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교회의 문헌
1999-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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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은총과 평화의 대희년에

천주 강생 2000년 대희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담화

은총과 평화의 대희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를 경축하며 온 세상에 은총과 평화를 선포하는 대희년이 밝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구원이 베풀어지는 ‘은총의 해’, 하느님께서 특히 가난하고 뒷전으로 밀려난 이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시는 자비의 때를 열어 주셨습니다. 2000년 대희년은 저마다 생명을 얻고 더 얻는 구원의 때임을 되새기면서, 모든 형제자매 여러분이 그리고 구원을 갈망하는 세상의 모든 이가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를 빕니다.
교회는 사도 시대 이래 끊임없이 복음을 선포하여 왔습니다. 동서양이 만나는 곳에서 출발한 구세주의 복음 선포는 제일천년기 동안 유럽 대륙에, 제이천년기에는 세상 온 대륙에 그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이 복음화의 과정에서 교회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 때문에 때로는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에서 벗어난 언행으로 참된 복음화에 장애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최근 교황님께서도 대희년의 은총을 가득히 받아 새날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지난날의 부족했던 것과 잘못을 반성하고 사과하며 새 복음화에 정진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한국 교회도, 지난날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하고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참회하며, 대희년을 맞아 새 복음화의 사명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순교 성인들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한국 교회는 지난 200년 동안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교황님을 모신 가운데 103위 순교자 시성식과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특히 지난 40여 년, 우리나라 전체가 가난과 싸우며 여러 가지 난관을 헤쳐 나오는 동안, 평신도들의 아낌없는 노고와 희생은 매우 자랑스러운 것이었으며, 수도자들의 봉헌 생활과 사목의 협력은 보기 드문 것이었고, 사제들의 봉사는 참으로 헌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오늘의 한국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는 세계의 주목을 받을 만큼 활발하고 빠른 성장을 거듭해 왔으며, 수도자와 성직자의 수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한편, 한국 교회가 이렇게 발전하고 성장하면서도 한국 사회 속에서 참된 삶과 복음의 표지가 되지 못했던 점을 반성하여야 하겠습니다. 박해를 받는 동안에 애국 애족을 위한 우리의 의식과 처신이 적절하지 못하였으며, 민족의 수난기에는 자주 독립과 해방을 위한 노력에 크게 동참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하며 아쉽게 여깁니다. 국민이 분단과 전쟁으로 상처받았을 때 우리도 역시 많은 희생과 순교의 길을 걸었고 고통을 함께하였으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은 소홀히 하였던 점을 반성합니다.
현재 우리는 사회로부터 좋은 대우와 인정을 받기도 하지만 교세 확장은 중산층에 치중되었고, 예수님께서 가장 마음 쓰시고 사랑하시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충분한 관심과 배려를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사회 속의 불의와 부정을 보면서도 우리 지도자들은 이해관계나 공동체 안의 갈등을 우려하여 명백한 태도 표명을 하지 못한 때도 있었습니다. 이 부족하고 허약했던 생활을 반성하고 대희년을 새로운 마음으로 맞이하여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강생의 신비가 충만히 드러나는 대희년의 문턱에서 교회는 천주 성삼께서 이루시는 통교의 산 표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가 서로 존경하고 협력하며 사랑으로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세례와 견진 성사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몸을 이룬(에페 4,7-13 참조) 선택된 민족이고 왕다운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1베드 2,9-10; 마태 5,13-16 참조).
사제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목자로서 수도자들과 평신도들과 함께 책임과 권한을 나누며 교회 공동체에 봉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평신도들은 우리 교회 초창기의 자발적 활동과 열의를 되살려 교회와 사회에 자기 고유의 역할과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식과 지혜 그리고 용기를 갖추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수도자들은 복음 삼덕을 토대로 하느님 나라의 산 증인이 되고 고유한 은사를 살리면서, 한국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따라 교구와 본당에서 사목 활동에 많은 협조를 계속해 나가기 바랍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새로운 천년기는 커다란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이 더욱 줄어들어 이른바 ‘지구촌’을 이루게 되었으나, 사회의 기초인 가정이 파괴되고, 세대 간 민족 간 지역 간 종교 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고, 무한 경쟁의 시장 경제로 말미암은 빈부의 격차가 더욱 커지고, 경제적 선진국과 후진국의 골을 깊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현실 속에서 교회는 사회 정의와 공동선을 위하여 연대 의식과 보조성의 원리를 고취하여야 합니다. 또한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자기보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노사 관계의 대립을 피하고, 서로 화합하고 봉사하면서, 모두 평화와 행복을 누리며 기쁘게 살아가는 세상을 이룩하여야 합니다. 교회 일치 운동과 종교 간 대화도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추진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 민족의 가장 큰 과제는 평화 통일을 이루는 일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먼저 진심으로 회개하고 우리들의 마음에서 모든 미움을 몰아 내어야 합니다. 교회가 앞장서서 온 민족의 화해를 북돋우고, 동포애를 살려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평화 통일을 위한 진지한 대화와 화합의 길을 찾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경제 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파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 생명의 터전으로 잘 지키며 관리하라고 주신 자연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환경을 살리는 것은 곧 생명을 살리는 것이고, 생명을 살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신성한 사명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과 연대하여 노력하여야 할 과제입니다.
제3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 교회는 이제 내적으로 더욱 성숙하여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때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깊은 애정을 쏟고 교육에 힘쓰며, 복음의 씨앗이 한국이라는 토양과 문화 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하고, 신앙생활과 전례를 토착화하여 새로운 문화 창출에 이바지하며, 참된 생명 문화를 꽃피워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세계 교회와 일치하여 온 인류를 구원으로 이끄는 선교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특별히 아시아 대륙의 복음화에 우리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여야 합니다.
이 역사적 사명과 대희년의 축복을 이웃과 나누며 다 함께 새로운 천년기를 향하여 큰 걸음을 내디딥시다. 각자 ‘나부터 새롭게’ 되어 구세주의 마음과 일치하고, ‘참된 가정을 이루어’ 사회의 기초를 튼튼히 하며, ‘좋은 이웃이 되어 주어’ 이웃 사촌이라는 전통을 실감하며, 사회의 정의와 공동선이 이룩되도록 ‘함께 가요, 우리’를 구체적인 생활로 실천합시다. 하느님께서 필요한 은혜를 베푸시어 도와주실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생 2000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대희년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이 대망의 2000년을 경축하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께서 풍성히 강복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000년 대희년을 맞으며
1999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