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국외
1998-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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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추계 정기 총회 성명 ‘생명의 복음을 실천하기 미국 가톨릭 신자들의 과제’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
1998년 추계 정기 총회 성명
(1998년 11월 18일)


생명의 복음을 실천하기
미국 가톨릭 신자들의 과제

(Living the Gospel of Life: A Challenge to American Catholics)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예레 1,4-5).

    주님 안의 형제자매 여러분,

    1998년 말 미국 주교들의 사도좌 정기 방문 때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저는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1티모 6,12).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 우리는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언자다운 증언은 가톨릭 공동체만이 아니라 온 인류 가족을 위한 근본적이고도 절박한 봉사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우리는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며 스승과 목자로서 우리의 역할을 완수하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사랑의 진리를 선포하는 일이 사목 책무를 수행하는 필수 불가결한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I. 미국의 세기

    “여러분의 나라는 선진 민주 사회의 본보기로 세계 무대에 우뚝 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여 주는 모범의 힘은 막중한 책임을 수반합니다. 미국인 여러분, 이를 선용하십시오”(요한 바오로 2세, 뉴어크, 1995).

    1941년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를 위한 호소를 발표하였을 때, 헨리 루스는 앞으로 다가올 현실에 비해 자신의 꿈이 작다는 것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루스는 미국의 “기술자, 과학자, 의사, …… 도로 건설자, 교사들”이 전 세계에서 활약하며 경제적 성공을 촉진하고, 미국적 이상인 “자유에 대한 사랑, 좋은 기회를 찾는 정신, 자립과 독립과 협력의 전통”1) 등을 증진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그 뒤 수십 년에 걸쳐 정확히 이 일이, 아니 이보다 더 많은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미국 경제의 성공이 세계를 변모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미국 실험 정신의 고귀함은 그 상업적 힘이 아니라 그 건국 원칙들에서 비롯됩니다. 20세기에만 해도 무수히 많은 미국인들이 이 원칙을 수호하다 죽어 갔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고국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대륙에서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교육과 조언과 인도주의적 지원을 함으로써 그러한 원칙들에 봉사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미국의) 건국 문서들에 담긴 윤리관의 핵심에는 인간의 권리들에 대한 인식이 자리합니다.” 미국의 위대함은 “특히 모든 상황과 발달 단계에 있는 인간 생명의 존엄과 신성함을 존중하는 데”2)에 있습니다.

    미국 정신의 이러한 고귀함은 오늘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회 정의와 균등한 기회를 위하여 분투하는 이들을 통하여 지속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번영은 인간 자유와 인권과 인간 존엄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한 덕분입니다. 따라서 교황 성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미국인 여러분, 여러분 나라가 이룬 위대한 업적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마땅합니다.”3)

    그러나 성공은 흔히 실패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이따금 해외에서 심각한 불의로 이어집니다. 국내에서 이는 지나친 자기도취, 무관심, 과도한 소비주의를 부추겨 왔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더욱 내세우게 된 인간의 힘에 대한 과신은 자연적 한계를 뛰어넘는 생명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결과를 개의치 않는 행위들을 초래하였습니다. 시장의 원칙이 건전한 도덕적 지표를 대치할 조짐이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 실용성과 생산성과 비용 효율성이라는 이상에 따라 미국 문화가 점진적으로 재편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도덕 문제가 재화와 용역이라는 강물에 침잠되어 버리고, 상품 판매와 홍보의 남용이 공공 생활을 전복시켜 버립니다.

    이 변화하는 윤리적 대양에서 낙오되는 이들은 노인과 빈민과 장애인 그리고 정치적으로 소외받는 이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효용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지만 적어도 생존은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단체를 결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아, 병약자, 말기 환자들에게는 그러한 이점도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 ‘효용성’이 없고, 더군다나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시작과 끝, 그리고 심지어 그 기본적인 세포 조직을 함부로 다룬다면 우리는 인간 존엄에 헌신하는 자유 국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함부로 다루게 됩니다. 미국 정치 생활이 국민을 위한 그리고 국민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실험이 되면 더 이상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그러한 시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침해할 수 없는 권리가 선포되고 생명의 가치가 공적으로 천명되는 오늘날, 가장 기본적 인권인 “생명의 권리 자체가, 특히 존재의 가장 중대한 순간에, 곧 탄생과 죽음의 순간에 부정되거나 짓밟히고 있는 것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 18항).

    이러한 위협의 본질과 절박성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인간 존엄에 대한 존중은 인권에 대한 폭넓은 투신을 요구합니다. “미국인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미국 가톨릭 신자들은 모든 단계와 모든 상황에 있는 생명을 수호하는 데에 투신하여야 합니다.”4) 죽음의 문화는 우리의 국경을 넘어서 확대되고 있습니다. 기근과 기아, 세계적인 보건과 발전의 거부, 무력 분쟁의 치명적인 폭력과 그러한 분쟁을 낳는 수치스러운 무기 매매 등이 그러합니다. 우리 국민은 가정 폭력, 약물 남용, 생명을 위협하는 성행위, 세계의 생태 균형에 대한 무분별한 조작을 목격합니다. 인간 생명의 존중은 우리가 이러한 위협들과 그 밖의 위협들로부터 생명을 수호할 것을 요청합니다. 또한 먼저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과 쉴 곳과 제대로 된 일자리를 마련하도록 도와줌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위한 조건들을 향상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여 그들의 삶과 존엄을 옹호하며 살아갈 때 생명의 복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낙태와 안락사는 인간 존엄에 대한 매우 심각한 대표적인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인간 선이며 다른 모든 것의 조건이 되는 생명 자체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가장 약하고 가장 무방비 상태인 이들, 참으로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저지르는 범죄입니다. 이러한 범죄는 점점 더 노골적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낙태와 안락사를 조장하는 지지자들도 이러한 행위가 살인이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은 가족이나 의료 종사자들처럼 통상적으로 약자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공동체들 안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인간 생명에 대한 그러한 직접적인 공격은 한때는 범죄 행위였으나, 오늘날에는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한 정부들이 도리어 이를 합법화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민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미국 국민들에게 복을 내리시어, 엄청난 선의 보고를 맡겨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 선조들에게 지혜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어, 모든 시민이 모든 이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증진하는 데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 제도를 수립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인이고 가톨릭 신자이며 우리 국민의 목자들인 우리는 오늘날 우리 시민들이 우리나라의 건국 원칙들을 되새겨, 특히 태아와 약자, 장애인, 말기 환자의 권리에 대한 국가적 존중을 새롭게 하도록 이 글을 씁니다. 참자유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닌 불가침성에 달려 있습니다. 독립 선언서가 특정 종교의 신조가 아니듯이, 모든 단계와 상황에 있는 인간 생명의 천부적 가치는 한 종파가 주장하는 쟁점이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는 미국 가톨릭 신자들, 특히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지도자 신분에 있는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신의 신원을 재확인하여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존중을 쇄신하는 데에 앞장설 것을 당부합니다. 복음 활동에서 지니는 ‘시민 의식’은 미국 시민 활동에 대한 책임감 있는 시민 의식의 확실한 보증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가톨릭 신자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부르신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어떤 이는 말로, 어떤 이는 행동으로, 모두 모범을 보이며 이를 선포합니다. 모든 믿는 이가 복음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고 있습니다. 모든 가톨릭 신자는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은 인간 존엄에 대한 기쁜 소식의 선교사입니다. 우리 각자의 소명에 따라 증언하는 형태와 방식은 다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회의 누룩이 되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행실에 따라 심판받게 됩니다. 사회적 지도자로 활동하는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누구든 공공연히 가톨릭 신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서 온전히 실천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떳떳하게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세기’가 끝나 가고 있는 요즈음,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우리가 한 나라로서 지닌 진정한 성격을 잘 말해 줄 것입니다. 이는 또한 다음 세기에 인간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담론을 마련해 줄 것입니다. 여기 이 나라에서 이루어진 일이 전 세계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기술, 마이크로칩, 섬유 광학, 인공위성이 있고, 더욱이 미국의 사상과 유흥은 새로운 세계 정신의 신경망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신흥 세계 문화 안에 지울 수 없는 각인을 남기고 있는 것은 그 정신입니다. 그런데 그 정신의 모호함 때문에 교황님께서는 1995년에 미국인들에게 그토록 열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호소하신 것입니다. “미국이 과학, 사업, 교육, 예술과 여러분의 창의력이 발휘되는 모든 분야에서 계속 발전을 추구하는 노력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향한 동정과 관대함과 관심을 계속 간직하는 것이 인류 가족에게 매우 중요합니다.”5) 이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II. 인간 폐지

    “우리 시대에 정치적 연설과 글은 대부분 옹호할 여지가 없는 것을 옹호하고 있습니다”(조지 오웰, “정치와 영어”〔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

    국가는 기계나 수식이 아니라 하나의 생태계와 같습니다. 한 국민의 관습, 신조, 가치, 제도들은 뿌리 조직처럼 뒤얽혀 있습니다. 한 부분이 중독되면 결국 전부 중독되어 버립니다. 결과적으로, 악법이나 잘못된 법원 판결은 타락한 정치 사상과 행동을 낳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로우 대 웨이드 사건의 여파도 그렇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판결로, 임신 전(全) 기간에 거의 모든 이유로, 또는 전혀 이유가 없어도 낙태하는 것이 사실상 합법화되었습니다. 이 판결은 지난 사반세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비탄과 수백만 태아 살해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방 대법원의 이 1973년 판결 이유의 취약성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훗날 1992년 케이시 판결에서 연방 대법원 스스로 이 취약성을 인정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로우 판결을 유지하는 이유로, 바로 이 판결이 20년 동안 존속되어 왔다는 관례 이상의 더 나은 이유를 찾지 못하였습니다.6) 케이시 판결의 약점과 혼란은 로우 판결 자체의 혼란에서 직접적으로 비롯된 것입니다. 이는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곡된 ‘사생활권’을 새로운 지위에 올려놓고 이를 정당화하고자 새로운 도덕적 잣대를 개발하면서, 로우 판결은 미국 정치계 전반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로우 판결은 실제로 인간에 대한 정의를 쉽게 굴절되고 타협이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은연중에 태아를 인간의 지위에서 제외시켜 버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로우 판결은 계속 자행되는 살해로 예상할 수 있는 다음 단계인 영아 살해가 진지하게 고려되는 길을 열어 놓은 현재의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 일조하였습니다. 결정적으로, 로우 판결 때문에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미국의 많은 젊은 여성들이 자기가 낳은 아기를 살해하거나 유기하는 이유를 공공연히 연민으로 헤아리고 있습니다. 더구나 ‘아기 살해’(infanticide)라는 용어도 ‘신생아 살해’(neonaticide, 아기를 태어난 당일에 죽이는 살해)나 ‘자녀 살해’(filicide, 아기를 태어난 뒤 얼마 지나서 죽이는 살해)처럼 감정적으로 덜 부담스러운 새로운 용어로 대치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살해를 일컫는 명칭을 바꾸면 인식되는 그 심각성도 줄어들게 됩니다. 이것이 실제로 법률과 도덕적 추론과 언어의 생태입니다. 악법과 그릇된 도덕적 추론이 악을 정당화하는 모호한 언어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야말로, 아기가 분만 과정에서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부분 분만 낙태(partial-birth abortion)를 지지하는 선출 공직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언어적, 윤리적 재주를 부리는 일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장삿속이 의사 조력 자살, 태아 실험, 인간 복제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인간을 하나의 문제나 물건으로 격하시켜 버린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로우 판결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로우 판결은 1990년대 말 미국의 모습을 형성해 온 여러 사회적 분수령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판결은 몹시 파괴적인 것이었습니다. 로우 판결이 있은 지 25년 동안, 법률과 도덕적 추론과 언어의 관계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혼돈은 유권자들 사이에 갈수록 냉소주의만 키워 왔습니다. (‘선택’이나 ‘임신 종결’처럼) 언어들이 그 본디 의미를 벗어나고, 우리를 결속시키는 생각과 이상이 무너짐에 따라,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적 참여도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건전하고 바람직한 애국심도 줄어들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볼티모어의 캠던 야즈에서 예언자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당면 과제는 진리 안에서 자유 실현을 찾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 생명이 타고난 진리, 인간 마음에 새겨져 있는 진리, 이성으로 알 수 있고 따라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행동의 방향에 대하여 나누는 깊고 보편적인 대화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진리입니다.”7)



III. 우리는 이 진리를 자명한 것으로 여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인간의 힘은, 우리가 앞서 목격한 바와 같이, 일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내는 힘을 의미합니다”(C.S. 루이스, 『인간 폐지』[The Abolition of Man]).

    우리는 자유와 진리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가 ‘인간의 마음 안에 새겨져 있다’고 믿습니다. 미국의 건국 시조들도 이 사실을 믿었습니다. 1776년에 미국 헌법의 입안자 가운데 한 명인 존 디킨슨은 다음과 같이 확언하였습니다. “우리의 자유는 헌장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헌장은 기존 권리의 선언일 뿐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문서나 인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들의 임금님이시고 온 세상의 주님이신 분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8) 미국 독립 선언서는 “자연법과 자연의 신의 법”에 대하여 언급한 다음, 계속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곧,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께서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하셨으며, 그 가운데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가 있다. …….”고 역사적인 단언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미국적 실험도 2세기가 넘게 지났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건국 시조들은 무장 혁명에 나서며 쓴 이 구절에 그들의 철학만이 아니라 그들의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미국 독립 선언서는 “하느님 섭리의 보호를 굳게 믿으며” 목숨을 건 맹세로 끝을 맺습니다. 미국 독립 선언서는 미국의 건국 원칙들, 곧 인간에 대한 불변의 진리들에 분명히 근거한 원칙들을 밝히고 있습니다.

    선언서의 원칙들은 그 당시 사회, 정치 구조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였습니다. 당시에 인간 노예 제도를 비롯한 사회적 불의들은 건국 시조들이 표명한 높은 이상과 긴장 관계에 있었습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다음에야 이러한 마찰은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우리나라의 건국 원칙들과 정치 현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어 가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양도할 수 없는 생명권에 대한 존중이 줄어들고, 가장 약한 이들에 대한 법적 보호도 없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건국의 진리들이 우리 문화와 법률 안에 더욱 완전히 실현될 때까지 우리 사회에 진정한 정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진리의 하나가 우리 자신의 본질적 피조성입니다. 가상 현실과 유전 과학이 힘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의 창조주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도, 우리는 결코 신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할 수 없듯이, 부모도 그들의 자녀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부모는 새 생명을 특별히 보호하여야 할 책임을 맡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안전은 오로지 거기에 있습니다. 바로 창조주만이 생명권을 비롯한 기본 인권의 주권자이십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밖에서 그리고 위에서, 우리에게 그 누구도 앗아 갈 수 없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과 권리를 주십니다. 오로지 이러한 맥락에서, 곧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인간 존엄을 부여하신다는 맥락에서만 ‘진리’나 ‘자명’과 같은 말들이 그 궁극적인 의미를 찾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불변의 진리를 세우신 창조주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인간 권리도 보장될 수 없고, 어떠한 인간 존엄도 자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을 종파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치 구조에 미친 하느님 주권의 결정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건국 시조들은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자들과 전통 그리스도인들이 섞여 있었으나, 유다인과 무슬림과 다른 종교 집단들과 비신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미국에 정착해 왔습니다. 미국의 관용적인 제도는 문화와 외모와 종교가 다른 이들도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는 유다`-그리스도교 원칙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원칙이 지금도 우리의 국가적 의지를 밝혀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에서 공직의 소명을 지닌 사람들을 상찬하고, 적극적인 시민 의식을 장려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이렇게 상기시켜 줍니다. “정치 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하여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완전한 자기 정당화와 의미를 얻고, 공동선에서 본래의 고유한 자기 권리를 이끌어 낸다. 참으로 공동선은 개인과 가정과 단체가 더 충만하게 더욱 쉽게 자기완성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체를 포괄한다”(사목 헌장 74항). 공동선을 추구할 때, 국민은 “애국심을 너그럽고 충실하게 길러야 하겠지만, 편협한 정신을 버리고, …… 정치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고유 소명을 의식하여야 한다. 확고한 책임 의식을 지니고 공동선의 함양에 진력하여 빛나는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사목 헌장 75항).

    이 과정에서 교회가 하는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정치 공동체와 교회는 그 고유 영역에서 서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다. 그러나 양자는, 자격은 다르지만, 동일한 인간들의 개인적 사회적 소명에 봉사한다. …… 그러나 교회가 언제나 어디에서나 참된 자유를 가지고 신앙을 선포하고, 사회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며,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임무를 자유로이 수행하고,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할 때에는 정치 질서에 관한 일에 대하여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정당하다”(사목 헌장 76항).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1988년 교회와 세계에서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에 관한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Christifideles Laici)에서 이 책임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절대 불가침성을 반영하는 인간의 불가침성은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에서 근본적인 첫 표현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생명의 권리, 최우선적이며 근본적인 권리로서 다른 모든 인권의 필수 조건인 생명의 권리가 최대한으로 수호되지 못한다면, 예컨대, 보건, 주택, 노동, 가정, 문화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인권을 부르짖는 공동의 외침도 비록 이론상 정당하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허구와 환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 인간은 임신[受精]에서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그 생명 과정의 모든 순간에서 그리고 건강하든 병들었든, 성하든 불구이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모든 상황에서 생명권의 주체인 것입니다. …… 참으로 모든 사람이 다 인간 존엄성을 인정하고 생명의 권리를 수호하여야 할 사명과 책임을 지고 있지만, 평신도들은 부모로서, 교사로서, 보건 의료인으로서, 그리고 경제력과 정치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특수한 명목으로 생명권 수호의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평신도 그리스도인」, 38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생명의 복음’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과 사회를,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며 풍요롭게 살아가는 새로운 삶으로 초대합니다. 우리는 이 복음이 미국의 정치 원칙들을 보완할 뿐 아니라, 우리 사회를 물들이는 정신적 병폐를 치유하기도 한다고 믿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듯이, 서로 갈라지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집니다(루카 11,17 참조). 우리는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한 이들을 배제하거나 소외시키는 가운데 인권과 인간 진보를 위하여 투신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생명의 복음을 단지 개인적 신심으로만 실천할 수 없습니다. 미국 가톨릭 신자들은 국가의 지도력과 증언의 문제로서 생명의 복음을 열정적으로, 공적으로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실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IV. 생명의 복음을 실천하기: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

    “생명권을 인정하고 옹호하지 않는다면 공동선의 증진은 불가능합니다. 개인의 다른 모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은 생명권 위에 성립되며, 생명권에서부터 생겨납니다”(요한 바오로 2세, 「생명의 복음」).

    현실 정치에서 인간 존엄의 존중은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인간 생명 수호와 인간 존엄의 증진과 관련하여 광범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선의를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떤 문제들을 다루어야 하는지, 어떤 정책들을 채택하여야 하는지, 그 정책들을 채택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한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에게도, 선출직 공직자에게도 기본 원칙은 간단한 것입니다. 곧, 우리는 제아무리 생명이 온전하지 않다거나,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았거나, 장애가 있다거나, 가망이 없는 것으로 보여도 무고한 인간 생명을 결코 고의적으로 살해하거나 살해에 공모하지 않겠다는 약속에서 시작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행동 방식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 존엄과 언제나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직접 낙태는 결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선택입니다. 이는 언제나 한 여성과 그의 태아에 대한 심각한 폭력 행위입니다. 이는 흔히 임신한 여성이 아기 아빠나 자기 부모나 친구들에게서 받는 심한 압박 때문에 진리를 분별하지 못했을 때에도 그러합니다. 마찬가지로, 안락사와 조력 자살은 결코 자비의 행위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언제나 고통 받고 낙담한 이들을 종용하여 바로 ‘삶의 질’이란 명분으로 생명을 꺼뜨리는 행위입니다. 무고한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살해를 반대하는 이와 같은 가르침이 전쟁 때에 무고한 민간인에게 직접 가하는 모든 공격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우리가 범죄자나 불의한 공격자의 생명까지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의 안전과 공적 질서를 보호하는 데에 사형 제도는 불필요하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형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는 “실제로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극히 드뭅니다.” 아무리 심각한 범죄여도 생명을 빼앗지 않는 형벌이 “인간의 품위에 더욱 적합합니다”(「생명의 복음」, 56-57항). 우리가 다른 이들에 대한 그러한 존중을 보여 주지 못하는 이들의 생명도 포함하여 각각의 모든 인간 생명을 존중하도록 요구할 때, 생명 존중에 대한 우리의 증언이 가장 밝게 빛납니다. 폭력의 해독제는 더 이상 폭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우리의 1995년 성명 ‘정치적 책임’(Political Responsibility)에서 강조하였듯이, “복음 가치를 실제 상황에 적용시키는 일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핵심 활동입니다.” 항구한 생명 윤리를 실천하는 가톨릭 교회는 “생명이 잉태된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 생명을 보호하고 인간 존엄을 촉진하는”9) 폭넓은 노력들을 촉진합니다. 낙태와 안락사에 대한 반대에는 가난과 폭력과 불의로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한 무관심에 대한 반대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인간 생명에 대한 모든 정치 활동은 전쟁의 폭력과 사형의 추문을 반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인간 존엄에 대한 모든 정치 활동은 인종 차별, 가난, 기아, 고용, 교육, 주거, 의료에 관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들은 이 모든 분야에서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옹호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여야 합니다. 가톨릭 신자 공직자들은 삶의 모든 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일관된 정책들을 추진하여 이 문제들을 올바로 다룰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들을 ‘올바로’ 다룬다는 것은, 무고한 인간 생명을 직접 공격하는 잘못된 결정을 결코 좌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가장 연약한 단계에 있는 생명을 보호하고 지지하지 못한다면, 인간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협하는 다른 문제들에 대하여 ‘올바른’ 입장을 지닌다는 주장은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을 ‘성령의 성전’, 곧 하느님의 살아 있는 집으로 이해할 때,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문제는 논리적으로 이 집의 대들보와 벽을 이루는 것입니다. 낙태와 안락사처럼 죄 없는 인간 생명에 대한 모든 직접적 공격은 이 집의 토대를 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권리인 생명권을 직접 침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간과하는 것은 우리의 집을 모래 위에 짓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한 공격은 궁극적으로 다른 인권들을 파괴하는 방식들에 대한 사회적 양심을 무디게 만들기 마련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상기시켜 주셨듯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가 존중하여야 하는 최소한의 것이고, “몇 번이고 반복하여 ‘예.’라고 대답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그 최소한에서 출발하여야 합니다. “이 ‘예.’는 점차적으로 선의 완전한 지평을 받아들이게 될 ‘예.’입니다”(「생명의 복음」, 75항).

    미국 정치 주류에 가톨릭 신자들이 합류한 이래로, 믿는 이들은 자신의 신앙과 민주적 다원주의의 요구를 조화시키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결국, 공직자로 선출된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개인적으로 낙태와 같은 악행에 반대하지만, 자신의 종교관을 더 넓은 사회에 강요할 수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왔습니다. 이는 몇 가지 핵심 요소에서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먼저, 낙태와 관련하여, 인간 생명이 시작되는 시점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입니다. 이는 앞장서서 낙태를 지지하는 이들조차도 분명히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둘째, 인간 생명의 신성함은 가톨릭 교리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인류 도덕 유산의 일부이고, 우리나라의 건국 원칙입니다. 마지막으로, 침묵이 민주주의에 이바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개인적으로 노예 제도나 인종 차별이나 성차별에 반대하지만, 내 개인관을 사회의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주장에 모순이 있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진정한 다원주의는 가능한 모든 윤리적, 법적 수단을 활용하여 자신의 신앙을 제시하고자 열정적으로 분투하는, 신념을 지닌 이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은 그릇된 다원주의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세속 사회에서 신자들은 어떤 도덕적 신념이든, 가정이나 교회에서, 또 공적 영역을 벗어난 곳에서 개인의 양심 안에 간직하기만 한다면 자기 마음에 드는 도덕적 신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도덕성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고, 또 부도덕성을 바로잡는 만병통치약도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민주주의가 구현하고 증진하는 가치들에 따라 높아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합니다. 인간에 대한 진리를 끊임없이 촉진하는 것만이 민주주의에 올바른 가치들을 주입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사회의 누룩이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미국 가톨릭 신자들은 오랫동안 미국 문화생활에 동화되고자 노력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동화될 때 우리는 너무 흔히 그 생활에 녹아 들어가 버립니다. 우리는 우리 문화 때문에 너무 많이 변해 왔지만 이 문화를 충분히 변화시키지는 못해 왔습니다. 우리가 누룩이라면 우리는 우리 문화에 복음 전체, 곧 생명과 기쁨의 복음을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인 우리의 소명입니다. 또한 인간 생명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증진하는 것보다 더 나은 출발점은 없습니다. 폭력이나 그 위협으로 생명의 대의를 증진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 복음의 핵심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촉구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고 ……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1,22; 2,17). 예수님께서도 친히 당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은 활발한 증언의 삶입니다. 이는 도덕적 지도력을 요구합니다. 가톨릭 신앙의 진리 안에서 세례 받은 각각의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복음화를 위하여 파견하신 ‘생명의 백성’의 일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에 필요한 덕성들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비는 우리 기도에 하느님께서는 언제든 응답해 주십니다. 그 무엇보다도 아무리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더라도 우리는 인간 생명에 대한 진리를 말할 정직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거짓말은 우리가 대중문화의 구조와 타협과 유혹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기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식별할 줄 압니다. 우리는 주님께 속하고, 주님 안에 우리의 힘이 있으며, 주님의 은총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낙태 문제에 관하여 우리의 친구와 반대자 양쪽 모두의 이야기를 배움의 자세로 편견 없이 귀 기울여 듣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과업의 궁극적인 성취를 확신하면서, 어떠한 차질이 있더라도, 하느님을 믿고 인간 생명의 보호를 위하여 싸워 나가는 불굴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공적 분야에서 언제, 어떻게 활동하여야 할지 아는 현명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바로 신중함을 가장하는 행동에 대한 두려움을 식별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든 사도직 생활의 위대한 토대인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도덕이나 정치적 관념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격적 현존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의 능력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과 자비에 대한 희망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사랑에 뿌리를 두고, 우리를 반대하는 이들을 포함한 다른 이들을 향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덕은, 그 도움으로 활력을 얻는 생명의 복음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공공 생활에 어느 모로든 관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진지하게 숙고하여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 주교들은 특히 공개적으로 가톨릭 신자로 확인된 이들을 포함하여 정치 지도자들과 모든 미국인에게 회개를 촉구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에서 상기시켜 주셨듯이,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이 성실하게 이어져 내려오는지, 그리고 신자들이 그 가르침과 반대되는 교설이나 이론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우리 사목 활동의 일부입니다”(116항). 교회의 으뜸 교사인 우리는, 정치 활동과 정책을 통하여 생명의 복음을 거스르는 지도자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교정해 주고, 경고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불가침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소홀히 하는 가톨릭 공직자들은 무고한 생명을 빼앗는 일에 간접적으로 공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도자들을 다루는 첫 단계는 언제나 사적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도를 통하여, 꾸준히 사랑의 진리를 말함으로써, 또 우리 삶의 증언으로, 그들이 태아와 모든 미약한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인간 존엄에 마음을 활짝 열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또한 이 지도자들에게 사회 안에서 진정한 도덕적 지도력을 발휘하여야 할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이 의무는 그들이 아무 생각 없이 여론 조사에만 집착하거나, 여성의 선택을 지지하는 공허한 구호만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과 그들의 유권자들에게, 태어나지 않은 아기도 인간임을 교육하고 인식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국민들에게 생명의 존엄과 낙태의 잘못에 대한 교리 교육을 하고, 국민을 복음화하는 노력을 배가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일부 가톨릭 공직자들은 교회의 증언에 마음을 열지 않고 진리에서 멀어질지도 모릅니다. 모든 경우에, 주교들은 그러한 공직자들에게 관련 문제들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그들의 마음을 바꾸도록 줄기차게 요청할 의무와 사목적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주교들은 특히 『성무일도』 독서 기도의 한 대목을 묵상합니다.

    “우리는 짖지 못하는 개가 되거나 말 없는 구경꾼이 되지 맙시다. 늑대를 보고 도망쳐 버리는 삯꾼이 되지 맙시다. 그리스도의 양 떼를 지키는 충실한 목자가 됩시다. 그레고리오 성인께서 「사목 규칙」에 쓰신 대로, 하느님께서 능력을 주신 만큼, 큰 사람이든 작은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온갖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선포합시다.”10)
    사제, 수도자, 교리 교사, 가톨릭 학교 교사, 가정 사목 봉사자, 신학자들은 모두 생명의 신성함을 존중하도록 가톨릭 신자들을 교육하는 교회의 과업에 각자 나름대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그 과업에 새로운 마음으로 헌신하기를 요청합니다. 그들은 말과 모범으로, 모든 인간 생명은 어떠한 발달 단계에 있든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진리를 충실히 기쁘게 증언하여야 합니다. 의사, 간호사, 보건 종사자는 낙태를 고민하는 여성과 소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과 상담과 입양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기 전문직에서 의식적인 복음 선포자가 되어 하느님께서 생명의 주님이심을 말과 모범으로 증언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적 지도자의 지위에서 봉사하는 특권을 지닌 가톨릭 신자들은 특별히 인간 생명의 신성함과 존엄에 관련된 문제들에서 자신의 신앙을 공공 봉사의 핵심에 두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영국의 수상이던 토마스 모어는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저버리기보다 자기 목숨을 내어 주는 길을 택하고, 처형당하기 전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왕의 충실한 신하로 죽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느님의 신하로 죽습니다.” 1990년대 말의 미국에서 선출 공직자들은 그들의 목숨을 안전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공직자들은 낙태 반대의 신념에 따라 공직을 수행하다 보면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게 될 것입니다. 이 길을 선택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그 길이 정당하고, 그들의 증언을 통하여 생명을 살리며, 하느님과 역사가 그들을 잊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밝혀 둡니다. 더 나아가, 증언의 위험이 과장되어서도, 증언의 힘이 과소평가되어서도 안 됩니다. 책략이 난무하는 시대에, 많은 유권자들은 실체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도덕적 신념을 진지하게 밝히는 정치가들을 존경하고 지지합니다. 우리는 가톨릭 신자든 아니든, 용기와 결단으로, 모든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을 촉진하고자 자신의 지도자 지위를 활용하는 공직자들을 추천합니다.

    우리는 가톨릭 공직자들이 자신의 공직 생활에서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서 떠나겠다고 선택할 때에, 그 결과로 다른 이들을 중대 범죄로 이끌어 가는 추문만이 아니라 자기 영혼의 안녕도 숙고하도록 촉구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인간 생명의 근본 문제들에 대하여 취하는 행동이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 그들이 수행하는 공적 역할과 신실한 가톨릭 신자로 자처하는 그들의 신분 사이에 있는 엄청난 모순을 성찰해 보도록 요청합니다. 어떠한 공직자든, 특히 자신이 성실하고 진지한 가톨릭 신자라고 주장하는 공직자라면 그 누구도 무고한 인간 생명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분명하게 옹호하거나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도덕적 악을 허용하거나 조장하는 법률, 예를 들어, 태어나는 인간 생명의 파괴를 허용하는 법률의 통과를 방지하거나 번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선출 공직자가 생명을 옹호하는 입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이라면, 그는 그러한 법이 일으키는 해악을 제한하도록 합법적으로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책이나 절차, 다수의 뜻이나 다원주의를 핑계로 공직자는 최대한 생명을 수호하여야 하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삶의 여정에서 지도자들에게 그러하듯이, 어떠한 정치 지도자도 자신의 권력 행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생명의 복음」, 73-74항 참조). 낙태가 국법이라는 핑계로 자신의 무위를 정당화하는 이들은 더 높은 법인 하느님의 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이 만든 어떠한 법도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계명을 타당하게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장소와 모든 시대에 생명의 복음은 선포되어야 하고, 인간 생명은 보호받아야 합니다. 도덕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장소에는 정부 청사뿐 아니라 투표소도 포함됩니다. 낙태와 안락사와 조력 자살을 허용하는 법률들은 몹시 부당한 것이므로, 우리는 이 악법을 반대하고 바꾸도록 평화로운 방식으로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합니다. 이 법률들은 부당하기 때문에 시민의 양심을 구속하거나 유효한 것으로 지지를 받거나 묵인되거나 인정될 수 없습니다. 우리 국민은 그러한 근본적인 인권 침해가 우리 사회에 존속하는 것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시민이, 특히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의 시민권을 단순히 의무와 특권만이 아니라, 생명의 문화 건설에 참여하는 뜻깊은 기회로 받아들이도록 촉구합니다. 모든 목소리가 공청회에 중요합니다. 모든 투표가 중요합니다. 책임감 있는 시민의 모든 행동은 개인의 뜻깊은 권한 행사입니다. 우리는 인간 생명, 특히 태어나지 않았거나, 장애가 있거나, 미약한 하느님 자녀의 생명을 수호하는 방식으로 그러한 권한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신뢰할 만한 공직자들을 뽑아야 합니다. 그들의 덕성은 ― 또는 그 결여는 ―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이 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동료 시민들이 정당을 초월하여 생각하고, 선거 구호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소속 정당이나 단순한 사리사욕이 아니라 원칙에 따라 정치 지도자를 뽑도록 촉구합니다.

    우리는 부모들이, 교황 성하께서 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Familiaris Consortio)에서 인용하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말씀을 되새겨 보도록 촉구합니다. 가정은 “사회의 첫째가는 핵심 세포입니다”(42항).11) 가정이 가는 대로 우리 문화도 갑니다. 부모는 자녀의 첫 교육자입니다. 특히 인간의 성과 생명 전달이라는 중요한 분야에서 그렇습니다. 부모들은 먼저 그들 스스로 열린 마음으로 새 생명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다음으로 인격적 표양을 통하여 가난한 이들, 나이 든 이들, 태중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을 존중하도록 자녀를 교육시킴으로써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 갑니다. 생명의 복음을 실천하는 가정은 증언을 통하여 복음화의 역군이 됩니다. 그러나 또한 가정은 사회를 개혁하고, 생명의 신성함을 드높이려는 목적에서, “국가의 법률과 제도가 가정의 권리와 의무를 침해하지 않고 나아가 가정의 권리와 의무를 지지하고 옹호하는지 살펴야 합니다”(44항).

    여성은 인간 생명의 전달과 양육에서 유일무이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들은 낙태의 쓰라린 정신적 상처와 ‘선택’이라는 말에 담긴 공허와 무의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성들이 새로운 생명 수호를 위한 여성주의로 생명의 복음을 촉진하는 데에 특별한 역할을 맡아 주기를 당부합니다. 여성들은 예기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다른 여성들에게 조언하고 지원해 줄 수 있는 탁월한 자질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미국에 3,000개 이상의 임신 지원 센터들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데에 앞장서 왔습니다. 그 누구보다 더 효과적인 방식으로 여성들은, 선출 공직자들이 만민의 평등권 옹호를 바라는 모든 정치 의제는, 태어났거나 태어나지 않은 모든 자녀의 평등한 권리를 천명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여성들은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계명과 더불어 천부적 권리에 대한 우리나라의 독립 선언이 참된 자유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줄 수 있습니다. 그 밖의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은 ‘생명, 자유, 행복 추구’에 헌신하는 국가로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고 이 복음에 봉사하는 모든 이를 추천합니다. 그들은 평화적 행동과 교육과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진리를 증언하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실천합니다.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들에 대한 봉사를 통하여 그들은 주님의 평화와 위로를 전해 줍니다. 우리는 그들이 인내심을 갖고 이 힘든 활동을 계속하도록, 결코 용기를 잃지 말도록 당부합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처럼, 생명의 복음에 대한 충실한 헌신은 우리 시대에 ‘반대받는 표징’이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미국에서 그토록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정치 생활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교회의 영향력과 미국 사회의 개방성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민주주의는 …… 도덕적 모험이고, 공동선과 개별 시민들의 선익에 봉사하는 국민의 자치 역량에 대한 지속적인 시험입니다. 개별 민주주의의 생존은 그 제도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입법과 행정과 사법 절차에 영감을 불어넣고 또 스며들어 있는 정신에 훨씬 더 많이 달려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실제로 진리와 가치를 수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양성할 수 있는 문화에 달려 있습니다.”12)

    미국의 세기를 마무리하고, 우리나라와 세계를 위한 새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는 미국이 계속 희망적이고 훌륭한 목적을 간직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말대로, 우리의 소명은 “인적이 드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길은 법률에 뿌리내린 인간 자유의 길입니다. 이 법률은 이제 인간의 신성함에 대한 진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미래는 모든 새로운 세대가 결정짓습니다. 자유는 언제나 두 갈래 길, 곧 생명으로 이끄는 길과 죽음으로 이끄는 길(신명 30,19 참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가 선택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모든 국민에게 호소합니다. 특히 권위를 지닌 공직자들에게, 그 가운데에서도 더 각별히 가톨릭 공직자 여러분에게 우리가 이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호소합니다. 우리는 선의를 지닌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적 변화, 곧 모든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바탕으로 한 공공 생활과 제도의 진정한 쇄신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여 주기를 당부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거의 2,000년 전에 당신 아드님을 성모 마리아께 맡기셨듯이, 우리도 오늘 이 서한을 마치며 생명의 복음을 공공 광장에서 효과적으로 증언하려는 우리 국민의 모든 노력을 성모 마리아께 의탁하고자 합니다.

미국의 수호자이신 성모 마리아님, 임신[受精]에서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에 대    한 사랑을 저희 안에 새롭게 해 주소서. 외아드님께서 저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셨듯이, 저희가 다른 이들을 섬기며 살아가도록 도와주소서. 교회의 어머니, 우리 구세주의 어머니, 우리나라를 보호하시고, 생명의 복음에 저희 마음을 활짝 열어 주시어, 저희가 진리를 증언하게 하소서.


<원문 A Statement by the Catholic Bishops of the United States, Living the Gospel of Life: A Challenge to American Catholics, 1998.11.18.>


1. Henry Luce, “The American Century”, Life, 1941.2.17.
2. 요한 바오로 2세, 볼티모어/워싱턴 국제 공항 출발 연설, 1995.10.8., 25 Origins, 318면, 1995.10.19.
3. 요한 바오로 2세,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한 연설, 1995.10.5., 25 Origins, 305면, 1995.10.19.
4.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한 연설, 1995.10.5., 25 Origins, 303면, 1995. 10.19.
5. 요한 바오로 2세, 뉴어크 도착, 공항 연설, 1995.10.4., 25 Origins, 301면, 1995.10.19.
6. 남동부 펜실베이니아 가족계획협회 대 케이시 판결(505 US 833, 1992)에서 연방 대법원은 펜실베이니아 법률 가운데 낙태 규제 관련 규범들을 대부분 유지하였다. 그러나 법원은 로우 대 웨이드 판결의 이른바 ‘중심 주문’을 번복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지난 20년간의 경제 사회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은 피임에 실패할 경우에 낙태가 가능하다는 데 바탕을 두어 서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자아관과 사회적 입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505 US 856.
7. 요한 바오로 2세, 캠던 야즈에서 한 강론 ‘자유란 무엇인가?’(What Freedom Is), 1995.10.8., 25 Origins, 314면, 1995.10.19.
8.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청 주재 미국 대사의 신임장을 받으며 한 말씀, 1997.12.16., 27 Origins, 488면, 1998.1.8.; C. Herman Pritchett, The American Constitution, McGraw-Hill, 1977, 2면에서 인용.
9. 미국 가톨릭 협의회, 이사회, “정치 책임: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기,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을 보호하기, 공동선 추구하기”(Political Responsibility: Proclaiming the Gospel of Life, Protecting the Least among Us, and Pursuing the Common Good), 1995, 12면.
10.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의 편지, 78, MGH, Epistolae, 3, 352.354, 로마 예식에 따른 「시간 전례」(6월 5일 독서 기도), 뉴욕: Catholic Book Publishing Co., 1975; 『성무일도』 2, 1687면 재번역.
1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사도직 활동」(Apostolicam Actuositatem), 11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글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1(제3판 4쇄) 참조.
12. 요한 바오로 2세, 텍사스, 오클라호마, 아칸소 주교들의 사도좌 정기 방문 때에 한 말씀, 1998.6.27., 28 Origins, 282면, 1998.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