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회

한국 교회와 남자 선교·수도회

6 맺음말

40여 개의 남자 선교?수도회가 200여 년의 한국 교회사와 함께 하였다. 본고는 남자 선교?수도회에 대해 한국 사회 내지 한국 천주교회의 변화와 함께 시기 구분하여 고찰하였다. 한국 진출 첫 선교회인 파리 외방 전교회의 진출로부터 해방 이전까지 3개의 선교회와 2개의 수도회 등 5개의 남자 선교?수도회가 진출하여 한국 교회에서 활동하였다. 첫 번째 선교회의 진출로부터 두 번째 선교회의 진출까지는 92년, 두 번째 선교회의 진출로부터 세 번째 선교회의 진출까지는 10년의 시간이 요구되었다. 한편 1909년 교육 사업을 목표로 진출한 베네딕도회에 이어 두 번째로 진출한 수도회는 프란치스칸 영성을 펼치고자 하는 작은 형제회로 28년만이었다. 포교지 교회라는 이유 때문이겠지만 100여 년 동안 겨우 2개의 수도회만이 진출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교회가 수도 영성을 접할 기회가 적었다는 점에서 아쉬운 점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선교회에도 각기 고유한 영성이 있다. 그러나 선교회들은 최고의 목표가 포교지에의 선교이다. 그러므로 선교회들의 선교 노력을 뒷받침해준다는 측면에서도, 피선교지 현지인들의 신앙 활동의 다양한 접근이라는 측면에서도 수도회가 두 개뿐이었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라고 할 것이다.

해방 이후 교계제도 설정 이전까지 한국에 진출하였거나 설립된 남자 선교?수도회는 총 8개였다. 이 시기 남자 수도회의 첫 번째 특징은 수도회의 설립이었다.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회인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 그리고 샤미스트회의 설립은 아직 포교지 교회의 처지이기는 하지만 한국 교회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는 김대건과 동료 순교자들을 수호자로 모심으로써 한국인의 토양을 빚어내려 하였던 토착화를 위한 노력의 첫 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외국에서 진출한 수도회를 대상으로 할 때 활동 분야는 주로 교육이었다. 살레시오회와 예수회, 그리고 마리아회가 교육을 목적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의료와 출판?인쇄를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가 진출하고, 사회사업에 주력하는 수도회도 진출하여 활동 영역이 매우 다양해졌다. 또한 살레시오회와 요한수도회, 그리고 마리아회 등이 광주교구장의 초청으로 진출하여 이 시기에는 광주교구가 수도회 초빙에 가장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지역적으로는 교황청 설립 수도회일지라도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수도회 회원들이 진출하여 일본 교회와 한국 교회가 수도회를 중심으로 볼 때에는 같이 움직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의 혼란 시기,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은 후 한국 사회와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한 것은 교육 사업과 의료 사업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 교육가 의료 사업을 목적으로 수도회들이 진출하였다는 것은 당시 한국에 진출한 수도회들이 한국 사회와 교회의 요구에 상당히 부응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1962년 교계제도 설정 이후 1984년의 한국 천주교 200주년 이전까지 진출, 설립된 남자 선교?수도회는 11개였다. 포교지 교회에서 자립 교회가 된 후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 설립된 수도회가 3개이며, 외방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선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교회가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경제개발정책과 유신체제로 인하여 한국 사회가 병들고, 노동자?농민들이 고통당하고 있던 때였는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수도회들이 진출하여 활동하였다는 것은 교회와 수도회가 시대의 요구, 민족의 요구를 읽고 응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는 1970년대 한국 교회가 전개하였던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큰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관상 수도회들의 진출은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과 더불어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성장에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남길 수 있다.

그러나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던 토착화라는 측면에 비추어 볼 때 이 시기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남자 선교?수도회들의 태도는 아쉬운 점도 남긴다. 이 시기 토착화에 선교?수도회들이 기울인 관심은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었다. 토착화에 대한 관심은 남자 수도회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박약한 한국 교회의 토양을 바꾸고, 수도회들의 쇄신과 발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수도회에서도 토착화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 내지 한국 교회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연유한다고 할 것이다. 또한 교계제도가 설정되었지만 한국 교회가 여전히 복음 전파에 있어서 계속 선교사들의 도움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문화 선교로의 전환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 이후 1999년까지 진출, 설립된 남자 수도회는 20개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았다. 이 시기 남자 선교?수도회의 특징은 그 활동 범위가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활동 범위가 다양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교회 내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도회 고유의 영성 내지 활동 범위를 망각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1990년대에 이르면 거의 모든 수도회가 수도회 고유의 색깔을 퇴색시키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각 수도회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 수도회가 자리 잡고 활동하고 있는 지역 교회와 지역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하기 어렵다. 수도회마다 고유의 영성을 밝히고,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듯이 각자의 카리스마를 견고하게 하는 모습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하였던 남자 선교 수도회는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노력하였고, 한국의 사회 발전과 교회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국 교회의 발전은 1962년 교계제도의 설정으로 확인되었다. 교계제도 설정 이후 보다 활발한 활동들이 각 방면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전후한 때부터 일기 시작한 각 수도회들의 사목 활동 다양화는 수도회들의 고유 색상을 퇴색시키기 시작하였다. 또한 급변하는 시대 변화에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시대를 이끄는 역할을 소화하지 못하는 한계도 노정시켰다. 각 수도회들이 고유의 카리스마를 지키며 협력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면들이 고려될 때 각 수도회들의 발전,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