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교회의 문헌
2014-05-26 00:00
2020-07-03 11:42
5,924
[담화] 2014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

2014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문

“순교 영성으로 민족 화해를”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해마다 6월이 되면 우리 민족이 한 형제이면서도 총부리를 겨누고 마치 원수라도 되는 듯 전쟁을 치른 아픈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이 땅에 전쟁이 멈춘 지 60년이 되었는데도 우리 민족은 화해를 하지 못하고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아픔이 더해 가고 절망이 깊어 가고 있는 이때에 그동안 따뜻한 말씀과 미소와 행동으로 온 세계에 기쁨과 위로를 주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우리나라를 방문하십니다. 제6회 아시아 청년 대회와 124위 순교자들의 시복식을 주례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특히 방한하시는 교황님께서는 분단의 아픔을 안고 있는 한반도에 따듯한 위로와 축복을 주시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계심을 알고 있기에 기쁨이 더욱 큽니다. 교황님께서는 교황 즉위 직후인 예수 부활 대축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메시지를 통해 “아시아, 특히 한반도의 평화를 빈다.”고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올 1월 외교 사절단과 가진 신년 하례식에서는 “대한민국과 외교 관계 50주년을 기하여 한반도에 화해 선물을 주십사 하느님께 빈다.”고 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바오로 6세 교황님의 「민족들의 발전」을 인용하시며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219항) 하고 재천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오늘 하루를 어떻게 봉헌해야 할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분단 상황에서 전쟁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것보다, 지금 여기에서 얼마나 평화를 위해 힘쓰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지난 세월호 참사는 우리 민족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그리고 인간 사이에 꽃피어야 할 질서와는 너무나도 멀게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와 우리 민족의 부끄러운 얼굴을 확실하게 보여준 세월호 참사 앞에서, 사랑과 책임, 생명 존중과 희생이라는 윤리가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깊은 큰 참회와 성찰을 해야 함을 느낍니다.

평화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생명과 하느님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며, 함께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평화와 통일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평화의 원천이신 주님께 기도드리고,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를 실천할 때 얻게 되는 것입니다.

순교 영성으로 민족 화해를!

이제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는 길은 바로 ‘순교 영성으로 민족 화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순교는 하느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를 뜻합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치는 무한한 헌신입니다. 103위 순교 성인과 곧 복자가 되실 124위 순교자들은 생명을 바쳐 우리 민족과 하느님 사이의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그 반석 위에 오늘의 한국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민족 화해는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가 이념과 체제 때문에 갈라져 반목하며 분열된 우리 민족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는 속죄와 구원의 길입니다. 그 원동력이 순교 영성입니다. 순교 선열들이 보여 준 하느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와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는 헌신의 마음 없이 민족 화해를 향한 열정을 불태우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체제와 이념의 벽을 넘습니다. 순교 선열들은 체제와 이념의 벽을 뛰어 넘어 하느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의 길을 따랐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화해의 제물이 되는 것을 조금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체제와 이념의 벽을 구실 삼아 “형제적 사랑으로 화해할 수 있다는 신념”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북녘 형제들을 형제적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화해해야 한다는 신념 자체를 두렵게 만드는 분단 현실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이들에게 어떻게 전달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사려 깊게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분단 현실을 책임진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확인하고 서로 나눌 수 있도록 이들을 변화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에 소홀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민족 화해의 길은 더욱더 멀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103위 순교 성인과 124위 순교 복자를 허락해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보답하는 길은 오늘 이 시대에 알맞은 방식으로 그분들의 순교 영성을 본받는 길뿐입니다. 비록 우리의 생명을 바치지는 못하더라도 기도와 희생을 통한 순교의 길을 힘껏 따라나서야 합니다. 십자가의 희생을 본받아 순간순간 우리 스스로를 화해의 제물로 봉헌하는 순교 영성의 길, 그 길이 바로 민족 화해의 길입니다.

기도와 사랑의 실천

민족 화해를 위한 방법은 ‘기도와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 교회가 민족 화해를 위해 처음 시작했던 활동은 기도 운동이었습니다. 민족화해위원회의 밑거름이 되었던 북한선교후원회는 추운 겨울에도 임진각 벌판에서 미사를 드리고 묵주 기도를 바쳤습니다. 매달 그곳을 찾아왔던 분들의 가슴에는 “기도로 통일을”이라는 리본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말하셨듯이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령 그 누가 통일의 지혜와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하고,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보여 준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끝은 허망할 것입니다. 오늘 남과 북 사이에 절실한 것이 바로 이러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 길이 바로 민족 화해의 길입니다.

순교의 영성으로 사도 바오로가 말씀하신 사랑 실천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것이 오늘 이 시대의 징표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불신과 증오를 떨쳐 버리고 사랑으로 가득 채워 민족 화해의 새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소명인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한 끼 식사비를 절약해서 북한 동포 한 사람이 한 달간 먹을 수 있는 국수를 마련”하는 ‘사랑의 국수 나누기 운동’을 펼쳤고, 끊임없이 밀가루를 비롯해 식량을 지원했던 일들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아무리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형제적 사랑 회복’이 계속될 수 있도록 식량 지원을 비롯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하고자 하는 종교인들의 남북 교류와 민간인들의 여러 가지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큰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사랑의 실천으로 이 땅에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이 우리 한반도에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남북한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2014년 6월 22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이 기 헌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