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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천주교 주교회의] 안락사와 인간 존엄 (EUTHANASIA AND HUMAN DIGNITY)
카테고리 외국 주교회의 문헌 발표시기 1983-2001 전자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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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천주교 주교회의


안락사와 인간 존엄*

EUTHANASIA  AND  HUMAN  DIGNITY


법률 제정과 관련된 네덜란드 천주교 주교회의의 기고문

 


* 이 문헌은 네덜란드 천주교 주교회의가 안락사에 관한 법률 제정 문제를 두고 1983년부터 2001년까지  발표한 보도 자료와 선언문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원문 EUTHANASIA AND HUMAN DIGNITY:A Collection of Contributions by the Dutch Cathoic Bishops' Conference to the Legislative Procedure 1983-2001, Utrecht/Leuven, Peeters, 2002에서 발췌).

 

[차 례]


제1부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사목 교서
병자들의 고통과 임종
(위트레흐트, 1985년 3월 3일)


들어가는 말
  이 사목 교서의 대상
  이 사목 교서의 내용
  이 사목 교서의 목적

I. 임종 돕기
  임종자에 대한 올바른 도움
  고통의 완화
  정 보
  마음의 체념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
  영적인 도움

II. 임 종
  품위 있는 임종
  인생의 어두운 단면들
  임종을 받아들임
  생명 연장
  치료를 거부할 병자의 권리

III. 안락사
  안락사에 대한 이해
  임종 과정에서 생명을 연장하지 않는 것과 끊는 것의 차이
  임종 과정에서 고의적으로 생명을 끝내 달라는 요구
  임종자 대신 다른 사람들이 하는 안락사 요청
  임종자 자신의 안락사 요청

IV. 윤리적 신학적 성찰
  인간은 자기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인간의 존엄
  양 심
  고통과 함께하기
  고통의 실재
  왜?
  “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다”(마태 25,36)
  그리스도를 본받아
  병자: 기도와 성사
  서로를 위한 여지
  하느님께 대한 여지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표지


제2부

안락사에 관한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입장

1991년 11월 8일에 발표된
  ‘임종과 관련한 의료 결정에 대한 정부의 입장’에 답하는
  네덜란드 주교들의 선언문(보도 자료, 1991.12.10.)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보도 자료(1992.4.7.)

하원의 안락사법 통과에 대한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선언문(보도 자료, 1993.2.10.)

안락사에 관한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선언문
  (보도 자료, 1993.12.7.)

샤보트 사건(자살 방조)에 내린 법원의 판결에 관한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선언문(보도 자료, 1994.7.1.)

‘자살 방조’에 관한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의견서(1994.7.28.)
  ─1993년 11월, 네덜란드 왕립의료협회의 생명중단행위
   인정위원회의  보고서 ‘정신 질환자를 위한 자살 방조’에 관한 응답

안락사 논쟁에 대한 주교들의 깊은 우려
  “생명 보호권을 지키는 방벽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다”(보도 자료, 1995.2.17.)

안락사 보고 절차에 관한 평가 결과에 대한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선언문(위트레흐트, 1996.12.)

요청에 따른 안락사와 자살 방조의 수사에 관한 제안 입법과
  형법과 장례법 개정(안락사와 자살 방조에 대한 수사 관련법)에 대한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의견서(위트레흐트, 1999.10.)

병자와 임종자들의 간호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 교회 사무처의 보도 자료
 “주교들은 안락사 법안의 수용을 ‘깊이’ 개탄한다”(2000.11.29.)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 교회 사무처의 보도 자료
 “네덜란드 주교들은 안락사 허용 법안에 깊은 실망을 금할 수 없다”(2001.4.11.)

새 법의 관련 조항 발췌문
  ─ 요청에 따른 안락사와 자살 방조 (재심 절차) 법

 

 


제1부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사목 교서

병자들의 고통과 임종

 


들어가는 말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모두 건강한 삶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건강하다면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어린아이들의 놀이나 어른들의 운동, 의미 있는 활동, 휴가를 즐긴다든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일, 이 모든 것이 즐거움을 주고 살아 있음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건강하게 모든 좋은 것을 누리는 삶을 자기도 모르게 차츰 당연시할 수도 있다. 극심한 고통이나 중병, 병약함에 대해서는 잠시도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고통이나 질병을 접하는 사람이나, 자신이 그러한 중병에 걸려 있는 사람에게는 건강하고 즐거운 삶이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갖가지 의문이 생긴다. 병자는 살기를 바라고, 때로는 죽음을 갈망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이 사목 교서의 대상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밀접히 연루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병세가 더 이상 호전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중환자와 그와 고통을 함께하는 가족과 친지들, 의사와 간호사, 가정이나 요양원에서 병자를 돌보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또한 다른 이유에서 병자의 고통과 죽음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들은 흔히 병자나 그 주변 사람들과는 다르게 이 문제에 접근한다. 도움 요청에 대한 문제가 흔히 여러 집단에서 폭넓게 논의되고, 안락사 문제가 자주 지적된다. 대중 매체와 언론, 라디오와 텔레비전도 이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사법권은 결단을 요구받고, 정부 역시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새롭게 밝히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우리도 병자를 돕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의견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힘이 되리라 믿는다. 이 문제와 그 바탕에 깔린 동기에 대해서 더 깊이 성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교서 끝에 교회의 문서들을 참고로 밝혔다. 이 사목 교서의 대상은 네덜란드의 가톨릭 신자들이지만, 로마 가톨릭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 교서에서 우리가 병자, 의사, 간호사, 영성 지도자, 기타 다른 사람들을 언급할 때는 당연히 남성과 여성을 모두 포함한다. 본문에서 우리는 가능한 한 그렇게 표현하였다. 이것이 언어적으로 불가능할 경우에 우리는 남성 대명사를 대표로 사용하였다.>

이 사목 교서의 내용

이 교서에서 우리는 우선 중환자의 간호와, 임종 과정의 개입이나 안락사와 같이 임종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 다룬다.1) 나아가 ‘인간에게는 자기의 목숨을 끊을 권리가 있는가? 고통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성찰한다. 끝으로 우리는 병자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기도와 성사가 갖는 의미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 문제를 교회가 선포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에서가 아니라 의학이나 간호, 법률적 관점에서 다루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개인의 양심에 관한 문제도 고찰할 것이다. 이 교서는 사목을 위한 것이다. 이 교서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보건 기관에서 사목 활동을 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사제들, 의사와 간호사들, 진심으로 병자를 돌보는 많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 사목 교서의 목적

오늘날 현실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임종에 관한 많은 질문은 과거에도 제기되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뚜렷한 차이를 보여 준다. 의사들이 병자를 성공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게 증대함에 따라 ─ 모순되게도 ─ 임종과 관련된 문제가 줄어들기보다는 더 커졌다. 연구와 치료의 가능성이 더 높아진 덕택에, 전에는 치료가 불가능했던 많은 병자들이 이제는 생명을 되찾아, 병자 자신과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을,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다른 보건 종사자들에게는 합당한 자긍심을 안겨 준다. 그러나 때때로 이러한 승리의 대가는 견디기 힘든 결과를 가져다준다. 병자는 생명을 부지하지만 고통과 불편이 그의 몫으로 남고, 때로는 점점 더 심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병자는 지속적이거나 빈번한 치료의 도움으로 목숨만 유지할 뿐이다. 임종에 앞서, 육체적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의사도 경감시켜 줄 수 없는 고통이 올 수 있다. 그것은 흔히 살아 있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낄 정도의 고통이고, 병자는 자신이 내팽개쳐졌다고 느끼며, 상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고, 질병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무너져 가고 있다는 인식을 갖는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도 병자의 고통을 지켜보며 함께 아파하고 매번 찾아가고 때로는 밤낮으로 간호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 되며, 특히 오래 끄는 질병일 경우 그들도 심한 고통을 겪는다.

 

I. 임종 돕기


임종을 도와주려면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사람들이 병자의 감정에 잘 대처하고, 죽음, 곧 다른 사람의 죽음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의문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을 맞게 되어 있다.

중환자는 위독한 상태에 있고 도움이 필요하며 의존적이다. 육신의 힘도 쇠잔해져 점점 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된다. 건강했을 때는 마음대로 오가고 행동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무엇이든 하고 싶어도 점점 더 힘이 딸리게 된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아주 평범한 일상의 활동이 병자에게는 힘든 일이 된다. 때로는 밤낮으로 걱정과 고통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힘든 일은 아주 사소한 일까지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를 사로잡는 이러한 여러 가지 생각들 외에도, 여러 가지 느낌들이 때로는 분명하게 때로는 흐릿하게 그를 스쳐간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익숙한 것들에 둘러싸여 자기 집에서 주위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집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중환자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집에서 병자는 아주 정성껏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 사실 중환자와 임종자는 가족이나 친지들에 둘러싸여 있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불행히도 이것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집에서는 전문적인 치료나 간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병원이나 요양원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곳에서는 친지들의 도움과 정성 어린 보살핌이 더욱더 필요하다. 병이 들어 죽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밟는 과정이다. 사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

임종자에 대한 올바른 도움

임종자를 도와주고 지켜 주는 일에 관한 글들이 최근 몇 년 동안 많이 쓰여졌다. 이 교서에서는 몇 가지 측면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임종자에게 필요한 전문적인 치료와 간호에 대하여 살펴보자. 임종자가,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요령과 기술이 있으며 필요한 결단력을 갖춘 전문적인 도움과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이미 많은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럴 때 임종자는 불필요한 고통은 받지 않으리라는 확신과 정신적 안정을 얻게 된다.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자신의 질문에 가능한 한 충분한 답을 얻으며, 제시간에 치료를 받고,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기구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임종자는 자신이 훌륭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중환자를 치료하고 간호하며 보살피는 사람들 사이에는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협력은 병자에게 유익할 것이다. 간호사, 의사, 치료사, 사목자, 기타 보조자들은 병자를 보살피는 일에서 서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의사의 역할에 거는 기대가 크므로, 의사는 비록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라도, 임종자와 그의 가족들과 함께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여야 한다. 의학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동안만이 아니라,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제나 다른 사목 종사자도 자신의 위치에서 임종자의 신앙에 호소할 수 있으며, 그에게 용기와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임종자는 의료 행위가 참으로 자신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에서 이루어지는지를 건강한 사람보다 더 잘 알아차린다. 그는 전문적인 치료나 간호 못지않게 인간적인 동정과 연민을 필요로 한다. 이 일에는 가족들뿐 아니라 이웃, 친구, 자원 봉사자들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인간적인 배려는 긴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임종자를 대하고 보살피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어쨌든 병상 주위의 온갖 행위가, 흔히 임종자와 인간적인 접촉을 피하거나 치료 행위로만 느껴지는 임종 상태에서 벗어나거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서 도망치려는 구실로 느껴질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전문 지식과 역량뿐 아니라 사랑으로 병자와 임종자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고통의 완화

고통을 완화시키는 일도 임종자를 돕는 중요한 일이다. 요즘은 다행히 병자들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 고통을 효과적으로 경감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고통을 없앨 수도 있다. 사실 강한 진통제를 쓸 경우 의식을 잃을 수도 있고, 때로는 생명을 단축시키기도 하는데, 이것은 실제로 임종을 앞당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고통을 완화하는 방법을 쓰는 것이나 고통을 견디는 것이나 별다를 게 없다면 그러한 부작용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더구나 그런 방법은 임종자가 살아 있는 동안 견디기 힘든 고통에서 면제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쁘게도 의학계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고통 완화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덕분에 중병의 고통을 더욱 효과적으로 완화시킬 뿐만 아니라 고통 완화의 과정을 이른 단계에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고통의 원인이 육체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다.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요인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거나 고통이 심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고통의 완화는 진통제를 주는 것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병자는 신뢰 관계 안에서, 의식하지 못하거나 의식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자기의 느낌에 대해서, 또는 가장 밀접한 주위 환경이나 자신의 병세나 내면의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병자는 터놓고 대화를 나누거나 단순히 침묵 가운데 함께 있어만 주어도 흔히 “이제 아픈 것이 훨씬 덜하다.”고 말한다. 병자의 ‘불안’과 슬픔, 걱정, ‘괴로움’, 욕구 등이 진정제나 흥분제의 사용을 부추길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그것은 단지 그가 ‘뭔가에 대하여 걱정한다.’는 표시이다. 약물 치료가 인간적인 도움과 이해를 대신할 수는 없다. 병자는 인간적인 도움과 이해를 받을 때 더 큰 힘을 얻어 마음속에서 떨쳐 버릴 수 없는 고민들을 해결할 수 있다. 병자가 언제나 약물 치료에 매달리기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말할 수 있다면 더 인간적이고 유익하지 않겠는가?
 
정 보

임종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정보도 필요하다. 그들도 알 권리가 있다. 다행히도 최근 들어 전문 의료인들이 터놓고 이야기를 해 주려는 의지를 더 많이 보여 주고 있다. 병자와 주변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불필요한 슬픔을 더 많이 겪었다. 그러므로 의사는 임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의사는 병자와 그 가족을 안심시킬 수 있다. 이것이 의사가 하는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의사는 병자와 가까운 친지들의 상태에 따라 단계적으로 정보를 주어야 할 것이다. 임종자와 그 주변 사람들이 흔히 똑같은 마음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 특별히 어려운 점이다. 병자는 오랫동안 자신에게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느껴 왔더라도, 가족들이 아직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반대로, 가족들은 병자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병자는 아직 죽음을 생각하지 않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듯한 경우도 있다. 참으로 슬픈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서로 사실을 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을 숨기면 양쪽 모두에게 거리감이 생기게 되어 남아 있는 날을 함께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바로 이러한 때에 병자와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들이 서로에게 최대한 솔직할 수 있다면 양편 모두 큰 힘과 위로를 얻을 것이다.

마음의 체념

경험이 말해 주듯이, 임종자는 불안과 희망, 걱정과 거부감, 다가오는 이별의 아픔 등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느낌을 주변 사람들이 이해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임종자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말해 주는 것도 위로가 되겠지만, 참된 관계 안에서 솔직한 대화를 통하여 그에게 삶과 죽음을 받아들일 기회를 주어야 한다. 가족과 친지들이 이 과정에 깊이 참여한다.

이 기간에 가족과 친지들은 보통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죽음의 길에 들어선 임종자와 동행하며 가능한 한 그와 가까이 있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누구도 임종자의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그의 짐을 대신 질 수 없다. 임종은 인간이 홀로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종자를 위한 진정한 의미의 ‘동행’은 다른 사람들이 임종자에게 길을 가르쳐 주며 ‘인도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마치 누구나 임종자가 가야 할 길을 아는 것처럼, 병자들을 자주 다루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병자를 인도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는 마치 자신이 상황을 더 잘 파악하고 있는 듯한 안도감을 준다. 어쨌든 같은 한 인간의 임종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고 ─ 물론 처음에 ─ 심리적 장애를 겪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봐야 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을 거야.”라는 식의 충고는 당사자를 괴롭힐 뿐이다. 이러한 간섭조의 말을 듣는 임종자는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자기 안으로 움츠러든다. 중환자가 명백히 누군가를 필요로 하거나 그 사람을 신뢰할 때, 조력자는 매우 겸손하게 행동하여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 조력자나 친척들이 병자에게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고 어떤 감정을 가지거나 가지지 말아야 하는지 충고하려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죽음을 평화롭게 받아들이고자 힘과 위로가 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대를 키울 수 없다거나 또 키워서도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

상태가 악화되면서 병자가 인간 삶의 의미와 생명의 의미, 질병과 고통과 죽음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경우, 병자를 올바로 동행할 필요성이 특히 중요해진다. 이러한 질문들에는 절망감과 무력감이 배어 있으며, 그 질문들은 신앙이나 생명관과 연관되어 있다. 삶이 뒤바뀌고 그것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느낄 때 인간은 그러한 질문들을 제기한다. 곧, 가까운 가족이나 친한 친구가 죽을 때, 누군가가 직장에서 해고될 때, 깊은 외로움이나 인생에서 다른 수많은 위기의 순간들을 겪을 때이다. 삶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위기의 상황들은 마치 발 밑의 땅이 꺼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가장 힘든 위기 상황은 아마도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거나 그렇게 의심될 때일 것이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왜?’ ‘무엇 때문에?’ ‘내가 어쨌기에?’라는 질문이 나온다. 한 인간의 삶의 본질을 건드리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밖에서 주어지는 진부한 대답 ─ 종교적인 대답 ─ 은 흔히 삶과 무관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질문들에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사람도 무력감을 느낄 수 있다. 삶의 이러한 근본 질문들에 대한 답은 오로지 함께 느끼는 무력감과 신앙 안에서만 도움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친척이나 조력자가 이러한 무력감으로 심한 압박을 느낀다 하더라도, 스스로 이러한 느낌을 인정하고 임종자와 인격적인 만남을 가진다면, 임종자의 질문들을 해결하고 하느님께 되돌아간다는 생각에 마음을 열어 주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를 도와줄 수 있다.

영적인 도움

이러한 인생의 심오한 물음들과 관련해서, 가족이나 그 밖의 사람들 말고도 사제와 다른 사목 조력자들도 병자와 함께하는 소중한 임무를 맡는다. 이는 흔히 그들에게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데, 중환자들은 보통 정신적으로 비탄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충실한 신자들은 대개 기도를 하며 힘과 위로를 얻음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때때로 중환자들은 건강했을 때는 하느님께 거의 관심도 없다가 병이 들어서야 하느님께 의지한다는 것이 위선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충실하시며 결코 인간을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한때 하느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직접 예언자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
어느 시점에서 하느님의 도움을 갈망하던 사람이 정작 자신의 소심함을 떨쳐 버리지 못하여 그분께서 내미시는 손을 붙잡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바로 이러한 인생의 고비에서 기도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영성체,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서 읽기, 그 밖에 하느님을 가까이 체험할 수 있는 다른 기회들도 분명 많은 도움을 준다. 이때 사제만이 병자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병자를 염려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도움이 될 수 있다.

 

II. 임 종


품위 있는 임종

임종을 올바로 돕고 함께하는 길은 병자에게 인간다운 임종의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임종이란 최후의 몇 시간이나 며칠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임종 과정은 ─ 병자 자신의 의식으로도 ─ 더 이상 회복이나 개선의 여지가 없을 때부터, 곧 병자 스스로 자신의 병세가 더욱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누가 봐도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때부터 시작된다. 임종 과정의 기간은 짧을 수도 있고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품위 있는 임종은 여러 가지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삶의 질에 대한 생각과 죽음에 수반되는 때로는 비참한 징후들에 대한 생각이다. 이래도 아직 살아 있는 것인가? 이렇게 질질 끌어야만 하는가? 그러나 품위 있는 임종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해 단정지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육체적인 기능 저하가 인간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의견이다. 역사가 보여 주듯이 매맞고 고문을 받아 엉망이 된 육신으로도 훌륭한 인격자가 된 사람이 수없이 많다.
슬픔이나 우울, 무력감과 절망감 역시 삶과 죽음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감정들도 삶의 한 부분이 아닌가? 인생의 어느 시기에 슬픔의 골짜기를 지나가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러한 골짜기를 일평생 비켜갈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견디기는 어렵지만 슬픔도 삶에서 나름의 역할을 한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좀 더 성숙해지고 어른답고 인간다워지며, 인생의 역경도 더욱 잘 감당해 왔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많은 고통을 감당해야 할 사람들은 그러한 비극을 바라지 않는다 해도, 그 모든 일을 인간에게 부당한 것으로 여길 수는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흔히 죽음을 동반하는 육신의 쇠약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임종자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그러한 쇠약을 받아들이기가 아무리 어렵다 해도, 인간은 육체를 넘어서는 존재이다.
그러나 가족과 친구들이 임종자를 짐스럽게 여기기 시작하고 그를 멀리하며,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다가가지 않고 더 이상 그를 돌보는 사람도 없다면, 그리하여 그가 홀로 남겨진 채 외로이 죽음을 기다린다면, 임종은 인간답지 못하게 된다.
품위 있는 임종을 위해서는 임종자의 주변 사람들이 임종자에게 그가 그들의 일원으로서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끼도록 배려하여야 한다. 이것은 치매나 정신 박약, 기타 심리 장애로 주변 상황에 대해 의식을 잘 못하는 임종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인생의 어두운 단면들

임종자를 가까이 하는 일이 오늘날에는 옛날보다 더 힘겨워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과 임종, 죽음에 대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 사회의 가치 체계에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건강과 왕성한 힘, 인생을 즐기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더군다나 전에는 장애인이나 병자, 임종자들이 가정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렀던 것이 사실이다. 옛날 사람들은 날마다 삶의 그러한 단면들과 마주하였다. 서구 세계의 변화된 상황 때문에 병자를 보살피고 간호하는 일도 오늘날에는 사정이 예전 같지 않다.
임종 역시 과거에는 하나의 사회적 과정으로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친지들과 이웃들이 거기에 깊이 동참하였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인생의 어두운 단면들과 더 이상 매일 접촉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고통과 죽음을 사람됨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이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다. 임종자와 함께할 때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불안을 느끼며 안절부절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질병과 고통, 죽음을 본질적으로 인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줄 알게 된다면, 그리고 병자와 임종자를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다른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때로는 매우 힘들지만 언제나 만족감을 주는 봉사를 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고통과 죽음에 더욱 익숙하고, 임종자와 그의 가족들에게 좀 더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안락사에 대한 요구가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 우리는 병자와 임종자를 마음속 깊이 염려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주변에서 그에게 마지막까지 성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헌신적인 간호에도 “이건 더 이상 사는 게 아니야. 이대로 계속될 수는 없어.”라고 말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병자에게 편안한 임종을 맞게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물음은 “이렇게 임종을 질질 끄는 것이 옳은가?”라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임종의 순간이 왔다고 판단할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나는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비슷한 상황에서 명백히 더 살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삶의 의미 ─ 이 경우에 ‘품위 있는’ 임종의 의미 ─ 는 사람마다 다르다. 병자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꿋꿋이 견디며, 다른 사람들은 전혀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그 과정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려면, 그의 종교적 신념이 중요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임종을 받아들임

여기서 잠깐 멈추어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생각해 보자. 가까운 친척들은 흔히 슬프면서도 때로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떠올린다. 오늘날에도 오랜 싸움을 거치면서도 완전한 의식 속에서 죽음을 맞을 줄 아는 신자나 비신자들이 있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그들이 더 살고 싶어도 삶을 마칠 때가 되었다고 말하며 작별을 고한다. 그들이 질병과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육체의 쇠약이 그들의 존엄을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그들이 삶에서 추구하였던 참된 가치들이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사려 깊은 분별력과 수용하는 자세로 이웃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이며 여전히 주변 사람들을 격려하고자 한다. 그들의 작별 인사는 사람들에게 삶을 계속해 나가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남아 있는 날들의 감사와 사랑의 빛이 너무도 강렬해서 그 안에서 그들은 자신을 초월하고 하느님과 더욱 결합되어 때로는 “내 육신이 안식을 얻게 되면, 나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야.”라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 빛은 감사의 마음을 통해서 임종의 슬픔을 완화시켜 주는데, 이 역시 임종의 한 모습이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임종의 모습을 알고 그러한 임종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생명 연장

예로부터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써서 생명을 구하고 죽음과 싸우는 것이 의사의 임무라고 말해 왔다. 최근까지 그러한 수단들은 매우 한정적이었고, 의사는 가능한 한 생명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하여야 했다. 그러나 요즈음 의사는 생명을 거의 무기한 연장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다. 불행히도 일부 의사들은 이 유혹을 떨치지 못함으로써, 책임 있는 치료의 한계가 무너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의술의 남용에 대해서 거론하여야 하지 않느냐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 문제에서 병자의 관심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명 연장은 흔히 불필요한 고통의 증대를 의미한다. 임종의 순간을 지연시키고자 임종자에게 온갖 치료를 강행한다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전망도 없이 병세만 악화될 뿐이다. 이렇게 의학 윤리의 경계가 침범당해 왔다.
인간과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은 사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인정도 내포한다. 고개를 숙이고 의미 없는 치료를 중단하려면 용기와 겸손이 요구된다. 죽음이 임박하였다고 확신하는 순간, 즉시 사실을 받아들이고 회복을 위한 치료에서 임종을 돕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더 이상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때에는, 임종 과정의 연장이 정말로 임종자를 위한 것일 때만 생명의 연장이 정당화될 수 있다.

의학적인 측면은 물론 의사만이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요인들도 어떤 역할을 한다. 임종자가 임종을 받아들이고자 하는가 아닌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작별의 인사를 전하려고 여전히 삶에 집착하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이나 하느님과 화해하거나 타협할 일이 아직 남아 있는가? 임종자를 떠나 보내려면 이 모든 요인을 고려하여야 한다. 이러한 결정은 물론 의사의 책임만이 아니라, 임종자는 물론 가능한 한 관련된 모든 사람과 깊이 협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치료를 거부할 병자의 권리

자신의 건강을 돌보고 건강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병에 걸렸을 때는 의사와 그의 치료 방법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의사와 치료 방법을 선택할 병자의 권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것은 당연하다.
병자가 통상적인 의학 치료에서 효과를 보지 못한다면, 아직 실험 단계를 거치지 않아 위험 부담이 있는 치료법에 동의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다른 병자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렇다고 병자가 그러한 치료법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병자는, 이미 사용하고 있지만 그 효능이 입증되지 않았고 위험 소지가 없지 않거나 너무 큰 부담이 되는 치료법은 거부할 권리가 있다. 예를 들어 병자는 있을 수 있는 극단적인 부작용이 염려된다든지, 가족이나 다른 사랑하는 사람들 또는 공동체에 너무 큰 부담을 지우는 것이 우려되거나, 치료를 받아도 회복되거나 인간다운 삶을 연장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있을지 의심이 될 때 치료를 거부할 수 있다.
임종자가 자신의 생명 연장을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흔하다. 때로는 미리 서류로 이를 작성해 놓기도 한다. 특히 노인들은 때때로 하늘 나라를 갈망하며 죽음을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그들은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기를 고대하며, 의사가 그들의 임종을 더 이상 늦추지 않기를 바란다. 병세를 호전시킬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때 표명하는 그러한 바람은 존중되어야 한다. 이때에는 아픔을 누그러뜨리고 성심성의껏 인간적으로 대함으로써 고통을 완화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임종을 연장하는 치료는 포기하여야 한다.
그러나 모든 수단을 써서 가능한 한 오래 살아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임종자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더 이상의 가능한 치료가 가져오는 결과와 영향을 정직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그러나 더 이상의 검사와 치료가 더 이상 아무런 긍정적인 결과도 가져오지 못한다면, 치료를 중단해도 된다. 결국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다.

요즈음에는 훨씬 더 관례화된 듯하지만, 더 이상 호전이나 고통의 경감을 가져올 수 없는 치료법으로 임종 과정을 무의미하게 연장하는 것을 거부하여야 한다. 그러한 경우에 개인의 생명을 단축시킨다는 인상을 줄 수 있지만, 그러한 인상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때가 다한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III. 안락사


안락사에 대한 이해

이쯤에서 안락사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인간사의 여러 측면을 말로는 결코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일어나는 일들은 몇 마디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그렇다고 안락사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밝혀야 할 우리의 임무를 회피할 수는 없다. 우리는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안락사에 관한 선언’(1980.5.5.)에 나타나 있는 정신과 목적에 따라 안락사의 의미를 말하고자 한다.

안락사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편안한 죽음, 편안한 임종을 뜻한다. 그러나 이 말은 오늘날의 일상어에서 다른 뜻으로 통용된다. 요즈음 안락사라는 말은 죽을 병에 걸렸거나 심각한 장애가 있는 임종자의 생명과 고통을 종식시키려는 목적으로 그의 생명에 고의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이유에서든 아직 임종을 맞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생명에 고의적으로 개입하는 매우 민감한 문제는 다루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자기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굳게 확신할 수 있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안락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살인이나 자살이라고 일컫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사목 교서에서 우리는, 적극적 개입이든 죽음을 부르는 무책임하고 의도적인 부작위이든 조만간 돌이킬 수 없는 죽음에 이를 임종자의 생명을 고의적으로 끊을 때 이를 안락사라고 말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임종자는 병세가 더 이상 호전될 가망이 없으며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고 죽음이 확실히 임박한 불치병 환자를 뜻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안락사라는 말은 임종자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끊는 경우에만 사용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특수한 의미에 대해서만 안락사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선택한다. 우리는 임종자의 문제 상황은 임종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교서의 앞부분에서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임종을 연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죽음이 돌이킬 수 없이 임박하고, 더 이상의 치료는 더욱 견딜 수 없는 고통만을 가져다준다면, 그리고 병자가 인생에서 어떠한 과업도 마칠 필요가 없고 또 마칠 수도 없다면, 물러서서 임종자를 떠나 보내야 한다. 이것은 흔히 소극적인 안락사라 불린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은 사실 자연사이다. 안락사라고 부를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의 질병으로 죽은 것이다. 그의 죽음은 의도된 것도 야기된 것도 아니고, 죽음을 지연시키고자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신앙교리성의 선언은 의학 치료의 중단을 결정할 때는 “병자의 상태와 병자의 육체적 윤리적 자력을 참작하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의학적 수단이 병자에게 ‘유익한 효과가 아닌 더 많은 고통과 불편’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경우에, 가족이나 공동체에 너무 큰 부담을 주지 않고자 하는 병자의 바람도 고려되어야 한다.
우리는 임종 과정에서 고의로 생명을 끊는 경우에만 안락사라고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적극적인 안락사’라고도 불린다. 적극적 안락사란 임종자 자신의 요구나 그의 선익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끊는 것이다.

임종 과정에서 생명을 연장하지 않는 것과 끊는 것의 차이

우리는 개개의 경우에 임종 과정에서 생명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는 것과 종식시키는 것을 구분하기가 대부분 매우 어렵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극심한 고통을 줄이고자 죽음을 재촉하는 독한 약을 투여받는다면 그것도 안락사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리고 치료의 효과가 전혀 없는 약이나 치료로 임종자가 생명을 좀 더 연장할 수만 있을 뿐이라면? 그렇다면 이들의 죽음은 질병 때문이며 그 죽음은 더 이상 연기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죽음이 어떠한 개입이나 부작위의 결과인가? 여기서 그들은 질병으로 죽는다고 말해야 옳다. 그러므로 그것은 안락사라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에 의학 치료는 회복이나 호전을 가져오지 못하며, 임종을 연장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병자와 그의 생명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임종 과정에서 생명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는 것과 끊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론적인 문제로만 여겨질 수 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불쌍하다 해서 우리가 이 사람을 죽여도 되는가?”라는 물음과 “모든 수단을 써서 이 사람을 좀 더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선행인가?”라는 물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임종 과정에 개입해서 생명을 끊겠다는 결정은 죽음이 시작되는 것을 더 이상 막지 않겠다는 결정보다 감정적으로 더욱 비장한 것이다. 실제로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관련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어떤 식으로 임종 과정을 끝내려고 하는지 느낄 것이다. 곧 생명을 끊음으로써인지 아니면 더 이상 죽음을 중지시키지 않음으로써인지 잘 알 것이다. 신앙교리성 역시 앞에서 언급한 ‘안락사에 관한 선언’에서 안락사냐 아니냐는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더욱 깊은 마음속의 의도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안락사는 모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저절로 또는 고의로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 또는 부작위(不作爲)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안락사의 관계 조건은 사용된 방법과 지향 의지에서 인지되는 것이다.” 신앙교리성은 치료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안락사는 임종자뿐 아니라 앞으로 몇 년은 더 살지도 모르는 중환자나 장애인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에게 통상적인 치료를 하지 않는 것은 엄연히 중죄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생명의 유지가 가능하고 의무적일 때, 그러한 치료를 하지 않는 것은 사실 피할 수 있는 죽음을 유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교리성의 의도는 고의적으로 생명을 끊는 것으로 여겨질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기술하고 있는 것은 돌이킬 수 없이 죽음이 임박한 임종자에 대해서이다. 신앙교리성은 임종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사람은 인간적인 그리고 그리스도교적인 존엄성을 지니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임종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들에 맞닥뜨리게 하지 않는다. 실제로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쇠퇴 속에서 임종을 맞는 것과 임종 과정에서 고의로 생명을 종식시키는 것 사이에서 거의 언제나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충실한 접촉과 동반, 그리고 전문적인 진정제 치료를 통하여 임종자의 고통을 대개는 충분히 경감시킬 수 있는 듯하다.

가능한 한 빨리 개입하여 생명을 종식시켜야 하느냐 마느냐라는 질문보다는 ─ 질병의 성격과 앞으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 병자의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 그래도 정당하지 않겠느냐 라는 질문이 훨씬 더 자주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전자의 질문이 점점 더 자주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임종 과정에서 고의적으로 생명을 끝내 달라는 요구

임종자가 자신의 임종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거나 견디고 싶어하지 않을 때, 또 그가 그 모든 것의 의미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때, 극심한 고통을 더 이상 충분히 진정시킬 수 없을 때, 육체적 또 어쩌면 정신적 쇠퇴가 임종자 자신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 참을 수 없고 혐오감을 일으킬 때, 생명을 고의적으로 끊어 달라는 요구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요구의 심각성을 잘못 판단하지 않기를 바라며, 임종자와 주변 사람들에 대하여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그러한 요구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자 노력하여야 한다.
임종자나 주변 사람들이 치명적인 주사나 그 밖의 어떤 방법으로든 고통을 중지시켜 달라는 바람을 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이러한 바람은 그들의 참뜻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그러한 요청은 흔히 “나는 더 이상 고통을 이길 힘이 없으니, 어떻게든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세요.”라는 부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임종자는 사실 임종에 대한 더 나은 도움과 더욱 효과적인 진정제 치료, 더욱 인간적인 치료와 접근, 주변 사람들의 더욱 진실한 동정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임종자가 주변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너무 큰 부담을 지우고 있다고 느낄 때 안락사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다. 그는 스스로를 너무 큰 짐이라고 느끼며 다른 사람들에게 밤낮으로 자신을 돌보는 일을 시키고 싶어하지 않는다. 인내심이 바닥난 가족들 편에서도 “얼마나 더 오래 이렇게 계속되어야 하나?”라며 흔히 말끝을 흐리며 같은 질문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럴 때 이것은 오히려 도움과 더 나은 대우를 요청하는 것이다. 임종자나 가까운 친지들이 안락사를 요청할 때,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선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안락사를 요청하게 만드는 감정들과 그러한 요청 뒤에 숨은 마음을 분명히 알게 되면, 실제로 생명을 끊어 달라는 요청이 늘 진심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 이를 것을 대비해서 서면으로 안락사를 요청해 놓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서면 진술을 한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중병에 걸리지 않았을 때에도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임종자의 안락사 요청이 전보다 더 흔하고 진심이라는 인상을 준다. 요즈음에는 친척들 역시 전보다 더 단호하고 노골적으로 안락사를 요구한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옛날에는 안락사 문제가 없었는가? 아니면 안락사를 거론하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여겼는가? 옛날 사람들이 좀 더 체념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는가? 아니면 오늘날의 서구인들이 죽음을 지배하려 드는 것인가? 오늘날의 광고와 한층 개방적인 자세가 사람들에게 안락사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는가? 오늘날 임종을 거의 무제한 연장할 수 있는 의술이 좀 더 솔직하게 안락사를 요청하도록 만들었는가? 아마 이 모든 요인이 함께 작용하는 것 같다. 어떻든, 우리는 의식적이고 고의적인 안락사 요청을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될 것이다.

임종자 대신 다른 사람들이 하는 안락사 요청

임종자 대신 다른 사람들이 안락사를 요청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임종 과정에 개입하여 목숨을 끊어 달라는 명시적인 요청은 매우 개인적이고 극단적인 성격의 요청이기 때문이다. 정의상 안락사는 당사자의 존재성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치명적인 개입에 대한 요청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는 없다고 확신한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가 근본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생명이 끊길 가능성이 있다면, 중환자들은 의사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상호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보건 체계 전체에 금이 가게 할 것이다. 병자와 임종자들은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임종자의 주변 사람들이 그러한 개입을 바랄 경우, 그러한 요청을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임종을 견디기 어려운 부담으로 느끼는 가족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임종자에게 깊은 무력감 속에서도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들도 그것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경험이 가르쳐 주듯이 임종자가 사망한 다음에는,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임종 과정 내내 그와 함께 있었다는 느낌으로 상실에 대한 슬픔이 흔히 누그러진다.

임종자 자신의 안락사 요청

자신이 곧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불치병 환자들이 때로는 명시적으로 또 의식적으로 그들의 생명을 끊어 달라고 스스로 요청을 하는 경우가 오늘날에는 옛날보다 더 흔하다. 임종자의 안락사 요청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주변 사람들은 그들이 임종자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거나 도움을 거의 주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는 자책감을 갖게 된다. 임종자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될 뿐이라고 생각하는가? 더 심한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것인가? 흔히는 대화를 통해 아무도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그가 결정을 철회하도록 도울 수 있다. 또는 임종을 불필요하게 연장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약물 치료로 우울과 고통, 불안을 가능한 한 예방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퇴치할 것이라고 솔직히 약속할 수도 있다. 대부분 임종자가 실제로 바라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나 임종자가 끝까지 자신의 결정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삼자는 당사자의 고통이 참을 만한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임종자가 자신의 요청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지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충분히 존중하고 있는가? 그의 요청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려운 양심의 결정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가? 과연 누가 그러한 치명적인 개입을 감행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임종자가 모든 것을 고려하고도 자신의 결정을 고집한다면, 임종자의 요청을 받은 당사자는 심각한 문제에 맞닥뜨린다. 한편으로 인간에 대한 존엄성은 매우 신중하고도 양심적인 결정을 따르도록 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생명에 대한 존중심이 어느 누구도 생명을 종식시키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다그친다. 뒤에서 양심에 대해서 다룰 때 우리는 다시 이 딜레마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신앙교리성은 생명 존중에 대해서 이렇게 쓴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자기가 돌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든,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살인 행위를 요청할 수 없고, 또 남자든 여자든 명시적으로나 함축적으로 거기에 동의할 수 없다. 어떠한 권위라도 그러한 행위를 합법적으로 권고하거나 용인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을 침해하는 문제이고 인간 존엄에 대한 모욕이며 생명을 거스르는 범죄요 인간성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죽음을 추구하거나 측은한 마음에서 임종자의 생명을 끊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인간의 생명, 특히 불완전한 생명에 대한 존중은 인간 문화와 그리스도교 문화의 근본 요소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확신에서 우리는 임종 과정에서 고의로 생명을 끊는 것을 승인해서도 안 되고 승인할 수도 없다. 이에 반하여, 우리가 생각하기에 생명 존중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임종자의 개인적인 양심의 결정에 공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의사가 임종자의 요청에 따라 또는 동정심에서 임종자의 안락사 결정을 실천에 옮겨 그의 생명을 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더 이상의 치료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의사가 치료를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의사는 질병에 수반되는 징후와 싸울 뿐이다. 의사는 임종자가 그러한 결정을 하게 된 이유를 존중하지만, 다른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양심을 괴롭히지 않는다. 결국 어떤 행위를 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사람의 양심도 그것을 요청한 사람의 양심만큼이나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임종자나 그 밖의 어떤 사람의 결정도 의사나 간호사에게 그들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결코 그것을 수락할 의무를 지울 수는 없다.

 

IV. 윤리적 신학적 성찰


인간은 자기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가?

이 교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 논의의 바탕이 되는 동기를 성찰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왜 어느 특정한 순간에 임종을 끝내고 싶다는 결정을 할 수 없는가? 결국 우리 자신의 생명에 관한 문제가 아닌가?”
사실 사람은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생명의 주인도 지배자도 아니다.”라는 가톨릭 교회의 대답을 많은 사람이 쉽게 수긍하지 못한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임종자가 생명 연장을 위한 더 이상의 어떠한 행위도 바라지 않을 때 자기 생명을 마음대로 하지 않는가? 그는 고의로 죽음의 순간을 더 이상 미루지 않는다. 교회는 이러한 결정에 대해 어떤 반대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치명적인 주사를 요구할 때 교회는 무슨 이유로 반대를 해야 하는가? 그런 방법으로라도 임종자의 고통을 완전히 중지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비로운 행위가 아닌가?

우리는 그러한 개입을 허락할 수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사람의 생명과 죽음을 그렇게 마음대로 최종적으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인간됨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밝히고자 한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생명이 하느님의 손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에게서 그 생명을 받는다. 그러나 부모가 생명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에게도 자녀의 출생은 다행히 대부분 경이와 기쁨, 감사의 이유가 된다. 유일하고 다시 없이 귀중한 인간 존재인 자녀는 부모에게 하나의 선물이 된다. 자녀는 자기 자신의 ‘자아’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그 아이를 생명으로 부르셨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힘입어 살아간다. 하느님께 생명을 빚지고 있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히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주셨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인격체로 만드셨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느님께서 말씀을 건네실 수 있고, 또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주님이신 하느님께 대답할 수 있는 존재이다.

생명을 주신 것에 감사할 때만 아니라, 항변하고 불평할 때에도 우리는 인격적인 하느님과 우리가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표현한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되기까지 자기 자신을 완성해 가는 것은 바로 신앙의 체험이다. 임종 때라 해도 자기 생명을 끊거나 끊게 함으로써, 살아 계신 하느님과 인간의 이러한 근본 관계를 어느 누구도 일방적으로 단절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계약을 맺으셨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사이를 거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 나는 너희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되리라”(2고린 6,16-18).
하느님의 손에서 나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썼다.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7-8).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성장할 때나 쇠약할 때나 어떤 단계에서든 끝까지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께 대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임종에 왜 그런 극심한 고통이 수반되는지 알 수 없지만, 임종 역시 본질적으로 삶의 한 단계이다. 인간은 고통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을 시켜서 생명을 끊음으로써 삶을 등지는 것은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극단적으로 죽음을 지연시키는 것도 하느님께 대한 존중의 결여를 드러낸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지만, 죽음으로 끝마치는 때가 온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새로운 존재 양식을 주신다고 믿는다.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위령 감사송 1).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은 고통을 막고 아픔과 싸우면서 가능한 한 편안한 임종을 맞도록 부름 받아 왔다. “그러나 우리는 솔직히 고의적으로 생명을 끊는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행동을 시작하는 순간 거기서 멈춰야 한다.”2) 자기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의 생명에서 고통을 막을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들이 이것을 인정할 때, 이러한 깨달음은 그들이 서로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서로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며 연대 안에서 성장해야 하는지를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한다. 이에 따라 사회는 더욱 인간적이 될 것이다.

인간의 존엄

인간을 유일하고 대치할 수 없으며 숭고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신앙을 통해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삶 자체를 통해서도 그것을 체험할 수 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삼라만상을 그의 발 아래 두시었으니 ……”(시편 8,5-7).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의식하고 있다는 경험을 함으로써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에 대하여 깊이 떨리는 마음으로 감탄할 수 있게 된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소포클레스가 썼듯이, “만물은 위대하지만 인간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른바 인간의 존엄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인간을 ‘눈에 보이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고귀한 존재’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그가 놓여 있는 처지에 상관없이 고귀하다. 매를 맞고 고문을 받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도 인간의 존엄은 변함이 없다.

인간은 정신을 통해 살아 있고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인격체이기에 그러한 존엄을 지닌다. 인간이기에 이야기 상대가 될 수 있고 질문을 던지면서 인생을 살아간다. 아무리 불완전하게 성장하여 결점이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은 유일하며 되풀이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존엄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협력으로 자기의 삶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 자기의 가능성을 계발하여 이웃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들은 서로 본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완전해지고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서로를 필요로 한다. 서로에게 어떠한 존재가 될 수 있느냐가 이 문제에서는 서로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 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많은 사람이 그들의 인격과 생활 방식, 때로는 고통과 가난과 질병을 견디고자 애쓰는 모습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 준다. 그들은 임종 때에도 사랑과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

오로지 자신만을 중심으로 살며 다른 사람들과 유대가 없는 사람은 고립되어 자기 안에 갇히게 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얼마만큼 더 깊은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인간성이 성장하며 더욱 인간다워진다. 인간은 인간다워지고자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임종 때에라도 자기 목숨을 끊거나 다른 사람을 시켜 자기 생명을 끊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맺는 본질적이고 깊은 관계를 단절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럴 경우 그는 자기 생명을 되돌리지 못하므로, 사회적 존재라는 자기 자신의 가장 심오한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생명을 그렇게 마음대로 처분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생명을 하느님의 선물로 존중한다고 해서 믿는 이들이 언제나 생명에 대하여 감사함을 느낀다는 말은 아니다. 믿는 이들도 자신의 생명을 통해서만 생명을 알고 체험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제 방식으로 생명을 체험한다. 자기 생명에 대하여 날마다 감사함을 느끼며 하나의 선물로 기쁘게 체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비참한 시기를 겪었거나 현재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값진 선물로 생각하기가 어렵다. 가혹한 짐으로만 체험한 선물에 대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에게 생명을 끊도록 허락할 수 있는가?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끝까지 목숨을 부지하라는 호소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 생명을 끊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이러한 호소에 대한 위배이다.

양 심

그럼에도 임종 과정에 있는 병자가 자기 생명을 끊거나 다른 사람을 시켜 끊게 하려는 개인적인 결정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는 개개인의 양심이 문제가 된다.
양심은 하나의 계시가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 자기 앞에 놓인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충분히 숙고한 인간의 대답이다. 이 양심은 인간에게 교육을 통하여 제시되는 규범과 신앙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인간은 영적 성장을 통하여 양심을 기름으로써 건전한 판단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은 이렇게 말한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양심에 충실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결합되어 진리를 추구하고 개인 생활과 사회 관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도덕 문제들을 진리 안에서 해결하게 된다.……`어쩔 수 없는 무지에서 양심이 잘못을 저지르는 수도 드물지 않지만, 양심이 그 존엄성을 잃지는 않는다”(16항).

양심이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양심의 존엄은 언제나 존중하여야 한다. 그렇다고 그릇된 양심을 가진 사람의 요청을 다른 사람이 받아들여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임종자가 명시적으로 안락사를 요청하는 경우, 대화를 통해서는 그의 마음을 바꾸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의사는 그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잘못된 양심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생명에 대한 존중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릇되게도 자기 결단에 대한 가상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병자와 의사에게 매력적이지만 비참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이 말해 주듯이 불치병 환자도 안락사를 하지 않을 것을 결정하면, 다시 말해 그의 임종이 불필요하게 연장되지는 않을 것이며 가능한 한 고통 없이, 때가 오면 평온하게 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진정한 약속을 받으면 거의 대부분 편안해한다.

이와 관련하여 신앙교리성은 ‘안락사에 관한 선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래 지속되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심리적이거나 다른 이유로 죽음을 요청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요청할 수도 있다고 믿게 되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한 경우에 개인의 죄의식이 감소되거나 완전히 없어진다 하더라도, 비록 선의에서일지라도 양심이 저지른 판단의 오류가 결코 그러한 살인 행위의 본질을 바꾸지는 못한다.”

위의 인용구는 교회가 ─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믿음과 인간의 존엄을 바탕으로 ─ 인간에게는 자기 생명을 그렇게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없다고 믿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통과 함께하기

이 교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고통에 생각을 집중하고 있다. 질병과 임종은 결국 고통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우리 인간은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가능한 한 우리는 고통을 완화하고 없애고 싶어한다.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한계인가? 전체적으로 이 교서는 이 중요한 문제를 함축적으로 다루어 왔는데, 이제부터는 명시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고통의 실재

우리는 누구나 고통이 우리의 삶 전체와 뒤얽혀 있다는 것을 날마다 경험한다. 고통은 전쟁과 폭력, 차별, 자연재해, 사고 등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걱정과 질병, 선천적인 장애, 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괴로워한다. 그야말로 고통의 세계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 이유를 되묻곤 한다. 간단한 대답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그러기에는 고통이 사람들의 삶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언제나 신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맡기신 임무를 수행했더라면,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일을 계속한다면 세상은 매우 다른 모습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땅을 다스리라는 임무가 맡겨졌기 때문이다. 좋건 싫건 우리에게는 이 땅을 개발할 자유가 주어졌다. 우리에게 이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닐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신명 30,19). 그런데 우리는 서로를 위하여 생명을 선택하는가? 땅은 참으로 많은 부요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이 흔히 서로의 생명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개발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히고 인간 사회를 희생시키면서 자신의 이익을 찾기에만 여념이 없다. 사람들은 서로 얽혀 살기 때문에, 고통과 인간의 과오는 흔히 연관되어 있다. 불의를 입거나 겪을 때마다, 죄와 고통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굴면 ─ 이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많은 고통을 부른다. 이와 관련하여 교회가 말하는 원죄는 머나먼 과거의 사건만은 아니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죄이기도 하다. 우리는 원죄의 고통스러운 실재를 날마다 우리 주변에서 경험한다. 악의 신비에서 비롯되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

그러나 이 밖에도 인간의 책임이 아닌 고통도 많이 있다. 자연재해로 수많은 사람이 죽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죄 없는 사람들이 때로는 일평생 고통에 시달리는가? 많은 사람이 죽음을 맞기 전에 장기간 고통을 겪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수많은 슬픔에 반발하는 것도 당연하다. 많은 사람이 이를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고통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이 세상 삶을 불운과 고통으로 정화되어 내세의 삶을 시작하는 하나의 시련기로 본다. 아니면 하느님의 창조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창세기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는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창조하시려고’ 아직도 일하고 계시는 것인가? 확실히 하느님의 본성은 위대한 질서를 드러낸다. 모든 것이 확고한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 자연은 차별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이 이러한 질서 정연함 속에 들어 있다.

이에 대한 암시가 욥의 이야기에 들어 있다. 이 죄 없는 사람이 비탄에 잠겨 자신이 겪는 고통에 대하여 하느님을 원망하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신다. “네가 나의 판결을 뒤엎을 셈이냐?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 작정이냐? 네 팔이 하느님의 팔만큼 힘이 있단 말이냐? 너의 목소리가 천둥소리와 같단 말이냐?”(욥기 40,8-10) 욥은 이렇게 대답한다.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욥기 42,2).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옛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생한 신념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그들은 아주 지혜롭고 질서 있게 창조가 이루어졌으며, 당연히 창조의 법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유효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동시에 옛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고통에 마음을 쓰신다고 믿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출애 3,7). 이에 욥은 말문이 막혀 이렇게 대답한다. “손으로 입을 막을 도리밖에 없사옵니다”(욥기 40,4).

고통의 이유에 답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어 왔다. 그 답들은 불완전하고 불만족스럽다. 인간은 날마다 삶에서 한계와 불화를 경험한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와 더불어, 우리는 고통이 때로는 풍부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간과할 수 없다. 많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 때로는 훌륭하고 현명한 인격자로 성장할 수 있다. 고통 속에서 성숙한 사람은 온건한 판단과 인생의 본질적인 것에 대한 느낌,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찬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때로는 많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나는 어느 누구도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지만, 나는 내가 고통 때문에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고통은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올 여지와 개방성과 사랑의 여지를 만들어 준다.

왜?

아직도 이러한 질문이 계속된다. 왜 어떤 사람, 어떤 민족들은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견뎌야 하고, 왜 다른 사람들은 고통을 거의 완벽하게 비켜 가는가?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반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회복이 더딜 것으로 예상되는 병자들도 “왜 하필 나인가?”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는가?” 하며 기막혀한다. 단순히 지적인 설명만 하려 한다면 이러한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고통 받는 사람이 바라는 것은 지적인 설명이 아니다. 고통 받는 사람의 질문은 무력감과 몰이해, 분노와 항거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심하게도 자신의 반항으로 죄책감만 생겨 무력감이 더 깊어질까 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어둠이 덮치자 하느님을 탓한 욥과 다른 수많은 예언자들의 불평을 잊었단 말인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불행 속에서 욥이 하느님을 거슬러 종주먹을 들이댄 사실을 잊었는가?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27,46) 하고 외치시지 않았는가? 우리라고 하느님께 홀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드러내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다정하게 들리지는 않겠지만 매우 솔직하면서도 매우 자연적인 이러한 항거나 외침도 기도가 될 수 있다. 도움과 빛을 바라는 기도이다. 생각과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인간의 속내를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 이 기도를 듣지 않으실 리 없다.

질병이나 괴로움, 모든 고통을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통이 닥치면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되묻는다. 이러한 생각은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에서 발견된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생각이 뚜렷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신 예수님께 제자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요한 9,2-3). 욥도 그의 불행이 그릇된 삶을 살았을 것이기 때문에 받은 징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질병과 고통이 하나의 징벌, 곧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징벌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앞에서 숙고한 바와 같이, 우리의 죄와 인간의 잘못 때문에 받는 고통도 물론 많이 있다. 죄에는 벌이 따른다는 사람들의 말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책임 지울 수 없으며 무고한 사람들이 받는 고통도 많이 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를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답을 줄 수 있다. 우리에게 닥친 고통의 의미를 탐구하면서 우리는 먼저 주님을 바라본다. 주님은 길이시며, 주님께서는 우리도 당신의 길을 따르도록 권고하신다. 우리는 주님의 길이 어둠 속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고 빛을 밝혀 주기를 바란다.

“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다”(마태 25,36)

예수님을 직접 뵌 성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한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심장이 우리를 위하여 뛰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어떻게 견디어 내셨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닥친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발견하신 길을 세상 사람들에게 제시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온 생애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마음을 쓰시는지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시며 당신을 그들과 동일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으로 가득한 인간 세계로 나가셨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셨으며 굶주린 이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셨고 귀머거리와 소경, 나병 환자들을 낫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시는 분이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예수님께서는 곤경에 빠진 모든 사람에게 당신께 나아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동정하시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신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고통과 불의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보이셨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짐을 짊어지우는 것을 단죄하셨으며,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낫거나 더 높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마태 23,8-9).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으며, 이에 대한 생생한 본을 보여 주셨다. 또한 우리에게도 인생길을 가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라고 권고하시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사람들이 곤경에 빠진 사람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마음으로 돌보는 그곳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21)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이와 일치하시어 고통 받는 사람 편에 서신다. 그러나 주님을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로 제시하는 말씀은 없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고통 받는 사람과 당신을 동일시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못 본 척하지 말고 다가가 도와주라고 권고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고통 받는 사람을 이웃이라 부르신다. 예수님께서는 말하자면 고통 받는 사람과 일심동체가 되어 그들을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당신과 동일시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고 말씀하시며 이렇게 덧붙이신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어떤 기준보다도 우리 이웃들의 고통을 얼마나 덜어 주었느냐에 따라 주님의 가장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능한 한 모든 곳에서 고통과 맞서 싸우며 고통에 저항하고 고통을 없애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 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처음부터 고통을 끈기 있게 견딜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없애 주시되 만일 그 고통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주님께서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운명에 마음을 쓰셨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기꺼이 몸소 고통을 견디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가 9,58)고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조차 오해를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와 죽음의 위협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려고 당신의 사명을 온전히 의식하신 채 십자가를 지셨다. 고통이 따른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생명의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시는 것이 당신 아버지의 뜻이었다. 당신 사명에 대한 충실과 아버지와 당신 백성에 대한 헌신이 그분의 죽음을 불렀다. 바오로 사도의 기록대로 예수님께서는 “……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필립 2,7-8). 예수님의 삶과 수난과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되살리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계실 분이 아니시다”(사도 2,24).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충실하셨기에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필립 2,9). 예수님의 부활은 고통과 죽음을 이기셨음을 뜻한다.

많은 고통을 견뎌야 했던 충실한 그리스도인은 어느 시대에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모범에서 용기와 영감을 얻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그들도 다름 아닌 고통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고통 가운데서도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다. 그들은 고통을 참고 견딤으로써 무조건적인 충실과 사심 없는 사랑, 삶에 대한 순수한 태도의 시금석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또한 그분의 수난과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을 본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믿음이 깊은 그리스도인들도 삶 속에서 죽음이나 고통에 직면하면 자신들의 고통에 차츰 이러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고통은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들의 소명을 실천하는 길이다. 주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몸소 이 길을 보여 주셨다(1고린 15,35-45 참조). 주님께서는 이 길을 가셨으며,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수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 주셨다.
우리 역시 어둠을 통해서만 빛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생명을 잃음으로써 생명을 얻는다. 주님께서 죽음을 통하여 새 생명을 얻으셨기에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는 이러한 영광으로 부름 받는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확신은 많은 사람에게 자신들의 고통을 참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준다.
우리는 고통과 죽음, 죄악과 불의와 관련하여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 속에서 암중모색을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의 신비는 훨씬 더 깊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께서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 받으시며 그 고통을 새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로 만드심으로써 고통을 이기셨음을 보여 주셨다. 불가피하고 인간적으로 무의미해 보이는 고통 앞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시각을 제시해 주셨다. 그 모든 괴로움에도 미래가 있기에, 임종자에게는 수용과 체념이라는 놀라운 가능성이 저항과 반항의 감정보다 앞설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임종자를 부활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고통을 통해서 좋은 일을 하며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을 하라고 가르치셨다. 주님께서는 이 두 가지 관점을 통하여 우리에게 고통의 의미를 밝혀 주셨다.”3)

병자: 기도와 성사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특히 힘든 시기에 서로를 필요로 한다. 병자와 임종자는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병자가 불안과 저항심 등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느낌을 털어놓을 수 있다면, 귀 기울여 들어 줄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큰 위안을 얻겠는가!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와 기억들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 싶어한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차츰 공허감을 밀어 내는 것이다. 귀 기울여 들어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들은 큰 위로를 받을 것이다. 병자와 병자 주변에서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대화하며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들을 인식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서로를 위한 여지

병들었거나 건강하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하기를 어려워한다. 병상이라서 예전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기도할 수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모르는 사이에 그들 내면에 어떠한 변화가 생겼다. 새로운 하느님상이 자리잡지 않은 채 청소년기의 하느님상이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나이든 어린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단연코 존재하셨고 그들 삶의 모든 일과 결부되셨지만, 이제 그 하느님께서 얼굴을 감추셨다. 이것은 자연히 기도에 영향을 미친다. 많은 사람이 더 이상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른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사람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하느님을 다시 찾는 길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서구인들은 하느님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내면의 느낌을 더 쉽게 털어놓는다. 중병에 걸렸을 때도 친한 친구나 신뢰하는 누군가에게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할 것이다. 여기에 이미 하나의 생활양식이 나타난다. 곧 좋은 일에는 감사를, 잘못된 일에는 불만과 유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 둘만 모여 있어도, 분명히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신다(마태 18,20 참조). 그들은 충실한 일치를 통해 하느님을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대화는 새로운 기도 방식을 다시 배우는 학교가 되고 사제나 다른 동료 그리스도인의 영적 도움을 받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사람은 서로에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될 수 있다. 병자 방문은 옛날부터 자비의 활동으로 불려 왔다. 병자 방문에서 영적 대화는 언제나 중요한 요소가 되어 왔다. 질병이나 고통 때문에 더 이상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흔히 이웃의 믿는 이와 대화를 나눔으로써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길을 찾는다. 오늘날에도 병자와 인간적인 일치감을 통해 기도의 문을 열어 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하느님을 향한 여지

사람이 서로 믿고 마음을 터놓는다면, 다른 사람 앞에서 좀 더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면, 삶에서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나아가 믿는 이들은 우리를 생명으로 불러 주신 하느님과 함께할 여유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저를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걸을 때도 누울 때도 환히 아시고, 제 모든 행위를 익히 보시나이다”(시편 138[139], 1-3).
살아가면서 한 일이나 소홀히 한 일에 대하여 하느님 앞에서 자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요한 사도의 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3,19-20). 우리는 이렇게 이해력을 키우고 용기를 얻는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와 하느님께 마음을 엶으로써 자기 자신이나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또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새로운 자세를 갖게 된다. 흔히 우리는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해서 모르는 사이에 고정된 틀을 갖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에 비추어 우리 삶의 참모습을 속속들이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어떤 일에 대해서 쓸데없이 걱정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고, 사람을 달리 보게 될 수도 있다.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 늘 우리 곁에 계시다는 생각이 생생하게 떠오를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어느 누구도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깊은 신뢰감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그 고통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그 고통을 견디신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맨다 해도,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십자가나 성모상을 바라보며 하는 묵주기도처럼 가시적인 기도 형식을 찾는 사람이 많다. 또한 노인들은 젊었을 때부터 익숙한 옛 기도를 바친다. 병자가 너무 지쳐서 더 이상 기도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누군가가 기도하도록 도와준다면 좋지 않겠는가? 따라서 한번 시도해 보는 용기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적당한 때를 기다려 합당한 말을 찾아 재치 있게 말하려면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이것은 병자에게는 용기를 주고, 기도하며 병자를 돌보는 친척들에게는 위로가 될 것이다.

그와 같이 기도하며 거기에서 힘을 얻고자 할 때, 복음서와 훌륭한 기도서인 시편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 “괴로움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었나이다. 주님께서는 제 소리를 들어주셨나이다”(시편 119[120],1). 우리를 앞서 간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였다. 성서에는 그들의 확신과 기쁨과 감사뿐 아니라 고뇌의 외침과 도움을 요청하는 호소로 가득하다. 다른 기도서들도 우리의 기도를 도와준다. 중개도 훌륭한 기도 형태이다. 곧, 우리 눈앞에 주님을 보여 주고, 그분을 통하여 이 세상 모든 인간의 고통을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기도를 통하여 당신께서 가야 할 길을 깨달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깊은 신뢰 안에서 끝까지 그 길을 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42). 또 이렇게도 기도하셨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46) 주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믿음은 병자에게 평화 안에서 생명의 길을 끝까지 갈 힘을 준다.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표지

몸짓과 표지가 때로는 말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한다. 눈빛과 몸짓, 관심의 표시가 상대방에 대한 느낌을 말보다 더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성사라는 효과적인 표지를 남겨 주셨다. 각각의 성사는 우리에게 “내 부활하여 지금도 당신과 함께 있나이다.”(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 입당송)라는 부활의 메시지를 들려준다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참회와 화해의 성사인 고해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용서의 표지를 주셨다. 고해성사는 실제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를 변형시킨 것으로,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라는 복음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마음 깊이 용서하고 다른 사람과 화해하는 것은 상처 받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고 여유와 자유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양쪽이 모두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을 결속시키고 일치시키며 평화를 주는 유대가 있다. 그러므로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자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고해성사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고해소에서 할 수도 있으나, 사제와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성찬례의 표지를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찬례 안에 몸소 현존하시고 우리와 당신을 가장 긴밀하게 일치시키시며 우리 삶에 동참하시고 우리에게 희망과 새로운 미래상을 보여 주신다. 병원과 요양소에서 거행하는 병자와 장애인을 위한 주일의 성찬례는 흔히 깊은 감동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여러 가지 기도에서 그들의 처지와 비슷한 인상을 받으며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신뢰를 얻고 안정과 평안을 느끼며, 다가오는 날들에 대하여 새로운 용기를 갖게 된다. 집에 있는 병자도 라디오나 텔레비전, 본당의 전화망을 통하여 성찬례를 거행함으로써 일치감을 느끼며, 집에서도 영성체를 할 수 있을 때 용기를 얻게 된다. 병자가 주일이나 평일에 영성체를 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다.

주님께서는 또한 병자성사를 통하여 안수와 도유의 표지를 주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도유에 그것이 교회 초기 몇백 년 동안 지녔던 의미대로 ‘병자성사’라는 의미를 다시 부여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이 도유가 임종자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병자성사를 받는 것은 죽음에 임박했다는 생각을 너무도 많이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성 야고보 사도는 이 성사를 받는 충실한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모두 온전해질 것입니다”(야고 5,15-16).
병자의 도유에서 주님께서는 병자에게 안수하시고 그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신다. 병자는 이를 통하여 병세와 상관없이 그의 질병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새 힘을 얻는다. 이 새 힘은 병자의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도유는 임박한 죽음에 대한 무서운 표지가 아니라, 주님의 안수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표지이다. 주님께서는 병자의 깊은 내면까지 치유하시고 굳건하게 하기를 바라신다. 그렇다면 인간적으로 말해서 회복이 더 이상 불가능할 때까지 병자의 도유를 미룰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요즈음에는 양로원이나 요양원에서 병자들을 위한 3일 기도 동안에 병자들과 노인들을 위한 병자의 도유가 종종 거행된다. 적절히 준비되기만 하면 이것은 교회의 성사임을 드러낼 수 있으며, 또한 신심을 장려하고 촉구할 수 있다. 도유를 받은 병자와 노인들은 새로운 영감을 얻어 새 힘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병자와 고통 받는 이들을 마음에 깊이 두고 이 글을 쓰고자 했다. 교회는 초기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보여 왔지 않은가? 또 병자 간호 역시 교회의 관행에서 발전되지 않았는가? 교회는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도께서 삶의 모범을 통하여 증언하시고 가르쳐 주신 것을 선포하며 실천에 옮겨 왔다. 하느님께서는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특별히 더 마음을 쓰신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깊은 내면에 그 깊이를 잴 수 없는 신비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나와 상대방과 하느님의 비밀이다. 고통과 임종을 통하여 이 신비가 벗겨진다. 봉사를 통하여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소명이다. 바로 이러한 연유로 우리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을 위한 간호와 그의 임종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의문들에 대하여 글을 씀으로써, 사고에 도움이 되고 격려를 주고자 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고통과 임종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분께서 주시는 힘으로 자기 인생길을 가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영광 속으로 들어가리라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4).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빈다.


위트레흐트에서
1985년 3월 3일

네덜란드 주교단

 

참고 자료
우리가 광범하게 인용하고 지침으로 삼은 참고 자료는 성서와 다음 문서들이다.
1. 성서: 예루살렘 바이블, 더블데이, 뉴욕, 1966년.
2. 교황청 신앙교리성, 안락사에 관한 선언, 1980.5.5.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애보트 갤러거 옮김, 아메리카 출판사, 1966년.
4. 요한 바오로 2세, 인간 고통의 그리스도교적 의미에 관한 교황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 1984.2.11.
5. 안락사와 자살 방조에 관하여 네덜란드 주교들이 수상에게 보낸 서한, 1983.6.16.

 

 

제2부
안락사에 관한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입장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 교회 사무처
(보도 자료, 아메르스포르트, 1991년 12월 10일자)

 

1991년 11월 8일에 발표된
‘임종과 관련한 의료 결정에 대한 정부의 입장’에 답하는
 네덜란드 주교들의 선언


1. 인간 생명은 하나의 선물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생명은 물론 타인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권한이 없다. 특히 더 이상 자신의 생명을 돌보거나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별도의 보살핌과 보호가 필요하다.
한편,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죽음의 순간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자발적 안락사)를 예전보다 훨씬 더 쉽게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는 자기 생명을 연장하는 문제에 대하여 아직 의사를 밝히지 않았거나 밝힐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의 권리를 당사자가 아닌 가족이나 의사, 간호사가 결정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은 크게 높아졌지만, 말기 환자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임종 과정을 연장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하여는 의구심을 갖는 경우들이 생겼다(네덜란드 주교회의 사목 교서, 「병자들의 고통과 임종」 참조).
사회는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과 품위 있는 죽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2. 우리는 정부가 안락사 시행에 대한 처벌 의무를 약화시키지 않고, 그에 관한 현행법(네덜란드 형법 제293조와 294조)을 개정하지 않겠다는 데에 찬성한다는 것을 밝힌다.
병을 낫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죽음을 늦추려는 치료나, 지나친 부담만 줄 뿐 병을 낫게 할 실질적인 가능성이 없는 치료를 시작하지 않거나 중단하는 것은 명백히 처벌의 대상이 아니다. 죽음을 앞당길 것이 분명하지만 필요한 진통제를 투여하는 것도 처벌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것은 특히 환자 자신이 그러한 치료를 거부하거나 진통제 투여를 요청할 경우에 그러하다.
그러나 환자가 ‘적극적 안락사’를 바라고, 또 비록 그것이 인간의 품위를 지켜 주고 자비를 베푸는 행위라 할지라도, 그러한 방법으로 환자의 고통을 없애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더 이상 의학적인 치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한편으로는 더욱 효과적인 고통 억제 수단을 사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절한 말기 치료의 도움을 받아 환자가 품위 있게 고통을 극복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노력하도록 권고하는 바이다. 병자나 임종자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일 경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생명 존중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3. 우리는 정부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안락사는 처벌을 면할 수 없다는 원칙을 지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락사의 의미를 너무 좁게 해석함으로써 일종의 ‘적극적 안락사’를 정상적인 의료 행위의 일부로 여기는 것은 모순일 뿐만 아니라 원칙적으로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안락사는 …… 고의로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 또는 부작위(不作爲)로 이해되며”(교황청 신앙교리성, 안락사에 관한 선언[Iura et bona], 1980.5.5.) 따라서 처벌을 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의사나 간호사, 가족이 안락사 시행을 요청하는 것은 실제로 불법이다.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안락사를 시행하거나 협력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탄생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하느님의 선물이다. 모든 사람은 “인간적인 그리고 그리스도인다운 존엄성을 지니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권리”(안락사에 관한 선언)가 있다.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보도 자료
(아메르스포르트, 1992년 4월 7일자)

 

오늘 주교회의에 모인 주교들은, 임종과 관련한 의료 결정에 관한 정부의 견해에 대하여 최근 국회 하원에서 논쟁이 있었기에, 이 문제에 대한 주교들의 입장을 다시 한 번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교들은 국가 안락사 위원회의 청문회에 기고를 하거나(1984년), 사목 교서 「병자들의 고통과 임종」(1985년), 루드 루베르스 총리에게 보내는 서한(1989년), 그리고 최근의 1991년 12월 10일자 주교회의 보도 자료 등을 통하여 함께 구체적으로 안락사 논쟁에 꾸준히 개입해 왔다.

주교들은 환자가 죽어 가고 있거나 환자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기능이 마비되기 시작할 때에도, 생명 중단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는 그 어떤 것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행위는 실제로 처벌을 받아야 한다. 어느 누구도 생명을 끊는 데에 목적을 둔 행위를 통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중단시킬 권리는 없다.

입헌 국가는 사회에서 가장 힘 없는 사람들, 곧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어떠한 입법자나 장관, 판사도 이 의무에서 제외될 수 없다. 목숨을 끊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행위는 정상적인 의료 행위로 간주될 수 없다. 그러므로 주교들은 이러한 여지를 남겨 둔 정부의 입장에 반대하며, 책임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가능성에 현혹되지 말고, 각 사람의 생명을 온전히 존중하여 행동할 것을 요청한다.

 

하원의 안락사법 통과에 대한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선언문
(보도 자료, 위트레흐트, 1993년 2월 10일자)

 

H.C.A. 에른스트 몬시뇰은 지난 1월 29일 주교회의 부의장으로서 네덜란드 주교들을 대표하여 국회의 하원 의원들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
─ 적극적 안락사에 대한 처벌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할 것,
─ 적극적 안락사의 모든 사례는 예외 없이 형사 처분을 밟도록 조처할 것,
─ 발전시키고 있는 법체계를 세밀하게 검토하여 인간 생명을 무조건적으로 보호할 것.

그러나 하원이 정부가 제안한 법규를 다수결로 승인하였기 때문에, 주교들은 같은 서한을 국회의 상원 의원들에게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적극적 안락사를 형사 처분하도록 법으로 지정해 왔던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하원의 승인을 받아 상원의 결정에 회부되어 있는 현재의 법안은 법규를 위반하면 실질적인 처벌이 따르도록 충분히 보장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입헌 국가는 “모든 상황에서 인간 생명을 수호”(부의장이 보낸 서한)할 무조건적인 의무가 있다. 형벌 적용의 실질적인 가능성뿐만 아니라 형사 처분은 필요 불가결하다. 구체적인 행위와 관련하여, “적극적 안락사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같은 곳)는 사실에 주의하여야 한다.

주교들은 상원 의원들에게 모든 권한을 행사하여 이러한 적극적 안락사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법적으로 보장할 것을 요청하였다.

끝으로 주교들은 인간 양심이 요구하거나 금지하는 것과 민법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형사 처분에서는 제외되더라도 도덕적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들이 있다. 적극적인 안락사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안락사에 관한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선언문
(보도 자료, 아메르스포르트, 1993년 12월 7일자)

 

장례법 개정에 대한 국회의 승인과 관련하여, 주교들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마련하였다.

1. 안락사란 죽음을 초래하거나 죽음을 초래할 의도를 가진 치료 행위를 말한다. 이 말은, 병을 낫게 하기보다는 죽음을 지연시킬 뿐인 치료 행위나 치료의 효과가 성공 가능성에 못 미치는 치료 행위를 중단하는 것은 안락사로 간주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또는 생명을 단축시키려는 의도가 없더라도 그러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진통제를 투여하는 것도 안락사로 보지 않는다.

2. 의학의 발전으로, 죽어 가는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치료는 못하더라도 임종을 지연시킬 수는 있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죽음을 둘러싼 의료 결정과 관련하여 명백한 도덕적 원칙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원칙들은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과 인간다운 죽음을 보장하여야 한다.

3. 그러므로 자살 방조와 마찬가지로 안락사는 당연히 처벌받아야 할 범죄이다. 이러한 원칙은 모든 생명체는 하느님의 선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인간 생명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강화하는 데에 이바지한다.

4. 그러나 우리는 고의로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가 실질적인 처벌을 받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정부와 국회에 적절하고 실질적인 처벌 정책을 강구하도록 절실하게 요청하는 바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는 정부와 국회에, 경고 사항들을 담고 있는 일반 행정 법령에서도 적극적 안락사가 언제나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일 것을 단호히 요청한다.

5. 최근의 판례들은 적극적 안락사와 자살 방조를 처벌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사목의 책임자로서 우리는 적극적 안락사는 ─ 비록 처벌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법으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 해서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6. 이러한 상황은 입법자들에게만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을 수호하려는 네덜란드의 법률 제정자들은 거의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에 직면한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네덜란드 국민의 상당수가 적극적 안락사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공공 토론에서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이 너무도 경시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7. 이러한 일들은 부분적으로 네덜란드의 그리스도인들이 확고하고 일관된 입장을 견지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특별한 상황에서는 적극적 안락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8. 특히 우리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조차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을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옹호하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인간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주교들의 거듭된 성명서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언제나 강력한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였다.

9. 끝으로 우리는 병자들과 이른바 회복 가망이 없는 사람들도 하느님께서 뜻하신 죽음의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사랑과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우리는 특히 신자들에게 그러한 도움과 사랑과 보살핌을 주도록 촉구하며, 병자들의 치료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예방할 수 있는 연구를 강화하도록 촉구한다. 나아가 우리는 병자와 임종자들에게 유익한 지도를 해 주는 모든 활동을 환영한다.

 

샤보트 사건(자살 방조)에 내린 법원의 판결에 관한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선언문
(보도 자료, 위트레흐트, 1994년 7월 1일자)

 

네덜란드 주교들은 네덜란드 대법원이 1994년 6월 21일에 내린 샤보트 사건의 판결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하여 회의를 열고 토론한 끝에 다음 선언을 발표하기로 결정하였다.

1. 앞선 선언들에서 주교회의는 안락사와 자살 방조에 대한 처벌을 고수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 이러한 처벌은 우리 사회에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 의식을 강화할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모든 인간의 존엄에 대한 도덕적 신념과, 인간은 하느님께 생명과 생명의 의미를 부여 받았다는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이러한 도덕 의식은 인간 생명을 보호한다.

2. 매장과 화장에 관한 법을 개정할 때, 주교회의는 처벌이 실제로 충분한 효과를 낼 수 없으리라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따라서 주교회의는 실질적인 기소 정책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주장한 것은 안락사와 자살 방조가 필요성(불가항력)에 따른 호소와 충분한 신중성의 요구를 만족시킨다는 명목으로 실질적인 처벌에서 제외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3. 네덜란드 주교회의는 샤보트에 대한 형사 소송 절차에서 1994년 6월 21일자 대법원의 판결로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고 본다.

4. 네덜란드 대법원이 보여 주듯이, 매장과 화장에 관한 법의 공시 절차는 안락사와 자살 방조를 정당화할 만한 어떠한 구체적인 기준도 제시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책임과 평가를 위한 기구를 제시할 뿐이다.
이러한 판정에 따르면, 대법원이 더 일찍이 받아들였던 안락사와 자살 방조의 필요성에 대한 호소는 환자의 참을 수 없는 절망적인 고통이 육체적인 것이 아니고 또 환자가 말기 상태가 아니라 하더라도 배제되지 않는다. 극도의 절망적인 고통은 객관적으로 평가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안락사와 자살 방조의 필요성이 제기될 때는 매우 신중하게 조사하여야 한다. 대법원은 그러한 경우에, 환자를 직접 진찰하고 검사한 적이 있는 별도의 동료 의사의 판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동료 의사는 또한 그것이 자발적이고 신중한 결정에 해당하는 경우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해 주었음에 틀림없다. 대법원에 따르면, 환자가 완전한 자유 의사로 고통을 경감할 수 있는 실제적인 대안을 거부하였을 경우에, 그것은 분명 절망적인 고통의 경우에 해당한다. 대법원은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자율적인 결정으로 죽음을 바랄 수 있다는 판단에 법률의 잘못된 해석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대법원의 판결은 이 자살 방조 사건에서 샤보트의 역할은 처벌받을 만한 행위라고 선언하며, 어떤 전문의도 그 환자를 진찰하거나 검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책임의 불가피한 갈등을 이유로 제기된 필요성에 따른 상소를 기각한다. 대법원은 그가 처벌받아야 한다고 선언하지만 그를 처벌하지 않는다.
 
5. 대법원은 한편으로는 자살 방조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필요성에 대한 호소는 개별 경우에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여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말기 단계에 있지 않은 환자가 정신적인 고통을 받는 경우 그러한 호소를 ―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진 것이라면 ―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이러한 판정은 자살 방조를 정당화하는 근거를 확대시킨다.

6. 네덜란드 주교회의는 정신적 고통이 스스로 결정할 환자의 자유를 반드시 제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어떤 사람이 자기 생명을 끊겠다고 결정하는 것을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어느 누구도 의사에게 그러한 결정을 도와 달라고 요청할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네덜란드 주교회의는 ‘참기 어려운 절망적인 고통’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자살 방조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러한 판단을 내릴 권한은 없다.

7. 네덜란드 주교회의는 고통 중에서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유보한다. 그러나 우리는 살인을 돕는 일을 확대하기보다는, 생명 보존을 돕는 일을 강화하며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인 죽음을 존중심을 갖고 맞이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주장하고자 한다.

8. 사회적으로 처벌을 하지 않는다 하여 윤리적으로 정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주교회의는 안락사와 자살 방조가 법적인 정당성을 더 많이 확보한다면,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사회의 생명 존중 의식을 크게 약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렇게 된다면 생명을 존중하고자 하는 환자와 가족, 의사들이 격려를 받기보다는 더욱 무거운 짐을 지게 될 것으로 우려된다.

9. 이전부터 주교회의는 가톨릭 집단들 내에서도 언제나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생명 존중을 지지해 왔던 것은 아니라고 유감을 표명해 왔다. 주교들은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환자를 돌보도록 재차 촉구한다. 주교들의 이러한 촉구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며, 인간 사회의 모든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것이다. 주교들은 또한 사회의 책임 있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 존중을 강조하도록 촉구한다.

 

‘자살 방조’에 관한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의견서
(위트레흐트, 1994년 7월 28일)


1993년 11월, 네덜란드 왕립의료협회의
생명중단행위인정위원회의 보고서
‘정신 질환자를 위한 자살 방조’에 대한 응답

 

1. 자살을 목격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깜깜한 미로와도 같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끝내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신중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 깊은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신앙의 관점에서도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마태 7,1)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무슨 일이나 미리 앞질러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 내시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각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응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1고린 4,5)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따라, 갑절의 주의가 요구된다. 자살한 사람들에 대하여 최대한 주의와 신중을 다하여 말하는 것이 중요한 사목적 원칙이다. 우리는 역사상 교회 안팎에서 이 점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워야 했다.

많은 사목 종사자들은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극심한 슬픔을 직접 경험해 왔다.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생각들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산다. 사랑했던 그 사람이 왜 죽기 전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내가 알아듣지 못했는가? 그리고 이미 벌어진 일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끝없이 떠오른다.

2.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 안에서든 교회 안에서든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원칙에 대하여 말하는 것조차 안 되는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네덜란드를 방문하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회 생활에서 교회는 개개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지만, 원칙적인 차원에서 선악을 구분하여야 한다.” 사목 활동과 도움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이루어지지만 명백히 도덕 원칙과 무관할 수 없으며, 그것들은 또한 인간의 존엄과 보편적인 행복이 보호되는 법치 국가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서로 다른 측면들, 곧 사목 활동과 도움의 측면, 도덕적 측면과 사법적 측면들은 구분될 수는 있지만 서로 무관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살자에 대하여 존중으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온당하지만, 자살과 더 나아가 자살 방조로 위태로워질 윤리적 법적 원칙에 대해서까지 침묵을 지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
   
3. 더욱더 이를 강조해야 하는 까닭은, 네덜란드 대법원에서 앞서 내린 샤보트 사건에 대한 판결과 심의가 보여 주듯이, 많은 사람이 특정한 상황에서는 자살 방조를 고려하고 허용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93년의 네덜란드 왕립의료협회의 생명중단행위인정위원회의 보고서에서는 경우에 따라 정신 질환자의 경우에 자살 방조는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법적으로도 허용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신생아, 오랜 혼수상태, 심각한 치매의 경우에는 생명을 끊도록 권고하였던 적이 있던 이 위원회는, 치료될 희망이 전혀 없고 피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이 지속되며 환자가 명시적으로 거듭 죽음을 바랄 때, 정신 질환자를 위한 자살 방조는 정당화되고 시행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주교회의는 이러한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4.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자살자의 행위를 윤리적으로 용인할 수 있을 때 방조자의 행위도 윤리적으로 용인할 수 있다는 일반 원칙을 흔히 자살 방조의 윤리적 문제에 적용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상황에서 자살 방조가 받아들여질 수 있고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개인의 자유와 자기 결정권의 한 표현인 자살은 범사회적인 도덕적 논의의 주제가 될 수 없으며,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라는 전제 조건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네덜란드 왕립의료협회의 생명중단행위인정위원회의 보고서는 철학적 종교적 주장은 관련된 개인에게만 설득력이 있다고 여긴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 조건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 신앙만이 자살을 인정하지 않는 주장을 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받아들인다고 생각되는 원칙들을 바탕으로 한 윤리 사상도 그러하다.

5. 유다교 전통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신앙도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자유로 초대받았다고 확신한다. 자유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결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낮은 차원에서는 다른 사람의 결정,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결정과 비교할 때 상대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자유는 일종의 책임이 된다. 책임은 질문자와 언급된 말, 그리고 대답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생명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하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맡기신 선물이며 과제이다.

6. 서구 사회에서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이 없었다면 인간 존엄에 대한 존중 의식은 발전할 수 없었으리라는 데에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만,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이 신앙에 대하여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철학적 윤리적 견해 또한 주관적인 자유와 자기 결정권을 들어 자살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본다. 가톨릭 교회의 윤리 전통은 ─ 사람들의 자유와 통찰력을 제한하는 복잡한 요인들 외에도 ─ 자살은 그 자체가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마땅히 존중하지 않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7. 자살에 대해서 자기 결정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말 자체의 모순이며, 본질적인 모순으로 보인다. 자살은 이러한 자기결정권을 훼손함으로써 그러한 권리의 토대를 허물어 버린다. 네덜란드 왕립의료협회의 생명중단행위인정위원회의 보고서는 죽음에 대한 선택은 “개인이 인간의 실존을 구체화하는” 한 방법이라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감추고 있다. 이처럼 생명 파괴를 인간 실존의 구체화나 실존과 동등시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현이며, ‘죽음의 문화’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1983년 11월 3일, 알크마르 안락사 판결에 대한 항소심에서 검찰총장이 적용 가능한 법의 문제를 다루며 한 말은 윤리적으로도 매우 중요해 보인다. 곧, 어떤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막연히 자기 결정권에 호소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선결 문제 요구의 허위(petitio principii), 곧 입증되지 않은 것을 맹목적으로 당연시하는 논리적 오류이다.

8. 자살을 정당화하려고 자기 결정권을 내세우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개인의 자기 결정 능력은 다르다는 것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윤리적 판단의 토대인 인간 존엄을 개인의 자기 결정 능력과 동일시하면 윤리는 모호해진다. 인간의 존엄은 개인의 자기 결정 능력에 흡수될 수 없다. 한 개인이 아무리 많이 자기 결정을 요구받는다 하더라도, 그의 가장 소중한 가치가 선택의 자유로 이해되는 자기 결정 안에 놓여 있다면, 자기 결정 능력이 떨어지거나 그러한 능력이 생기고 있는 단계의 사람의 가치는 다른 이들보다 떨어진다는 말이 된다. 정신병자나 심각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이러한 결론을 적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네덜란드 왕립의료협회의 생명중단행위인정위원회는 인간의 존엄을 강력히 수호하고자 하며, 무엇보다도 자살을 방지하는 것이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좋은 의도들도 우리 사회의 특정한 전개 양상을 거스르기는 역부족이다. 바람직하지 못한 전개 양상에 대한 주장은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최선이다.

9. 그러므로 정신 질환자의 자살 방조에 관한 논의에는 우리가 공감할 수 없는 또 다른 전제 조건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여야 한다. 곧 자살 방조를 요청하는 사람들의 자기 결정력이 커질수록 자살 방조를 점점 더 윤리적으로 인정하는 추세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고서의 주장은 서로 뒤얽혀 있다.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이다. 하나는 고지(告知)에 따라 동의할 능력이 없는 정신 질환자를 별개의 범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동의할 능력에 대한 기준(또는 충분한 신중성)의 요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일관된 자세가 아니다. 다른 하나는 고지에 따라 동의할 능력의 기준을 고집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고지에 따라 동의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끊는 문제에 관하여 말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생명중단행위인정위원회가, 먼저 생명 중단 행위는 심각한 장애가 있는 신생아나 혼수상태의 환자, 치매 환자들에게 적용된다고 말한 뒤, 정신 질환자의 자살 방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언급하면서, 정신 질환자가 병세가 호전되어 좀 낫다고 느끼는 시기에 합법적으로 신중하게 죽음을 선택하는 조건에 대하여는 매우 강도 높게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반대로 결국 중요한 것은 환자의 자기 결정권이라면 (의사가 확인하는) 치료의 기회가 있고 없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도 분명하지 않다.

10. 앞서 말한 것과 관련된 또 하나의 모순은 보고서가 고지에 따라 동의할 능력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통, 치료의 가능성과 결정 과정에 적용되는 충분한 신중성의 요구를 동등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러한 충분한 신중성의 요구가 제기하고 보고서에서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문제들을 검토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 질환자가 고지에 따라 동의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평가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닌가? 왜냐하면 정신 질환자는 흔히 그렇지 않은데도 고지에 따라 동의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충분한 신중성의 요구 가운데 ‘치료 가능성의 부재’는 무엇을 말하는가? 치료 가능성이 없어도 안락사나 자살 방조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질병과 장애는 무수히 많지 않은가? 피할 수 없는 심각한 고통은 무엇인가? 환자의 고통은 끝날지라도 남아 있는 사람의 고통은 계속되므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히 그릇된 방법이 아닌가? 보고서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을 하지 않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고지에 따라 동의할 능력과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 그리고 치료 가능성의 부재에 대한 충분한 신중성의 요구 사이에 생기는 모순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의사가 결정하는 이 마지막 기준을 환자가 결정하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통의 기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논쟁이 벌어진다. 만약 환자가 고지에 따라 동의를 할 수 없다면, 자살 방조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환자가 고지에 따라 동의를 할 수 있다면, 고통이 치료의 가능성보다 더 클지 아닐지를 왜 환자가 판단할 수 없는가?

11. 자살 자체가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므로, 환자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증대되었거나 더욱 명확해졌다 해서 자살 방조가 도덕적으로 더욱 쉽게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인간 존엄성은 자결권 안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며, 환자가 고지에 따라 동의할 능력이 더욱 커졌다고 해서(이를 확인했다 하더라도) 결코 자살 방조가 윤리적으로 더 쉽게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전통 윤리에 따르면, 고지에 따른 동의 능력은 어떤 행위를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능력은 행위자의 책임을 결정하며, 행위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근거들 가운데 하나인 주체의 의도를 설명하는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덕성의 첫째가는 근거는 행위의 목적이며, 자살은 자발적이고 의도적인 만큼 당연히 크나큰 범죄이다. 자살에 해당되는 사항은 자살 방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12. 끝으로 일반적인 자살 방조와 특별히 정신병자를 위한 자살 방조의 법적인 측면에 대하여 몇 마디 하고자 한다. 의료계와 법조계를 포함한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안락사와 자살 방조를 처벌해야 한다고 아직도 주장하는 형법은 틀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은 개인이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가치들 가운데서 선택의 자유를 첫째로 꼽으려는 현대 사회의 논리와 일치하는 것 같다. 앞의 8항에서 설명했듯이, 인간의 존엄은 개인의 자기 결정권에 흡수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다.

13.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모든 충분한 신중성의 요구들을 열거하고 있는 보고서가 자살을 선택하는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보호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고서는 언뜻 보기에 안락사와 자살 방조를 요청하지 않을 환자의 권리와, 안락사나 자살 방조를 거부할 의사의 권리는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너무나 명백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 간호나 치료를 받으려면 많은 비용이 든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가족을 기꺼이 집에서 돌보며 헌신적인 노력을 쏟는다 하더라도, 가족의 고통을 견뎌 내는 데에 필요한 강인한 마음에는 흔히 한계가 있다. 보고서가 권고하는 논리는 장기적으로 볼 때 안락사와 자살 방조를 실질적으로 형법 대상에서 제외시킬 가능성이 있다.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분명히 불치병 환자와 그 가족, 그리고 의사들이 안락사와 자살 방조를 바라지 않는 이유를 정당화하도록 짐을 지우는 문화가 생겨날 수도 있다.

14. 물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논리가 추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은 여러분에게 호소하며 흔히 어쩔 수 없는 연민의 감정을 안겨 준다. 결국 사람들은 고통을 없애려면 생명을 끊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락사와 자살 방조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여전히 믿고 있다. 개개인의 사정을 들어 보면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이러한 경계선을 넘어서면 사회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을 완전히 존중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언제나 ─ 그러므로 삶의 모든 단계에서 ─ 자신이 경험한 그 이상의 존재이며 우리가 기대하는 그 이상의 존재라는 인식이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이 말이 오해되거나 잘못 사용될 수도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인간은 그가 겪는 고통보다 더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끝까지 주장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 교회 사무처
(보도 자료, 위트레흐트, 1995년 2월 17일자)


안락사 논쟁에 대한 주교들의 깊은 우려
“생명 보호권을 지키는 방벽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다”

 

지난 2월 15일 수요일 국회 하원에서 열린 안락사와 자살 방조에 관한 논쟁에 대한 응답으로, 주교회의는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발표하기로 하였다.

“주교들은 안락사 관행이 더욱더 잘못된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우려가 불행히도 다시 한 번 확인되었음을 선언하는 바이다. 기소 정책이 말기 단계에 대한 기준과 고통의 물리적 원인에 대한 기준을 둘 다 포기하였기 때문에, 모든 인간 생명의 보호와 불가침성에 대한 권리를 지키는 방벽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다.
의사는 말기 단계에 있지 않은 환자에 대해서는 언제나 생명을 지키는 쪽의 선택을 하여야 하며, 말기 단계에 있더라도 절대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생명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
살인 금지에 대한 예외 조항이 늘어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 인간 생명에 대한 법적 보호가 점점 느슨해지는 시점에서, 우리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고, 외로이 고통 받는 환자들 특히 말기 환자들에 대한 치료와 상담을 증진하는 데에 목적을 둔 운동들을`─`호스피스 운동과 같은`─`후원하고자 최선을 다하도록 모든 사람에게 호소한다.”

이보다 앞서 발표된 선언문에서 주교회의는 안락사와 자살 방조로 나아가는 단계가 더욱 쉬워지고 있다는 우려를 자주 표명해 왔다. 샤보트 사건에 대한 네덜란드 대법원의 판결과 네덜란드 왕립의료협회의 ‘정신 질환자에 대한 자살 방조’ 보고서에 대한 반응이 그러한 예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1994년 7월 1일자, 1994년 7월28일자 선언 참조).

 

안락사 보고 절차*에 관한 평가 결과에 대한
네덜란드 주교회의의 선언문
(위트레흐트, 1996년 12월)

 

주교들은 평가 보고서와 평가 보고서에 담긴 보고 절차 개선에 관한 권고를 인지하고 있다. 이 보고서와 그에 대한 언론의 반응들을 주시하면서 주교들은 여러 차례 원칙의 문제들을 고찰할 기회를 가졌다. 우리는 이러한 고찰들이 의견 형성 과정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기본 원칙

보고서는 안락사에 관한 원칙의 문제들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도 보이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살인이나 살인을 돕는 행위는 허용할 수 없다는 우리의 신념을 거듭 확인하고자 한다. 이러한 신념은 우리 문화의 토대이다.
우리는 또한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과 품위 있는 죽음은 보장받아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는 바이다. 따라서 우리는, 국회가 매장과 화장에 관한 법의 개정을 승인하였을 때 이미 밝혔듯이, “안락사와 자살 방조는 처벌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확인한다. 이러한 처벌 의무가 있어야 우리는 모든 생명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야 한다는 것과, 따라서 인간 생명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인간의 자기 결정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사 여부나 자신의 출생 시기와 장소, 자신이 살게 될 환경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책임의 의무

법 이행

위에서 말한 법이 개정되었을 때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적극적인 안락사를 효과적으로 처벌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우리는 정부와 국회에 적절하고 효과적인 기소 정책을 보장하도록 촉구하며, 이는 고지에 따른 동의를 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평가 보고서는 안락사의 실태 파악이라는 개정의 주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음을 보여 준다. 40퍼센트의 사례만이 보고되었다. 나머지 60퍼센트의 경우에 법적으로 요구되는 신고서를 따르지 않고 안락사를 시행한다는 사실은 법과 질서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다. 1990년에는 2,300건이었던 안락사 요청이 1995년에는 총 3,200건으로 늘어났다. 그뿐만 아니라 연간 900건의 “명시적 요청 없이 이루어지는 생명 중단은 거의 보고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230면).
평가서의 결론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의사들의 보고는 상당히 개선되었지만 “의사들의 안락사 시행에 대한 사회적 통제는 아직도 기준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234면). 의료 협회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례를 100퍼센트 보고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 선

우리는 현행 제도에 반대하지만, 그 개선에 관하여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 첫째, 의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막중한 책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다행히도 다수의 의사들이 이를 인식하고 있다.
─ 둘째, 전문가들과 실무진들은 형사상의 출발점에 비추어 재심 절차에 관한 의견과 제안들을 매우 비판적으로 검토할 의무가 있다.
─ 셋째, 사전에 재심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보고 의무에 더욱 충실한 결과를 얻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에 관한 보고서의 언급은 불안정하다. “모든 보고 사례는 명백히 하나하나가 독특하지만, 어느 정도의 표준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예외적인 상황을 위하여 마련된 필요성에 대한 호소와 상충된다”(236면). 필요성에 대한 호소는 특이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더욱이 그러한 경우들을 표준화하게 되면 안락사를 위한 근거가 계속 확대되어, 기준이 충족되기만 하면 안락사나 자살 방조의 시행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여겨지고, 추가적인 조사 없이 형사 처분을 면제받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위험이 있다.
─ 넷째, 보고 절차는 형사상의 문제와 깊이 관련된다. 이러한 사실은 안락사와 자살 방조는 사회에서 근본 권리인 각 개인의 생명과 관련되며, 안락사 행위가 법률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검찰은 계속하여 결정적인 평가 기관으로서 개입하여야 한다.

인간 생명에 대한 봉사

의사들이 올바르고 정확하게 행동하려면 양심을 형성하고 가치와 규범을 존중하도록 교육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의사들은 인간 생명에 봉사하고자 일한다. 여기서 ‘인간 생명’과 ‘봉사’는 둘 다 중요한 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의사들은 다른 대안이 없어서 자신들에게 의탁해 오는 사람들의 생명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며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명시적 요청 없이 안락사시키는’ 경우가 연간 900건에 이른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떠한 전문가 집단, 심지어는 의사들도 주장할 자격이 없는 권한이 행사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 주교들은,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료 활동은 적절한 말기 치료, 임종 상담, 완화 치료를 지향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곧, 환자와 그 가족과 친지들에게 올바른 의료적, 심리적, 사회적, 영적 치료를 제공하여야 한다. 이러한 치료에 요구되는 것은 관련된 모든 사람 사이의 충분한 대화와 협동이다. 네덜란드에서 ‘호스피스’ 운동은 이 분야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이를 후원하고 장려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조사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임종을 앞둔 사람에 대한 의학적 치료의 특성과 한계에 관하여 사회적 전문적으로 논의를 계속하는 것이”(240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근본적인 것이라 생각되는 그러한 논의는 사회 전체와 사회 모든 구성원의 도덕적 자질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 "안락사와 생명 중단에 관한 다른 의료 결정: 시행과 보고 절차", 헤이그, 1996년.

 

요청에 따른 안락사와 자살 방조의 수사에 관한 제안 입법과
형법과 장례법 개정(안락사와 자살 방조에 대한 수사 관련법)에 대한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 주교회의의 의견서
(위트레흐트, 1999년 10월)

 

두 번째 콕(Kok) 정부를 구성한 정당들의 합의에 따라, ‘요청에 따른 안락사와 자살 방조에 대한 수사와 형법과 장례법 개정에 관한’ 법률이 국회 하원에 제출되었다.

안락사와 자살 방조에 관한 형법의 법률들을 논의하였던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우리는 우리 사회의 여러 구성원들이 각자 나름대로 의견을 표명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언론에서는 거의 끊임없이, 특히 내각과 하원에서 법률을 제정하거나 법체계에 변화가 있을 때마다 이 문제를 다루어 왔다.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상급 지도부인 우리 주교들은 이러한 양상에 관하여 공적으로 일관된 입장을 취해 왔다. 특히 1985년 사목 교서 「병자들의 고통과 임종」(Lijden en sterven van zieken)을 발표하고, 또한 같은 해에 국가 안락사 위원회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반대 의견을 내 놓음으로써 이러한 현상에 관하여 공식적으로 일관된 입장을 견지해 왔다.

현재 제출된 법안은 다시 한 번 우리의 입장을 밝힐 기회를 준다.
여기서 밝히는 우리의 입장은 철학적 윤리적 원칙만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우리는 이것이 우리 신앙 공동체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문서는 국회 상하원, 특히 사법 위원회와 공중 보건 위원회에 보낼 것이며, 또 나아가서는 최고 책임자들, 곧 법무장관, 사회 복지부 장관, 보건 체육부 장관, 국무총리, 최고 행정 재판소 등에도 보낼 것이다.

입장: 형법에서 삭제할 법적 근거가 없다

‘설명 각서’에 따르면, 이 법안의 취지는 “충분히 신중을 기울여 안락사를 시행하거나 자살을 방조한 다음 이를 시(市) 병리학자에게 보고한 의사는 앞으로 처벌에서 면제된다.”는 것을 규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의사의 안락사 시행과 자살 방조는 법적 처벌이 없으므로 실제로는 네덜란드에서 조건부로 인정받는 것이 된다. 제안된 이 법안은 실질적으로 이러한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또한 형사상의 수사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더 이상 검사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법안이 통과되어 법으로 채택되면, 어떤 의미에서 안락사와 자살 방조를 ‘합법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85년에서 오늘날까지는 안락사와 자살 방조를 허용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개별 사례들에 대한 법적 개입을 제한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제는 안락사와 자살 방조가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형사적 책임의 틀을 벗어나게 되며, 따라서 ‘합법화’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이 법안이 지금까지의 법률을 파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파기를 용인할 수 없다고 본다.

설 명

법안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쇠약, 의존의 문제에 어떠한 법적 대응이 적절한가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심각한 문제가 형사 처벌의 법적 면제를 통하여 해결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견해로는, 이 법이 개인의 자율성에 바탕을 둔 것이든, 자기 결정권에 바탕을 둔 것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에 바탕을 둔 것이든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법안은 특정 전문직, 말하자면 이 경우에는 의료직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요청에 따라 시행한 안락사는 법적 처벌에서 면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적 처벌의 면제는 우리 사회에서 언제나 확실하게 인정받아 온 인간 생명 보호의 원칙과 상충된다. 인간 사회의 질서나 대인 관계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사람은 더 이상 자유를 행사할 수 없다는 것, 또는 달리 말하면 누구도 생명과 죽음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언제나 믿어 왔다. 법안은 이러한 인간 생명의 보호, 사회 구성원 서로의 생명 보호를 위협한다. 이는 안락사나 자살 방조 요청과 관련해서도 근본적으로 그러하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든 모든 외부의 억압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실제로 그러한 요청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어떠한 경우에서든 이 문제는 직접적이고 의도적인 안락사의 문제이며, 다른 사람의 생명에 치명적인 개입을 하는 것이다.
법안에서 입법자들은 인간 생명의 근본적 보호를 이야기하면서 안락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자가당착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용인할 수 있는 의료 행위를 시행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의사들을 고발하는 것이 절대 가능해져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안락사와 자살 방조와 같은 특수한 사례들은 당연히 검사가 직접 판단하여야 한다. 의료계에서도 이와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곧장 기소될 수 있을 때에, 의사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동을 인간 생명 보호의 원칙과 같은 근본 가치에 비추어서 비판적으로 숙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안락사 요청서와 미성년자의 경우

일반 개업의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안락사 요청서에 관한 법안에 대하여 진지하게 보류를 주장해 왔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인간 생명 보호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원칙적으로, 서면 요청서가 있든 없든, 그것이 일정한 순간에 자신의 의지를 표명할 수 없는 사람의 생명 보호라는 가치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 환자는 자신의 바람을 미리 적어 두겠지만, 당면하는 상황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특수한 상태에 있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와 관련된 것이고, 그 의사에게는 그 사람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모든 것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12세에서 16세 사이의 미성년자에 관한 법안에 대해서도 상당한 반대의 목소리가 있어 왔다. 여기서는 두 가지만 언급하겠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미성년자들의 권리는 여러 사안에서 법적으로 올바로 제한되어 있다. (지속적인) 치료 거부와 같은 문제들이 직접적인 생명 중단 행위와 동등하게 취급된다는 사실은 이 법안이, 나아가 전반적인 안락사 논쟁에 관한 사고들이 충분히 차별화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법안이 사회에 미칠 결과

우리의 입장은 무엇보다도 원칙들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는 또한 정부가 제안한 이 법안이 더욱 부추길 것이라 생각되는 여러 가지 결과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이 법의 승인 효과와 그러한 법이 네덜란드 사회의 공중 도덕에 미칠 윤리적 영향으로서, “법이 그러니 해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 우리 사회의 더 많은 부분에서 안락사를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 의식이 더욱 낮아질 것이다.
─ 안락사와 자살 방조가 마치 의사의 의무와 정상적인 업무의 일부인 것처럼, 의사들에게 그러한 일에 협력하도록 하는 사회적 압력이 더욱 증대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의사와 의료직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킨다.
─ 말기 환자들이 고통에 대처하도록 돕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나눌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서적 기반이 줄어들 것이다.
─ 말기 환자들이 자신들을 오랫동안 힘들게 간호하는 주변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 주어야 할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다.
─ 금지 장벽을 없애게 되면, 안락사와 자살 방조를 반대하는 말기 환자와 그 가족, 담당 의사가 오히려 그들의 결심을 정당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불합리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을 중단시키기를 바라는 호소

우리는 책임 있는 모든 정치인과 정부 기관의 관련자들에게 이러한 흐름을 중단시킬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정치인들이,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환경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관한 자기 결정의 의미를 더욱 잘 깨닫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노력하기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 생명의 쇠퇴와 의존성을 고려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고통과 죽음의 상황에서 서로의 요구를 이해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상호 작용의 태도를 말하며, 거기에는 존엄하게 죽고자 하는 요구가 포함된다.
여러 차례 널리 말해 왔듯이, 요청에 따라 직접 고의적으로 생명을 중단시키는 안락사는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후자의 경우는 죽음이 피할 수 없이 임박해 왔을 때 죽음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간접적이고 의도하지 않게 죽음을 앞당길 수 있다고 하더라도 통증을 완화시키려는 행위와 안락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다운 품위를 지니고 죽음을 맞이하려면 특히 적절한 ‘완화 치료와 호스피스 간호’가 필요하다. 정부의 정책은 이러한 것들을 발전시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121」 제6권(2000년 4월 7일) 게재*


병자와 임종자들의 간호



들어가는 말
─ 네덜란드 주교회의 의장 아드리아누스 시모니스 추기경

교회 공동체 안팎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중환자와 임종자들의 인간 존엄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작년에는 교구 직원들에게 호스피스 조직과 그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단체들 또는 교회 기관들에 관한 유용한 지침을 주었다.

이러한 지침을 내린 뒤, 교구들은 완화 치료가 무엇인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것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에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다. 가톨릭 교회 사회 평의회(KRKS)와 가톨릭 의료 기관 연합(KVZ)의 자문 이사회인 교회와 보건 특별위원회는 이에 관한 권고를 펴냈다.
특별 위원회는 능숙하고 인간적이며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간호 활동을 펼치도록 이끄는 데에 교회가 동참할 수 있도록, 로마 가톨릭 교회가 종교적 도덕적 통찰을 제시할 수 있고 또 제시하여야 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광범하게 논의한다.
주교들은 이 보고서를 매우 유용하다고 여겨 정기 간행물 「121」지에 게재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로테르담에 있는 안토니우스 예이설몬더(Antonius IJsselmonde) 양로원의 바아르 박사와 인터뷰한 내용도 실었다. 주교들은 이 간행물을 소개하면서 교회 공동체의 많은 이들 사이에 중환자와 말기 환자 간호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다(KRKS는 자체 소책자에 이 보고서를 더욱 이해하기 쉽게 수정하여 실었다.).

권 고

이 보고서는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여러 권고들을 담고 있다. 일부 권고들은 호소에 가깝다. 주교들은 직무를 수행할 때 이 호소를 마음에 새기고자 하며, 교회 공동체의 많은 이들이 이 호소를 병자와 임종자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기울이는 노력에 대한 지원으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바로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사람이 병들고 죽음에 직면했을 때 위기에 놓이기 쉬운 근본적인 인간 가치들에 대한 관점이 형성되며, 또한 안락사와 그 합법화 문제에서 원칙적으로 교회가 옹호하는 접근 방식이 구체화된다. 마지막으로 본인은 이를 바탕으로, 교회 안팎에서 간호 제공이 점점 더 줄어드는 현실에 대한 보고서의 우려를 강조한다.

중환자와 임종자 간호

네덜란드에서 완화 치료(palliative care)를 더욱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도록 로마 가톨릭 교회가 기고한 글

핵심 사항

가. 완화 치료는 임종자들에게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현재의 네덜란드 관행에서 완화 치료를 한다면, 그것의 기원과 내용의 세 가지 주요 특징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완화 치료는 치료와 생명 연장에 일방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의료 행위에 대한 비판이며 견제이다.
완화 치료는 총체적인 치료의 문제이다. 곧, 인간 고통의 모든 측면을 대상으로 하며, 환자와 그 가족을 위하여 생명의 질을 가능한 한 가장 높은 수준으로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완화 치료는 인간의 죽을 운명을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나. 현재 정부가 완화 치료에 기울이는 관심은 높이 살 만하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완화 치료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기꺼이 종교적 윤리적 통찰을 제시한다.

다. 윤리적으로 균형 잡힌 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완화 치료가 죽음을 앞당겨서도 지체시키려 해서도 안 된다는 국제연합 세계보건기구(WHO)의 견해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 총체적인 치료라고 볼 수 있는 완화 치료는 말기 환자들에게 사목적 도움을 주는 매우 귀중한 기회라는 점에서 교회 공동체의 지지를 받을 만하다.

마. 고통과 죽음에 대한 신앙적 통찰은 질병과 고통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을 담고 있으며, 육체적 증상의 치료만을 단편적으로 강조하는 것을 배제한다.

바. 기초 윤리학과 사회 윤리학은 둘 다 적절한 완화 치료의 사회적 중요성을 강조하도록 권고하는 동시에 안락사의 사회적 인정을 저지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중요한 이유를 제공한다.

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점점 더 부실해져 가는 치료에 대한 교회 공동체의 우려를 알려야 한다.

1. 완화 치료와 관련 개념들

완화`(Palliation)─치유(치료)를 포함하여─`는 오랫동안 의료 행위의 한 부분이었다. 치유 단계의 치료 과정에서도 고통과 통증이 있으며, 이는 특수한 완화 치료로 다스릴 수 있다. 또한 의학은 이러한 증상과 더불어 완전히 치료할 수 없는 병의 고통을 경감하는 것을 언제나 본연의 임무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완화 치료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의학의 발전으로 치료와 생명 연장에 치중하느라 고통 완화의 목적에 소홀하게 된 것을 비판하고 있다. 증상과 통증을 치료하는 것만이 완화 치료의 전부는 아니라는 통찰이 확실한 기반을 얻고 있다. 완화 치료라는 말은 이러한 통찰에서 나온 것이다. 완화 치료의 주목적은 생명 연장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이다. 이것은 행동의 변화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치료의 원칙과 목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이다. 완화 치료는 원칙적으로 생명과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를 추구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죽을 운명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남은 삶을 가치 있게 살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이도록 도와주는 치료를 할 수 있다. 이러한 치료는 단순히 육체적 증상들을 치료하는 것 이상이다.

국제연합 세계보건기구는 완화 치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완화 치료는 불치병을 앓는 환자를 적극적이고 총체적으로 치료하는 것이다. 고통과 다른 여러 증상들, 심리적 사회적 정신적 문제들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완화 치료의 목적은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최대한 가치 있는 삶을 누리도록 해 주는 데에 있다”(암의 고통 경감과 완화 치료; WHO 전문가위원회 보고서, 제네바, 1990년).

호스피스 간호는 임종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완화 치료의 한 형태이다. 따라서 호스피스 간호는 특별한 개념과 특별한 방식의 완화 치료이다. 간호라는 개념에서 볼 때 호스피스의 목적은 점점 더 개인화 되어 가는 우리 문화 안에서 증대하고 있는 바람, 곧 신뢰가 가는 환경에서 죽음을 맞고자 하는 바람을 충족시켜 주려는 것이다.

호스피스 제도는 여러 유형의 시설에서 형성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별도의 건물이나 집, 기존 시설 안에 마련된 별도의 병실이 있으며, 또는 말기 환자가 바란다면 자기 집에서 전문가나 자원 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임종을 맞을 수도 있다. 전국 각지에서 이러한 유형의 치료가 그리스도교 원칙에 따라 안락사를 명백히 배제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보고서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임종자들에 대한 완화 치료와, 완화 치료의 한 유형인 호스피스 제도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여기서 우리는 호스피스 제도 자체나 호스피스 제도를 조직하는 최선의 방법을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호스피스 제도는 부분적으로 지역적 경제적 정책적 요인 등 여러 요인에 따라 조직된다.

요약하면, 이러한 의미에서 완화 치료의 주된 특징은 다음과 같다.

가. 완화 치료는 불치병 환자를 전체적으로 보살핌으로써, 치료와 생명 연장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의료 행위를 적절히 보완하는 것이다.

나. 완화 치료는 총체적인 치료 방법이다. 곧 이것은 모든 측면의 인간 고통을 대상으로 하며, 환자와 그 가족을 위하여 가능한 한 최상의 삶의 질을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 완화 치료는 인간의 죽을 운명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2. 네덜란드의 상황과 다른 국가들의 상황 비교

네덜란드에서 완화 치료에 기울이는 관심은 다른 나라에서 기울이는 관심과 세 가지 측면에서 다르다.

첫째, 네덜란드는 다른 나라들과 더불어, 언제 치료를 중단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하는 의료 체계에 비판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에서는 이러한 비판이 흔히 완화 치료 분야의 노력으로 이어지는 반면, 네덜란드에서는 안락사 논쟁의 토대가 된다(J. van den Berg, Medische machten en medische ethiek, Nijkerk 1969 참조).

두 번째 중요한 사실은 완화 치료와 호스피스는 최근 들어서야 정부 정책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완화 치료에 대한 정부의 이러한 뒤늦은 관심이, 네덜란드의 안락사 허용은 완화 치료에 대한 정책 부재의 결과라는 다른 나라들의 비판에 대한 대응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지 의문이며, 또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를 매우 환영하며, 이는 정부 정책의 강조점의 변화를 보여 주는 것으로서 교회는 이를 자주 요청해 왔다고 밝혔다. 네덜란드 주교들은 안락사에 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중환자와 임종자들에 대한 세심한 관심을 강조해 왔다. 그러므로 주교들이 정부의 조치를 지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교회가 완화 치료에 대한 자신의 종교적 도덕적 통찰을 기꺼이 활용하여 이러한 완화 치료의 발전에 도움을 주도록 권고받을 필요가 있다.

셋째, 놀랍게도 네덜란드에서는 안락사가 완화 치료의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거나 적어도 ‘상세하고 명시적으로’(expressis verbis) 배제되지 않고 있다(M. Janssens, B. Gordijn, Palliativmedizin in die Niederlanden: Deutsche Medizinische Wochenschrift 123(1998), 432-435). 예를 들어 보건복지 체육부 장관에 따르면, 안락사는 말기 임종 단계에서 완화 치료를 품위 있게 끝내는 한 가지 가능성이다(보건 복지 체육부 장관의 서한, 라이스바이크, 1996년 4월 18일).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계 보건 기구는 “완화 치료는 …… 죽음을 앞당겨서도 지연시켜서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윤리적 입장이 세계 보건 기구의 견해와 일치하는 것은 높이 살 만한 일이다. 가톨릭 교회는 교회 자체의 전통에서 주로 이끌어 낸 논거들을 이용하여 세계 보건 기구의 입장을 지지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의 전통에서는 한편으로는 인간 생명을 고유하긴 하지만 절대적인 선으로 보지는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을 지연시키지 않는 것’과 ‘죽음을 앞당기지 않는 것’에 관한 개별 논문들이 발전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지지할 수 있는 다른 논거들도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안락사 요청 건수가 늘어나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예상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훌륭한 완화 치료는 실제로 시행되는 안락사 건수를 상당히 감소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며, 실제 경험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안락사를 완화 치료의 일부로 여겨야 하는가 아니면 이 둘은 별개의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것은 사회 윤리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가 임종자들에게 베푸는 제도적 지원의 구조적 요소인 완화 치료에 어떠한 목적을 부여하고 있으며 추구하는 목적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이러한 제도적 의미에서 안락사는 완화 치료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다. 왜냐하면 안락사는 완화 치료의 본질 자체에 상충되며 그러한 치료의 성장과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당기거나 지연시키는 치료가 더 이상 죽음의 순간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면, 임종자와 임종에 모든 힘과 창의력을 집중시킬 수 있다. 적극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일이 여전히 하나의 선택으로 남아 있을 때에는 그 반대가 된다. 그럴 때에는 정확한 사망 원인에 초점을 맞추느라 임종 과정에서 삶의 질에 기울여야 할 관심이나 노력, 창의력이 분산된다. 이는 네덜란드의 완화 치료에 발전을 가져오기보다는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더 높다.

3. 종교적 시각에서 본 통증과 고통과 죽음

종교에서는 고통의 물리적 원인보다는 인간의 삶에서 고통이 지니는 의미를 더욱 중요하게 본다. 이러한 차원은 명백히, 세계 보건 기구와 다른 이들이 옹호하듯이, 완화 치료를 ‘총체적 치료’로 이해하는 개념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교회가 임종자들에게 사목적 배려를 하는 귀중한 기회가 된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불안과 죽음은 인간 삶의 현실이지만 하느님께서 예정해 두신 우리의 생명, 곧 우리가 약속받은 고통과 괴로움 없는 삶,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삶에는 그러한 고통들이 자리잡을 여지가 없다는 역설적 통찰은 가톨릭 신앙과 사목 활동에 근본적인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고통과 죽음은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의 상태를 나타내는 징표인 ‘죄에 대한 벌’의 의미를 가지는 한, 생명에 철저히 ‘어긋나는’ 것이다. 1995년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비록 사람이 죽을 본성을 지니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죽지 않도록 정하셨다. 그러므로 죽음은 창조주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은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의 한 형태이며, 비록 인간의 제한된 경험 때문에 죽음이 우리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바랄 때에도 우리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실 분은 하느님이시다.

통증과 고통은 치료되어야 하며, 다행히도 그러한 치료의 가능성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통증과 고통을 완전히 없애고자 하는 바람은 실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또 다른 더 큰 고통을 불러온다. 따라서, 종교적 관점에서 통증과 고통에 대한 해답은 고통을 완화하고 고통에 맞서려는 노력과, 그렇게 하면서 인간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 믿는 이들은 미래와 약속의 차원을 용감하게 인정함으로써 삶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약속된 미래에 바탕을 두고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현재에 온전히 몸담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이 고통을 좋은 것으로 바꾸거나 죽음의 악을 축복으로 바꿀 수는 없다. 고통과 죽음은 하느님께서 궁극적으로 예정하셨듯이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관점은 고통을 하느님의 끊임없는 보살핌에 대한 약속으로 생각하게 한다.
사목 활동을 펼치면서 교회는 고통과 죽음의 의미와 그 경험은 삶의 의미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해답을 개인 생활 안에 통합한 결과라는 것을 늘 인식해 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자기 결정을 존중하는 완화 치료에서 크게 강조되는 자율성의 도덕적 원칙을 단언한다. 완화 치료에서는 그 사람의 생애나 인간 관계가 고려된 가운데 임종자 개개인이 치료의 척도가 되며, 환자가 자신의 죽음과 이별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가능한 시도가 이루어진다.

또한 교회는 자율성의 개념을 규정한다. 자율성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은 자기 결정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신에 대한 개인의 유일성이다. 이러한 준거의 틀 안에서, 자율성은 취약함과 유한함 그리고 이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배우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다시 말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충실하다는 것을 종교적으로 깨달을 때 자율성은 지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도록 배우는 것이다. 개개인이 겪는 고통의 인격적 측면은 개인의 생애, 타인이나 하느님과 맺는 관계, 종교적 문화적 전통이라는 더욱 큰 전체 안에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임종자들을 위한 사목 활동을 펼칠 때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끊임없는 보살핌과 복음의 종교적 시각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비록 교회가 그것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언제나 참된 신앙 경험이나 구원에 대한 희망, 고통의 수용으로 이끌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실제의 고통은 의미를 체험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과 힘을 압도할 수도 있다.

따라서 교회는 개별적인 인간만이 무의미한 상황에서도 유의미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교회는 또한 고통이 때때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을 수 있다는 것과, 자포자기의 심정이 너무도 커서 무의미함을 느끼는 데 대한 두려움만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신앙은 이를 넘어선다. 아니,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바로 그러한 순간에 더욱 깊어진다. 교회의 신앙은 우리에게 그러한 깊고 깊은 허무와 불안의 순간에 처했을 때 우리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4. 사회 윤리학에 대한 교회의 설명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임종자에 대한 간호와 안락사 문제의 윤리성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사회 윤리학에 중요한 초점을 맞추어 왔다. 1985년 사목 교서 「병자들의 고통과 임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자신의 삶이나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고통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있는 사회는 이러한 한계를 점점 더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보다 더욱 인간적이다.” 또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삶의 의미를 체험하거나 그것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으로나 공동체로나 우리는 삶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Aan de Staatscommisie Euthanasie [왕립 안락사위원회에] …… 1-2-1 시리즈, n°8, 1985년). 적절한 완화 치료의 사회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안락사가 사회적으로 용인된 관행이 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안락사를 반대하라고 권고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교회가 힘을 얻는 것은, 사회가 한 개인에게, 곧 의사에게 다른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중단시키거나 그러한 일을 허용할 수 있는 결정적인 판단을 내릴 권한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굳은 원칙에 있다는 것을 교회는 알고 있다. 이 원칙은 생명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라는 종교적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무엇보다도 의사들이 이러한 권한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이 중병을 앓거나 말기 단계에 있는 가장 무력한 순간에 안정감과 보호받고 있다는 확신을 주어야 할 사회적으로 신뢰받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서는 생명의 신성함뿐 아니라 모든 인간 생명이 누려야 할 안정성도 주요한 근거가 된다. 사회는 의사들이 의료 목적의 한계를 알고 그 한계를 존중하며 일한다는 것을 알 때 의사들을 신뢰할 수 있다. 안락사 시행은 의사들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해 왔다.

이와 관련하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점점 부실해져 가는 치료에 관한 교회 공동체의 우려를 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완화 치료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는 이를 위한 적절한 제도적 시설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요양원 치료나 가정 간호를 위한 인력과 수단의 부족이 심각한 경우가 많다. 호스피스 운동이 널리 알리고 있는 편안한 죽음에 대한 개념은 사회적 구속으로 제한을 받고 있는 듯하다. 부분적으로는 편안하고 인간다운 죽음을 위한 진지한 사회적 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안락사가 우리 사회에서 널리 용인되는 하나의 선택이 되고, 나아가서 그러한 선택 가능성 때문에 이러한 노력을 증진하려는 의욕이 꺾여서야 되겠는가?

 

<편안한 죽음에 대한 관심 증대>

F. 바아르 박사와 가진 인터뷰  - 아르얀 부르스(Arjan Broers)


지난 몇 년 동안 완화 치료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증대하였다. 지난 5년 동안, 임종자와 그 가족들을 돌볼 수 있는 별도의 시설을 갖춘 요양원이 20군데가 더 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50여 곳의 요양원이 그러한 시설을 설립하는 중이다. 1992년, 로테르담에 있는 가톨릭 요양 시설인 안토니우스 예이설몬더에서 처음으로 말기 환자들을 위한 시설을 제공하게 되었다. 환자 간호 책임자인 F. 바아르 박사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사람들도 주고받을 것이 많다는 인식이 점점 증대되고 있다.”고 말한다.

말기 환자들을 위한 네덜란드 완화 치료 조직(NTPN)의 회장인 바아르 박사는 통합 호스피스 간호 활동 단체의 회원이기도 하다. 이 호스피스 단체는 보건부의 요청으로 일반 보건 활동을 통해서도 임종자들을 간호할 수 있도록 정책 문서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바아르 박사는 임종자들을 만나 보면 그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죽음에 단지 양적으로만 접근합니까 아니면 질적으로도 접근합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과 신, 자연과 존재의 본질에 대한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저는 네덜란드가 보건, 통증 조절, 질병에 대한 정보 전달은 매우 뛰어나지만 이런 문제들은 다소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구의 노령화를 감안할 때, 임종자들을 위한 시설은 더욱 늘어나야 한다. 이러한 필요성은 요양원이나 말기 환자들을 위한 별도의 호스피스 시설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병원이나 가정에서 임종하는 사람들을 위한 호스피스 시설에서 지원을 받는 형태를 띠기도 한다. 바아르 박사는 임종자들을 상담하는 의사나 간호사들에게 “말기 환자들을 위한 완벽한 간호 활동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세기 동안, 평균 수명은 20세기 초반에 40세이던 것이 20세기를 마감할 무렵에는 76세까지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러나 바아르 박사의 말대로 사람들은 이제 인간의 유한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며 떠나 보내는 데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도 그러한 인식의 일부이다.” 또한 바아르 박사는 병원과 요양원, 요양소들이 가정 간호 조직이나 일반 의사들과 함께, “임종을 맞는 장소와 상관없이” 말기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훌륭한 간호를 해 줄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하는 일에 협력할 것을 요청하였다.

바아르 박사는 완화 치료 분야의 발전은 두 가지 발전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말한다. 첫째, 20세기 후반의 보건 활동은 환자의 건강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진단학과 ‘치료’에 점점 더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러나 일부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이러한 생명 연장 치료는 고통의 연장이기도 하며 때로는 고통을 증대시키기도 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질병이 아니라 환자와 그 가족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는 ‘간호’로 더욱 훌륭한 봉사를 받기를 바라게 되었다.

또한 바아르 박사는 완화 치료에 대한 관심 증대는 한편으로 안락사 논의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단지 이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발적인 안락사 진술서를 들고 이곳을 찾는 환자들을 자주 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우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알려 줍니다. 그러한 진술서는 흔히 도움을 요청하는 호소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환자와 함께 과연 편안한 죽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환자들에게, 당연히 우리가 그들의 통증을 덜어 줄 것이고 질식하지 않도록 지켜볼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되게 도와줄 것이라고 안심시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환자의 불안과 절실한 소망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고, 환자나 가족들은 죽음을 더욱 성숙한 태도로 맞을 수 있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의료적 사회적 정신적 보살핌이 환자가 존엄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면, 안락사까지 나아갈 필요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바아르 박사는, “질병과 죽음, 삶과 죽음을 둘러싼 금기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있으며” 또한 이 모든 것은 임종자를 더욱 잘 보살피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고통은 참으로 엄청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심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환자를 고통 속에 내버려둔다면 안락사를 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안락사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안토니우스 예이설몬더에서 보낸 다년간의 경험으로 바아르 박사는 삶의 마지막 단계가 서서히 지나갈 때 삶은 매우 강렬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줄 것도 받을 것도 많습니다. 여러 가지 것이 다시 평가되고 ‘다시 풍요로워’집니다. 마지막 위기 때에 많은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과 관계가 회복되고 새로워지며, 또한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더욱 강하게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더욱 가까워집니다. 그것은 또한 간병인이나 자원 봉사자들에게도 ‘원동력’이 됩니다. 이러한 강렬함은 우리에게 큰 만족을 줍니다.”
완화 치료에 대한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안토니우스 예이설몬더는 1993년에 말기 환자들을 위한 별도의 시설을 지었으며, 그 이전에는 의료적 수단만이 아닌 그 이상의 방법으로 임종자들에게 다가가고자 다년간 노력해 왔다. 그러한 노력은 안토니우스 예이설몬더 안에서뿐만 아니라 가정 간호에서도 이루어졌다. 가정 간호의 경우, 의료 보험 회사들은 가정으로 말기 환자들을 방문하는 자원 봉사자들에게 전문적인 훈련과 지도를 해 줄 수 있는 자금을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요양원 ‘시설’은 1인실 여덟 개를 갖추고 있으며, 일 년에 평균 백 명의 환자들을 받는다. 그 가운데 반은 열흘 안에 사망하며 평균 입원 기간은 3주 정도이다. 바아르 박사는 의사와 간호사, 간병인, 사목 종사자, 가족과 친구들이 서로 깊이 관계를 맺는 간호법을 신뢰한다. 시설에 가족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상담하며 사후 준비를 하고, 직원들과 자원 봉사자들을 교육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바아르 박사는 이렇게 강조한다. “큰 관심을 가지고 간병인들을 지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환자와 가족들의 기부 덕분에 버팁니다.”
안토니우스 예이설몬더는 직원들과 자원 봉사자들을 위한 집중 훈련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이 요양원은 직원들이 일에 지치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바아르 박사는 2년 전 이 시설에 관한 책자에서 이렇게 썼다. “건강하고 열정적이며 의욕적인 직원들이 양질의 간호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직원들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시설은 그 시설에 머무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호사들이 자기 일터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럴 때만이 환자들에게 필요한 간호를 할 수 있고, 환자들이 사망한 다음에도 가족과 친구들을 적절히 돌볼 수 있다. 남겨진 가족들과 직원들을 위하여 해마다 대여섯 번의 추모 모임을 갖는 것도 이러한 사후 관리의 일환이다.

교회가 임종자들을 어떻게 돌보고자 하는지 분명히 밝히는 것 또한 중요하다. 바아르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영성적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잘 교육받은 인력도 간호 팀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가 할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교회의 믿음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로마 가톨릭 신자도, 개신교 신자도, 이슬람 신자도 아니심을 보여 주시는 순간이 바로 이때입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실 뿐입니다. 그러한 경험은 교회 일치를 위한 탄탄한 토대가 됩니다. 교회는 가끔 정도를 지나쳐 사람들에게 특정한 종교적 신념을 강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른 분이심이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는 서툰 간호사의 모습으로, 때로는 부엌일을 돕는 사람이나 신앙이 없는 같은 환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불안에서 해방시켜 주는 분은 하느님이시며, 교회만이 영적 도움을 주는 유일한 통로는 아닙니다.”
바아르 박사에 따르면 가톨릭 전통의 강점은 죽은 이를 떠나 보내고 기억하는 행위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고유의 의식에 있다. “가톨릭 교회는 여기서 큰 역할을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주입시키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교회는 임종자들과 그 가족과 친지들을 도와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는 생명을 도와야 합니다.”


* 「121」은 네덜란드 주교회의 공식 기관지로서 격주로 발간된다.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 교회 사무처
(보도 자료, 위트레흐트, 2000년 11월 29일자)


주교들은 안락사 법안의 수용을 ‘깊이’ 개탄한다

 

네덜란드 주교들은 하원에서 안락사 법안을 수용한 것을 ‘깊이 개탄한다.’ 주교들은 이것이 생명을 중단시키는 행위를 어느 정도 ‘합법화’하고 있다고 본다. 주교들은 안락사가 사회에서 점점 더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심이 더욱 약화되며, 의사들이 안락사와 자살 방조에 참여하도록 사회적으로 점점 더 압력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한다.

로마 가톨릭 주교회의는, 정부가 미성년자들에게 그러한 결정을 내릴 권한을 준 법안을 재고하였음에 주목하며, 완전하게 충족되어야 할 기준을 다룰 때 의학적인 객관성을 지닐 것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현재의 상황이 매우 유감스럽다는 주교들의 견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논의가 시작된 1983년 이후, 주교들은 생명을 보호할 필요성을 옹호하고자 공개 토론에 꾸준히 참여해 왔다. 1994년에 주교들은, ‘견딜 수 없고 가망이 없다.’는 기준은, 객관적으로 생각할 때 의료진의 안락사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명백하게 밝혔다. “어떠한 전문가도 이러한 판단을 내릴 권한이 없다.”

‘용납할 수 없는’
하원이 승인한 법안과 관련하여 네덜란드 주교회의는 이미 1999년 10월의 반박 성명을 통하여, 의료진의 적극적 안락사가 일정 조건을 충족시킬 때 기소를 면제받음으로써 처벌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모든 법적 토대의 기준을 명백하게 거부하였다. 주교들이 생각하기에 이는 법망의 ‘틈’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주교들은, 안락사와 자살 방조의 구체적인 사례들은 “당연히 검사가 직접 판단할 문제”라고 본다. 하원이 승인한 법안은 안락사 행위의 ‘합법화’를 의미하며, 이는 “우리 사회에서 언제나 인정받아 온 인간 생명 보호의 원칙과 상충된다.”
1999년 10월의 반박 성명에서 주교들은 이미 정치 지도자들에게 이 길을 포기하도록 요청하였다. “인간다운 품위를 지니고 죽음을 맞이하려면 특히 적절한 ‘완화 치료와 호스피스 간호’가 필요하다. 정부 정책은 이러한 것들을 발전시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 교회 사무처
(보도 자료, 위트레흐트, 2001년 4월 11일자)


네덜란드 주교들은 안락사 허용 법안에
깊은 실망을 금할 수 없다

 

네덜란드 주교들은 상원에서 안락사 법안을 승인한 것에 깊은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주교들이 지난 몇 년간 반대해 왔음에도 네덜란드 정부는, 요청이 있을 때 충분히 신중을 기한다는 조건으로 의사가 생명을 중단시키는 행위를 합법화하였다. 이로써 이러한 유형의 안락사는 앞으로 네덜란드에서 더 이상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게 되었다.

1983년에 안락사에 관한 정치적 사회적 논의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네덜란드 주교들은 현재 채택된 것과 같은 법은 허용될 수도 없으며 필요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지적해 왔다. 또한 주교들은 때로는 참기 어려운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 환자들의 경우에는 완화 치료가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해 왔다. 주교들은 또한 그러한 법이 사회 전반에 미칠 파급 효과를 끊임없이 경고해 왔다. 1999년 10월과 2000년 11월, 주교들은 그러한 법의 결과로서 안락사가 점점 더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질 것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여러 교회와 기관들이 작성하여 최근 상원에 제출한 탄원서에서 주교들은 제안된 법안은 사회의 토대를 좀먹는다고 지적하였다. 네덜란드 주교들은 이 법이 다른 나라들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단 정치적 결정이 이 법을 지지하는 쪽으로 이루어진 이상, 주교들은 모든 관련자가 실제 상황에서 매우 신중하게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의 책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청한다.

 

새 법의 관련 조항 발췌문


요청에 따른 안락사와 자살 방조의 재심 절차와
형법(Wetboek van Strafrecht)과 매장과
화장에 관한 법(Wet op de lijkbezorging) 개정안
(요청에 따른 안락사와 자살 방조 [재심 절차] 법)


제1장 용어 정의

제1조

이 법의 목적에 따라,
가. ‘본 장관들’이란 법무부 장관과 보건 복지 체육부 장관을 말한다.
나. ‘자살 방조’란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의 자살을 돕거나, 형법 제294조 2항 2절에 언급된 수단들을 그 사람에게 조달해 주는 것을 말한다.
다. ‘의사’란 통지에 따라 환자의 요청으로 그를 안락사 시켰거나 자살을 도운 의사를 말한다.
라. ‘상담자’란 요청에 따라 안락사를 시행했거나 자살을 도운 의사의 의도와 관련하여 상담을 한 의사를 말한다.
마. ‘간호 제공자’란 민법 제7권(Burgerlijk Wetboek) 제446조 1항에 언급된 간호를 제공한 사람을 말한다.
바. ‘위원회’는 제3조에 언급된 지역 재심위원회를 말한다.
사. ‘지역 검사관’은 공중위생관리국 보건검사과의 지역 검사관을 말한다.


제2장 충분한 신중성의 요구

제2조

1. 형법 제293조 2항에 언급된 충분한 신중성의 요구란, 의사가
가. 환자의 안락사 요청이 자발적이고 깊이 숙고한 것임을 확신하고,
나. 환자가 지속적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다고 확신하며,
다. 환자에게 그의 상황과 가능성에 대하여 알려 주었고,
라. 환자가 자신의 상황에 대한 다른 적절한 해결책이 없다고 확신하며,
마. 적어도 한 명 이상의 다른 의사가 환자를 직접 보고, 가에서 라에 언급된 충분한 신중성의 요구에 입각하여 소견서를 써 주었으며,
바. 충분히 신중을 기하여 생명을 중단시켰거나 자살을 도왔다는 것을 뜻한다.

2. 16세 이상인 환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능력을 상실하였으나, 그러한 상태에 이르기 전에 자신의 상황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안락사를 요청하는 진술서를 작성해 두었다면, 의사는 이 요청을 이행할 수 있다. 1항에 언급된 충분한 신중성의 요구들을 적절히 변용하여(mutatis mutandis) 적용한다.

3. 환자가 16-18세 사이의 미성년자이며 자신의 상황을 이성적으로 이해한다고 판단되면, 의사는 친권을 행사하는 환자의 부모나 보호자와 함께 의논하여 결정한 다음, 환자가 요청한 안락사나 자살 방조를 이행할 수 있다.

4. 환자가 12-16세의 미성년자이며 자신의 상황을 이성적으로 이해한다고 판단되면, 친권을 행사하는 환자의 부모나 보호자가 안락사나 자살 방조에 동의하는 한에서 환자의 요청을 이행할 수 있다. 2항은 적절히 변용하여 적용한다.


제3장 요청에 따른 안락사와 자살 방조에 관한 지역 재심위원회

제1항 설립, 구성, 임명

제3조

1. 형법 제293조 2항이나 제294조 2항 2절에 각각 언급된 대로 요청에 따른 안락사와 자살 방조의 사례들이 통지되면 이를 재심리하는 지역 위원회들이 있다.
2. 위원회는 위원장인 법조인 한 명, 의사 한 명, 윤리나 철학 전문가 한 명을 포함하여 홀수의 위원들로 구성된다. 또한 앞 문장에 열거된 각 분야의 부위원들도 이 위원회의 구성원들이다.

제4항 의무와 권한

제8조

1. 위원회는 매장과 화장에 관한 법 제7조 2항에 언급된 보고서를 토대로, 요청에 따른 안락사나 자살 방조를 시행한 의사가 제2조에서 설명한 충분한 신중성의 요구에 따라서 행동하였는지 판단한다.
2. 위원회는 의사의 행위를 올바로 판단하기 위하여 필요할 경우, 의사에게 서면이나 구두로 보고서를 보완하도록 요청할 수 있다.
3. 위원회는 의사의 행위를 올바로 판단하기 위하여 필요할 경우, 시 검시관이나 관련된 상담자 또는 간호 제공자에게 문의할 수 있다.

제9조

1. 위원회는 제8조 1항에 언급된 보고서를 받은 지 6주 이내에 의사에게 의견서를 보낸다.
2. 위원회는 검사 위원회와 지역 보건 검사관에게 위원회의 의견을 알려 준다.
가. 위원회가 의사가 제2조에서 설명한 충분한 신중성의 요구에 따라서 행동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거나,
나. 매장과 화장에 관한 법 제12조 마지막 절에 언급된 것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위원회는 이를 의사에게 알려야 한다.
3. 제1항에서 명시한 기간은 최대 6주까지 한 번 연장될 수 있다. 위원회는 의사에게 이를 알려야 한다.
4. 위원회는 자체 의견을 의사에게 추가로 구두 설명할 수 있다. 위원회나 의사의 요청이 있을 때 이러한 구두 설명이 이루어진다.

제10조

위원회는 검사의 요청에 따라, 그가
1° 제9조 2항에 언급된 경우에 의사의 행위를 판단하기 위하여, 또는
2° 형사상의 수사를 위하여
필요로 하는 모든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위원회는 검사에게 제공하는 모든 정보에 대하여 의사에게 알려야 한다.


제4장 타 법규의 개정

형법은 다음과 같이 개정된다.

가. 제293조는 다음과 같이 개정된다.

제293조

1. 타인의 명시적이고 간절한 요청에 따라 그를 안락사 시키는 자는 12년 이하의 징역이나 5급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2. 의사가 위에서 언급된 죄를 저질렀으나, 요청에 따른 안락사와 자살 방조 (재심 절차) 법 제2조에 언급된 충분한 신중성의 요구들을 충족시키고, 매장과 화장에 관한법 제7조 2항에 따라 시 검시관에게 이를 보고한 경우에는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

나. 제294조는 다음과 같이 개정된다.

제294조

1. 의도적으로 자살을 교사한 사람은, 그 결과로 자살이 이루어지는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벌금형에 처해진다.
2. 의도적으로 타인의 자살을 방조하거나 자살 수단을 제공한 사람은, 그 결과로 자살이 이루어지는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벌금형에 처해진다. 제293조 2항은 적절히 변용하여 적용된다.

제24조

이 법은 요청에 따른 안락사와 자살 방조 (재심 절차) 법이라고 불려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법을 조례와 법령 고시에 발표하고, 모든 관련 정부 부처와 당국, 기관과 공무원이 이를 성실히 이행하도록 명령하는 바이다.

전문은 법무부 사이트에 나와 있다.
http://www.minjust.nl:8080/a_beleid/fact/suicid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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