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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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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차 정기 총회 최종 문서 「성체성사로 사는 아시아」
  • 발표일 : 2009-08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제9차 정기 총회 최종 문서

성체성사로 사는 아시아

Living  the  Eucharist  in  Asia

마닐라, 필리핀, 2009.8.10-16.

 


차 례


서 론 
아시아의 전반적인 사목 상황 

가. 성찬례 거행의 신학적 사목적 흐름
1) 성체성사: 우리의 생명이며 친교이신 예수님의 생명 

나. 시작 예식
1) 하느님 안에 모인 한 가족 - 분열의 반대 표징 
- 사목 적용 
2) 자기 죄를 깨닫고 하느님 알기(참회 예식) 
- 사목 적용 

다. 말씀 전례
1) 예수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 사목 적용 
2) 공동 기억을 만들기(말씀을 다시 말하기) 
- 사목 적용 
3) 말씀의 저자이신 하느님 
4) 아시아에서 억압받는 이야기 
5) 기쁘지만 위험한 행동(공동 신앙 고백) 
- 사목 적용 
6) 귀 담아 들어주시는 하느님께 간청하기(보편 지향 기도) 
- 사목 적용 
7) 불의한 세상 안에 있는 희망의 징표(예물 봉헌) 
- 사목 적용 

 

라. 감사 기도
1) 성찬 제정 이야기: 배반에서부터 자기를 내어 주는 섬김의 희생 제사까지 
- 사목 적용 
2) 산 이와 죽은 이와 맺는 친교 
- 사목 적용 

마. 영성체 예식
1) 친교와 평화인 사랑(주님의 기도와 평화의 인사) 
- 사목 적용 
2) 넘치는 사랑(영성체) 
3) 사랑의 양식에 대한 “아멘!”: 선교를 위한 헌신 
4)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명 
- 사목 적용 
5) 현존의 약속과 선물 

바. 결 론 

사. 사목 제안
1. 성찬의 삶을 위한 교육 
2. 성찬 거행과 주님 조배 
3. 성찬의 삶 
4. 선교 지향 

 

 

서 론


‘성체성사로 사는 아시아’라는 주제로 열린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FABC) 제9차 정기 총회에는 교황 특사와 인류복음화성 장관을 비롯하여 17개 주교회의와 6개 준회원국에서 온 주교 66명(추기경 6명 포함)이 참석하였다. 비아시아권 5개 주교회의에서 온 형제 대표 5명도 참석하였다.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의 각 위원회 위원장 주교들, 사제, 수도자, 평신도 대표들도 초청되었다. 이번 정기 총회는 교회에서 언제나 막중한 중요성을 지닌 이 주제를 선택하여 2004년 대전에서 열린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제8차 정기 총회 이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뜻깊은 발전을 살펴보았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2003년 4월 17일 성목요일에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를 발표하시어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통해 주시는 생명에 교회가 다시 한 번 감사할 수 있게 하셨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2004년 10월 7일 발표하신 교황 권고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Mane Nobiscum Domine)에서 2004년 10월부터 2005년 10월까지를 ‘성체성사의 해’로 선포하시고, 성체성사의 해를 마무리하는 행사로 ‘교회의 생활과 사명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체성사’를 주제로 2005년 10월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제11차 정기 총회를 소집하셨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서거하시자 후임자이신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께서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제11차 정기 총회의 준비를 촉진하시고 이 정기 총회를 주재하셨으며 2007년 2월 22일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후속 교황 권고 「사랑의 성사」(Sacramentum Caritatis)를 발표하셨다. 그러한 교황 교도권의 풍요로운 통찰과 가르침에 힘입어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제9차 정기 총회의 최종 문서는 아래와 같은 성찰을 담고 있다.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의 회원 주교회의들과 준회원들도 소중한 의견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의 여러 위원회는 총회 주제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유익한 정보와 사목적 신학적 통찰력을 제공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지역 모임이나 지역 간 모임의 워크숍과 전체 회의들에서 이루어진 활발한 토론이 이 최종 문서를 더욱 풍성하게 해 주었다.

교회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작성된 이 문서의 목적은 주교회의들과 교구들을 돕는 것이다. 우리는 아시아의 사제와 수도자가 성체성사에 대한 계속 교육에 이 문서를 활용하도록 권장한다. 또한 이 문서는 전례, 교리 교육, 신앙 교육, 평신도 지도자 교육, 소공동체와 기타 신앙 공동체의 양성과 관련된 교구 직무를 위해서도 유용할 것이다. 우리는 이 최종 문서가 아시아 상황에서 성체성사를 더 잘 이해하고 거행하고 실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성찰과 실행에 매우 유용한 지침이 되리라 믿는다.

이러한 연유로 각 항마다 아시아에서 성찬의 삶을 지향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상황에 맞는 사목 적용도 제시하였다.

아시아의 전반적인 사목 상황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제9차 정기 총회의 성찰은 아시아 각지의 현실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현상들은 아시아의 생명 추구, 아시아의 생명 찬미, 참생명을 위한 아시아의 노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아시아에서 풍요로운 창조, 풍부한 문화, 깊이 있는 종교 윤리 전통, 새로운 경제의 힘, 기술적 진보, 인간 존엄과 평화 증진에 담긴 활기찬 생명의 표징들을 보게 되어 매우 기뻤다. 가난한 이, 어린이, 여성, 이민, 노동자의 권리와 피조물을 온전히 수호하는 종교,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 활동들 안에서 성령의 생생한 현존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언뜻 보기에는 생명을 약속하지만 결국 죽음을 초래하는 일부 발전의 양면성도 잘 알고 있다. 점차 개방되는 경제와 이에 따른 급속한 산업화로 농촌 공동체가 피폐해지고, 새로운 형태의 가난은 이주와 가정 해체의 원인이 되고 있다. 고삐 풀린 자본의 흐름은 정보의 무차별적 유입, 새로운 사고 방식, 새로운 선호를 야기하여 아시아의 문화, 특히 청소년 문화를 바꾸고 있는데, 늘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아시아 대부분 지역에서, 정치 권력은 여전히 봉사보다는 지배를 위한 도구이다. 안타깝게도 억압적 정치가 경제적 힘과 결탁하고 종교적 분파가 문화적 배타주의와 결합하고 있다. 전쟁, 폭력, 민족들의 강제 이주로 피폐해진 삶 속에서도, 생명을 찬미하고 더 나은 삶을 희망하는 아시아의 역량은 놀랍기만 하다. 교회도 아시아 민족들과 함께 참생명을 추구하는 길을 나아간다.

우리의 성찰은 가톨릭 교회의 살아 있는 전승에, 특히 최근 교황님의 가르침과 아시아의 삶의 현실에 뿌리를 두고 아시아의 상황에서 성체성사로 산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성찬의 삶’은 ‘성체성사에 대한 믿음’과 ‘성찬례의 거행’에서 흘러나오면서 동시에 그 믿음과 거행의 밑거름이 된다. ‘성찬의 삶’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살아 있는 신앙과 살아 있는 거행이라는 틀 안에서 신중히 이루어지게 된다. 이 문서에서 모두 인용되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가르침과 전례 자료들은 신자들과 교회에 제시되는 성찬의 삶이라는 생활 양식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시아에서 삶의 관심사도 소홀히 하지 않고 성체성사에 대한 믿음과 성찬례 거행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것이다. 우리는 성찬례로 나아가며 우리 아시아인의 꿈과 희망과 고통을 결코 잊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가 성찬례에서 예수님과 이루는 친교는 우리가 이 세상 삶의 현실에 새롭게 참여하게 하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 삶의 모습을 제시해 준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순환’ 방법론을 따라 생명-믿음-거행-생명의 순으로 성찰해 볼 것이다.

 

가. 성찬례 거행의 신학적 사목적 흐름


1) 성체성사: 우리의 생명이며 친교이신 예수님의 생명

성찬의 삶은 그저 성체성사에 대한 믿음과 성찬례 거행에 딸려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체는 우리에게 당신 생명을 주시어 우리의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의 생명 자체이다. 요한 복음 6장 22절에서 60절까지 나오는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빵이라고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선물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사명을 가지고 파견되신 분이시다. 그분의 선물은 바로 하느님께서 인류와 나누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생명이다.

그러나 이 선물은 성령께서 북돋워 주신 신앙의 응답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분의 몸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는 새 계약인(루카 22,20 참조) 삼위일체 하느님과 생명의 친교를 이루는 것이다. 대화가 교회 생활의 특징인 아시아에서, 성체성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하느님께 응답하는 생명의 대화, 사랑의 대화를 체험하는 유일무이한 자리이다.

이러한 생명과 사랑의 대화는 성찬례에서 전례의 형태를 취한다. 우리는 전례 거행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삶과 그 역동성을 보고 듣고 만진다. 전례의 다양한 부분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 구원을 위하여 봉헌되신 그리스도의 삶의 리듬에 동참할 수 있다. 우리는 성찬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명의 일부분만을 기리는 성사적 기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어 결국 영광을 받으신 그 파스카 신비에서 절정에 이르는 그분의 온 생애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께 바치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희생 제사, 곧 사랑의 예물이었다. 그분의 희생 제사는 아버지에 대한 순명과 나약한 죄인들을 향한 연민의 행위이다. 그분의 제사는 흠숭과 봉사의 희생 제사였다. 그분의 삶 자체가 성찬례였다.

우리가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예수님의 삶이 성사적으로 구현되어 우리도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대로 살 수 있게 된다. 성령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머무실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자유롭게 해 주신다. 우리는 성찬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성찬례 거행의 흐름을 따라가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찬의 삶을 성체성사에 대한 우리의 믿음으로 살펴볼 것이다.

아시아에는 이번 정기 총회 기간에 우리가 거행했던 시로 말라바르 예법과 시로 말란카라 예법처럼 동방의 오래된 주요 성찬 예법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 최종 문서는 사목적 이해를 위해 간단하게 라틴 교회의 성찬례 거행의 순서를 따르기로 한다.

 


나. 시작 예식


1) 하느님 안에 모인 한 가족 - 분열의 반대 표징

성찬례는 공동체 가족이 한데 모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부르시고 초대하시고 한데 모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라고 우리는 믿는다.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함께 모이는 일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한다. 예수님의 구원의 파스카를 기념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천상 잔치를 보증하는 이 희생제 식사로 ‘초대하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의 삶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식사는 음식만을 먹는 것이 아니라 또한 하느님 나라를 ‘맛보도록’ 사람들을 모으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하느님의 초대는 인간의 초대와 달리 성찬의 식사를 위하여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민족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 심지어 시간대와 지역이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은총과 신앙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 자녀들의 새로운 가정은 우리 가운데에 있다. 이 가정이 바로 교회(ecclesia)다. 하느님의 폭넓은 사랑의 결실은 하느님 자녀라는 공통된 품위를 나누는 형제자매의 공동체이다. 은총을 통한 하느님의 현존은 형제자매의 현존을 낳아 우리가 염원하는 새로운 인류를 미리 맛보게 한다. 우리는 우리를 초월하는 부르심에 응답하여 한 가족이 된다. 성체성사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소소한 관심사에 초연하고 우리를 초월하는 부르심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해도, 우리는 서로 이웃과 형제자매로서 현존하며 친교를 나눌 수 있다.

- 사목 적용

아시아 문화의 두드러진 특색 가운데 하나는 가족, 부족, 공동체, 민족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이다. 이는 흔히 식사를 함께 나누며 다져진다. 아시아인들에게 식사는 단지 음식과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세세대대로 이어지는 유대를 기르고 새롭게 한다. 태어나 이름이 붙여지고 혼인하고 이별하는 등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공동체가 이러한 ‘인생의 중요 순간’에 함께 하는 식사가 빠지지 않는다. 불교에서 스님들이 탁발하여 공동체가 다함께 공양하는 관행은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찬례에 모인 공동체로서 흩어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한데 모이는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는 여러 위협 요소들에 맞서 아시아에서 공동체 생활을 강화하는 데에 기여하여야 한다. 개인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생활 방식은 가족 식사를 자주 못하게 하여 공동체를 이루는 식사의 기능을 방해한다. 일부 아시아 문화에서, 식사는 엄격한 신분 제도를 반영하여 다른 신분의 사람들과는 음식과 생활을 공유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가족과 민족, 국가나 신앙 공동체에 대한 충성은 흔히 ‘외부인’에 대한 거부, 차별, 폭력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주 노동자, 난민, 수많은 실향민은 식량 못지않게 그들을 환대하는 공동체를 찾고 있다.

성찬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한 가족이 된다. 우리를 모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상황에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아 성찬의 삶을 뒷받침하는 그리스도교 소공동체, 기초 공동체, 교회 단체, 수도회, 본당, 교구, 그 밖에 이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치하하고 지지한다. 성찬의 신앙과 영성을 육성할 때에는, 성찬례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활동 가운데 공동체 형성의 측면을 강조하고 성찬례 참여에 대한 개인주의적 좁은 관점을 피하여야 한다. 사제는 자신이 섬기는 공동체 안에서 가족 의식을 발전시킴으로써 자신의 성찬 신앙을 실천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리하여 신자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이 교회 안에서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국제적 성격을 지닌 수도회들은 국적과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모으시는 성령의 힘을 증언하여야 한다.

2) 자기 죄를 깨닫고 하느님 알기(참회 예식)

성찬례 안에서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 새로 태어난 교회는 삼위일체의 모상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성전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깨달을 때 우리가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생각이 더 강해진다.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에도,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은 시몬이나 레위나 자캐오 같은 이들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해 주었다. 루카 복음 15장에 나오는 방탕한 아들처럼 우리도 우리가 받은 유산을 낭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짊어지고 아버지께 돌아가 “전능하신 하느님께 고백하오니……”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자매들에게도 우리 죄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하고 호소한다. 어느 누구도 다른 이보다 더 거룩한 체할 수 없다. 우리는 다 같이 자신의 일그러진 인간성을 인정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간청하며 서로서로 비는 가난한 공동체이다. 우리는 모두 가난하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우리 이웃의 기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느님과 이웃과 대화를 나눈다.

- 사목 적용

아시아 정신은 신성과 생명을 추구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한 추구는 아시아에서 생겨난 종교나 철학 전통에서 보이는데, 겸손과 비폭력, 불가침, 인내, 조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인간관계와 통치와 생활 방식을 다루는 윤리는 이러한 전통들의 지혜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권력의 망상과 독선의 기만에서 비롯되는 유혹들도 충분히 알고 있다. 아시아의 자연환경과 인간적 전망을 파괴하고 있는 폭력과 차별과 전쟁은 우리가 거짓과 가식에 얼마나 많이 무릎을 꿇어 왔는지를 보여 준다. 자신은 선의 원천과 수호자라고 생각하고 ‘다른 이들’은 악과 오류의 원흉이라고 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스스로 착각에 빠져 버리고 만다. 그러면 지배주의가 공동체 의식을 대치하기 시작한다.

성찬의 삶은 또한 다른 이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고 은총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것이다. 아시아의 수많은 문화와 종교와 관련하여, 성체성사는 우리와 다른 이들에게 드러난 진리와 선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준다. 또한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진리에 기뻐한다.

성찬의 삶에 편견이 설 자리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들과 쉽게 타협하려고 진리를 희생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반드시 사랑과 겸손으로 진리를 고수하여야 한다. 우리가 진리를 고백하면서도 세상의 고통과 어려움에 일조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깨달으면 우리는 서로를 파멸시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차별의 도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슬픔을 나누고 우리가 받은 복도 나눌 것이다. 우리가 간청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자비를 널리 전파할 것이다. 아시아의 분쟁 지역에서 끊임없이 화해와 대화를 촉진하는 교회 공동체들과 운동들은 성찬의 삶의 활기찬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인류 구원과 화해의 씨앗이 되라는 부르심대로 살아가는 공동체는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린다. 생기가 넘치는 공동체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

 

다. 말씀 전례


1) 예수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한데 모인 공동체는 이제 하느님 말씀의 양식을 먹게 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기”(신명 8,3) 때문이다. 교회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말씀의 식탁과 성찬의 식탁에서 받아 모신다(사목 헌장 21항 참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성찬례에 포함된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선포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요한 6,68-69 참조).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본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일깨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신앙이다. 신앙은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 생겨나고 강해진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라고 하였다. 대중 매체와 정보 기술의 ‘영상’ 언어와 인쇄 언어가 신념과 견해와 사고방식과 유행과 생활 방식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대에, 우리는 신앙의 생명을 낳는 하느님 말씀의 힘을 한층 더 탐구해 보아야 한다.

2006년에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열린 아시아 선교 대회에서는 선교의 한 방식으로 ‘아시아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기’를 다루어 보았다. 우리는 말씀 전례를 성찬의 기념제에서 이야기하는 시간으로 여길 수 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대화를 먼저 시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이야기를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은 활동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삶에 영향을 준다. 말씀 전례에서 역사 속에서 계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업적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과 신약 성경을 읽고, 특히 하느님 계시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봉독하는 것으로 선포된다.

하느님 말씀에 담긴 생생한 기억에 대한 응답이 신앙이다. 신앙은 성사적 표징들과 일상생활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데에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는 성령(요한 16,13 참조)을 통해서만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된다(1코린 12,3 참조). 인간의 지혜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신앙에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이 말씀을 자기 삶에 받아들이며 말씀으로 자기 삶을 변화시키고 말씀에 따라 행동하며, 말씀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일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신앙은 지적인 동의를 초월하는 것이다. 신앙은 하느님에 대한 순종, 곧 전적인 회개를 수반하는 순명과 같다. 신앙은 한 사람의 삶을 바꾼다. 곧 신앙이 그의 삶이 되는 것이다.

- 사목 적용

아시아에서, 다양한 종교의 경서와 경전들은 결코 단순한 읽을거리로 취급되지 않는다. 경전은 누군가의 마음에서 적어도 신앙의 응답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거룩한 책들을 대하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공경심은 인간의 언어보다 더한 것이 담긴 믿음을 드러내 준다. 이러한 아시아의 특성은 성찬례에서 참으로 살아 있는 신앙을 체험하는 데에 필요한 말씀에 마음을 여는 것과 잘 조화된다. 그러나 종교 분야 외에도 말은 아시아 민족들에게 많은 의미를 갖는다. 인간은 자기가 한 말에 진실해야 한다. 진심으로 한 말은 신뢰를 불러일으키고 관계를 증진시킨다. 마찬가지로, 특히 성찬례에서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대를 강화시킨다. 말을 주의 깊게 듣는 아시아 민족들의 자질이 말씀 전례에 적용될 때 우리 마음은 신앙과 사랑으로 불타오를 것이다(루카 24,32 참조).

침묵은 성경 독서가 선포될 때 공동체가 성령께 마음을 여는 데 도움이 된다.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며, 신자들의 마음은 성령의 지혜를 통해 변화된다. 묵상과 감사의 시간을 통해 우리 마음은 하느님 말씀으로 새로워진 신앙을 느낄 수 있다. 신앙 교육은 신자들에게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영성을 심어 주어 정의롭고 선한 행동으로 이끌어야 한다.

독서자는 하느님 말씀과 공동체에 알맞은 방식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독서하는 기술뿐 아니라 영성도 양성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말씀을 중심으로 모인 그리스도교 소공동체나 기초 공동체들이 증가하고 있기에 하느님께 찬미를 드린다. 그러한 소공동체는 이웃들을 만나거나 그들의 모임을 가질 때 하느님 말씀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개인과 공동체의 활동을 위한 식별의 원칙으로 삼는다.

강론은 신자들에게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신자들은 당연히 강론을 통해 생명을 주는 말씀에서 양식을 얻으리라고 기대한다. 강론자는 하느님과 공동체가 나누는 대화에 참여한다. 어떤 의미에서, 강론은 강론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에 공동체와 나누는 대화이다. 강론자는 사목 임무를 맡은 동료 신자로서 신앙을 증언한다. 기도하고 공부하고 묵상하며 공동체가 부딪히는 삶의 현실에 알맞게 준비하여 강론을 해야 한다. 강론자가 하는 삶의 증언은 그 강론의 효과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아시아의 변화하는 문화들은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약속하는 말로 넘쳐 나는데, 이러한 공허한 약속에 가장 취약한 희생자는 젊은이와 가난한 이들이다. 성찬례 거행은 우리 주변의 많은 말들 가운데에서 삶의 지표로 삼을 만한 말이 무엇인지 구별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가르친다. 강론을 통하여, 말씀의 식탁은 생명을 주는 말씀과 죽음을 퍼뜨리는 말들을 식별하는 배움터가 될 수 있다.

2) 공동 기억을 만들기(말씀을 다시 말하기)

성찬례에서 성경 독서들은 전례 주기와 축일에 따라 되풀이된다. 일정 시기가 지나면 독서는 반복된다. 일부 신자들은 같은 성경 본문을 되풀이하여 읽는 것을 지루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반복은 신앙에 꼭 필요한 것이다. 구원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위업에 관해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정보 전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확실한 안내자이신 성령과 함께 전해지는 살아 있는 기억이다. 듣는 이가 믿음 안에서 살아 있는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그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구원 활동에 대한 교회의 생생한 기억에 동참하는 것이다.

성찬 기념제는 최후의 만찬에 관한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말씀 전례는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하느님께 응답하도록 거듭 초대받는다. 그리고 기억으로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보다 앞서 기억하고 그 기억을 우리에게 전해 준 과거의 공동체와도 일치를 이룬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인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놀라운 위업을 기억하는 전 세계 성찬 공동체들과 친교를 이룬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여 같은 것을 기억하게 될 미래의 그리스도인 세대들과 이미 하나가 된다.

하느님 말씀으로 형성된 신앙은 단순히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 신앙이기도 하다. 기억을 받아 전달하면서 우리는 신앙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사회 과학자들은 가족과 씨족, 공동체, 국가, 심지어 기업의 생존과 강화에 공동 기억이 핵심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사람들이 보통 가족이나 공동체로 모여 식사하면, 그들의 이야기 또한 공동 기억이라는 ‘저장소’에 모인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래서 하느님 말씀은 신자들의 마음에 믿음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들을 주님께서 하신 선한 일들에 관한 공동 기억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 공동체로 만들어 준다.

- 사목 적용

아시아의 전통 사회는 전설과 설화를 들려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기억들은 씨족이나 부족 구성원의 일체감을 증진할 뿐 아니라, 공동체의 신원과 가치와 신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성년식에는 흔히 여러 시간 또는 여러 날 동안 공동체의 살아 있는 기억을 경청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러나 다양한 사회적 요인과 제약 때문에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더 이상 같은 기억을 지니지 못한다. 드물어진 가족 식사, 민족의 대거 이주, 무력 분쟁 희생자들의 이산 등은 공동의 기억 저장소에 이야기가 모이는 것을 크게 방해하는 현상들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지 못하고 있다. 공동체 기억의 일부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3) 말씀의 저자이신 하느님

모든 성찬 공동체는 과거와 현재의 그리스도인 세대들과 공유하는 공동 기억에서 기쁨과 위안을 찾을 수 있다. 하느님 말씀 덕분에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혼자가 아니다. 그러나 이 위안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세인들의 기억에서 지워진 이들, 곧 기억되지도 않고 기억할 수도 없는 이들을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잊힌 사람들과 연대하며 살아야 한다. 그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의 신앙은 그들이 언제까지나 하느님의 이야기와 기억의 일부임을 선포한다. 잊힌 이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한 감상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의 행위이다. 잊힌 이들은 하느님의 구원 기억 속에 언제나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참으로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하느님 말씀, 곧 구원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위업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의 말과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시편과 이사야서,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은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말씀 선포 뒤에 우리는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글이라는 형태로 담은 이들이 다윗과 이사야, 바오로를 포함한 여러 저자들임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그 글들이 각기 독특한 상황과 문체, 기질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들이 저자임은 사실이나, 우리는 신앙으로 인간이 쓴 글의 원저자가 하느님임을 알 수 있다. 성경에 영감을 주신 바로 그 성령의 인도를 받은 교회의 신앙도 하느님께서 참 저자이심을 알아보게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의 신비 앞에 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단순한 인간의 도구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전달하신다.

4) 아시아에서 억압받는 이야기

그처럼 중요한 신앙 경험 덕분에 우리는 다른 민족의 이야기를 통하여 전달되는 하느님 말씀을 끊임없이 경청한다. 경청에서 나오는 신앙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도구인 인간의 이야기와 말을 포함하고 있다.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 위협이 되고 있는 단순한 인간 이야기들이 억압을 받고 있다. 그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진실이 널리 알려질 경우 사욕을 채우지 못하게 되는 이들은, 그 진실을 두려워한다. 이야기를 억압하는 형태는 독재 통치, 미디어 탄압, 반역자로 낙인찍은 이들에 대한 체포와 살해, 선거 결과 조작, 역사서 개정 등 다양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하느님께서 전달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두려워한다. 성찬의 신앙은 우리에게 그러한 이야기들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심지어 공동 기억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준다. 시대의 징표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이야기가 그러한 인간의 이야기들을 통하여 우리 앞에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알게 된다.

5) 기쁘지만 위험한 행동(공동 신앙 고백)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응답한다. 주일과 대축일이나 축일에 말씀의 선포와 강론 다음에 신앙 고백을 한다. 이보다 더 나은 응답은 없다. 신앙 고백은 삼위일체의 구조를 지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초점을 맞춘다. 신앙 고백문은 성경 안에 이미 계시된 구원 경륜을 강조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과 믿는 이들이 맺는 살아 있는 관계를 증진하는 것이다. 신경에 나오는 정확한 교의는 교회가 정통 그리스도 신앙의 내용을 결정하여 제시하고자 수 세기에 걸쳐 식별해 온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신경은 우리를 초세기 공동체들과 묶어 주는, 교회가 지닌 공동 기억의 또 다른 형태이기도 하다. 과거의 교회와 미래의 신자들과 일치를 이룬 가운데, 성찬 공동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기쁘게 신앙 고백을 한다. 이 신앙 고백을 통하여 그들은 세상과 인간, 그리고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다진다.

- 사목 적용

하느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신경을 신자들에게, 특히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신경은 믿어야 할 진리의 조문으로 또 각자의 믿음에서 일어나는 인생관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러한 방식으로 제시된 신경에 관한 교리 교육은 그 내용을 경신례와 윤리와 통합할 수 있다.

애석하게도 일부 아시아 지역에서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위험한 행동일 수 있다. 신앙에 대한 객관적 근거를 부인하는 상대주의에서 나온 거부와 다양한 형태의 실천적 무신론은 차치해 두고라도, 우리는 종교적 불용으로 빚어지는 소요 사태와 종교 자유 무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박해에 직면해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 때문에 순교한 외방 선교사들과 아시아 순교자들은 신앙이 줄 수 있는 매우 놀라운 힘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그들의 삶과 증언을 알게 되면 매우 풍요로워질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억압하는 체제들과 타 종교인을 차별하는 종교 집단들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이 열망과 권리를 존중하도록 호소한다. 곧, 말과 예배와 생활에서 공공연히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하여야 한다. 우리는 또한 박해와 거부와 차별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타 종교인들에게 희망과 연대의 메시지를 보낸다.

6) 귀 담아 들어주시는 하느님께 간청하기(보편 지향 기도)

공동체는 이제 교회와 세상, 고통 받는 가난한 사람들과 공동체 자신의 필요를 하느님께 간청하는 기도를 드린다. 성경에 뿌리를 둔 교회의 영적 전통은 청원 기도를 신앙의 행위로 들어 높인다. 청원 기도는 피조물과 인류와 역사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당신의 섭리로 끊임없이 이끄시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울러, 청원 기도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가 늘 필요한 피조물이라고 스스로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그러한 삶을 지속하고자 생명의 원천으로 돌아설 때 비로소 우리는 인류 전체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 참 하느님을 인정하고 경배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청원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아 우리 공동체와 모든 사람의 친교를 드러낸다. 끝으로 보편 지향 기도에서 교회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뿐 아니라 귀담아 들어주시는 분,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말을, 사회에서는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선포한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대화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 사목 적용

아시아에서 경계해야 할 상황에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직적으로 침묵하게 만들고, 그러한 강압과 더불어, 사람들의 목소리를 마땅히 들어야 하는 이들이 고의적으로 스스로 귀머거리가 되는 일도 있다. 성찬의 신앙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말 못하는 이들에게 각별한 사랑으로 귀를 기울이시듯이 교회가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일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은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가장 먼저 사랑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나아가 교회는 아시아의 말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 교회를 통하여 그들이 부르짖는 간청이 하느님의 귀에 닿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다. 교회는 사회의 강자들이 약자들의 통곡을 듣게 해 주시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끊임없이 간청하여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말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려면 먼저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가난한 이들의 기도는 교회의 기도가 된다.

7) 불의한 세상 안에 있는 희망의 징표(예물 봉헌)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공동체를 영원한 생명의 말씀으로 먹여 살리신다. 이제 성찬례 거행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식탁으로 옮아간다. 예물 준비부터 감사 기도의 마침 영광송에 이르는 이 전례 부분을 희망의 삶과 연결 짓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인간 생명과 창조의 완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파스카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생명과 그 의미의 추구가 헛되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죄와 죽음을 이기신 하느님의 승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인된다. 우리의 희망은 소원이나 헛된 약속에 근거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참되고 지금 실현되고 있기에 우리는 희망할 수 있다. 흔히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상황들이 오히려 희망의 덕을 실천하고 증언하는 좋은 자리가 된다.

예물 준비는 피조물과 인간의 노동을 변화시키시는 예수님의 힘이 지닌 희망을 기린다. 사제는 빵을 들고 이렇게 말한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포도주를 바칠 때에도 비슷한 감사 기도를 드린다.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

빵과 포도주가 준비되는 동안 우리는 빵과 포도주가 창조와 인간 노동의 열매임을 깨닫는다. 그 열매는 모두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주시는 생명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성령의 힘으로 창조와 인간 노동의 이 상징들은 생명의 빵과 ‘구원 활동’이 되어 우리가 그 선물들을 인류와 함께 나누도록 촉구한다. 성찬례는 선물로 가득 찬 세상을 보여 준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선물을 구체적으로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나눠 주신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창조의 하느님만이 아니다. 빵과 포도주를 우리에게 마련해 주는 땅은 하느님의 협력자다. 땅의 열매를 빵과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인간의 손 또한 사랑의 위대한 행동과 은총의 나눔에 참여한다.

성찬례 거행 때 우리가 사용하는 소박한 빵과 포도주는 호화판 만찬의 식탁에 올리기에는 마땅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다른 식탁에 모인 것이다. 성찬례는 평범한 빵과 포도주에서 드러나는 선물의 순수성을 빛나게 하는 적절한 자리다. 성경은 하느님 은총의 활동이 작고 평범한 사람들, 그러한 민족이나 사건들에 미치고, 비천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준다고 증언한다(루카 1,46-55 참조). 성령께서 이처럼 소박한 예물에 주시는 변화는 피조물과 땅과 노동자에게 확실한 희망을 가져다준다. 그들의 예물은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 곧 세상과 인류를 재창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이 될 것이다.

- 사목 적용

성찬례는 삶이 곧 선물임을 깨닫도록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준다. 성찬의 삶은 우리에게 그러한 핵심 전망을 되찾게 해 준다. 세계의 많은 지역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도 삶이라는 선물 대신 편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 관계, 노동, 그리고 그 의미가 삶의 ‘상품화’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한 비극에서 흔히 무기력과 무의미가 나오게 된다.

피조물과 인간 노동도 마찬가지로 희생당하였다. 성찬례는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회복시키고, 우리가 피조물과 인간 노동을 소비 목적의 상품으로 취급하지 않고 선물로 존중하도록 이끈다. 피조물과 인간 노동을 경시하면 파괴와 죽음이 초래될 것이다. 피조물과 인간 노동은 선물로 인식될 때 비로소 창조주의 생명과 사랑의 징표가 될 것이다.

탐욕이 피조물에게서 신비를 앗아갔다. 이익 추구가 자연에 나타난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향한 두려움을 몰아냈다. 인간 노동은 세상을 관리하는 하느님의 협력자에게 마땅한 존경을 주지 못한다. 착취를 가장 많이 당하는 사회 계층이 노동자 계층이다. 정당한 임금과 품위 있는 노동 조건이 거부된 노동자들은 탐욕과 이윤의 제단에서 희생되고 있다. 땅이 하느님께 울부짖는다. 노동자들도 하느님께 울부짖는다. 성찬례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성령의 재창조 활동으로 땅과 인간 노동을 다시 변모시켜 주시리라 확신한다.

역설적이게도 빵은 우리에게 양식이라는 선물이면서도,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굶주리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빵은 또한 심각한 빈부 격차, 가난한 이들의 구매력을 훨씬 뛰어넘는 터무니없는 상품 가격, 그리고 일하는 부모들이 자기 가족에게 밝은 미래를 마련해 주지 못하는 무력감을 떠올리게 한다. 삶의 축제를 상징하는 포도주가 만취, 주정뱅이 남편에게 매 맞는 아내, 만취 폭력범의 희생자들, 악습으로 파산에 몰린 가정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은 참으로 곤혹스럽다.

그러나 성령의 활동에, 또 우리가 존중하는 단순함에 희망이 있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피조물이 치유된다는 희망이 있다. 성모님께서 희망의 증인이시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비천함을 굽어보셨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현존의 은총을 통하여 모든 세대가 성모님을 복되다 일컬을 것이다.

그리스도 교회들의 시급한 관심은 피조물 관리를 그리스도교 영성과 제자직의 핵심으로 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땅을 돌보는 일이 지구와 인류의 생존에 꼭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데 비해, 흔히 피조물 관리는 그럴듯한 대의명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된다. 교리 교사, 성서학자, 신학 교수, 영성 지도자, 사목자, 수도 단체, 소공동체들이 피조물 관리를 그리스도 제자직의 핵심으로 삼도록 교육하는 데 함께 협력하여야 한다. 우리가 피조물을 다루는 방식은 인간을 대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땅을 돌보는 데도 다른 신앙의 지혜와 실천에서 배울 것이 많다.

 

라. 감사 기도


1) 성찬 제정 이야기: 배반에서부터 자기를 내어 주는 섬김의 희생 제사까지

감사 기도는 감사송과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송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교회가 바치는 위대한 감사 기도의 알맞은 도입부다. 감사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만찬을 기억한다. 성령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를 화해시킨 그 희생 제사를 기억하고 ‘아버지께서 기억하시도록’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이시다! 같은 성령을 통하여 빵과 포도주의 예물은 우리 가운데 영원히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선물이 된다. 최후 만찬은 예수님의 죽음에 빛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기억할 용기가 있다는 점에서 교회는 칭찬받을 만하다. 교회는 당혹스러운 세세한 상황을 얼버무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렇게 선포한다. “당신이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드시고`……`”(감사 기도 제3양식 참조). 성찬 기념제는 인류를 치유와 정화의 기억으로 초대하여 우리가 사람들과 참된 친교를 이룰 수 있도록 힘을 북돋워 준다. 인류는 상처를 받았다. 그러기에 인류는 상처 받은 과거를 애써 잊고자 한다. 인류는 어지러운 기억들을 억누른다. 성찬례는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에도 용감히 맞서라고 가르친다. 모든 어두운 기억 속에서 우리는 배반의 밤을 화해의 새벽으로 변모시키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보기 때문이다. 수치스러운 기억들을 무시하거나 거부한다 해도 그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평화와 희망을 무너뜨릴 뿐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희생의 사명에 한결같이 헌신하셨음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미래 약속에 대한 기억들’로 꽉 차 있다. 성찬례는 예수님을 통하여 승리를 거둔 하느님의 사랑이 주는 희망으로 우리가 지난날의 어둠에 맞설 수 있게 해 준다. 예수님처럼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받아 주실 삶의 희생 제사를 봉헌한다면, 배반과 죽음은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한 생명의 샘이 될 수 있다.

세상은 갖가지 배반으로 갈라져 있다. 더 많은 부와 힘과 권력을 향한 경쟁으로 민족과 국가의 배반자들이 생겨난다. 생명에 대한 거짓 약속들에 그만 눈이 멀어 우리는 친구들의 선물을 보지 못한다. 희생자는 복수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섣부른 만족은 이내 쓰라림으로 바뀌고, 결국 배반을 낳을 따름이다.

돌아가시기 전날 최후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배반당한 당신의 목숨을 생명의 예물이 되게 하셨다. 그분의 예물은 어떤 사물이나 물건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의 몸과 피였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이 겪으실 굴욕적인 죽음이 참으로 생명을 주는 사랑의 봉헌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참된 생명과 구원은 다른 이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주는 자기 증여의 희생 제사에서 나온다. 자기를 내어 주면 다른 이들을 참으로 살게 해 주지만, 배반은 다른 이들을 죽인다. 그러나 자기를 내어 주는 것은 바로 그 사람에게도 생명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주는 행위 안에 자유와 사랑이 충만하고, 자기를 주는 대상에 훌륭한 대의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8). 성찬 신앙은 생명으로 가는 길이 자신의 야망을 위하여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이들의 선익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산 제물로 기꺼이 사랑으로 바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자유와 사랑으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자기 희생에서 우리는 비폭력의 윤리를 본다. 사랑은 남을 희생시키지 않고, 그 대신 자기를 내어놓는 것이다. 사랑이 승리했으므로 남을 희생시키지도 않는다.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 때에 우리는 요한 복음에 나오는 발씻김 예식을 재연하고 기념한다(요한 13장 참조). 예수님 시대에 발을 씻기는 행위는 가장 비천한 노예들이 행하는 것이었고, 사랑이 아닌 의무로, 때로는 무자비하게 강요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그 일을 하셨다.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신 것은 사랑의 행위일 뿐 아니라 섬김의 행위였다. 그분의 죽음은 지상에서 그분이 하신 섬김의 절정이었다. 스승이시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종이 되시어 제자들 또한 서로 발을 씻겨 주는 종들이 되게 하셨다(요한 13,13-15 참조).

- 사목 적용

감사 기도의 성찬 제정 이야기는 우리를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이 희망은 쓰라린 기억에 시달리는 이들과 배반으로 희생당한 이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보여 주셨다. 아시아 민족들과 국가들의 역사는 위대함과 용기, 지혜와 헌신적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억들을 살려 나가야 한다. 우리는 그 기억들을 세세대대로 선포해야 한다. 특히 배반과 분쟁을 겪어 온 아시아 국가들을 위하여 기억의 정화와 치유가 필요하다. 쓰라린 고통이 인간관계, 국제 관계, 공공 정책을 좌우하게 할 수는 없다. 성찬의 희망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치유 과정에 촉매제로 기여할 수 있다. 지역이나 대륙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주교, 신부, 수도자, 젊은이들의 모임, 교회 일치 회의, 종교 간 우의를 통하여 형성된 선의는 상처 받은 기억들을 달래 주는 향유와 같다. 이웃들과 평화의 정서를 키워 나가는 소공동체와 기초 공동체들이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우리는 가톨릭 학교와 교육 기관들이 젊은이들에게 정확하고 균형 잡힌 역사 교육을 하여 기억을 치유하는 데 도움을 주도록 촉구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증언하는 예수님의 자기 증여, 비폭력과 섬김은 아시아의 토양 속에 더 나은 인간 사회의 씨앗이 이미 존재한다는 희망을 되살리게 될 것이다. 변화는 이루어져 왔고 계속하여 이루어지고 있기에, 변화는 일어날 수 있다.

아시아 전역에 우려할 만한 폭력이 만연해 있음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가정, 학교, 거리, 예배 장소와 여가 장소 등 예외가 없다. 젊음과 미모의 숭배가 널리 확산되면서 그 추종자들은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노화와 죽음을 지연시키려고 한다. 게다가 군비 경쟁과 가난, 낙태, 가정 폭력, 마약과 환경 오염 등이 너무나도 쉽게 죽음을 퍼뜨리고 있다. 다른 이들을 살리고자 돌아가신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교회는 삶의 모든 단계에서 생명을 수호하고 생명의 정서가 우리 땅에 두루 퍼질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또한 날로 증가하는 섹스 관광과 장기 매매, 무분별한 실험, 매매춘, 인신매매, 우편으로 주문하는 신부 매매 등 인간의 몸을 모독하는 모든 행위를 우리는 개탄한다. 범죄 수사의 방법으로 인체에 상해를 입히는 것 역시 혐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한쪽 팔이나 다리, 눈을 잃은 이들을 보면 전쟁의 무자비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몸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한 선물이 되기에 존엄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셨다. 성찬의 희망은 우리가 사람의 몸, 특히 여성과 어린 소녀들의 몸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온갖 일에 저항하도록 촉구한다. 교회의 교육 임무와 교리 교육에 종사하는 이들은 몸의 고귀한 소명을 신자들에게 깊이 확신시키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기꺼이 더 폭넓게 대중과 공유한다면, 입법과 대중 매체의 관행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장애인들을 위한 활동도 강화해야 한다. 우리는 교만해지지 않도록, 이 모든 노력에서 바로 성령의 활동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2) 산 이와 죽은 이와 맺는 친교

우리는 감사 기도에서 성령 청원을 두 번 한다. 첫 번째 성령 청원은 봉헌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두 번째 성령 청원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신”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모두 한 몸”을 이루도록 예수님의 동일한 성령께 간청하는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룰 수 없다. 그러한 변화를 이룩할 수 없기에 교회는 오순절 성령의 활동에 의지하는 것이다(사도 2장 참조). 성령께서는 하나인 몸의 선익을 위하여 여러 지체에 다양한 은사를 부어 주신다(1코린 12장 참조). 성령께서 이루시는 친교는 지역 회중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인 성찬례와 한 분이신 주님의 한 성령에 힘입어 지역 공동체는 보편 교회와 친교를 이루게 된다. 우리의 일치는 인종적, 문화적, 경제적, 또는 정치적 정체성을 초월한다. 교황과 지역 직권자의 이름을 부를 때 그러한 보편적 친교를 증언하는 것이다.

감사 기도에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한 전구가 포함된다. 모든 성인의 통공에 대한 믿음을 마음에 떠올린다.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에 동참하고 있는 성인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성인들을 기억하며 우리는 우리의 지상 여정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리라는 희망을 불태우게 된다. 우리는 죽은 이를 기억하며 하느님 안에서 그들이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실재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성찬 친교는 죽음이 정해 놓은 인간의 한계마저 초월하는 것이다.

- 사목 적용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시아는 다양성 속에서 한 백성이 되는 새로운 방법을 계속해서 찾고 있다. 다양성이 분열과 갈등의 계기가 될 위험이 실재한다. 성찬의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공동체를 촉진하도록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는 새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아시아의 분열에 동조한다면 절망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살아 있는 희망은 우리가 교회 일치 대화, 문화 간 대화, 종교 간 대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도록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선물이 죽음이 세워 놓은 장벽마저 극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대륙에서 변화된 공동체를 희망할 수 있다.

우리는 죽은 이를 기억하면서 아시아에서 다양한 형태의 폭력으로 희생된 많은 이들이 이름도 없이 잊혔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찬례에서 죽은 이를 기억하는 것은 망각 속에 묻혀 버릴 희생자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를 간청하는 것이다. 성찬의 희망은 특히 고난 중에 예수님과 하나 되는 이들을 잊지 않는다. 그분은 희생을 승리로 바꾸셨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이들에게 희망을 가질 이유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기억하시고 지상에 정의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우리는 고난 중에도 충성하여 하느님 현존의 기쁨을 누린 아시아의 성인들에 대한 기억으로 삶을 지탱하고 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하느님 아버지께 “아멘”을 외친다. 아버지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성자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기에 모든 영예와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하다.

 


마. 영성체 예식


1) 친교와 평화인 사랑(주님의 기도와 평화의 인사)

성찬례 거행의 그 다음 절정은 영성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이다. 말씀의 식탁과 몸과 피의 식탁은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탁월한 은총으로 이끌어 우리가 그분과 친교를 이루며 살게 한다. 친교는 사랑이다. 공동체는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린다. 라틴 예법에서는 주님의 기도 다음에 평화의 인사를 한다. 다른 예법의 전례에서는 그 위치가 다르지만, 평화의 인사가 친교와 사랑의 행위라는 온전한 의미는 그대로 담고 있다.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신 것은 예수님만의 고유한 특성이었다. 이러한 호칭은 경배의 대상이신 하느님께 친근하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하느님의 실재적인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셨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아버지와 예수님께서는 서로에게 속하신다. 아버지와 예수님께서는 성령이라 불리는 상호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서로에게 온전히 내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도 하느님을 그들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마태 6,9-13 참조). 그러나 우리는 성자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시는 성령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아빠’로 부를 수 ?獵?로마 8,15-16 참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영성체의 효과는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헌신과 사랑과 친교의 하느님이신 성삼위의 내적 생명 안으로 우리 존재를 들여놓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 특히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아버지라고 믿는다. 예수님께서는 영성체 때 우리에게 곧 주어질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시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속한다는 것은 하느님 가족 안에서 하느님의 다른 자녀들에게 속한다는 것이며, 그들과 함께 빵을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한 하나의 신앙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서로 형제자매가 된다(갈라 3,26-29; 1코린 12장 참조). 참다운 이웃 사랑 없이는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바오로 성인은 공동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식별하지 못하고 성찬의 희생 잔치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는 것은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코린 11,29 참조).
주님의 기도 다음에 나누는 평화의 인사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이다. 평화는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도 평화를 줄 수 있게 하신다. 아버지와 이웃에게서 평화를 받은 우리는 우리의 평화이신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한다(에페 2,14-16 참조). 그리스도의 평화는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고 또한 서로 화해하도록 한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갈라놓는 적대적인 장벽을 무너뜨리신다(에페 2,14 참조).

- 사목 적용

성찬례에서 우리가 믿고 거행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친교를 이루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 없는 친교는 없다. 화해 없는 평화도 없다. 이러한 사랑의 추구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아시아의 모든 문화와 신앙에서 우리는 가정생활의 굳건한 전통 위에 서 있다. 아시아 가정을 강화하는 교회 안팎의 노력은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표징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가정을 파괴하는 세력을 잘 알고 있다. 가난, 전쟁, 부모의 폭력, 악습 등이 사랑의 친교를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사회라는 넓은 가정 안에도 공격, 대립, 경쟁, 불용이 존재하고 있음을 본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평화롭게 살려면 아시아 사회에 화해와 자비와 용서가 절실히 필요하다. 교회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간을 당신과 화해시키시고 인간이 서로 화해하기를 바라시는 그 사랑의 재촉을 받아 아시아의 평화 건설에 힘을 보탠다.

2) 넘치는 사랑(영성체)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간청했다. 아버지께서는 앞으로 올 하늘 나라를 향한 우리의 여정에서 일용할 양식, 곧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고백한 다음에 감히 성찬의 식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초대 곧 자비와 연민의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께 다가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는다. 환대하시는 주님의 사랑은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어 주님과 하나 되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키운다. 우리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고귀한 바람은 없다.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이제 그분을 사랑하고 우리 마음에 간직한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 이웃을 사랑한다.

정의의 규범을 엄격히 지킨다면, 이러한 친교는 우리에게 과분한 것이다. 우리는 바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차고도 넘치는 사랑을 맛본다. 우리는 이러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보답으로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을 흠숭한다. 감사는 이제 사랑하려는 우리의 바람을 깊게 한다. 아버지에게서 내려오신 빵인 예수님을 받아 모신 우리는 예수님을 다른 이들, 특히 사랑이 결핍된 이들과 함께 나눈다.

아시아는 풍부한 자연 자원과 많은 인재의 복을 받았다.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의 무절제한 탐욕이 식량 부족을 야기하여 많은 사람들이 궁핍을 겪고 있다. 아시아의 많은 가정과 지역에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외침이 울려 나온다. 성찬의 사랑은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따라서 우리도 그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행동하도록 한다. 또한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여 노력하면서 우리는 사랑과 연민이 넘치는 사회를 건설하는 이들을 위한 양식인 하느님 말씀을 그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임무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랑으로 움직이는 우리는 우리 시대의 그릇된 욕망과 독이 든 빵에 대한 탐욕을 서슴없이 비판할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성공하고 성취해도 사랑에 대한 인간의 굶주림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시아의 많은 부자들이 사랑과 우정을 갈망한다. 그래서 우리가 성찬례에서 예수님을 모시듯이 우리 또한 가난하고, 외롭고, 버림 받고, 지치고, 박해받는 이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을 환대한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그들의 것뿐만 아니라 참으로 우리의 것인 우리의 사랑과 생명을 주어야 한다.

3) 사랑의 양식에 대한 “아멘!”: 선교를 위한 헌신

영성체 후 기도를 드리고 나면 마침 예식에 이르게 된다. 이 예식은 단순히 전례를 마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회중을 해산시키는 것도 아니다. 이는 파견이다. 이는 전례 신학의 아름다운 발전으로, 이를 통해 단순한 예식이 “선교의 계기”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수확할 당신 밭에 선교사들을 파견하신다. 새로운 가족을 모으시는 하느님께서 이제 그 가족을 참으로 수확할 것이 많은 포도밭에 당신 일꾼으로 보내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 곧 앓는 이들, 죽은 이들, 나병 환자들, 마귀 들린 이들에게 사도들을 파견하신 것(마태 10,6-8 참조)에서 영감과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커다란 수확은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버림 받은 이들이다. 이들은 교회의 참된 재산이다. 성령께서는 모든 성찬의 공동체가 그들에게 가도록 이끄신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서 열매를 맺도록 뽑힌 사도들처럼(요한 15,16 참조) 교회도 많은 열매를 맺도록 파견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요한 15,4 참조). 하느님 안에 머물도록 부름 받은 이가 하느님께 파견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선교의 신비이다. 우리는 가면서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 안에 머물면서 간다. 이는 예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명에 참여하여 그 사명을 성취하는 길동무가 되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성찬의 삶은 무엇보다 당신 구원 계획의 증인으로 우리를 파견하시는 하느님께 더욱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부르심에 열정적으로 응답하고 하느님께서 파견하시는 곳이 어디든 기쁜 마음으로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열성을 가지고 아시아의 넓은 세상에 사는 수많은 가난한 이들, 지친 이들, 보잘것없는 이들을 풍성하게 수확하러 가야 한다. 이들은 나쁜 소식만 들어 왔다. 그중에는 자신의 삶이 나쁜 소식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는 사랑으로 구원받았다.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우리의 성찬 신앙이 우리 마음을 선교 열정으로 타오르게 하는가? 선교가 우리를, 특히 우리 젊은이들을 움직이게 하고 재촉하는가? 우리는 어떤 훌륭한 ‘대의’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는가?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그들에게 선포된 기쁜 소식을 듣게 되는(루카 7,22 참조) ‘수확’이 아니라, 개인주의적이고 유물론적 체제가 약속한 ‘수확’에 더 매료되어 있는가?

우리는 교회가 선교하는 이유가 세속적 정복이나 야망 때문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 성찬례가 선교이다. 성체성사가 예수님의 현존이다. 성체는 직접 사랑하시고 봉사하시는 예수님이시다.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성찬 봉헌,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발견한 기쁨, 그 생명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할 의무, 이것이 우리를 선교하도록 재촉한다.

4)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명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증언하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셨다. 요한 사도는 그러한 증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1요한 1,1). 사도는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져 보았기에 그분을 증언할 수 있었다. 성찬례 때 우리는 모여 공동체 안에 계시는 하느님 현존을 만져 보았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고 희망을 품고 그 말씀을 기억하였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희생 제사를 통하여 피조물, 인간 노동, 고통스러운 기억에 주어진 희망을 경탄하며 바라보았다. 우리는 사랑과 평화로 가득한 생명의 빵을 맛보았다. 우리가 보고, 듣고, 바라보고, 맛본 것을 이제 우리는 증언한다. 성찬례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은총으로 체험한 그 생명을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는 사명을 받는다. 영성과 관상과 사명이 만나게 된다. 성찬례에서 체험한 기쁜 소식은 나누어야 한다. 우리가 받은 선물은 우리가 만난 주님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어야 할 책임을 동반한다.
- 사목 적용

모든 성찬례 거행은 그 선교 촉구로 교회를 새롭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간직하고 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이다. 교회가 자신의 사명에 충실할 때 비로소 그 정체성을 바르게 보존할 수 있다. 성찬례에서 우리는 아버지께서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예수님을 파견하신 것처럼 우리를 파견하시는 예수님을 받아 모신다(요한 20,21 참조).

교회는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 소수이지만 예수님이라는 선물을 다른 이들과 계속 나누고 있다. 이것이 교회의 삶이다. 그리고 성찬례 거행은 교회의 선교 생활에 힘을 준다. 명시적인 선교 활동이 금지된 곳에서 교회는 침묵하는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고 또 증언해야 한다. 우리의 기쁨, 단순성, 연민, 친교의 자질이 예수님의 진리를 강력하게 증언한다.

하느님 말씀은 묶어 둘 수 없다. 아무리 미약하고 힘없는 증언이라 하더라도 거기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복음의 불길은 막을 수 없다. 우리는 수없이 어려운 정치적 종교적 상황에서도 신앙을 위하여 묵묵히 고난을 감내하며 영웅적인 증언을 하는 많은 아시아 사람에게 크게 경탄하며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들의 증언은 성체성사 안에 계신 주님의 권능과 현존을 말해 주고 있다. 숨어서 거행하는 성찬례나 신령성체를 통하여 성체는 그들을 위로하고 그 놀라운 그리스도 증언에 힘을 북돋워 준다.

아시아의 많은 사람과 공동체는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찾는 그들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진리의 증언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고향을 떠난 이민들, 끊임없는 폭력 속에서 살아가는 여자들과 아이들, 붕괴된 가정들, 무고하게 체포 투옥된 이들, 심신 장애인들, 자살을 생각하는 이들이다. 교회는 그들에게 파견된다.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새로워진 교회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 준다. 그 몸의 모든 지체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공동 사명에 참여한다.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부모는 부부 상호 간에, 그리고 그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인이 된다. 젊은이는 자기 또래들에게 그리스도를 발견한 기쁨을 전하는 선교사가 된다. 또 국가 관리들은 예수님께서 모범으로 보여 주신 사랑의 겸손한 봉사를 증언해야 한다.

선교의 증언을 하도록 부름 받은 아시아 교회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자신의 신빙성을 검증해야 한다. 종교 교육 기관들과 교육자들이 지행합일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 대륙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공동 증언의 자질을 검증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성찬례에서 거행하고 받은 대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교회는 성찬례에서 참된 사명을 배운다.

5) 현존의 약속과 선물

우리가 받은 사명을 수행하러 갈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신다고 믿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첫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당신께서 교회의 사명 안에 언제나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현존의 약속은 전례 거행이 끝난 다음에도 성체의 형상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참된 현존이다. 예식이 끝나도 현존의 선물은 남는다. 그래서 예식이 끝난 다음에도 성체를 병자에게 모셔다 줄 수 있고, 성찬례를 거행한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성체 조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명 안에 함께 계시겠다는 현존의 약속은 성체 안에 계신 현존의 선물로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당신께서 사명을 주어 파견하신 이들에게 하신 현존의 약속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받는다. 성체성사의 영성에서 조배와 선교는 함께 나아간다. 참다운 선교는 조배로 이끈다. 참다운 조배는 선교로 이끈다. 현존의 이러한 약속과 선물은 교회가 거친 길을 가고 험난한 항해를 할 때 교회를 떠받쳐 준다.

언제나 성체와 사명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은 우리 이웃들, 특히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병들고, 감옥에 갇히고, 외롭고, 버림 받고, 희생당한 이들(마태 25,31-46 참조)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깨우쳐 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은 피조물과 역사적 사건들 위에 휘돌고 있다.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언하면서 우리는 또한 가난한 이들, 피조물, 역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바라본다. 선교는 관상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선교적 관상에 몰입할수록 신비를 전달하는 바로 그 표징들이 그 신비를 완전하게 포착하지 못하여 흔히 그리스도의 현존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의 죄,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포함한 인류의 죄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자녀들의 자유가 완전히 드러나는 것을 보려고(로마 8,19 참조) 갈망하게 만드는 ‘가려진 현존’의 긴장 속에서 우리의 선교와 조배가 이루어진다. 한편 우리는 이미 받은 선물이고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약속인 예수님의 현존에 힘입어 그 선물과 약속을 우리 것으로 삼고자 더욱 노력한다(필리 3,12 참조).

 


바. 결 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역사 안에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표징과 선교를 통하여 드러낸다. 아시아에서 교회의 선교 증언은 성찬의 삶을 사는 방식이다. 성찬의 삶에는 1) 분열에 맞선 증언으로 하느님의 가족이 되기, 2) 우리의 죄를 깨닫고 하느님을 알기, 3) 인간의 이야기 안에 있는 예수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4) 공동 기억을 만들기, 5) 위험을 무릅쓰고 기쁘게 신앙을 고백하기, 6) 하느님께서 들으시는 방식으로 말 못 하는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기, 7) 상품화된 불의한 세상에서 창조의 선물을 찬양하기, 8) 배반을 자기를 내어 주는 섬김으로 바꾸기, 9) 산 이와 죽은 이와 함께 친교를 이루기, 10) 평화롭게 살기, 11) 예수님의 넘치는 사랑에 깊이 감사하기, 12) 수확할 것이 많은 하느님의 밭에서 선교사로 일하기, 13) 예수님을 용감하게 증언하기, 14) 영원한 잔치의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안고 확신에 찬 여정을 걷기 등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성찬례에서 받은 삶의 형태다. 아시아에서 우리는 이러한 삶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한다. 성찬례의 역동성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리듬이 된다. 성체성사가 교회를 이룬다. 성체성사는 교회의 삶이다.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는 당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체험하시고 당신 아드님의 제자로 사셨다. 새로운 계약의 궤로 찬미받으시는 그분은 교회의 모범이시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하시는 성모님께서는 커다란 사랑과 희망을 안고 끝까지 당신의 아드님을 따르신 성체의 여인이시다. 성모님께서는 이제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현존 안에 당신 아드님과 함께 살고 계신다. 성모님께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며 우리가 모두 영원한 생명의 잔치에 참여할 때까지 교회와 세상을 위하여 전구하신다.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이시기에 성체의 삶을 사셨다. 생명의 모후이시며 아시아의 모후이신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이제와 영원히 빌어 주소서!

 


사. 사목 제안


1. 성찬의 삶을 위한 교육

1.1. 성찬례와 일상생활에서 성체성사의 의미에 관한 통합적인 교리 교육, 신앙 교육, 전례 교육이 교구와 본당, 소공동체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1.2. 사회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쉽게 마련할 수 있는 곳에서는 교리 교육과 신앙 교육을 위하여 마을의 경당에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설치해야 한다.
1.3. 소공동체나 기초 공동체는 성찬의 공동체가 되어 더 큰 공동체들과 함께 변화를 일으키는 사랑의 봉사를 서로 나누어야 한다.
1.4. 신학교 교육에서 성찬의 삶과 생활 양식을 강조하여야 한다.

2. 성찬 거행과 주님 조배

2.1. 신자들은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로 침묵과 관상 훈련을 받아야 한다.
2.2. 성체 조배를 위한 경당을 마련하고 ‘성시간’(Holy Hour)을 가지는 관습을 널리 장려해야 한다.
2.3. 신자들은 알맞은 어린 나이부터 성체 공경을 배우고 거룩함에 대한 깊은 감성을 키워야 한다.
2.4. 전례의 토착화는 교도권의 가르침에 따라 지역 주교의 현명한 지도로 촉진되어야 한다.
2.5. 본당 사목구들은 사목자들의 지도와 전례위원회의 협조를 통하여 성찬례를 더욱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거행하여야 한다.
2.6. 주교들과 신부들은 강론을 잘 준비하고 그 전달 수준을 높여야 한다.
2.7. 보편 지향 기도는 더 큰 공동체를 포괄하고 상황에 맞는 것이어야 한다.
2.8. 혼인 미사와 같은 경우에 미사 거행에 참여하는 비가톨릭 신자들에게 성체를 분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정중하고 친절한 태도로 설명해야 한다.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환대할 수 있다.

3. 성찬의 삶

3.1. 주교와 신부는 신자들에게 성찬례 거행의 열매로서 전통적인 물질적 자선 행위를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3.2. 신자들이 미사 때 내는 헌금의 일부는 자선을 목적으로 사용하여야 한다.
3.3. 용서와 화해와 평등을 이루는 본당 공동체의 형성은 성찬의 삶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
3.4. 사제들은 모든 이를 환대하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성찬의 자세로 사랑과 봉사의 성찬의 삶을 살아가는 모범이 되어야 한다.

4. 선교 지향

4.1. 교리 교육과 신앙 교육 계획에는 개인주의, 물질주의, 편견과 불평등을 극복하는 가치 교육 과정이 들어 있어야 한다.
4.2. 교구와 본당 사목은 임신[受精]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수호하고 증진하는 일에 협력해야 한다.
4.3. 희생자들, 착취당하는 여성과 어린이와 청소년, 외로운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가난한 사람, 노인들을 위한 상담을 포함한 사목적 배려에 적절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4.4. 젊은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언어로 말하며 그들의 특별한 요구에 부응하는 사목이 이루어져야 한다.
4.5. 주교회의는 교회 간 종교 간 협력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폭넓은 사회 안에서 화해와 평화 건설을 적극 촉진하여야 한다.
4.6. 우리는 각국 지도자들에게 군비 경쟁의 종식을 호소하여야 한다.
4.7. 주교회의와 교구는 피조물 관리에 초점을 맞춘 사목 계획을 세워야 한다.


<원문 Federation of Asian Bishops?Conferences, The 9th FABC Plenary Assemb1y Final Document Living the Eucharist in 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