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회

한국 교회와 남자 선교·수도회

4 교계제도의 설정과 한국 수도회들의 창설

4-1 교계제도 설정 이전 진출?설립 수도회들의 활동

1962년 3월 10일 교황 요한 23세는 교황서한을 통해 한국에 교계제도의 설정을 공포하였다. 현지인 교계제도의 수립은 포교지에서의 교회 조직의 최종 목표인 동시에 포교지에서의 교회 조직의 완성이다. 현지인 성직자가 복음전파를 책임지고 교구를 관할하지 않고서는 교회가 포교지에서 뿌리를 내리기가 어렵다. 한국 천주교회는 130여 년간의 포교지 교구에서 정식 교구로 승격하였다. 교계제도의 설정으로 완전한 제도를 갖춘 지역교회로서, 또 자립 능력을 갖춘 교회로서 전 교회에 관한 중요 문제를 결정하고, 전 교회를 통치하는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첫 번째의 모습이 1962년 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한국주교단이 정식 초청됨으로써 분명하게 드러났다.

교계제도의 설정과 더불어 1963년에는 대한민국과 교황청간에 공사급 외교사절의 교환이 합의됨에 따라 12월 11일 주한교황공사관이 설치되었다. 1966년 양국은 공사급 외교사절을 대사급으로 승격시켰고, 그해 9월 5일 주한교황대사관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1960년대 초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 내적으로 뿐 아니라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천주교 선교 내지 활동을 위해 대단히 좋은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교계제도의 설정, 그리고 교황청과 대한민국의 외교 관계의 등급 승격은 세계의 많은 선교회와 수도회들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교계제도의 설정은 자립 교회의 형성을 의미한다.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교회가 아니라 한국인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교회의 모습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에서는 상당한 아쉬움을 남겼다. 게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하였던 목표 중 하나였던 지역 교회의 가치 구현이라는 면에서도 한국 천주교회는 발전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다. 교계제도 설정 당시 한국에는 13개의 남자 선교?수도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단체들이 교계제도 설정 이후 전개한 활동은 크게 선교, 교육, 청소년 사목, 사회복지, 피정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선교 면을 보자면 파리 외방 전교회와 메리놀회, 골롬반회는 앞 시기와 비슷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골롬반회는 1971년 신설 제주교구의 사목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1970년대 150여 명의 선교사들이 광주대교구와 춘천교구, 그리고 제주교구에서 활동하였다. 1980년대 초에는 전국 7개 교구, 61개 성당에서 사목 활동과 구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교계제도 설정 이후에는 선교회들 뿐 아니라 수도회들도 성당 사목을 담당하였다. 살레시오회가 1963년부터 구로3동성당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꼰벤뚜알회는 1964년 4월 부산교구 대연동성당, 1965년 부산교구 해운대성당 기장공소, 1969년 11월 마산교구 하동성당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또한 1972년 서울 한남동 국제성당, 1977년 인천교구 갈산동성당을 설립하고, 1984년 1월 부산교구 기장 성당을 신축하였다.

교계제도 설정 이후 교육 활동을 전개한 수도회는 메리놀회와 마리아회이다. 메리놀회는 1963년 3월 성당 선교 뿐 아니라 부산 메리놀 간호전문학교를 시작함으로써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쏟았다. 마리아회는 1966년 11월 학교법인 목포 마리아회 학교의 설립인가와 1967년 9월 목포 마리아회중학교의 설립 인가를 거쳐 1968년 개교하였고, 1975년 3월 목포 마리아회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또한 목포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낙도 학생들을 많이 받아들였는데 당시로서는 드물게 도서지방의 학생들과 어려운 환경에 있는 학생들을 위해 기숙사를 운영하였다. 1983년 2월 인천교구의 요청으로 인천 대건고등학교의 운영권을 인수하였다.(1988년 중학교는 폐교)

청소년에 대한 배려도 이루어졌다. 1963년 살레시오회는 대림동에 근로청소년을 위한 기숙사와 신학원을 설립하였고, 1964년 4월 6일 돈 보스꼬 청소년센터를 건립하였다. 1967년 돈 보스꼬 직업전문학교를 마련하여 1970년 사회복지기관 인가를 정부로부터 획득하고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기계기술을 가르치는 동시에 공단지역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사회?문화 교육, 가톨릭 노동청년회나 소년원 사목 등 사회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9년 12월 서울 영등포구 근로청소년회관에서 청소년 사회복지, 교정 사목에 주력하였고, 1979년부터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살레시오 교육회관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의 인성교육을 위한 수련회 활동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꼰벤뚜알회는 1971년 7월 대구 화선소신학교를 일반 남자학생 기숙사로 함께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마리아회는 1972년 11월 15일 서울 망원동에 불우 청소년을 위하여 효성야간학교를 개설, 중학교 과정을 교육하고 직장을 알선하기도 하였다.(학생 수 감소로 1985년 2월 28일 폐원)

이 시기 남자 수도회들이 전개한 사회복지활동은 나환우와 그 자녀들에 대한 배려, 유아원 설립, 양로원 운영, 야간 중학교 설립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1962년 12월 9일 꼰벤뚜알회는 부산에 성당을 완공하고, 그해 대연동 난민 주택에 미감아 27명이 모여 살기 시작하자 이들을 돌보기 위해 ‘성 프란치스코의 집’(1994년 1월 나환자 자녀들이 감소함에 장애 아동을 위한 재활원으로 사업 전환)을 시작하였다. 또한 국립 부산 오륜대 나환자 마을 ‘상애원’ 공소를 돌보고, 1963년 3월 부산 대연동에 콜베 유치원을 개원하여 유아 교육(1963년 6월 6일 인가받고, 1983년 2월 20일 자립 유아원으로 독립)을 시작하였다. 또한 1973년 부산 대연동 수도원 건물에 야간 중학교를 개설하였고, 1978년 인천 갈산동에 요셉 양로원을 건립하였다. 예수회도 1966년 6월 서강대 내에 산업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1978년 3월 성 이냐시오 학교(야학)를 설립하였다. 교육 출판에 주력하던 베네딕도회는 1970년 경북 선산에 “선산양로원”(1992년 7월 그리스도교육수녀회로 이관)을, 1975년 경북 칠곡에 “결핵요양원”을 각각 개원하였다. 작은 형제회도 1974년 6월 진주에 성 프란치스꼬 양로원을 설립하였고, 1978년 서울 용산에 베들레헴의 집을 개원하여 행려자와 빈민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다.

교계제도 설정 이후 한국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평신도들에게 피정에 대한 장소를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베네딕도회는 1965년 1월 한국 교회 첫 피정의 집인 왜관 피정의 집을 개원함으로써 신자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왜관 피정의 집은 신자들에게 기도와 영적인 성숙을 이룰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영적인 성장에 기틀을 다졌다. 왜관에 이어 베네딕도회는 1972년 서울 장충동에 분도회관을 개원, 서울과 인근 신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베네딕도회에 이어 1973년 4월 예수회가 수원에 “피정의 집”(말씀의 집)을 개원하였으며, 1976년 5월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가 서귀포분원에 “피정의 집”(복자회관)을 건립하였다.

한편 요한 수도회는 1976년 신경정신과와 소년의 집을 개원하였으며, 1984년 1월 춘천시립복지원을 위탁 운영하였다. 꼰벤뚜알회는 1964년 9월 17일 대구에 화선 소신학교를 설립, 성소 육성의 신기원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성 바오로 수도회는 1964년부터『교리교육을 하는 법』,『가정』이라는 제목의 책들을 발행하면서 출판 사도직을 시작하였다. 또한 1983년 2월 서울 논현동에 성 바오로 서원을 개원하고 12월 천호동에 서원을 개원하여 교회 출판물 보급에 주력하였다.

수도회 내부 조직 면에서도 작은 움직임이지만 변화를 보였다. 작은 형제회는 1969년 한국순교복자 준관구로 승격하였고, 꼰벤뚜알회는 1975년 12월 1일 준관구로 승격하였다. 베네딕도회는 1971년 제2대 아빠스로 한국인 신부가 피선되었고, 1981년 이동호 아빠스가 함흥교구와 덕원면속구 교구장서리로 임명되었다. 이는 한국 교회의 성장, 각 수도회들의 발전과 수도회들 안에서 한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성장에 기인한 것이었다.

4-2 관상 수도회와 사회복지활동 수도회

기존 남자 선교?수도회 외에도 많은 선교?수도회들이 교계제도가 설정된 한국 천주교회에 진출하였다. 교계제도가 설정된 한국 교회에 가장 먼저 진출한 것은 과달루페 외방 선교회(1949년 10월 7일 멕시코 주교단에 의해 창설, 이하 과달루페회로 약칭)로 1962년 11월 26일이었다. 골롬반회 진출 이후 선교회로는 29년 만이었다. 회원들이 부산에 머물며 선교 대상지를 물색하던 중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광주대교구장 헨리 주교와 과달루페회 총장과의 협의에 따라 1963년 9월 1일부터 여수 동산동성당과 서교동성당에서 사목을 시작하였다. 1964년 8월 서울대교구 성수동성당의 사목을 시작하였고, 1965년 10월 3일 순천 저전동성당의 사목도 시작하였다. 1968년부터는 한국 신학생들 양성을 시작하였으며, 1970년 마산교구 남해성당, 1974년 부산교구 양산성당의 사목을 관할하였다. 그리하여 과달루페회는 광주?서울?마산?부산교구 등 4개 교구에서 성당 사목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기여하였다.

과달루페회의 진출 이후 1964년 9월 14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회(1720년 십자가의 성 바오로에 의해 창립)가 진출하였다. 광주대교구장 헨리 주교의 요청으로 미국 시카고관구에서 3명의 회원이 진출하였다. 초기에는 여러 교구의 성당 사목과 광주 대건신학대학의 영적 지도신부 등으로 활동하다가 1969년 4월 28일 광주시 화정동에 피정센터를 건립하여 피정과 세미나 등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1969년 9월 15일 서울대교구장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의 초청으로 서울대교구에 진출하여 돈암동, 서교동, 부암동 등에 작은 연락처 및 피정의 집을 운영하다가 1977년 4월 20일 우이동에 명상의 집을 개관하여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들의 영적 쇄신과 성화를 위한 장소가 되게 하였다. 예수 고난회의 가장 본질적인 사도직은 피정센터를 이용한 피정 지도였다. 한국에서 최초로 피정센터를 이용한 피정을 소개하고 정착시켰다.

한편 1967년 5월에는 남자 선교?수도회 장상 협의회가 설립되었다. 그 동안 15개의 선교?수도회가 진출 혹은 설립되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지역적으로 활동 영역을 공유함에 따라 의견을 조율할 수 있는 모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선교?수도회들 간의 영적인 유익을 촉진하고, 공동의 관심사와 그 문제를 연구하며, 상호 긴밀한 협력을 통하여 더 효과적인 해결책을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주교단과 개별 주교와의 적절하고도 효율적으로 접촉하는 대표 기구의 역할을 하며, 각 교구장들과 협력을 강화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1969년 9월 15일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으로 예수의 작은 형제회(1933년 10월 2일 설립)가 서울대교구에 진출하였다. 관상 수도회로 1976년 8월 경기도 양주에 수련소를 시작하였고, 1981년 한국관구로 승격하였으며, 1984년 경기도 광명시 철산리 분원을 시작하였다.

관상 수도회로 1974년 9월 8일 서울 삼선동에서 가르멜 남자수도회(가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맨발 형제회, 1226년 1월 20일 교황청 인준)가 창립되었다. 관상 생활과 사도직 실천이라는 두 가지 축을 바탕으로 한다. 가르멜회의 총원장 휘니안이 1974년 3월 25일자로 한국에서의 수도회 창설을 허락하고, 1974년 8월 10일 서울 여자 가르멜 수도원의 초청으로 가르멜 남자수도회가 진출하였다. 그런데 이 수도회는 외국인에 의해 창설된 것이 아니고 몇 명의 한국인이 프랑스에 있는 가르멜회에 입회하여 수련과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스스로 수도회를 창설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1976년 2월 인천시 계산동에 수도원을 신축하였고, 1977년 5월 정식 수도원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수련 수도원이 되었다. 1980년 4월 인천 수도원에 피정의 집(기도의 집)을 마련하였는데, 많은 신자들이 개인 피정을 통해 기도 생활을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건립하였다.

1971년 9월 13일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1817년 창설)가 진출하였다. 진출 목적은 ‘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을 하느님께 인도한다’는 마리스타 교육정신을 바탕으로 특별히 한국의 불우 청소년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이를 통하여 한국 교회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살레시오회와 진출 목적이 비슷한데, 구성면에서 살레시오회가 성직자와 수도자로 구성된 수도회인 반면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는 수사들로만 이루어진 수도회라는 차이점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의 전체 수도회 차원에서 각 관구마다 10%의 회원들을 의무적으로 선교지에 파견하도록 결정하였다. 멕시코관구에서 이러한 수도회의 결정을 받아들여 아시아 각국을 두고 대상지를 물색하던 중 1971년 4월 아르투로 차베스 관구장과 엔리코 수사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관구 총회에 보고, 그해 말 한국 진출이 결정되었다. 1976년 2월 안동 마리스타 학생회관(1988년 3월 철수)을 개관하였고, 1979년 안동 마리스타 교육회관 내에 야간학교를 개설하였다. 1981년 3월 충주 농아학교에 파견되어 활동하였고, 1981년 3월 안동교구 영주 다미안 의원(1996년 9월 철수)을 위탁 운영하였다.

1977년 7월 5일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으로 서울 삼산동에 사랑의 선교 수사회(1963년 3월 25일 교회 인가 획득)가 진출, 활동을 시작하였다. 앤드류 총장 수사가 극동 지역에서의 활동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홍콩, 대만, 일본을 경유 1976년 2월 내한하였는데, 이때 한국 진출이 결정되었다. 서울에 이어 부산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부산에 진출, 부산교구장의 정식 요청이나 허락이 내리지 않던 상황이었지만 1980년 9월 16일 부산 분원을 개설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주로 자갈치 시장의 걸인들, 알코올 중독자들, 부랑자, 산동네 움막에서 살아가는 이들, 빈민가 아이들, 시립병원 행려병자 등을 보살폈다. 1981년 앤드류 총장이 부산교구장 주교를 직접 방문하여 정식으로 승인을 요청하여 비로소 정식단체로 받아들여졌다. 1981년 10월 3일 광주대교구에, 1983년 9월 인천교구에 분원을 마련하고 극빈자 가정을 돕기 시작하였다.

1982년 9월에는 인천교구 나길모 주교의 초청으로 글라렛 선교수도회(1849년 7월 창설)가 진출하였다.

3-3 외방 선교회와 한국 수도회들의 창설

교계제도 설정 이후에는 선교회와 수도회들이 한국 내에서 설립되었다. 1975년 2월 26일 한국 주교회의의 결의에 의해 한국 외방 선교회가 설립되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한국 교회에 대한 이웃 교회들의 형제적 협조에 대한 감사의 정신으로 복음화 활동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서든지 그 지방 교구장의 선교와 사목 협조 요청에 따라 봉사할 한국 선교 사제를 지도 양성한다는 것이 설립 이념이었다. 1977년 청주교구장 정신석 주교가 선교회 설립 교령을 반포하였고, 1981년 3월 선교회 소속의 첫 사제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인 1981년 파푸아 뉴기니의 마당교구에 선교 사제를 파견, 외방 선교를 시작하였다. 파리 외방 전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선교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한국 교회가 보다 선교 조건이 열악한 지역에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대만, 홍콩, 필리핀 등으로 선교 영역을 확대하였다.

한국 외방 선교회의 설립에 이어 1976년 9월 24일 미리내 천주 성삼성직 수도회가 정행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에 의해 수원교구장의 인가로 미리내 성지에서 설립되었다. 관상과 활동을 겸한 성직 수도회로 정결 성소가 특별한 카리스마이다. 1974년 수원교구장으로 임명된 김남수 주교가 교구장 착좌 후 정행만 신부에게 미리내 사적지 개발을 부탁하면서 수도회 설립을 실현하였다. 김남수 주교의 재가를 받아 1975년 10월 6일 지원자 1명의 수련을 시작하였다. 1981년 미리내 피정의 집을 증축하여 수도원으로 사용하였고, 1979년 5월 1일 첫 사도직 사업체로 경기도 안성에 “성 요셉 성물 공예사” 개설, 교회용품 제작함으로써 자립의 길을 마련하였다. 1982년 5월 1일부터 “부산 성 요셉 병원”에서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다.

1981년 5월 10일 미국인 사제 알로이시오 슈왈츠 몬시뇰에 의해 서울에서 그리스도 수도회가 창설되었다.(1999년 9월 15일 서울대교구 김옥균 주교 인준) 서울시에서 발생하는 부랑인들을 수용 보호하는 서울 시립 갱생원을 서울시의 의뢰로 위탁 운영하면서 시작되었다. 부랑인 시설인 은평의 마을에 2,000여 명의 노약자?정신질환자?지체장애자?정박아?결핵환자?알코올중독자 등을 수용하여 보살피고 있다.

1962년 교계제도 설정 이후 1984년의 한국 천주교 200주년 이전까지 23년 동안 진출, 설립된 남자 선교?수도회는 11개로 교황청 설립 수도회 6개, 교구 설립 수도회 4개, 선교회 2개이다. 포교지 교회에서 자립 교회가 된 후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 설립된 수도회가 3개이며, 외방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선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교회가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경제개발정책과 유신체제로 인하여 한국 사회가 병들고, 노동자?농민들이 고통당하고 있던 때였는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수도회들이 진출하여 활동하였다는 것은 교회와 수도회가 시대의 요구, 민족의 요구를 읽고 응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는 1970년대 한국 교회가 전개하였던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큰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관상 수도회들의 진출은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과 더불어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성장에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남길 수 있다.

그러나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던 토착화라는 측면에 비추어 볼 때 이 시기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남자 선교?수도회들의 태도는 아쉬운 점도 남긴다. 이 시기 토착화에 선교?수도회들이 기울인 관심은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었다. 토착화에 대한 관심은 남자 수도회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박약한 한국 교회의 토양을 바꾸고, 수도회들의 쇄신과 발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수도회에서도 토착화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 내지 한국 교회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연유한다고 할 것이다. 또한 교계제도가 설정되었지만 한국 교회가 여전히 복음 전파에 있어서 계속 선교사들의 도움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문화 선교로의 전환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표 3> 교계제도 설정 이후 한국 천주교 200주년 이전까지 진출?설립된 남자 선교?수도회

수 도 회(교황청 설립) 수 도 회(교구 설립) 선 교 회
성 바오로 수도회(1962)
예수 고난회(1964)
예수의 작은 형제회(1969)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1971)
가르멜 남자수도회(1974)
글라렛 선교 수도회(1982)
미리내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1976)
사랑의 선교 수사회(1977)
그리스도 수도회(1981)
과달루페 외방선교회(1962)
한국 외방 선교회(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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