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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관심 (Sollicitudo rei socialis)
교황 요한바오로2세 발표시기 1987-12-30 전자북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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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현 세계에 관한 신학적 탐구와,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 담긴 가르침에 따라, 개발의 개념 자체가 더욱 완벽하게, 더욱 섬세하게 규정될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 개념을 실현시킬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이다.

 

회칙 '민족들의 발전' 반포 20주년을 맞이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사회적 관심

SOLLICITUDO REI SOCIALIS

1987. 12. 30.

회칙 [민족들의 발전] 반포 20주년을 맞이하여
주교, 사제, 수도자 가족들에게 교회의 자녀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회칙



 

I. 서 론
II.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참신함
III. 현대 세계에 대한 진단
IV. 진정한 인간 발전
V. 현대 문제점들에 관한 신학적 해독
VI. 몇 가지 특별한 지침
VII. 결 론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인사와 더불어 사도적 축복을 보낸다.


I. 서 론

1. 교회의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은 인간의 참다운 발전과 사회가 인간의 모든 차원을 존중하고 신장시키는 사회로서 발전함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이 관심을 극히 다양한 양상으로 표명하여 왔다. 근자에 있어서 이에 개입하는 특별한 수단의 하나로서 로마 교황의 교도권이 행사되어 왔으니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효시로 하여1) 이 문제를 수시로 다루어왔고 때로는 각종 사회적 문서의 반포 시기를 전대에 나온 문서의 주년 기념일과 맞추는 관습도 생겨났다.2) 교황들은 이들 메시지의 내용을 이용하여 교회의 사회 교리의 새로운 측면에다 참신한 빛을 제시해 왔다. 그 결과 이 교리는 레오 13세의 탁월한 공헌에서 시작되어 역대 교도권의 기여를 받는 가운데 시의에 맞는 하나의 교리적인 ‘체계’로 갖추어져 왔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말씀의 충만한 빛을 받으면서3) 성령의 보우를 입어(요한 14,16.26; 16,13-15 참조), 역사의 도정 속에 전개되는 사건들을 해독하는 가운데, 이 교리 체계가 구축된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적인 사색과 인간 학문들의 보조를 받아가면서, 현세 사회를 책임지고 건설하라는 자신의 소명에 호응하도록 인도하고자 노력한다.

2. 이러한 사회 교리의 방대한 체계 중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 존경하올 본인의 선임자 바오로 6세가 1967년 3월 26일자로 반포한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4)이다.
이 회칙의 장구한 영향력은 1987년에만도 교계와 사회 각계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개최된 행사들을 보아서도 족히 알 수가 있다. 같은 의도에서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는 동방 교회 각급 시노드와 각국 주교회의에 회람 서한을 보내어 회칙의 반포 주년을 보람 있게 거행할 만한 착상과 제안을 요청한 바 있었고, 필요하다면 그 가르침을 시대에 맞추어 절충할 방안도 물은 바 있었다. 20주년을 기념하는 마당에서는 동위원회가 장엄한 기념식을 마련하였고 본인이 거기서 폐막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5) 그리고 지금 위에 말한 회람 서한에 대한 각계의 대답을 고려하여, 1987년의 막이 내리는 이즈음에 맛민족들의 발전맜의 주제들에 관하여 한 편의 회칙을 헌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하였다.

3. 이리하여 본인은 두 가지 목적을 주로 이루고자 하는 바이니, 한편으로는 바오로 6세의 이 역사적인 문헌과 그 가르침에 경의를 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베드로좌에서 본인의 경애하올 선임자가 되는 분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서 사회 교리의 연속성과 아울러 그 부단한 쇄신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상 연속성과 쇄신이야말로 교회의 가르침이 영구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이 이중의 차원은 사회 영역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에 있어서 전형적인 특색이기도 하다. 일면으로 교회의 사회 교리는 항구적이어서 그 근본 염원에 있어서, 그 ‘반성의 원리’에 있어서, 그 ‘판단 기준’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행동 지침’에 있어서,6)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복음과의 산 연결에 있어서 한결같이 지속된다. 다른 면에서 그것은 늘 새로운 것이니, 역사적 여건의 변화에 의해서나, 사람과 사회의 생활의 장이 되는 사건들의 부단한 유동성에 의해서 적응이 필요하고 적절하다고 시사될 적에는 이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4. 본인은 회칙 [민족들의 발전]이 비록 60년대의 인간과 사회를 대상으로 한 발언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양심에 건네는 호소라는 점에서 80년대의 말에 이른 오늘에도 여전히 위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아직도 이루어지기에 요원한 ‘민족들의 발전’을 염원하고 목표로 삼는다는 맥락에서 현대 세계의 기본 노선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 메시지의 영향력을 확산시켜 20년 전에 비하여 극적인 성격이 조금도 감소되지 않은 역사의 현순간에다 가능한 대로 적응을 시켜보고자 한다.
잘 알다시피 시간은 항속적이고 불변하는 리듬을 갖고 있는 법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리듬이 한층 가속화된 느낌을 주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들이 증폭되고 복잡하다는 이유에서 특히 느낌이 심하다. 따라서 지난 20년이 경과하면서 세계의 면모는 어떤 항속적인 기본 요소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현저한 변화를 보였고 심지어는 전혀 새로운 면모도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제3천년대의 전야에 해당하는 이 시점은 널리 만연된 어떤 ‘기대’ 다시 말해서 새로운 ‘대림절’7)을 맞는 느낌이며 그래서 그러한 기대가 모든 이에게 미치고 있다. 그런 정황이 회칙의 가르침을 더욱 상세히 궁구하고 그 가르침이 미래에 더욱 발전할 가능성을 가늠하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하겠다.
이 고찰의 목표는 현세계에 관한 신학적 탐구를 통해, 또 회칙에 담긴 가르침에 따라, 개발의 개념 자체가 더욱 완벽하게, 더욱 섬세하게 규정될 필요성을 강조하려는 데에 있다. 또한 그 개념을 실현에 옮기는 몇 가지 방안을 지적하는 데에도 목표가 있다.



II.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참신함

5. 교황 바오로 6세의 문서는 출현하자마자 그 참신함으로 말미암아 여론의 주의를 끌었다. 구체적으로 또 극히 명료하게 문서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들어 있는 연속성과 새로움이라는 특성을 밝혀낼 수가 있었다. 회칙을 주의 깊게 재독함으로써 이 가르침의 여러 측면을 재발견하려는 것이 본 고찰의 주요한 흐름이 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본인은 이 회칙이 반포된 시기에 관하여, 즉 1967년에 관하여 몇 마디 하고자 한다. 교황 바오로 6세가 그 해에 사회적 회칙을 반포하기로 선정한 사실은 이 문서를 1965년 12월 8일에 폐막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결부시켜 고찰하도록 요구한다.

6. 여기서 우리는 단순한 연대적 근접 외의 무엇을 감지할 수가 있다. 회칙 [민족들의 발전]은 어느 면에서 공의회의 가르침을 적용시키는 문서라고 하겠다. 회칙이 공의회의 문서를 계속해서 인용한다는 이유에서만 아니고8) 오히려 회칙이 교회의 동일한 관심, 다시 말해서 공의회로 하여금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의 중요한 주제들을 발전시키고 조정하려는 노력 전체에, 그중에서도 사목 헌장에 나타난 노력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이 공의회의 호소, 사목 헌장의 첫머리에 나오는 호소에 대한 일종의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진실로 인간적인 것이라면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9) 이 말들은 공의회의 이 위대한 문서에 영감을 주는 기본 사상이며, 사실 문서는 수백만 인간들이 살고 있는 빈곤과 저개발의 처지를 언급하는 데에서 발언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빈곤과 저개발이 이름을 바꾸면 오늘의 ‘슬픔과 번뇌’이며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들의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이처럼 고통과 슬픔이라는 광활한 현상을 배경으로 삼아 공의회는 기쁨과 희망의 지평선을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바오로 6세의 회칙은 같은 목적을 가진 것으로 공의회의 염원을 지극히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7. 또한 거기에는 회칙의 주제라는 것도 있으니,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이라는 위대한 전통을 따르면서 공의회가 이룩한, 특히 사목 헌장에 나타나 있는 새로운 제시와 풍부한 종합을 직접적으로 취한 것이기도 하다.
그 내용과 주제들에 관해서 회칙은 다음의 사실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천명하고 있으니, 우선 ‘인간성에 관한 전문가’인 교회는 “그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 줄 의무를”10) 의식한다는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교회의 사명이 ‘봉사’에 있음과, 비록 교회가 백성들의 구체적인 상황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기능과는 구분되는 사명이라는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11) 아울러 바로 그 백성 가운데에 현저한 불평등이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한다.12) 그리고 오랜 세기에 걸친 교회의 전통을 충실히 반향하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재확인하여 ‘재화의 보편적 목적성’을 강조한다.13) 또한 문화와 기술 공학의 문명이 인간적 해방에 기여함을 인정하면서14) 동시에 그 한계를 간과하지는 않고 있다.15) 끝으로 회칙의 본주제가 되는 개발이라는 특정한 소재에 있어서 더 발전한 국가들이 “개발 도상국들을 원조해야 할 중대한 의무”16)를 강조하고 있다. 회칙이 제기하는 개발의 이상 자체가 사목 헌장이 이 문제에 접근하는 자세에서 직접 도출된 것이다.17)
이러한 인용과 다른 많은 인용으로 미루어 회칙이 사회 문제에 관한 공의회의 가르침, 특별히 민족들의 발전과 저개발이라는 특정 문제에 관한 가르침을 적용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8. 이러한 간단한 분석은 또한 회칙의 참신함을 더 잘 파악하게 해준다고 하겠으니 그것을 우리는 세 가지 점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는 문서가 가톨릭 교회의 최고위 당국자가 반포하였음에도 교회와 더불어 ‘모든 선의의 사람들’18)을 상대로 발언을 한다는 것과 언뜻 보기에 경제와 사회에 국한되는 문제, 곧 민족들의 발전에 관해서 다룬다는 사실에 있다고 하겠다. ‘개발’이라는 용어 자체가 사회 및 경제 과학의 사전에서 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회칙 [민족들의 발전]은 ‘노동자들의 처지’를 다룬 바 있는 회칙 맛새로운 사태맜의 노선을 직접 따르고 있다.19) 피상적으로 관찰한다면 양 주제가 종교 제도라고 보는 교회의 합법적인 관심에 벗어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노동자들의 처지’라는 주제보다 ‘개발’은 더욱 그렇다.
레오 13세의 회칙과 연속성을 갖고서 바오로 6세의 문서는 개발과 연관된 문제의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다는 공적이 있음은 인정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이 분야에 대한 교회의 개입이 정당하고 필요함도 아울러 인정되어야 한다.
덧붙일 것은 교회의 사회 교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의 생활에 그리고 사회의 생활에 적용하는 성격의 것임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을 뿐더러 사회나 인간과 결부된 지상의 현실에 적용하여 거기에 ‘반성 원리’와 ‘판단 기준’과 ‘행동 지침’을 제공하는 것임이 증명된 것이다.20) 여기 바오로 6세의 문서에서 우리는 이 세 가지 요소가 탁월한 실천적 방향에서, 다시 말하여 윤리적 행동을 지향하여 엮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교회가 ‘민족들의 발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때에 그의 특정한 전문 영역을 벗어났다거나 더욱이나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에서 이탈하는 것처럼 비난하면 안된다.

9.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두번째 참신함은 일반적으로 ‘사회 문제’라고 일컫는 분야에 열려진 폭넓은 시야라고 하겠다.
실제로 요한 23세의 회칙 [어머니요 스승]은 이 폭넓은 전망 속으로 들어간 것이었고21) 공의회는 사목 헌장에서 이를 반영한 바 있다.22) 하지만 교회의 사회 교리는 사회 문제가 세계적 차원을 띠게 되었다고 명백하게 주장할 수 있을 만한 정도에 이르러 있지는 않았으며,23) 바오로 6세가 그 회칙에서 한 만큼 이 주장과 그에 수반된 분석이 ‘행동을 지향하여’ 작업이 된 적은 없었다.
그 같은 명시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내용이 크게 풍부해졌으며 그 점은 명기할 만하다.
먼저, 일어날 만한 오해가 제거되어야 하겠다. ‘사회 문제’가 전세계적인 차원을 띠게 되었다고 해서 그 예봉을 상실했다거나 국가적 지역적 비중을 잃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특정 국가나 지역의 기업이나 노동자의 처지 또는 노동 조합 운동 등을 아무런 연관이 없는 고립된 것처럼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정반대로 지역적 범위라든가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는 인자들의 영향력에 갈수록 좌우되는 것이다.
불행히도 경제적 관점에서 개발 도상국들이 선진국들보다도 숫자가 많다. 개발이 제공하는 선익과 혜택을 결한 인간들의 숫자가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들의 숫자보다도 훨씬 많다.
그리하여 우리는 원래 인간 모두를 위해 있는 생존 수단의 불평등한 분배라는 문제, 그리고 그 수단에서 오는 혜택의 불평등한 분배라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더군다나 이것이 곤궁한 사람들의 잘못에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그들의 자연 조건이나 환경 전체에 달린 불가피한 성격의 것이 전혀 아니다.
바오로 6세의 회칙은 사회 문제가 세계적인 차원을 띤다고 공언함으로써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윤리적 사실,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에 토대를 둔 사실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회칙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 중대한 사실을 모든 이가 인식해야 하겠다.”24) 왜냐하면 그것이 양심과 직결되는 문제이며 양심은 윤리적인 결정의 원천이 되는 까닭이다.
이 같은 틀에서 본다면 회칙의 참신성은 역사적인 주장, 즉 사회 문제의 보편성을 주장한 거기에 있지 않고 그러한 현실을 윤리적으로 평가한 데에 있다. 그러므로 부강국들의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시민들은 비록 개인으로라도, 더군다나 그들이 그리스도 신자들일 경우, 도덕적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며, 각자의 책임의 정도에 따라서, 개개인의 결정이나 정부의 결정에 있어서 이 같은 세계적인 관련성, 자기들이 하는 행동과, 수백만 인간들의 빈곤과 저개발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상호 의존성을 고려에 넣어야 할 도덕적인 의무를 지지 않으면 안된다. 바오로 교황의 회칙은 이 도덕적 의무를 더욱 예리하게 “연대성의 의무”25)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주장만은, 비록 세계에서 많은 상황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회칙이 쓰여질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구속력과 효과를 지닌다.
다른 한편, 이 같은 윤리적인 견해의 노선에서 이탈하지 않고도, 회칙의 참신함은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세계적인 상호 의존을 고려에 넣을 때에, 크게 바뀐다는 사실에 있다. 진정한 발전은 단순히 부의 축적, 재화와 서비스의 더 많은 향유에 있을 수가 없다. 만약 이러한 혜택이 대중의 발전을 희생시킨 대가로,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차원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말이다.26)

10. 세번째로 회칙은 교회의 사회 교리 전체에 그리고 발전의 개념 자체에 참으로 고유한 공헌을 하였다. 이 고유함은 그 문헌의 결론적인 항목, 어떤 면에서 그 요약이요 문서의 역사적인 표어라고도 할 글귀에서 알아볼 수가 있다. “발전은 평화의 새 이름이다.”27)
실제로 사회 문제가 전세계적인 차원을 띠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정의에 대한 요청이 오직 그 차원에서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요청을 무시할 적에는, 불의의 희생자들 속에 폭력으로 응수하려는 유혹을 조장할 수가 있고 과연 많은 전쟁의 발발은 여기서 연원한다. 원래 만인에게 돌아가기로 되어 있는 재화의 분배에서 제외당한 사람들은 스스로 물을 것이다. 먼저 우리를 폭력으로 취급하는 자들에게 왜 폭력으로 응수해서는 안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만일 사태를 세계가 이데올로기의 블록으로 양분된 사실 - 이러한 분열은 1967년에도 이미 존재했었다 - 에 비추어 검토한다면, 또 그에 뒤따르는 경제적 정치적 반대 급부와 종속 관계에 비추어 검토한다면, 위험이 훨씬 큼을 알 수 있다.
회칙의 역사적인 문구의 충격적인 내용을 일차 고찰하고 나면 문서가 빗대어 말하는 두번째 내용에 의해서 그 뜻이 보완됨을 알게 된다.28) 민족들의 발전을 증대시키는 데에 쓰일 수 있고 쓰여야 마땅한 거금들이, 선진국들과 후진국들을 막론하고 소수 개인들과 집단들의 치부에 이용되고 있거나, 무기 비축의 증대에 할당되고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절실한 우선 순위를 뒤집어 엎는 짓을 무슨 수로 정당화한다는 말인가? 곤궁한 국가들을 돕는, 자본의 직접적인 이동을 훼방하는 장애물들을 감안한다면 이 문제는 훨씬 심각하다. 만일 “발전이 평화의 새 이름”이라면, 전쟁과 군비야말로 민족들의 총체적인 발전의 제일 큰 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이 표현에 비추어볼 때에 우리는 발전의 개념 자체를 재검토하도록 요청받는다. 물론 이것은 다수 대중의 고통은 무시한 채로 또 개인들과 국가들의 이기심이 주요 동기가 되면서 재화의 증대를 통해서 물질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야고보서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바와 같이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까? 여러분의 지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욕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합니다”(야고 4,1-2).
그와 반대로 다른 세계에서는, 온 인류의 공동선에 대한 관심에 의하여, 또 개인적 이윤의 추구가 아닌 “모든 이의 정신적이고 인간적인 발전”을 위하는 배려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계에서는 평화가 가능하며 “인간들 사이에 더욱 완전한 정의”29)의 결실로서 그 평화가 가능하다.
회칙의 이 새로운 요소도 영구적이고도 현시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며, 정의에 대한 존중과 참다운 평화의 건설 사이에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현대의 태도에 비추어보더라도 그 가치를 지님이 분명하다.



III. 현대 세계에 대한 진단

11. 그 당대만 해도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기본 가르침은 그 새로운 성격 때문에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사회적 맥락이 20년 전의 그것과 온전히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그러한 이유에서 본인은 오늘의 세계가 갖는 몇 가지 특성을 간략히 검토하여 바오로 6세의 회칙의 가르침을 ‘민족들의 발전’이라는 견지에서 다시 한번 개진시켜 보고자 하는 바이다.

12. 맨 먼저 주지시킬 사항은 한때 그처럼 생동하였던, 발전에 대한 희망이 오늘날에는 참으로 실현이 요원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 회칙이 환상으로 그친 것은 아니다. 회칙의 침중한 언어들, 때로는 극적인 음조까지 띠는 그 언어는 상황의 심각성을 각성시키는 데에 그쳤고, 문제의 해결에 기여하지 않으면 안될 시급한 의무를 만인의 양심 앞에 제기하였을 따름이다. 당대에는 일종의 낙관론이 널리 유포되어 있어서 극단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도 빈곤한 민족들의 경제적 후퇴를 극복하는 가능성이 있으리라는 데에, 그들에게 기저 구조층을 마련해 줄 수 있으리라는 데에, 그들의 공업화를 지원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낙관하였다.
그 같은 역사적인 배경에서 각국의 노력 외에도 또는 그 노력 위에 국제 연합은 두 차례의 10개년 개발 계획을 추진해 왔던 것이다.30) 사실 어느 정도로는 쌍방적인, 또는 다각적인 노력이 여러 나라를 원조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추구되어 왔으며 그러한 국가들 중의 일부는 이미 얼마 전부터 독립을 이룬 지 상당히 되었지만 절대 다수는 탈식민지화의 과정에서 막 탄생한 신생국들이었다. 교회로서는 이 같은 새로운 상황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깊이 이해할 의무를 느꼈다. 교회의 종교적이고 인간적인 영감으로 이러한 노력을 성원하겠다는 희망에서, 이러한 노력에 그야말로 ‘혼’을 넣어주고 효과적인 충동을 제공하려면 문제를 깊이 파악할 의무가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13. 이처럼 다채로운 종교적 인간적 경제적 기술적인 창안들이 헛된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리는 데에 성공을 거두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말해서, 여러 상황을 고찰할 때에, 세계의 현상황은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보아 오히려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이유에서 본인은 다른 인자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몇 가지 일반적인 징후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정황과 통계의 분석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도 무수한 인간들이,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인간이요 유일회적인 인간들이, 어린이들과 성인들과 노인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빈곤의 짐을 지고 고통을 당하는 현실 사정만 일별해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세계 도처에서 그들의 상태가 현저하게 악화되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아예 희망을 박탈당한 자들이 수백만이다. 다름아닌 우리 형제들과 자매들이, 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완전 결핍과 완전 빈곤의 비극 앞에서 우리에게 의문을 제기하시는 분은 다름아닌 주 예수이시다(마태 25,31-46 참조).

14. 첫번째 부정적인 평가는 소위 선진 북반구와 개발 도상의 남반구 사이의 격차가 항속적일 뿐더러 흔히는 갈수록 확대 일로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리학적인 용어는 어디까지나 지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실상 부유와 빈곤의 경계는 선진 사회든 개발 도상의 사회든 동일한 사회 속에도 엄연히 가로지르고 있는 현상이다. 사실 빈곤의 수준에 이르는 사회적 불평등은 부강국에도 존재하고 있듯이 이와 병행되는 현상으로 저개발 국가에서도 이기심의 발로와 부의 허세가 당혹할 정도로 노골적이어서 가히 스캔들이 될 정도이다.
세계 일부 지역에서, 특히 선진 북반구에서 가능한, 풍요한 재화와 서비스가 남반구에서는 용납 못할 정도로 지연되고 있으며 바로 이 지정학적인 지역에 인류 대다수가 살고 있다.
식료품의 생산과 분배, 위생, 보건과 주택, 음료수의 취수 가능성, 작업 여건(특히 여성들의 조건), 예상 수명 그리고 여타의 경제적 사회적 지수 등 여러 부면을 살펴볼 때에, 전반 상황은 그 자체로 보든 선진국의 해당 여건과 관련시켜 보든 절망적이다. ‘격차’(갭)라는 단어가 저절로 머리에 떠오를 정도이다.
이 단어까지도 현실 자체를 형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하겠으니, 그것이 마치 고착된 현상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과 개발 도상국에서 보이는 개발의 속도가 근년에 달라졌고 바로 이것이 그 간격을 넓히는 데에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개발 도상국들, 그중에서도 극히 빈곤한 국가들은 크게 우려할 정도로 지체되는 상황에 처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다 다양한 민족 집단들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와 가치 체계의 차이, 경제적 발전의 정도와 늘 부합되지는 않을 뿐더러 오히려 간격을 조성하는 차이를 덧붙여야 하겠다. 이것들은 사회 문제를 훨씬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자 측면들이니 이 문제가 전반적인 차원을 띠어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확대 일로에 있는 격차로 나누어진 세계의 여러 지역을 관찰할 때에, 그리고 그 지역 하나하나가 자기 나름의 성취를 얻으면서 자기 나름의 길을 걷고 있음을 주지할 때에, 우리의 하나뿐인 세계를 두고 여러 세계를 운위하는 어법, 즉 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 제4세계를 말하는 시사 용어가 이해된다.31) 이런 표현들은 비록 모든 국가들을 빈틈없이 분류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의미가 깊다. 이 말 자체가 세계의 단일성, 말하자면 인류의 단일성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다는 의식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는 표징이다. 그런 표현은 객관적 가치가 있든 없든 간에 도덕적인 내용을 그 속에 숨기고 있으며 따라서 “전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주는 표지요 도구인”32) 교회로서는 그 앞에서 무관할 수가 없는 것이다.

15. 하지만 지금까지 열거한 저개발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지표’에다 똑같이 부정적이고 심지어는 더 곤란한 다른 지표들, 문화 영역에서 시작되는 지표들을 첨언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도면이 어디까지나 불완전한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문맹, 고등 교육을 받기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한 상태, 자기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참여할 수 없는 무력함, 각종 형태의 착취와 개인과 그의 인권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심지어는 종교적 억압, 온갖 유형의 차별, 특히나 인종의 차이에다 근거를 둔 가증할 형태 등이 있다. 만약 이런 병폐의 일부라도 선진 북반구의 여러 지역에서 감지되는 통탄할 상황이 있다면, 개발 도상국 또는 저개발국에서는 더욱 빈번하게, 더욱 지속적으로, 뿌리뽑기 더욱 어려운 양상으로 자리잡고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오늘의 세계에서는 다른 여러 권리 중에서도 경제적 창의의 권리가 자주 말살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에게나 공동선을 위해서나 중대한 권리이다. 경험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 권리가 부정되거나 사회에서 모든 이의 ‘평등’이라는 명분으로 제한을 가할 경우에 창의의 정신, 말하자면 시민의 창조적 주체성이라는 것이 위축되거나 실제로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다. 그 결과로 진정한 평등과는 거리가 먼 ‘전반적 하락’(levelling down)이 발생한다. 창조적인 솔선 대신에 피동성, 관료 체제에 대한 의존과 종속이 등장한다. 관료적인 장치가 재화와 생산 수단의 체계 전체에 대하여 ‘소유주’가 아니라면 적어도 ‘명령’하고 ‘결정을 내리는’ 단독 기구가 되고 인간 개개인을 절대에 가까운 종속과 흡사한 위치에 몰아넣고 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에 있어서 노동자 무산 대중이 처해 있던 전통적인 종속 관계와 유사하다. 이것은 좌절과 절망감을 유발하고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 생활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만들며 많은 수가 이민을 가게 되거나 적어도 ‘심리적’ 이민이라는 형태를 조장하게 만든다.
이 같은 상황은 ‘각국의 권리’라는 관점에서도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사실 한 국가 공동체 내에서 경제적, 사회 정치적 차원들이 상호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한 국가가 자국의 경제적, 사회 정치적 의미에서, 때로는 어느 면에서 문화적인 의미에서까지도 그 주체성, 말하자면 그 고유한 권리인 ‘주권’이 상실되어 있는 경우가 이따금 일어난다.
여기서 재천명할 일은 어느 사회 집단도, 예컨대 어느 정당이 유일한 사회 지도자의 역할을 독점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전체주의 형태에서도 일어나는 바와 같이 필히 개개 시민들의 주체성은 물론 사회의 진정한 주체성의 파괴를 초래하는 까닭이다. 그 같은 상황하에서는 입으로야 제아무리 상반되는 구호를 외친다 하더라도 개인과 국민이 ‘객체’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현세계에는 다른 많은 형태의 가난이 존재한다는 점을 첨부해야 하겠다. 가난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결핍 내지는 박탈이 있지 않던가? 인간 권리의 부인 또는 제한, 예를 들어 종교 자유의 권리, 사회 건설에 참여할 권리, 단결을 하고 단체를 조직할 자유, 경제적 문제에 창의성을 발휘할 자유 등이 부인되거나 제한되는 경우, 물질적 재화의 결핍에 못지않게 인간 자체가 빈곤해지지 않던가? 그리고 이러한 권리의 충만한 시인을 배려하지 않는 개발이 과연 정말로 인간적 차원의 개발인가?
간단히 말해서, 현대의 저개발은 단지 경제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사회적 정치적인 것, 그리고 단순하게 인간적인 것이며, 이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이 이미 20년 전에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점에서 오늘의 이 현실이 개발에 관한 너무 협소한 개념에서 온 결과가 아니었는지, 말을 달리하자면 주로 경제적인 것으로 본 데서 기인하지 않았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16. 지난 20년을 두고 다수 선진국들과 개발 도상국들 그리고 국제 기구들이 사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아니면 적어도 그 징후의 일부나마 치유하려고 행한 칭찬할 만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현저하게 악화되어 왔다.
이러한 악화의 책임은 여러 가지 원인에 돌려진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개발 도상의 당사국들의 태만, 특별히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태만이 중대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선진국들의 책임을 못 본 체할 수는 없다. 그들은 자기네가 소속된 풍요한 세계로부터 격리된 나라들을 도울 의무를 늘상 느끼지 않았거나 적어도 느껴야 할 만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경제적 재정적 사회적 메커니즘의 존재를 고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메커니즘은 인간들에 의해서 조종됨에도 불구하고 흔히는 거의 자율적으로 움직이다시피 하며 소수의 부를 강화하고 나머지의 빈곤을 아울러 악화시킨다. 이 메커니즘은 직접 간접으로 선진국들에 의하여 조종이 되는 것으로 그 기능 자체가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한다. 그러나 결국은 저개발국들의 경제를 질식시키거나 좌우하기에 이른다. 뒤에 가서 이 메커니즘을 두고 윤리 도덕적 관점에서 주도 면밀한 분석을 해야 할 것이다.
[민족들의 발전]은 그 같은 체제하에서는 부자들의 부가 증대되는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은 여전하리라고 이미 예견한 바 있다.33) 이러한 예측이 들어맞았다는 증거로 소위 제4세계가 출현하였다.

17. 세계적으로 본 사회상이 제1, 제2, 제3, 심지어는 제4 세계라는 진부한 표현이 나올 만큼 분열된 표징을 보인다 할지라도 그 세계들의 상호 의존은 여전히 긴밀하다. 이 같은 상호 의존을 도덕적 요구에서 분리시킬 경우에 그 약자에게는 파탄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오직 도착적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이 메커니즘의 내부에 들어 있는 일종의 추진력의 결과로 말미암아 이 상호 의존은 부강국 내에서도 부정적인 효과를 유발한다. 바로 이들 국가에서, 비록 정도는 약하지만, 저개발의 더욱 특이한 양상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개발이라는 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동으로 혜택을 나누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꾸준한 진보를 보이는 지역에서까지도 퇴보의 과정을 겪거나 둘 중의 하나임이 분명해진다. 이것은 진정한 개발의 성격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셈이다.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참여를 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참다운 개발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개발은 선진국들까지도 점차 타격을 미치고 있는데 저개발의 특이한 표징들 가운데 비극적인 상황을 보이는 특별한 표징 둘을 들 수 있다. 첫째는 주택의 위기이다. 국제 연합이 세계 무주택자들의 해로 선언한 이 해에 적절한 주거가 없거나 아예 집이 없는 수백만 인간들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의 양심을 일깨워 개인이든 가정이든 사회든 부정적인 결과를 끼치는 이 심각한 문제에 해결을 찾기 위함이다.34)
주택의 결핍은 전반적으로 겪고 있는 일이며 점증하는 도시 집중의 현상에 크게 달려 있는 문제이다.35) 최고도로 발전하였다는 국민들까지도 글자 그대로 머리 위에 지붕이 없이, 또는 지붕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도 부적당하여 도무지 지붕이라 일컬을 수조차도 없는 상황에서 글자 그대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개인들과 가정들의 서글픈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주택의 결핍은 그 자체가 극도로 심각한 문제일 뿐더러, 그 성격이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또는 단순하게 인간적이라 할 일련의 그 모든 과오들의 표지 내지는 요약이라고 보아야 한다. 문제가 얼마나 광범위한지 생각한다면 우리가 민족들의 참다운 발전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쉽사리 알 수 있을 것이다.

18. 대다수 국가들에 공통된 다른 지표는 실업 또는 불완전 취업의 현상이다.
공업 국가들에 대두되는 이 문제의 현실성 내지 점증하는 심각성은 누구나 아는 바이다.36) 개발 도상국에서는 그 높은 인구 증가율과 그중의 태반이 젊은층이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실업 문제가 경종을 울리는 상황인 데 비해서, 고도의 경제적 발전이 된 국가에서는 노동원이 감소되고 있는 추세이며 그로 말미암아 취업의 기회가 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줄고 있다.
이 현상 역시 남녀 인간이 지녀야 할 자부심을 상실하는 굴욕감으로 인해 개인과 사회에 일련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데, 지난 20년을 두고 추진되어 온 개발의 성격 내지 유형에 관해서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회칙 맛노동하는 인간맜의 다음 말이 참으로 적절할 것 같다. “이 발전에 있어서 건설적인 요소, 교회가 천명해 왔고 이를 위해…끊임없이 기도해 온 정의와 평화의 정신으로 그 발전을 평가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모든 노동의 객관적인 목적성에서 그리고 모든 노동의 주체, 즉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노동에 대한 지속적인 재평가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를 극도로 당혹하게 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 사실이란…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실직 또는 불완전 고용 상태에 있고…이는 개별 정치 공동체 안에 그리고 대륙적 세계적 차원의 관계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극히 중대한 핵심 문제인 노동과 고용의 조직과 관련하여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해 주는 사실이다.”37)
이 두번째 현상은 앞에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갈수록 심화될 것으로서, 오늘날 목격하고 있는 민족들의 발전의 위상과 성격에 관한 극히 부정적인 표징이다.

19. 세번째 현상도, 비록 어디서나 목격하는 것은 아니지만, 똑같이 극히 최근의 특성을 띠는 것으로 선진국과 저개발국 사이의 상호 의존을 가리키는 지표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것은 국제 부채의 문제로서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가 이미 관계 문서를 공표한 바 있다.38)
이런 종류의 문제 - 그 점증하는 심각성은 이미 [민족들의 발전]에서 예측한 바 있다39)- 와 민족들의 발전이라는 문제 사이에 있는 긴밀한 연관을 아무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개발 도상국 국민들로 하여금 풍부하게 쓸 수 있는 자본의 제공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만든 동기는 그 돈을 개발 계획에 투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다. 그리하여 자금의 공여와 이것을 부채로 받아들이는 일은 개발에 기여하는 것으로, 비록 아마도 현명하지 못하고 때로는 성급한 일이 없지 않으나 그 자체로는 바람직하고 정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채무국 내부에서와 국제 금융 시장 내에서 정황이 바뀌어짐으로써, 짐짓 개발에 기여하는 것으로 채택된 수단이 역효과의 메커니즘으로 변신하였다. 이것은 채무국들이 부채를 이용하기 위해서 자기네 생활 수준을 개선하거나 적어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수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같은 이유에서 그들이 새로운 재정 투자, 앞에서와 똑같이 불가결한 재정 투자를 얻어내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통해서 민족들의 발전을 의도한 수단이 개발을 저지시키는 장치로 바뀌었고 어떤 경우에는 저개발을 악화시키기도 하였다.
최근의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의 문서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40) 이러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민족들의 상호 의존의 도덕적 성격을 두고 숙고하도록 요청한다. 아울러 같은 노선에 입각하여 개발 문제에 협력하는 일에 있어서 도덕적인 원리에서 오는 요구와 조건을 두고 깊이 숙지하도록 요청한다.

20.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지표들은 커다란 희망을 고무시켰음에도 그와 상반되는 지연, 개발 과정에 있어서 심각한 지연이 보이는 이유를 검토한다면 우리의 관심은 오늘의 상황에 관한 정치적인 이유로 쏠리게 된다.
참으로 복잡 다단한 요인들이 교차하는 문제이므로 우리가 여기서 포괄적인 분석을 행할 수 있을 것으로 바라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래의 정치 판도에 일어난 충격적인 사실, 민족들의 발전이라는 전향적인 움직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실을 모른 채 넘어갈 수도 없다.
본인이 하는 말은 대치되는 두 블록의 존재이다. 대개는 동서 진영이라고 일컫는다. 이런 서술이 나오는 이유는 단순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고 말 그대로 지정학적인 것이다. 이 두 블록은 제각기 다른 국가들, 또는 국가군을 자기에게 동화시키거나 주변에 모으고자 한다. 물론 그 귀속이나 참여의 정도가 다양하다.
그 대치는 우선 정치적이다. 각 블록이 사회를 조직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으며 다른 블록과는 양자 택일의 상반된 체제로 의식하는 까닭이다. 그 대신에 정치적 대립은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띠는 더욱 깊은 대립에서 기원한다.
서방 진영에는 자유 자본주의의 원리에서 역사적으로 영감을 받은 체제가 있는데 자본주의는 지난 세기에 산업화와 더불어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동방 진영에는 마르크스 집단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체제가 존재하는데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 관한 특수한 해독에 비추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여건을 해석한 데서 유래한다. 두 개의 이데올로기는 제각기 인간과 그의 자유 그리고 사회적인 역할에 관한 상이한 견해에 근거를 두고서 경제 영역에서 정반대되는 노동 조직의 형태와 소유 제도 특히나 이른바 생산 수단에 관련된 소유 제도 형태를 주창하였고 지금도 촉진하고 있다.
적대적인 체제와 세력권이 발전하고 각기 자기 고유한 선전 수단과 교조를 갖추고 있는 이상,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불가피하게 점증하는 군사적 대립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는 두 개의 군사력의 블록을 만들어내어 서로 상대방의 제패를 의심하고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
국제 관계 역시 이 ‘블록의 논리’, 그리고 거기서 오는 ‘영향권’이라는 결과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부터 시작된 두 블록간의 긴장은 그 뒤의 40년을 송두리째 지배하였다. 때로는 ‘냉전’의 형태를 취하고 때로는 지역 분쟁을 조종하는 식으로 ‘대리 전쟁’의 형태를 취하였고 때로는 노골적인 전면전의 위협을 갖고서 국민들의 마음을 전율과 불안 속으로 몰아넣곤 하였다.
현시점에서는 이 위험이 물러간 듯하지만 완전히 자취를 감추지는 않았으며 핵무기 중의 한 가지 종류를 파괴하기로 1차 협정이 맺어지기는 하였으나 블록의 존재와 대립은 여전하고 지금도 세계 판도를 특징짓는 불안한 현실로 남아 있다.

21. 이것은 개발 도상국들에 관련된 국제 관계에서 각별하게 부정적인 결과를 자아낸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동서간의 긴장은 두 가지 상이한 개발 수준간에 일어나는 대립이 아니고 개인과 민족들의 발전에 관한 두 가지 상이한 개념들간의 대립이기 때문이며, 양개념 모두가 불완전하고 철저한 수정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이런 대립이 개발 도상국들에 전가되고 그 때문에 남과 북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경제 수준의 격차를 더욱 확대하는 역할을 하고, 이런 격차는 선진 세계와 후진 세계라는 두 세계 사이의 거리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정황으로 말미암아 이 교회의 사회 교리가 자유 자본주의와 마르크스 집산주의 양편에 다같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발이라는 견지에서 자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체제가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과 민족들의 진정하고 총체적인 개발에 좋은 조건을 마련하거나 촉진할 만큼 어떤 방도로 또 어느 범위까지 변화와 쇄신을 받아들일 여지가 있는가? 실상 이런 변화와 쇄신은 시급할 뿐더러 만인에게 공동의 발전을 이룩하는 데에 본질적인 것이다.
최근에야 독립을 성취한 국가들, 그리고 자기 고유의 문화적 정치적 신원을 확립하려고 노력하는 국가들, 따라서 부강하고 발전된 모든 국가들로부터 효과적이고 편파성 없는 원조를 필요로 하는 국가들이 이데올로기의 갈등에 말려들거나 때로는 그 밑에 짓눌리게 되며, 그것은 불가피하게 내부적인 분열을 조성하고 심하면 전면적인 내란으로 번지고는 한다. 이런 현상은 개발을 위한 투자와 원조가 본연의 목적을 이탈하여 그런 충돌을 조장하는 데에 쓰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 투자나 원조에서 혜택을 입어야 할 국가들의 이익과는 달리, 흔히는 정반대로 악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들 중의 다수가 일종의 신식민주의 형태에 희생물이 될 위험을 점차적으로 의식하고 거기서부터 탈출하고자 시도한다. 바로 이러한 자각 때문에 그 많은 곤란과 때로는 모순 속에서도 국제 비동맹국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운동은 그 긍정적인 측면에서 각국민으로 하여금 자기의 고유한 동질성, 독립, 안녕 그리고 평등과 연대성에 입각하여 만인에게 돌아갈 재화에 참여할 권리 등을 효과적으로 주창하고자 할 것이다.

22. 이상에서 고찰한 바에 비추어 우리는 지난 20년에 관한 더욱 명확한 사진을 볼 수 있게 되며 북반구에서 일어난 충돌, 말하자면 동서간의 충돌이 남반구의 후퇴 내지는 침체의 중대한 원인이 됨을 확연히 파악할 수가 있다.
개발 도상국들이 만인에게 돌아가야 할 재화와 서비스에 당당하게 참여하는 방향으로 진보하는 문제에 있어서 자율적인 국가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기계의 한 부품 또는 거대한 바퀴의 톱니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사회 홍보의 영역에서도 일어나는 문제로서, 대개 북반구에 있는 센터들에 의해서 운영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국가들에 대해서는 우선을 거의 두지 않을 뿐더러 그 국가들이 처한 문제 또는 그들의 문화적 특질에 관해서도 합당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회 홍보를 장악하고 있는 기관들은 생활과 인간에 관하여 빈번하게 왜곡된 관점을 강요하기가 예사이며 따라서 참다운 개발의 필요에 호응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두 블록 다 자체 안에 보통으로 말하는 제국주의, 아니면 일종의 신식민주의 형태로의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역사를 포함하여 전체 역사가 가르치듯이, 그들이 빈번히 빠지는 유혹이 이것이다.
바로 이 비정상적인 상황, 전쟁 그리고 터무니없이 과장된 안보 의식의 결과로 만인이 인류의 공동선을 위하여 한데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가려는 충동을 말살시키고 만다. 그뿐 아니라 평화로운 민족들이 만인을 위해 있는 재화에 권리 당당하게 접근하지 못하게 방해를 받아 오히려 그들의 손해를 초래한다.
이렇게 볼 때에 세계의 현재와 같은 분열은 개발 도상국 또는 저개발국에서 저개발의 조건을 실제로 변혁하는 데 있어서 직접적인 장애물이다. 그렇지만 민족들이 언제나 자기 운명에 체념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군사 경비와 관료 제도 그리고 내부적인 비효율에 의해서 터무니없이 악화된 경제의 필요로 말미암아 현존하는 대립을 완화시키려는 절차가 생겨나고 유익한 대화와 평화를 위한 순수한 협력을 시작하려는 움직임이 만들어진다.

23. 무기 생산에 돌려지는 자원과 투자는 빈곤으로 추락해 가는 민족들의 비참을 덜어주는 데 쓰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주장은41) 두 블록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라는 호소를 더욱 절박하게 만든다.
오늘날에는 이 자원들이 각 블록으로 하여금 상대방을 제압하여 그것으로 자신의 안보를 보장한다는 식으로 쓰이고 있는 현실이다. 역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도적 역할을 할 가능성을 가진 국가들은 근본적으로 쓸모없는 이 왜곡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발전을 희구하는 민족들의 복지에 연대 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자기네 의무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게 된다.
국가들 사이의 지도적 역할은 더욱 넓게 또 더욱 관대하게 공동선에 이바지할 가능성과 이바지하려는 의사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함이 시의 적절하며 결코 과장이 아님을 천명하는 바이다.
한 국가가 스스로 폐쇄를 하고 국가들의 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월등한 위치와 거기서 오는 책임을 감당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그 국가는 자신의 도덕적인 의무를 중대하게 손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정황에서 현격하게 나타나는 사실로 거기서 신앙인들은 신적 섭리의 안배를 분별해 내고 있으며 섭리가 국가들을 이용하여 그 계획을 실현하시고 “만백성의 계교를 부수시는”(시편 33,10) 모습을 보게 된다.
서방이 갈수록 이기적인 고립의 형태에 자신을 맡겨버린다는 인상을 준다든가, 동방이 자못 의심스러운 명분을 내세우면서 인간의 비참상을 덜어주어야 하는 사명에 협력할 의무를 모르는 체할 때에, 그것은 단지 인류의 정당한 기대를 배신하는 것뿐 아니라 - 이런 배신은 예측 못할 결과를 불러올 전조이기도 하다- 그 도덕적인 임무를 유기하는 것이다.

24. 만일 무기의 생산이 인류의 필요와 그 필요를 충족시킬 만한 수단을 이용하는 데에 현세계의 심각한 무질서라고 한다면, 무기 거래는 똑같이 부끄러워해야 할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아니, 후자를 두고는 도덕적 판단이 훨씬 엄하여야 마땅하다.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이것은 국경이 없는 장사이며 심지어 블록의 장막까지 넘나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하면 동방과 서방의 분단을 초월할 줄까지도 알며 무엇보다도 남북간의 분단까지도 넘나들어 남반구를 좌우하는 각급 분야에까지 판로를 뚫고 들어가는데 이 점이야말로 참으로 심각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이한 현상에 직면하게 된다. 경제 원조와 개발 계획은 도저히 극복 못할 이데올로기의 장벽에 부딪히고 관세와 무역 장벽에 부딪히는 데에 비해서 무기만은 그 출처가 어디든 상관없이 거의 완전한 자유를 구가하면서 전세계를 휩쓴다. 그리고 국제 부채에 관해서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가 최근에 발표한 문서가 지적한 바와 같이,42) 많은 경우에 선진국에 의해서 대부된 자본이 저개발 세계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데 사용되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만약 여기에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축된 원자 무기로 대표되는 저 위험, 가공스럽고 전세계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위험을 보탠다면, 다음과 같은 논리적인 결론이 나오게 된다. 경제가 발달된 세계를 포함해서, 오늘의 세계에서는 지배적인 상황이 진정한 개발에 대한 관심 쪽보다는 죽음을 향하여 우리를 몰아가게 결정되어 있다. 회칙 맛민족들의 발전맜에서는 참된 진보야말로 만인을 ‘더욱 인간다운’ 삶으로 이끌어갈 것으로 예시했다.43)
이러한 사태에서 나오는 결과는 현대 세계의 불균형과 분쟁을 특징짓고 폭로하는 상처에서 적나라하게 엿볼 수가 있다. 전쟁, 자연 재해, 각종 박해와 차별이 집과 직장, 가정과 조국을 박탈당한 수백만 피난민들이 바로 그 상흔이다. 이 많은 인간들의 비극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의 희망 없는 얼굴, 갈라지고 야박한 세계에서 안주할 곳을 더 이상 발견 못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생생히 반영되어 있다.
또한 우리는 현대 세계의 고통스러운 다른 상처 하나를 눈감고 지나칠 수가 없다. 테러라는 현상이다. 사람을 죽이고 무차별하게 소유물을 파괴하고 공포와 불안의 분위기를 조성하며 때로는 인질까지도 포함하는 활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록 때로는 더 나은 사회를 창조하겠다는 이념이나 원의가 그 동기로 작용한다 할지라도, 테러리즘의 행동은 결코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 같은 결정과 그 같은 행동이 그 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죄한 사람들을 대량 살륙하는 데로 나아가면서, 더 궁극의 이유를 지향하는 선전적인 목적을 갖는 것처럼 주장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것은 더욱 정당화될 수가 없다. 더구나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단순히 죽일 목적에서 살인을 범하는 경우는 더욱 나쁘다. 이처럼 가공할 고통스러운 정황 앞에서 본인이 수년 전 했던 그 말이 여전히 맞는 말이요 이를 다시 여기서 되풀이하고자 한다. “증오에 의해서, 무방비 상태의 인간들을 죽임으로써, 테러리즘의 수단에 의해서 해결을 찾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금하는 바이다.”44)

25. 인구 문제에 관해서, 또 오늘날 이 문제를 두고 말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하여야 할 것 같다. 바오로 6세가 그의 회칙에서 언명하고45) 본인도 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에서46) 주장한 바에 근거하여 말을 하겠다.
인구 문제가 있고 특히 남반구에 인구 문제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으며, 그것이 개발에 어려움을 조성하고 있다. 그런데 북반구에서는 이 문제의 성격이 역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즉시 덧붙여야 하겠다. 이 지역에서는 우려의 원인이 출생률의 저하이며 그것이 인구의 노령화라는 파급 효과를 내고 생물학상으로 이를 회복시키기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 자체로는 이것도 개발에 지장을 줄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런 곤란이 오직 인구 성장에서만 유래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도 옳지 못하듯이, 모든 인구 증가가 꾸준한 개발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도 바른말이 아니다.
다른 면에서, 여러 국가에서 정부가 산아에 반대하는 조직적인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해당 국가의 문화적 종교적 독자성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진정한 개발 자체에도 상반된 것이다. 흔히는 이런 캠페인이 해외로부터 오는 압력의 결과이고 해외에서 오는 재정으로 추진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재정적 경제적 원조와 보조를 제공하는 조건이 되는 수도 있다. 여하튼 당사자 남녀의 선택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 절대 결여되어 있으며, 그들이 이 새로운 형태의 압제에 굴종하도록 강박하려는 의도에서, 당사자들에게 경제적인 압력을 위시한 용납 못할 압력을 가하고 있다. 대개 그런 학대를 받는 사람들은 가장 빈곤한 주민들이며 때로는 그것이 인종 차별의 형태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이거나 인종 개량이라는 똑같이 인종 차별의 성격을 띠는 형태로 조장된다.
이 사실도 강력한 단죄를 받아야 할 것으로 진정 인간다운 발전에 대한 그릇되었거나 전도된 관념의 표지이다.

26. 주로 부정적인 각도에서 현대 세계에서 보이는 개발의 현황을 개괄하였는데, 만일 긍정적인 측면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고찰이 미완성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첫번째 긍정적인 신호는 수많은 남녀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자기의 존엄성과 각자의 존엄성에 대한 완전한 각성이다. 이 자각이 표현되기로는, 예를 들어 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생한 관심이며 인권의 유린에 대해 더욱 격렬하게 반발하는 행동이다. 그 표시 중의 하나가 근자에 결성된 그 많은 사설 단체이니 어떤 것은 범세계적인 회원을 갖고서 이 예민한 영역에서 국제적으로 발생하는 바를 면밀하게 또 권장할 만한 객관성을 갖고서 감시하고 있다.
이 방면에서는 40여 년 전에 국제 연합에 의해서 선포된 인권 선언이 끼친 영향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권 선언이 존재하고 국제 공동체에 의해서 점차 채택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이 의식이 점증하는 증거이다. 또한 인권의 분야에서 국제 연합 또는 다른 국제 기구들이 창설한 다른 사법적인 수단들을 들 수 있겠다.47)
이러한 각성 문제는 개인들에게만 해당하지 않고 국가들과 민족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이니 그들은 특정한 문화적 주체성을 갖고서 자신의 귀중한 유산을 보존하고 자유롭게 발휘하고 촉진하는데 특히 예민하다.
이와 동시에 분열되고 각종 분쟁으로 얼룩진 세계에서는 철저한 상호 의존에 대한 확신, 그 상호 의존을 용납하여 도덕적인 차원으로 전이시킬 연대성이 필요하다는 확신이 증가하고 있다. 오늘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인간들이 공동의 운명으로 서로 결속되어 있음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또 만인에게 닥칠 재앙을 피하려면 이 공동 운명을 함께 건설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식이 팽창하고 있다. 불안과 공포, 현대 세계의 전형적인 현상이라 할 마약 같은 도피적 현상 한가운데서 하나의 이념이 서서히 부상하고 있으니, 우리 모두가 부름받은 선이며 우리 모두가 동경하는 행복은 모든 사람 편에서 노력과 투신을 하지 않고는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여기서는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을 뿐더러 따라서 개인적인 이기심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자리에서 언급할 바는, 낙태와 안락사 등에 의해서 생명을 파괴하는 온갖 유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표시로 평화를 위한 관심이 동시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평화는 불가분한 것이라는 의식도 대두되고 있다. 모두가 평화를 누리거나 아무도 못 누리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평화는 갈수록 정의를 엄정하게 존중하도록 요청하며, 따라서 진정한 개발의 성과를 공정히 분배하도록 요청한다.48)
오늘의 긍정적인 표지 중에는 이용 가능한 자원의 한계에 대해서, 자연의 주기와 통일성을 존중하여야 할 필요에 관해서, 개발을 계획함에 있어서 자연에 관하여 선동적인 관념을 갖고서 이 주기와 통일성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에 관해서 자각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이것을 가리켜 생태학적 관심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정치가, 정치학자, 경제학자, 노조 운동가, 학계의 인사들과 국제적인 공무 종사자들의 관대한 투신 - 그들 중의 상당수는 종교 신앙에 의해서 영감을 얻는다 - 이다. 그들은 적지 않은 일신상의 희생까지 감수하면서 세계의 병폐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며,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평화의 복지를 향유하고 이름에 맞갖은 ‘생활의 질’을 향유할 수 있도록 온갖 방도로 헌신한다.
위대한 국제 기구들, 그리고 수많은 지역적인 기관들이 이 방면에 적지 않게 이바지한다. 그들의 단합된 노력은 더욱 효과적인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바로 이러한 기여들에 힘입어 제3세계의 일부 국가들은 수많은 부정적 인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로 식량의 자급에 이르렀거나, 품위를 갖고 살아가며 활동 인구를 위해 고용의 자원을 마련할 만큼 산업화의 수준에 이르는 데 성공하였다.
그렇게 본다면 현대 세계에 있어서 모든 것이 부정적이지는 않으며 또 그럴 수도 없다. 천상 아버지의 섭리가 사랑에 찬 시선으로 우리의 일상 염려까지 지켜보고 계시는 까닭이다(마태 6,25-32; 10,23-31; 루가 12,6-7.22-30 참조). 오히려 우리가 언급해 온 적극적 가치들은 새로운 윤리적 관심을 입증하는 것이며 특히나 개발과 평화와 같은 커다란 인간 문제들에 대해서 참신한 윤리적 관심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우리가 반포 주년을 기념하고 그 가르침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는 회칙의 노선에 따라, 인간 발전의 참된 발전에 관하여 생각하게 하였다.


IV. 진정한 인간 발전

27. 회칙이 우리로 하여금 현대 세계를 두고 검토하도록 요청한 결과, 우리는 개발이 일직선으로 나가는 과정이 아님을 맨 먼저 감지하게 된다. 물론 일정한 조건이 마련되면 인류는 경계가 없다고 할 정도로 완성을 향해서 신속하게 진보를 해나감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자동적이고 동시에 무한정한 과정처럼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49)
이 같은 사상은 원래 계몽주의로부터 유래한 철학적인 개념과 연관을 가지면서 ‘진보’의 개념과 결부된 것이지, 특정하게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 ‘개발’과 결부된 것이 아니다.50) 따라서 지금은 이런 사상이 심각한 의심을 사고 있으며, 실제로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라는 비극을 겪고 민족들을 송두리째 말살하고자 계획하였고 부분적으로 그 목적이 달성되기까지 한 사실, 그리고 원자 무기에 의한 전멸의 그림자가 거대한 모습을 하고 전면에 나타나는 시점에서 의혹을 살 수밖에 없다. 순진한 기계론적 낙관주의는 이제 인류의 운명을 생각하는 근거 있는 우려로 대체되었다.


 

28. 그러나 이와 동시에 개발이라는 단어와 연관된 ‘경제적’ 개념도 위기에 들고 있다. 오늘날에는 단순한 재화나 서비스의 축적은, 비록 다수의 복지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 행복의 실현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훌륭한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 따라서 최근에 컴퓨터 과학을 위시해서 과학과 기술 공학으로 제공되는 여러 가지 실제적인 혜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혜택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을 온갖 형태의 예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최근 몇 년 간의 경험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인간의 처분에 맡겨진 재화와 잠재력의 중요한 모든 체제가 도덕적인 식견에 의해서 지도되고 인류의 진정한 선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유도되지 않으면, 그것이 쉽사리 인간에게 대항하는 양상으로 변질되어 인간을 억압하게 된다.
가장 최근에 관한 당혹스러운 결론은 우리에게 일깨우는 바 많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저개발의 온갖 참상과 나란히 전자와 똑같이 용납 못할 초발전(超發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전자와 마찬가지로 후자도 선한 것에, 그리고 참된 행복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까닭이다. 이 초발전이란 일정한 사회 집단을 위해 온갖 물질 재화를 지나칠 정도로 확보해 주는 것으로 성립하는데, 그것 때문에 사람들을 자칫하면 ‘소유’의 노예, 즉각적인 충족의 노예로 만든다. 여기서는 이미 소유한 것을 증식시키는 일, 또는 이미 소유한 것을 다른 것과 더 좋은 것과 끊임없이 대치시키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이 안중에 없다. 이것이 이른바 ‘소비’의 문명 또는 ‘소비주의’라고 하는 것으로, 버리고 낭비하는 것으로 소일하게 만든다. 이미 소유하고 있지만 더 좋은 무엇에 의해서 그 지위를 빼앗긴 물건이 있다면 그냥 처분해 버리고 그 물건이 영구적인 가치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나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고려에 넣지 않는다.
순수한 이 소비주의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데서 오는 서글픈 결과는 우리 모두가 직접 체험하는 바이다. 제일 먼저 천박한 유물 사상이며 동시에 철저한 불만이 나타난다. 광고의 홍수와 끊임없이 쏟아지고 유혹하는 상품의 홍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는 한, 인간은 소유를 많이 하면 할수록 욕망이 더욱 커진다는 것을 머지않아 깨닫기에 이르고, 인간의 깊은 염원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채로 남고 아마도 오히려 질식되어 감을 느끼게 된다.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은 오늘날 누누이 강조되는 바와 같이, ‘무엇을 갖는 것’(having)과 ‘어떤 인간이 되는 것’(being) 사이에51)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같은 사상은 그보다 먼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서 명확하게 언명된 바 있다.52) 어떤 대상물과 재화를 ‘갖는 것’은, 그것이 그 주체의 ‘사람됨’을 성숙시키고 풍부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하지 못하는 한, 다시 말해서 인간적 소명 그대로를 실현하는 데 공헌 못하는 한, 그 자체가 인간 주체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물론 ‘갖는 것’과 ‘인간이 되는 것’ 사이의 차이, 소유한 물건의 축적이나 대치를 곧 ‘사람됨’의 가치로 비교하는 데서 오는 위험을 바로 양자 사이의 모순처럼 여길 필요는 없다. 현대 세계에 있는 가장 큰 불의들 중의 하나는 바로 다음 사실에 있다. 많이 소유한 자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거의 아무것도 소유 못한 이들이 다수라는 것이다. 원래는 만인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분배가 잘못되어 있는 불의를 말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도식이 만들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많이 가진 자들은 더욱이나, 참으로 ‘사람됨’에 성공을 못하고 있으니 이는 가치의 위계를 전도시켜 ‘갖는 것’을 숭배하느라고 지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 조금밖에 못 갖거나 또는 아무것도 못 가진 다수 인간들은 자기네 기본적인 인간 소명도 실현하는 데 성공을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필수적인 재화마저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은 ‘갖는 것’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재화의 질과 바른 위계를 고려 않고 소유를 하는 거기에 있다. 질과 위계는 재화와 그 용도를 인간의 ‘사람됨’과 그의 진정한 소명에 귀속시키는 데서 발생한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개발이 비록 필연적으로 경제적 차원을 갖기는 하지만 개발이 가능한 대로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인간이 되는 데 필수적인 재화의 공급을 보장하여야 하기 때문에 개발은 그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만약 개발이 그 차원에 국한되고 말면, 그것이 혜택을 주어야 할 그 사람들에게 도리어 반역을 하고 나선다.
온전한 개발, 다시 말해서 ‘더욱 인간적’이고 남녀 인간들에게 그 경제적인 요구를 거절하지 않은 채로 진정한 소명의 차원에 머물게 할 수 있는 개발의 제반 특성은 바오로 6세에 의해서 묘사된 바 있다.53)


 

29. 개발이 경제적인 것만이 아닌 이상, 인간의 총체성에 비추어서 보는 인간의 실제와 소명에 의거하여, 다시 말해서 인간의 내면적인 차원에 입각하여 개발을 측정하고 방향을 정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은 피조물인 재화와 산업의 생산품을 필요로 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이 같은 재화와 생산품은 과학과 기술 공학의 진보에 의해서 부단히 풍요해지고 있다. 그리고 물질 재화의 이용도가 증대되면 그것이 단지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기도 한다. 물질 재화가 위태로운 측면을 띠고 인위적인 수요가 출현하기도 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우리의 처분에 맡겨진 새로운 재화와 자원을 발굴하고 이용하는 노력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그리고 인간 소명에 대한 응답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 소명이 충만하게 이루어진 것은 그리스도에게서였다.
그렇지만 진정한 발전을 성취하려는 노력에 있어서 우리가 시선을 놓쳐서는 안될 점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그분과 비슷하게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창세 1,26 참조)의 특정한 본성에 깃들어 있는 어떤 차원이다. 그것은 인간이 육체적이자 정신적인 본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인데, 둘째 창조 설화에서 이것이 상징적으로 두 요소로 상징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재료로 쓰시어 인간의 신체를 빚으신 흙과 하느님이 인간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신 생명의 숨결이다(창세 2,7 참조).
그리하여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도 친근성을 갖기에 이르렀다. 인간은 피조물들을 이용하고 그것들과 필수적인 관계를 갖도록 부름받았다. 창세기 설화가 말해 주듯이(창세 2,15 참조), 인간은 낙원에 갖다 놓이면서 낙원을 가꾸고 지키는 임무를 받았고 하느님께서 인간의 지배하에 두신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 월등한 존재가 되었다(창세 1,25-26 참조).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인간은 하느님의 뜻에 복속하여야 마땅하며,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불사 불멸을 언약하시는 가운데에(창세 2,9; 지혜 2,23 참조), 사물에 대한 그의 사용과 지배에 한계를 설정하신다(창세 2,16-17 참조). 그리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면서 하느님과도 진정한 친근성을 갖는다.
이 같은 가르침을 근거로, 개발은 피조물 및 인간 산업의 생산품에 대한 이용과 지배와 무분별한 소유에 있지 아니하고 그 소유와 지배와 사용을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사실, 불멸에로 불린 자기 소명에다 귀속시키는 거기에 있다. 이것이 인간의 초월적 실재이며, 이 실재는 태초로부터 인간 부부 곧 남자와 여자가 함께 향유하던 바이고(창세 1,27 참조), 따라서 근본적으로 사회적 성격을 갖는다.


 

30. 그렇게 본다면 개발의 개념은 결코 속인에게 해당하는, 속적인 무엇이 아니며, 그 고유한 사회 경제적 측면을 간직한 채로, 인간 소명의 본질적인 차원의 현대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말하자면 부동적이고 정적인 존재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성서에 제시되어 있기로는 인간의 맨 처음 초상화는 그를 하나의 피조물로, 모상으로 소개하는데, 이것은 그의 기원, 그를 구성하는 어떤 근사성에 의해서 인간의 가장 깊은 실재를 정의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남녀로서의 인간 안에 씨앗과 요청처럼 심겨진 것으로 장차 각 개인에 의해서와 부부에 의해서 성취될 특수한 사명이라고 하겠다. 그 사명은 다른 피조물들을 ‘지배’하고 ‘동산을 가꾸는’ 것이다. 이 일은 신법에 복종하는 틀 속에서, 따라서 받은 바 모상을 존중하여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이 모상은 그의 지배권의 확고한 근거이며, 이 지배권은 인간이 완성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인간에게 귀속된 것이었다(창세 1,26-30; 2,15-16; 지혜 9,2-3 참조).
인간이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그분의 규율에 복종하기를 거절할 적에는 자연도 인간에게 거역하고 그를 더 이상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니 이것은 인간이 자신 안에 있는 신적인 모상을 변색시켰기 때문이다. 아직도 피조물에 대한 소유권과 사용권을 주장하는 것은 유효하지만, 죄를 지은 뒤에 그 권리의 행사가 한결 어려워지고 고통에 찬 것이 된다(창세 3,17-19 참조).
사실 창세기의 그 다음 장을 본다면 카인의 후손들이 ‘도시’를 건설하고 예술(음악)과 기술(쇠를 정련하는 기술)을 부리기 시작하였고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창세 4,17-26 참조).
성서가 묘사하는 인류의 역사는, 인간이 죄에 떨어진 다음에도, 꾸준한 성취의 역사이며, 비록 늘 죄로 말미암아 의문을 자아내고 위협을 받기는 했어도, 태초에 남자와 여자에게 내리셨고(창세 1,26-28 참조) 그들이 받은 모상 속에 새겨진 신적인 소명에 호응하여 인간이 이 성취를 반복하고 증대시키고 확장해 간 역사이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논리적인 결론은, 적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 편에서는, 오늘의 ‘개발’이 창조에서 시작된 ‘이야기’, 창조주의 뜻에 불충함으로 말미암아 부단히 위험을 겪고 특히나 우상 숭배의 유혹 때문에 위기를 당하는 이야기의 한 토막이라고 보아야 한다. 어떻든 이 ‘개발’은 최초의 전제 사항과 근본적으로 부합된 것이다. 그 전인성에 비추어본 인간의 처지, 그리고 모든 인간의 처지를 향상시키려는, 힘들고도 고귀한 사명을 포기한다든가, 더군다나 그 투쟁이 힘들고 꾸준한 노력이 요구된다는 핑계로 단념한다든가, 또는 단순하게 실패의 경험과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유에서 손을 든다면, 그 인물은 창조주 하느님의 뜻을 배반하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는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서 일하여야 한다는 인간의 소명과 관련시켜 본인이 언급한 바 있다. 개발에 있어서 언제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54)
사실 주 예수께서도 달란트의 비유에서 받은 바 재능을 숨겨두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엄한 취급을 받는지 강조하신 바 있다.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을… 알고 있었느냐? 저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마태 25,26-28). ‘거두고’ ‘모으는’ 일은, 성과를 내라고 하여 하느님의 선물을 받은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가 만일 그 일을 않는다면 우리에게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엄한 말씀을 깊이 묵상한다면, 우리는 저 임무에 더욱 결연하게 투신하기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인간 전체와 전인류의 완전한 발전”55)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시급한 것이기 때문이다.


 

31. 구원자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은 내면으로부터 개발의 성격을 비추어주는 것이지만 협력의 과업에 있어서도 우리의 지침이 되어준다. 사도 바오로가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며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1,15-16)고 한다. 사실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하고” 있으니,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다”(1,20).
하느님의 이 계획, 아버지의 완전한 ‘모상’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1,18)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는 이 계획의 일부가 곧 우리의 역사이다. 인간 조건을 고양시키고자, 또 우리가 걷는 길에 부단히 솟아오르는 장애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개인적 집단적 노력으로 점철된 역사이다. 이렇게 해서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안에 있고” 또 그분이 “당신의 몸인 교회”에 전해주시는(1,18; 에페 1,22-23 참조) 충만함에 참여하게 만든다. 동시에 죄는 언제나 우리를 덫으로 걸어넘기려 하고 우리의 인간적 성취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화해’에 의해서 정복되고 구제된다(골로 1,20 참조).
여기서 전망은 일약 확대가 된다. ‘무한한 진보’라는 꿈이 다시 등장하고 그 꿈은 그리스도 신앙에서 조성된 새로운 안목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변혁된다. 그 새 안목은 우리에게 확신을 시켜주기를 진보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 하느님께서 태초로부터 결정해 두시기를,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셨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출되었다”(에페 1,7).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정복하기로 하셨고 우리의 더욱 큰 선익을 위하여 그것을 이용하기로 하셨으니,56) 그 선은 진보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을 무한히 초월한다.
비록 우리가 ‘저개발’과 ‘초개발’의 어두운 그림자와 결함 한가운데에서 투쟁을 하고는 있지만, 언젠가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되며(1고린 15,54 참조), “그때에는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이고”(15,24) 인간에게 보람 있는 모든 사업과 활동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단언할 수가 있다.
나아가서는, 신앙의 개념 자체가 교회가 왜 개발의 문제에 부심하는지, 왜 그 문제를 자신의 사목적 봉사의 임무로 간주하는지, 왜 모든 이를 상대로 진정 인간다운 개발의 성격과 특징들에 관해서 숙고하도록 촉구하는지 그 명분을 뚜렷이 해준다. 교회는 스스로 투신하여 다음 두 가지를 동시에 달성하고자 한다. 즉,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깃들어 있고 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에 나누어주신 충만함에로(골로 1,19 참조) 만물을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이바지하는 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성사’, 즉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주는 표지요 도구”57)가 되라는 자기 근본 소명에 응답하고자 한다.
어떤 교부들은 이 사상에 고취되어 역사의 의미라는 관념을, 그리고 인간 노동의 의미라는 관념을 특유한 방법으로 개진하였다. 즉, 역사와 인간 노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를 까마득히 초월하는 목표를 향하고 있으며, 반드시 그리스도의 사업과 연관하에 규정되는 것이다. 말을 달리하자면, 교부들의 가르침과 역사 및 노동에 관한 낙천적인 견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성취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이 되고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로 정향되면 될수록 영구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58)
그리하여 교회 가르침의 일부요 가장 오래된 관행이, 교회는 - 교회는 물론이요 그 성직자들과 그 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 그 소명으로 말미암아 가깝든 멀든 고통받는 사람들의 비참을 덜어주어야 하며, 단순히 교회의 ‘남는 것’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요긴한 것’을 갖고서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곤궁한 사람들의 처지에 임하여, 하느님께 드리는 경신례를 위해서 피상적인 교회의 장식이라든가 값비싼 비품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그런 사람들을 못본 체할 수가 없다. 그와는 정반대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지붕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런 재산들을 파는 일이 의무적이 될 수도 있다.59)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가치의 서열’, 소유의 권리에 관해서 ‘갖는 것’과 ‘사람됨’ 사이에서 가치의 위계이다. 더욱이나 소수의 ‘갖는 것’이 다른 많은 인간들의 ‘사람됨’을 손상시킬 경우에는 말할 나위도 없다.
그 회칙에서 바오로 6세는 사목 헌장에서 영감을 받아 바로 이 가르침의 노선에 서 있다.60) 본인으로서는 이 가르침의 심각성과 절박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으며, 주께서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힘을 주시어 이것을 실천에 옮기게 해주십사 기도드린다.


 

32. 민족들의 발전에 투신하는 의무는 이미 개인적인 임무가 아니며 더군다나 각 개인의 고립된 노력으로 이 발전을 성취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개인주의적인 성격의 무엇이 아니다. 남녀 인간 각자와 사회 및 국가에게 의무를 지우는 정언적 명령이다. 특히나 이것은 가톨릭 교회의 다른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에게 의무를 지우는 명령이며, 그들과 더불어 우리는 이 분야에서 협력할 자세가 완전히 되어 있다. 그런 뜻에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우리의 그리스도교 형제들에게 우리의 이니셔티브에 참여할 것을 초청하는 바이며, 동시에 우리도 그들의 이니셔티브에 협조할 태세가 서 있음을 공언함과 아울러 우리에게 오는 초대를 적극 환영하는 바이다. 완전한 인간 발전이라는 이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서 우리는 타종교들의 성원들과도 많은 일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며 실제로 여러 곳에서 그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인간 전체의 발전과 인간 모두의 발전에 협력하는 일은 사실상 모든 이가 모든 이에게 진 의무이며, 동과 서, 남과 북, 또는 오늘날 쓰이는 용어를 따른다면, 여러 ‘세계들’이 모두 참여하여야 할 의무이다. 그와는 반대로 만약 인간들이 그것을 어느 한 곳에만, 어느 한 세계에만 성취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른 사람들이 무시되어 버린다는 사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기네의 발전이 과장되고 오도되는 것이다.
민족들 또는 국가들은 자기네의 충만한 발전을 도모할 권리가 있으며, 이미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경제적 사회적 측면도 내포하면서도, 각자의 문화적 신원을 포함하고 초월적 세계에 대한 개방성을 포함하여야 한다. 개발이 필요하다는 사실까지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활 방식과 자기 종교 신념을 강제로 부과할 구실은 되지 못한다.


 

33. 아울러 인권을, 인격적 사회적 권리, 경제적 정치적 권리, 그리고 국가들과 민족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신장시키지 않는 개발 유형은 진정 인간에게 가치가 있는 것이 못된다.
오늘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경제적 요인에만 국한된 개발의 내면적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따위 개발은 쉽사리 인간과 그의 심원한 필요를 경제 개발과 이기적인 이윤 추구에다 종속시켜 버린다.
본연의 개발과 인권의 존중 사이의 내적인 관계는 개발의 도덕적 성격을 다시 한번 밝혀준다. 인간 각자의 자연적 역사적 소명에 상응한 인간의 진정한 고양은 재화와 서비스의 풍요만을 갈취함으로써, 또는 완전한 경제 기반(하부 구조)을 갖춤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존엄성에 기반을 두고 가정과 종교 사회를 위시해서 각 공동체의 고유한 정체에 기인하는 도덕적 문화적 정신적 요구를 엄정하게 존중하지 않을 때에, 그 밖의 모든 것 - 재화의 이용, 일상 생활에 응용되는 기술 자원의 풍부, 어느 정도의 물질적 복지의 수준 등 - 이 불충분함이 드러나고 끝에 가서는 경멸할 것으로 나타난다. 주께서 가치들의 참다운 서열에 모두가 주의를 기울이도록 촉구하신 말씀을 하실 적에 복음서에서 이것을 분명히 하셨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
진정한 개발은 남자나 여자, 어린이와 어른 그리고 노인 등 인간의 특정한 필요를 유지시키는 가운데에, 이 개발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그 책임을 지는 사람들 편에서는 만인의 권리와 각 사람의 권리의 가치들을 생생하게 의식하도록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각 개인으로 하여금 과학과 기술 공학이 제공하는 혜택을 완전히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존중할 필요도 의식하지 않으면안된다.
각국의 내부적 차원에서는 모든 인권의 존중이 극히 중대하며, 특별히 인간 존재의 모든 순간에 누릴 생명의 권리, 기본적인 사회 공동체로서 또는 ‘사회의 세포’로서 갖는 가정의 제반 권리, 고용 관계에 있어서의 정의, 정치 공동체의 생활에 고유한 권리들, 각자가 자기 고유한 종교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유를 위시하여 인간의 초자연적인 소명에 근거한 제권리가 존중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국제적인 차원에서는, 다시 말해서 국가들간의 관계 또는 오늘의 용어대로 여러 ‘세계’들간의 관계에서는 각 민족의 고유한 신원이 그 역사적 문화적 특성과 더불어 완전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이와 똑같이, 이미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언명한 바와 같이,61) 각 민족이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여야 할 것이며, 가난한 라자로처럼 문밖에 앉아 있고 “더군다나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는”(루가 16,21) 정황이어서는 안된다. 민족도 개인들도 기본적인 평등을 향유하지 않으면 안되며,62) 이것이 예컨대 국제 연합 헌장의 기본이기도 하다. 이 평등은 모두가 완전한 발전의 과정에 참여할 권리의 토대가 된다.
개발이 순수한 것이 되려면, 연대성과 자유의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 어떤 명분으로도 그중 하나를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개발의 윤리적인 성격과 그 필수적인 촉진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니, 인간성에 고유한 진리와 선의 질서에서 유래하는 모든 요청들을 더할 나위 없이 엄격하게 존중할 때에는 이것이 제대로 강조가 되는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신자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요 하느님 자신인 진리와 선을 나누어 누리도록 불림받은 존재라는 가르침을 받고 있으므로, 개발을 위한 투신과 그 응용이 이 ‘모상’의 유일 무이한 존엄성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제외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진실한 발전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위에 기반을 두어야 하며,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촉진시키는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바오로 6세가 자주 말하던 ‘사랑의 문명’이다.


 

 34. 그렇지만 개발의 윤리적인 성격에서 자연 세계를 구성하는 제반 사물들, 일찍이 그리스인들이 그것을 특징짓는 ‘질서’를 의미하여 ‘우주’(cosmos)라고 일컬은 그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들에 대한 존중이 제외되어도 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음 세 가지 이유에서 그 세계도 또한 존중을 받아야 한다. 이것도 우리가 주의 깊게 반성함이 유익할 것이다.
첫번째 고찰은,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 동물, 식물, 자연 요소들 - 다양한 종류의 사물을 인간이 자기 원대로만, 자기의 경제적인 필요에만 의거하여 사용할 수는 없으며 만약 그렇게 했다가는 징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자각을 더욱 깊이 얻게 하는 적절함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는 각 사물의 본성과 그것이 질서 있는 체제, 정확하게 말해서 ‘우주’에서 차지하는 상호 연관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두번째로 고찰할 점은 자연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는 자각 - 이 자각은 매우 시급한 것이다 - 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자원은 글자 그대로 재생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을 마치 절대 고갈되지 않을 것처럼, 또 절대 지배권을 가진 것처럼 사용함으로써 그것들의 이용도를 위태롭게 만들며, 현세대에게만 아니라 다음에 올 세대에까지 그 이용 가능성을 해치게 된다.
세번째 고찰은 산업화된 지역에서 ‘생활의 질’과 연관하여 발전시켜 온 개발 유형이 있는데 바로 그 후속 결과에 직결되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공업화의 직접 또는 간접 결과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빈번하게 환경의 오염이 조성되고 그것은 주민의 건강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여기서 개발, 그것을 관장하는 계획, 거기서 자원이 이용되는 방도 등에 있어서 도덕적 요청을 존중하여야 한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된 셈이다. 그 같은 도덕적 요청 가운데 하나가 자연 세계의 이용에 한계를 설정하라는 것임에 틀림없다.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지배는 절대권이 아니며, 따라서 ‘선용하든 남용하든 자유다’라는 말을 못할 뿐더러, 사물을 자기 좋을 대로 처분한다는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 태초부터 창조주 친히 설정하신 한계, “그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하시는 금령에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한계(창세 2,16-17 참조)는, 우리가 자연계를 대할 적에 그 생태학적인 법칙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법칙에 귀속됨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를 위반할 적에는 반드시 징벌이 따르게 되어 있다.
개발에 관한 참다운 개념은 자연 요소들의 이용, 자원의 재생 가능성 여부, 위험스러운 공업화의 후속 결과 등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가 없으며, 이 세 가지 고찰은 개발의 도덕적 차원에 관하여 우리 양심에 경종을 울린다.63)


 



V. 현대 문제점들에 관한 신학적 해독


 

35. 개발이 본질적으로 도덕적 성격을 띤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개발에 대한 장애도 도덕적인 성격을 갖는다. 바오로 교황의 회칙이 나온 지 여러 해가 지나고서도 개발이 없거나 있어도 극히 미소하고 불규칙적이고 심지어는 모순적인 개발밖에 없다면, 그 원인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다. 앞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정치적 동기들도 들어 있다. 민족들의 발전을 가속화하거나 침체시키는 결정들은 실제로 그 성격이 정치적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 있는 오도된 메커니즘을 극복하고 더욱 정의롭고 인류의 공동선에 부합된 새로운 메커니즘으로 대체시키려면, 효율적인 정치가 필요하다. 불행히도 상황을 분석한 뒤인 지금 우리로서는 이 정치가 불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서처럼 사목적 성격을 갖는 문서에서는 저개발(또는 필요한 수정은 가해서 말하더라도, 초개발)의 경제적 정치적 원인만을 분석하는 일은 완전하다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도덕적 원인들을 밝혀내지 않으면 안된다. 책임 있는 인간으로서의 개개인의 행동은 그 나름으로 존중한다 하더라도, 이 도덕적 성격을 띤 원인들은 개발의 과정을 서행시키거나 그 완전한 달성을 방해하거나 하는 형태로 개입을 하기 마련이다.
이와 유사하게, 과학적 기술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을 때에도, 그것이 필히 구체적인 정치적 결정을 거쳐서 민족들을 참다운 발전에 이르도록 도와야만 하겠지만, 개발에 대한 장애는 어디까지나 본질적으로 윤리적인 성격을 갖는 결정에 의해서만 극복되는 법이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에게, 특히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는 이러한 결정이 필시, 신적인 은총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신앙의 원리에서 영감을 취하겠기 때문이다.


 

36. 그러므로 다음 사실을 감지함은 매우 중요하다.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유지되는 두 블록으로 나누어진 세계, 상호 의존과 연대 의식 대신에 갖가지 제국주의가 휩쓰는 세계는 죄의 구조에 종속된 세계가 될 수밖에 없다. 보편적인 공동선에 대한 의식을 깨우치는 데, 그리고 공동선을 더욱 신장시켜야 할 필요성을 깨우치는 데 역행하는 부정적인 인자들을 모두 합치면, 그것이 개인들과 제도들 안에다 매우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를 설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떨쳐버리기 힘들다.64)
현재의 상황이 각종 곤란에서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런 지경에서는 ‘죄의 구조’(structures of sin)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본인의 교황 권고「화해와 참회」에서 이미 주장한 바와 같이, 죄의 구조는 개인적인 죄 속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반드시 개인들의 구체적인 행동과 결부된다. 개인들이 이런 구조를 도입하며, 개인들이 이 구조를 강화하고 제거하기 어렵게 만든다.65) 그러는 가운데 이 구조들이 강화되고 확장되고 다른 죄들의 원천이 되며 아울러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죄’ 그리고 ‘죄의 구조’는 현대 세계의 상황을 묘사하는 데는 자주 쓰이지 않는 범주들이다. 하지만 우리를 괴롭히는 악들의 뿌리에 이름을 지어 붙이지 않고서는 우리가 부딪히는 실제를 깊이 이해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다.
물론 ‘이기심’이니 ‘단견’이니 ‘정치적 오산’이니 ‘현명치 못한 경제적 결정’이니 하는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평가 하나하나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의 반향을 느끼게 해준다. 인간의 조건은 변질되어 있어서, 어느 모로든 도덕적 성격의 판단과 소급을 하지 않고서는 개인들의 행동과 더욱이 태만을 깊이 분석할 길이 없다.
이런 평가는 그 자체로 보아서 적극적인 평가이다. 특히나 그것이 일관성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하느님과 그분의 법 - 선한 것은 명하고 악은 금지하는 법 - 을 믿는 신앙에 의거할 때에, 적극적인 평가라고 보아야 한다.
이 점에서 사회-정치적 분석과 ‘죄’와 ‘죄의 구조’에 입각한 해설 사이의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견해에 의거하면, 우리는 성삼위 하느님의 뜻, 인류를 위하시는 그분의 계획, 그분의 정의와 자비에 마주치게 된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인간의 구원자’,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명확한 태도, 행동에서든 태만에서든 자기 이웃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태도를 요구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십계명의 둘째 석판을 보게 된다(출애 20,12-17; 신명 5,16-21 참조). 이 계명들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상심시켜 드리고 이웃 사람을 해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 어떤 영향과 장애를 끌어들이는 것인데 이것들은 한 개인이 행동이나 짧은 수명을 넘어서서 오래 지속한다. 이것은 민족들의 발전 과정에도 간섭하게 되는데, 발전의 지연이나 저하는 이러한 각도에서도 판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37. 종교적인 성격을 띠는 이 같은 일반적인 분석은 수많은 세부적인 고찰에 의해서 보완될 수 있겠다. 그것으로 하느님의 뜻에 상반되고 이웃의 선익에 위배되는 행동과 태도들 가운데에서, 또 그것들에 의해 조성되는 ‘구조들’ 가운데에서 두 가지가 전형적임을 알 수 있다. 한편에서는 이득을 위해 무엇이든 소모하는 욕망이며, 다른 편에서는 자기의 의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이 태도 하나하나의 특성을 더욱 정확히 밝히는 뜻에서 혹자는 여기에 ‘무슨 수를 다해서라도’라는 한마디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달리 하자면, 우리는 여기서 인간 태도의 절대화와 거기서 오는 가능한 모든 결과에 부딪히게 된다.
이러한 자세들이 각 사람에게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가 있으므로 제각기 분리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세계에서는 양자가 불가분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그중 하나나 다른 편이 두드러질 수는 있다.
물론 개인들만이 죄의 이 이중 태도에 희생되는 것이 아니고 국가들과 블록까지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본인이 말한 ‘죄악의 구조’라는 개념의 도입을 무난하게 만든다. 현대의 ‘제국주의’의 몇 가지 형태를 이러한 윤리적 기준에 비추어볼 때에, 오로지 경제 또는 정치에 의해서 유래된 것처럼 보이는 결정의 배후에는 사실상의 우상 숭배 형태를, 돈, 이데올로기, 계급, 기술 공학에 대한 우상 숭배를 볼 수 있다.
본인이 이런 유의 분석을 개진한 것은 민족들의 발전에 관하여 우리에게 얼굴을 보이는 악의 진정한 성격을 지적해 내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윤리악의 문제이며, ‘죄악의 구조’로 인도하는 많은 죄들의 결실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악을 진단한다는 것은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 행동의 차원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38. 이 길은 멀고도 복잡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결의와 성취의 내면적인 나약성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예기 못할 외적 환경의 가변성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위협을 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했고 또 일단 몇 걸음을 내딛거나 그 여정의 일부를 걷고 나면 용기가 끝까지 지속된다.
이러한 고찰을 배경으로 할 때에, 출발을 하기로 또는 길을 계속하기로 하는 결정은 무엇보다도 윤리적인 가치를 띠게 되며, 신앙을 가진 남녀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서 오는 요구이자 절대 구속력을 갖는 도덕의 참다운 토대임을 인정한다.
우리가 기대하기로는 명시적인 신앙을 갖지 않은 남녀들도 총체적인 개발을 가로막는 장애가 단순하게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고 인간들이 절대 가치 앞에서 취하는 더 근원적인 자세에 있음을 확신하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느 모로든 자기 이웃 인간들에게 ‘더욱 인간다운 삶’을 마련하는 일에 책임을 진 사람들은, 종교적 신앙에서 영감을 받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정신적인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는 시급한 필요성을 철저하게 감지할 것이며, 정신 자세는 개개인이 자기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가장 멀리 떨어진 인간 공동체들과의 관계, 나아가서는 자연과의 관계를 좌우하게 됨을 알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공동선과 같은 더욱 고차원적인 가치,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 나오는 훌륭한 표현을 빌려, “개인의 인간 전체와 전인류의 완전한 발전”66)을 생각하기에 이를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죄’라는 단어의 명확한 신학적 의미를 알고 있으므로, 행동, 사고 방식 또는 존재 양식의 변화를, 성서의 용어를 써서(마르 13,3.5; 이사 30,15 참조) ‘회개’라고 일컫는다. 이 회개는 특별히 하느님께, 범한 죄악에, 그 결과에, 따라서 개인이든 공동체든 자기 이웃에게 관련되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의 손 안에 “주권자의 권력이 달려 있으며”67) 만인의 마음도 그분의 손에 달렸으니, 그분은 당신이 하신 언약에 따라서, 그리고 당신의 성령의 능력으로 ‘돌심장’을 ‘살심장’으로 바꾸실 수가 있다(에제 36,26 참조).
소기하는 회심을 향하는, 개발의 윤리적인 장애들을 극복하려는 길에서 우리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개인들과 국가들 사이에 상호 의존의 각성이 점증하고 있다는 긍정적이고 윤리적인 가치이다. 세계 도처에서 남녀 인간들이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아마도 결코 찾아갈 길이 없는 나라에서 저질러지는 불의와 인권 유린에 의해서 개인적으로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은 그 현실이 하나의 의식으로 변화되었으며 윤리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는 표지라고 하겠다.
문제는 무엇보다도 상호 의존이니, 현대 세계에서 그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인 요소들에 있어서 상호 관계를 결정하는 어떤 체제라고 이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며, 하나의 윤리적 범주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만약 상호 의존을 이런 각도에서 파악한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태도, 일종의 ‘덕’이라고 할 응답은 연대성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연대성은 가깝든 멀든 그 많은 인간들이 겪는 불행을 보고서 막연한 동정심 내지 피상적인 근심을 느끼는 무엇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공동선에 투신하겠다는 강력하고 항속적인 결의이다. 우리 모두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만큼, 만인의 선익과 각 개인의 선익에 투신함을 뜻한다. 이런 결의는 완전한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름아닌 이익에 대한 욕망과 권력에 대한 갈망임이 분명하다는 확고한 신념에 근거를 둔다.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이 같은 태도와 ‘죄의 구조’는 - 물론 신의 은총의 도우심을 전제로 하겠지만 - 대칭적으로 이와 상반된 태도로만 극복이 가능하다. 타인을 착취하는 대신에 이웃의 선익에 투신하고 복음의 뜻 그대로 남을 위하여 ‘자기를 잃는’ 각오로 임하는 것이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남을 억압하는 대신에 ‘그를 섬기는’ 것이다(마태 10,40-42; 20,25; 마르 10,42-45; 루가 22,25-27 참조).


 

39. 각 사회 안에서 연대 의식을 행사하는 일은 그 성원들이 서로서로 타인을 인격으로 인정할 경우에만 유효하다. 재화와 공동 서비스를 더욱 많이 향유하기에 더욱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더 약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느껴야 하며 자기네가 가진 모든 것을 그들과 나눌 태세가 되어야 한다. 한편 더 약한 사람들은 같은 연대감의 정신을 갖고서, 그저 피동적인 태도만 취하거나 사회 기틀 자체를 파괴하는 입장을 취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당한 권리를 당당히 주장함과 아울러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서 자기로서 할 수 있는 바를 행하여야 한다. 중간 매개를 하는 집단들은, 다른 편에서, 자기네 특정한 이익만을 이기적으로 주장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존중하여야 한다.
현대 세계의 긍정적인 표시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들 사이에서 갖는 연대 의식과 서로 돕는 노력과, 사회적 무대에서 행하는 공공연한 시위가 점증하는 점이다. 공공연한 시위는 폭력에 호소하지 않으면서도, 국가 당국의 미비점이나 부패에 직면하여 자기들의 필요와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이다. 교회는 받은 바 복음적인 임무에 의거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편을 들고, 그들의 요청에 정의가 담겨져 있음을 식별하며, 공동선이라는 맥락에서 집단들의 선익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데 도움이 되라는 소명을 느끼는 바이다.
같은 기준이 유비적으로 국제 관계에도 해당된다. 상호 의존은, 창조계의 재화가 만인을 위한 것이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연대 의식으로 변형되어야만 한다. 원자재를 가공 처리하여 또 노동의 기여를 통해서 인간 산업이 생산한 것은 만인의 선익을 위해 공평하게 봉사하여야 한다.
온갖 유형의 제국주의와 자기네 패권을 존속시키려는 결의를 극복하고서 더욱 강하고 부유한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 윤리적인 책임감을 느껴야 마땅하며, 그렇게 함으로써만 진정한 국제 체제가 건설될 것이니 그런 체제는 모든 민족들의 평등을 기반으로 하고 동시에 그들의 합법적인 차이성에 대해 필요한 존중을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국가들 또는 아직 자급 자족하는 수준에 있는 국가들은 다른 국민들과 국제 공동체의 조력을 받아 인문과 문화의 보고를 갖고서 공동선에 나름대로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하며, 이 같은 가치들은 이렇게 배려하지 않으면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연대감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 - 인간이든 민족이든 국가든 - 을 일종의 도구로, 저가로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과 체력을 가진 존재로, 그리고 더 이상 효용이 없을 때에는 내버릴 것으로 보지 말고, 우리 ‘이웃’으로, ‘돕는 이’(창세 2,18-20 참조)로 보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동등하게 초대해 주신 생명의 잔칫상에 우리와 똑같이 참여하는 사람으로 간주하여야 한다. 따라서 개인들과 민족들에 관한 종교적 인식을 재각성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하면 타인들에 대한 착취, 억압 그리고 말살은 배척될 것이다. 이 같은 작태들은 대치된 두 블록으로 분열된 세계에서 전쟁의 위험을 조장하고, 개인의 안전에 대한 과장된 우려를 자아내며, 그것이 흔히는 양진영 사이의 ‘영향권’ 내지는 ‘안전 벨트 지역’에 위치한 약소국들의 자율, 결정의 자유, 그리고 심지어는 영토권마저도 위협하는 결과를 낸다.
‘죄의 구조’와 그것이 산출해 내는 죄들은 마찬가지로 평화와 개발에 철저하게 상반되는 것이니, 발전이란, 바오로 교황의 회칙에 나오는 친숙한 표현대로, “평화의 새 이름”68)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제시하는 연대성은 곧 평화에 이르는 길이자 동시에 개발에 이르는 길이다. 상호 의존 그 자체가 블록 정치를 청산하고 온갖 형태의 경제적 군사적 또는 정치적 제국주의를 포기하고 상호 불신을 협력으로 전환시킬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세계 지도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한, 세계 평화는 생각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방금 말한 내용이야말로 개인들 사이와 국가들 사이에 연대성에 이르는 고유한 행위라고 하겠다.
본인의 존경하올 선임자 비오 12세의 교황직 좌우명이 “평화는 정의의 열매”(Opus justitiae pax)였다. 오늘에도 성서적 영감에서 오는 똑같은 의미와 똑같은 어조(이사 32,17; 야고 3,18 참조)로, “평화는 연대 의식의 열매”(Opus solidaritatis pax)라고 단언할 수가 있다.
누구나 그토록 희구하는 평화의 목표는 사회적이고 국제적인 정의를 구현함으로써, 그러나 또한 덕들을 실천함으로써 확실하게 성취될 것이니, 그 덕이란 인간들의 공동 일치를 신장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단결하여 사는 법을, 주고받는 가운데 새 사회와 더 나은 세계를 단결하여 건설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40. 연대성은 의심없이 그리스도교 덕목이다. 여태까지 죽 이야기해 온 바를 본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식별하는 표라고 할(요한 13,35 참조) 애덕과 연대성 사이에 여러 가지 접촉점이 있음을 감지했으리라 믿는다.
신앙에 비추어볼 때에, 연대성은 그 자체를 초월하고자 모색하며, 전적인 무상성, 용서, 그리고 화해 같은 각별히 그리스도교적인 차원이라고 할 형태를 취하려고 한다. 그렇게 될 때에, 사람의 이웃은 단지 나름대로 권리와 다른 이와의 근본적인 평등을 갖춘 인간으로만 비치지 않고, 아버지 하느님의 산 모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았고 성령의 항속적인 활동을 입고 있는 모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웃은, 그가 비록 원수라 하더라도, 사랑을 받아야 하며 주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신 똑같은 사랑으로 사랑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희생을 치를 각오가 서 있어야만 하며, 최후의 희생, 곧 형제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1요한 3,16 참조) 희생까지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시점에서 하느님께서 만인의 아버지이시고 만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이며 - 그로 말미암아 “성자 안에 만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 성령의 현존과 생명을 주시는 활동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우리의 세계관은 그것을 해석하는 새로운 기준을 얻게 된다.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유대만도 매우 긴밀하고 강한 것이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신앙의 빛으로 인류의 일치를 보이는 새로운 모델이 파악되고 있으니, 그것이 우리의 연대성을 불러일으키는 궁극의 근거가 된다. 일치의 이 최고 모형, 한 분 하느님께서 삼위 안에 계시다는, 하느님의 내밀한 생명을 반영하는 모형을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친교’라는 어휘로 표현한다. 각별하게 그리스도교적이라고 할 이 친교는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열렬히 보전하고 확산하고 풍부하게 한 것으로, 교회의 소명의 ‘혼’이라고 하겠으니, 교회의 소명이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은 의미로 ‘성사’가 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대성은 이 같은 신적인 계획을 실현하는 것으로서, 개인의 차원에서와 국가적 국제적인 차원에서 다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이야기한 ‘사악한 메커니즘’과 ‘죄의 구조’는, 교회가 우리에게 호소하고 부단히 촉진시켜 온 인간적 그리스도교적 연대성을 발휘함으로써만 제압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긍정적인 활력들이 개발과 평화를 위하는 방향으로 충만히 방출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시성한 성자들 중의 많은 인물들이 이 같은 연대성의 놀라운 증언을 제공하며 현재와 같은 어려운 환경에서 모범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도 본인은 베드로 클라베르 성인(콜롬비아)이 카르타헤나 데 인디아스에서 노예들에게 행한 그의 봉사를 들고 싶고, 아우슈비츠의 강제 수용소에서 알지도 못하는 한 수인 대신에 자기 목숨을 내어놓은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을 들고 싶다.


 

  

VI. 몇 가지 특별한 지침


 

41. 교황 바오로 6세가 이미 그 회칙에서 언명한 바와 같이,69) 교회는 저개발이라는 문제 자체에 관해서 기술적인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교회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체제라던가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존엄성이 제대로 존중되고 촉진되는 한, 교회가 세계 속에서 자기 직무를 행사하는 데에 필요한 여유가 허락되는 한, 어느 체제가 다른 것보다 낫다고 주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인간 문제에 대한 전문가”70)이며, 또한 교회는 남녀 인간들이 인격의 존엄성에 입각하여 이 세상에서 가능한,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행복을 찾아서 노력을 경주하는 모든 분야에까지 자신의 종교적 사명을 확대하지 않을 수 없다.
선임자들의 모범을 본받아, 본인은 올바른 개발처럼 개인들과 민족들의 존엄성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의 ‘기술적’ 문제로 축소될 수 없음을 거듭 강조하는 바이다. 이런 식으로 위축을 시키면, 개발은 그 참된 내용을 결하는 것이며, 이것은 결국 개발이 이바지하여야 할 개인들과 민족들을 배반하는 행동이 될 것이다.
그러한 연유에서 교회는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또 장래에도 진정한 개발의 성격과 조건과 요구 사항 및 목적에 관해서, 그리고 개발이 부딪히는 장애들에 관해서도, 할 말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복음화하는 자신의 사명을 채우는 것이니, 교회가 그리스도께 관해서와 교회 자신에 관해서 그리고 인간에 관해서 진리를 선포하고 이 진리를 구체 상황에 적용시킬 때에, 교회는 개발이라는 시급한 문제의 해결에 첫째가는 공헌을 하는 셈이다.71)
이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교회는 자신의 ‘사회 교리’를 이용한다. 오늘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의 가르침이 제시하는 “반성 원리와 판단 기준 그리고 행동 지침”을 더욱 정확하게 의식하고 이것이 더욱 광범위하게 확산된다는 것은,72) 당면한 문제를 정확히 규정하는 데에도, 그것을 최선으로 해결하는 데에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는 우리가 봉착하고 있는 문제점들이 무엇보다도 윤리적인 문제라는 것이 보이고, 개발 자체의 문제에 관한 분석이든 현재의 곤란을 타개하는 수단이든 이 본질적인 차원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교회의 사회 교리는 자유 자본주의와 마르크스 집산주의 사이에 낀 ‘제3의 방도’가 아니며, 서로 상충되는 해결책들 사이에서 덜 극단적인 차선책은 더욱 아니고, 자기 나름의 범주를 갖는다. 하지만 또한 이것은 이데올로기도 아니니, 그보다는 인간 실존의 복잡 다단한 현실들을 사회 안에서 또 국제적인 차원에서, 신앙의 빛과 교회 전통의 빛 안에서 주의 깊게 고찰한 결과를 면밀하게 형식화하여 나타낸 것이다. 그 중요한 목표는 이러한 현실들을 해석하는 데에 있으며, 인간과 그의 소명, 지상적이면서 동시에 초월적인 소명에 관한 복음의 가르침의 노선에 그런 현실들이 상합한지, 아니면 위배되는지를 규명하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그 목표는 그리스도교다운 행동의 지표가 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영역이 아니라 신학의 영역에, 특히 윤리신학의 영역에 속한다.
사회 교리를 가르치고 널리 펴는 일은 교회 편에서는 복음 전파의 사명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사람들의 행동에 지표가 되는 데 목적을 둔 교리이므로 당연히 이 교리는 ‘정의에의 투신’을 유발한다. 물론 이 투신은 각 개인의 역할과 소명과 환경에 입각하여 발생하기 마련이다.
악과 불의에 대한 단죄 역시 사회 분야에서 복음 선포를 하는 봉사직의 일부이며, 교회의 예언적 역할의 한 측면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할 점은, 선포가 단죄보다 언제나 더 중요하다는 것이며, 후자는 전자를 무시한 채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선포야말로 참다운 연대성을 간직하고 더 고상한 동기에서 온 힘을 갖추고 있는 까닭이다.


 

42. 오늘날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교회의 사회 교리가 국제적인 전망을 향해서 열려야 하며,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73) 최근의 회칙들과74) 특히나 우리가 지금 기념하고 있는 회칙의75) 노선에 입각한 것이다. 따라서 이 자리를 빌려 최근에 교도권에 의해서 취급된 바 있는 특수한 주제들과 지침을 이러한 빛에 비추어 재검토하고 더 자세히 밝히는 것도 무용한 일은 아닐 듯하다.
여기서, 먼저 본인은 그중의 하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 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사랑’이라는 주제를 지적하고 싶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의 실천에서 그 편을 먼저 선택하는 특별한 형태의 우선을 말하는 것으로, 교회의 전통 전체가 이에 관한 증거를 갖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고자 하는 이상,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치며, 아울러 우리의 사회적 책임에 따라서 우리의 생활 방식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재화의 소유와 사용에 관해서 내려야 할 논리적인 결단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사회 문제가 전세계적인 차원을 지닌다는 점에서76)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 그리고 거기서 영감을 받아 우리가 내리는 결단은 당연히 저 무수하게 많은 굶주린 사람들, 곤궁한 사람들, 집 없는 사람들,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더 나은 미래의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이 같은 현실들을 무시한다는 것은 저 ‘부자’가 거지 라자로가 자기 집 문간에 누워 있음을 모르는 체하는 바와 다를 것 없다(루가 16,19-31 참조).77)
우리의 일상 생활이 정치와 경제의 분야에서 우리가 내리는 결정과 마찬가지로 이 같은 현실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각국의 지도자들과 국제 기구들의 우두머리들은, 개발 계획을 수립함에 있어서 진정 인간적인 차원에다 우선을 두도록 유념할 본분이 있으면서, 날로 증대되는 이 빈곤의 현상에 최우선을 두는 일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불행히도 가난한 이들은 줄어드는 대신에 갈수록 많아지기만 하며, 저개발 국가에서만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그러하니 이 후자는 전자에 못지않게 수치스러운 현상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사회 교리의 특수한 원칙을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이 세상의 재화는 원래부터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78) 사유 재산권은 유효하고 필요하지만, 그것이 이 원칙의 가치를 없애지는 못한다. 사실상 재산의 사유는 ‘사회적 저당권’이 설정되어 있는 것이며,79) 이 말은 사유 재산이 본질적으로 사회적 기능을 갖는 것이며, 재화가 만인을 위한 것이라는 원리에 기반을 두고서, 또 그 원리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것임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이들을 배려함에 있어서 특수한 형태의 가난, 즉 기본 인권이 결여된 가난, 특히나 종교 자유의 권리와 경제적 창의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빈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43. 구체적인 동기에서 우러난, 가난한 이들 - 그들은 말뜻 그대로 ‘주님의 가난한 이들’이다80) - 을 위하는 관심은 모든 차원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되며, 필요한 일련의 개혁을 결정적으로 달성하기까지는 구체적인 행동이 지속되어야 한다. 각 지역의 상황이 무슨 개혁이 시급하고 어떤 방도로 달성할 수 있는지를 말해 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묘사한 바와 같이 국제적인 불균형의 상황에 의해서 요청되는 개혁들도 망각되어서는 안된다.
이 면에서 본인이 특별히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보호주의와 갈수록 심해지는 쌍무주의에 의해서 묶여 있는 국제 무역 체제의 개혁, 오늘날 부적격한 것으로 판정이 난 세계 통화 및 금융 체제의 개혁, 기술 교역과 그 이용에 관한 문제점, 기존의 국제 기구들의 구조를 국제간의 사법 질서의 틀 안에서 재검토할 필요성 등이다.
현존의 국제 무역 체제는 개발 도상국들의 신생 산업의 상품들을 차별하는 일이 빈번하고 원자재 생산자들의 의기를 꺾어놓기 일쑤다. 그런가 하면, 노동의 국제 분담이라는 체제가 생겨, 효과적인 노동법이 부재하거나 그런 법을 적용하기에는 너무도 취약한 어떤 국가들의 저가 생산품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국경을 무시한 채로 이런 형태의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회사들에 막대한 이윤을 끼쳐주면서 판매되는 일이 흔하다.
세계 통화 및 금융 체제는 환율 및 이자의 지나친 유동성으로 특징을 이루고 있어서, 빈곤한 국가들의 지불 균형과 부채 사정을 악화시키는 것이 예사이다.
기술 공학의 형태와 그 이전은 오늘날 국제 교역의 가장 큰 문제점의 하나요 거기서 유래하는 해악도 가장 크다. 개발 도상국들에게 필요한 형태의 기술을 거부하는 일이 빈번하거나 아예 무용한 기술을 넘겨주는 경우가 빈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으로는 국제 기구들이 그 활동 방식, 활동 경비와 효과 등을 주의깊게 재검토하고 가능한 수정을 가할 필요가 있는 시점에 와 있는 듯하다. 물론 이 같은 미묘한 과정은 모든 이들의 협력이 없이는 실현될 수가 없다. 그러자면, 정치적인 적수 관계를 초극하고 이런 기구들을 조종하려는 일체의 의도를 포기할 것을 전제로 한다. 이 기구들은 오로지 공동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기존의 단체들과 기구들은 민족들의 복지를 위하여 일을 잘 해왔다. 그렇지만 오늘의 인류는 그 본연의 발전의 새롭고도 훨씬 어려운 단계에 봉착해 있다. 그리하여 전세계의 사회들과 경제들 및 문화들에 기여할 수 있게 국제 질서를 더욱 강화하는 일이 필요하다.


 

44. 개발은 무엇보다도 개발이 필요한 나라들 편에서 창의의 정신을 발휘하도록 요구한다.81) 각국은 자기 자신의 책임에 의거하여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며 더 잘사는 나라들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면 안된다. 또한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나라들과도 협력하여 행동해야 한다. 각국은 자기의 고유한 자유의 영역을 발견해 내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이롭게 활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각국이 하나의 사회로서 자기의 고유한 필요에 상응한 이니셔티브를 취할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각국이 자국의 진정한 필요, 그 필요에 대응하도록 강요하는 권리들과 의무들을 깨달아야 한다. 민족들의 발전은 각 국민이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하에, 자기 자신의 발전에 헌신함으로써 시작되고 또 그 같은 헌신에 의해서만 가장 적절하게 성취가 된다.
그렇다면, 개발 도상국들부터가 가능한 대로 시민 각자의 자기 주장을 신장시키며 시민들에게 더욱 폭넓게 문화에 접근하게 하고 정보의 자유스러운 소통을 보장하는 일이 중요하다. 읽고 쓸 줄 아는 일과 그것을 보충하고 심화시키는 초등 교육을 촉진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회칙 「민족들의 발전」이 제안하는 바와 같이,82) 참다운 개발에 직접 기여한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는 이 목표가 아직도 달성이 요원하다.
이러한 노선을 걷자면, 국가들 스스로가 자국민의 특수한 처지와 지리적 여건과 문화적 전통에 맞추어, 우선 순위를 판별하고 자국에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할 것이다.
어떤 국가들은 식량 생산을 증가시켜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함으로써 생존과 일상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언제나 공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현대처럼 세계에서 기아가 그처럼 많은 희생자를, 특히나 극히 어린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희생자를 내는 세계에서, 특별하게 발전된 국가도 아니면서 식량 자급을 이룩하고 나아가서는 식량 수출국이 된 나라들이 없지 않다.
다른 국가들은 일부 불의한 구조를 개혁해야 할 것이며 특별히 그 정치 제도를 개선하여, 부패하고 독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부 형태를 민주적이고 참정적인 정부로 대체시켜야 할 것이다. 이런 과정이 확산되고 강화되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왜냐하면 정치 공동체의 ‘건강’은 모든 시민들이 공공 활동에 자유롭고도 책임있게 참여하는 데서, 법에 의한 통치에서, 인권의 존중과 신장에서 표현되는 것이며, 이 건강이야말로 “모든 개인들과 모든 민족들의” 발전의 필요 조건이요 확고한 보장이기 때문이다.


 

45. 지금까지 말한 그 어느 것도 모든 이의 협력 없이는, 특히나 국제 공동체의 협조 없이는, 또 가장 등한시되는 사람들을 위시해서 인간 모두를 포괄하는 연대성의 틀 안에서 전개되지 않고는 달성되지 못한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개발 도상국들 스스로가 자기들끼리 연대성을 발휘하여야 하겠으며,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들과 연대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람직한 일은 예를 들어, 지리적으로 동일한 지역의 국가들이 협력의 형태를 이루어, 그 지역의 생산품에 국경을 개방한다든가, 자기네 생산품이 어떻게 상호 보완을 할 수 있는지 검토한다든가, 각국이 단독으로는 마련 못할 서비스들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합동한다든가, 통화와 금융 부면에까지 협력을 확대한다든가 해야 할 것이다.
상호 의존은 이들 국가 상당수에게 이미 하나의 엄연한 현실이 되어 있다. 이 현실을 인식하고 이것을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할 정도가 된다면, 더 부유하고 더 강한 국가들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일을 벗어나는 방도가 될 수도 있고, 개발을 희구하면서도 누구와 상충하는 일이 없이 자국의 고유한 능력을 발견하고 최대한 활용하는 길도 될 것이다. 단일한 지리적 구역에 속하는 국가들, 각별히 ‘남반구’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지역의 국가들은 새로운 지역 기구를 결성할 수 있고 결성해야 할 것이니, 이런 기구는 국가들의 예양에 있어서 평등, 자유와 참여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어야 하겠고, 사실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면서 이미 그러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전반적인 연대성을 이루는 본질적인 조건은 자율과 매이지 않는 자결이니 이것은 방금 지적한 연합체에서도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연대성이라는 것은 전세계 공동체의 선익에 필요한 희생을 받아들일 자세를 요구한다.


 


 



VII. 결 론


 

46. 민족들과 개인들은 자유롭기를 희구한다. 완전한 발전을 추구하는 그들의 노력은 ‘더욱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데 그들을 가로막는 수많은 장애물들을 극복하려는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최근에, 그러니까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공포에 뒤따른 시기에 빈곤과 저개발의 문제를 대면하는 새로운 방식이 세계 몇몇 지역에서 널리 퍼졌고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널리 퍼졌다. 이 접근법은 해방을 근본 범주요 행동의 일차 원리로 만든다. 그 긍정적 가치와 함께, 신앙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신학적 반성 형태와 방법에 연관되는 왜곡 및 왜곡의 위험은 교회의 교도권이 이미 적절하게 지적해 왔다.83)
개인과 사회에 영향을 주는 모든 형태의 예속으로부터의 자유를 염원함은 고귀하고 또한 정당한 것임을 이 자리에서 첨언함이 적절하겠다. 바로 이것이 개발의 참 목적이며, 양자 사이의 깊은 연관을 고려할 적에 그 목적이란 곧 해방이자 개발이라고 보아야겠다.
단지 경제적인 데 그치는 개발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 능력이 없다. 오히려 인간을 더욱 예속시키는 것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문화적,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을 포함하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그 같은 차원의 존재마저 인정 않고, 개발의 목표와 우선을 바로 이러한 차원으로 유도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개발이라면, 참다운 해방으로 인도하는 데 별반 이바지하는 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될 때에, 자기의 권리와 의무를 충만히 갖출 때에만, 전적으로 자유스럽다고 할 수 있다. 전체로 본 사회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다.
참다운 해방에 이르는 길에 있어서 우리가 극복할 주된 장애물은 죄이며 죄에 의해서 산출되고 죄를 증대시키고 확산시키는 구조이다.8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베푸신 자유(갈라 5,1 참조)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이의 종이 되도록 촉구한다. 그리하여 개발과 해방이라는 과정은 연대성을 발휘하는 가운데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 특히나 가장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봉사에서 그 형태를 갖추는 것이다. “진리와 사랑을 잃어버린 곳에서, 해방의 과정은 모든 지지를 상실하는 자유의 죽음에 이르고 만다.”85)


 

47. 근년의 서글픈 체험을 맥락으로 하고 또 현시점의 주로 부정적인 정경을 배경으로 하더라도 이 장애들을, 그 과불급으로 말미암아 개발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들을 극복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교회야말로 강력히 주장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리고 교회야말로 참다운 해방을 믿고 있음을 천명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궁극적으로 교회의 이 같은 신뢰와 가능성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교회의 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니, 우리의 현역사가 그 자체에만 폐쇄되어 있는 무엇이 아니고 하느님의 나라로 개방되어 있음을 이 약속이 보증하는 까닭이다.
비록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을 알지만, 교회는 인간에게 신뢰를 기울인다. 이것은 죄의 유업과 인간 각자가 범할 수 있는 죄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에는 넉넉한 자질과 활력 그리고 근본적인 ‘선’(창세 1,31 참조)이 존재한다는 것을 교회가 알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창조주의 모상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키신”86) 그리스도의 구원의 영향하에 놓여 있기 때문이며, 성령의 힘있는 활동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지혜 1,7)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망이나 비관론이나 타성은 정당화될 길이 없다. 사람이 이기심 때문이거나 이윤과 권력을 지나치게 탐하여 죄를 짓는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저개발의 처지에 빠져 있는 무수한 인간들의 시급한 필요를 고려할 적에, 아무래도 사람은 공포와 우유부단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근본적 비겁으로 말미암아, 부족한 인간임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2천년대의 마지막 십 년의 저 가공할 도전에 정면으로 부딪히도록 불리움을 받았고 또 그렇게 할 본분이 있으니, 이것은 현재의 위험이 인간 모두를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세계 경제의 위기, 국경 없는 전쟁,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을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 부유한 개인과 국가들 및 가난한 개인과 국가들 사이의 구분 따위는 아무 힘도 없을 것이다. 다만 더 가진 자들과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빼놓고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계기는 아니고 또 가장 중요한 계기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며, 그 존엄성의 수호와 촉진을 창조주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셨다는 것이고,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도 남녀 인간은 창조주께 엄정하게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소간에 이미 각성하고 있는 바와 같이, 현재의 상황은 이 같은 존엄성에 부합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각자가 이 평화적인 캠페인에서, 평화적인 수단에 의해서 나오는 캠페인에서 자기 역할을 다함으로써, ‘평화 속의 개발’을 확보하기 위하여, 자연과 우리 주위의 세계를 보존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교회도 이 사업에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느끼면서 그 종국적인 성공을 희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바오로 6세와 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을 본받아,87) 본인도 소박하고 겸손되이 각 사람에게, 예외 없이 모든 남녀 인간에게 호소하고자 한다. 현시점의 심각성과 각자의 개인적 책임의 심각성을 의식하도록,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과 연대 의식에서 우러난 대책을 강구하도록 요청하고자 한다. 개인으로서와 가정으로서 살아가는 방도를 통해서, 자기들의 갖가지 능력을 발휘하여, 시민 활동을 통해서, 경제적 정치적 결정에 기여함으로써,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사업에 투신함으로써 이런 일을 할 수가 있다. 현시점이 요구하는 바가 바로 이런 일이며, 창조주 하느님의 파괴될 수 없는 모상이요 우리에게 있는 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인간 존엄성 자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다름아닌 이것이다.
이러한 투신에 있어서 교회의 자녀들은 모범과 길잡이로서 활약을 하여야 할 것이니, 그들은 예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친히 선포하신 강령에 입각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는”(루가 4,18-19) 사명을 띠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 강조된 바와 같이, 이 문제에 있어서는 남녀 양측의 평신도들의 탁월한 역할을 강조함이 적절하겠다. 현세적인 사물을 그리스도교적인 투신에 의해서 활성화시키는 일은 바로 그들의 과업이며, 그런 활동에 의해서 그들은 평화와 정의의 증거자가 되는 것이다.
본인이 여기서 특히 말을 건네고 싶은 사람들은 세례성사와 같은 신앙 고백에 의해서, 비록 불완전하나마 우리와 실제적인 친교를 나누고 있는 이들이다. 이 회칙에 표명된 관심사라든가 거기에 영감을 준 동기들이 그들에게도 친숙한 것들이리라고 본인은 확신하는데 그 이유는 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존엄성에 관한 우리의 신념을, 인간이 하느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되었으며 성령에 의하여 거룩해졌고 이 세상에서는 이러한 품위에 부합하게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우리의 공통된 신념을 ‘함께’ 증언하라는 초대를 발견하게 된다.
동시에 본인은 이 호소를 유다인들에게 보낸다. 그들은 “우리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로마 4,11-12 참조)의 유산과 구약의 전승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88) 아울러 회교도들에게도 같은 호소를 보내는 바이니 그들도 우리처럼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는 까닭이다. 그리고 세계의, 대종교들을 신봉하는 이들에게도 이 호소를 보낸다.
지난 10월 27일 성 프란치스꼬의 고향 아시시에서, 각자가 자신의 신앙 고백에 충실한 가운데에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평화에 헌신할 수 있기 위하여 모임을 가진 바 있었지만, 거기서는 평화라는 것이 그 필요 조건이 되는, 인간 전체와 모든 민족들의 발전과 함께, 바로 종교의 중대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평화와 개발 양자의 충만한 달성이 남녀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소명에 대한 충실에 달려 있음도 함께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 성취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달려 있는 까닭이다.


 

48. 어떠한 현세적 성취도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할 수 없으며 그 같은 성취가 단순히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반영하고 어느 면에서 선참할 따름임을 교회는 잘 안다.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의 종말에, 즉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임하리라고 우리는 고대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다림이 구체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들, 고유한 사회적 국가적 국제적 생활에 처한 인간들에 대한 관심을 결코 소홀히 할 구실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에 의해서 좌우되며, 오늘날 특히 그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더욱 인간다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역사의 일정한 시점에서 각 사람의 노력을 규합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 달성할 수 있고 또 달성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이든 불완전하고 잠시적인 것이기는 해도, 그 어느 것도 상실되지 않을 것이고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사목 헌장의 한 구절에서 천명한 뜻깊은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형제적 친교와 자유와 같은 인간의 본성과 노력으로 얻어진 훌륭한 결실을 전부 다 주님의 성령 안에서 주님의 계명을 따라 널리 지상에 전파한 후에, 모든 때를 씻어버리고 광채 찬란하게 변모된 그것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성부께 ‘보편되고 영원한 나라를’ 돌려드릴 때이다 … 이 나라는 이미 현세에 신비롭게 현존하고 있다.”89)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희생인 성찬의 성사를 거행함에서 현존한다. 그 식전에서는 땅과 인간의 손이 거둔 결실, 곧 빵과 포도주가 하느님의 아들이요 마리아의 아들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 성령의 능력과 성직자가 발설하는 말의 능력을 입어 신비스럽게, 그러나 실제로 또 실체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하는데, 바로 그분을 통해서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 현존하게 되었다.
이 세상의 재화요 우리 손으로 행한 노동 - 빵과 포도주 - 이 결정적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이바지하는 것이니, 주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희생을 재현하시는 가운데, 그것들을 취하셔서 아버지께 당신 자신을 바치시고 우리에게는 당신 자신과 함께 그것들을 되돌려주신다. 이 같은 희생 제사야말로 하느님 나라에 선참하는 것이요 그 나라의 궁극적인 도래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사이자 희생 제사인 성찬을 통하여 주께서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시고, 그 어느 자연적인 인연보다 강한 묶음으로 우리를 당신과, 또 우리들끼리 묶어주신다. 그리고 이처럼 한데 묶인 우리를 온 세상에 보내시어 신앙과 행실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현시대의 어둠 속에서라도 그분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고 그 나라에 선참하게 하신다.
이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는 개발과 평화를 위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수행하는 행동의 깊은 의의를 이 성사를 통해 발견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그리고 이 성사 안에서 당신의 벗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시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아(요한 15,13 참조), 우리가 더욱 관대하게 투신할 힘을 이 성사로부터 얻어내라는 부름도 받는다. 우리의 인격적인 투신은 그리스도의 투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분의 투신과 결합함으로써,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며 확실히 결실을 낼 것이다.


 

49. 본인은 이 해를 성모 성년으로 선포하였는데 그것은 가톨릭 신도들로 하여금 신앙의 이 순례에서 우리를 앞서가시고 당신의 아들 우리 구세주 앞에서 어머니의 정성으로 우리를 위해 전구하시는 마리아께로 더욱 시선을 돌리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90) 본인은 현대 세계의 이 어려운 순간을 그이와 그이의 전구에 맡겨드리고자 한다. 그리고 본인의 선임자 바오로 6세가 제안하였고 선언한 그대로, 민족들의 참다운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대개는 크나큰 고통을 감수하면서 지금까지 바쳐졌고 앞으로도 바쳐질 노력을 성모께 맡겨드리고자 한다.
오랜 시대에 걸쳐 그리스도교 신심에 입각하여, 우리는 개개인의 어려운 처지들을 복되신 동정녀께 바치는 바이니, 성모께서 이것들을 당신 아드님의 면전에 가져다 보이시면서 그분이 이것들을 덜어주시고 변경시켜 주시도록 청해주십사 하는 뜻에서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사회적 상황과 국제적인 위기까지도, 그 가난, 실업, 식량 부족, 군비 경쟁, 인권의 무시, 국지적 또는 전면적 분쟁의 실정이나 위험이라는 우려되는 측면들을 모두 합쳐 맡겨드린다. 자녀다운 마음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이의 ‘자애하신 안전’에 갖다놓고서 믿음과 희망을 품고서 저 오래된 찬미가를 다시 한번 올리고자 하는 것이다.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 우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항상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시여.”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 우리의 모친이요 여왕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돌아보시면서 “그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요한 2,3)고 말씀하신다. 또한 그이는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여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루가 1,52-53) 하고 노래하신 분이시다. 그이의 모성적인 염려는 지상에 사는 인간들의 삶의 개인적인 측면에도 사회적인 측면에도 두루 미친다.91)
지극히 복되신 성삼위 앞에서 본인은 이 회칙에 본인이 기록한 바를 모두 마리아께 맡겨드리며, 모든 이들이 숙고하고 민족들의 참다운 발전을 촉진하는 데에 투신하도록 초대하는 바이다. 이러한 의도에서 꾸며진 미사의 기도문에 이것이 잘 표현되어 있다. “모든 민족들이 한 기원을 가지게 하시고, 그들을 모아 당신 안에서 한 인류 가정을 형성하신 천주여, 당신 사랑의 불로 모든 민족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고, 서로 형제들의 정당한 발전을 기원하는 소망을 북돋아주시어, 모든 사람들에게 넘치도록 내려주시는 당신 은혜로 개인의 인격이 완성되고, 인간 사회가 온갖 분열을 극복하여 균형과 정의를 확고히 유지하게 하소서.”92)
결론으로 말하거니와, 이것이 본인이 본인의 모든 형제들과 자매들에게 청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인사와 호의의 표로 본인의 특별한 축복을 보낸다.


 

로마 성 베드로좌에서,
교황 재위 제10년,
1987년 12월 3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 레오 13세, 회칙 「새로운 사태」: Acta Leonis, XIII, 11(1892), 97-144면.
2. 「사십주년」: AAS 23(1931), 177-228면; 「어머니요 스승」: AAS 53(1961), 401-464면; 「팔십주년」: AAS 63(1971), 401-441면; 「노동하는 인간」: AAS 73(1981), 577-647면. 이 밖에 비오 12세는 레오 13세의 회칙 반포 50주년을 기념하여, 라디오 담화(1941.6.1.)를 보낸 바 있다.
3. 계시 헌장, 4항.
4. 「민족들의 발전」: AAS 59(1967), 257-299면.
5. 로세르바토레 로마노(1987.3.25.) 참조.
6. [자유의 자각], 72항: AAS 79(1987), 586면; 「팔십주년」, 4항: AAS 63(1971), 403면 이하 참조.
7.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Redemptoris Mater), 3항: AAS 79(1987), 363면 이하; 강론(1987.1.1.): 로세르바토레 로마노(1987.1.2.).
8. 회칙 [민족들의 발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을 19회 인용하고 있으며, 16회는 그중에서도 사목 헌장을 언급한 것이다.
9. 사목 헌장, 1항.
10. 사목 헌장, 4항; 「민족들의 발전」, 13항: AAS 59(1967), 263.264면참조.
11. 사목 헌장, 3항; 「민족들의 발전」, 13항: AAS 59(1967), 264면 참조.
12. 사목 헌장, 63항; 「민족들의 발전」, 9항 참조.
13. 사목 헌장, 69항; 「민족들의 발전」, 22항: AAS 59(1967), 269면 참조.
14. 사목 헌장, 57항; 「민족들의 발전」, 41항: AAS 59(1967), 277면 참조.
15. 사목 헌장, 19항; 「민족들의 발전」, 41항: AAS 59(1967), 277면 이하 참조.
16. 사목 헌장, 86항; 「민족들의 발전」, 48항: AAS 59(1967), 281면.
17. 사목 헌장, 69항; 「민족들의 발전」, 14-21항: AAS 59(1967), 264-268면 참조.
18. 「민족들의 발전」, 헌사(獻辭): AAS 59(1967), 257면 참조.
19.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주제로 하여 엮어진 문서였다.
20. 「자유의 자각」, 72항: AAS 79(1987), 586면;「팔십주년」, 4항: AAS 63(1971), 403면 이하 참조.
21. 「어머니요 스승」: AAS 53(1961), 440면 참조.
22. 사목 헌장, 63항.
23. 「민족들의 발전」, 3.9항: AAS 59(1967), 258.261면 참조.
24. 「민족들의 발전」, 3항: AAS 59(1967), 258면 참조.
25. 「민족들의 발전」, 48항: AAS 59(1967), 281면.
26. 「민족들의 발전」, 14항: AAS 59(1967), 264면 참조:“진보는 경제적 성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가 올바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전체와 인류 전체의 발전 향상이 전체적인 것이라야 한다.”
27. 「민족들의 발전」, 87항: AAS 59(1967), 299면.
28. 「민족들의 발전」, 53항: AAS 59(1967), 283면 참조.
29. 「민족들의 발전」, 76항: AAS 59(1967), 295면 참조.
30. 여기서 말하는 두 차례의 10개년 개발 계획이란 1960-1970년과 1970-1980년의 연차 계획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은 제3차 10개년(1980-1990)계획에 해당한다.
31. ‘제4세계’(the Fourth World)라는 표현이 이른바 저개발 국가들을 가리키는 데 쓰일 뿐만 아니라 수입이 중류와 상류에 해당하는 국가의 혹심하거나 극도의 빈곤을 겪는 무리들을 가리키는 데도 쓰이고 있다.
32. 교회 헌장, 1항.
33. 「민족들의 발전」, 33항: AAS 59(1967), 273면.
34. 성청이 이 국제적인 해의 거행을 함께한다는 뜻에서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가 발표한, [교회와 주택 문제:“그대는 집 없는 그대의 형제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1987.12.27.)라는 특별 문서가 있음을 주지시키고 싶다.
35. 「팔십주년」, 8-9항: AAS 63(1971), 406-408면 참조.
36. 최근에 나온 유엔의 문서 [1987년 세계 경제 조사서]는 최신 자료(8-9면 참조)를 제공한다. 시장 경제를 갖춘 선진국에서 실업률이 1970년에는 노동력의 3퍼센트였던 것이 1986년에는 8퍼센트로 뛰었다. 이것은 2천 9백만에 해당하는 사람 숫자이다.
37. 「노동하는 인간」, 18항: AAS 73(1981), 624-625면.
38.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 [국제 부채 문제에 관한 도의적 해결: 인류 공동 사회를 위하여], 성염 역(사목 110[1987,3], 118-128면 및 111[1987,5], 135-144면).
39. 「민족들의 발전」, 54항: AAS 59(1967), 283면 이하:“그렇게 되면 후진국들이 부채에 억눌려 수익의 대부분을 부채 상환에 소비할 우려는 없어진다. 이자나 상환 기간에 관해서는 쌍방에 서로 무리가 안 가도록, 증여, 무이자, 싼 이자, 연부 상환 등 여러 가지 적당한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40. 「국제 부채 문제에 관한 도의적 해결」, 서론 참조.
41. 「민족들의 발전」, 53항: AAS 59(1967), 283면 참조.
42. 「국제 부채 문제에 관한 도의적 해결」, III, 2, 1 참조.
43. 「민족들의 발전」, 20-21항: AAS 59(1967), 267면 이하 참조.
44. 아일랜드 드로게다에서 행한 연설(1979.9.29.), 5항: AAS 71(1979), II, 1079면.
45. 「민족들의 발전」, 37항: AAS 59(1967), 275면 이하 참조.
46.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 30항: AAS 74(1982), 115-117면 참조.
47. 세계 인권 선언 참조. 또한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 17항: AAS 71(1979), 296면 참조.
48. 사목 헌장, 78항 참조; 「민족들의 발전」, 76항: AAS 59(1967), 294면 이하:“우리가 빈곤과 부조리를 거슬러 싸우는 것은 결국 인간의 물질적 행복과 정신적 내지 윤리적 발전을 도모함으로써 전인류의 공동선을 증진시키려는 것이다…평화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질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이다.”
49. 「가정 공동체」, 6항: AAS 74(1982), 88면 참조: “역사란 단순히 좀더 나은 것을 향한 고정된 전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유의 사건 또는 상호 충돌하는 자유들의 투쟁이다.”
50. 이러한 이유에서 회칙에서 ‘진보’(progress)라는 용어 대신에 ‘개발’ 또는 ‘발전’(development)이라는 말을 쓰지만, 어디까지나 ‘개발’이라는 단어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에서였다.
51. 「민족들의 발전」, 19항: AAS 59(1967), 266면 이하:“날로 더욱 풍부해지는 물질 재화를 개인이나 국가의 최종 목적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모든 진보는 이중적 의의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경제적인 재화만의 획득은 인격의 성장을 방해할 뿐 아니라 인격 본연의 위대성에 위배되는 것이다. 탐욕이란 병폐에 걸린 개인이나 국가는 도덕적으로 덜 진보하였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팔십주년」, 9항: AAS 63(1971), 407면 이하 참조.
52. 사목 헌장, 35항; 바오로 6세, 외교관단에게 행한 연설(1965.1.7.): AAS 57(1965), 232면 참조.
53. 「민족들의 발전」, 20-21항: AAS 59(1967), 267면 이하 참조.
54. 「노동하는 인간」, 4항; AAS 73(1981), 584면 이하; 「민족들의 발전」, 15항: AAS 59(1967), 265면 참조.
55. 「민족들의 발전」, 42항: AAS 59(1967), 278면.
56. 「미사 경본」, 부활 성야의 ‘부활 찬송’[한국어판(1992년 신조판), 174-175면]: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씻은 죄.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57. 교회 헌장, 1항.
58. 예를 든다면, 대 바실리오, Regulae fusius tractatae, interrogatio 37,1-2: PG 31,1009-1012; 키르의 테오도레토, De Providentia, Oratio 7: PG 83,665-686; 성 아우구스띠노, De Civitate Dei, 19, 17: CCL 48,683-685를 들 수 있겠다.
59. 예를 들면, 성 요한 크리소스또모, In Evangelium S. Matthaei, hom. 50,3-4: PG 58,508-510; 성 암브로시오, De Officiis Ministrorum lib.II, 28,136-140: PL 16,139-141; 성 뽀씨디오, Vita S. Augustini Episcopi, 24: PL 32,53 이하 참조.
60. 「민족들의 발전」, 23항:AAS 59(1967), 268면: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1요한 3,17). 교부들도 곤경에 빠진 사람들에게 대한 부요한 사람들의 의무를 강조하였음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같은 회칙의 전 항목(22항)에서 교황은 사목 헌장 69항을 인용하고 있다.
61. 「민족들의 발전」, 47항 참조:“명실 상부한 자유 세계, 가난한 라자로도 부자와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인간 공동 사회를 건설하는….”
62. 「민족들의 발전」, 47항 참조:“인종이나 종교나 국적의 차별 없이 누구나 다 타인과 자연의 예속 상태에서 해방되어 참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이다.” 사목 헌장, 29항도 참조할 것. 이러한 근본 평등이야말로, 교회가 언제나 일체의 인종 차별을 반대해 온 명분이었던 것이다.
63. 발 비스덴데에서 행한 강론(1987.7.12.), 5항: 로세르바토레 로마노(1987.7.13-14.); 「팔십주년」, 21항: AAS 63(1971), 416면 참조.
64. 사목 헌장, 25항 참조.
65. 교황 권고 「화해와 참회」(Reconciliatio et Paenitentia), 16항: AAS 77(1985), 217면: “교회가 죄의 상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크고 작은 규모의 사회적 집단이나 온 나라 또는 여러 나라들의 군집 전체가 놓인 어떤 상황이나 전체적 행동 양식을 사회적 죄라는 말로 단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교회는 그런 사회적 죄의 경우들이 모두 많은 개인적 죄가 쌓이고 응집된 결과임을 알고 이를 공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상 다음과 같은 여러 종류의 인간들이 저지르는 개인적 죄의 한 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악을 조성하고 유지시키거나 그것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죄입니다. 또 어떤 종류의 사회악을 피하거나 근절시키며 적어도 줄여나갈 수 있는 자리에 앉은 이들의 나태, 비겁, 침묵에 의한 방조, 비밀 공모, 무관심 등으로 해서, 이를 그대로 방치할 때, 그것은 그 개인의 잘못입니다. 또 세상을 개선하는 일은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나서, 그것을 구실로 자기의 작은 세계에 안주하는 인간들, 제법 고상하기까지 하고 그럴듯해보이는 이유들을 늘어놓으면서 의당한 노력이나 희생을 거부하는 인간들도 모두 개인적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참다운 책임성은 인간 각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상황이라는 것이 - 제도, 구조, 사회 자체도 마찬가지인데 - 그 자체로서 윤리적 행위의 주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이 그 자체로서 선하거나 악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66. 「민족들의 발전」, 42항: AAS 59(1967), 278면.
67. 성무일도, 제3주간 화요일 저녁 기도 중의 청원 기도 참조.
68. 「민족들의 발전」, 87항: AAS 59(1967), 299면.
69. 「민족들의 발전」, 13.81항: AAS 59(1967), 263면 이하. 296면 이하 참조.
70. 「민족들의 발전」, 13항: AAS 59(1967), 263면 참조.
71. 제3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총회 개막 연설(1979.1.28.): AAS 71(1979), 189-196면.
72. 「자유의 자각」, 72항: AAS 79(1987), 586면;「팔십주년」, 4항: AAS 63(1971), 403면 이하.
73. 사목 헌장, 83-90항 참조.
74. 「어머니요 스승」, 158항: AAS 53(1961), 440면; 「지상의 평화」, 제4부: AAS 55(1963), 291-296면; 「팔십주년」, 2-4항: AAS 63(1971), 402-404면 참조.
75. 「민족들의 발전」, 3.9항: AAS 59(1967), 258.261면 참조.
76. 「민족들의 발전」, 3항: AAS 59(1967), 258면 참조.
77. 「민족들의 발전」, 47항: AAS 59(1967), 280면; 「자유의 자각」, 68항: AAS 79(1987), 583면 이하.
78. 사목 헌장, 69항; 「민족들의 발전」, 22항: AAS 59(1967), 268면; 「자유의 자각」, 90항: AAS 79(1987), 594면; 성 토마스 데 아퀴노,「신학대전」, II-II. q.66, a.2 참조.
79. 제3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총회 개막 연설(1979.1.28.): AAS 71(1979), 189-196면; 폴란드 주교들의 정기 방문 알현 석상에서 행한 연설(1987.12.17.), 6항: 로세르바토레 로마노(1987.12.18.) 참조.
80. 주께서 그들을 당신과 동일시하고자 하셨기 때문이자(마태 25,31-46), 그들에게 각별한 보살핌을 내리시기 때문이기도 하다[시편 11(12),6; 루가 1,52-53 참조].
81. 「민족들의 발전」, 55항: AAS 59(1967), 284면 참조; “바로 이런 사람들을 격려해 주어 스스로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함께 일하며 자력으로 진보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도록 인도해 주어야 한다.” 사목 헌장, 86항도 참조.
82. 「민족들의 발전」, 35항: AAS 59(1967), 274면: “초등 교육을 개발 계획의 첫째 목표로 삼아야 한다.”
83. 「자유의 전갈」, 서론: AAS 76(1984), 876면 이하 참조.
84. 교황 권고 「화해와 참회」, 16항: AAS 77(1985), 213-217면;「자유의 자각」, 38.42항: AAS 79(1987), 569.571면 참조.
85. 「자유의 자각」, 24항: AAS 79(1987), 564면.
86. 사목 헌장, 22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 8항: AAS 71(1979), 272면 참조.
87. 「민족들의 발전」, 5항: AAS 59(1967), 259면:“이런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톨릭 신자들과 그리스도교 형제들뿐 아니라 모든 선의의 사람들이 자기 능력과 노력을 함께 모아야 할 줄로 여긴다.”; 「민족들의 발전」, 81-83.87항: AAS 59(1967), 296-298.299면.
88.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4항 참조.
89. 사목 헌장, 39항.
90. 교회 헌장, 58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구세주의 어머니(Redemptoris Mater), 5-6항: AAS 79(1987), 365-367면 참조.
91. 교황 바오로 6세, 교황 권고「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 37항: AAS 66(1974), 148면 이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멕시코 사포판 성모 성지에서 행한 강론(1979.1.30.), 4항: AAS 71(1979), 230면 참조.
92. 「미사 경본」, 국가를 위한 기원 미사, “민족들의 발전을 위하여”, 한국어판(1992년 신조판), 78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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