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2019-12-1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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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2020년 제53차 세계 평화의 날 교황 담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53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2020년 1월 1일)


희망의 여정인 평화: 대화와 화해와 생태적 회심


1. 장애와 시련에 맞서는 희망의 여정인 평화

평화는 소중한 선(善)입니다. 평화는 우리 희망의 대상이고 온 인류 가족의 열망입니다. 평화를 향한 희망은 실존적 긴장을 특징으로 하는 인간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실존적 긴장 덕분에,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현재라면, 그리고 이 목표를 확신할 수 있다면, 또한 이 목표가 힘든 여정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것이라면,” 우리는 온갖 어려움 안에서도 현재를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1) 따라서 희망은, 극복할 수 없어 보이는 장애들이 있을 때조차도 우리가 여정을 시작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덕목입니다.

우리 인간 공동체는 기억으로든 실재로든 전쟁과 분쟁이 남긴 상흔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점점 더 큰 파괴력을 지니는 전쟁과 분쟁은 특히 가난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에게 끊임없는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가 증오와 폭력을 조장하는 착취와 부정부패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수많은 이들의 존엄성, 신체적 온전성, 종교의 자유를 포함한 자유, 공동체 연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은 모욕과 배척, 슬픔과 불의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 민족과 그들이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구조적 적개심에서 비롯되는 정신적 상처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국내외 분쟁의 참상은 흔히 무자비한 폭력으로 증폭되고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칩니다. 모든 전쟁은 인류 가족의 사명으로 새겨진 형제애를 파괴하는 일종의 형제 살해입니다. 

흔히 전쟁은 타인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관용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관용이 소유욕과 지배욕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전쟁은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이기심, 교만, 증오에서 비롯됩니다. 그러한 인간의 마음은 파괴로 이끌며, 타인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고 그들을 배척하며 없애버리도록 몰아갑니다. 전쟁은 관계의 왜곡, 패권 장악의 야망, 권력 남용, 타인에 대한 두려움, 다양성을 장애물로 보는 시각으로 부추겨지며, 동시에 이 모든 것을 악화시키는 것도 전쟁입니다. 

최근 저의 일본 방문에서 강조했듯이, 역설적이게도 “이 세상은 공포심과 불신으로 지탱되는 거짓 안보에 바탕을 두면서 안정과 평화를 수호하고 보장하려 하는 사악한 이분법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민족들 사이의 관계를 해치고 모든 대화의 가능성을 가로막아 버립니다. 평화와 국제적 안정은 상호 파괴에 대한 공포나 전멸의 위협에 기반한 그 어떤 시도와도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평화와 국제적 안정은 미래에 봉사하는 연대와 협력의 세계 윤리에서 시작될 때에만 가능합니다. 미래는 오늘과 내일의 온 인류 가족이 상호 의존과 공동 책임으로 일구어 가는 것입니다.”2) 

모든 위협적인 상황은 불신을 키우고, 자기만의 안전한 곳을 찾아 움츠러들도록 부추깁니다. 불신과 공포는 관계를 약화시키고 폭력의 위험을 증대시키면서, 결코 평화의 관계로 이끌 수 없는 악순환을 만들어냅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핵 억제도 신기루 같은 안보만 만들어낼 따름입니다. 

따라서 전멸의 공포를 통한 세계 안정의 유지를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핵의 구렁텅이로 이어지는 벼랑 끝에 매달려 있고 무관심의 장벽에 갇혀 있는 지극히 불안정한 평형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인간과 피조물이 서로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버림을 받는 비극적 상황들을 불러오는 사회 경제적 결정들이 내려집니다.3)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평화와 상호 존중의 여정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위협과 공포의 병든 논리를 어떻게 깨뜨릴 수 있습니까? 현재 만연하고 있는 불신의 힘을 어떻게 타파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 공동 기원을 두고 있는 우리는, 이 공동의 기원에 기초하고 대화와 상호 신뢰로 이루어지는 참형제애를 추구해야 합니다. 평화를 향한 갈망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 갈망을 채울 때까지는 만족한 채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2. 기억과 연대와 형제애에 기초한 경청의 여정인 평화

히바쿠샤(Hibakusha), 곧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생존자들은 오늘날 집단 양심의 불꽃이 꺼지지 않게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히바쿠샤들은 다음 세대들에게 1945년 8월에 일어난 그 사건의 참상과 지금까지 이어지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그들의 증언은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을 일깨우고 보전하여 인류의 양심이 온갖 지배욕과 파괴욕에 더욱 강력히 맞설 수 있게 합니다. “현재와 미래 세대들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잊지 않게 해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기억이 더욱 공정하고 형제애 넘치는 미래를 보장하고 증진합니다.”4)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히바쿠샤들처럼, 미래 세대가 과거 사건을 잊지 않게 하려고 기억의 지킴이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이와 같은 과오가 재발되거나 과거에 사람들을 현혹시킨 계략들이 다시는 생겨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경험의 열매인 기억이 평화 증진을 위한 현재와 미래의 결정들에 밑바탕이 되고 영감으로 작용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욱이, 기억은 희망이 펼쳐지는 지평입니다. 전쟁과 분쟁의 어둠 속에서도 연대의 작은 몸짓을 체험했을 때, 이에 대한 기억이 용기 있고 영웅적이기도 한 결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이러한 기억은 개인과 공동체 안에 새로운 활력을 북돋우고 새로운 희망을 불타오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화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도전 과제입니다. 사람들, 공동체들, 국가들 사이의 수많은 이해관계가 상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의 도덕적 양심에 그리고 개인적 정치적 의지에 호소하여야 합니다. 실제로, 평화는 인간의 마음 깊숙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정치적 의지는 언제나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개인과 공동체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새로운 길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공허한 말이 아니라 확신에 찬 증인들이 필요합니다. 곧, 배척이나 조작 없이 대화에 열려 있는 평화의 일꾼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서로 다른 견해와 이념을 뛰어넘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확신에 찬 대화 없이는, 참평화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평화는 “언제나 꾸준히 이룩해 나가야 하는 것”5)입니다. 평화는, 우리가 언제나 공동선을 추구하고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며 법을 존중하면서 함께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상호 경청은 상호 이해와 존중으로 이끌 수 있고, 심지어 원수에게서 형제자매의 얼굴을 알아보게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평화의 여정은 지속적인 투신을 요구합니다. 평화의 여정은,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고,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복수심보다 훨씬 강한 공동의 희망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길을 여는 인고의 노력입니다. 법치국가에서, 민주주의는 이 평화 여정의 중요한 기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민주주의는 정의에 바탕을 두고, 각 개인의 권리, 특히 힘없고 소외받는 이들의 권리를 수호하고자 노력하며, 계속 진리를 추구해 나가야 합니다.6) 지역과 국가와 전 세계 공동체의 모든 차원에서, 각 개인이 책임감 있는 기여를 하는 사회를 건설하고 이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오로 6세 성인께서 강조하신 대로, “평등과 참여의 소망은 하나의 민주주의 사회 형태를 요구합니다. …… 이것은 사회생활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을 잘 하려면 각자의 권리를 아는 동시에 그 필연적 상호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곧,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의무의 자각과 실천은 특히 자기 절제와 책임의 수락과 개인과 단체에 제시된 자유 사용의 한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7)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분열되고, 사회적 불평등이 증대되며, 온전한 인간 증진을 위한 수단들을 활용하는 것이 거부될 때, 공동선 추구는 위태로워집니다. 그러나 말씀과 진리의 힘에 바탕을 두는 인내로운 노력은 연민과 창의적 연대를 위한 더 큰 역량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경험으로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기억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화해를 위하여 당신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로마 5,6-11 참조). 교회는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추구하는 데에 온전히 동참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 가치들을 전하고 도덕적 가르침과 사회 활동과 교육 활동을 펼쳐 나가면서, 계속해서 공동선에 이바지하고 평화에 대한 희망을 키워 나갑니다. 


3. 형제적 친교 안에서 이루는 화해의 여정인 평화

성경은 특히 예언자들의 말씀을 통하여 개인과 민족들에게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계약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배욕을 버리고 우리가 서로를 인격체로, 하느님의 자녀로, 형제자매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결코 그가 한 말이나 행동에만 국한시켜 바라보지 말고, 그 사람이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하느님 약속을 보고 그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러한 존중의 길을 선택할 때에만, 우리는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버리고 희망의 여정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들려주는 다음의 복음 구절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이 화해의 여정은, 용서하는 힘과 서로를 형제자매로 알아볼 역량을 우리의 마음속 깊은 데에서 발견하라는 초대입니다. 용서하며 살아가는 법을 익힐 때,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은 더욱 커집니다. 

사회 분야에서 평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정치나 경제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평화의 문제는 공동체 생활의 모든 차원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정의로운 경제 체계를 이룩하지 못하면, 그 어떠한 참평화도 없을 것입니다. 10년 전에 베네딕토 16세께서 회칙 「진리 안의 사랑」에서 밝히신 그대로입니다. “저개발을 척결하려면, 교환을 바탕으로 한 상거래와 공공 복지 제도를 개선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전 세계적으로 무상성과 친교에 몫을 할애하는 경제 활동 형태에 점진적으로 열려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진리 안의 사랑」, 39항).


4. 생태적 회심의 여정인 평화 

“우리의 원칙들을 잘못 이해하여 종종 자연을 착취하거나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횡포, 또는 전쟁과 불의와 폭력을 정당화하여 왔다면, 우리 믿는 이들은 이러한 행동이 우리가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지혜의 보고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8) 

우리는 타인을 향한 적개심과 우리 공동의 집에 대한 존중 부족으로 발생한 결과들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천연 자원에 대한 과도한 착취를 감행한 결과도 마주합니다. 이는 지역 공동체, 공동선, 자연에 대한 고려 없이 목전의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천연 자원을 여기는 데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우리의 생태적 회심이 필요합니다. 최근에 열린 ‘범 아마존 지역에 관한 주교대의원회의 특별 회의’의 뜻에 따라, 우리는 공동체와 땅, 과거와 현재, 경험과 희망의 평화로운 관계를 새롭게 촉구합니다.  

이 화해의 여정은 하느님께서 우리에서 선물로 주신 공동의 집인 이 세상에 대한 경청과 관상도 요청합니다. 실제로, 천연 자원과 다양한 형태의 생명과 지구는 우리가 “일구고 돌보도록”(창세 2,15)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우리는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모든 사람의 책임감 있고 적극적인 참여를 통하여 이를 일구고 돌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고방식과 시각을 바꾸어, 더욱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창조주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반영하는 피조물을 선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더욱 강력한 동기와 새로운 길을 발견하여, 공동의 집에서 살아가고,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며, 우리가 받아 함께 나누는 이 생명을 존중하고 기릴 수 있습니다. 또한, 삶의 지속적인 번영과 인류 가족 전체의 공동선 증진을 촉진하는 사회의 조건과 형태를 모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호소하고 있는 생태적 회심은 창조주의 너그러움을 생각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생명을 바라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창조주께서는 우리에게 이 지구를 주셨고 기쁨과 절제로 그것을 공유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이러한 회심은 관계들의 변화로 통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형제와 자매, 다른 살아 있는 존재들, 풍요롭고 다양한 피조물, 그리고 모든 생명의 기원이며 원천이신 창조주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생태적 회심은 “예수님과의 만남의 결실이 그들을 둘러싼 세상과의 관계에서 온전히 드러나도록”9) 요구합니다. 


5. 우리는 희망하는 모든 것을 얻습니다10)

화해의 여정에는 인내와 신뢰가 필요합니다. 평화를 희망하지 않으면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먼저, 이는 평화의 가능성을 믿고 다른 이들도 우리만큼 평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감도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자유롭게 해 주고 무한하며 무상으로 주어지고 지치지 않는 사랑입니다. 

두려움은 흔히 갈등의 원천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적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되찾은 아들의 아버지처럼(루카 15,11-24 참조), 우리를 사랑하고 기다리시는 그분께서는 우리를 가련한 자녀로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형제적 만남의 문화는 갈등의 문화를 타파합니다. 모든 만남을 하느님의 너그러우신 사랑이 주는 기회이며 선물이 되게 합니다. 형제적 만남의 문화는 우리의 좁은 지평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우리를 이끌어, 우리가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보편적 형제애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이 여정에서, 세례 받은 이들의 죄의 용서를 위하여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화해의 성사로 힘을 얻습니다. 개인과 공동체를 새롭게 해 주는 교회의 이 성사는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 화해의 성사는 우리가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이웃을 향해서든 피조물을 향해서든 모든 폭력 행위를 멀리하도록 요구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은 조건 없는 사랑으로 베풀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를 받은 우리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고자 길을 나설 수 있습니다. 날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말을 이끄시어 우리가 정의와 평화의 장인이 되게 해 주십니다.  

평화의 하느님, 저희에게 강복하시고 저희의 도움이 되어 주소서.  

평화의 군왕의 어머니이시며 지상의 모든 민족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화해의 여정으로 가는 모든 걸음마다 저희를 동행하시고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가 평화로운 삶을 살고 그들 안에 간직하고 있는 사랑과 생명의 약속을 온전히 실현하게 되기를 빕니다.


바티칸에서
2019년 12월 8일
프란치스코

1) 베네딕토 16세,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 2007.11.3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7(제1판), 1항 수정 번역.

2) 프란치스코, 핵 무기에 관한 연설, 나가사키 원폭 투하 중심지 공원, 2019.11.24. 

3) 프란치스코, 람페두사에서 한 강론, 2013.7.8. 참조.

4) 프란치스코, 평화에 관한 연설,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2019.11.24.

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78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글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7(제3판), 304면.

6) 베네딕토 16세, 이탈리아그리스도인노동자연합 대표들에게 한 연설, 2006.1.27. 참조.

7) 성 바오로 6세, 교황 교서 「팔십주년」(Octogesima Adveniens), 1971.5.14., 24항, 교회와 사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제1판), 470면 수정 번역.

8) 프란치스코,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2015.5.2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5(제1판), 200항.

9)  「찬미받으소서」, 217항.

10)  십자가의 성 요한, 「어두운 밤」(Noche Obscura), II, 21,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