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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장 문서 (사목교서·부활,성탄 메시지)
[서울대교구]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
- 미사는 새로운 복음화의 중심 -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루카 22,19)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께서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구는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뜻에 따라 2013년 한 해를 ‘신앙의 해’로 지내면서 우리의 허약한 신앙을 강화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을 계속 이어가고자 신앙 강화를 위한 다섯 가지 방안을 한 해에 한 가지씩 실천하면서 지내왔습니다. 말씀으로 시작되어, 기도로 자라나며, 교회의 가르침으로 다져지는 신앙 강화의 여정을 걸었고, 올해는 미사로 하나가 되는 신앙의 해를 보내고자 합니다.

미사 전례는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입니다. 주님의 말씀, 공동체의 기도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신앙의 종합선물과도 같은 미사는 새로운 복음화의 중심이며 원동력입니다.

미사 안에 현존하시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2천 년 전에 배경과 기질이 서로 다른 제자들을 하나로 불러 모으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서로 다른 우리들이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미사 안에 현존하시며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주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형제적 공동체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곳이 바로 미사입니다.

미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호를 그으면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성호경을 바치면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녀임을 고백합니다. 말씀 전례 중에는 독서와 복음을 함께 들으면서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에 집중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뒤로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 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이룹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미사 전례 중에 ‘신경’을 바치며 가톨릭 교회가 2천 년 동안 소중하게 간직해 온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한 신앙 안에서 서로 일치를 이룹니다. 시간적으로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지켜 왔던 모든 신앙의 선조들과 하나가 되고, 공간적으로는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가톨릭 신자들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찬 전례에서도 주님과의 일치, 신자들 서로 간의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예물을 봉헌하면서 십자가 상에서 당신 자신을 바쳐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어려운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그들과 일치를 이룹니다. 성찬 전례의 핵심인 영성체에서 주님과의 일치, 신자들 간의 일치가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분의 몸인 성체를 영하게 되면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또한 사도 바오로가 역설하듯이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이들은 그분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6-17)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당신과의 일치 안에서 서로 가족과 같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가정 안에서 육체적·정신적으로 성장하듯이 신앙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해 참된 신앙이 보존되고 전달되기에 교회를 멀리하면 신앙의 불꽃은 쉽게 꺼져 버립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품 안에 머물면서 미사에 참례하여 복음을 함께 경청하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신앙을 함께 고백하며, 가진 바를 서로 나누고, 영성체로 주님 안에서 서로 일치를 이룰 때 신앙은 유지되고 성장합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특별히 미사 중에 주님의 말씀과 성체의 힘으로 신앙이 자라나 굳건해질 때 세상에 나아가 각자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성체는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선물인 동시에 이웃에게 빵과 신앙을 나누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약속을 상징한다.”고 하시며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타인의 영적·물적 성장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아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각자는 참으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생명을 주는 쪼개진 빵이 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삶을 쪼개어 나눌 수 있는 힘은 바로 성체성사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며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말씀하시는 부활하신 주님 사랑의 힘을 믿고 체험하고 전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하나 되어 굳건한 믿음, 확고한 희망, 따뜻한 사랑의 삶을 사는 우리들은 주님을 모르는 이들을 교회와 복음의 삶으로 인도하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 한 해에는 특별히 미사 전례의 핵심이자 ‘교회 일치의 원천이며 친교의 공현(公顯)인 성체성사’의 삶을 함께 살아가자고 교구민 모두에게 요청하고 싶습니다.

사제 여러분, 여러분은 날마다 축성의 말씀을 되풀이하고 여러분 손에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사랑의 기적을 증언하며 전달하는 고귀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매일 거룩한 미사를 첫 미사 때와 같은 기쁨과 열정으로, 생의 마지막 미사처럼, 유일한 미사처럼 거행하십시오. 또한 감실 앞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자주 가지며, 감실 안에 머무시는 주님을 세상 삶의 자리로 모셔 가십시오.

수도자 여러분, 감실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당신 곁에 머무르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의 친교를 더욱 깊게 하면서 자신의 마음과 삶에 의미와 충만함을 채우고 증언하십시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각자 다르지만 삶에 필요한 빛과 힘을 성체성사에서 얻도록 노력하십시오. 무엇보다도 가정의 아름다움과 사명을 충만히 체험하기 위해서 성체성사의 은총을 재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가정 성화의 기반은 세례성사에 있으며 성체성사에서 그 극치를 이룹니다. 배우자를 위해 헌신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주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사랑의 마음과 나눔의 신비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가정은 최초의 신앙 학교이며 부모는 최초의 교육자’이므로 부모는 믿음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자녀들에게 심어 주고 뿌리내리도록 보살펴야 할 자신의 의무를 항상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하여 미사에 더욱 능동적으로 참례하기 바랍니다. 미사 전에 성실히 준비하도록 합시다. 전례 시작 전에 한 주간의 삶을 돌아보며 감사와 회심을 올리는 묵상과 침묵의 시간을 잠시라도 가집시다. 또한 그날 미사 독서와 복음 말씀을 미리 읽고 마음에 새기도록 합시다. 필요한 경우에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내적 준비를 충실히 하도록 합시다.

성체 공경은 미사 중에는 물론, 미사가 끝난 뒤에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성체께 마땅한 흠숭을 드리기 위해 개인적인 성체 조배와 공동체가 함께하는 성시간과 성체 강복에 자주 참여하여야겠습니다. 그리고 건강이나 노령으로 미사에 함께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하여 병자 영성체로써 영적 도움을 주는 일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올 한 해 동안 미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복음화의 열정을 재발견하고, 교회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체성사가 우리의 삶과 복음화의 중심임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미사 전례 안에서 체험하는 하느님의 깊은 사랑은 우리 각자가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도록 파견합니다. 우리 교구가 미사로 하나 되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임을 함께 느끼며,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 한몸’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체성사의 모범이시며 인류 최초의 감실이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그리스도의 순수한 빵과 포도주가 되신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들과 복자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16년 11월 27일 대림 첫 주일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추기경 염수정 안드레아
[춘천교구]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
-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

╋ 찬미 예수님

1. 2016년 한 해 동안, 우리는 참으로 자비로우신 하느님과 함께했습니다. 언제나 사랑과 용서로 새 힘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 감사드리며 ‘자비의 희년’을 넘치는 은총으로 보냈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고자 노력했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늘 우리 곁에 계시며 깨달음을 주시는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2017년 새로운 은총의 선물

2. 우리가 새로운 은총의 선물로 맞게 될 2017년은, 교구설정 80주년이 되는 2019년을 2년 앞둔 해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설정한 목표를 상기해 봅니다. 『교구설정 80주년이 되는 2019년까지 복음화율 10%와 주일미사 참례율 40%를 달성한다.』 마음의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그 결과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는 잠언의 말씀(16,1)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현재의 수치가 기대에 못 미쳤다하여, 낙담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남은 두 해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며 주님께 지혜와 힘을 청합시다. 주님 포도밭의 성실한 일꾼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은총도 구합시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은총에 은총을(요한 1,16) 주실 것입니다.

3.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사무처와 사목국, 청소년국과 사회사목국, 문화홍보국, 관리국 등 교구에서는 선교를 위해 지속적인 교육과 의미 있는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치러 왔습니다. ‘자비의 희년’ 동안에는 교구의 모든 본당과 사적지를 순례하며 뜻깊은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누린 보람과 감동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사목자들의 헌신적 노력과 많은 교구민의 끊임없는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모든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 당부말씀 드립니다. 우리들의 그동안의 노력과 변화가 일회적이며 일시적인 것으로 마쳐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희생은 언제나 새롭게 봉헌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열정과 새로운 방법 그리고 새로운 신앙의 표현을 계발하여 더욱 정진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하며 치열하게 노력합시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4. 저는 여러분에게 2017년을 맞아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라는 사목교서를 드립니다. 사도 요한은 첫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실천적 사랑을 강조하신 말씀인데, 특별히 ‘진리 안에서’라고 강조합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고별사에서 당신께서 못내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끝내 사랑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

5. 그렇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추구해야 할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진리이신 ‘아버지의 말씀’은 어떻게, 누구를 통해 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베드로께서 우리에게 일러 줍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며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곁에 머무르며 그분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4,6 참조).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6.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와 같은 행복에 이르는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을 성찰해 보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성경말씀을 가까이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는 합니다만, 그분을 알기 위해, 그분의 은총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모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쓰고, 외우고, 살며 진리의 그 아름다움과 감미로움을 맛보아야 합니다. 한 번 맛들인 사람은 결코 진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칩니다. 그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징벌로까지 느낍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8. 우리 교구의 신자들 가운데 주일미사 참례의 의무를 궐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타성에 젖어 마지못해 신앙생활하며 기쁨과 감동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세례를 받은 후, 신앙의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쉽게 냉담에 빠지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많은 사목자들이 이 문제 때문에 고심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들 모두는 말씀에 맛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시편저자와 같이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

9. 2017년 춘천교구의 모든 본당에서 성경 사목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성경 공부반을 새롭게 만들고 기존의 성경 프로그램(여정, 백주간, 40주간, 성독, 통독피정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주십시오. 성경 필사자들도 더욱 늘어나도록 독려하여 주십시오. 모든 신자들이 날마다 성경의 참뜻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사목자들의 정성이 담긴 강론도 필요합니다. 준비하는 시간만큼 정성이 담길 것입니다. 신자들이 흥미를 느끼도록 특별한 행사를 기획하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교구의 각 처,국에서는 이에 합당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도록 노력할 것이고, 본당의 필요에 도움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0.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됩시다. 말씀을 통하여 사랑으로 하나 됩시다. 어둠의 세상 한 가운데 참 빛이신 분이 이미 오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셨습니다(요한 1,18).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2017년은 성경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 말씀을 듣고, 들은 바를 실행하도록 합시다. 바다의 별이며 영생(永生) 얻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성모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며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2016년 11월 27일 대림 제1주일
천주교 춘천 교구장 김운회 루카 주교
[대전교구]
"시노드와 함께 복음의 기쁨을 사는 해"

주님 안에 사랑하는 사제, 수도자, 형제자매 여러분,
2016년 한 해 동안‘자비의 해’ 안에서 ‘병인순교 150주년’을 기념한 우리 교회에게 2017년은 참으로 큰 의미와 과제로 다가옵니다. 우리 모두를 경악하게 한 여러 가지 사건 사고들이 ‘자비의 해’를 언급하기조차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을 드러낸 한 해였습니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순교자의 후손인 우리 대전교구는 이러한 사회 현실이 ‘순교’로 우리를 부르시는 역사적 사명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순교’는 증거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의탁하여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평등과 나눔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온 삶을 증거한 선열을 따르는 한 해가 되도록 다짐해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증거만이 죽음의 문화, 물질만능주의, 무한경쟁주의에서 죽어가는 현대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구원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2017년 대전교구의 사목 목표는 ‘시노드와 함께 복음의 기쁨을 사는 해’로 정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인의 기본 사명이며 존재 이유인 ‘하느님을 증거함’이 그 핵심에 놓입니다. 시노드를 통해 대전교구의 모든 구성원이 증거 실현의 길을 걸어가는 한 해 동안 성령께서 함께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교구 하느님 백성들이 함께 복음의 기쁨을 찾는 여정: 시노드
우리는 2015년 12월 8일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에 교황님이 선포하신 자비의 희년 시작과 함께 교구 시노드를 열었습니다. 저는 교구민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를 더 깊이 체험하고 세상 속에서 그 자비를 살며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공동체로 쇄신되기를 기도하며 교구 시노드를 선포하였습니다.
교구의 사제, 수도자, 평신도 모두 함께 하는 여정인 시노드는 약 7개월의 ‘기초위원회’ 기간을 걸쳐 시노드 정신을 보다 깊이 이해하면서 9개의 분과(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전례, 신심활동, 본당사목, 교회운영, 가정생명, 사회복음화)를 설정하는 등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2016년 7월 5일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지인 솔뫼성지에서 시노드 ‘준비위원회’를 출범하였습니다. 준비위원회 기간은 모든 본당과 기관의 시노드 위원들이 함께 활동하면서 공동체 전체가 교회의 현실을 함께 바라보고 공유하는 시간입니다. 이 여정은, 교구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파악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동시에, 우리가 누리는 은총의 기쁨 속에서 더 심화하는 길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시노드 기간 동안 우리의 체험들이 시작점이 되어 미래의 모든 사목과 신앙생활에 동력이 되고 빛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러한 지향으로 모든 하느님 백성들이 교구 시노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금까지 보여주신 하나된 마음을 변함없이 가져주시기를 청합니다.

가정의 복음화
온전한 사랑으로 부부가 하나로 결합하는 것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의 뜻이고(창세 2,24-25 참조), 모든 사람이 바라는 일입니다. 사람은 가정 안에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라며, 그 안에서 인격을 형성하여 타인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건강한 가정은 한 사람이 건전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뿐 아니라, 복음적인 정신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인 바탕을 형성해 줍니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특히 오늘날 사회 변화와 함께 가족 관계에 있어서 이전에 없었거나 작았던 문제들이 크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어떤 문제들은 복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크게 인식되어 왔지만, 또 어떤 문제들은 사회적으로 보다 안락한 삶을 위해 수용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복음적으로는 오히려 더 큰 위험이 내포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 혼외 자녀들이 생기는 경우가 많이 있고, 한부모 아래서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성장하는 자녀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여러 형태의 이민자들이 늘면서 온전한 정착이 쉽지 않은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한편 노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이들에 대한 적절한 배려가 큰 과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동성애에 관한 문제 역시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긴급 사안입니다. 특히 성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증가하고 있는 이혼 가정과 새롭게 결합하는 이들이 성사생활에 어려운 처지가 될 경우 교회가 사목적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도 당면한 문제입니다.
현대사회의 이러한 경향들이 미래 세계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논의하는 ‘세계주교 대의원회의’가 열렸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세계주교 대의원회의에서 논의된 것들의 토대로 2016년 3월 19일 ‘성 요셉 대축일’에 사도적 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을 발표하셨습니다. 교황님의 이 권고는 ‘가정 교황’이라고도 불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위와 같은 문제들을 깊이 이해하면서, 교회가 하느님 자비의 정신으로 그들에게 충분히 사목적인 배려를 하고 있는지 반성을 촉구하며 함께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사랑의 기쁨⌟ 안에서 성가정을 위한 교회의 깊은 배려를 잘 이해하는 것은 물론, 특히 사목자들은 이 문헌과 더불어 인간사랑에 대한 교리서인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을 깊이 이해하고 사목 현장에서 적극 활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루카 복음을 읽고 필사하기
성경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자비의 역사입니다. 그 가운데 복음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외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자비의 정점입니다. 이에 우리는 교구 설정 70주년을 바라보면서 모든 교구민이 복음정신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살아가려는 지향을 봉헌하는 마음으로 2015년부터 매년 복음서 하나씩 공부하고 필사하고 있습니다. 2017년은 루카 복음을 읽고 필사하기를 권고합니다.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주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말씀이 더욱 돋보이기 때문에 ‘하느님 자비의 복음’이라고도 불립니다. 말씀 안에서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하느님 자비를 닮아 살아가기를 얼마나 원하고 도와주시려는지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깊이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안에 사랑하는 사제, 수도자,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는 주님의 성령께서 이끌어 가시는 공동체이며,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입니다. 우리 각자가 받은 은총과 능력은 서로 서로를 위해 봉사하는 공동선을 위한 것입니다(1코린 12,4-11 참조). 이 공동선은 교회 내에서만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우리들이 세상과도 맺어야 할 관계입니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세상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교구 시노드는 이렇게 교회 안의 여러 가지 현실들은 물론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주님의 뜻을 올바로 전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고 함께 공유하며, 이 시대에 깨어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지향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시노드의 진행 과정에 처음부터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진행될 과정에도 함께 해주시고, 교구 사제들의 사목에도 항상 시노드가 그 중심에 자리하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천주강생 2016년 11월 27일 대림 첫 주일에
천주교 대전교구 교구장 주교
유흥식 라자로
[인천교구]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루카 22,19)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난 해, 전 세계 모든 교회와 더불어 ‘자비의 특별 희년’을 맞아,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묵상하고 느끼는 시간을 보냈고, 나아가 우리도 그 자비를 삶 안에서 베풀기 위해 노력하였던 한 해를 보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무궁무진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작은 마음과 좁은 생각으로는 다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삶의 매 순간 그 자비를 체험하고 그 신비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2017년을 맞이하면서 저는 올 한해 모든 신자들이 ‘성체성사’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더욱 깊이 다가서기를 원합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즉 성사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사랑 그 자체입니다.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생명을 얻고 자라난다’(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34항)고 강조하셨습니다. 성찬례는 교회의 생활의 중심이기에, 우리 신앙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성체를 통해 우리 각자를 받아들이십니다. 성체성사는 친교입니다.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 우리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깊이 느끼고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는 말씀의 깊이를 느끼게 됩니다. 이런 성체성사의 신비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제물로 내어주신 희생을 통해 제정된 것입니다. 희생과 자기 비움이 더 큰 사랑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보다 신자가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는 더욱 비인간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기심으로 자기만의 이득을 추구하고, 자기 아집에 가득 찬 이들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중심이 ‘나’이기에, 그 외의 것은 눈에도, 마음에도 두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는 사회 전반에 걸쳐진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되어가느냐?’고 탄식하지만, 어느덧 우리 자신도 그런 비인간적인 부류에 무의식적으로 동의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이러한 세상에 희망을 주는 강한 빛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 사랑의 신비로, 또 그것을 본받아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원천도 성체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삶 안에서 우리를 ‘사랑의 전도사’로 변모시키는 힘도 성체성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올 한 해, 우리 교구 모든 신자들이 성체성사의 깊은 신비에 초대되었음을 기억하며, 구체적인 신앙의 실천을 하도록 합시다.

하나. 미사는 우리 신앙의 중심임을 더욱 깊이 깨닫고, 주일미사 뿐 아니라 평일미사도 열심히 참여하도록 합시다.

미사를 통해 우리는 성체성사의 깊은 의미를 더욱 깊게 알고, 성체를 모십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여러분이 영성체를 하지 않고, 미사에 참례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영적 친교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 이 영적친교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깊이 새겨질 것입니다.”(34항)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큰 잔치에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하나. 성체조배를 생활화 하도록 합시다.

고 최기산 주교님은 2015년에 김포성당 옛 성전을 ‘성체성지’로 선포하시면서, ‘모든 이가 살아계신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그 사랑 안에서 숨쉬며,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되기를 기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성체조배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의 힘과 위안을 얻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성당에 올 때, 우선 성체께 인사를 드리고, 활동하는 것이 생활화 되었으면 합니다. 특히 본당에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 회의 전에 모두가 성체조배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도 중요한 실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하나. 나눔의 삶, 베품의 삶을 살아갑시다.

고 김수환 추기경님은 ‘서로 밥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시면서 성체성사의 신비와 구체적 삶을 알려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나눔의 삶, 베품의 삶으로 구체화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베풀고, 나눌 수 있는 삶이 바로 성체성사의 신비를 사는 삶입니다. 나, 내 단체, 내 본당, 내 지구, 내 교구, 내 나라를 넘어 서로에게 밥이 되어주는 실천의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나’와 ‘너’를 넘은 ‘우리’가 됩시다.

올 한해도 모든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을 기원하며, 성체성사의 사랑 안에 모두가 깊이 머물기를 바랍니다.

기도 안에 일치를 이루며

천주교 인천교구
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수원교구]
말씀과 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인의 쇄신

친애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1. 수원교구는 지난 2013년 교구 설정 50주년을 기념하며 교구의 미래 복음화를 위한 지표로서『50주년 교서』를 반포하였습니다. 이 교서에서 저는, 오늘날 우리가 안고있는 사회와 교회의 여러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복음적 가치를 “소통과 참여를 통한 쇄신”에 두고, 이 가치의 실현을 위해 전 교구민이 일치하여 매진해 줄 것을 당부하였습니다.1) 이어서 2015년 “소통”을 주제로, 2016년 “참여”를 주제로 온 교구민이 “쇄신”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도록 구체적인 실천사항을 담아 사목교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저는 지난해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자비의 해”를 은혜로이 지낸 것을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2017년을 맞이하며 “말씀과 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인의 쇄신”을 주제로 사목교서를 발표합니다.

2. 하느님의 말씀과 소통하고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성찰은 우리를 쇄신된 삶으로 초대합니다.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우리 교회는 끊임없는 쇄신의 노력을 통해 시대가 요청하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으로 세상 안에서 새 복음화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교회는 더 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더욱이 수도권에 위치한 우리 교구는 급속한 신도시의 개발로 인해 외적으로는 계속 팽창하는 교세에 대응해야 하고, 내적으로는 교구민의 영적 갈증을 채우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마련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교구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교회의 미래와 쇄신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보편 성사”3)인 교회의 쇄신은 그 신비체인 하느님의 백성들이 “말씀과 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다 깊고 풍요롭게 체험하는 데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쇄신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

3. 그리스도인의 쇄신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그 원천을 두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과 함께 세상에 본질적으로 ‘전적인’ 새로움을 가져다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신선하고 질적인 새로움은 우선 그분께서 전해주신 가르침에서 드러납니다. 또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관계 안에서도 드러나고, 제자들에게 남겨 주신 ‘새 계명’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새로움은 십자가상의 희생 제사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신비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권력이나 힘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낮춤으로서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비움과 섬김의 삶은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요 교회 쇄신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에게도 신앙생활의 쇄신을 통해 교회의 구원활동에 참여하도록 인도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비움과 섬김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로마 13,14 참조)4)

신앙 쇄신의 두 축

4. 교회의 쇄신은 그 원천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5) 교회 안에서 말씀과 성사를 통해 구체화됩니다. 모든 새로움의 원천이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성사를 통하여’ 성령과 함께 교회 안에서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6)

말씀을 통하여

5. 교회의 쇄신은 무엇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신자 개인은 물론 교회 공동체 전체를 변화시키는 신비로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은 믿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로마 1,16)이고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7) 특히 교회의 전례 안에서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신자 개개인에게 자신을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구체적으로 만나게 합니다. 따라서 전례 안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직무를 맡은 이들과,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하는 직무를 맡은 이들은 말씀을 듣는 이들이 보다 경건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깊이있게 말씀을 경청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교육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8)

6.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강론은 하느님 말씀이 신자들의 삶에서 더욱 깊이 이해되고 힘을 발휘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9)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풀이하는 직무를 맡은 사제들은 말씀의 단순함을 가리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강론이나 복음 메시지의 핵심을 잃어버린 준비되지 않은 강론을 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10) 또한 말씀을 자신의 양식으로 삼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말과 행동이 강론과 모순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11)

7.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 영성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가득 찬 거룩한 전례를 통해서나, 영적 독서를 통해서나, 또는 적합한 성경 강좌 등을 통해서 성경에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 사목자들의 승인과 배려로 교구에서 시행하고 있는 성경사목에 보다 많은 본당과 신자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거룩한 독서와 접목하여 이루어지는 소공동체 모임의 말씀나누기를 통해 모든 신자들이 공동체의 친교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기를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은 언제나 교회의 친교 안에서 접근해야 비로소 개인주의적 접근의 위험성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성경을 읽을 때에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가 따라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것은 교회가 전례 안에서 말씀을 선포하며 거행하는 것을 동반하고 심화시키기 때문입니다.12)

성사를 통하여

8. 교회는 “구원의 보편 성사”13)입니다. “교회는 일곱 성사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를 표현합니다. 이 성사 덕분에 하느님의 은총이 구체적으로 신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쳐,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신 신자들의 삶 전체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예배 행위가 될 수 있도록 합니다.”14)

성체성사와 입문성사

9.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모든 교역이나 사도직 활동과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생명을 얻고 또 생명을 주는 당신 살을 통하여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노동과 모든 피조물을 당신과 하나 되어 봉헌하도록 부르시고 이끄신다.”라고 상기시켰습니다.15) “성찬례가 참으로 교회 생활과 사명의 원천이며 정점이라면, 그리스도교 입문과정은 언제나 성체성사를 지향하여야 합니다. … 우리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는 것은 성체성사를 받기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실제 사목은 그리스도교 입문 과정에 대한 더욱 통합적인 이해를 반영하여야 합니다. … 거룩한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입문을 완성시키며, 그리스도인의 모든 성사 생활의 중심이자 목표가 됩니다.”16)

10.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그리스도교 입문 과정 곧, 세례성사와 견진성사가 얼마나 통합적이고 효과적으로 신자들을 거룩한 성찬례로 인도하고 있는지 깊이 있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 성급하게 단기적으로, 그리고 단절된 형태로 이루어지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는 신자들을 교회 전례의 정점인 거룩한 성찬례로 인도하는데 충만한 성과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신자들이 세례 받은 후 1, 2년 사이에 냉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교구 내 각 본당에서 시행하고 있는 입문 과정 전반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 안에는 교리교육의 기간, 교리교육의 단계적 과정 및 프로그램, 교리교사의 양성 및 관리, 본당-대리구-교구의 역할 등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포함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본당 사목자와 교리교사 그리고 교구담당자 상호간에 유기적인 소통과 참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고해성사와 병자성사

11. 세속화의 거센 물결은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양산함과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식을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미 신자들을 둘러싼 문화는 죄의식을 잃어버리게하는 경향이 있고, 합당한 영성체를 위해서는 하느님 은총 안에 있어야 함을 간과하는 피상적인 태도를 조장하고 있습니다.17) 따라서 교회는 신자들이 성찬례에 대한 정성과 애정을 더욱 깊게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다양한 교육과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화해 성사에 대한 이해를 더욱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화해성사의 직무를 맡은 사제들은 언제든지 기꺼이, 헌신적으로, 또한 합당한 준비와 자질을 갖추고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데에 주력함으로써 신자들이 고해성사의 부담을 갖지 않고 고해소를 즐겨 찾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12. “병자성사는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을 내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봉헌에 병자들을 일치시켜 그들도 성인들과 함께 통공의 신비 안에서 세상 구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18) 특별히 병자성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성체는 병자에게 파스카 신비의 충만함을 엿볼 수 있게 하므로 적절하게 집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목 현장의 변화에 따라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새로이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로 노인전문요양원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구 대부분의 본당 관할 내에 이러한 노인요양원이 적어도 하나 이상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들 노인요양원에는 다양한 노인성 질환을 앓고 있는 병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가 올바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관할 사목구 주임의 권한과 역할, 이웃 본당 사목구 주임과의 협력, 병자영성체의 식별기준, 지역공동체의 유기적 협력 등에 관한 방안들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성품성사와 혼인성사

13. 교회는 사제 서품이 성찬례의 합당한 거행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라고 가르칩니다.19) 하지만 세속화의 영향으로 세계 교회는 사제부족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미 사제성소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이 현저하게 줄어들기 시작했고, 몇몇 교구에서는 신학교의 유지문제를 염려하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젊은 부부들의 저출산 경향과 무분별한 독신주의는 교회내의 성소자 감소를 넘어 인류의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성소자 양성을 위해 어느 때보다도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선 성소자의 양적인 양성에 앞서, 교회 공동체가 보다 근본적으로 사제직이 갖는 의미를 성찰하고, 사제들은 스스로 그 직분에 합당한 자질을 갖추도록 쇄신해야 할 것입니다. 곧 사제들의 삶이 신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젊은이들이 사제들의 삶을 동경하고 따르기를 희망하기에 충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세속화를 거스르는 사제들의 쇄신을 향한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또한 양성에 있어서도 “현실적으로 또 마땅히 우려해야 할 사제 부족 문제에 대처하고자 성소 식별을 충분히 거치지 않거나, 또는 사제 직무에 필요한 자질들이 부족한 후보자를 신학교 양성과 성품에 허용하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합니다. 필요한 식별 없이 충분히 양성되지 못한 성직자가 성품을 받게 되면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려는 원의를 불러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20)

14. 혼인으로 결합된 남녀의 사랑은 당신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십자가에서 정점에 이르는 그 사랑을 성사적으로 드러내는 표지입니다.21) 혼인성사 안에서 거룩한 서약으로 맺어진 혼인의 유대 안에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이루는 “해소될 수 없고 배타적이며 충실한 유대”22)가 그대로 깃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세속화의 거센 흐름은 이러한 혼인의 유대가 갖는 성사적 의미를 점점 더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이 개인의 성향과 경제적인 이유로 교회 밖에서 혼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이유로 혼인을 미루거나 기피하는 경우를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혼인하려는 그리스도인 젊은이들만큼은 교회 안에서 성찬례와 결합된 사랑의 성사를 통해 혼인의 유대를 맺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일반예식장과 다를 바 없는 비용을 요구하면서 신앙인이기에 불편하고 볼품없는 환경을 감수할 것을 요구한다면 더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갈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거룩한 성사를 거행해야 하는 교회가 장소의 사용을 이유로 경제적 논리를 적용하고, 그 때문에 혼인하려는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간다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더라도 혼인하려는 젊은이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여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가 혼인성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하더라도 혼인이 거행되는 장소 자체가 매력을 잃어버린다면 결국 교회는 혼인성사를 베풀 기회 자체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쇄신의 출발점인 가정

15. 가정은 자녀들에 대한 그리스도교 교육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교회생활의 일차적인 영역입니다.23) 가정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자신을 성화시켜 나갑니다. 교회가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먹고 성장하듯이, 가정의 자녀들도 일상의 식탁에서 대화와 나눔으로 부모의 사랑을 받아먹고 성장합니다. 교회의 전례가 거룩한 성찬례를 정점으로 지향하는 것은 바로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도 음식을 나누는 식탁의 자리에서 서로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빵을 나눌 때에 주님을 알아보았던 것처럼(루카 24,30-31), 우리들도 식탁에서 가족과 음식을 나누며 그자리에 함께 하시는 사랑의 주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모범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16.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 안에서 구원의 성사가 성취되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분 삶의 모든 순간은 하느님 활동에 응답하는 순종적인 믿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인 동정녀이신 그분께서는 하느님 뜻에 온전히 일치하여 살아가시며,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소중히 마음에 새기시고 그 말씀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또한 아드님과 함께 극도의 고통을 겪으시며 당신에게서 나신 희생 제물에 사랑으로 일치하시어 아드님의 희생 제사에 어머니의 마음으로 당신을 결합시키셨습니다.24) 그러므로 우리도 교회의 모범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본받아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지극히 정성된 마음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

평화의 모후이시며 순교자들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1)『50주년 교서』, 3항.
2)『50주년 교서』, 61항.
3)『교회 헌장』, 48항.
4) 『50주년 교서』, 62-69항 참조.
5) 『사목 헌장』, 40항.
6) 『50주년 교서』, 72항.
7) 『50주년 교서』, 73항.
8) 『주님의 말씀』, 58항.
9) 『사랑의 성사』, 46항.
10) 『주님의 말씀』, 59항.
11) 『주님의 말씀』, 60항.
12) 『주님의 말씀』, 86항 참조.
13) 『교회 헌장』, 48항.
14) 『사랑의 성사』, 16항.
15) 『사랑의 성사』, 16항.
16) 『사랑의 성사』, 17항.
17) 『사랑의 성사』, 20항 참조.
18) 『사랑의 성사』, 22항.
19) 『사랑의 성사』, 23항.
20) 『사랑의 성사』, 25항 참조.
21) 『사랑의 성사』, 27항.
22) 『사랑의 성사』, 28항.
23) 『사랑의 성사』, 27항.
2016년 11월 27일
대림 제1주일에,
수원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원주교구]
“행복하여라, 주님께 그 믿음을 두는 사람” (시편 40, 5)
-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신앙의 해 -

+ 찬미 예수님,

친애하는 원주교구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평화를 기원합니다.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 16).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분의 사랑과 은총에 대하여 우리가 응답할 수 있는 자세는 바로 신앙과 희망과 사랑입니다(1코린 13, 13 참조). 교회는 오랜 역사를 거쳐 하느님께 응답하는 인간의 올바른 자세로 신・망・애 삼덕을 강조하였습니다. 저는 원주 교구장을 시작하는 첫 번째 해로서 올 한 해가 원주교구 모든 형제, 자매들이 믿음으로 ‘하느님 은총에 응답하는 신앙의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사악을 봉헌하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창세 22, 3). 성모님께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응답하였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 10). 그리고 믿음의 힘을 강조하셨습니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마태 8, 13).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5, 38; 마르 6, 5 참조). 그리고 병자들을 고쳐주시면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 22; 마르 10, 52; 루카 7, 50; 8, 48; 17, 19).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상전벽해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루카 17 6 참조).

우리에게는 훌륭한 신앙의 모범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나라 순교자들입니다. 그분들은 믿음 때문에 목숨을 바쳤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성 정하상 바오로 회장님과 그 동료 순교자들이 그렇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옥중 편지가 그분의 믿음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천주께서 무시지시(無始之時)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配設)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模像)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爲者)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을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이 입교한 효험(效驗)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배은(背主背恩)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得罪)하면 아니 남과 어찌 같으리오. [...]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천만 바란다.” (김대건 신부님의 「옥중 서한」에서, 1846년 8월 말)

정하상 바오로 회장님이 성직자를 모셔오기 위해 북경을 아홉 차례나 오갔던 삶은 그분의 믿음이 얼마나 돈독한지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 집안에서 아버지가 가장 중하지만, 아버지보다 높은 사람은 임금입니다. 또 한 나라에서 임금이 가장 중하지만 임금보다 높은 것은 천지대군입니다. 아버지의 명을 따르면서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죄가 무거울 것이요, 임금의 명을 따르되 천지대군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죄가 비길 바 없이 클 것입니다. [...] 도리 역시 지역에 구애됨 없이 성스러우면 참된 것이지요. [...] 도리가 참되고 바른지 거짓되고 나쁜 것인지를 자세히 분별하신 뒤에 [...] 금령을 늦추고 체포령을 거두며 옥에 갇힌 이들을 놓아 주시어, 온 백성들과 함께 편안하고 즐겁게 태평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천번 만번 바라고 또 바랍니다.” (정하상 바오로 「상재상서」에서)

순교자들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성직자와 교우들 역시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최근 가경자가 되신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이 그렇습니다. 전국 5도에 흩어져 있는 127개 교우촌의 신자들을 찾아 밤낮으로 이 교우촌, 저 교우촌으로 전전하시다가 순직하셨습니다. 신부님의 13년간의 사목은 참으로 외롭고 고달프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신자들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우리 종교를 실천할 자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사방에 궁핍 투성이요, 사방에 투쟁뿐입니다. 우리는 마치 지극히 큰 죄나 저지르는 듯이 항상 전전긍긍 떨고 있으며, 사람들은 공연히 우리를 미워하고 마치 우리를 흉악범들처럼 멸시합니다. 만일 누가 신앙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즉시 온 가족과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공격하고 그를 인간 중에 가장 부도덕한 자로 여겨 저주합니다. 온갖 방법으로 못살게 괴롭힙니다. [...] 단 한번이라도 [...]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이틀이나 사흘 길을 걷는 것쯤은 오히려 가깝게 여깁니다. 우리는 [...] 미사성제에 참여하려고 떼를 지어 한꺼번에 급히 몰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항상 매우 엄격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명령을 위반하는 신자들에게 아무리 벌을 내려도 신자들은 이 벌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신자들이 막무가내로 순명하지 않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일곱 번째 편지, 도앙골에서 1850년 10월 1일)

우리는 박해시대와 달리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편안함이 우리를 안이하게 만들고 게으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각 교구마다 각 본당마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냉담하고’ 있습니다. 불과 몇 분 걸리지 않는 곳에 성당이 있지만 주일미사마저 궐하고 있습니다. 2016년 한국천주교 통계는 전신자의 20%만 매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신앙의 내용은 「사도신경」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신앙이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일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하느님의 강생의 신비를 믿는 일입니다. 당신의 생명까지 우리를 위해 음식을 내어주신 성체의 사랑의 신비를 믿는 일입니다. 그리고 ‘교회’, ‘죄의 용서’, ‘성인들의 통공’, ‘육신의 부활’ 그리고 ‘영원한 삶’을 믿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어야 할 이 신앙의 내용들이 얼마나 큰 보물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코헬렛 저자가 외치는 것처럼, 그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코헬렛 1, 2)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끝까지’, ‘다 이루어질 때까지’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시드는 풀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이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살도록 미사성제 안에서 베풀어주시는 ‘성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아마 그것을 알았더라면 박해시절 사흘 길을 걸어서라도 미사에 참례했던 그 신자들의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죄의 용서’가 얼마나 절실한 은총인지 죄의 아픔을 겪어본 사람은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은 꿈같은 일입니다. 믿기지 않는 크나큰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놓치는 것이 안타까워서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 31-33).

하느님께 대한 신앙만이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믿음도 중요합니다. 상도덕의 기본은 신용입니다. 부부간에 가장 필요한 것도 상호 신뢰입니다. “믿지 않으면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성 안셀모의 「프로스로기온」 참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신앙을 청합니다. 우리는 세례 때를 기억합니다.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은 그대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말하자면 신앙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손과 같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의 약한 신앙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 5). 그리고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로마 15, 1 참조).

우리 원주교구에는 많은 성지와 유적지가 있습니다. 배론, 풍수원, 용소막, 원동 그리고 강원감영 등 곳곳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순교자들과 선배 신앙인들의 숨결과 발자취가 배어 있습니다. 특히 배론 성지에는 ‘땀의 순교자’ 이신 최양업 신부님의 묘가 있습니다. 최초의 신학교 터가 있습니다. 그곳 성지에 우리 교구의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를 건립하기로 하였습니다. 원주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하여 건의되었던 숙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기도하고, 기도를 배우고, 기도를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신앙을 배우고, 희망을 키우고 사랑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기도학교 건립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우리의 정성을 모읍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 성녀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16년 11월 27일 대림 제1주일
천주교 원주교구장 주교 조규만
[의정부교구]
‘자비’는 앞으로도 그리스도인이 계속 걸어가야 할
중요한 여정입니다.

Ⅰ. 머리말

1. 우리는 지난 한 해 자비의 특별 희년을 보냈습니다.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대로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자비의 희년은 한 해로 끝나는 일이 아니고, 앞으로도 그리스도인이 계속 걸어가야 할 중요한 여정입니다. ‘자비’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의 핵심, 곧 복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2.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황좌에 오르시면서부터 최근까지 지금의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여러 가르침을 통해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셨습니다. 특히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과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그리하셨습니다.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을 통해 현대세계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교회가 어떻게 쇄신되어야 하고, 또 복음 선포자들이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찬미받으소서』를 통해서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훼손되어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며, 생태·환경문제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가난한 나라들을 함께 도울 방법을 마련할 것을 전 세계에 촉구하셨습니다.

3. 2014년 대림주일을 시작하면서 발표된 저의 사목서한 「착한 목자」(Pastor Bonus)는 보편교회의 흐름에 맞추어 우리 교구의 향후 10년간의 사목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구는 ‘소공동체’를 전체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기본 방향으로 정했고, 2년 전부터 ‘생활 다시 보기’를 소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로 선택하고, 이를 본당에 적극 보급해왔습니다.
「착한 목자」에서 제시된 이러한 방향은 그대로 유효합니다. 아울러 최근 한국교회에서 중요하게 제시되고 있는 노인사목이나 생명·환경 사목은 모든 본당에서도 중요한 사목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4. 사목의 기본 구조인 성인사목, 사회사목, 청소년사목은 모두가 알다시피 서로 깊이 연결돼 있습니다. 제가 자주 이야기한 바와 같이 ‘소공동체는 사회사목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하고, ‘소공동체는 청소년사목을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올 해도 이 큰 흐름 아래 각 분야의 사목자들이 긴밀히 협력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Ⅱ. 선교사목

1. ‘생활다시보기’ 훈련의 지속적 추진

교구 설립 이래 지금까지 교회 공동체의 내실화와 사목 활성화를 이루는데 가장 시급한 과제로 ‘평신도 봉사자 양성’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사제들과 교우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있어왔습니다. 저는 이러한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생활다시보기 훈련’을 ‘평신도 지도자 양성’ 방안으로 추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습니다. (「착한목자」 24쪽 참조)
이에 ‘선교사목국’에서는 지난 한 해 많은 본당의 적극적인 협조와 동반자(생활다시보기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노력 아래 ‘생활다시보기 훈련’ 보급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 결과 39개 본당에서 약1,200명의 ‘소공동체 봉사자들’과 ‘예비신자 교리봉사자’들이 9주간의 훈련과정을 수료하였습니다. 수료자들이나 봉사자들은 이 훈련이 개인의 신앙성숙은 물론, 공동체와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갖고 복음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올해도 교구에서는 ‘소공동체 내실화’와 ‘평신도 봉사자 양성’ 차원에서 ‘생활다시보기 훈련’을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갈 계획입니다. 우선 동반자 양성 및 파견을 통해 이미 ‘생활다시보기 훈련’을 실시한 본당은 물론 아직 ‘생활다시보기 훈련’을 경험하지 못 한 본당들에서도 훈련을 실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또한 훈련의 대상을 확대하여 ‘사목위원 및 남성 구역 봉사자’의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올해에도 각 본당 공동체의 적극적인 협조와 참여를 통해 ‘생활다시보기 훈련’이 더 널리 보급되고 내실화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2. ‘가정교회’로 거듭나는 가정 공동체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교부들은 가정을 일컬어 ‘가정 교회’, ‘작은 교회’라 하였습니다.”(가정교서, 제15항) 가정은 하느님의 사랑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아울러 교회의 전통과 문화가 살아 숨 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회입니다.
우리 교구에서는 2014년 가정사목부를 신설한 이래, 모든 가정이 ‘가정교회’가 되도록 사목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올해에도 이러한 ‘사목지향’이 좋은 열매를 맺도록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목실천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첫째: 약혼자 주말의 참여 확대
가정을 이루는 출발 단계에서부터 부부들에게 가정의 중요성과 의미를 전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 진행하는 혼인교리로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습니다. 약혼자주말(Engaged Encounter)은 부부가 혼인성사를 통해 부여받은 사명을 깨달으며, 서로에게 생명을 전하는 그리스도교 문화가 가정 안에 형성되도록 소중한 체험을 제공하는 시간입니다. 아무쪼록 혼인하는 모든 젊은이들이 약혼자주말을 체험하여 그리스도인다운 가정을 시작하도록 그 참여가 확대되었으면 합니다.

둘째: 유아세례 준비를 위한 부모 및 대부모 신앙교육의 적극 활용
신자 부모들은 자녀를 하느님 뜻대로 길러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은 물론 자녀들의 신앙교육에도 소홀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자녀의 유아세례도 통과의례로 끝나는 경우가 흔합니다. 따라서 사목자들은 유아세례를 청하는 부모에게 자신의 신앙생활을 점검케 하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부모의 사명을 확인시켜 주는 교육을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모들도 이 기회에 자신의 의무를 새롭게 자각해야 합니다. 이 교육은 부모들로 하여금 자신과 가정의 삶을 다시금 신앙 안에서 출발케 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 전 이 교육을 의무화 한다면 가정사목의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가정사목부에서는 교육을 진행할 봉사자 양성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봉사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위의 두 가지 사목적 제안은 무엇보다 본당 사제들과 부모들이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참여할 때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들에 힘입어 2017년에는 우리 교구의 모든 가정이 ‘가정 교회’로 거듭나기 바랍니다.

3. 시대의 징표를 읽는 노인 사목

통계청은 2017년 우리나라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 중 14%를 차지하여 고령사회가 될 것으로 예측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구는 2016년 12월 31일 현재 65세 이상 신자비율이 17.4%로 한국 사회보다 빨리 고령사회에 진입한 상태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한국 사회가 고령화에 대해 제기하고 있는 여러 비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이를 희망적인 시대의 징표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노인은 의존적 존재인 것만이 아니라 세상과 교회 공동체에서 주체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능동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노인들이 노년의 삶을 더 풍요롭게 향유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이 방법 가운데 하나가 노인대학운영입니다. 현재 우리 교구에서는 32개 본당이 노인대학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봉사자들의 노력으로 노인대학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것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노인대학을 운영하는 본당을 더 늘리고, 노인대학의 수업 내용을 좀 더 신앙적인 것으로 채워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본당 소공동체의 구역과 반 안에서 지역에 있는 노인들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혈연관계를 넘어 노인들에게 가족의 따뜻함과 희망을 전해 줄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하겠습니다.
이를 큰 방향으로 삼아 올해 우리 교구의 노인사목은 노인들이 교회와 사회 안에서 주체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신앙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주력하겠습니다.

Ⅲ. 청소년사목

1. 우리의 이웃인 청소년·청년들의 곁이 되어줍시다.

2016년은 ‘청소년·청년을 우리의 이웃으로 삼는 해’였습니다. 이를 위해 지난해 사제연수에서는 청소년사목을 주제로 청소년·청년들의 현실을 깊이 인식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초청강연에서 우리는 지금의 청소년·청년들이 얼마나 힘겨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사들의 요청 가운데 핵심 은 ‘교회가 청소년·청년들의 곁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고 함께했던 사제들도 여기에 크게 공감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올 한 해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우리의 어려운 이웃인 청소년·청년들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곁이 되어줄 수 있는 방안들을 과감하게 실천하는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특히 그동안 사목의 사각지대라 할 수 있는 30~40대 미혼의 청장년층과도 함께할 수 있도록 청소년사목국과 선교사목국이 서로의 영역이나 역할을 뛰어넘어 협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사제연수를 통한 청소년 사목의 대안 모색

청소년사목을 주제로 하여 두 번째 맞이하는 올해의 사제연수는 이제 현실 인식 단계를 넘어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실천을 결심하는 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제들의 관심과 열정이 요구됩니다. 모두의 적극적인 참여와 활발한 의견 교환을 통해 건설적인 대안과 실천방안들이 도출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구 사목연구소 산하 ‘청소년사목연구 소위원회’가 한시적으로 담당해온 연구 기능은 사제연수가 끝난 이후에도 지속되고 강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청소년·성인·사회사목 전반이 유기적으로 결합되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신앙인의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체계적인 사목방안 연구를 위해 전담사제와 전문 인력이 보강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3. 신앙교육을 통한 청소년·청년 ‘사도양성’

어린이·청소년·청년들을 자비로우신 하느님과의 만남에로, 어머니인 교회의 관심과 사랑에로 이끌어 그들이 그리스도의 마음과 눈으로,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 안에서 하루하루 걸어갈 수 있는 ‘사도로 양성하는 일’은 교구 청소년 사목이 핵심적으로 추진해 온 방향이었습니다. 이는 인내심과 긴 안목을 가지고 앞으로도 계속 추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4. 청소년·청년들을 위한 공간 마련 및 평신도 사목자 육성

청소년·청년들의 곁이 되는 일에는 그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장기적으로는 연구 및 양성, 청소년·청년들의 다양한 모임이 가능한 적정 규모의 청소년 사목센터가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청소년 사랑방’과 같은 작은 규모의 공간에서 청소년·청년들을 만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청소년·청년들의 만남의 장이요 사목 터전이 될 공간 마련과 더불어 그곳에서 이들을 동반할 평신도 일꾼들도 필요합니다. 평신도 일꾼들을 발굴하고 양성하는 데에도 각별히 힘 써 주시기 바랍니다.

Ⅳ. 사회사목

우리는 지난 해 ‘자비의 해’를 지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생태적 회개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는 데서 실현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이 어려운 시대에 세상의 변화와 교회의 쇄신을 위해 기울이시는 노력은 크게 정의, 평화, 생태적 통합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의, 평화는 『복음의 기쁨』에서, 생태적 통합은 『찬미받으소서』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주제들이 올 한 해에도 교구 및 본당 차원에서,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에서 잘 실천되어 우리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 정의의 차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세계화 영향으로 우리 사회는 ‘고통의 공유화, 이익의 사유화’로 대변되는 모습으로 변했으며 양극화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에 우리 교회는 고통 받는 이웃들에 대해 보다 더 큰 관심과 배려를 기울이는 동시에 사회구조적인 악에 대해서도 깨어 실천하여 ‘가난한 이들의 사회적 통합’(복음의 기쁨, 186항)에도 기여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각 본당사목구 주임들은 사회교리 교육을 확대하고, 신자들이 사회교리에 더 접근하기 쉬운 방법들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사회사목분과가 활성화 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지역사회 안에서 사회교리 실천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2. 평화의 차원

주교회의에서도 밝혔듯이 사드배치 결정은 한반도의 냉전구도를 고착시킬 위험이 있는 사안입니다. 그러나 걱정만으로는 이러한 흐름을 늦추거나 막기 어렵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평화를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야 합니다.
평화를 위한 움직임은 ‘공동선과 사회 평화’(복음의 기쁨, 217항)의 원칙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넘어 동북아 평화로까지 확장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교구와 본당 내에서 현재 추진하는 민족화해분과 구성과 활동,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은 이러한 방향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아울러 모든 교구민이 민족의 화해와 일치, 더 나아가 동북아 평화를 위하여 꾸준히 기도를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3. 생태적 통합

회칙 『찬미받으소서』가 반포된 이후 한국주교회의에서도 생태환경위원회를 설치하여 생태적 통합 차원의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활동이 중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로는 1986년 체르노빌 핵발전소,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방사능 유출 사고 등이 있습니다. 그 참혹한 결과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해로운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생태적 회개를 촉구하고, 인류에게는 후손들의 미래를 보장하는 데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해 9월 경주 지역에서는 역사상 유례없는 큰 지진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는 장차 경주 주변에 있는 핵발전소들에도 큰 타격을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일 이렇게 되면 한반도에 큰 재난이 될 것입니다.
이런 사고들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교구와 본당에서 탈핵과 생태적 의식 전환을 이룰 수 있는 활동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현재 조직된 환경농촌사목위원회의 활동, 특히 생태 사도직 활동을 본당 내에서 더욱 널리 확산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 세 주제들은 서로 연결돼있고 상호보완적입니다. 그런데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복음적 가치가 신앙인의 가치관임을 확인하고, 이를 우리 사회와 우리의 삶 속에 통합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소공동체의 ‘생활다시보기’가 장기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의 ‘생활다시보기’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바탕을 마련하는 한 해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입니다. 정치와 연관된 이러한 선택은 우리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공동선과 사회 평화를 이루기 위해 “정치 참여는 신자들의 소명이며 도덕적 의무”(복음의 기쁨, 220항)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위의 세 가지 차원(정의, 평화, 생태적 통합)은 복음적 식별과 선택에 있어 중요한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선거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V. 순교자 기억과 공경, 전구 그리고 본받음

지난 해 우리는 병인순교 150주년을 맞아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많은 교우들이 박해 중에도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을 본받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특별한 해에 실천하는 일 못지않게 일상에서 이 순교신심을 실천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초대 교회부터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하였고, 그러한 순교록을 보며 순교자의 길을 따르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우리나라도 최초의 순교자였던 윤지충의 기록인 ‘지충일기’가 전해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런 기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사가 잘 정리되어 있고, 순교자들의 약전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공경하며 전구를 비는 기도와 함께 그분들을 본받고자 하는 신심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간직하게 해줄 것입니다.

우리 교구에서 시도하고 있는 ‘순교자 공경회’는 바로 이런 신심운동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순교 성인과 복자들께 전구를 비는 호칭 기도, 한국 교회사에 대한 단계적 학습, 순교자들의 약전 낭독, 순교자를 본받으려는 삶의 나눔, 시복시성 청원 기도 및 한국 순교자들께 바치는 기도와 순례로 이루어지는 순교자 공경회를 통해 순교 신심 운동이 지속적으로 펼쳐지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순교 신심이 바탕이 될 때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우리 교구 성지들의 성역화도 앞당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Ⅵ. 맺음말

지금까지 2017년에 우리 교구가 펼쳐나갈 사목의 큰 개요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실천할 방향만 크게 요약 제시하였기 때문에, 이를 실천하기 위한 세부 실천지침이 더 필요한 상태입니다. 이에 각 본당에서는 이 사목지침서를 바탕으로 사제·수도자, 평신도 대표들이 함께 의논하며 본당 실정에 맞고 실천이 가능한 세부 사목계획을 수립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충실히 실행하고, 한 해를 마무리할 때 반드시 그 결과를 평가하여 그 다음 해 계획에 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시기에 교구 구성원 모두가 용기 있게 한 해를 사실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빌어드립니다.

2016년 대림 1주일
천주교 의정부 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
[대구대교구]
그리스도의 젊은 사도,
청소년과 청년

이천 년 전 한 젊은이가 예수님께“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하고 질문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도 같은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치열한 입시경쟁과 취업준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으며 이는 곧 신앙에 대한 무관심과 주일학교 학생 수의 감소, 냉담 청년들의 증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제2차 교구 시노드(2011.4.8∼2012.10.28)는 첫 번째 주제로 ‘젊은이 복음화’를 다루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교회의 미래인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며 젊은이 사목에 교회의 역량을 모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청소년 사목의 목표는 청소년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체험케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청소년들을 만나는 첫째 사도입니다. 청소년들이 친구들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참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도록 양성해야 할 것입니다(「평신도 교령」, 12항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만드셨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전승되어 왔습니다. 청소년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교리지식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개인 신심 위주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본당과 학교의 가톨릭 학생회나 소공동체, 가톨릭 동아리 등 신앙공동체의 활동을 통하여 기도와 전례, 봉사와 친교, 선교활동 등을 수행함으로써 장차 교회를 이끌어 나갈 역량을 키워나가야 합니다(제2차 교구 시노드 교구장 교서 「새 시대 새 복음화」, 7항 참조).

특별히 부모들은 자녀들과 함께 가정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며 생일이나 영명축일, 조상의 기일 등 가족의 기념일에는 온 가족이 함께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함으로써 가정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본당의 전례적 축제나 다양한 행사에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등 가정공동체와 본당공동체의 유기적 결합을 통하여 교회의 신앙 유산이 자녀들에게 전수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본당은 기존의 주일학교에서 더 나아가‘지역 청소년 센터’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지역에서 한 본당 정도는 형편에 맞게 시설을 보완하고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지역의 청소년들을 초대함으로써 청소년들이 좀 더 쉽게 교회를 가까이할 수 있도록 사목적 배려를 해야 하겠습니다(「새 시대 새 복음화」, 8항 참조).

교구에서는‘2017년 청소년 윤일축제’를 시작으로 청소년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며 청소년들의 1기도 1실천 운동, 청소년을 돕는 청소년(Youth Helping Youth)운동을 전개하며 가톨릭 학생회 활동을 더욱 강화하고 청소년 축제 등 청소년을 위한 행사들을 개최할 것입니다. 또한 장애 청소년 및 다문화 가정 청소년들과 그 가족들이 부담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장애인 주일학교와 다문화 주일학교를 지역별로 운영하고, 학교 밖 청소년과 학교 부적응 학생들을 위해서도 위탁 교육 센터와 특별교육 이수기관, 대안학교 운영 등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청년사목의 목표 역시 청년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체험함으로써 살아있는 교회의 표징이 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대구대교구「청년사명문」, 참조). 이를 위해 제2차 교구 시노드는 본당에 ‘청년위원회’를 설치하여 운영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새 시대 새 복음화」, 23항 참조). 본당 청년위원회는 청년들을 위한 본당의 사목 조직으로서 청년사목에 헌신할 위원들을 발굴하고 청년들의 다양한 신앙적 요구를 파악하여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수 있도록 사목적 지원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교구 청년국에서는 젊은이 성령기도회와 세미나, 파스카 청년성서모임, 선택 주말, 비다 누에바(청년 신앙 쇄신 프로그램), 청년 리더십 등 많은 청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하는 청년들의 욕구에 맞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교재를 연구하고 개발하여 본당에 보급함으로써 본당 청년 사목에 도움을 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대학생사목은 청년사목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하는 분야입니다. 대학생 사목은 군인사목과 더불어 청년사목의 황금어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신앙에 소홀했던 학생들이 다시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곳이 대학입니다. 우리 교구 관할 구역 내에는 4년제 대학이 19개, 전문대학이 16개, 총 35개 대학이 있습니다. 대학생 사목 전담 사제를 많이 확보하여 각 대학별로 찾아가 가톨릭 학생회를 조직하고 청년 신앙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그들이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새 시대 새 복음화」, 24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 7월 28일 폴란드에서 개최된 제31회 세계청년대회 환영행사에서 젊은이들에게“인생의 공허한 스릴을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삶의 의미와 충만감을 주는 힘을 느끼고 싶습니까? 충만함을 찾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진정한 열정을 주실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젖은 젊은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고개를 들라고 말씀하십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현실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현실을 외면하거나 불안과 고난 앞에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의 기운으로 생기 있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젊은 사도들이 될 수 있도록 모든 교구민들이 기도와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성인 성녀님,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2016년 11월 27일 대림 첫 주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 환 길(타대오) 대주교
[부산교구]
본당 재탄생을 향한 새 복음화 (5) - ‘본당 복음화의 해’

교구 공동체는 지난 2013년부터 ‘본당 재탄생을 향한 새 복음화’의 여정을 걸어왔으며, 올해 그 여정을 마무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간 우리는 새로운 복음화를 본당 안에 구현시켜, 본당 공동체의 쇄신과 성숙을 이끌어 내고자 여러모로 노력해왔습니다. ‘2013년 신심운동 복음화’와 ‘2014년 가정 복음화’를 통해, 교구 공동체는 세속주의의 조류에 맞서는 영성적 공동체로 거듭나 신앙인의 정체성을 재확립하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심운동 복음화와 가정 복음화를 바탕으로, ‘2015년 문화 복음화’와 ‘2016년 기초공동체 복음화’를 실천하면서 본당의 내외적 쇄신과 활력을 추구하였습니다.

이제 지난 4년간의 새로운 복음화와 사목활동을 응집시켜, 교구는 올해 ‘본당 복음화의 해’를 지냅니다. 본당은 그 지역에 사는 교회의 현존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인 생활이 성장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전례와 복음선포, 형제애와 애덕실천 등이 이루어져,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세상의 특정한 장소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러한 본당은 다양한 형제적 모임의 공동체로서, 하느님을 만나는 지성소(至聖所)이며 지속적인 선교활동의 중심지입니다. 따라서 본당은 복음화의 첫째 주역이자 그 대상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을 전하여 온전한 복음화를 실현하는 동시에, 본당이 살아있는 친교와 참여의 터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 「복음의 기쁨」, 28항. 30항 참조)

우리가 본당 복음화를 위해 가까이 다가가야 할 사람들은 세 가지 모습으로 구분됩니다. 첫째, 정기적으로 공동체 전례에 참여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 온전히 응답하도록 도와, 그들의 영적 성장을 지향해야 합니다. 둘째, 이미 세례를 받았으나 세례의 요청대로 살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교회를 떠나 있고 더 이상 신앙의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신앙의 위로와 기쁨을 되찾는 새로운 삶을 경험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거나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강요하기보다는, 신앙의 기쁨을 나누는 사람, 구원의 희망을 보여주는 사람, 그리고 사랑의 잔치에 초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당 공동체가 일반 사회 공동체와 달리 참으로 그리스도적인 공동체가 되는 길은 따로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 토대를 두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처럼 믿음 안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 형제적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 「교회의 선교사명」, 51항 참조)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교회에는 활력과 버팀목이 되고, 그 구성원들에게는 신앙의 힘과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가르침은 성경에서 거룩한 힘과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성경을 주님의 몸처럼 공경하여 왔습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으로,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실제로 살아계십니다. 영성체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일치를 이루며,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교우들을 결합시켜 하나의 몸인 교회를 이루십니다.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일치는 성체성사를 통해 경이롭게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성사로 양육되는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적 친교를 나누면서, 몸의 지체는 여럿이지만 한 몸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룹니다. 사랑의 친교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탄생한 교회는, 하느님의 그 신비를 세상에 실제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단순한 친목단체나 영리조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의 영성으로 맺어진 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이 공동체는 사회 공동체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성사로 양육되는 ‘깊고 풍부한 영적 감각을 지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올 한 해 교구민 모두가 ‘본당 복음화’에 함께하여 ‘현세적 욕망’이 큰 이 시대에, 내적 힘과 영성을 지닌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가 정치적 결사체나 이익집단으로 오해받지 않고, 인간 자신의 본질적 치유와 구원을 지향하는 신앙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다하기를 소망합니다.


실천지침

1. 사랑의 잔치에 초대하기 : 공동체 소속 신앙인들

  • - 주일미사, 평일미사 참례를 통한 신앙강화
  • - 가족이 함께하는 기도의 생활화

2. 구원의 희망 보여주기 : 교회를 떠나 있는 신앙인들

  • - 쉬는 교우 돌보기
  • - 쉬는 교우 초대 행사

3. 신앙의 기쁨 나누기 :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

  • - 지역민 선교 계획
  • - 지역사회를 향한 애덕실천
천주교 부산교구장 황 철 수 바오로 주교
[청주교구]
주님과 함께 ‘이웃으로, 세계로’ 제3차 첫째 해
온 세상의 복음화를 준비하는 교구 공동체의 해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한 해를 돌아보며 교구에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2016년 ‘자비의 특별 희년’을 맞이하여 우리 교구 공동체는 하느님의 자비를 증거하는 삶을 살기 위해 힘썼으며, 특히 지역사회 복음화를 지향하며 ‘가장 작은 이를 찾아가는 공동체’가 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새해에는 지역사회를 뛰어 넘어 온 세상을 향한 복음화의 사명을 다짐하며, 주님과 함께 ‘이웃으로, 세계로’ 제3차 시기 첫째 해인 2017년을 ‘온 세상의 복음화를 준비하는 교구 공동체의 해’로 정하였습니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를 향하여

2. 우리 교구는 2005년부터 2008년까지 4년에 걸쳐 시노드를 개최하였고, 시노드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여 교구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이웃으로, 세계로’라는 사명선언문을 토대로 ‘교구 비전 2050’을 이루기 위해 수립된 중장기 계획은 1차시기 4년 동안(2009년∼2012년)에 ‘가정과 소공동체에서 말씀과 성체 중심의 삶을 사는 공동체’, 2차시기 4년 동안(2013년∼2016년)에 ‘지역에서 가장 작은 이를 섬기는 공동체’를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제 중장기 계획의 마지막 3차 시기인 2017년부터 2020년까지 4년 동안은 ‘성찰과 도약의 시기’로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그 목표입니다.

받는 공동체에서 주는 공동체로

3. 2018년에 교구 설정 6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구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으로 78개 본당, 16만 4천여 명의 신자와 180명의 사제, 3개의 장애인 특수학교와 종합병원, 그리고 60여 개의 사회복지 시설을 운영하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성장의 밑거름은 파리 외방 전교회와 메리놀 외방 선교회 선교사들의 복음선포를 위한 뜨거운 선교 열정과 헌신적인 삶이었습니다. 특히 메리놀 외방 선교회 선교 사제들의 선교 활동과 미국 신자들의 물질적 도움은 교구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교구 공동체는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교구는 1981년 파푸아 뉴 기니에 선교 사제를 파견한 이래 해외선교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지속적인 노력을 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해외선교를 활성화 할 것입니다. 3차시기 2020년까지 우리 교구는 해외의 다양한 지역 중에서도 아시아 선교에 주력할 것이며, 특별히 중국과 북한 선교에 역량을 집중할 것입니다. 이는 물질적 지원과 나눔뿐 아니라 인적 자원의 지원과 나눔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며, 이를 통해 온 세상의 복음화를 위한 부르심에 응답할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을 본받는 공동체

4. 이러한 선교 활동은 ‘가경자’ 최양업 신부님을 기리고, 그분의 신앙과 삶을 본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한국인 두 번째 사제이신 최양업 신부님은 청주교구의 첫 사목구라 할 수 있는 진천 배티를 사목 활동의 중심지이자 본거지로 삼고 조선 5도에 산재되어 있던 127개 교우촌을 순회하며 증거의 삶을 살다 선종하신 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최양업 신부님은 1849년 상해에서 성품 성사를 받으신 후, 그리운 고국에 입국하시기 전 6개월 동안 중국 차쿠에서 첫 사목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중국은 최 신부님의 ‘최초의 선교지’였으며, 최 신부님은 ‘한국인 최초의 중국 선교사’이셨습니다. 우리 교구 공동체는 최 신부님을 본받아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 특히 광활한 대륙 중국에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구 공동체의 실천 사항

5. 교구는 2017년 ‘온 세상의 복음화를 준비하는 교구 공동체의 해’를 구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선교 사목 분야에서는 온 세상의 복음화, 특히 아시아 선교 활동을 위한 준비에 역량을 집중할 것입니다. 더욱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해외 선교 활동을 펼 수 있도록 해외 선교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여 파견하고, 그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여 지원하는 데 더욱 노력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본당의 구성원들이 복음 선포자가 되도록 격려하고 교육할 것입니다.
청소년 사목 분야에서는 청소년들을 온 세상 복음화의 주인공으로 양성하는 일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더 넓은 세상을 체험하고, 그들이 그 체험을 바탕으로 미래의 선교사로 양성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이를 지원할 것입니다. 또한, 또래사도 해외선교체험 프로그램 강화, 청년 해외 선교체험, 청년 해외 봉사 등을 통해 온 세상을 향한 선교의 열망을 키워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가정 사목 분야에서는 다문화 가정, 새터민,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것입니다. 또한 특수한 상황에 처한 고통 받는 가정들과 신혼부부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주님과 함께 하는 가정 안에서 복음의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이 ‘선교사의 첫 양성소’로서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매괴 성모님에게 도움을 청하며

6. 끝으로, 교구 공동체가 온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준비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도움이신 매괴의 성모님께서 전구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교구 공동체, 그리고 지역 사회에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이 가득히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2016년 11월 27일
대림 제1주일
청주교구장 장 봉 훈 가브리엘 주교
[마산교구]
2017년 교구장 사목교서

1. ‘마음의 귀’를 쫑긋 세우기

아직 주교라고 불리기조차 어색한 사람이 ‘사목교서(司牧敎書)’ 라는 – 교우분들께는 아주 낯선 제목의 - 글을 올리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목교서라는 말은 다른 게 아니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요한 10,3 참조)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 교구 안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드리는 글이라 여겨집니다.
극히 상징적이긴 합니다만 제가 여러분의 주교요 목자라면, 그렇다면 여러분은 양들로서 제 목소리를 잘 알아듣습니까? 자기 목소리 하나에도 끝내 책임질 수 없는 부끄러운 인간인 저와 제 동료 사제들의 목소리를 여러분들은 어떻게 알아듣고 이해하고 따르며 50주년이 되는 지금껏 살아오셨는지... 그것이 오히려 하나의 신비가 아니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마산교구의 오늘은 하느님의 손길 그분의 자비 없이는 있을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없이는 스스로 서있을 수조차 없는 존재들입니다.(이사야 7,9 참조) 그러니 목자들도 양들도 모두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도록 ‘마음의 귀’를 쫑긋 세웁시다. ‘육신의 귀’에는 오늘의 “여야(與野)”처럼 늘상 서로 헐뜯고 싸우는 일이 다반사겠지만, 사랑으로 오래 참으며 형성된 ‘마음의 귀’ 안에는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한 진정성이 귀하게 살아있을 겁니다.

2. 카이사르의 것 하느님의 것

참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은 어디를 가도 개인을 자유롭게 가만두지 않습니다. ‘여냐 야냐’ ‘종북이냐 수구냐’ 양자택일을 강요당합니다. 심지어 우리 가톨릭 교회 안에도 이런 현상이 심심찮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저는 예수님처럼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마태오 22,21 참조). 그러니까 신자로서 자기가 ‘여’인 사람은 ‘여’로 살면서도 ‘여’로만 살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근본을 하느님의 진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야’인 사람도 ‘야’로서만 살지 말고 ‘여’를 더 높은 진리 추구를 향한 삶의 동반자로 여겨야 한다는 얘깁니다.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또한 귀하게 새겨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여 야’ 의 현실로 살면서도 보다 진실한 ‘여’, 보다 거룩한 ‘야’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하기 시작하는 ‘여’와 저렇게 실행해가는 ‘야’를 우리는 참된 교회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3. 이스탄불의 어린사제

이렇게 진리에로 거룩함에로 불리었지만 여기 우리네 인간 삶이란 참으로 힘겹고 불안하고 무상하기만 합니다. 이제 이런 불안한 목장에서 살고 있는 우리 신부님들과 교우분들께 제가 참 좋아하는 글 한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이스탄불의 어린사제’입니다. 저에게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폭설이 쏟아져 내리는 이스탄불 밤거리에서
커다란 구두통을 멘 아이를 만났다
야곱은 집도 나라도 말글도 빼앗긴 채
하카리에서 강제이주당한 쿠르드 소년이었다

오늘은 눈 때문에 일도 공치고 밥도 굶었다며
진눈깨비 쏟아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작은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선 채로 젖은 구두를 닦은 뒤
뭐가 젤 먹고 싶냐고 물었다
야곱은 전구알같이 커진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빅맥, 빅맥이요!
눈부신 맥도날드 유리창을 가리킨다

학교도 못 가고 날마다 이 거리를 헤매면서
유리창 밖에서 얼마나 빅맥이 먹고 싶었을까
나는 처음으로 맥도날드 자동문 안으로 들어섰다
야곱은 커다란 햄버거를 굶주린 사자새끼처럼
덥썩 물어 삼키다 말고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물었다
세입쯤 먹었을까
야곱은 남은 햄버거를 슬쩍 감추더니
다 먹었다며 그만 나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창밖에는 흰 눈을 머리에 쓴
대여섯 살 소녀와 아이들이 유리에 바짝 붙어
뚫어져라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곱은 앞으로 만날 때마다
아홉 번 공짜로 구두를 닦아주겠다며
까만 새끼손가락을 걸며 환하게 웃더니
아이들을 데리고 길 건너 골목길로 뛰어들어갔다

아, 나는 그만 보고 말았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몰래 남긴 햄버거를
손으로 떼어 어린 동생들에게
한입 한입 넣어주는 야곱의 모습을

이스탄불의 풍요와 여행자들의 낭만이 흐르는
눈 내리는 까페 거리의 어둑한 뒷골목에서
나라 뺏긴 쿠르드의 눈물과 가난과
의지와 희망을 영성체처럼
한입 한입 떼어 지성스레 넣어주는
쿠르드의 어린 사제 야곱의 모습을

특히 우리 교구 젊은 신부님들께 혀를 깨무는 마음으로 이 어린 쿠르드 소년의 마음이 되어줄 것을 당부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사랑하는 우리 교우분들께서 다음 세 가지 성경 말씀에 많이 귀 기울여 주시길 빕니다. 주님 안에 늘 건강하소서.

1.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공동번역: 요한 17,17)
2.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로마 12,9)
3.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이방인을 너희 본토인 가운데 한 사람처럼 여겨야 한다. 그를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레위 19,34)

2017년을 준비하는 대림절에
교구장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
[안동교구]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가정의 쇄신-

1. 교구 설정 50주년(2019년)을 준비하는 첫 단계로 우리 교구는 지난 3년 동안 교구의 사목방향을 “선교”에 초점을 맞추어 전 교구민이 함께 적극적인 선교활동에 힘썼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과제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 선교의 여정을 열심히 걸으면서 양적인 선교를 넘어 참으로 ‘복음의 기쁨’을 누리며 사는 질적인 선교에도 함께 힘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구는 교구 설정 50주년을 준비하는 두 번째 단계로 앞으로 3년(2017-2019) 동안 교구의 사목방향을 교회의 질적인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특별히 내적인 쇄신에 함께 매진하기로 하였습니다. 연차적으로 2017년에는 <가정의 쇄신>을, 2018년에는 <본당의 쇄신>을, 2019년에는 <교구의 쇄신>을 목표로 두고 함께 노력할 것입니다.
앞으로 3년 동안 추진될 쇄신 운동은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는 말씀의 큰 제목 아래 진행될 것입니다. 근본적인 “쇄신”은 우리의 주도권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도권 아래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가정에 관한 복음
2.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부부가 맺은 계약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의해 존중받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인간들 사이에서 맺어진 사랑의 끈이 약해지고 끊어지게 될 때에도 굳건하기 때문입니다.”(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가정에 관한 복음」, 39)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부부의 인연은 ‘멍에’가 아니라 ‘은사’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고한 인간의 마음을 당신의 은총으로 치유하시고 변화시키시며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의 의미를 하느님의 본디 계획을 되살리는 계시의 충만함으로 선포하십니다.(「사랑의 기쁨」, 62항 참조)

3. 가정은 ‘가정에 관한 복음’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가정과 교회가 공동 운명체처럼 함께 했던 교회 역사는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집입니다.(1베드 2,5; 4,17; 1티모 3,15; 히브 10,21 참조) 교회가 모든 이를 위한 집이 되고, 그 안에서 모든 이가 가정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가정에 관한 복음이 ‘가정 교회’(교회헌장 11항 참조)로 불리는 가정 안에서 구체화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가정들의 가정이고, 모든 가정 교회의 삶을 통하여 끊임없이 풍요로워집니다. … 이러한 관점에서 가정과 교회의 상호작용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 시대에 교회를 위한 소중한 선물이 됩니다.”(「사랑의 기쁨」, 87항)

가정의 현실과 대처
4.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정의 현실은 이상적이거나 낭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매우 복잡하고 다양합니다. 인간의 타락과 함께 펼쳐지는 구세사 안에서 부부관계와 가정생활도 타락과 파탄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매우 현실적이고 솔직하게 가정의 현실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이런 현실적인 이야기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가정에 대한 문제들은 오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늘 그래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가정의 가혹한 현실도 직시하여 가정의 슬픔과 염려, 그리고 눈물도 함께 나누어야 함을 일깨웁니다.
오늘날 가정의 현실은 더 복잡하고 다양합니다. 지역 교회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기 교회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현실을 진단하고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구 역시 우리 교구의 특수 상황을 고려한 특별한 사항이 있다면 보다 더 적극적인 관심을 함께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다문화 가정과 독거노인, 결손‧조손 가정에 대한 교회의 관심’입니다.

5.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교회가 따라야 할 전형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모범이라고 강조하시면서(「사랑의 기쁨」, 64항 참조), 교회 사목자들에게 한 가지 일반적인 원칙을 제시하십니다.
“어려운 상황이나 상처 입은 가정들과 마주할 때,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원칙을 늘 명심하여야 합니다. ‘사목자들은 진실을 알기 위하여 상황 파악을 조심스럽게 해 나갈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가정 공동체」, 84항) 그러므로 사목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명확히 설명하여야 하지만, 여러 복잡한 상황들을 고려하지 않은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그들이 처한 상황 때문에 겪는 고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사랑의 기쁨, 79항)

가정의 쇄신을 위하여
6.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쇄신의 주도권이 하느님에게 있기에 먼저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가족관계 회복을 위하여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잘못이 있으면 참회하고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화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친히 깨어진 가족관계를 회복하시고 망가진 가정을 새롭게 똑바로 세우실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훼손된 가정을 그 본디 모습으로 되돌리실 것입니다.

7. 가정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부부가 맺은 계약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의해 존중받으니 하느님께서 친히 축복하신 가정은 우리에게 ‘복음’이 됩니다. 가정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가정에 관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입니다.

8. 회개해야 합니다. 근본적인 쇄신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완고한 마음을 치유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한데 이는 특히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 이 예언의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이제 성령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회개와 쇄신을 통하여 깨어진 혼인의 상처가 치유되고 가정이 본 모습을 제대로 찾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혼인 관계가 깨진 이들을 위한 특별 피정 프로그램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9. 부부는 위기를 기회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정사에는 온갖 종류의 위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극복된 위기는 오히려 혼인과 가정의 새로운 단계를 사는데 보탬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위기는 부부가 서로 더욱 가까워지거나 혼인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 부부가 다가오는 위기를 마주하여 도전을 받아들이고 이러한 것들이 가정생활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람직합니다.”(「사랑의 기쁨」, 232항) 이를 위해 특별히 경험이 많은 주변의 부부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도움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10.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가정의 문제들은 혼자 풀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함께 대면하고 함께 풀려고 노력할 때 문제도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성소(聖召)란 혼자 사는 성소가 아니라 특별히 함께 사는 성소입니다. 그리고 함께 사는 이유는 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 때문입니다. 사실 가정에는 드러난 문제들보다 감추어진 보화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정생활을 갈망하고 가정에서의 기쁨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깁니다.
어떻든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당사자들은 물론 주변(국가, 사회, 교회)에서 함께 노력한다면 가정의 불행과 비극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가정에 관련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목 과제는 사랑을 강화하고 상처의 치유를 도와주어 우리 시대에 이러한 비극이 만연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입니다.”(「사랑의 기쁨」, 246항)


   

2016년 11월 27일 대림 제1주일 천주교 안동교구 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광주대교구]
본당의 해Ⅰ
세대별 활성화 및 일치를 통한 본당 복음화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평화를 빕니다!

복음정신과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이기적 물질주위와 퇴폐적 향락주의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하느님 자비의 빛을 따라가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든 형제, 자매님들께 감사드리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참 평화가 함께하도록 축복합니다.

저는 100주년을 향한 우리 광주대교구의 든든한 초석을 다지는 것이 교구장으로서의 소임이라 생각하며, 지난 2012년 교구설정 75주년을 맞아 교구장 비전을 선포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교구의 발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공동체성의 회복과 강화라는 사목적 판단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성을 체험하고 확인하는 첫 자리인 ‘가정의 복음화’를 비전 실현의 출발점으로 결정하였습니다. 가정은 모든 인간이 공동체적 삶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정체성을 형성하고 키우는 가장 기초적인 자리입니다. 따라서 저는 가정의 회복이야말로 인간성 회복의 첫 출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이런 목표설정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교회와 신앙의 쇄신을 위한 목적으로 이번에 소집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주제가 “가정”이었습니다. 교회 쇄신을 위한 첫 출발이 가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가정의 복음화에 있음을 천명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광주대교구 역시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한 첫 자리가 가정임을 직시하여 지난 2012년부터 3년 동안 기도하는 가정, 복음을 선포하는 가정, 봉사하는 가정이라는 기치 아래 가정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 노력의 열매가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빛 안에서 든든한 결실을 맺어갈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무엇보다 마중물을 부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구의 사목을 일회적인 행사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할 것입니다. 특히 세계주교대의원회의 결과물과 연계하여 지속적으로 추진해 갈 것입니다. 가정은 교회의 거울입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가정을 통하여 믿음과 사랑의 거울이 되어주신 교구민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특히 다양한 사목현장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고 계시는 형제 사제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더욱 적극적인 참여와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난 2012년 발표한 비전에 따라 ‘공동체성 회복과 강화’의 두 번째 단계로 본당활성화를 위해 “본당의 해”를 시작하겠습니다. 본당은 교회가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곳으로서(본당 공동체의 목자이며 인도자인 사제 30항) 하느님의 친교가 실현되며(9항),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탁월한 장소(4항)입니다. 특별히 본당은 신앙인들의 믿음의 삶 전체가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본당의 활성화 없이 교회의 성장은 결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당은 공동체들의 공동체이며, 목마른 이들이 물을 마시러 오는 지성소이며, 지속적인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어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28). 또한 본당 공동체는 구성원들을 통하여 하느님 사랑을 구체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일치의 기쁨, 하느님 안에서의 평화를 살아갈 수 있도록 초대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당활성화에 있어 구성원들의 일치와 활성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세대별 활성화

먼저 각 세대의 고유한 문화와 삶을 존중하고 활력을 불어 넣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형성에 기초를 놓으신 어르신들과 지금의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장년들, 그리고 교회의 미래인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로 우리 교회는 구성되어있습니다. 이들은 각자 고유한 문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의 고유성을 존중하는 것은 교회 활성화와 일치의 첫 출발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르신들을 위한 사목적 선택이 더욱 확장되어야할 현실에 대해 직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어르신들의 깊이 있는 신앙 및 인생의 경륜과 지혜가 공동체에 계승될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교회가 더욱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현재 본당 공동체의 다양한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사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이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가 적절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장년들이 신앙체험의 생활화를 이룰 수 있도록 올바른 신앙교육의 필요성이 절실합니다. 봉사직을 수행하고 있는 장년들의 신앙의 힘이 공동체 결성과 유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동시에 사회 분위기를 형성하는 중심적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삶의 온갖 어려움에 대한 위로와 사목적 배려는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사명 수행의 여정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교회의 미래인 어린이와 청소년, 청년들에 대한 사목적 선택과 집중은 미래를 위한 교회의 우선적 과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야말로 교회의 사명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이는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일 뿐 아니라 젊은이들을 위한 사목적 배려는 곧 모든 이들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세대별 활성화를 위한 프로그램 개발과 실행을 위해 교구와 본당이 유기적으로 협력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세대의 일치와 친교

세대별 활성화뿐 아니라 동시에 모든 세대의 일치를 이루어갈 수 있도록 역량을 모아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동안 일치를 지향하는 것에 소홀히 한 점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이제는 세대별 활성화와 동시에 세대 통합을 위한 사목적 대안을 마련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사회는 극도의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빈부 차이뿐 아니라 세대별 간극의 차가 더욱 확대되고 있습니다. 교회마저도 이런 시대적 물결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분열과 갈등의 고통이 절정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사회 통합과 안정을 위한 노력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평화와 일치의 소명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중요해졌습니다. 본당 구성원들의 공동체성 회복과 강화를 위한 프로그램 개발과 사목적 배려가 확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구청과 본당 사목자간의 유기적 연대가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저도 최선을 다할 것이며, 동시에 우리를 하나로 모으시는 성령께 의탁할 것입니다. 세대별 활성화와 일치를 위한 노력을 통해 본당 공동체가 삼위일체의 친교를 누릴 수 있도록 구성원들 서로 서로에게 활력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요, 가족으로서의 기쁨과 보람을 체험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복음의 기쁨” 실행

본당활성화는 전적으로 본당신부에 따라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문헌에서 “공동체의 성사적 길잡이인 사제가 대신하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완전한 교회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성찬의 전례와 설교, 신자 지도 등 “날마다 통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본당 사목구를 진정한 신자 공동체가 되게 합니다.”(본당 공동체의 목자이며 인도자인 사제 2항)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제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당 사목자들이 자신들의 생활과 활동의 목적이 “교회의 사명인 온 인류의 영원한 구원에 이바지한다.”는(현대의 사제 양성 70) 것임을 깊이 되새길 수 있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을 통해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교회의 쇄신을 말씀하시면서 사목자들의 쇄신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목적 열정과 성덕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사목자들에게 “복음의 기쁨”이 사목의 새로운 등대가 되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따라서 저는 “복음의 기쁨”을 통해 사목을 성찰하며, 동시에 “복음의 기쁨”을 실행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사제들의 존재 자체가 “복음의 기쁨”이 될 수 있길 기원하며, 다시 한 번 본당 신부님들의 관심과 참여를 요청합니다.  


우리 모두를 교회 공동체로 초대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섭리에 감사드리며, 새로운 복음화를 향한 여정에 다함께 기쁘게 참여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삼위일체의 친교가 체험되는 본당,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전 교구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으로 교구설정 100주년을 향한 새로운 복음화의 여정이 더욱 활기차게 진행될 것을 확신합니다. “본당의 해”가 여러분의 사랑과 관심 속에 풍성한 결실을 맺어 모든 교구민들이 하느님의 기쁨과 평화 안에 머물게 되길 기원합니다.

2014년 11월
대림 첫 주일에
천주교 광주대교구
대교구장 김 희 중 히지노 대주교
[전주교구]
“떠나라!” (루가 10,3)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1. 2017년은 전주 교구 설정 8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동시에 이 해는 새 주교님을 모시고 우리 교구 역사에서 새 장을 열게 될 해이기도 합니다. 저는 1990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으로부터 주교로 임명 받아 지난 27년 동안 이 직무를 수행해 왔습니다. 주교들이 만 75세에 은퇴하게 되어 있는 교회의 관례에 따라, 저는 교황님께 은퇴 청원서를 제출하고 새 주교님이 임명되시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우리는 교구의 역사를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훌륭한 주교님을 보내주시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러, 저로서는 그동안 신부님들, 수녀님들, 교우 여러분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협력에 감사드리면서, 여러분과 함께 걸어온 세월을 돌아보게 됩니다. 제가 교구장 직무를 시작하던 1990년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조직적인 무신론 체계였던 공산주의 세계가 서서히 붕괴되면서, 온 인류가 새 세상에 대한 꿈을 한껏 부풀리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천년기가 바뀌는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새로운 대림” 혹은 “새로운 대망”의 시대라고 표현하신 그 시점을 내다보며 큰 희망을 가지고 준비했습니다. 이제 와서 매년 발표한 사목교서들을 되돌아보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정신을 구현하려고 시도한 점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특히 2000년 대희년에 발표한 특별 사목교서는 공의회의 4대 헌장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계시헌장’에 따라 하느님 말씀을 개인과 공동체의 삶 중심에 모시고 실천하기. ‘전례헌장’에 따라, 말씀과 성찬의 전례, 특히 십자가 희생을 ‘지금 여기’에 재현하는 성체성사를 생생하게, 또 생명의 잔치답게 기쁜 분위기 속에서 드리기. ‘교회헌장’에 따라, 성직자와 평신도 등 하느님 백성 전체가 높낮이 없이 같은 존엄성을 가지고 서로 보완하며 교회의 사명을 함께 수행하기. ‘사목헌장’에 따라, 우리가 교회의 안락한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빛과 소금이 되기. 이것이 처음부터, 특히 새로운 천년기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다짐하고 오늘날까지 계속 실천하기 위해 선택한 기본 방향이었습니다. 그 이후 해마다 나온 사목교서는 대희년 특별 사목교서를 바탕으로 하고 그 실천을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그 중에서 어느 특정한 측면을 그 해의 상황에 맞추어 좀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 이런 목표를 세우고 노력한 것이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돌아보며, 저는 형제 신부님들과 수도자, 교우 여러분들이 그동안 이루어내신 일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모든 분들에게 큰 축하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대단히 깊어지고 넓어졌음을 확인합니다. 여러 가지 모양의 성서 공부와 쓰기, 말씀 나누기, 전례 안에서의 말씀 봉독, 마음에서 우러나와 자기의 표현으로 드리는 생생한 기도, 신앙체험 발표 등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그와 함께 미사전례가 생명의 잔치답게 활기차고 기쁨이 넘치는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외롭게 사시는 노인들도 이렇게 따뜻하고 생기 넘치는 전례에 참여하면 목욕탕에 들어가 깨끗이 씻고 난 것처럼 몸과 마음이 산뜻하고 새 힘이 돋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본당에서 새로 부임해 들어가신 신부님들이 전례가 놀랍게 활기를 띠고, 크고 작은 일에 서로 협력하며, 누가 어려움을 당하면 교우들끼리 알아서 찾아가 기도하며 도와주곤 하기 때문에, 사제인 자신이 그런 일에 특별히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목방문이나 견진성사를 위해 본당에서 미사를 드리며, 그런 모습을 확인할 때마다 참으로 큰 기쁨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우리의 본당 공동체가 이렇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를 본 사람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 갔다”(사도 2,47). 물론 어디에서나 전례가 주님 부활의 승리를 경축하는 잔치답게 활기와 기쁨에 넘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더 멀리를 내다보며, 신앙인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기쁨과 확신에 넘쳐 그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하기 위해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3.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걸어갈 길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보편교회의 사목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전 세계 모든 교회를 위한 사목지침으로 내놓으신 [복음의 기쁨]에서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구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나 교황님의 이 사목지침을 받아들여, 세심하게 읽고 실천해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이 길의 출발점과 이 여정을 걸어가는 데 필요한 힘을 얻고,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떠나라’고 당부하시는 데까지를 간단히 살피며 묵상하겠습니다. 우리 묵상의 출발점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임 베네딕도 16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가장 강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한 사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분을 만나 인생을 보는 눈이 새로워지고 삶의 방향을 다시 잡는 것을 의미합니다”(복음의 기쁨, 7). 그래서 우리는 이 사목교서의 제1부에서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묵상하고, 제2부에서는 그 만남에서 발견한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밖에 나가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명에 관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루가복음은 그리스도인 신앙생활의 이 두 단계를 간단한 문장 속에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들이 예수께 가까이 왔을 때에 예수께서는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이것은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3-15). 물론 이것은 개인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걷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뛰라고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이제 막 퇴원한 사람에게는 회복기간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성숙의 시간과 단계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강요할 수는 없고,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에게는 “오랜 동안의 준비나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 없다”(복음의 기쁨, 120)는 점은 언제나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가보지 않은 길에서 떼는 첫발이 나머지 삶을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제1 부

“예수께서는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4.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주님을 깊이 만날 때,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복음의 기쁨, 1). ‘기쁨’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마리아를 찾아온 천사의 첫마디는 “기뻐하여라!”(루가 1,28)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의 축하를 받고 마리아의 입에서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 하는 노래가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복음’이라는 말이 ‘기쁨을 주는 소식’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은 그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실제로 기쁨이 넘치게 되고 삶이 온전히 새로워진 가장 대표적 성서 인물 가운데 하나를 우리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발견합니다(요한 4,1-42 참조). 이 여인은 우물물로 상징되는 물질에서 출발하여 사람, 그리고 하느님이라는 세 대상에 대한 3중의 갈증을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의 처지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한 성서의 이 대목을 좀 더 가까이 살펴봅시다. 먼저, 우물물을 길으러 샘에 나온 이 여인이, 앞서 와 계신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처음에는 ‘유다인’이었다가, ‘선생님’, ‘예언자’를 거쳐서, 마침내 ‘메시아’로 바뀌어가는 것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여인이 예수님을 점점 깊이 만나 상대방의 정체를 깨달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이 말씀대로, 이 여인은 지금 그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는 것입니다.

5. 대화는 예수님 쪽에서 그 여인에게 “물을 좀 주시오” 하고 청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인간과의 만남에서 먼저 첫 발을 떼는 쪽은 항상 하느님이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요한 15,16).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더구나 이 만남은 여러 면에서 상식을 크게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사마리아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접촉해서는 안 되는 천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사는 지역에 들어가는 일조차 대단히 마음내켜하지 않았습니다. 또 유다인들은 밖에서 여인을 만나는 것을 극히 꺼려서, 그들 가운데 어떤 무리는 밖에서 다른 여인을 쳐다보기만 해도 그 순간부터 눈을 감았기 때문에, 담벼락이나 건물 등에 부딪치는 일이 많아서 얼굴에서 피가 나고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대가 보통 여인도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인데다가 겉 차림새만 보아도 삶이 완전히 헝클어지고 망가진 사람이었으니, 보통 유다인으로서는 가까이하는 것만도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습니다. 먹을 것을 사러 시내에 갔다가 돌아온 제자들이 그 만남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여인 자신에게는 말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당신은 유다인(남자)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여기서 우리는 그 옛날 예언자 엘리야가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고, 이교 지역인 시돈 지방의 사렙다 마을에 가서 한 과부를 만나는 장면을 연상하게 됩니다. 1열왕 17,8-16에 소개되어 있는 그 이야기 역시 예언자가 한 과부를 만나서 물을 좀 달라고 청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물을 가지러 가는 과부의 뒤에 대고 예언자가 이왕이면 빵도 한 조각 가져다달라고 하자 그 여인은 대답합니다. “구운 빵이 없습니다. 있다면 천벌을 받아도 좋습니다. 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뒤주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 몇 방울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조금 주어다가 저희 모자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있는 것이나 모두 먹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때 예언자가 말합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시오. 집에 들어가서 방금 말한 대로 음식을 준비하시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 나에게 먼저 한 조각 가져오고 그 후에 아들과 함께 들도록 하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가 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릴 때까지 뒤주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리라.’” 과부는 이 말을 듣고 집 안에 들어가 하느님의 사람이 말한 대로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일어난 놀라운 일을 성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엘리야와 과부 모자에게는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다. 엘리야가 전한 야훼의 말씀 그대로 뒤주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도 동이 나지 않았다.” 하느님은 사랑,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엘리야와 예수님이 모두 인생의 막장에 이른 여인들에게 무언가를 청하시고, 그들이 ‘줌으로써’ 하느님을 닮을 수 있게 하십니다. 자기도 굶어 죽을 지경이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먼저 남에게 주는 일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 뜻밖에도 모자람이 없게 된 것입니다. 다시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이 여인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놀라움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 우물물을 청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시작된 대화는 계속 진행되다가 마침내 그분이 모든 사람에게 주고자 하신 바로 그 물 이야기로 건너갑니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물을 청하는 쪽이 바뀌어, 그 여인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6. 이 장면에서 먼저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장벽을 뚫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경계도 뛰어넘어, 길 잃은 양과 같은 한 사람을 찾아오시는 모습입니다. 먼 여행과 한낮의 땡볕에 지친 몸을 이끌고 그분은 먼저 우물가에 와서 기다리십니다. 인간이 우물물에 목말라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목말라하는 갈증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시내에 가서 음식을 사다 예수님께 잡수시라고 권했을 때,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음식이 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요한 4,32-33절). 예수님께서는 다른 자리에서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그렇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요한 6,39-40). 또 우물은 이사악, 야곱, 모세 등 이스라엘 역사에서 많은 이들에게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한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여기서도 우물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성서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익숙한 여러 명칭을 쓰십니다. 목자, 왕, 아버지, 주인, 남편은 가장 대표적인 예들입니다. 이 가운데에서 남편 혹은 부부관계는 인간의 경험에서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가장 깊고 강력한 관계 혹은 사랑을 대표합니다. 남녀 사이의 이 사랑은 “뛰어난 사랑의 원형처럼 보여, 그와 비교할 때 다른 온갖 사랑은 빛을 잃는 듯합니다”(베네딕도 16세,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2항). 그만큼 남녀가 서로를 향해 느끼는 끌림은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강한 갈증을 표상합니다. 성서에서도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란 ‘부부’를 가리킵니다(창세 1,26-27). 그렇기 때문에 부부관계는 사람이 자기 안에 새겨진 하느님 모상을 실현하는 제일 가깝고도 일반적인 길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본래 그렇지만, 부부관계는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만나야만 인간으로 깨어납니다. 남성은 여성을 만나야 남자로 깨어납니다. 여성도 남성을 만나야 여자로 깨어납니다. 남녀가 몸, 정신, 영혼을 다해 만나면 자기 안에 잠들어 있던 ‘하느님의 모상‘이 깨어납니다. 몸만 만나면 몸만 깨어납니다. 부부는 서로 상대방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깨워주는 가장 대표적인 관계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은 각자의 얼굴이 다른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다양하고, 우주 천지에 단 하나밖에 없는 모습으로 각 사람 안에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잠들어 있습니다. 누군가 나타나서 그 사람의 유일성을 인정하고 사랑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만들어 거기에 잠재워 두신 공주, 아니 하느님의 모상이 깨어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수많은 남성을 만났지만, 그 누구와도 몸을 스치는 정도를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느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깨워주실 때 비로소 그 안에 하느님의 모상이 깨어났습니다.

7. 많은 예언자들이, 충실한 남편인 하느님과 불충한 아내라는 표상을 빌려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아내가 자신을 버리고 외간 남자와 놀아났다가 돌아오는 체험을 통해서, 불충한 백성이 결국 돌아오기까지 참아내시는 하느님의 끝없는 인내와 자비 그리고 사랑의 힘이 결국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2,2.20; 31,3), 에제키엘(16,1-43), 이사야(40-55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자기 남편인 야훼와의 계약을 깨뜨리지만, 남편인 주님께서는 상대방이 “처녀였을 때 약혼했던 것을 생각하고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계약을 맺을 날”을 예고합니다(에제 16,59-63; 이사 61,10; 62,4-5 참조). 특히 이사야는 말합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여자’라 하지 아니하고 너의 땅을 ‘소박데기’라 하지 아니하리라. 씩씩한 젊은이가 깨끗한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듯 너를 지으신 이가 너를 아내로 맞으신다”(이사 62,4-5). 바로 그 예언이 드디어 지금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아니 그 예언조차 이 현실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버림받은 여자’, ‘소박데기’처럼 살고 있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온갖 장벽을 다 허물고 뛰어넘어 우물가로 오신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었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8). 지금 그분께서는 이 여인 속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이끌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물물에서 시작된 대화는 더욱 깊어지면서 마침내 그 여인이 지닌 갈증의 깊은 뿌리로 향합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너라.” 남편 - 그 여인이 앓고 있는 소갈병의 뿌리는, 일단, 인간관계, 그 대표 격인 남편 문제에 있었습니다. 우물물에 대한 갈증은 그 증상일 뿐이었습니다. 이제 그 여인은 메시아의 도움으로 그 뿌리를 정확히 알아내고 거기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깊이 감추어 두었던 비밀이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요한 2,25)의 눈길을 받자, 햇빛을 받아 스스로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열립니다. 그 여인은 지난날에 지은 죄의 올가미에서 풀려난 것입니다. 기자가 베드로의 후계자로 갓 선택된 분의 본래 이름을 대며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는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께서 눈길을 보내주신 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신 그 눈길은 2천 년 전에 사마리아 여인이 받았던 눈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눈길을 받자 여인은 자기 입으로 깊이 숨겨두었던 자신의 비밀을 열어 보입니다. “남편이 없습니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가 있지만, 그가 남편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실토한 것입니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요한 4,18). 이제 그 여인의 고백과 그것을 확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문제의 뿌리가 드러났습니다. 상대방을 바꾸어가며 수많은 남자를 만났지만, 그것은 여인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했고, 그것은 오히려 점점 더 심해져만 갔습니다. ‘사막’, ‘황무지’, 혹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은 그 여인의 내면을 잘 그려줍니다. 물질, 명예, 권력, 쾌락 등의 올가미에 갇혀 사는 동안 인간이 겪는 내면의 처지를 잘 나타내는 것입니다.

8. 그런데 인간관계만으로 인간의 갈증이 완전히 해소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 스스로 하느님 이야기를 꺼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지, 사마리아인들은 거기가 그리짐 산이라고 하고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이라고 하니, 도대체 어느 쪽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 여인 스스로 말합니다. “저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저희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시겠지요.” 바로 그 때, 예수께서는 복음서 전체에서 처음으로 당신의 정체를 스스로 밝히십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시어(출애 3,14), 이스라엘을 노예의 땅에서 자유의 땅으로 이끌어낼 힘을 주셨던 것처럼,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때가 되기 전에는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시지 않고, 베드로의 고백으로 그것을 알게 된 열두 제자들에게마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던”(마태 16,20) 바로 그 비밀을, 여기서 그 여인에게는 스스로 밝히십니다. 예수님과 여인이 각기 자신의 내면을 두려움 없이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느님과 인간이 가장 깊이 만났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표지(기적)를 보여주심으로써 자신이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당신이 지으신 백성과 결혼하기 위해서 오신 하느님이심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넌지시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초상집 같은 슬픔의 시대는 가고 혼인잔치 같은 기쁨의 시대가 왔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산 위에서 만군의 야훼,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살진 고기를 굽고 포도주를 잘 익히고 연한 살코기를 볶고 술을 맑게 걸러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이사 25,6). 이제 여인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우물물, 남편, 하느님을 향해 품고 있던 3중의 갈증이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9. 이렇게 해서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으로 이루어지는 ‘영원한 생명’, 그리고 그곳을 향해 가는 그 여인의 여정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요한 14,9)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만났으면 곧 하느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제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이사 35,6)던 예언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8)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여인의 속에서는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물물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우물가에 내버려진 물동이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이제 그 여인은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새 인간”(골로 3,10)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를 비롯해서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그 여인도 곧바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부끄럽던 과거까지 사람들에게 그분을 증언하는 수단으로 바뀝니다. “‘나의 지난 일’을 다 알아 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가서 봅시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요한 4,29). 이렇게 해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증명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구원의 역사가 완성 점에 이르면, “어린양의 아내인 그 신부”(묵시 21,9)를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신랑인 어린양이 신부와 다른 모든 사람들의 목마름을 결정적으로 풀어주실 것입니다(묵시 22,17 참조). 이것이 우리 희망의 근거입니다.

10. 이런 그림을 배경으로 우리 주변과 세상을 바라봅시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다가 가장 짧은 시간에 제일 부요한 나라에 속하게 된 대표적인 국가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니 어려웠던 시절에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어두운 그림자와 절망의 물결이 온 땅에 들이 닥쳤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벌어지고, 물질, 권력, 명예, 쾌락을 우상처럼 섬기는 흐름이 해일처럼 넘실거립니다. 청년들은 희망을 잃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조차 마음은 빠른 속도로 사막화하며, 인간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져 갑니다. 외로움은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혼자 사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 이 가운데에서도 외로움은 시대적 질병처럼 확산되고 있습니다. 주변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혼자”라는 느낌, 인간의 이 외로움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제일 심각한 사태입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 창조주께서 세상 만물을 하나하나 만드신 다음, “좋다, 참 좋다!” 하고 말씀하시다가, 단 한 번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 이렇게 세 위격으로 이루어진 가족-공동체인 하느님께서 그런 당신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인간은 공동체일 때에만 자신의 원형을 닮고 자기를 실현하며 행복과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더는 미룰 수 없는 교회 쇄신”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단 한 가지를 구체적으로 바꿀 것을 주문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본당 사목구를 “공동체들의 공동체”(28항)가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기초공동체’, ‘소공동체’ 등으로 불리는 지역별 모임에서, 하느님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그렇게 해서 주님을 만나 기쁨과 힘을 얻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기쁨과 힘을 얻은 신앙인들이, 동네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11. 순교자 황일광(1757-1802)은 당시 사회에서 천민으로 멸시를 받는 백정의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당시의 관행에 따라, 마을 공동체 안에 살지 못하고 그 울타리 밖에서 지내야 했고, 일반인들의 집 안으로는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나니, 교회 공동체는 그를 형제로 받아주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귀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는 새로 태어난 기쁨을 맛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천국이 둘 있다. 하나는 하늘에 가서 들어가는 천국이고, 또 하나는 여기 세상에서 들어가는 교회다.”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포졸들에게 잡혀 감옥에 갇힌 그는 여유 있게 말재주까지 부리며 말했습니다. “포졸들이 나를 남원에서 옥천으로 데려왔네!” 나무(남원)하러 나갔더니 포졸들이 나를 옥천(옥이라는 천국)으로 데려 왔다는 뜻이었습니다. 복음을 통해 주님을 만난 그에게는 감옥도 이미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복음을 들여온 이들은 외국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 우리의 선조들이었습니다. 그것도 평신도들이었으며,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신 103위 순교자들, 2014년에 복자로 선포되신 124위 순교자들 가운데 절대 다수가 평신도들입니다. 사제와 수도자들도 이런 정신을 이어받은 부모님들에게서 태어난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의 정신은 지금도 계속 살아서 한국 교회 특유의 활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서운동, 여러 신심단체나 선교운동을 통해서 이미 많은 신앙인들이 선교사로서의 훈련을 잘 받고 훌륭하게 활동해 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교회 구성원 모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사제, 예언자, 왕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한다면,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대로 소공동체를 통해서 그 사명을 더욱 구체적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스도 신앙이 무엇인지, 참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며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삶의 우선순위 맨 앞에 두게 될 것입니다. 이 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대로 “오랜 준비나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120). 우리 교구 어느 시골에 사시는 한 할머님(84세)이 그 사실을 가장 잘 증언하는 분들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75세에 병으로 쓰러지셔서 담당 의사가 가족에게 장례를 준비하라고 권고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동안 어떤 수녀님이 오셔서 기도하실 때 놀라운 꿈을 꾸고 깨어나 곧바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성당에 다니다 보니 레지오 마리애 교본, 성서, 미사 책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한글을 깨우쳐 성서 필사까지 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당신의 집을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으로 내주시고 온갖 봉사를 하셨는데, 그 모습에 감동해서 사실상 마을 인구의 전체라고 할 수 있는 25명이 세례를 받고, 버스를 타야만 하는 거리에도 불구하고 모두 성당에 나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계십니다. 올해는 84세가 되셨는데, 여전히 건강한 몸으로 활동하시며, 세상에 사시면서도 이미 천국에 사시는 것처럼 기쁨에 차 있는 그분의 모습이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놀라운 기쁨을 맛 본 이들입니다. 일흔 두 제자도 복음선포 활동을 마치고 “기쁨에 넘쳐” 돌아왔고(루가 10,17), 그들의 기쁨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루가 10,21) 외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루가 10,21).

12.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과 결혼에 관한 복음성서 대목에서 우리의 묵상을 시작했습니다. 결혼은 한 사람에게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가장 공적인 의미도 있어서 한 사회와 나라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남녀의 만남과 거기서 출생할 자녀가 함께 이루는 가정은 사회의 기본 세포로서 나라와 세상의 건강과 명운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내면 가장 깊숙한 데서 만난 사람은 곧바로 세상을 위한 소금과 빛이 될 사명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시편 85,10) 세상을 만드는 일에 한 몫을 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182).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에만 몰두하여 이웃과 사회를 잊어버리는 사람은 가짜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유형입니다”(2015.5.28 강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런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우리는 누구나 주님의 마지막 당부를 실천하는 사도가 될 사명을 받았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제 2 부

“떠나라!”
“이것은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13.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곁에 ‘천막을 치고 사신 것’(요한 1,14 참조)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세상에 보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각 개인과 사회 구석구석에 하느님의 정신, 그 영이 스며들어 정의와 사랑이 가득한 세상으로 만들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일을 위해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뽑아 언제나 곁에 두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나 초라하고 볼품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에다 일자무식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이렇게 나가는 그들의 명단은 마태오에 이르러서야 글을 알고 셈을 할 수 있는 인물에 이르지만, 그는 무식보다 더 큰 결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침략국 로마에 붙어서 동족을 착취하는 매국노에 도둑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어서, 창녀와 함께 망가진 인간의 표본처럼 취급받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아임을 알아봄으로써, 스승으로부터 더할 수 없는 칭찬과 함께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지가 밝혀지면서, 이번에는 같은 스승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말씀과 함께 정 반대 쪽으로 떨어지기도 한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최측근 3인방을 이룬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역시 스승이 죽음을 바로 앞두고 있을 때까지 현세적 출세에만 눈이 어두운 인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열두 제자 중의 하나는 스승을 적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신 끝에 뽑아 곁에 두고 가르치시던 열두 제자들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주님께서 맡겨주시는 복음선포 사명을 실천할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적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실제로 이루어진 역사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도행전에서 확인합니다.

14.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 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 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마태 10,7-8).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다녔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병자들을 길거리에 메고 나가 들것이나 요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행여나 그 그림자만이라도 그 몇 사람에게 스쳐 갔으면 하였다”(사도 5,15)고 루가는 증언합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 아버지께 가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겠기 때문이다”(요한 14,12-13). 주님의 이 말씀은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믿지 못했고, 그 누구도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1고린 2,9)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겠습니까? 이에 관해서 사도 요한은 자신이 쓴 복음서의 결론인 20장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5.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달음질을 하여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가서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알려 주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곧 떠나 무덤으로 향하였다. 두 사람이 같이 달음질쳐 갔지만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 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곧 뒤따라온 시몬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 가 그도 역시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수의와 함께 흩어져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그들은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제자는 숙소로 다시 돌아갔다. 한편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마리아가 몸을 굽혀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또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 하고 물었다.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예수께서 거기에 서 계셨다. 그러나 그분이 예수인 줄은 미처 몰랐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셔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거든 어디에다 모셨는지 알려 주셔요. 내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께 돌아 서서 히브리말로 “라뽀니” 하고 불렀다. (이 말은 “선생님이여” 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 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고 전하여라” 하고 일러 주셨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일러 주신 말씀을 전하였다. 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 하셨다. 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 쌍동이라고 불리던 토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이 장면, 바로 이 자리가 두 번째 천지개벽의 현장입니다. 옛 세상은 사라지고 새 세상이 도래한 순간입니다. 거짓말의 아비인 악마가 통치하던 시대가 가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통치하시는 시대, 곧 ‘아버지의 나라’가 온 현장입니다. 치욕과 실패의 상징이던 십자가가 영광과 승리의 상징으로 드러난 순간입니다. 연약한 제자들이 스승처럼 용감한 사도로 태어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사람들 ‘곁’에 머무시던 시대가 가고,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그들 ‘안에’(요한 14,20) 계시는 시대가 시작된 날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대로 제자들이 “위에서 오는 능력”(루가 24,49)을 받은 순간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하신 주님의 예언이 마침내 이루어져서, 그들이 ‘제자’ 단계를 졸업하고, 마침내 ‘사도’가 된 날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소개된 장면은 여기에 이미 소개된 일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뿐입니다. 이제 그들은 ‘주님의 뒤를 따라다니던’ 제자가 아니라, ‘그분을 뒤에 두고 떠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끝까지 가서 사람들을 악마의 통치로부터 이끌어내어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새 세상으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라는 건물을 떠받치는 바위요 초석입니다. 이것이 빠지면 복음도, 교회도, 신앙도, 온갖 종교행위도 다 허물어집니다. 하늘에서 오는 능력, 성령을 받고 이제 돌이켜 보니, 예수님께서 생전에 그토록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온갖 질병을 고쳐주시고 악령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것도 같은 성령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스승이시던 나자렛 예수를 ‘성령을 받은 이’라는 뜻으로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들어 주시던 날에 일어난 일이,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자신들에게 일어났음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하늘에 오르셔서 받으신 모든 힘, 능력, 권세는 제자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제자들을 떠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 ‘속’으로 들어가셔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효과적으로 도와주시며 함께 계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마르코는 이를 더욱 분명히 증언합니다. “주님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다 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사방으로 나가 이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으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마르 16,19-20). 그렇게나 겁이 많던 제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사도 9,27.28; 13,46; 14,3; 18,26; 19,8; 28,30). 겁이 많아 세 번씩이나 스승을 배반했던 베드로는 이제 요한과 함께 의회의원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겠는지 한번 판단해 보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사도 4,19-20). 의회의원들조차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사도 4,13)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17.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된 모든 신앙인은 사제직, 예언직, 왕직을 수행할 사명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교회헌장, 33-36). 공의회의 이 가르침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대로, 이제는 사제나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교우들도 하느님 백성으로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이 능력을 활용하고 사명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각자 살고 있는 지역에서 전쟁터에 설치된 “야전병원”(프란치스코 교황, 하느님께 활짝 열린 마음, 제1부 7장)에서 일하는 일꾼이 되어, 먼저, 신앙생활을 하다가 낙오가 된 이들을 치료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살이에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매는 이들을 참 삶의 길로 인도하는 일에 뛰어들어야 하겠습니다.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저는 교회에게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까이 다가가는 일, 친밀성이 필요합니다. 저는 교회를 전쟁이 끝난 다음의 야전병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심한 부상을 당한 사람에게 콜레스테롤이나 혈당 수치를 묻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선 상처부터 치료해 주어야지요. (....)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미사에 나오지 않는 사람, 교회를 떠난 사람 혹은 전혀 무관심한 사람들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 사목자가 스스로 책임진 공동체를 얼마나 가까이 접촉하고 만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척도는 바로 ‘강론’입니다. 강론하는 이는 자기가 책임진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하고,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갈망이 생생하게 불타오르는 곳이 어디인지를 볼 수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세례 받은 분들 가운데 이른바 “잃은 양”으로 분류되는 이들이 어느 정도인지를 생각할 때, 교황님의 이 말씀은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잃은 양” 찾기를 동시에 할 때에만, “어린양 찾기”가 그 본래의 뜻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하시는 주님의 당부를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 이 일은,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사명입니다. 하느님의 능력보다 먼저 인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을 떠나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지팡이나 식량자루나 빵이나 돈은 물론, 여벌 내의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루가 9,3). 당신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 루가 9,58).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에게 제일 큰 장애는 “세상 걱정과 재물과 현세의 쾌락”(루가 8,14)입니다. 재물, 명예, 권력, 쾌락은 다 좋은 것입니다. 창조자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좋다”고 하신 것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종으로 부려먹을 때만 그것들은 좋은 것입니다. 반대로 그것들이 주인이 되어 우리를 종처럼 끌고 다니게 되면, 그것들은 우상이 되고 우리는 그 사슬에 철저히 묶여 사는 꼴이 됩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그런데 지금 우리가 경험하듯이, 오늘날 재물, 명예, 권력, 쾌락의 힘은 참으로 강해서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이겨내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성령의 칼인 하느님의 말씀”(에페 6,17 참조)을 듣고,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요한 6,51)을 먹어서, 늘 새로운 힘을 받아야 합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7).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기억하여 우리가 해야 할 것으로 한 가지만을 유언으로 당부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고린 11,23-26). 성체성사, 십자가 제사의 재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성사, 죽음을 물리친 생명의 축제. 루가복음 24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뒤, 낙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를 잘 말해줍니다.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루가 24,25-27). 성서 전체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을 목적지로 해서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린 옆구리로부터 피와 물을 다 쏟으실 때 완성되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는데 예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루가 24,30-31).

19. 이제 제자들은 스승의 생전에 들었던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루가 12,49-50).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내다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으로부터 이미 세례를 받으셨는데 또 세례를 받아야 한다니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어떤 세례를 또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까?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37) 하고 청탁하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그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마르 10,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받으셔야 할 세례는 십자가에서 창에 찔려 피와 물로 다 쏟아 온 몸이 흥건하게 젖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멀지 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가 3,16; 마태 3,11참조). 세례자 요한이 예고한 성령과 불의 세례를 사람들에게 베푸시기 전에 예수께서 먼저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분이 세상에 지를 불이란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건네주실 수 있게 된 성령의 불, 사랑의 불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벗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하신 말씀대로, 우리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사랑의 불을 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령의 불길이 십자가 제사의 재현인 성체성사 안에서 타고 있습니다. 그 옛날 떨기 가운데에서 활활 타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태워 없애지는 않던 그 불길, 그리고 거기서 당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알려주셔서 이스라엘 해방의 대역사를 이룰 수 있게 해 주신 그 사건(출애 3장 참조)은 여기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십자가 나무에서 사랑의 불길은 비할 수 없이 더 뜨거운 열기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길이 십자가 희생을 재현하는 성체성사 안에서 계속 타고 있습니다.

20. 성령은 시간과 공간의 벽을 뛰어넘기 때문에, 그 불길은 ‘그때’ ‘거기’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똑같은 열기로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체성사가 계속되는 한, 이 불길은 언제까지나 타오르면서 그 열기가 가 닿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새로 태어나게 해 줄 것입니다. 그 불길 속에서는 습관성도, 기계적 반복도, 무의식적 의례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언제나 ‘처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첫 순간의 감동이 있고, 떨림이 있고, 놀라움이 있고, ‘두려움과 이끌림’이 있습니다.
이 불길, 이 놀라움의 영역을 벗어나면, 거기에는 기계적 반복, 생명 없는 의례, 귀만 울리는 꽹과리 소리만 남습니다. 종교에 몸담은 사람은 직업인으로 전락하고, 마태오복음 23장에 모아놓은 온갖 문제가 이어집니다. 태양에서 멀리 떨어진 행성이 얼음으로 뒤덮이는 모양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제사, 성체성사를 재현합니다. 주일마다, 아니 날마다 미사를 봉헌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성령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몸을 먹어 힘을 얻게 됩니다.

21. 그런데 여기까지는 준비, 절반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반은 성당 밖, 세상에 나가서 해야 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사제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마지막 이 당부를 실천하기 위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은”(요한 17,14.16. 참조) 그리스도인들이 사제, 예언자, 왕으로서의 자기 소명을 깨닫고 세상에 나가 그 사명을 실천할 때, 교회는 전혀 달라지고 세상은 완전히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 마칠 때까지 언제나 함께 해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지금 우리 하나하나와 공동체에게 촉구하십니다.

“떠나라!”

2016년 대림 첫 주일에
천주교 전주교구장 이 병 호(빈첸시오) 주교
[제주교구]
“생태적 회개의 삶을 사는 소공동체”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1)
하느님께서는 땅 위에 온갖 풀과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물속에는 각종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하늘에는 온갖 새들이 날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땅 위에 집짐승과 들짐승,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것들을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당신과 비슷하게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신 것은 인간이 피조물들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를 행사하며 마음대로 훼손하고 짓밟아도 좋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구고 돌보라’ (창세기 2,15) 는 당부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일구다’는 말씀은 밭을 갈고 돌을 골라내고 고랑을 만들고 씨를 뿌리고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일하라는 의미이고, ‘돌보라’는 말씀은 씨앗이 잘 자라고 열매 맺을 수 있도록 김매고 물 주고 거름 주고 애정으로 보살피고, 보호하라는 의미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대신하여 책임지고 보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찬미받으소서’ 67항).

하느님은 인간이 이 땅 위에서 복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참으로 오랜 시간 공들이고, 있는 정성을 다해, 최고의 솜씨로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빚어주셨습니다. 자연과학자들은 우리 공동의 집 ‘지구’ 가 45억 년 전에 뜨거운 불덩어리로 태어났다고 알려줍니다. 이 불덩어리가 겉 표면만 식는 데 5억 년이 걸렸습니다. 식는 동안 단단한 지각이 만들어지고, 산과 계곡이 주름 잡혔습니다. 다시 5억 년이 흐른 다음 생명의 씨앗인 원시 세포가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5억 년이 흐르자 태양의 빛을 받아 광합성이 시작되고 식물이 태어났습니다. 생명이 탄생한 후 생명은 진화를 거듭하고, 식물과 바다 생물과 양서류와 날개 달린 생물과 파충류와 포유류가 나타났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생명체가 다채롭게 펼쳐져 나왔습니다. 이 다양한 생명체들 중 인간이 제일 마지막으로 등장했습니다. 지구 전체의 나이가 45억 년인데 인간이 출현한 것은 불과 5만 년 전입니다. 지구의 나이에 비하면 인류의 역사는 다 해봐야 그 9만 분의 1 정도밖에 안 됩니다.

인류가 문명을 이루면서 수만 년의 세월 동안 큰 변화 없이 소박하게 살아왔습니다. 소를 키우면 암소는 젖을 짜 먹고, 황소는 밭에서 논에서 일을 시켰습니다. 가축이 배설을 하면 퇴비를 만들어 밭에 뿌리고 곡식은 잘 익어갔습니다. 가축이 할 일을 다 하면 고기는 식탁에 올리고, 가죽은 말려서 신발을 만들거나 가방을 만들었습니다. 머리끝에서 꼬리까지 하나도 남는 것도 버릴 것도 없었습니다. 집을 짓고 길을 닦고 다리를 놓아도, 나무나 돌을 써서 오래되면 원래의 자연으로 돌아갔습니다. 쇠붙이를 쓰더라도 다 재활용이 가능하여 버릴 것이 없었습니다. 농산물이나 공산품을 만들더라도 사람들이 필요한 만큼, 소비할 만큼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없고 대부분 재활용되거나 순환되어 쓰레기가 쌓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과 200년 전쯤 시작된 산업혁명이라는 시대를 거치며 인류는 그 전의 지구 생태계가 작동되던 순환적 구조를 무너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나무를 베어내서 집을 지어도 다시 나무가 자라서 새 목재를 확보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목재의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유지할 여유가 있었습니다. 상품 생산이 인간의 직접적인 노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고, 상품 수송도 인간과 가축이 담당했기에 과다한 유통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산업화의 물결이 세상을 주도하면서 생태계의 유기적, 순환적 구조가 무너졌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인간의 과도한 욕망의 도구가 되어 무한한 성장과 발전을 부추기며 유한한 지구자원을 탕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회칙 ‘찬미받으소서!’ 에서 지구라는 ‘우리 누이, 우리 어머니 같은 우리 공동의 집’ 이 울부짖고 있다고 호소하십니다. 우리가 지구를 우리 마음대로 처리해도 괜찮을 소유물로 착각하고 남용하고 수탈하여, 우리 누이, 우리 어머니 지구는 병들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습니다. 해마다 가정과 기업, 건설 현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억 톤의 분해되지 않는 각종 맹독성, 방사성 폐기물들이 지구를 뒤덮어, 지구 전체가 쓰레기 더미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찬미 받으소서’ 21항).

오로지 이윤 추구를 위한 무한대의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서 화석 연료를 주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탄산가스, 메탄가스, 질소산화물 등의 분출이 대기권에 온실가스 층을 급속도로 증가시키며 지구 온난화 현상을 촉진하고 지구 생태계를 질식시키며 위협하고 있습니다. 온난화는 지구의 탄소 사이클에 영향을 미치고, 식수, 에너지, 온대지역에서의 농업생산에 다시 영향을 미쳐 궁극적으로는 생명들 안에 다양한 종들의 생명을 급속도로 영구히 멸종시켜가고 있습니다. 고속도로, 대단위 농장 조성, 댐 건설 등의 개발 행위는 그 지역 생태계 전체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동식물들의 멸종을 촉진시켜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누리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려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고정시켜 놓으신 물질의 가장 깊은 밑바닥(핵) 구조를 흔들고 폭발시켜 그 열기로 발전소를 돌리고, 거기서 나오는 처치 곤란한 폐기물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쌓아 놓기만 합니다. 우리의 하늘, 땅, 물이 오염되고 회복이 불가능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수십억 년 걸려 빚으신 아름다운 지구행성의 생태계를 인간은 불과 지난 200년 동안 반생명적 쓰레기 야적장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물, 공기, 토양 등의 ‘자연환경은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모든 인류의 유산이며 모든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공공재입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을 사유화해도, 모든 이의 이익을 위해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의 생존을 부인하며 우리의 양심을 거스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계 인구의 20%가 가난한 나라와 미래 세대의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훔치면서까지 자원을 소비하고 있는” 상황은 “사람을 죽이지 마라.” 는 계명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교종 프란치스코는 고발하십니다’ (‘찬미받으소서’ 95항).

하느님은 일찍이 우리에게 두 종류의 계시를 선물하셨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 말씀으로 들려주신 문자 메시지요, 다른 하나는 조화와 통합으로 아름답게 지어진 우리 공동의 집에 새겨진 메시지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주신 문자 메시지에도 인류는 합당하게 응답해오지 못 했지만, 우리 공동의 집에 새겨주신 메시지에는 너무나 무지와 무관심으로 일관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께서 임대해 주신 우리 공동의 집에서 셋방살이 하면서도 임차료 내지 않고, 주인의 호의와 은혜에 아무런 보답도 못 한 채 담장이 무너지고 문짝이 뜯겨나가고 천장에 구멍이 나도,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고 모른 척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공동의 집 초석에 금이 가고 기둥이 흔들리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이제 우리가 마음을 고쳐먹고 삶의 자세를 바꾸지 않으면, 이 공동의 집이 곧 무너질 징조가 사방에 드러났음을 경고하고 생태적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도끼가 나무 밑동에 놓였습니다.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인류는 종말적 파국을 향해 돌이킬 수 없는 질주를 시작하게 됩니다. 생태적 회개는 우리의 무절제한 욕망을 제어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집주인이신 창조주께 우리가 저질러온 생태적 죄악을 기워 갚는 데에는 생태적 보속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너뜨려 온 생태계의 균형을 복구하는 일에 우리는 상당한 희생과 봉헌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제주도가 한국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지만, 우리들의 무분별한 소비와 내버리는 행위로 이 땅도 이미 섬 전체가 쓰레기로 뒤덮일 위험수위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후손들에게 쓰레기 섬을 보금자리로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제주도민만이 아니라 이 나라 국민 모두를 위해서도 제주의 생태계가 유원지로 전락하고 투기세력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우리는 지역사회, 시민단체 등과 힘을 합하여 저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제주의 전통적인 조냥 정신과 수눌음 문화를 통하여 제주의 생태계를 살리는 생태지킴이가 됩시다.

2016년 대림 첫 주일에
제주 감목 강우일
[군종교구]
“군 복음화, 새 열정으로”

친애하는 교구민, 군종사제, 그리고 수녀 여러분,

지난 한해 모두가 바쁘고 피곤한 일상생활 중에서도 서로 형제애를 나누며 군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여 주셨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를 맞아 더욱 새로워진 열정으로 군의 복음화에 함께 진력할 것을 부탁드리며, 저는 2017년 교구 사목표어를 “군(軍) 복음화, 새 열정으로”로 정하였습니다.

전날 밤 당신께 희망을 두고 찾아온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예수님께서는 피곤하신 상태로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새벽의 고요함 가운데 기도로서 아버지 하느님과의 축복 넘치는 친교의 시간을 갖고 계시던 중, 시몬 베드로와 그 일행이 주님을 찾아와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자, 주님께서는 하시던 기도를 중단하고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따라나서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온 것이다.” 마르코 복음 1,32-39이 전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 가운데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와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온 것이다.” 이 두 마디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복음전파 열정과 이 복음전파를 위해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어 오셨다는 사명의식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온 것이다.”라는 사명의식은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이야기에서도 다시금 나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2-34) 주님께서는 이해하기 힘든 신비로운 “양식”을 말씀하십니다. 양식은 우리 생명 유지에 절대 필요한 요소이지요. 그런데 절대 필요한 요소인 당신의 양식은, 바로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 곧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복음전파 사명의식과 여기서 나오는 열정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면서 우리에게 이 복음전파를 지상(至上) 명령으로 주시어 온 세상에 나아가 회개의 복음 전파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47)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 성 바오로께서는 깊은 사명감과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사도의 편지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제 개인으로 복음선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고 생각할 때, 새로운 자극을 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바로 사도행전 20장이 전하는 “에페소 원로들에게 한 마지막 고별 인사말”입니다. 저는 이 인사말의 한 부분만 인용하겠습니다.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사도 20,24) 복음전파에 몸 바치는 사도의 열정적이고도 거룩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께서는 당신이 지극히 신뢰하고 사랑했던 제자 디모테오에게 쓴 서간에서 힘주어 지시하십니다. “그분의 나타나심과 다스리심을 걸고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2티모 4,1-2)

또한, 저는 ‘선교의 수호자’이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께서 동료이자 영적 스승이셨던 성 이냐시오 로욜라께 보낸 편지 한 부분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제가 게으름과 타성에 빠져들 때 제 마음을 두드리고 자극하여 복음적 열성을 회복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여기 많은 사람들―인도의 선교지에서 만난 사람들을 가리킴―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맙니다. 유럽의 대학 특히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가서 사랑보다는 지식을 더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지식으로 열매를 맺도록, 미친 사람처럼 큰 소리로 외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꾸짖을 마음을 자주 먹었습니다. ‘여러분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렇게 2017년의 사목교서 내용을 간략히 말씀드리면서, 사목표어인 “군(軍) 복음화, 새 열정으로”를 실천으로 옮기기 위한 몇 가지 구체적인 사항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싶습니다.

 

- 복음화는 두 가지 차원을 지니는데, 하나는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게 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신자들을 영적으로 돌보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닮아가게 하는 일입니다. 군종사제와 수녀가 앞장선 가운데 평신도들도 이 두 가지 복음화 일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노력을 군종사제, 수녀, 평신도들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예비자 인도는 사실 평신도들이 군종사제보다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군인들과의 접근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신자 병사, 군 간부, 지휘관들은 자신의 동료 가운데 적어도 1명은 예비자 교리반으로 인도하는 노력을 해주시길 요청합니다. 군 가족들도 같은 노력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예비자들을 인도하는 노력과 함께 그들에게 형제애와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도록 합시다. 군종사제와 수녀는 자신들의 노력과 함께 평신도들의 도움을 적극 청하시기 바랍니다.

- 현재 우리 교구에서는 교구 소속 29명의 평신도 선교사(2016년 9월, 예비단원 포함)들이 육군 3군 지역의 신병교육대대를 중심으로 교리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지역이 제한적이고 원거리(遠距離)에 따른 사고의 위험성이 있는 관계로, 교리교육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부대를 지원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교구 선교사의 지원이 어려운 본당에서는 인근의 수도회 소속 사제, 수녀, 혹은 교리교육이 가능한 평신도의 지원을 받도록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노력 못지않게 기존 신자들에 대한 영적 돌봄에 관심을 갖도록 합시다. 이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물론 군종사제에게 있지만, 이 임무 역시 수녀가 있는 본당에서는 수녀 및 평신도들과 공유했으면 합니다. 군종사제는 되도록 매 주일미사 강론 후에 신자재교육과 영속교육 차원에서 신자들, 특히 군에서 세례 받아 아직 교리 지식이 부족한 병사들을 위해 5분 교리를 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5분 교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을 중심으로 ‘죄와 회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일곱 성사(특히 성체성사와 고백성사)’, ‘성모님에 대한 공경심’, ‘교회’ 등에 대한 교육이 쉽고 재미있게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교육 자료로 PPT 사용도 권장하고 싶습니다.

- 할 수 있으면 본당 단독으로 혹은 주변 군 본당과 합동으로 사순·대림절 피정을 실시하고, 이 두 전례시기의 피정만이 아니라 별도의 피정 계획도 가졌으면 합니다.

- 군에서는 군인과 그 가족들 그리고 군종사제도 이동이 잦은 편이기에 긴 영속교육 프로그램 실시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영속교육인 ‘성경공부’를 권장합니다. 신·구약 중에서 한두 개의 성경을 택해서 군종사제나 수녀의 지도하에 진행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성경공부라 할 수 있는 성경 읽기와 쓰기를 적극 권장하기 바랍니다. 군종교구의 본당에서는 레지오 마리애나 꾸르실료 같은 신심단체의 지속성이 어려워 대부분의 본당에는 이러한 신심단체가 없습니다. 신심단체가 있는 본당에서는 본당 신부가 각별한 관심을 갖고 도와주고, 새로운 신심단체 설립에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2016년 대림 제1주일에 천주교 군종교구장 유수일 F.하비에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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