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회

한국 교회와 남자 선교·수도회

3 8·15 해방 이후 교육·의료 수도회들의 진출

3-1 해방 이전 진출 선교?수도회들의 활동

1945년 8?15 해방은 민족의 해방이었으며, 교회에도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1948년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교회도 분단의 현실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38선 이북의 교회에는 종교탄압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으며, 38선 남쪽의 교회는 종교의 자유와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서는 휴전선 이북에서 종교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반면 남한의 교회는 더 많은 발전을 기약할 수 있었다. 8?15 해방 이후 1962년 교계제도(敎階制度)가 설정되기 이전까지 한국 교회에서 활동한 남자 선교?수도회는 크게 기존의 단체들과 이 시기에 새로이 진출 또는 설립된 단체들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기존의 선교?수도회들이 전개한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제 말기 한국인에게 서울교구장직을 넘겨주고, 일본인에게 대구교구장직을 이관한 후 파리 외방 전교회는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그 동안 한국에 파견된 170여 명의 회원 중 25명이 순교하였고, 10명의 회원이 1984년 103위 한국 성인에 포함되어 있다. 8?15 해방 이후 1948년 대전지목구의 선교를 맡았고, 1958년 안동지목구의 선교를 맡아 한국에서의 활동을 재개하였다.

함경도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던 베네딕도회는 8?15 해방 이후 더욱 큰 어려움에 부딪쳤다. 당시 덕원수도원은 수도원 안에 정미소, 포도주 양조장, 인쇄소 등을 운영하는 한편 수도원 소유지를 경작하여 식생활을 자체 해결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군과 북한 공산정권은 처음에는 토지 개혁령을 이유로 농지와 전답을 몰수하였고 이어 1948년 덕원 수도원을 폐쇄하였으며, 1949년 5월 9일 밤부터 본격적으로 수도자와 성직자들을 체포하였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덕원 수도원은 전소되었고, 체포된 수도원 가족들은 교화소에 감금되었다가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겪은 후 1954년 1월 8일 독일로 송환되었다. 그 동안 25명이 사망하였고, 42명이 송환되었다.

한국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952년 6월 베네딕도회는 경북 칠곡군 왜관 성당과 낙산 성당에서 피난 중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1953년 왜관?낙산?성주 등 3개 성당을 감목대리구로 설정, 관할하였고, 1955년 경북의 김천?문경?상주?금릉?선산?칠곡?성주군으로 감목대리구를 확장하였으며, 1956년 왜관공동체를 정식 수도원으로 인정받았다. 한국 진출의 목적이 교육 사업이었던 베네딕도회는 왜관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아 교육 사업을 가장 먼저 시작하였다. 1955년 4월 순심고등학교, 1961년 8월 순심중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또한 1960년 분도출판사, 인쇄소, 목공소를 시작하여 덕원수도원에서 펼쳤던 수도회의 삶을 계속하고자 하였다.

일본의 적성국 내지 준적성국 국민이라 추방되었던 메리놀회와 골롬반회도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메리놀회는 1947년 1월 한국에 재입국하였으며, 1948년 회원인 번(Byrne) 주교가 초대 주한 교황사절로 임명되어 한국 교회와의 관계가 한결 밀접해졌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그해 7월 11일 번 주교와 부쓰(Booth) 신부가 납북 당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1950년 11월에는 캐롤(Carroll) 몬시뇰이 메리놀회 한국지부장으로서 평양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53년 초 서울교구장 노기남(盧基南) 주교로부터 청주지역의 사목을 위임받아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해방 이전 선교 근거지가 평안도였던 메리놀회가 남한에서 선교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교구장의 배려였다. 또한 한국전쟁 과정에서 한결 위상이 높아진 미국이 메리놀회의 모국이며, 전후 복구비용의 상당 부분, 구제품의 상당량이 미국에서 전달되었다는 것도 일정한 이유가 될 것이다. 메리놀회는 1955년 청주에 농아와 맹아를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58년 6월 청주교구가 설정되자 그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958년 인천감목대리구가 설정되면서 사목을 시작하여, 1961년 인천교구가 설정되자, 관할권을 이양 받았다.

골롬반회는 일제 말기 광주교구장직을 일본인 성직자에게 넘겨주고 태평양전쟁 중에는 적성국 내지 준적성국 국민이라 일제의 탄압을 받았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강원도 홍천에 연금 당하였다. 또한 6?25 한국전쟁 중 7명의 성직자가 피살되었고, 2명이 납치당하였다. 전후골롬반회는 한국교회의 성당 설립에 주력하였다.

작은 형제회는 1955년 12월 이탈리아 관구 소속의 회원들이 진주에 진출하여 남부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58년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수도원으로 인정받아 수련을 시작하였고, 1959년 6월 경남 진주 산청에 “성심원”을 설립하여 나환우를 위한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8?15 해방 이전부터 한국 교회에서 활동 중이던 남자 선교?수도회가 해방 이후 교계제도 설정 이전까지 전개한 활동은 해방 이전과 비슷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절반이 선교 지역에서 제외되고 그에 따라 평안도를 선교 지역으로 하였던 메리놀회, 함경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베네딕도회는 남한에서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도 황해도 선교지를 제외하게 되었으니 그만큼 선교회들의 선교 구역에 어려움이 드러났다. 한국인 서울교구장과 대구교구장은 선교의 근거지를 상실한 메리놀회와 베네딕도회에 선교지를 분할,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다질 수 있도록 하였다.

3-2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의 창설

1937년 작은 형제회의 진출 이후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등으로 선교회도 수도회도 전혀 진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7년 7월 한국 교회에는 고유한 교황사절(서리)이 파견되었고, 1949년 4월 7일 교황사절로 승격되었다. 교황청의 이러한 조치는 한국 교회의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측면을 보증하는 것으로 해방 이후, 그리고 전후 한국 교회에 수도회들이 진출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전이 성립되고 1953년 10월 30일 방유룡 신부에 의해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인준 1956년 12월 6일, 이하 복자수도회로 약칭)가 설립되었다.) 35년간의 일제 식민지배와 3년간의 한국전쟁으로 많은 선교사와 한국인 성직자들이 목숨을 잃고, 본국으로 추방당하여 한국 교회에는 성직자의 숫적인 부족이 초래하였다.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는 1953년 10월 서울 제기동성당에서 5명의 회원과 방유룡 신부가 공동생활 시작함으로써 그 모습이 드러났다. 최초의 한국인 설립 남자 수도회인 복자수도회가 전개한 최초의 활동은 1956년 6월 새남터 순교성지 관리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 교회는 순교지 관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였는데 복자수도회가 순교지 관리를 통하여 순교자 현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새남터 성지 주변의 빈민들을 위해 1958년 ‘복자공민학교’를 설립, 교육 활동을 하였으며(1969년 도시 재개발로 빈민 이동, 폐교), 라리보 주교의 요청으로 천안의 ‘대건 남자중학교’를 경영하였다.(1959년 8월 17일 복자 수녀회에 인계, 철수) 또한 광주교구장 헨리(Henry) 주교의 요청으로 1959년 제주 서귀포 분원을 개설하고 귤 농장과 피정의 집을 운영하였다. 이어 1961년 5월 인천교구에 만수동분원을 설립하고 수도 생활의 일환으로 농장을 운영하였다. 복자수도회가 전개한 활동은 교육 사업과 농장 경영이 중심이 었다.

3-3 교육 수도회와 의료 수도회의 진출

한국 최초의 수도회가 설립된 이듬해인 1954년 5월 6일 살레시오회가 진출하였다.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수도회의 진출을 필요로 하였던 광주교구장 헨리 주교가 당시 일본에서 청소년 교육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살레시오회를 초청하였다. 교육 사업을 목적으로 하였던 베네딕도회의 진출 이후 45년만이었다. 베네딕도회는 해방 이후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었다. 살레시오회는 1956년 3월 살레시오중학교(1974년 폐교, 1994년 재개교), 1959년 4월 살레시오고등학교를 개교하여 살레시오 교육을 전개하였다. 또한 1956년 4월 광주에 목공 훈련소를 개설하여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술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훗날 서울 대림동의 근로 청소년 기숙사 내에 마련된 목공 훈련소의 모체가 되었다. 1958년 6월에는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의 초청으로 서울교구 도림동성당의 사목을 맡았다.(1969년까지) 당시 한국은 일본 관구에 소속된 선교지였으므로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다.

살레시오회가 진출한 해인 1954년, 예수회(1540년 9월 27일 창설)가 10월 30일 진출하였다. 일제 말기인 1943년 10월 메리놀회와 골롬반회가 예수회의 한국 진출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세계 교회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으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47년 한국 주교들이 교황청에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할 수 있도록 교육수도회의 진출을 요청하였고, 1948년 교황 비오 7세가 예수회에 한국에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요청하였다.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목적으로 한국 주교단이 요청하여 교황 비오 12세의 명을 받은 예수회가 당시 일본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1955년 1월 미국 윈스컨시 관구가 한국 교육 사업을 위임받아 사업 전 규모에 대한 계획을 구체화하였다. 이어 1956년 11월 대학 설립을 위해 서울 마포구 신수동에 토지를 매입, 1959년 11월 서강대학교 건물을 준공, 1960년 4월 제1회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961년 광주교구의 요청으로 “광주 대건신학대학”을 위탁 경영하였다.(1969년까지)

1956년 샤미스트회가 설립되었고, 1958년 10월 6일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꼬회(1223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창설, 이하 꼰벤뚜알회로 약칭)가 진출하였다. 1937년 작은 형제회 진출 이후 21년 만에 진출한 프란치스칸 영성을 따르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였다. 1958년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중국의 공산화 때문에 로마로 강제 귀환 당하였던 파도바 관구의 프란치스코 팔다니 신부가, 일본의 꼰벤뚜알회에서 공부를 마치고 로마에 온 한국인 허철(안드레아) 신부를 만남으로써 한국 진출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한국 선교를 의논하였고, 관구 차원에서 두 사람의 한국 파견을 결정하였다. 1958년 10월 부산 범일동성당 사목을 시작으로, 1959년 5월 대구교구 범어동성당의 사목을 시작하였다.

성당 선교와 교육 사업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던 남자 선교?수도회가 활동하고 있던 한국 교회에 새로운 목표를 지닌 수도회가 진출하였다. 1958년 11월 19일 한국 교회 최초의 의료 수도회인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1537년 설립, 이하 요한 수도회로 약칭)가 광주교구로 진출하였다. 요한 수도회 진출은 선교회와 교육 사업을 위주로 하던 수도회들과 더불어 의료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수도회의 활동 영역을 넓혔다는 면에서 첫 번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또한 기존의 수도회들과는 달리 오직 수도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수도회라는 점에서 두 번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요한 수도회는 1960년 1월 광주에 ‘성 요한 의원’을 개원,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다.

1960년 9월 17일 마리아회(1817년 윌리암 요셉 샤미나드 신부에 의해 프랑스에서 창설)가 진출하였다. 광주교구장 헨리 주교의 초청으로 태평양관구에서 3명의 회원이 광주교구에 진출하였다. 마리아회의 아시아 지역 진출은 19세기 말부터로, 1888년 1월 5일 일본 요코하마에 진출한 이후 삿뽀로, 후쿠오카, 나가사키, 오사카, 도쿄 등지에 5개의 명문학교를 설립하는 등 일본 교육계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08년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교육 사업을 추진하고 있던 마리아회를 초청하였고, 1923년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도 초청 의사를 비쳤으나 당시는 거절하였다. 그리고 1948년 마리아회 태평양관구가 설정되면서 수도자와 수련자들이 증가하자 1950년대 말부터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갖고 선교지를 물색하던 중 광주교구장 헨리 주교의 한국 진출 요청을 받고 진출을 결정하였다. 한국 진출 처음에는 광주에서 소신학교 운영에 참가하면서 신학생 교육에 주력하였다.

1962년 1월 15일 성 바오로 수도회가 진출하였다. 일본에서 27년간 활동하였던 성 바오로 수도회의 회원들이 한국 지부 설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1961년 12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와 상의하여 서울 성북동 한국 순교 복자 수도원을 임시로 빌리고 1962년 1월 15일 강북구 미아 9동에 수도원을 건립하고, 인쇄 시설을 갖추는 한편 한국의 젊은이들을 받아들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 교계제도 설정 이전까지 16년 동안 한국에 진출하였거나 설립된 남자 선교?수도회는 총 8개이다. 선교회는 전혀 없으며, 8개 모두 수도회이다. 이 시기 남자 수도회의 특징은 우선 수도회의 설립을 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회인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 그리고 샤미스트회의 설립은 아직 포교지 교회의 처지이기는 하지만 한국 교회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는 김대건과 동료 순교자들을 수호자로 모심으로써 한국인의 토양을 빚어내려 하였던 토착화를 위한 노력의 첫 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외국에서 진출한 수도회를 대상으로 할 때 활동 분야는 주로 교육이었다. 살레시오회와 예수회, 그리고 마리아회가 교육을 목적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의료와 출판?인쇄를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가 진출하고, 사회사업에 주력하는 수도회도 진출하여 활동 영역이 매우 다양해졌다. 또한 살레시오회와 천주의성요한수도회, 그리고 마리아회 등이 광주교구장의 초청으로 진출하여 이 시기에는 광주교구가 수도회 초빙에 가장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지역적으로는 교황청 설립 수도회일지라도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수도 회원들이 진출하여 일본 교회와 한국 교회가 수도회를 중심으로 볼 때에는 같이 움직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의 혼란 시기,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은 후 한국 사회와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한 것은 교육 사업과 의료 사업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 교육가 의료 사업을 목적으로 수도회들이 진출하였다는 것은 당시 한국에 진출한 수도회들이 한국 사회와 교회의 요구에 상당히 부응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표 2> 해방 이후 교계제도 설정 이전까지의 남자 수도회

교황청 설립 수도회 한국 교회 설립 수도회
살레시오회(1954)
예수회(1954)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꼬회(1958)
천주의 성 요한회(1958)
마리아회(1960)
성 바오로 수도회(1962)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1953)
샤미스트(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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