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교회의 문헌
1999-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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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채탕감서명운동취지문] 가난한 이들에게 대희년의 기쁨을

외채 탕감 서명 운동 취지문

가난한 이들에게 대희년의 기쁨을
- 외채 탕감 서명 운동에 즈음하여 -

“1999년의 목표는 신앙인들의 시야를 넓혀 그들이 그리스도의 전망 안에서,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마태 5,45 참조)의 눈으로 세상 만사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제삼천년기」).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대희년 준비를 위한 마지막 해의 목표를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이 해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 만사를 바라보고 생각하고 행동할 줄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 인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눈으로 무엇을 먼저 보십니까?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출애 3,7). 그 옛날 하느님의 눈에는 이집트에서 재산도 자유도 없이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제일 먼저 들어왔습니다. 그 백성을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옮겨 주시고 먹고 살 만큼 토지를 골고루 나누어 주신 것이 출애굽 역사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파스카 축제를 통해서 이를 영구히 기념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정착한 다음에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부자와 가난한 이들 사이의 차이가 또다시 심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이 노예의 처지로 떨어지자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처지를 불쌍히 보시어 희년 제도를 제정하셨습니다.
“오십 년이 되는 이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킬 해이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레위 25,10).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재산을 모두 잃고 노예의 처지로 떨어졌다가도 희년이 되면 본래의 재산을 다시 찾아 가난에서 벗어나 떳떳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여러 지역의 많은 사람이 놓여 있는 형편은 다시 한 번 이 희년 정신의 구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추세는 가속화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특히 가난한 나라들의 외채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부자 450명이 가진 재산이 인류 전체의 56%를 거느리고 있는 여러 가난한 나라들의 국민총생산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자들의 재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동안 그 반대편에서는 가난한 나라의 빚이 그처럼 빠른 속도로 불어났습니다. 이른바 외채라는 눈덩이는 지금 2조 1천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500조 원이라는 덩치로 불어나 가난한 나라들을 눈사태처럼 덮쳐서 그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채의 문제가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된 것은, 1970년대에 기름 값이 대폭으로 인상되면서 산유국에 달러가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갔는데, 이를 처리할 길이 없자 투자 목적으로 국제 금융 기관을 통해서 이를 외국에 빌려 주기 시작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자가 적었는데 여러 나라가 경쟁적으로 달려들면서 이자율이 급격히 올라갔기 때문에 가난한 나라들의 짐은 점점 더 무거워졌습니다. 게다가 빌려간 돈의 약 20%는 무기 구입에 쓰여지고, 또 많은 부분이 독재자들의 개인 재산으로 빼돌려졌습니다. 이래저래 빌려다 쓴 돈은 엄청난데 국민의 실제적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거나 도리어 전보다도 더 어려워진 곳이 대단히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짐바브웨에서는 외채 문제가 등장하기 시작한 1980년대를 기준으로 할 때, 학교, 의료 시설 등 국민 생활에 직접 관계되는 기관이 그 전에 비해서 30%나 줄어들었으며, 우간다는 외채에 대한 이자를 갚는 데에만 전 국민을 위한 의료비의 4배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태를 생각할 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당부를 깊이 새겨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하여’(마태 11,5; 루가 7,22 참조) 오셨음을 상기한다면, 우리가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에 어찌 더 큰 역점을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그토록 수많은 갈등과 참을 수 없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으로 점철된 우리의 세계에서 정의와 평화에 대한 투신은 희년의 준비와 경축을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레위기의 정신(25, 8-12 참조)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희년이, 여러 다른 일들 중에서도 특히, 여러 국가들의 미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국제적 부채를 완전히 탕감해 주든가, 아니면 크게 감면해 주는 방향으로 배려하기 위한 적절한 시기라고 제안하면서 세상의 모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것입니다”(「제삼천년기」, 51항).
개인적으로나 공동체로나 일단 진 빚을 그냥 탕감만 해 준다고 해서 문제가 완전히 풀리지는 않는 것도 사실이며, 그 후에 따를 결과까지를 생각할 때 바람직하지 않은 측면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희년을 기해서 외채를 탕감해 주기로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차관의 운영 관리에서 그 자금이 해당 국민들의 실질적 삶을 향상시킨다는 본연의 목적대로 분명히 쓰여질 수 있도록 하는 만단의 장치를 강구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외국에서 들여온 돈이 그런 엄격한 조건 아래에서만 관리 운영된다면, 차관을 둘러싸고 지금까지 일어났던 온갖 문제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전제 아래 우리는 외채 탕감을 위한 국제적 서명 운동에 동참하여 대희년의 정신이 구현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금년 중에 열릴 선진 8개국 회의가 독일에서 있을 것인데, 그 이전까지 2,200만 명의 서명을 받아 이 회의에 제출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서명은 런던에 있는 외채 탕감 서명 운동 본부로 보낼 것이오니, 5월 16일까지 서명하시어 주교회의 2000년 대희년 주교특별위원회 사무국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대희년의 기쁨이 이웃 형제, 우리 동포, 나아가 지구 저쪽 편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도 실질적으로 전달되고, 그렇게 하여 우리가 아버지 앞에서 함께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는 기쁨을 경축할 수 있도록, 우리의 노력을 보태기로 합시다.

1999년 4월 6일
2000년 대희년 주교특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