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교회의 문헌
2013-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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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노동자들의 죽음을 지켜만 볼 수 없습니다
  • 발표일 : 2013-02-19

박근혜 제18대 대통령 당선인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호소합니다
더 이상 노동자들의 죽음을 지켜만 볼 수 없습니다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야고 5,4)

절망의 겨울입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명분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구분 없이 무차별적으로 행해지는 정리해고와 차별과 불평등으로 점철된 비정규직 문제, 불법적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조합 탄압으로 노동자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춥고 긴 겨울이었습니다. 300일 이상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전국의 장기투쟁 사업장이 20군데가 넘습니다. 송전탑과 성당 종탑, 길 위의 천막에서 노동자들은 생존대책과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침묵의 결과로 대선 이후에만 일곱 명의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이 절망 속에서 신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고 우리들 곁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자살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벼랑 끝 절망으로 몰아세운 것은 노동자들을 이윤 창출의 도구로만 여기는 자본의 논리, 정부의 무관심과 무책임, 동시에 우리 사회의 침묵과 냉대입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약과 함께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지난 5년 간 기업에 온갖 특혜와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경제는 침체되었고 서민들과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머지않아 출범할 박근혜 정부는 이러한 안타까운 전철을 답습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1. 박근혜 당선인께 간곡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지난 대선 직전 새누리당은 당의 공식 입장으로 대선 후 쌍용자동차에 대한 신속한 국정조사를 약속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대선 이후 지금까지 박근혜 당선인은 이렇다 할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으며 국회에서는 여당의 반대로 쌍용자동차 국정조사는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는 노동현안 해결을 위한 어떠한 노력도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회의 기초는 건강한 노동과 정당한 대가에 달려 있습니다. 때문에 최근 노동자들의 연이은 죽음과 같은 위급한 노동현안에 대한 근본적 해결 없이는 앞으로 박근혜 당선인이 이끌 5년 역시 건강한 사회일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대선 이전 국민 앞에서 했던 약속들을 이행하기 위해서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결의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2.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전국의 일터와 삶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내몰리는 노동자들의 곁을 지키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살자고 호소했지만 노동자들의 죽음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더 이상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죽지 말고 함께 살자고 호소합니다.
우리 교회는 언제나 일터와 삶터에서 내몰린 이들과 함께 하며 성실한 노동과 정당한 대가가 보장되는 사회를 일구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절망에 놓인 이 땅의 노동자들을 위해 지속적인 범교구 차원의 모금운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신앙인들과 선의의 국민들의 마음을 한데 모을 것입니다. 기업이 물질의 이윤만을 쫓지 않고 노동자들과 상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도록 촉구하며 쉼 없이 기도할 것입니다. 나아가 노동자들이 유엔과 국제사회의 기준에 부합하는 대우를 받고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정부로 하여금 부당한 법과 제도를 개선하도록 건전하고 합리적인 제언과 질책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사용자들과 노동자들이 함께 상생할 수 있는 올바른 노동정책을 펼치도록 끊임없이 촉구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교회를 비롯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마음으로부터 호소합니다. 정리해고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모두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의 가족이며 이웃입니다. 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고통과 아픔을 나누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인간의 도리이며 예의입니다. 강도를 만나 죽음에 직면하였던 이를 돌보아 준 착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이며(루카 10,33 이하 참조) 예수님의 고귀한 정신입니다. 이러한 마음만이 오늘 우리 사회의 상처를 치유하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본도 정부도 아닌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선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다짐과 약속이 절박한 상황에 처한 노동자들의 마음에 닿아 더 이상 소중한 삶을 놓아 버리는 이들이 없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2013년 2월 19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이 용 훈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