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회

수도생활에 대하여

2 수도생활의 역사

2.1 금욕자와 동정녀들

우리 교회에 처음으로 수도회가 생긴 것은 대략 3세기 말~4세기 초이다. 그렇지만 그전에 수도생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는 교회에서 인정한 수도회의 회원만을 수도자라고 하는데 이것은 너무 법률적으로만 본 견해이다. 본질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볼 때에는 개인적으로 복음적 권유를 지키는 사람도 수도자로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과 성모님은 모든 수도자들의 원형이고 모범이며, 그리스도의 선구자 성 요한 세자도 수도자였다. 독신을 선포한 성 바오로는 틀림없이 수도자였고, 예수의 많은 제자들은 결혼한 사람이었으나 여러 모로 수도자와 같은 생활을 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소유를 공유했다니 적어도 이 방면에 있어서는 수도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모두 일심으로 모여 함께 지내며 가진 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쓰고, 전답과 가산을 가진 자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 발 앞에 갖다놓고,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다”(사도 2,44; 4,35). 마찬가지로 동정을 지킨 처녀들은 교회 초창기부터 있었다는 것을 사도행전 21,9의 필리포스의 딸들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명시해 주고 있다. 이 동정녀들은 초창기 교회에서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남자들 중에 독신을 지키고 극기와 기도의 생활을 하는 분들은 아스케테(ascetae=금욕자 혹은 수덕자)라고 불리었다. 초창기에는 이런 남녀들이 집을 나와 따로 살지 않고 자기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살면서 덕을 닦았다. 그런데 이미 3세기 초부터 동정녀들은 교회 앞에서 공식으로 천국을 위한 독신의 서약을 하는 관례가 생겨, 그들은 교회 안에서 하나의 특수한 신분을 갖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차차 동정녀들이 한데 모여 사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세속사회를 떠난 것은 아니고 또 특별한 복장도 갖추지 않고 여러 곳에서 살았다. 그 시대에는―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신교의 자유를 주기 전―교회가 거의 계속적으로 박해를 받아왔기 때문에 일반 세속에서의 신자생활에도 영웅적인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그래서 열심한 신자들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표시하기 위하여 세속을 떠나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이들 금욕자와 동정녀들 중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났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박해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사막으로 피신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는 한적한 사막생활에서 하느님과 보다 쉽게 통교(通交)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계속 사막에 머물러 살았다.

2.2 광야의 은수자

이와 같이 처음으로 일부 사람들이 광야에서 수도생활을 하게 된 계기는 박해였으나 그렇다고 은수생활의 원인이 주로 박해에만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3세기 말부터 마음 놓고 평화롭게 살 수 있었던 사람들도 자의로 도시를 떠나 광야에 은거하여 사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을 엄밀한 의미에서 수도자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옛 교회의 동정녀들과 금욕자들은 세속사회를 떠나지 않고 외관상으로는 일반 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하였으나, 은수자들은 아주 특수한 생활로써 분명히 일반 신자들과는 다른 신분을 형성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속세를 떠나 특수한 생활을 하는 것이 수도생활의 특징이 되었다.

은수자들 중에 가장 유명한 이는 성 안토니오(251년경~356년)이다. 그가 문자 그대로 첫 독수자는 아니었으나, 그의 영향이 제일 컸기 때문에 그를 은수생활의 창시자 및 모든 수도자들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안토니오는 부유한 집안의 귀한 아들로 태어났으나 20세 무렵에 보모를 여의었다. 그때에 성당에서 “가서 가진 바를 팔아 빈궁한 자에게 준 다음에 와서 나를 따르라” 한 복음의 말을 듣고 감동되어 재산을 정리하고 누이동생을 동정녀들에게 맡긴 다음 세속사회 생활을 떠났다. 처음에는 고향 가까운 곳에서 어떤 독수자의 지도를 받았다. 그 후 홀몸으로 외딴 무덤 굴에서 지냈으며 이때에 마귀의 많은 유혹과 혹독한 공격을 받았다. 다시 거기를 떠나 사막으로 나가서 어떤 고성(古城)의 폐허에서 속세와 완전히 절연된 폐쇄적 생활을 했다. 이렇게 수십 년을 지냈는데 그 거룩한 덕성의 소문이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안토니오는 병을 기적적으로 고치는 은사와 정신 식별의 은사를 받았었다. 그리고 그의 표양을 본받으려는 사람도 많아졌고, 그들은 그의 훌륭한 강론을 듣기 위하여 근처에서 은수생활을 하며 그의 제자가 되었다. 311년 박해 때에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감옥의 신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시중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좀 더 조용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이집트 나일강 동쪽에 있는 산으로 가서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의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었다. 그러나 335년경에 또 한 번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아리우스파를 반박하여 예수님의 천주성을 선포한 일이 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순방하여 훈계한 다음 105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성 아타나시오가 그 생애를 저술함으로써 수도생활의 이상(理想)은 곧 유럽에까지 전파되었다.

성 안토니오와 같은 독수자들의 생활은 지극히 엄격했다. 하루 겨우 한 끼만 그것도 아주 검소하게 먹었고, 잠도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자고, 자주 기도로 밤을 새웠고, 옷도 매우 너절하게 입었으니, 이것은 그들의 생활에서 필수적 조건들이었다. 그들의 주요 일과는 시편 외움과 묵상기도였으나, 한가함을 피하고 양식을 사거나 애긍을 줄 수 있도록 부지런히 노동도 하였다. 그들이 한 일은, 한 사람이 혼자서 잘 할 수 있고 또 정신을 분산시키지 않는 일, 주로 멍석이나 바구니를 짜는 일이었다.

이러한 유거(幽居)와 고행의 생활은 힌두교나 불교 승려들의 생활과 유사한 점이 많아서 이집트의 수도자들이 동양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 학자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사료에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의 사상과 동기는 순전히 성경과 그리스도교적 전통에 의거한 것이다. 그들은 분심 없이 하느님을 섬기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는 것과, 모든 욕심을 깨끗이 떨쳐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으며, 가능한 한 천상생활과 비슷한 생활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직접 절대자에게로 나아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타종교에서 속세를 떠나 절대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점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의 상상하기도 어려운 고행은 정각(正覺)에 이르는 방법이라기보다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발로였다.

은수생활은 특히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주로 이집트와 팔레스티나 그리고 시리아 지방에서 많이 유행되었다. 그 명백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당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어 많이 속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안일한 생활을 피하려는 사람들은 광야로 나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고행으로만 영웅적인 순교자들의 증거와 생활양식을 계승하여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사막과 산악지대는 이런 은수생활에 적합하였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교회 안의 독수생활은 매우 적어졌다. 오늘날에 와서는 순수한 독수자는 아주 드물지만 반(半) 독수생활을 하는 까르투시오(Ordo Carthusianorum)회는 교회 안에서 제일 엄격한 수도회로 유명하다. 성 브루노가 1084년에 세운 이 회에서는 수도자들이 봉쇄구역 내에서 각각 독립된 자기 집에서 홀로 살면서도 하루 세 번 성당에 모여 공동기도를 바치고, 또 주일과 축일에는 공동식사를 하고 휴게를 겸한 대화시간을 가진다.

2.3 회수도자, 집단수도자

독수도생활과 시대를 같이하여 집단수도생활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본래 도시에 자리 잡던 금욕자들의 공동체들이 4세기에는 은수자들의 영향을 받아 광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한 것 같다. 이 시대의 독수도생활과 집단수도생활의 공통점은 은둔생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반(半) 독수도생활의 현상도 특히 이집트와 팔레스티나에 발달하였다. 그것은 여러 독수도자들이 서로 가까이 살면서 매주일 한번 미사성제와 철야기도를 지내며 중요한 일을 같이 의논하고 많은 경우 거룩한 독수도자의 지도를 받았다. 이미 은수생활의 초기에 훌륭한 독수도자들은 대개 한두 제자들을 받아들여 자기 토굴이나 움막집에서 함께 지내는 일이 많았다. 이것이 점차 독수도자들의 취락(聚落) 같은 것으로 발달하였다. 이런 생활을 “라우라”나 반독수생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독수도자들의 모임과 성질이 다른 본격적인 집단수도생활(회수도생활)을 처음으로 조직한 분은 성 파코미오(Pachomius, + 346)이다. 이분도 이집트 사람으로서 먼저 얼마동안 독수생활을 했지만 그는 곧 제자들을 모으고 대단히 질서정연한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의 이상은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형제적 공동행활(“코이노니아”)이었다. 그분이 사상 처음으로 수도규칙을 써서 수도자 각 개인에게나 곧 1,000~2,000여 명의 수도자들이 사는 몇 개의 수도원으로 구성되는 수도회에 교훈과 규정을 마련하였다. 그가 규정한 질서는 군대식 색채를 띠고 있었으나 절제가 있고 모든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였다. 노동이 큰 역할을 한 그의 수도원에서는 수도자들이 각자의 직업에 따라 20~40명씩 여러 집에 나뉘어서 살았다. 하루 두 번 식사를 같이 하고 아침저녁에는 한데 모여서 공동기도를 드렸다.

회 수도자의 대표적 덕행은 순종이다. 독수자들도 순종을 모른 것은 아니다. 어떤 수도자는 “아빠스(Abbas)”라고 부르는 스승에게 자기 자신을 완전히 예속시켰다. 마르코라는 수사는 나뭇가지를 거꾸로 심으라는 명령까지 이행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자발적인 덕행이었다. 회수도자에게는 순종이 그 생활의 필수적 요소이다. 독수도자들은 “자신을 끊어라”(마르 8,34; 마태 16,24; 루카 9,23)는 예수님의 명을 주로 육신적 고행으로 이행하려고 했다. 즉, “자신”이란 말을 자기 몸으로 이해했었다. 그러나 회수도자들은 (많은 독수도자들도 그렇지만) 이 말의 뜻을 더 깊이 파악하여, 무엇보다 개인의 이기적 의지를 끊어야 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독수도자들은 차차 드물어지고 회수도자들의 수가 날로 늘어갔다. 그러나 독수도자의 지위는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여겨져 교회에서 언제나 많은 존경을 받아 왔다.

회 수도생활을 논하려면 성 바실리오(Basilius,+379)의 이름을 뺄 수 없다. 성 파코미오는 고대 수도제도의 조직자이고 성 바실리오는 그 신학자이다. 그는 소아시아 체사레아의 주교로서 공주(空株) 수도제도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신학적으로 논증하였다: “수도원은 그리스도교회의 작은 전형이며 수도단체는 성령의 작용으로 생활하는 산「生」그리스도의 신비체이다”라고.

신앙 상 영육간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뿐 아니라 오직 신약의 새 계명, 즉 애․인․덕(愛․仁․德)을 실천하기 위해서도 공동생활은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완덕의 이상은 단체 내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 안에서만 희생적이요 겸손되이 봉사하는 애․인․덕을 실천할 수 있다. 성 바실리오는 수도원을 예루살렘 초기교회의 완전한 묘사로 보았다. 그는 동방의 수도원들은 순회한 다음에 비교적 개방된 수도원을 세웠다. 그의 수도원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등 여러 가지 자선사업도 하였다.

이 회 수도생활은 여자들도 쉽게 세속을 떠나 생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때까지 동정녀들은 꽤 자유롭게 살았고 여자의 독수생활은 거의 불가능했었으나, 성 파코미오 자신이 여동생을 위해 규칙을 만들어 수도원을 세워준 후부터 여자들도 수도생활을 남자 못지않게 실천했다.

2.4 성 베네딕도

위에서 말한 것은 주로 동방(지중해 세계의 동쪽)에서 발전한 수도생활이다. 그런데 특히 성 아타나시오의 소개와 선전으로 이집트의 수도자들은 서방(유럽)에도 알려지고 신심 깊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서방의 수도생활 창설자로서 제일 먼저 이름난 분은 성 마르띠노이다. 그의 수도생활은 이집트 수도생활의 색채를 띠고 독수도자와 회수도자 제도를 혼합한 것이다. 그가 프랑스 투르(Tours) 주교로서 397년에 별세하였을 때 2000명의 수사․수녀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수도원 사이에 긴밀한 연락이 없었고 다만 각 수도원에서 아빠스가 정하는 대로 한 규칙을 지켰다. 예컨대 어떤 수도원에서는 성 파코미오의 규칙을, 또 다른 수도원에서는 성 바실리오의 규칙을 지키는 등 각양각색이었고, 어떤 곳에서는 여러 규칙을 혼합해서 지켰고, 어떤 수도원에서는 아빠스가 모든 것을 구두로 정하였다(특히 창설자인 경우에 그랬다. 예를 들면 성 마르띠노). 그런데 성 베네딕도의 규칙이 나타 난 후로 이 규칙이 제일 높이 평가됨으로써 자유로이 규칙을 꾸미던 경향은 차차 없어지게 되었다. 8세기 말부터 13세기 초까지 거의 모든 수도원에서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지키게 되었다.

성 베네딕도는 480년경에 이탈리아 누르시아(Nursia, 현 Norcia)란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에서 시작한 공부를 중단하고 처음 얼마동안은 엄격한 독수도생활을 했다. 그다음에 자기의 지도를 받으러 온 제자들을 조직하여 먼저 수비아꼬(Subiaco)에서 몇 개의 작은 수도원, 그다음 몬떼까시노(Monte Cassino)에서 베네딕도의 보금자리가 될 대수도원을 세웠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이 그렇게 높이 평가되고 성공을 거둔 것은 그 “신중성”과 “중용” 때문이다.

이 성인이 새로 제정한 것은 특히 정주(定住)이다. 이 원칙에 따라 수도자는 한번 들어온 수도원에서 서원하면 다시 다른 수도원으로 옮겨갈 수 없다. 이같이 각 수도원은 자립적 가정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성 베네딕도는 그 당시 유랑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을 배척하였다. 이 원리를 취하여 서방교회의 모든 수도회는 비록 한 집에서 정주하지 않는 경우라도 같은 회 안에 머무르는 것을 교회법에 의해서도 요구된 원칙으로 지키고 있다. 불교 승려들은 이와는 달리 옛날 수도자와 같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자유로이 옮겨갈 수 있다.

성 베네딕도는 수도회를 세우지는 않았다. 각 수도원은 독립하여 스스로 선출한 아빠스 밑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세속적 권세에 대해 수도원의 독립을 보장하고 규율의 준수를 촉진하기 위하여 많은 수도원들이 서로 연락을 가졌다. 이와 같이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지키는 수도원들의 연합으로 성 베네딕도의 수도회(O.S.B), 시토회(O.Cist.), 트라피스트회 등 여러 수도회가 생겼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지키는 여자 수도회는 더 많다. 그중에서도 역사가 오래된 수도회는 순수 관상생활을 하며 엄격한 봉쇄를 지킨다.

성 베네딕도는 교회에 대하여 일정한 봉사를 하려고 하지 않았고, 더구나 당시 사회에 어떤 문화적 공헌을 하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수도자들은 성무일도(공동기도)를 중심으로 하여 침묵과 노동 속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역사상 중세기의 교회의 번영과 문화의 발전은 베네딕도회 없이 생각할 수도 없다. 유럽의 북쪽은 거의 다 수도자로부터 복음의 빛을 받았다. 그 선교사들 중에 가장 유명한 이는 성 보니파시오(Bonifatius, +756)이다. 그리고 사유 재산 없이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근면하게 살아가기로 유명한 성 베네딕도 제자들의 집은 중세의 빛나는 학문과 예술의 요람이 되었다. 이 시대의 훌륭한 사람들은 대부분 수도원이 경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또 많은 수도자들이 주교로 선임되었으며 수도원 출신의 교황도 있었다.

2.5 사제들의 수도생활

옛 수도자들 중에는 사제가 거의 없었다. 성 파코미오도 성 베네딕도도 평신도였다. 그 당시의 수도자들은 수품받기를 매우 꺼려했다. 왜냐하면 수품을 받음으로써 겸손의 덕을 지키기 어렵게 되고 그것이 홀로 하느님만을 찾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주교들은 수도원들을 훌륭한 인재의 양성소로 보기 시작했다. 성 그레고리오 1세도 596년에 영국으로 선교사들을 보낼 때에 수도자들을 선택하였다. 이와 같이 7세기부터 사목상의 필요 때문에 점차 많은 수도자들이 수품을 받게 되어 남자 수도생활은 평신도 위주가 아니라 성직자 위주의 것이 되었다. 그러다가 오늘에 와서야 다시 수도원에서 사제와 평수사들이 평등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

이외에 사제들이 공동생활을 하며 수도자들의 생활을 모방한 일은 옛날부터 있었다. 성 아우구스띠노(+430)는 아프리카 히포(Hippo)의 주교로서 다른 성직자들과 같이 수도생활과 비슷한 공동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서원을 하지 않았으므로 정식 수도자는 아니었으나 후대로 내려와서 아우구스띠노의 규칙을 지키는 수도회도 생겼다. 오늘날 대부분의 수녀회는 이 회칙을 따르고 있다.

아우구스띠노의 방침을 따른 남자 수도회들이 생긴 것은 11세기부터이다. 이 성인은 처음부터 재속 신부들의 공동생활을 시도하여서 그의 규칙은 은수 수도생활이 아닌 사도직을 목적으로 한 수도회에 더욱 알맞았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성 베네딕도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전자의 규칙은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하고 애덕을 더욱 강조하였다. 그 규칙을 따르는 수도회 중에 두 가지만 열거하겠다.

1) 1120년, 독일인 성 노르베르또가 Ordo Praemonstratensis 혹은 노르베르또회란 수도회를 세웠다. 이 회의 수도원(아빠시아) 구조는 베네딕도회의 수도원과 비슷하다. 그러나 옛날 수도자들은 하느님을 찾는 일 외에 다른 목적을 두지 않았는데 성 노르베르또는 사목 특히 설교를 목적으로 했다.

2) 1215년, 성 도미니꼬가 Ordo Praedicatorum(설교자의 회) 혹은 도미니꼬회란 수도회를 세웠다. 도미니꼬 성인이 수도회를 세운 첫째 목적은 이단인 “알비”파를 회개시키는 데 있었다. 초대교회의 단순한 생활을 모방한 저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성 도미니꼬도 옛 사도들과 같은 단순하고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동시에 베네딕도회의 큰 수도원과 그 정주의 제도를 떠나서 회원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돌아다니며 설교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회원들은 노동도 하지 않고 공동기도와 개인기도에 의한 자기성화와 면학(勉學), 교수와 설교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도미니꼬회는 옛날의 수도자들같이 한적한 산이나 골짜기에 수도원을 짓지 않고 도시에 집들을 세웠다.
그리하여 도미니꼬회는 곧 학자들의 회가 되었다. 설교활동을 위한 준비로서 회원들은 유명한 여러 대학교의 신학과에 다녔고 교수로도 많이 채용되었다. 13세기는 바로 스콜라 신학의 전성기이다. 이때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철학을 토대로 해서 새로운 신학체계를 세운 대 알베르또와 아퀴노의 성 토마스는 바로 도미니꼬회원이었다. 후자는 흔히 스콜라 신학의 왕이라고 불리운다. 도미니꼬회의 자랑은 비단 이런 학술상의 업적만이 아니었다. 14세기의 신비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들은 도미니꼬회원이었다. 그중에서도 엑하르트(Meister Echart)는 세계 종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신비적 경험과 신학의 연결은 도미니꼬회의 한 특징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름 있는 학자들이 많아서 예수회와 쌍벽을 이룰 정도이다. 동양에서 역사가 제일 오래된 대학교는 마닐라에 있는 도미니꼬회의 성 토마스 대학교이다(1612년 설립). 현재 도미니꼬회 회원 수는 남자만도 거의 7,000명이나 된다. 성 도미니꼬의 생활양식을 모방하는 여자 수도회도 많다(남자보다 더 많다).

2.6 프란치스꼬회와 가르멜회

2.6.1 성 프란치스꼬회

성 프란치스코는 성 도미니꼬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교회의 어느 성인보다 널리 인정받는 “둘째 그리스도”가 되었다. 그는 성 도미니꼬와 같이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도회를 세우지는 않았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영위하신 가난한 생활을 모방하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성 프란치스꼬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의도하였다. 그는 회개할 때부터 옛날 수도회들을 본받지 않고 오직 예수와 그의 사도들의 생활양식을 글자 그대로 본받을 생각뿐이었다. 이것은 바로 그 당시의 교회에 꼭 필요한 정신이었다. 13세기의 교회는 외적으로 볼 때에는 매우 힘 있는 것이었으나 세속의 정계 및 재계와 뒤얽히어서 위험한 상태에 있었다. 그 당시 많은 성직자들이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 평민들도 새로 부흥된 무역과 화폐경제 관계로 재물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에 가난(청빈)을 제일 강조한 성 프란치스꼬는 그전 수도자들과 달리 개인적인 가난(즉 개인적인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장상의 허락을 얻어 사용하는 것)을 강조할 뿐 아니라 단체의 가난도 요구하였다. 그래서 회원들은 일을 하여 벌 수 없을 때에는 구걸을 해야 했다. 동남아시아 승려들의 생활과 비슷한 점에서 프란치스꼬회 회원들을 탁발수도자(mendicant)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명칭은 훗날에 비슷한 청빈의 이상을 추구하는 다른 수도회에도 적용되었다(예: 도미니꼬회, 가르멜회,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수도회 역사에 있어서 성 프란치스꼬의 위치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성 프란치스꼬는 처음에 수도회를 세울 생각이 없었으나, 1209년 완전한 가난과 설교의 생활을 시작하였을 때부터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그래서 성인은 복음의 몇 구절을 기초로 해서 규칙을 만들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인준을 받았다. 이것은 교회에서 성 아우구스띠노와 성 베네딕도의 규칙 다음 세 번째로 공식 인준을 받은 수도규칙이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회원들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면학(勉學), 단식, 청빈 같은 문제에 있어서 갖가지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큰 조직의 지도를 싫어하신 성 프란치스꼬는 자신이 창립한 회의 지도권을 포기하고, 1226년 돌아가실 때까지 각처를 유랑하며 관상과 설교생활을 하였다.

성 프란치스꼬의 거룩한 표양과 또한 평민들과 가까이 지낸 서민적 생활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몇 년 안에 회원들이 수천 명이 되고 13세기 말에는 수만 명이 되었다. 여자들도 완전한 가난의 이상을 따를 수 있도록 성 프란치스꼬는 제2회를 세웠다. 그 초대 원장인 성녀 글라라의 이름을 따서 이 회를 글라라회라고도 한다. 제1(남자)회와 달리 이 수녀들은 수도원 봉쇄구역 안에서 엄격한 관상생활을 한다.

그리고 많은 세속 사람들도 성 프란치스꼬의 영향을 받아 세속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이 이상을 실천하려고 했다. 프란치스꼬 회원들은 그들을 지도하고 또 그들에게 생활규칙도 써 주었다. 그리하여 소위 성 프란치스꼬의 “제3회”가 생겼다. 후에는 많은 수도회도 이 규칙에 의거하여 세워졌다. 특히 자선사업을 하는 많은 수녀회에서 이 규칙을 지키고 있어 프란치스꼬회의 수녀라고 하면 제2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제3회의 여러 수녀회의 통칭이다.

성 프란치스꼬가 세상을 떠나신 후로 청빈의 덕을 실천함에 있어 엄격파와 온건파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생겨서 14세기에는 프란치스꼬회에 큰 위기가 닥치었다. 그 결과로 16세기에 이르러서 제1회는 세 가지 회로 갈라졌다. 즉 ① 수도원에서 공동재산을 가질 수 있는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꼬회(O.F.M.Conv.), ② 공동재산을 허락하지 않는 프란치스꼬회(O.F.M), ③ 더욱 충실히 성 프란치스꼬의 소박한 생활양식을 모방하려는 카푸친회(O.F.M.Cap.)가 그것이다.

프란치스꼬회의 조직은 도미니꼬회와 같이 집중적 체제이다. 회원들은 개별적으로 어떤 수도원에 속하지 않고 회 전체에 속하여 총장의 명을 따른다. 그런데 회는 여러 관구로 나뉘어 있으며 회원들은 쉽게 다른 관구로 적을 옮길 수 없다. 각 관구에 수련원, 신학교 등 회원들의 양성기관이 있다.

2.6.2 가르멜회

중세기 전성기에 생긴 수도회 중에 마지막으로 가르멜회에 대하여 한 마디 하겠다. 고대부터 팔레스티나의 가르멜 산에서 엘리야 예언자의 극기생활을 모방한 수도자들의 단체에서 생긴 이 회는 옛 수도자들과 같이 관상생활을 했으나, 한편으로 프란치스꼬회와 도미니꼬회의 조직을 취하여 비슷한 활동을 하였다. 이 회는 13세기에 생겼지만 그 후에 여러 가지 외적 불화와 규율의 해이로 저조를 면치 못했다. 그래서 16세기에 가르멜회를 개혁한 성녀 데레사(Avila의 대데레사 또는 예수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이 회의 창설자들보다 더 높이 평가된다. 이들은 근대의 가장 유명한 신비가로서 가르멜회의 영성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세기말 모든 사람이 따를 수 있는 사랑의 “작은 길”을 가르치신 프랑스의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가르멜회를 더욱 이름나게 하였다. 이 회의 여자회원들은 사도적 활동을 하지 않고 엄격한 봉쇄생활을 하고 있으나 교황 비오 11세께서 성녀 데레사를 포교 사업의 수호자로 선언함으로써 포교를 위한 기도와 희생의 불가결의 가치를 지적하였다.

2.7 예수회

교회에 어려운 고비가 닥칠 때마다 하느님은 성령으로 충만한 인물들을 일으키시어 복음적 생활의 새로운 형식을 개척하게 하셨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칙령으로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어 세속 권력과 얽히게 되었을 때 안토니오, 파코미오, 바실리오 같은 분들은 세속을 떠나서 천국에만 모든 희망을 건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중세기의 전성시대에 사람들이 물욕에 빠지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성 프란치스꼬와 성 도미니꼬가 예수님의 청빈생활을 더욱 지성으로 본받은 희생적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그다음에 루터가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고 개인주의가 근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때는, 이냐시오 성인이 그리스도와 교황을 위한 군단을 조직하였다. 성 이냐시오는 1491년에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로욜라라 마을에서 태어나 젊어서 군인생활을 하였다. 1521년에 중상을 입었을 때 영적 독서를 통하여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몇 년 동안 혼자서 심한 극기생활을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포교사업의 준비로서 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파리에서 공부할 때에 몇 동료들이 그의 뛰어난 성덕에 감동하여 그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1534년에 성인과 함께 수도서원을 발하고 팔레스티나 성지에 가서 포교사업을 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런데 전쟁 때문에 목적지에 가지 못하게 되자 곧 “예수의 중대”(Compania de Jesu)라고 불리어진 이 단체는 좀 더 광범위한 활동 분야를 택하기로 하고, 교황이 요구하는 모든 사도적 사업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예수회의 목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원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의 구원과 완덕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 데 있다. 이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예수회는 중세기에 생긴 수도회들보다 더 집중적인 조직체를 가진 회로서 특히 완전한 순종과 회원들의 철저한 학문적 연마로 유명하다. 성 이냐시오는 회원들이 민첩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일정한 수도복을 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종전의 수도회들과 아주 다른 것은 성무일도를 공동으로 바치지 않는다.

종교 개혁과 때를 같이하여 생긴 예수회의 신학자들은 그 깊은 학식과 정력적인 활동으로 열교의 전파를 막는 데 공이 컸다. 그리고 예수회의 학교들은 교육학에 있어 획기적 지표를 세우게 되었다. 즉, 예수회원들이 처음으로 교육 문제를 학술적으로 다루고 학생들을 심리학적으로 지도했다고 한다. 셋째로 포교활동에 있어서 예수회만큼 공로를 세운 회도 없을 것이다. 사도 바오로 후로 교회의 제일 위대한 선교사인 성 프란치스꼬 하비에르는 성 이냐시오의 수제자의 한 사람이었다. 중국과 인도에서 처음으로 문화적 적응의 전교 방법을 사용한 분들도 예수회원이었다. 불행히도 다른 수도회들의 반대로 이 의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오늘날까지 서양식 그리스도교를 동양에 주입하게 되었다.

예수회원들의 깊은 지식에 탄복하여 많은 군주들도 그들에게 영적 지도를 부탁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성공으로 예수회는 정치계와 얽히게 되어 많은 사람들의 질투를 사게 되었다. 그런데다가 종교를 미워하는 계몽주의자들이 여러 가지 계교로 군주들을 설복시키고 교황 끌레멘스 14세를 위협하여 1773년에 예수회를 해산시키게 하였다. 그러나 1814년에 비오 7세 교황이 예수회를 복구시킨 후로 그전보다 더 눈부신 발전을 하여 오늘날 교회에서 크고도 활발한 수도회가 되었다.

1800년경에 교회의 다른 모든 수도회도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당시 예수회와 같이 완전한 해산의 비운을 겪은 회는 없었으나 계몽주의,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황제의 전쟁의 결과로 대부분의 수도자들은 자기 수도원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지난 200년 동안에 교회 안의 수도생활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옛날부터 있었던 수도회들은 새로 활기를 띠고 또 한편 새로운 수도회들이 많이 생겼던 것이다.

2.8 새 수도회들(주로 Congregationes et Societates)

예수회 이후에 생긴 수도회의 대부분은 19세기에 설립되었다. 이들 수도회들의 공통적 특성은 일정한 목적을 위해 세워졌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는(1581년) 병자들의 간호, 성 요한 돈 보스꼬의 살레시오회는(1859년) 청소년들의 교육, 이탈리아 돈 알베리오네의 성 바오로 수도회는(1924년) 출판과 매스컴의 사도직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예수회와 비슷한 집중적 체제를 갖추고 외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봉쇄 구역을 과히 강조하지 않는다. 수도복도 보통 일반 재속 신부들이 입는 옷과 비슷하다. 그중에는 신부들만 위한 회도 있으나 대부분은 평수사들도 함께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수사들로만 구성된 회도 있다. 이 수사들만의 회 중에 제일 오래된 회는 위에 말한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이고, 제일 큰 회는 회원 수가 거의 2만 명이나 되는 크리스챤 학교들의 수사회(1681년 세움)이다.

이외에 근대에 와서 수도회와 유사한 회들이 많이 생겼다. 이런 회들은 외관상으로는 수도회와 같지만 그 회원들은 수도서원을 발하지 않는다. 그 예로서 전도사업을 위하여 세워진 많은 회를 들 수 있다. 파리 외방 전교회는 그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다(1663년). 이런 회들은 주로 재속 신부로 구성된다. 입회하는 이들은 재산을 포기하지 않지만 어떤 회에서는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공동생활을 하므로 순명의 서원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수도생활의 제일 뚜렷한 특징인 천국을 위한 독신을 지키고 있으니, 그들을 수도자로 볼 수도 있고 실제로 그들은 교회법에서 수도자로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2.9 재속회

지금까지 말해 온 수도생활의 변천을 훑어보면 세속 안으로 돌아가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초기의 수도자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세속을 멀리하여 홀로 하느님과의 사귐을 추구했다. 그런데 중세에 생긴 수도회는 봉쇄 구역과 수도복 같은 수단으로 세속과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설교와 사목사업을 통해 세속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통교하려고 했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와서는 세속에 있는 사람들과 완전히 같은 생활을 하는 수도생활이 생겼다. 봉쇄 구역과 수도복을 모르는 이 양식은 재속회(Institutum Saeculare)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수도생활의 역사는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 즉 이들의 생활은 초기 교회의 동정녀들이나 금욕자들과 비슷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속을 떠난 은수자들의 전통적 수도생활이 시대에 뒤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는 소요되는 것이 갖가지인데 그중에 세속을 멀리하는 이들의 증거도 불가결하다. 교회는 수도생활의 다양성을 인정해 왔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시 이를 확인했다.

그런데 특히 재속회는 우리 세대의 소산으로서 우리 시대의 요구에 가장 알맞은 소도생활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전에는 교회가 서양에 국한되어 있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교회의 권위를 인정했고 수도자들을 존경했다. 그러나 세속화된 현대에 와서는 비신자들과 교회를 멀리하는 사람들이 많아 수도자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도 많다. 동시에 교회가 온 세계에 전파되어 예부터 교회와 수도생활을 모르는 백성들 사이에 끼어들게도 되었다. 이와 같이 완전히 속화된 세상에서는 외관상 세상 사람과 꼭 같은 재속 수도단체의 회원들이 더 환영받기 마련이다. 그들은 옛날부터의 전통이나 여러 가지 원내 행사에 구속을 받지 않으므로 사회의 어떤 환경에든지 끼어들어 갈 수 있다. 그들은 융통성이 많아서 마치 반죽 속에 넣은 누룩과 같이 세속 안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재속 수도단체들은 상당한 다양성을 띠고 있다. 회원 몇 명씩 공동으로 생활하는 회도 있고 수련 기간 외에는 공동생활을 하지 않는 회도 있다. 대부분은 여자들 단체이나 남자들 단체도 있고 그중에 신부들을 위한 회도 있고 평신도들만의 회도 있으며 신부와 평신도로 구성된 회도 있다. 서원을 발하는 회도 있고 혹은 간단한 약속으로 입회할 수 있는 회도 있다. 그중에 어떤 회는 복음적 권유를 지키는 이들 외에 결혼한 부부도 회원으로 가입시킴으로써 프란치스꼬 제3회와 좀 비슷한 현상을 이루고 있다.

끝으로 우리 시대의 훌륭한 수도자 한 분을 소개하고 싶다. 샤를르 드 푸꼬(Charles de Foucauld, 1859~1916)는 재속 수도회를 세우지도 않았고 생존 중에는 아무 수도회도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저서와 그의 생활의 표양은 많은 수도자들뿐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산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트라피스트 수사 생활을 하다가 처음에는 나자렛에서, 그다음에는 북아프리카 사하라 광야에서 회교도 부족 가운데서 독수생활을 하였다. 그때에 그는 예수의 나자렛 생활을 모방하는 수도회를 구상하였다. 그러나 그가 피살된 지 30년 만에 비로소 “예수의 작은 형제회”와 “예수의 작은 자매회”가 생겼다. 이들은 일정한 사도적 사명을 띠지 않고 3~5명씩 가장 버림받는 환경 속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포괄적인 사랑을 증명한다. 자기 집에 모셔 놓은 성체 앞에서 드리는 공동 기도와 조배와 복음에 대한 묵상이 생활의 중심이 되는 점에서 그들은 관상수도회와 같으나 보통 노동자로서 일반 사람들과 같이 생계를 유지하는 점에서는 재속 수도회와 비슷하다. 이 외에 같은 샤를르 드 푸꼬의 정신을 받드는 재속 수도단체들도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