교황청 문헌
2019-06-10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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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와 봉사 -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

국제신학위원회


친교와 봉사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

COMMUNION AND STEWARDSHIP
Human Persons Created in the Image of God
2004.

 

 

차   례


서 론

제1장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
1. 성경과 성전에 나타난 하느님 모습
2. 하느님 모습의 신학에 대한 현대적 비판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현대 신학에서 보는
    하느님 모습

제2장 하느님 모습: 친교를 맺는 인간
1. 육체와 영혼
2. 남자와 여자
3. 인간과 공동체
4. 죄와 구원
5. 하느님 모습과 그리스도 모습

제3장 하느님 모습 안에서: 가시적 피조 세계에 대한 봉사
1. 과학과 지식의 봉사
2. 창조된 세계에 대한 책임
3. 인간의 생물학적 통합성에 대한 책임

결 론

 

 

 

서 론


1.  현대의 과학적 이해와 기술적 능력의 급격한 증가는 인류에게 많은 장점을 가져다주었지만 심각한 문제도 불러일으켰다. 우주의 거대함과 나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인류가 우주 안에서 그 지위와 중요성에서 더욱 보잘것없고 불안한 존재로 보이게 만들었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자연의 힘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그러나 또한 이 발전은 환경은 물론 인간에게까지 예측할 수 없고 통제가 불가능해 보이는 영향을 끼친 것으로 드러났다.

2.  국제신학위원회는 이러한 문제에 당면한 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한 성찰의 방향 정립을 위하여 하느님 모습(Imago Dei)의 교리에 대한 아래와 같은 신학적 고찰을 제안한다. 또한 우리는 이 새롭게 조명한 교리적 주제를 통하여 우주 안의 인간에 관한 긍정적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3.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하느님 모습의 교리는 교도권의 가르침과 신학 연구에서 더욱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에는 일부 근대 서양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여러 이유로 하느님 모습의 신학을 등한시하였다. 철학에서는 ‘모습’(image, 형상)의 개념 자체가 인식론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인식론은 모습(형상)을 희생하여 ‘이념’의 역할에 특권을 부여하거나(합리론), 모습­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 경험을 진리의 궁극적 판단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경험론). 여기에 더한 문화적 요소들인 세속적 인본주의, 그리고 최근의 대중 매체에서 범람하는 이미지들이 한편으로는 인간이 하느님을 지향한다는 사실 확인을, 다른 한편으로는 형상에 관한 존재론적 논의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 두 가지는 하느님 모습에 관한 모든 신학에 핵심이 되는 것이다. 우상을 섬기지 못하게 한 계명(탈출 20,3-4 참조)의 영원한 타당성을 강조하거나, 성경에 이러한 주제가 등장한 것을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보는 성경 해석은 서구 신학계가 모습에 관한 논의를 더욱 등한시하게 하였다.

4.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신학자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고 명료화하는 데에 기여하는 이 주제의 독창성을 재발견하지 못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들은 20세기 신학의 이 중대한 발전을 분명히 표현하고 확인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하느님 모습이라는 주제의 뜻깊은 재발견의 차원에서, 국제신학위원회는 이 글로, 인간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인격적인 친교를 이루고, 또한 인간들이 서로 친교를 이루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창조된 세계에 책임지고 봉사하려고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재확인하고자 한다. 이러한 진리에 비추어 보면, 세상은 단지 광활하기만 하고 어쩌면 의미 없을 수도 있는 장소가 아니라, 인격적 친교를 위하여 창조된 장소가 된다.

5.  우리가 다음 각 장에서 증명해 보이고자 한 대로, 이 심오한 진리는 여전히 그 타당성이나 권위를 상실하지 않고 있다. 제1장에서 하느님 모습에 대한 성경과 전승의 근거를 간략히 살펴본 다음에, 제2장에서는 하느님 모습에 관한 신학의 두 가지 중요한 주제,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와 인간들이 서로 이루는 친교의 근거가 되는 하느님 모습을 다룰 것이다. 제3장에서는 가시적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지배에 인간이 참여하는 데 근거가 되는 하느님 모습을 다룬다. 이러한 숙고들에서 하느님 모습의 신학의 관점에서 파악된 그리스도교 인간학의 주요 요소들과 더불어, 윤리 신학과 윤리학의 일부 요소들도 함께 다룬다. 우리가 다루기로 한 주제들의 폭이 매우 넓다는 것을 잘 알지만, 우주와 인간 생명의 의미에 관한 하느님의 진리를 재확인하고자, 하느님 모습의 신학의 폭넓은 설명력을 우리 자신과 독자들이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려고 이 연구가 이루어진 것이다.

 


제1장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


6.  성경과 성전과 교도권이 명백히 증언하는 것처럼, 인간이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진리는 그리스도교 계시의 핵심이다. 교부들과 위대한 스콜라 신학자들은 이 진리를 받아들여 그 포괄적인 의미를 연구하였다. 아래에서 지적한 대로, 몇몇 유력한 근대 사상가들이 이 진리에 도전하기도 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성서학자와 신학자들이 교도권과 더불어 하느님 모습의 교리를 새롭게 주장하고 재강조하고 있다.

1. 성경과 성전에 나타난 하느님 모습

7.  오늘날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경 주석학자들은 하느님 모습이라는 주제가 성경 계시의 핵심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창세 1,26 이하; 5,1-3; 9,6 참조). 이 주제는 인간 본성의 성서적 이해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 나타난 성서적 인간학에 관한 모든 확언의 핵심으로 여겨지고 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 모습이 인간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신비는 하느님의 신비와 분리하여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8.  인간이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구약 성경의 해석은 임금을 지상에 나타난 신의 형상으로 여기는 고대 근동의 사상을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의 해석은 하느님 모습의 개념을 모든 인간을 포함하도록 확대하였다는 점에서 독특한 것이다. 고대 근동의 사상과 구분되는 또 한 가지는,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이 무엇보다 신들을 경배하기에 앞서 땅을 먼저 경작하도록 지시받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창세 2,15 참조). 말하자면, 성경에서는 경배와 경작을 직접 연관시키면서 주 중 엿새 동안의 인간 활동이 축복과 성화의 날인 안식일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9.  다음의 두 주제가 합쳐져서 성경의 관점을 형성한다. 첫째로, 인간이 온전히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하느님 모습이 인간 본성의 몇 가지 측면(예를 들어, 인간의 직립 보행과 지성)에서, 또는 인간의 특성과 기능의 일부(예를 들어, 인간의 성적 본능과 땅의 지배)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해석을 배제한다. 성경은 일원론과 이원론을 모두 배격하면서, 인간의 영적인 측면을 그 육체적, 사회적, 역사적 측면과 더불어 이해하는 인간관을 제시한다.

10.  둘째로, 창세기의 창조에 관한 내용에서는 인간이 홀로 창조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하느님께서는 최초의 인간들이 이성 배우자와 관계를 맺게 하셨다. 성경은 인간이 다른 인간들, 하느님, 세계,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이 개념에 따르면,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관계를 맺는 존재인 한 인격체이다. 인간의 영원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인하는 단순한 현실주의와 거리가 먼 하느님 모습의 본질적인 관계적 특성은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와 자유와 책임 행사의 기초를 마련해 주고 있다.
11.  신약 성경에 따르면, 구약 성경에서 확인되는 피조물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모습(Imago Christi)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신약 성경에서 발전된 이 주제에서 두 가지 특징적인 요소가 나타난다. 곧, 하느님 모습의 그리스도론적이며 삼위일체론적인 특성, 그리고 성사적 중개가 그리스도 모습의 형성에서 수행하는 역할이다.

12.  그리스도께서 바로 완전한 하느님 모습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2코린 4,4; 콜로 1,15; 히브 1,3 참조), 인간이 성령의 권능으로 아버지의 자녀가 되려면(로마 8,23 참조) 그리스도와 같은 모상이 되어야 한다(로마 8,29 참조). 사실, 인간이 하느님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강생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는 역사적 움직임 안에서 당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신 성자의 모습을 따라(콜로 3,10 참조) 자신이 바뀌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한다. 성자께서 처음으로 걸어가신 그 길에 따라, 모든 인간 안의 하느님 모습은 창조에서 시작해서 죄의 회개를 거쳐 구원과 완성에 이르는 인간 자신의 역사적 과정으로 구성된다. 그리스도께서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죄와 죽음에 대한 지배권을 보여 주신 대로, 모든 인간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약 성경에서 확언한 대로) 지구와 동물 세계뿐 아니라, 원칙적으로 죄와 죽음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13.  신약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먼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깨닫고(2코린 3,18─4,6 참조) 세례를 받은(1코린 12,13 참조) 결과인 성사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갈라 3,26-28 참조) 새사람으로 갈아입는(갈라 3,27; 로마 13,14 참조) 세례의 결과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 고해성사와 성체성사, 그리고 나머지 성사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길을 따르는 이 근본적인 변모에 확신을 가지게 하고 힘을 북돋아 준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고 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모습대로 완성된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기게 된다.

14.  하느님 모습에 관한 성경의 관점은 교부들과 그 이후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신학자들의 그리스도교 인간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 주제가 중심을 이루었다는 증거는 하느님 모습의 인위적 복제[우상]를 금지하는 성경의 계명(탈출 20,2 이하; 신명 27,15 참조)을 강생에 비추어 해석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강생의 신비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그분의 인간적이며 역사적인 실재 안에서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7-8세기의 성상 파괴 논쟁에서, 강생하신 말씀과 구원 사건의 예술적 표현을 옹호한 것은 ‘모습’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지 않는 위격적 결합에 대한 깊은 이해에 바탕을 둔 것이다.

15.  교부 신학과 중세 신학은 어떤 점에서는 성경의 인간학을 넘어서서 이를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전통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인간의 모습과 그 전체성을 동일시하는 성경의 관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경 이야기의 중요한 변화는, 이레네오 성인이 도입한, 모습과 비슷함의 구별이었다. ‘모습’은 존재론적 참여(methexis)를 드러내고, ‘비슷함’(mimêsis)은 도덕적 변모를 나타낸다는 것이다(「이단 반박」[Adversus Haereses],
V,6,1; V,8,1; V,16,2 참조).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시고, 당신과 비슷하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 [그래서] 모습은 결코 파괴될 수 없지만, 비슷함은 죄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세례론」[De Baptismo], 5,6.7 참조).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러한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대신 하느님 모습에 대한 좀 더 인간학적이고 심리학적이며 존재론적인 해석을 하였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 인간 안의 하느님 모습은 삼위일체의 구조를 가진 것이어서, 인간 영혼의 삼단 구조(영혼, 자의식, 사랑) 또는 정신의 세 가지 측면(기억, 지성, 의지)에 반영된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따르면, 인간 안의 하느님 모습은 인간이 기도와 지식과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을 지향하도록 이끄는 것이다(「고백록」[Confessiones], I,1,1 참조).

16.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 모습이 역사적 특성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된 모습(본성), 재창조된 모습(은총), 그리고 비슷한 모습(영광)이라는 세 단계를 거치기 때문이다(「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 q.93, a.4 참조).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 모습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려는 근거라고 보았고, 하느님 모습은 원칙적으로 지성의 관상 행위를 통하여 실현된다고 하였다(「신학 대전」, I, q.93, a.4.7 참조). 이러한 개념은 모습이 대개 인간의 종교 행위에서 의지를 통하여 실현되는 것으로 본 보나벤투라의 개념과 구분된다(「명제집」[Sententiarum], II, d.16, a.2, q.3 참조). 이와 유사하지만, 좀 더 대담한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느님 모습을 영혼의 정점 위에 놓고 육체와 분리시켜 영적인 것으로 보려고 하였다(「논문집」[Traktate], Joseph Quint 편집, I, 5,5-7; V, 6.9s 참조).

17.  종교 개혁기의 논쟁들은 하느님 모습의 신학이 개신교와 가톨릭 신학자에게 여전히 중요한 주제로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개신교 신자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하느님 모습을 본성의 모습(imago naturae)으로 격하시켰다고 비난하였다. 그리하여 정적인 인간 본성 개념을 내세우고 죄인들이 하느님 앞에 스스로 나서도록 조장하였다는 것이다. 반면에,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이 하느님 모습의 존재론적 실재를 부인하고 그 모습을 단순한 관계로 격하시켰다고 비난하였다. 또한 개신교 신자들은 하느님 모습이 죄로 더러워졌다고 주장한 반면, 가톨릭 신학자들은 죄가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 모습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2. 하느님 모습의 신학에 대한 현대적 비판

18.  근세 이전까지 하느님 모습의 신학은 신학적 인간학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스도교 사상사 전체에서, 이 주제는 신학적 인간학의 신인 동형 동성설(神人 同形 同性說, anthropomorphism)이 우상 숭배를 부추긴다는 몇몇 비판(예를 들어, 성상 파괴 논쟁)에 맞설 수 있는 힘과 매력이 되었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서면서 하느님 모습의 신학은 좀 더 끈질기고 조직적인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19.  근대 과학으로 발전된 우주관은 하느님 모습을 바탕으로 형성된 고전적인 우주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이에 따라 하느님 모습의 신학을 떠받쳐 주는 개념 틀의 중요한 부분이 제거되었다. 이 주제는 경험론자들에게는 경험에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 것으로, 이성주의자들에게는 모호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하느님 모습의 신학을 위협하는 더 심각한 요소는, 인간이 하느님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고 스스로를 구성하는 자율적 주체라는 개념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하느님 모습의 개념은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성서적 인간학의 개념을 다양한 방식으로 뒤집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카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사상들이 등장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곧, 하느님 모습으로 인간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이 투사되어 하느님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자립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면 무신론이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20.  처음에는 20세기 서구 신학의 분위기가 하느님 모습의 주제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19세기의 변화를 놓고 볼 때, 몇몇 형태의 변증 신학이 이 주제를 자신을 하느님과 비교하거나 동등하게 여기는 인간의 오만의 표현으로 간주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하느님과 만나는 사건을 강조하는 실존주의 신학은 하느님 모습의 교리에서 연유하는 하느님과 맺는 안정된 또는 영원한 관계의 개념을 무너뜨렸다. 세속화 신학은 하느님과 관련하여 인간을 자리매김하는, 세상에 있는 객관적 준거라는 개념을 부인하였다. 몇몇 형태의 부정 신학이 주장하는 ‘속성 없는 하느님’, 사실상 비인격적 하느님은 더 이상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형으로 활용될 수 없었다. 올바른 실천(orthopraxis)에 지나친 관심을 가진 정치 신학에서 하느님 모습의 주제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끝으로, 세속적 비판가들과 신학적 비판가들은 하느님 모습의 신학이 자연환경과 동물 보호를 무시하고 이를 조장한다고 비난하였다.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현대 신학에서 보는 하느님 모습

21.  이러한 불리한 추세 속에서도, 하느님 모습의 신학의 회복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중반에 지속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경과 교부들, 그리고 위대한 스콜라 신학자들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하느님 모습이라는 주제의 편재성과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주제의] 재등장은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부터 가톨릭 신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의회는 특히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을 통하여 하느님 모습의 신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22.  이 공의회는 ‘사목 헌장’에서 하느님 모습의 주제를 환기시키면서, 창세기 1장 26절과 시편 8편 6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인간의 존엄을 강조하였다(사목 헌장 12항). 공의회의 시각에서는 하느님 모습이 인간의 근본적인 하느님 지향에 있고, 이는 인간의 존엄과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이기 때문에 인간은 세속적 제도나 목적에 예속될 수 없는 것이다. 우주 안에서 인간의 주권, 사회적 실존 능력, 그리고 창조주에 대한 지식과 사랑, 이 모든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공의회 가르침의 기초가 되는 것은 이 모습을 그리스도론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 참조)이시라는 것이다(사목 헌장 10항 참조). 성자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에게 최초의 범죄 때부터 이지러진, 하느님과 닮은 모습을 회복시켜 주셨다(사목 헌장 22항 참조). 당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대로,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인간의 질문에 답을 주시는 분은 성자이시다(사목 헌장 41항 참조). 공의회는 또한 모습의 삼위일체적 구조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고(로마 8,29 참조) 성령을 받아(로마 8,23 참조), 사랑의 새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이 창조된 것이다(사목 헌장 22항 참조). 성인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완전히 변환된 이들이다(2코린 3,18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표징인 당신의 현존과 은총을 드러내신다(사목 헌장 24항 참조). 하느님 모습의 교리의 근거에 관하여, 공의회는 인간 활동이 그 활동의 모범이 되는 하느님의 창조성을 반영하기에(사목 헌장 34항 참조), 그 활동은 모든 인간이 형제자매로서 한 가족을 이루도록 정의와 인간적 친교를 지향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사목 헌장 24항 참조).

23.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나타난 하느님 모습의 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여러 영역에서 발전을 보이고 있는 현대 신학에도 반영되어 있다. 먼저, 신학자들은 하느님 모습의 신학이 인간학과 그리스도론의 연관성을 어떻게 밝혀 주는지 증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신학자들은 강생을 통하여 인류에게 내려진 독특한 은총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인식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열어 주신 가능성은 인간 실재를 피조물이라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의 완전한 모습에 따라 그 실재를 변화시키고 실현하는 데에 있다. 그리스도론과 인간학의 연관성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이해에서 하느님 모습의 역동적 특성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게 된다. 인간이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는 은총을 받았음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신학자들은 인간 역사와 인류 문명의 진화에 비추어 볼 때, 하느님 모습이 참다운 의미에서 아직 형성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하느님 모습의 신학은 인간 존재 자체가 하느님 법에 참여한다는 사실의 논증을 통하여 인간학과 윤리 신학을 연결시키고 있다. 이러한 자연법은 인간이 행위를 통하여 선을 추구하게 한다. 결국, 하느님 모습은 인간을 나그네(homo viator)로 정의하는 목적론적 차원과 종말론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나그네인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때(parousia)를 지향하며, 모든 개인의 삶과 인류 전체의 역사 안에서 은총의 역사를 통하여 실현되는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완성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제2장
하느님 모습: 친교를 맺는 인간


24.  친교와 봉사는 하느님 모습의 교리를 형성하는 중요한 두 요소이다. 이 장에서 다룰 첫 번째 요소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적 삶의 친교를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과 함께 나눌 계획을 드러내셨다. 인간은 이러한 삼위일체적 친교를 위하여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것이다. 삼위일체적 하느님과 인간이 이토록 유사하다는 사실이 창조되지 않은 위격들인 복되신 삼위일체와 피조물 사이의 친교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본질적으로 육체적이고 영적이며,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또한 죄 때문에 상처 받아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은 하느님과 맺는 친교와 다른 사람들과 맺는 친교를 지향하며, 성령의 힘으로 성부의 완전한 모습이신 그리스도께 동화되도록 정해져 있다.

1. 육체와 영혼

25.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물리적 세계 안에서 친교를 누리고 봉사를 실천하도록 부름 받았다. 인간 사이의 친교와 책임 있는 봉사에 따른 활동은 영적, 곧 지적이고 정서적인 인간 능력과 관계된 것이지만 육체를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육체적 존재로서 다른 육체적 존재와 세상을 함께 나누고 있다. 하느님 모습에 관한 가톨릭 신학은, 물질세계가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는 조건을 만든다는 심오한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26.  이 진리가 언제나 합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 신학은 하느님 모습을 오직 인간 본성의 영적인 측면에만 관련시키는 이원론적 인간학의 영향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초기에는 플라톤의, 후기에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인간학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 신학 자체는 인간 안의 하느님 모습을 인간 본성의 가장 독특한 특성인 정신이나 영혼과 동일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성서적 인간학의 요소들과 토마스주의의 종합적 측면들을 모두 복원한 것은 이를 극복하는 노력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27.  그리스도교 계시의 증언에서, 육체성이 인간의 정체성에 근본적이라는 관점은, 구체적으로 주제화되지는 않았지만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성서적 인간학은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을 배격하면서, 인간을 온전한 하나의 존재로 보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인간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된 기본적인 히브리어 가운데 ‘네페쉬’(nèfèš)
는 살아 있는 구체적인 인간의 생명을 의미한다(창세 9,4; 레위 24,
17-18; 잠언 8,35 참조). 그러나 인간은 네페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곧 네페쉬이다. ‘바사르’(basar)는 동물과 인간의 살을, 그리고 때로는 몸 전체를 지칭하기도 한다(레위 4,11; 26,29 참조). 다시 한 번 여기에서도, 인간은 바사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곧 바사르 자체이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륵스’(sarx)라는 단어는 인간의 물질적 육체성을 의미하지만(2코린 12,7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온전한 인간을 지칭하기도 한다(로마 8,6 참조). 이와는 다른 그리스어 ‘소마’(soma), 곧 몸은 외면적으로 드러난 것을 강조하면서 온전한 인간을 지칭한다. 여기에서도 인간은 몸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그 몸이다. 성서적 인간학은 명백히 인간의 단일성을 전제하고 있으며, 육체성이 인간의 정체성에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28.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교리는, 육체가 인간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이기에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에 참여하고 있다고 본다. 창조에 관한 그리스도교 교리는 형이상학적 또는 우주론적 이원론을 철저히 배격한다. 그리스도교 교리는 우주 안의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므로 다 완전한 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강생 교리의 틀 안에서는 육체 또한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여겨진다. 요한 복음은 가현설에 맞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실적인 물질적 몸을 가지신 것이지, 허상의 몸을 가지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말씀이 사람(sarx)이 되셨다.”라고 확언하고 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통하여 하신 행위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예수님의 몸과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바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며, 성사들을 통하여 가시화되고 구체화된다. 성사의 효과는, 그 자체로는 먼저 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육체만이 받을 수 있고 육체를 통하여 지각할 수 있는 물질적 표지라는 수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정신만이 아니라 육체도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육체는 성령의 성전이 된다. 마지막으로, 육체가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속한다는 사실은 종말에 이루어질 육신의 부활에 대한 교리에 본질적인 것이다. 이 교리는 인간이 완전한 육체적 영적 인간으로서 영원히 실존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29.  계시를 통하여 확실하게 배운 육체와 영혼의 단일성을 보전하고자, 교도권은 인간 영혼이 ‘실체적 형상’(forma substantialis)이라는 정의를 채택하였다(비엔나 공의회와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 여기에서 교도권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육체와 영혼을 한 인간 존재에 관한 물질적 영적 원칙으로 이해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학에 의존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현대의 과학적 관점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현대 물리학은 물질이 그 가장 기본적인 소립자의 차원에서는 순전히 위치일 뿐이고, 서로 결합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매우 복합적인 형태의 생물과 무생물이 존재하는 우주의 결합 수준은 어떤 ‘정보’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추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실체적 형상의 개념과 현대 과학의 ‘정보’의 개념 사이의 부분적인 유사성을 암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염색체의 DNA는 물질이 특정한 종이나 개체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 구성되는 데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유비적으로, 실체적 형상은 최초의 물질에 특정한 방법으로 구성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이러한 유비에는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 조심할 필요가 있다. 형이상학적이고 영적인 개념은 단순히 물질적이고 생물학적인 자료와 비교해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30.  성서적, 교리적, 철학적 지표들은 인간의 육체성이 하느님 모습에 참여하고 있음을 확증하는 것으로 수렴된다. 만약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영혼이 인간의 육체를 이루는 물질을 형성한다면, 단일체인 인간은 영적인 차원뿐 아니라 육체적인 차원에서도 하느님 모습을 지닌 존재가 된다. 이러한 결론은 하느님 모습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함의를 충분히 고려할 때 더욱 확실해진다. “실제로,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의 신비가 밝혀진다. …… 그리스도께서는 ……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에게 그 지고의 소명을 밝혀 주신다”(사목 헌장 22항). 특히 인간은 성체성사를 통하여, 강생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말씀에 영적이며 육체적으로 결합될 때에 자신의 목적에 이르게 된다. 곧, 자신의 육체적 부활에, 그리고 육체와 영혼을 지닌 완전한 인간으로서 천상 공동체의 모든 성인과 함께 이루는 삼위일체적 친교에 참여하게 되는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 남자와 여자

31.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
(Familiaris Consortio)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셨다. “인간은 육화된 영, 곧 육체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영혼이요 불멸의 영을 부여받은 육체이기에 통일된 전체로서 사랑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사랑은 인간의 육체를 포함하고 육체는 정신적 사랑의 참여자가 되었습니다”(11항).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사랑과 친교의 소명을 받았다. 이 소명은 출산을 위한 부부의 결합을 통하여 독특한 방법으로 실현되기 때문에, 남녀의 차이는 하느님 모습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가 된다.

32.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참조: 창세 5,1-2). 그러므로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 모습은 처음부터 남녀의 차이를 통하여 드러난 것이다. 인간은 오직 남성과 여성으로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조건의 실제는 서로 다른 두 성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성은 인간 본성의 비본질적이거나 부차적인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서 성적 정체성으로도 규정되는 다른 사람을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그들과 상호 교류를 하려는 존재 방식을 지니고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에 따르면, “인간의 성은 육체와 영혼의 단일성 안에서 인간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특히 정서, 사랑하고 자녀를 출산하는 능력, 그리고 좀 더 일반적으로는 타인과 친교를 이루는 능력에 관련된다”(2332항). 남성 또는 여성에게 부여된 역할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성 정체성은 문화적이거나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 모습의 고유한 존재 방식에 속하는 것이다.

33.  말씀의 강생은 이러한 고유성을 강화시킨다. 말씀은 인간의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한 가지 성(性)을 택하셨다. 그런데 말씀은 두 가지 의미에서 인간이 되셨다. 곧 인류 가족의 구성원이 되시면서 또한 남성이 되신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는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곧 자신의 고유한 성 정체성에 따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34.  더 나아가, 강생과 부활은 하느님 모습의 본디 성 정체성을 영원으로 확대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한 남자로서 지금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우리는 또한 하느님의 어머니께서도 몸을 지니고 하늘에 올라, 성화되고 영광을 받은 인간으로서, 지금 한 여인으로 머물러 계신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갈라티아서 3장 28절에서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차이를 포함하여 모든 차이가 사라진다고 말한 것은, 어떠한 인간적 차이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교회는 부활 이후에 성적인 차이가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주장한 니사의 그레고리오 성인과 몇몇 다른 교부들의 이론을 따르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의 성적 차이는 분명히 육체적 속성을 드러내지만, 사실상 순전히 육체적인 것을 초월하여 인간의 신비 그 자체에 닿아 있는 것이다.
35.  성경은 남성이 여성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개념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동등하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성의 존엄성과 책임은 남성의 것과 동등하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동등성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특유한 양식으로 자기 봉헌을 하고, 둘이 혼인과 가정에 의당히 있는 자녀에게 자기 봉헌을 하는 데에서 실현됩니다. …… 인류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실 때에,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동등한 인격적 존엄성을 주시고, 인간에게 적합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와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22항).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 모습으로 동등하게 창조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지성과 의지를 부여받고 자유를 행사하여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인간이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성 정체성에 적합한 방법에 따라서,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상호성과 보완성이라고 하는 방법을 따라서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이 용어는 나중에 논란거리가 되기도 하였지만, 남자와 여자가 충만한 삶에 이르려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단언하는 데에 유용한 말이다.

36.  확실히 남자와 여자의 근원적 우정은 죄로 깊이 손상되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베푸신 기적을 통하여(요한 2,1 이하 참조), 우리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실 때에 의도하신 조화를 회복하러 오셨음을 보여 주셨다.

37.  그러한 인간 본성 안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모습은 인간들의 결합이라는 특별한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다. 이 결합은 하느님 사랑의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교 전통은 언제나 인간들 사이의 순결한 우정까지도 촉진하는 동정 생활과 독신 생활이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창조되지 않은 사랑 안에서 모든 피조물의 사랑의 종말론적 완성을 지향하는 가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이와 연관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의 위격들 사이의 친교와 지상의 인간들이 이루어야 할 친교 사이의 유사성을 이끌어 냈다(사목 헌장 24항 참조). 인간들 사이의 결합이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분명히 옳지만, 오늘날의 가톨릭 신학은 혼인이 차원 높은 형태의 인간 사이의 친교이자 삼위일체적 삶의 최고의 유비라고 주장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에게 자신을 열고 완전히 내어 주는 태도로 육체적이고 영적으로 결합할 때에 이들은 하느님의 새로운 모습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들이 한 몸으로 결합되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필요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기쁨을 나누도록 이끄시는 창조주의 의도에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혼인을 성화의 탁월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은 자신 안에서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일치의 신비를 살고 계신다. 인류를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의 인간성 안에 사랑과 일치의 소명을 부여하시고, 따라서 그 소명에 따른 능력과 책임도 부여하셨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331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혼인의 심오한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풍요로운 사랑과 일치의 신비를 드러내고 그 신비에 참여하는 혼인성사의 힘으로(에페 5,32 참조), 그리스도인 부부는 부부 생활은 물론 자녀 출산과 교육을 통하여 성덕에 나아가도록 서로 도와준다”(교회 헌장 11항; 참조: 사목 헌장 48항).

3. 인간과 공동체

38.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서로 특별한 친교를 이루도록 명령을 받은 육체적 존재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가르치신 대로, 혼인과 연관된 육체의 의미는 창조와 구원을 통하여 서로 사랑을 쏟아부으시는 복되신 삼위일체의 친교를 반영하는 인간적 내밀함과 사랑 안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진리는 그리스도교 인간학의 중심이다. 인간은 하느님 모습에 따라, 인격적으로 서로 알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다. 이러한 인격적 존재들은 교회 안에서 일치를 실현하며 예시하는 인간 가족 안에 포함된 관계적이며 사회적인 존재들이라는 사실이 인간 안에 새겨진 하느님 모습의 핵심인 것이다.

39.  우리가 인간에 관하여 말할 때, 이는 개별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비환원적 정체성과 내면성, 그리고 인류 가족의 바탕이 되는 다른 인간과 맺는 근본적인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이러한 개인의 정체성은 타인에 대한 지향이기도 한 것으로, 본질적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위격들에 바탕을 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세 위격의 친교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단일한 신성으로 이루어진 성부의 정체성은 성자와 성령과 맺은 관계인 부성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성자의 정체성은 아버지와 성령과 맺은 관계에서 드러난다. 성령의 정체성은 성부와 성자와 맺은 관계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교의 계시는 인간의 개념을 명료화하여 거룩하고 그리스도론적이며 삼위일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인간은 세상 안에서 고립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다른 인간들과 함께 존립하고 인간 공동체를 구성하도록 권유받는다.

40.  따라서 개인적 존재가 바로 사회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주변 사회를 함께 형성하는 가정과 종교 집단, 시민 집단, 직장과 기타 집단에서 자신의 인간적 특성 안에 존재하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요소를 실현할 때 참다운 인간이 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 문명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사회적 특성을 긍정하면서도, 인간의 절대적 가치와 개인의 권리와 문화적 다양성의 중요성도 인정하여 왔다. 창조 질서 안에서, 개인과 사회적 생활의 요구 사이에는 언제나 어떠한 긴장이 존재한다. 복되신 삼위일체 안에는 단일한 신적 삶의 친교를 이루시는 위격 사이의 완전한 조화가 존재한다.

41.  모든 개인과 인간 공동체 전체는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아담이 상징하는 본디의 일치 안에서 인류는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인류는 하느님께서 바라시지만 아직은 온전히 실현되지 않은 완전한 친교를 향하여 인류 역사의 어려움을 뚫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이미 존재하는 일치와 또 앞으로 이루어야 할 일치의 연대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의 본성을 공유하시고 우리 가운데 머무르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는 우리는, 비록 죄로 분열되었으나, 피조물의 궁극적 구원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치를 회복하고 재창조하실 그리스도께서 승리자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다(로마 8,18-19 참조). 이 인류 가족의 일치는 아직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교회는 구원의 성사이며, 하느님 나라의 성사이다. 이 교회는 모든 인종과 다양한 문화의 인간을 하나로 모으기에 보편적이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인류 공동체의 일치에 앞장서기에 하나이고, 성령의 권능으로 성화되고 성사를 통하여 모든 인간을 성화하기에 거룩하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인류의 일치, 그리고 창조와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뽑으신 이들의 사명을 지속하기에 사도적이다.

4. 죄와 구원

42.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의 친교에 참여하도록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이러한 친교를 자유롭게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자유는 신적인 선물로, 인간들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친교를 궁극적 선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 자유에는 자유가 실패할 가능성도 따른다. 인간은 신적인 삶에 참여하는 궁극적 선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부질없고 헛된 행복을 누리려고 그 선에 등을 돌릴 수 있고 또 돌리고 있는 것이다. 죄는 바로 이러한 자유의 실패이며, 친교를 나누자는 하느님의 초대에 등을 돌리는 것이다.

43.  존재론적 구조로 보아 본질적으로 대화적이고 관계적인 하느님 모습이라는 관점에서, 죄는 하느님과 관계를 단절하는 것으로서 하느님 모습을 손상시키게 된다. 죄의 차원은 죄에 침해를 받는 하느님 모습의 차원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소외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간관계도 훼손되고(1요한 3,17 참조), 참다운 의미로, 바로 그 인간 자신 안에서 육체와 정신, 인식과 의지, 이성과 감정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다(로마 7,14-15 참조). 또한 인간에게 고통과 질병과 죽음을 가져와 육체적 실존에도 영향을 끼친다. 여기에 더해 하느님 모습에 역사적 차원이 있듯이, 죄에도 역사적 차원이 있다. 성경의 증언(로마 5,12 이하 참조)은 인류 역사의 초기에 하느님께서 친교를 나누자고 초대하신 것을 인간이 거부하여 생겨난 죄의 역사의 관점을 보여 주고 있다. 끝으로, 죄는 하느님 모습의 사회적 차원에 영향을 끼친다. 인간의 편에서 하느님 모습의 실현을 가로막고, 또 죄가 객관적으로 표출되는 사회 구조와 이념들을 식별할 수 있다.

44.  가톨릭과 개신교의 주석 학자들은 오늘날 하느님 모습은 인간 본성의 전체 구조를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로 완전히 파괴될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의 전통은 하느님 모습이 손상되거나 왜곡되기는 하지만, 죄로 파괴될 수는 없다고 언제나 주장하여 왔다. 하느님 모습의 대화적 또는 관계적 구조는 상실될 수는 없지만, 죄의 지배 아래에서는 하느님 모습이 그리스도론적 실현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 방해를 받는다. 더 나아가, 하느님 모습의 존재론적 구조는 죄 때문에 그 역사성에 손상을 입기는 하지만, 죄의 행위들이 실재함에도 여전히 존립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교부들이 영지주의와 마니교에 대항하여 주장하였듯이, 인간다운 것, 하느님 모습의 존재론적 구조의 근본적인 것을 규정하는 그러한 자유는, 자유를 행사하는 상황이 죄의 결과로 부분적으로 좌우되기는 하지만, 억압될 수는 없는 것이다. 끝으로, 죄 때문에 하느님 모습이 완전히 훼손된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가톨릭 전통에서는, 비록 죄에 물들었다 하더라도, 은총과 구원이 기존 인간 본성의 실재를 실제로 변모시키지 못한다면 그 은총과 구원은 허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45.  하느님 모습의 신학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에, 구원은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한 모습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모습을 복원하여 준다.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여 당신과 일치를 이루게 하시고, 삼위일체적 삶의 복된 친교를 지향하는 하느님 모습을 다시 닮게 하신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원은 바로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 존재의 인격적 삶을 변모시키고 완성시키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강생의 은총을 통하여, 그리고 함께 머무시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 위격들의 삶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을 새롭게 지향한다. 가톨릭 전통은 여기서 인간의 실현을 올바르게 말하고 있다. 죄 때문에 사랑의 결핍으로 신음하는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느님의 완전하고 은총이 가득한 사랑 없이는 자아실현을 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구원하는 이러한 변모를 통하여 우주 만물 또한 변화되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로마 8,21 참조).
46.  신학적 전통으로 보아, 죄의 영향을 받은 인간은 언제나 구원을 필요로 하지만,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Capax Dei)로서 하느님을 보고 싶어 하는 본성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서 신적인 것을 역동적으로 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향은 죄로 파괴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은총 없이는 실현될 수도 없는 것이다.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모습인 인간이 하느님을 지향하는 데에 방해를 받아도 신적인 구원 활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인간에게 말씀을 건네신다. 이러한 전통적 진술은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지향이 파괴될 수 없다는 것과 구원의 필요성을 긍정한다.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그 본성상 하느님의 사랑을 누리게 되어 있지만, 오직 하느님의 은총만이 이러한 사랑을 자유로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그 사랑이 효과를 발휘하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은총은 단순히 죄의 치유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해진 인간 자유의 질적 변화, 곧 선을 향하여 열려 있는 자유이다.

47.  인간의 죄의 실재는 하느님 모습이 하느님께 확실하게 열려 있지 않고 자신 안에 갇힐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구원은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을 이러한 자화자찬에서 벗어나게 한다. 본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진 파스카의 신비는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 안의 생명에 이르는 죄의 죽음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준다. 십자가는 인간의 파괴가 아니라 인간을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길을 열어 준다.

48.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을 위한 구원의 효과는, 새로운 인류의 머리이시며, 죄인들을 위한 죽음과 부활로 인간에게 새로운 구원의 상황을 마련하신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하여 얻어진다(1코린 15,47-49; 2코린 5,2; 로마 5,6 이하 참조). 이리하여 인간은 새로운 자유의 삶, ‘ …… 로부터의 자유’와 ‘ …… 을 위한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2코린 5,17 참조).

49.  인간은 죄와 율법, 고통과 죽음에서 해방된다. 먼저 구원은 죄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죄에 맞선 투쟁이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지속되는 도중에도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킨다(에페 6,10-20 참조). 더욱이 구원은 율법 자체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거스르고(2코린 3,6 참조) 사랑의 실천을 방해하는(로마 13,10 참조) 율법주의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구원은 성자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에 참여한다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 해방, 곧 수난과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가져온다. 여기에 더해,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라 ‘ …… 로부터의 자유’는 ‘ …… 을 위한 자유’라는 뜻을 가진다. 곧, 죄로부터의 자유는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느님을 위한 자유를 의미한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참다운 사랑을 위한 자유를 의미한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는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위한 자유를 의미한다. 이 ‘ …… 을 위한 자유’는 아버지의 완전한 표상이시며 인간 안에 계신 하느님 모습을 복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능하게 해 주신다.

5. 하느님 모습과 그리스도 모습

50.  “실제로,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의 신비가 밝혀진다. 첫 인간 아담은 장차 오실 분, 곧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예형이었다. 새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 주는 바로 그 계시 안에서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에게 그 지고의 소명을 밝혀 주신다”(사목 헌장 22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의 이 유명한 구절은 하느님 모습의 신학의 주요 요소들을 요약하는 데에 좋은 도움이 된다. 인간 존재의 완전함을 인간의 근본 본성, 궁극적 완성, 현재의 실재 차원에서 드러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51.  인간의 기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콜로 1,16) 창조되었으며, ‘말씀은 생명이고 ……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요한 1,3-4.9 참조)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無)에서(ex nihilo) 창조되었지만, 또한 창조주이시며 중개자이시고 인간의 목표이신 그리스도 자신의 충만함에서(ex plenitudine) 창조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자녀가 되고,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신 ……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로마 8,29 참조) 예정해 주셨다. 그래서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전히 계시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 존재의 특징이 되어야 하는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수용성,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형제자매들과 맺는 관계의 특징이 되어야 하는 섬김의 자세를 통한 타인에 대한 개방성, 아버지의 모습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타인에 대한 자비와 사랑을 발견한다.

52.  인간의 시작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하듯이, 인간의 종말도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 존재는 절대적인 미래, 인간 실존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나라를 지향한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콜로 1,16)되었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방향과 운명을 찾는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완성이시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은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성령께서는 죽은 이들이 부활할 때 궁극적으로 인간이 그리스도의 모습에 통합되도록 하시지만, [사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이 종말론적 유사성에 시간과 역사 한가운데, 여기 지상에서 이미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강생과 부활과 성령 강림을 통하여 종말은 이미 여기에 도래하였다. 강생과 부활과 성령 강림은 종말을 시작하고, 인간 세상에 도입하였으며, 그 종말의 궁극적 실현도 선취하였다. 성령께서는 인간을 변모시키고 성화하시고자, 선의의 모든 사람, 사회, 그리고 세상 안에서 신비롭게 작용하신다. 또한 성령께서는 모든 성사, 특히 천상 잔치의 선취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친교의 완성인 성찬례를 통하여 활동하신다.

53.  인간의 기원과 그 절대적인 미래 사이에는 그 완전한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인류의 실존적 현재 상황이 놓여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강생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 안의 하느님 모습을 그 본디 형태로 회복시키셨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 인간은 자신의 죄 많은 삶 속에서 용서받고,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성령의 은총으로 알게 된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닮는 가운데 성장하고, 특히 성사를 통하여 인간을 그리스도와 닮게 만드시는 성령께 협조한다. 이렇게 하여 인간의 일상적 실존은 그리스도의 모습과 좀 더 완전히 일치하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으로 승리를 이루시도록 하는 투쟁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으로 정의된다.

 


제3장
하느님 모습 안에서:
가시적 피조 세계에 대한 봉사

 

54.  하느님 모습의 신학의 첫 번째 중요한 주제는 하느님의 친교의 삶에 참여하는 일이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다른 육체적 존재들과 세상을 공유하지만, 지성과 사랑과 자유로 구분되는 인간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인간들과 친교를 이루도록 질서 지어져 있다. 이러한 친교의 대표적 예는 삼위일체적 사랑의 창조적 친교를 반영하는, 남성과 여성의 출산을 위한 결합이다. 죄를 통한 하느님 모습의 왜곡과 이에 따른 개인 생활과 인간 상호 간의 생활에 미치는 필연적인 파괴적 결과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극복된다.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하는 구원의 은총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하느님 모습을 다시 갖추게 된다.

55.  이 장에서 우리는 하느님 모습의 신학의 두 번째 주요 주제를 다룬다. 삼위일체적 사랑의 친교를 나누고자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세상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가시적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일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린다. 이 특권은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피조물이 당신의 사업, 당신의 사랑과 구원의 계획, 나아가 세상에 대한 당신의 지배권에 참여하도록 허용하신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지배자로서 인간의 지위는 사실상 하느님의 피조물에 대한 지배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는 그것을 봉사의 한 형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56.  ‘사목 헌장’에 따르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땅과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세상을 정의와 성덕으로 다스리며,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알고 자기 자신과 모든 사물을 하느님께 다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렇게 인간은 만물을 다스려 하느님의 이름이 온 땅에 빛나게 하여야 한다”(사목 헌장 34항). 인간의 지배 또는 주권의 이러한 개념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느님께서는 복음서의 비유에 나오는 주인처럼 인간을 청지기로 임명하셨다(루카 19,12 참조).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하여 특별히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이 가시적 피조물의 정상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창세 1,26; 2,20; 시편 8,6-7; 지혜 9,2-3 참조).

57.  그리스도교 신학은 [인간의] 이러한 특별한 역할을 설명하고자 집주인과 임금의 비유를 모두 사용한다. 임금의 비유를 들어 보면, 인간은 모든 가시적 피조물에 대하여 우선권을 지닌다는 의미로, 곧 임금의 방식으로 지배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왕직의 내적 의미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봉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희생 제물로서 스스로 바라신 수난을 통하여 십자가를 당신의 권좌로 삼으시며 세상의 임금님이 되신 것이다. 가정의 비유를 들어 보면,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인간을 하느님의 모든 재화를 관리하도록 위임받은 집안 관리인으로 본다(마태 24,45 참조). 인간은 가시적 피조 세계의 모든 자원을 자신의 능력에 따라 배치하고, 가시적 피조물에 대한 이 참여적인 주권을 과학과 기술과 예술을 통하여 행사한다.

58.  인간은 자신 위에, 그리고 또한 자신의 고유한 양심 안에 전통적으로 ‘자연법’이라 불리는 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법은 하느님께 기원을 둔 것으로, 인간이 이를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 법에 참여한다는 의미가 된다. 자연법은 인간이 우주와 자기 자신의 참된 기원에 주목하게 한다(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 20항 참조). 이 자연법은 이성적 피조물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통하여 진리와 선을 추구하도록 이끈다.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이 가시적 피조 세계에 대한 주권을 오로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특권에 힘입어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지배를 본받을 수는 있지만 대신할 수는 없다. 성경은 하느님의 역할을 침해하는 죄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인간이 더 높은 하느님 법에서 벗어나 가시적 피조 세계의 지배자로 행세하는 것은 심각한 도덕적 잘못이다. 인간은 주인을 대신하여 청지기로 일하며(마태 25,14 이하 참조), 자신에게 부여된 재능을 개발하고, 어느 정도 담대한 창의력을 가지고 일할 자유를 가졌다.

59.  청지기는 자신의 봉사에 관하여 보고드리고, 하늘의 주인님께서는 그의 행위에 대한 판단을 내리실 것이다. 청지기가 사용한 수단이 도덕적으로 얼마나 정당하고 합당한 것이었는지가 이러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 과학이나 기술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못한다.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이 반드시 이성적이거나 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과학과 기술은 창조 세계 전체와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에 봉사하여야 한다. 이 계획은 우주와 인간이 도모하는 일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피조 세계에 대한 인간의 봉사는 바로 하느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실현되며, 언제나 하느님의 통치에 따르는 봉사이다. 인간은 우주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도모하고, (동물과 자연환경을 포함한) 자연 세계를 돌보는 책임을 지며, 인간의 생물학적 본질을 수호하는 가운데 이 봉사 활동에 임하는 것이다.
1. 과학과 지식의 봉사

60.  모든 단계의 인류 문명과 거의 모든 사회가 우주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이러한 노력은 바로 인간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실행하는 봉사에 대한 하나의 예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신뢰성을 상실한 성경 사실주의(concordism)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우주에 대한 현대 과학의 이해를 창조 신학의 맥락에서 정리할 의무가 있다. 현대 과학이 밝혀낸 대로, 이 진화하는 우주 안에서 인간의 지위는 삼위일체의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과 맺은 인격적 약속의 역사인 신앙에 비추어서만 그 완전한 실재를 파악할 수 있다.

61.  널리 받아들여진 과학적 설명에 따르면, 우주는 150억 년 전에 이른바 ‘빅뱅’(big bang)이라는 대폭발로 생겨났고, 그 이후로 계속 팽창하고 식어 가고 있다. 빅뱅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에 원자가 형성되는 데에 필요한 조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은하계와 항성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100억 년이 지난 다음에는 행성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태양계와 (약 45억 년 전에 형성된) 지구에는 생명이 탄생하기에 좋은 조건들이 나타났다. 최초의 미생물의 기원에 대한 과학자들의 견해가 다양한 가운데에서도, 최초의 유기체가 약 35-40억 년 전에 지구상에 나타났다는 데에는 대체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지구상의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가 유전적으로 서로 관련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 이후,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가 이 최초의 유기체의 후손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진화의 속도와 구조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자연 과학과 생물학의 여러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지구상의 생명체의 발달과 다양성에 대한 몇몇 진화론적 설명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넘쳐 나고 있다. 인간의 기원에 관한 설명은 복잡하고 수정될 여지가 있지만, 인류학과 분자 생물학은 모두 인간 종의 기원을 약 15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살던, 공통의 유전적 계보를 가진 원인(原人)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서 정점을 이루며 지속적으로 증대한 뇌의 크기가 인간의 기원에 대한 결정적 요소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명이 필요하다. 인간 뇌의 발달과 함께, 진화의 모습과 속도는 영구히 변모되었다. 곧, 의식과 지향성과 자유와 창조성 등 인간의 고유한 요소들이 나타나면서 생물학적 진화가 사회적 문화적 진화로 바뀐 것이다.

62.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몇 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새로운 지식은 진화론에서 하나의 가설 이상의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실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여러 학문 분야의 잇따른 발견으로 연구가들이 점차 이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진화에 관한 교황청 과학원 총회에 보낸 메시지, 1996). 지난 20세기의 진화에 관한 교황의 가르침(특히, 비오 12세 교황의 회칙 Humani Generis)을 계승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이 메시지는 ‘진화에 관한 몇몇 이론들’은 ‘유물론적, 환원주의적, 유심론적’이어서 가톨릭 신앙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메시지가, 특히 하느님의 섭리가 생명과 우주의 발달에 실질적으로 아무런 인과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신다윈주의를 포함한, 진화에 관한 모든 이론에 대한 포괄적인 인정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주로 ‘인간 문제에 관련된’ 진화에 관심을 보이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메시지는 인간의 기원에 관한 유물론적 이론들에 특히 비판적이며, 순전히 과학적인 용어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인간의 ‘존재론적 도약’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위한 철학과 신학의 타당성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진화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특히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그 종(種)에든 사회에든 단순한 수단이나 도구로 종속될 수 없다.’는 인간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친교를 이루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친교를 이룰 수 있을 뿐 아니라, 창조된 우주에 대하여 주권을 행사하고 봉사할 수 있다. 이러한 말이 함축하는 바는, 진화와 우주의 기원에 관한 이론들이 [하느님께서] 무에서(ex nihilo)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하셨다는 교리와 관련될 경우 특별한 신학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63.  우리는 인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고자(2베드 1,3-4 참조), 따라서 삼위일체의 삶과 가시적 창조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지배에 참여하려고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의 창조 활동의 핵심에는 피조물인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서, 창조되지 않은 복되신 삼위일체의 위격과 친교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바람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류의 공통 조상이 하나이고 본성이 일치한다는 사실은, 구원된 인간들이 새 아담을 머리로 하여 교회적으로 서로 친교를 이루고, 창조되지 않으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친교를 이루며, 은총 안에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자연적 생명의 선물은 은총의 생명을 받기 위한 토대가 된다. 따라서 핵심 진리가 자유롭게 활동하는 인간과 관련될 경우, 창조의 필요성이나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창조주를 일종의 힘이나 에너지나 근거라고 말할 수 없다. 무에서 창조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위격적 약속을 염두에 두고 자유롭고 지향적으로 활동하시는 초월적 위격이신 분의 활동이다. 가톨릭 전통에서 인간의 기원에 관한 교리는 하느님과 인간 본성을 근본적으로 관계적 또는 인격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계시 진리를 명료화하고 있다. 창조 교리와 관련하여 범신론과 유출설을 배제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이 계시 진리를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을 직접 또는 특별히 창조하신다는 생각은 물질과 정신의 존재론적 불연속성을 해결할 뿐 아니라,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실존의 첫 순간부터 받아 주시는 하느님의 친밀성의 근거를 세우기도 한다.

64.  따라서 무에서 창조 교리는 창조의 참된 위격적 특성과, 그 창조가 하느님 모습으로 만들어진 피조물, 곧 근거나 힘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위격적 창조주께 응답하는 인격적 피조물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확언하는 것이다. 하느님 모습의 교리와 무에서 창조 교리는 현존하는 우주가 삼위일체 창조주께서 나중에 당신 사랑 안으로 부르신 이들을 무에서 창조하신 근본적으로 위격적인 사건의 무대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바로 여기에 ‘사목 헌장’에 나오는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24항)이라는 말의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물리적 우주 안에서 책임 있는 봉사를 할 위치에 서게 된다.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고 가시적 피조 세계의 신성한 특성을 인정하면서, 인류는 자연 질서를 재구성하고, 우주 진화의 동인(動因) 자체가 되는 것이다. 지식에 봉사하는 가운데 신학자들은 창조된 우주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관점 안에서 현대의 과학적인 이해를 자리매김할 의무가 있다.

65.  무에서 창조 교리와 관련해서, 신학자들은 절대적 시작에 대한 추정이 과학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한, 빅뱅 이론은 이 교리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사실상 빅뱅 이론에서 물질이 존재하기 이전 단계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이론은 오직 신앙으로 알 수 있는 무에서 창조 교리에 대한 간접적인 지지를 하는 것으로만 볼 수 있다.

66.  생명체 출현에 유리한 조건들의 발전과 관련하여, 가톨릭 전통은 우주의 초월적 원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존재의 원인이실 뿐 아니라, 원인들의 원인이시라고 단언한다. 하느님의 활동은 피조물들의 원인의 작용을 대신하거나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원인이 그 본성에 따라 작용하되, 창조주께서 바라시는 목적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우주의 창조와 보존을 몸소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시고자 하는 자연 질서의 전개에 이바지하는 모든 이차 원인을 활성화하시고 그 활동을 유지시키고자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자연적 원인들의 활동을 통하여, 살아 있는 유기체의 출현과 보존, 더 나아가 번식과 분화에 필요한 조건들이 생겨나게 하신다. 비록 이 전개 과정에 작용하고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목적성이나 계획의 수준에 관한 과학적 논란이 있지만, 이 과정은 사실상 생명체의 출현과 번성을 유리하게 하였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이러한 추론이 하느님의 창조와 섭리에 대한 신앙에서 나오는 확신을 뒷받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창조 섭리의 계획에서 인간을 위한 자리를 우주 안에 만들어 놓으셨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의 삼위일체적 삶을 위한 자리도 마련해 주고자 하셨다. 더 나아가, 인간은 비록 자신이 이차 원인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작용하면서 우주를 재구성하고 변환시키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67.  진화 작용의 구조에 대한 현대의 과학적 논쟁이 때때로 하느님의 인과율의 본질을 오해하기 때문에 신학적 설명이 필요하다. 많은 신다윈주의 과학자들과 이들에 대한 비판자들의 일부도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진화가 근본적으로 자연 도태와 무작위적인 유전 변이로 일어나는 우연적인 유물론적 과정이라면, 여기에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는 인과율이 설 자리는 없다. 현재 신다윈주의에 대하여 과학적 비판을 하는 많은 이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예를 들어, 특정한 복합성을 보여 주는 생물학적 구조 같은), [하느님] 계획에 관련된 증거가 단순히 우연한 과정일 수 없는 것으로, 신다윈주의자들이 이것을 무시하거나 오해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커다란 견해차는 현재 주어진 자료가 [하느님의] 계획을 추론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자연의] 우연을 추론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에 관한 과학적 관찰과 일반화와 관련된 것이어서, 신학이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인과율에 대한 가톨릭의 해석에 따르면, 창조된 질서의 진정한 우연성은 목적이 있는 하느님의 인과율과 양립될 수 없는 것이 아님에 주목해야 한다. 하느님의 인과율과 창조된 인과율은 그 정도뿐 아니라 종류도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우연한 자연 과정조차도 하느님의 창조를 위한 섭리적 계획에 들어 있게 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하느님의 섭리의 결과는 어떤 일이 어떻게든지 발생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인과율에 따른 것이든 우연이든 발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오류적이고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가 무오류적이고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한 것이며,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가 우연적으로 발생하게 한 것이다”(「신학 대전」, I, 22,4 ad 1). 가톨릭의 관점에서 볼 때, 무작위적 유전 변이와 자연 도태를, 진화 과정이 완전히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주장의 증거로 내세우는 신다윈주의는 과학적 증명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하느님의 인과율은 우연적인 과정과 계획적인 과정에 모두 작용할 수 있다. 우연적인 모든 진화론적 구조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우연적일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 섭리의 영역을 벗어나는 무계획적인 진화의 과정은 있을 수 없다. “제일 동인(動因)이신 하느님의 인과율은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며, 종의 구성 원리뿐 아니라 개별화 원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다. …… 모든 것은 그것이 존재하는 한, 하느님 섭리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기”(「신학 대전」, I, 22,2) 때문이다.

68.  인간 영혼의 직접적 창조와 관련하여, 가톨릭 신학은 하느님의 특별한 활동이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창조된 원인의 능력을 초월하는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단순한 해석 차이와는 다른, 참으로 인과적인 것을 뒷받침하고자 하느님의 인과율에 의존한다고 해서, 인간의 과학적 이해의 ‘간극’을 메우는 하느님의 동인(動因)을 등장시키는, (그래서 이른바 ‘간극의 하느님’을 등장시키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구조는 세계 안에서 사건을 직접 주재하시면서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활동에 개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톨릭 신학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최초 인간 종들의 등장이 순전히 자연 발생적인 것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며, 하느님의 개입에서 그 근거를 찾는 것이 타당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주 역사의 시작부터 인과의 고리를 따라 간접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말씀하신 ‘존재론적 도약 …… 영적인 존재로 이행하는 순간’을 위한 길을 마련하셨다. 과학은 이러한 인과 고리를 연구할 수 있지만, 하느님 모습과 비슷하게 무에서 창조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물리적 우주에 대한 창조적 봉사와 통치권을 행사하는 인간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커다란 계획 안에서 삼위일체의 삶의 친교에 참여하도록 특별히 창조되었다는 이야기를 자리매김하는 것은 신학이 할 일이다.

2. 창조된 세계에 대한 책임

69.  지난 150년 동안 가속화된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진보는 우리 행성의 모든 생명체에게 전혀 새로운 상황을 마련해 주었다. 물질적 풍요, 생활 수준의 향상, 건강의 향상과 수명의 연장이 이루어진 반면에, 공기와 물의 오염, 유독성 산업 폐기물, 취약한 생태계의 착취와 때로는 파괴가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자신이 다른 생명체들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더 명확하게 자각하게 되었다. 자연은 모든 생명체가 복잡하지만 잘 조직된 생명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하나의 생물권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더욱이 자연 자원의 풍부함에도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자원의 지속적인 착취에 따르는 손상을 자연이 복구하는 능력에도 한계가 있음은 잘 알려진 것이다.

70.  이러한 새로운 환경 의식의 유감스러운 측면은, 그리스도교가 가시적 피조물을 지배하려고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지위를 극대화하였기 때문에 환경 위기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일부 사람들이 해 왔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일부 비평가들은 그리스도교 전통이 인간을 본질적으로 나머지 자연계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건전한 환경 윤리를 전개할 근거가 부족하며, 필요한 환경 윤리를 전개하려면 아시아의 전통 종교들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71.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그리스도교의 창조 신학과 하느님 모습의 신학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생태적 전환’의 필요성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인간의 지배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대리적인 것이며, …… 절대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주인의 임무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청지기의 임무”(연설, 2001.1.17.)라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가르침을 오해하여 일부 사람들이 자연환경을 분별없이 무시하였지만, 창조와 하느님 모습에 관한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어떤 부분도 무절제한 개발과, 예상되는 지구 자원의 고갈을 조장하지 않는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언급은 환경 위기에 관한 교도권의 깊어지는 우려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이는 현대 교도권의 사회 회칙들에서 발견되는 오랜 가르침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근대 교황들의 사회 회칙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르침의 긴 역사에 뿌리내린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의 관점에서 환경 위기는 인권 탄압과 지구 자원의 불공평한 활용과 연관된 인간적이며 사회적인 문제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러한 사회 교리의 전통을 회칙 「백주년」(Centesimus Annus)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으셨다. “소비 문제 외에 이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생태학적 문제도 염려됩니다. 인간은 존재와 성장보다 소유와 향락을 더 누리려고 하기 때문에, 과도하게 그리고 무절제하게 땅의 자원과 자신의 생활을 남용합니다. 자연환경의 무모한 파괴의 원인에는, 우리 시대에 널리 퍼져 있는 인간학적 오류가 잠재합니다. 자신의 노동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은, 그 세계가 언제나 하느님께서 처음에 가장 먼저 선물로 주신 것들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합니다”(37항).

72.  그리스도교의 창조 신학은 가시적 피조물 자체가 인격적 친교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원초적 선물’, 곧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근본적 진리를 긍정함으로써 환경 위기의 해결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한다. 사실, 제대로 된 그리스도교 생태 신학은 창조 신학을 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태학’이라는 용어가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 집)와 로고스(logos, 말씀)의 합성어이므로, 인간 실존의 물리적 환경은 우리에게 인간적 삶을 위한 일종의 ‘집’이라고 볼 수 있다.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적 삶이 하나의 친교임을 볼 때, 하느님의 창조 활동은 이 친교를 나누시고자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으시며 [친교의] 대상을 만드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친교가 이제는 창조된 우주 안에서 ‘집을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우주가 인격적 친교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73.  그리스도론과 종말론 모두 이 진리를 더욱 명료하게 하는 데에 이바지한다. 성자의 위격과 인간 본성의 인격적 결합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당신께서 직접 창조하신 육신을 가지셨다. 강생을 통하여, 곧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신 독생 성자를 통하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친밀한 인격적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하셨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인 인간을 들어 높이시고, 대화를 통하여 당신 삶에 참여시키시고자, 말하자면 당신께서 몸소 피조물의 수준으로 내려오신 것이다. 일부 신학자들은 하느님의 이러한 자기 낮춤을 일종의 ‘인간화’라고 말한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자유로이 인간의 신화(神化)를 가능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현현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우주 안에 드러내실 뿐 아니라, 그 육체성도 취하시어 그렇게 하신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의 전망에서 볼 때, 하느님의 ‘인간화’는 피조물인 인간뿐 아니라, 창조된 우주 전체와 그 역사적 운명과 이루는 연대 행위이다. 더 나아가 종말론적 전망에서,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은 창조의 원초적 계획을 완성하는 완전한 우주 안에 하느님께서 육체적으로 머무르시는 사건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74.  하느님 모습의 신학은 인간 중심주의적으로 자연환경을 분별없이 무시하도록 조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완전한 우주 안에 하느님께서 영원히 머무르시게 하는 데 인간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단언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모든 피조물이 갈망하는 이러한 변모에 이바지하는 청지기이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가시적 피조물은 하느님의 삶에 참여하게끔 부름을 받았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3).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우리가 ‘머물고 있는 현실’인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책임은 가시적 창조와 그 안의 인간 지위에 대한 심오한 신학적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75.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회칙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의 중요한 대목에서 이러한 책임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이렇게 적고 계시다. “인간은 세상의 정원을 경작하고 돌보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창세 2,15 참조),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과, 하느님께서 인간의 인격적 존엄성과 생명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창조하신 피조물에 대한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장차 올 세대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생태학적인 문제는 성경 안에서 생명과, 모든 생명의 큰 선익을 존중하는 해결책으로 안내해 주는 분명하고 힘 있는 윤리적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자연 세계를 대할 때 생물학적 법칙만이 아니라 도덕적 법칙에도 따라야 함을 충분히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자연을 훼손함으로써 이 법칙을 어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42항).

76.  결국 신학이 환경 위기의 해결을 위한 기술적 처방을 우리에게 제시해 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대로, 신학은 우리의 자연환경을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서로 친교를 나누고 가시적 우주의 궁극적 완성을 추구해야 하는,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 인격적 일치를 이루는 자리로 볼 수 있게 해 준다.

77.  이러한 책임은 동물의 세계에도 적용된다. 동물들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섭리의 손길로 동물들을 감싸 주신다(마태 6,26 참조). 인간은 동물들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이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창조의 모든 요소에 대하여 감사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 동물들은 그들의 삶 자체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또한 영광을 드린다. “하늘의 새들아, 모두 주님을 찬미하여라. …… 들짐승과 집짐승들아, 모두 주님을 찬미하여라”(다니 3,80-81). 여기에 더해, 인간이 전체 피조 세계에서 이룩하여야 할, 또는 회복시켜야 할 조화는 동물과 맺는 관계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에 싸여 오실 때, 조화의 종말론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피조물 전체를 ‘재창조’하실 것이다.

78.  그러나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 인간만이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동물 세계를 다스릴 통치권을 주셨기 때문이다(창세 1,26.28; 2,19-20 참조). 동물을 정당하게 이용하는 것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반영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동물을 관리하도록 맡기셨다. 그러므로 식량을 구하고 의복을 마련하기 위해 동물을 이용하는 것은 정당하다. 일과 여가에서 인간을 돕도록 동물을 길들일 수 있다”(2417항). 이 구절은 동물을 의학적이며 과학적인 실험에 합법적으로 사용하는 문제도 상기시키지만, “동물을 불필요하게 괴롭히며 마구 죽이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어긋나는 것”(2418항)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인정한다. 따라서 동물의 모든 이용은 위에서 자세히 설명한 원칙에 따라야 한다. 곧, 동물 세계에 대한 인간의 통치권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가장 참된 의미에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셈을 해 드려야 하는 봉사이다.

3. 인간의 생물학적 통합성에 대한 책임

79.  현대의 기술은, 가장 최근의 생화학과 분자 생물학의 발달과 더불어 현대 의학에 새로운 진단과 치유의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새롭고 더욱 효과적인 질병 치료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들의 가용성과 가능성은 인간이 스스로를 얼마나 변형시킬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의 심각성을 더해 준다. 생명 윤리 분야에서 책임 있는 봉사를 할 때, 인간의 생물학적 통합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술의 영역에 관한 깊은 도덕적 반성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만 새로운 기술들이 가져다준 특정한 도덕적 문제들과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생물학적 통합성에 대한 책임 있는 봉사를 하기 위하여 지켜야 할 몇몇 원칙에 대하여 간단하게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80.  자신의 육체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육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곧, 인간이 자기 육체의 일부를 교체, 보완, 폐기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육체의 목적성 또는 목적론적 가치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처분할 수 있는 권리는 단순히 도구적인 가치만을 지닌 대상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선(善)한 대상, 다시 말해 그 자체가 목적인 대상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그 자체가 그러한 선인 것이다. 특히 생명 윤리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과연 이것이 인간 안에서 생물학적-육체적, 정서적, 영적으로 구분되는 여러 차원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81.  병원에서는 생명을 보존하려고 다리 절단 수술이나 장기 제거와 같은 육체와 특정한 정신 기능을 없애는 관행이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다. 이러한 관행은 (치료 원칙이라고도 알려진) 전체성과 통합성의 원칙에 입각해서 허용되고 있다. 이 원칙의 의미는, 인간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모든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기능을 발전시키고, 돌보고, 보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1) 온전한 인간의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경우 이외에는 결코 하위 기능을 희생시켜서는 안 되며, 희생되었을 경우라도 희생된 것을 보완하려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2) 인간다움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기본 능력들은 생명을 구하는 경우 외에는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82.  전체의 일부분으로서 단일한 육체를 이루는 여러 장기와 사지는 육체에 완전히 흡수되고 종속된다. 그러나 더 낮은 가치가 더 높은 가치를 위하여 단순히 희생될 수는 없다. 이 모든 가치는 함께 유기적 일치를 이루고 상호 의존적이다. 육체가 인간의 본질적 부분으로서 그 자체적으로 선한 것이기에, 근본적인 인간 기능은 오직 생명을 구하는 경우에만 희생될 수 있다. 결국 생명은 근본적 선으로서 인간 전체와 관련된다. 생명이라는 근본적 선 없이는 자유와 같은 생명보다 더 높은 가치도 소멸할 것이다. 인간이 육체적으로도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면,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본성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하느님과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는 자의적인 인간 행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83.  전체성과 통합성의 원칙을 적용하려면 다음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 손상되었거나 직접적으로 생명에 위협을 주는 신체의 일부에 관련된 문제이어야 한다. 2) 생명을 구할 다른 방법이 더 이상 없어야 한다. 3) 실패에 비하여 성공할 확률이 상대적으로 더 높아야 한다. 4) 환자가 이에 대하여 동의를 하여야 한다. 고의가 아닌 실패나 부작용은 이중 효과의 원칙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다.

84.  어떤 사람은 이러한 가치 서열이 출산 능력과 같은 하위 기능들을 정신 건강과 타인과의 관계 증진과 같은 더 높은 가치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처럼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출산 능력은 여기에서, 살아 있는 전체성인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기능하는 전체성인 인간에게 본질적인 요소들을 보존하고자 희생되는 것이다. 사실상, 기능하는 전체성인 인간은 정신 건강에 대한 위협이 급박하지 않아서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때에도 출산 능력의 상실로 손상을 받는다. 더 나아가, 전체성의 원칙을 이렇게 해석할 경우, 사회적 이익을 위한 신체의 일부를 희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논리라면, 우생학적 이유로 불임 수술을 하는 것도 국가의 이익을 바탕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85.  인간 생명은 남성과 여성이 상호적이고 완전하며, 결정적이고 배타적으로 서로를 내어 주는 부부 사랑의 열매이다. 이 부부 사랑은 창조를 통하여 열매를 맺는 하느님의 세 위격 간의 상호 사랑과, 인간의 새로 남을 통하여 열매를 맺는 당신 교회에 주시는 그리스도의 선물을 반영한다. 인간의 완전한 선물이 영혼과 육체에 모두 관련된다는 사실은 부부 행위의 다음 두 가지 의미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의 근거가 된다. 곧, 부부 행위는 1) 육체적 차원에서 부부 사랑의 참된 표현이며, 2) 여자의 가임기 동안 출산을 통하여 완성에 이른다(바오로 6세, 회칙 「인간 생명」[Humanae Vitae], 12항;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Familiaris Consortio], 32항).

86.  성적 친밀함의 차원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내어 주는 행위는 피임과 불임 수술을 통하여 불완전한 것이 된다. 더 나아가, 어떤 기술이 부부 행위의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대체하여 제삼자가 개입하여 부모가 서로를 내어 주는 진정한 표현인 부부 행위를 통하지 않고 아이가 탄생한다면 그것은 불완전해 진다.

87.  배아 분리나 핵 이식을 통하여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체를 생산하는 복제의 경우, 아이는 무성 생식의 방법으로 태어나는 것이므로 사랑의 상호 증여의 열매라고 할 수가 없다. 한 사람에게서 많은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인 경우, 확실히 복제는 인간의 정체성을 침해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모습으로 이해되는 인간 공동체는 그 다양성 안에서, 본성은 동일하지만 서로 다른 하느님의 세 위격의 관계의 일면을 나타낸다.

88.  치료를 목적으로 한 인간 생식 계열 유전 공학은, 특히 실험의 초기 단계에서 배아의 대량 손실과 재난 사고와 같은 엄청난 위험이 있고, 생식 기술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만 아니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이를 대신할 만한 것은 남자의 정자를 생산하는 줄기세포에 유전자 치료법을 활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남성은 부부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정자로 건강한 후손을 볼 수 있다.

89.  형질 강화 유전 공학은, 어떤 특정한 특성들을 개선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공동 창조자’라는 개념은 그러한 유전 공학을 이용하여 인간의 진화를 조종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인간이 자신의 생물학적 본성을 마음대로 할 온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보다 하등한 존재를 생산하여 인간의 유전적 정체성을 바꾸는 일은 근본적으로 부도덕한 일이다. 본질적으로 새로운 영적 능력을 가진 초인이나 존재를 생산하려고 유전자 조작을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물질로 인간의 육체를 만드는, 인간의 영적 생명의 원칙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유전 공학의 대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유일성은, 부분적으로 인간의 생물 유전적(biogenetic) 특성으로 형성되고, 양육과 성장을 통하여 발달되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속하기에, 그러한 특성의 일부를 개선하려는 도구로 사용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을 그리스도께 결합시키고, 그분을 닮아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 모습을 더욱 완전하게 실현시킬 때에만 참으로 개선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형질] 변형은, 그 어떤 경우도 자신의 육체적 구조와 특성에 대한 심각하고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내려지는 결정에 아무런 참여도 할 수 없는, 앞으로 태어날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다운 증후군과 같은 선천적 조건들을 개선하려는 유전자 치료는, 관련자의 외모나 정신적 재능과 관련하여 그의 정체성에 확실히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그 변화가 손상된 유전자로 가려진 그의 참된 정체성을 완전히 드러내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90.  치료를 목적으로 한 개입은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다양한 차원과 관련하여 인간의 여러 차원의 목적성을 온전히 존중하면서, 육체적, 정신적, 영적 기능들을 회복시키는 데에 이바지한다. 그 자체가 목적인 인간과 인간의 육체에 치료적 특성을 통하여 이바지하는 의학은 인간과 인간의 육체 안에 있는 하느님 모습을 모두 존중한다. 수명 연장을 위한 특수 치료는 균형의 원칙에 따라 이 치료에 수반되는 긍정적인 결과와 환자 자신이 입을 수 있는 손상이 적절한 균형을 이룰 때 사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죽음을 앞당기게 된다고 해도 치료를 포기하여야 할 것이다. 고통 경감을 위한 치료에서 진통제를 사용하다가 죽음을 앞당기는 경우는 모든 약물의 부작용과 마찬가지로 이중 효과의 원칙의 대상이 되는 간접적 효과가 된다. 다만 이 투약이 생명을 적극적으로 종식시키는 것[적극적 안락사]이 아니라 고통 증상의 완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91.  죽음을 다루는 일은 사실상 생명을 다루는 데에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다. 개인이 놓인 상황이 아무리 비극적이고 복잡하다 하더라도, 조력 자살, 직접적 안락사, 직접적 낙태는 스스로 선택한 목적을 위하여 육체적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것에는 배아 치유의 목적이 아닌 실험과, 착상 전 진단 등을 통한 배아의 도구화 등이 있다.

92.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피조물인 인간의 존재론적 지위는 인간이 자신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에 어느 정도 제한을 가한다. 인간이 향유하는 통치권은 무한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창조된 세계에 대하여 일정한 참여적 통치권을 행사한다. 종말 때에 인간은 우주의 주님께 자신이 수행한 봉사의 셈을 해 바쳐야 한다. 인간은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이지, 하느님 자신은 아니다.

 

결 론


93.  지금까지의 성찰을 통하여, ‘하느님 모습’이라는 주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여러 진리를 밝히는 데에 체계적인 힘을 보여 주었다. 이 주제는 관계적이며 확실히 인격적인 인간 개념을 드러내는 데 도움을 준다. 하느님과 맺는 이러한 관계가 바로 인간 존재를 규정하고,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 맺는 관계의 기초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인간의 신비는, 성부의 완전한 모습이시며, 성령을 통하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 안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관점에서만 완전히 명료해진다. 이러한 사랑의 친교 안에서만 하느님께서 품으신 모든 존재의 신비가 각자의 완전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 모습으로서 위대하면서도 또한 보잘것없는 이 인간의 개념은, 창조된 세계와 맺은 인간의 관계에 관한 헌장을 수립하고, 인간의 삶과 환경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과학적이며 기술적인 진보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근거가 된다. 이 분야에서 하느님의 창조성에 참여하는 것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것처럼, 인간은 하느님께서 물리적 우주에 대한 봉사의 귀중한 책무를 부여하신 피조물인 자신의 지위를 인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원문 International Theological Commission, Communion and Stewardship: Human Persons Created in the Image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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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라는 주제는 국제신학위원회에 연구 주제로
제출된 것이다. 이 연구의 준비는 다음과 같은 인원으로 구성된 소위원회에 위임되었다. 아우구스티노 디노이아 몬시뇰(Very Rev. J. Augustine Di Noia, O.P.), 장루이 브뤼게스에 주교(Most Rev. Jean-Louis Bruguès), 안톤 스트루켈리 몬시뇰(Msgr. Anton Strukelj), 타니오스 부 만수르 신부(Rev. Tanios Bou Mansour, O.L.M.), 아돌페 게셰 신부(Rev. Adolpe Gesché), 빌렘 야코부스 에이크 주교(Most Rev. Willem Jacobus Eijk), 파델 시다루스 신부(Rev. Fadel Sidarouss, S.J.), 순이치 다카야나기 신부(Rev. Shunichi Takayanagi, S.J.).
이 본문은 작성 과정에서, 2000년에서 2002년까지 로마에서 열린 수차례의 국제신학위원회 소위원회 회의와 서너 차례의 국제신학위원회 정기 회의에서 다루어졌다. 이 본문은 국제신학위원회의 투표를 통하여 낱낱이 승인을 받았으며, 이어서 이 위원회의 위원장인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에게 제출되어, 발표를 허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