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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교회 (Ecclesiam Suam)
교황 바오로6세 발표시기 1964-08-06 전자북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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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관한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주님의 교회
Ecclesiam Suam

1964. 8. 6.
 

사도좌와 평화의 친교를 이루는 존경하는 형제 총대주교,
수좌 대주교, 대주교, 주교, 교구 직권자,
그리고 전 세계 성직자와 신자들,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가톨릭 교회가 현대의 의무를 수행하는 방법에 관한 회칙
 


[차 례]
 
  이 회칙이 의도하는 것
  이 회칙에서 의도하지 않는 것
교황직의 세 가지 중요한 정책
  더 깊고 본질적인 자각
  불가피한 결과에 대한 쇄신
  대화의 확대
  특히 절박한 문제인 평화 
 
  I. 자 각
 
신앙 행위
  ‘깨어 있어라’
  신앙 고백의 쇄신
교회의 현재 상황
  변화하는 세상에 깊이 뿌리내리기
  여러 위험과 그 치유책
  현대의 정신 왜곡
  자기 성찰
  두 차례의 바티칸 공의회
  레오 13세와 비오 12세 교황의 교회에 관한 가르침
  학자들의 기여
나아갈 길
  신비체의 재발견
  성숙한 신앙이 열쇠
  교계는 도구
  드높은 영성 수양
  세례의 의미
 
  II. 쇄 신 

  세상의 성화를 위하여
  공의회의 도움
필요한 개혁의 종류
  교회의 본질과 무관한 개혁
  축소가 아닌 복원
  삼가야 할 과잉 적응
  그릇된 철학들
  지도 원리의 쇄신
  그리스도의 뜻에 대한 순명
  적지 않은, 어쩌면 더 많이 요구되는
복음의 두 가지 기본 계명
  청빈의 정신
  새로운 규범에 복종하고자
  경제적 현실과 갈등 없는 관계
  으뜸인 사랑
  지극히 사랑하는 교사인 마리아
 
  III. 대 화
 
  대화의 동기
  무관심이 아닌 관심과 사랑으로
  용어 설명
  선임 교황들
구원의 대화
  새로운 대화에 빛을
  시작은 우리가 먼저
  그 동기는 사랑이어야
  편협하거나 자기중심적이지도, 강압적이지도 않은
  그러나 보편적이고
  끈기 있는 대화
하나의 방법으로서의 대화
  최선의 가능한 접근법
  대화의 고유한 특성
  더욱 폭넓은 설명을 통해 깊어지는 이해
대화의 방법들
  중요한 문제들
  전제 조건들
  위험들
  공의회의 방향
  첫째가는 사도직인 선포
대화하는 교회
  모든 사람을 위한 메시지
  인정하여야 할 어려움들
  동심원의 관점에서
  첫 번째 원: 인류
  무신론이라는 악의 증대
  공산주의의 억압
  이해와 응답과 개선을 위한 노력
  대화의 가능성
  평화 운동
  두 번째 원: 한 분이신 하느님을 경배하는 사람들
  여러 영역의 공동 이상들
  세 번째 원: 그리스도인들
  정당한 바람을 들어줄 준비가 된
  장애물로 보이는 교황권
  일치의 원칙
  으뜸인 섬김과 사랑
  미래를 약속하는 재회
  마지막 원: 가톨릭 신자들
  순명의 실천
  순조로운 출발 - 가야 할 머나먼 길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과 사랑하는 자녀들의 건강을 빌며 사도로서 축복을 보냅니다.
 
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모든 인류 가족의 어머니이며 구원의 분배자입니다. 따라서 수 세기에 걸쳐, 전능하신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갈망해 온 사람들은 언제나 교회를 각별히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 가운데에도, 그리스도의 지상의 대리자들인 수많은 주교들과 신부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 성인들을 탁월한 본보기로 들 수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제가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따라 교황직에 오른 다음 처음으로 발표하는 이 회칙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거룩한 교회에 마땅히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 회칙이 의도하는 것
 
3. 이 회칙에서 저는 교회와 세상이 서로 만나 알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 인류 구원에 얼마나 중요한지, 또 가톨릭 교회가 이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더욱 분명하게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4. 지난해에 저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여러분께 직접 말씀드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미카엘 대천사 축일에 바티칸 공의회 제2회기 개막을 위하여 성 베드로 대성전에 모였을 때입니다. 그때 저는 다른 교황님들께서 교황직을 승계하시며 하셨던 일들, 곧 여러분의 아버지요 형제로서, 저의 교황직 초기에 실질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책들, 제 생각에는 가장 중요한 정책들을 담은 회칙을 발표하겠다는 뜻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5. 이러한 정책들을 발표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한 정책들은 무엇보다도 거룩한 교리들을 신중히 고려하여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1) 하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러한 정책들은, 내적으로는 오랜 경험으로 단련된 영성 생활로 활기를 띠고 외적으로는 강력한 사도직 활동을 지향하는 교회의 현 상황과 맞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오늘날 인간 사회의 현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 저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이 회칙에서 의도하지 않는 것
 
6. 그러나 저는 새롭거나 발전된 통찰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그것은 공의회가 할 일입니다. 저는 이 짧은 회칙에서 공의회의 작업을 방해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공의회의 작업을 치하하고 고무합니다.
 
7. 또한 저는 이 회칙에서 가톨릭 교리나 윤리 원칙, 사회 원칙들을 장엄하게 선포할 의도가 없습니다. 저는 단지 한 가정의 가족이나 형제처럼 여러분에게 진심 어린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뿐입니다. 제 의무를 완수하고, 여러분께 제 마음을 열어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신앙과 사랑의 일치를 더욱 공고히 하고 더욱 큰 기쁨이 되게 하려는 생각뿐입니다. 저의 목적은 사목 활동에서 점점 더 좋은 결과를 얻고, 공의회에서 더욱 풍성한 결실을 얻으며, 교회의 통치자들과 그 수하들, 협력자들과 지지자들의 영적 활동과 사도직 활동을 좌우하는 교리 규범들과 실천 규범들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교황직의 세 가지 중요한 정책

8.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 요컨대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저의 막중한 책임을 생각할 때 먼저 떠오르는 세 가지 정책이 있습니다. 바라지도 않았고 그럴 만한 자격도 없지만 오묘하신 섭리로 하느님께서는 저를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로마 주교이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삼으심으로써 그러한 막중한 책임을 제게 맡기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진 베드로를, 온 세상에 흩어진 당신 양 떼를 돌볼 첫 목자로 임명하셨던 것입니다.
 
더 깊고 본질적인 자각
 
9. 첫 번째로 저는 교회가 통찰력을 가지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교회 자체의 신비를 묵상하며, 그 기원과 본성과 사명과 운명에 관한 교리를 더욱 깊이 살펴봄으로써 교훈과 영감을 얻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익히 알려져 있는 그 교리는 금세기에 발전하고 대중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리가 충분히 연구되고 이해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 교리는 “과거의 모든 시대에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을 담고 있어 “…… 교회를 통하여 …… 알려지게”2)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가 밝혀내야 하는 하느님의 감추어진 계획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모든 충실한 제자들, 특히 “성령께서 세우시어 하느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신”3) 존경하는 우리 형제 주교님들의 기대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교리입니다.
 
10. 교회의 분명하고 활발한 자기 인식은 거룩하고 흠 없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이상적인 교회상과4) 현대 세계에 제시되는 실질적인 교회상을 비교해 보도록 이끌기 마련입니다. 사실, 실질적인 교회상은, 감사하게도, 그 거룩한 창립자께서 새겨 주신 특성들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성령께서는 이 특성들을 더욱 부각시키고 발전시키심으로써 교회가 그 창립자의 원의와, 교회가 구원의 복음 선포를 통하여 교회로 인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 사회의 특성에 더욱더 부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교회상만으로는 교회의 창립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품으신 본래의 개념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정도로 완벽하고 아름답고 거룩하며 눈부신 상태에 이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불가피한 결과에 대한 쇄신
 
11. 그러므로 교회는 쇄신을 위하여, 곧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 성찰을 통하여 교회의 지체들로 말미암은 결함들을 지적하고 단죄함으로써 그것들을 바로잡고자 과감하고 열정적으로 싸워 나가야 합니다.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 지금 제가 염두에 두고 있고 여러분께 말씀드리려는 두 번째 정책은, 교회의 지체들이 자기 잘못을 바로잡고, 완덕을 위해 노력하며, 제가 말한 쇄신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수단을 현명하게 선택할 의무가 있음을 더욱 분명히 깨닫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저 자신이 적절한 개혁을 이끄는 데에 필요한 더 큰 용기를 얻고, 아울러 이처럼 시급하고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여러분의 공감과 조언, 지지를 얻기 위함입니다.
 
대화의 확대
 
12. 물론 여러분의 것이기도 한 저의 이 두 정책은 자연스럽게 세 번째 정책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교회가 살아가고 활동하는 주변 세상과 맺어야 하는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13. 모두 알고 있듯이, 일부 세계에서는 최근 들어 그 문화가 그리스도교적 토대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그리스도교 정신에 젖어 있었고 그 민족 고유 전통에서 가장 좋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을 정도로 그리스도교에서 힘과 열정을 이끌어 낸 적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세계의 또 다른 부분을 차지하는, 이른바 신생 국가들의 광활한 영토로 이루어진 세계는, 전체적으로 볼 때, 교회에 하나가 아닌 수많은 형태의 만남의 가능성을 제시해 줍니다. 그중에는 열려 있고 편안한 만남도 있고, 힘들고 불확실한 만남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만남이 전체적으로 대화에 우호적이지 못한 불리한 만남입니다.
 
14. 따라서 바로 이 점에서 교회와 현대 세계 사이의 대화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어느 정도 절박하고 얼마나 복잡한지를 밝히고 그 적합한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공의회의 몫이 될 것입니다. 문제 해결의 필요성은 저뿐만 아니라 형제 주교님들도 느끼고 계실 것입니다. 주교님들도 이 문제의 절박성을 저 못지않게 깊이 체험하고 계시기에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과 사명, 내적인 충동에 대하여 침묵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를 공의회에서 여러분 앞에 제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왔고, 이를 논의하고 숙고하려는 준비를 더 잘 갖추고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15. 물론 이 짧은 내용의 회칙에서 제가 오늘날 교회와 인류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하고 절박한 문제들을 전부 다룰 의도는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그 문제들이란 곧, 국가 간, 사회 계층 간의 평화, 여전히 전 인류를 괴롭히는 빈곤과 기아, 자립과 개화를 향한 신생 국가들의 전진, 그리스도교 문화에 반대하는 현대의 사조, 자유로운 시민권과 인권을 부인하는 세계 여러 곳의 민족들과 교회가 겪는 어려움, 인구 증가에 따른 도덕적 문제들 등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특히 절박한 문제인 평화
 
16. 그러나 저는 세계 평화라는 중대한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저의 의무를 깊이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제가 제 자신의 직무 권한 안에서 어떠한 정치 이론에도 구애받지 않고 저의 개인적이고 순전히 세속적인 이익을 떠나 끊임없이 직접 간여하고 특별한 관심을 보여야 하는 문제입니다. 저의 목적은 인류가 폭력적이고 잔인한 전쟁들에 반대하는 정서와 정책들을 키워 나가고, 국가 간에 올바르고 합리적이며 평화로운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민족들 사이에 화목한 관계와 협력 정신을 증진하고자 최선을 다할 것이며, 이를 위하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원칙, 전쟁을 야기하는 이기심과 탐욕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최선의 원칙을 선언할 것입니다. 또한 기회가 허락된다면, 국가 사이의 갈등을 우호적이고 영예롭게 해결하는 일에 기꺼이 저의 직무를 활용할 것입니다. 저는 이 직무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직무일 뿐 아니라 사실은 명백한 의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신학의 발전과 국제 기구들의 성숙을 생각할 때 이는 현대 세계의 저의 그리스도인 사명에서 가장 시급하게 여겨야 할 의무입니다. 저의 사명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시작된 정의와 평화의 나라의 권능을 통하여 인간이 서로 사랑 안에서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제가 이 회칙에서 교회 생활에 대한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언급에 머문다고 해서 다른 매우 중요한 문제들을 잊고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가운데 일부 문제는 공의회에서 숙고하게 될 것이고, 저 또한 제 사도직 기간에 하느님의 영감과 힘을 받아 그 문제들을 연구하고 그 실질적인 해결을 위하여 노력할 것입니다.
 

I. 자 각

18. 오늘날 교회의 의무는 교회 자신과, 세상 속에서 교회의 사명, 그리고 교회가 물려받아 관리하고 있는 진리의 보화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고 깊이 인식하고자 노력하는 일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따라서 어떤 특정 문제를 연구하기에 앞서,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취하여야 할지 고심하기에 앞서, 교회는 지금 여기에서 교회 자신의 본질에 대하여 성찰함으로써 교회가 완수하여야 할 사명인 하느님 계획에 대하여 더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더욱 큰 빛과 새로운 힘을 얻고, 자신의 사명을 이행하면서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되며, 세상과 만남으로써 더 큰 유익과 결실을 얻을 수 있는 더 나은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비록 고유한 특성상 세상과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 행위

19. 교회의 이러한 자기 성찰 행위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상호적인 신앙 관계를 확립하고자 사용하신 그 방법과 매우 일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그러한 관계는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에 실현되고 또 교회가 그 자체로 드러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시가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5) 명백한 역사적 배경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는 인간의 말과 하느님 은총이라는 고유한 수단을 통하여 인간의 삶 자체로 들어온 것도 사실입니다. 구원의 메시지를 들은 인간의 영혼 속에 은총은 슬며시 깃듭니다. 이는 우리 의화의 시작인 신앙 행위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20. 저는 그리스도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새롭고 생생한 관계의 기원과 본성에 관한 이러한 성찰이 거룩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청중들에게 하신 말씀, 특히 제자들 - 오늘날 우리도 마땅히 그 일원이 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 에게 하신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행위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 번 되풀이하여 말씀하신 계명 가운데, 저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들과 특히 관련 있어 보이는 한 가지, 곧 그리스도인의 깨어 있음에 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깨어 있어라’
 
21. 사실 이와 관련한 우리 스승님의 경고는 무엇보다도 머잖아 오게 될 세상 종말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충실한 종은 마음속으로 늘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 그의 모든 생활 방식이 이에 부합하여야 합니다.

‘깨어 있어라.’ 하신 우리 주님의 권고는 우리와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들, 곧 인간의 도덕 생활을 타락시키거나 인간을 진리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위험과 유혹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6) 복음에서 우리는 올바른 생각과 행동에 대한 끊임없는 호소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사실 우리 주님에 앞서 왔고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의 시작을 선포한 세례자 요한이 늘 말하던 주제가 아니었습니까?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하지 않으셨습니까?7) 그분의 가르침은 모두 인간의 내면생활을 고무하고 장려하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존엄에 맞게 진리와 은총이라는 초자연적 선물을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한 조건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도덕적 자각을 키워 주고자 하셨습니다. 이러한 자각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에 대한 자각이었고, 이는 훗날 그들 마음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모든 것, 그분께 일어난 모든 것을 상기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8) 이러한 자각이 무르익게 되면, 사람들은 마침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께서 가르치시고 행동하신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22. 교회의 자기 사명에 대한 자각과 교회의 탄생은 일치합니다. 우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에 이 두 사건을 경축합니다. 이 두 사건은 함께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곧 교회는 위계적 사회적으로 잘 짜여진 조직으로 성장해 나가는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소명과 내적 본질, 교리, 사명에 대한 자각도 마찬가지로 성장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지는”9) 것입니다.
 
신앙 고백의 쇄신
 
23.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 다시 말해 저는 모든 사람, 곧 주교님들과 주교님의 보호에 맡겨진 모든 사람, 그리고 신자 공동체 전체, 곧 교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식적이고 아낌없는 진심 어린 신앙 행위를 권고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지금 여기에서 이러한 신앙 고백을 통하여 다시 활기를 얻어야 합니다. 그것은 요한 복음에 나오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믿음처럼 겸양하면서도 확고하고 단호한 신앙생활이어야 합니다. 당신의 권능만큼 놀라운 온유함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 주셨을 때, 그 사람은 “주님, 저는 믿습니다.”10)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또한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11)라고 한 요한 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의 믿음을 닮아야 합니다. 나중에 베드로라 불리게 된 시몬이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2)라고 한 믿음도 저에게는 특별히 소중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주교님들께 교회에 대한 의식을 보여 주고, 내밀하지만 분명한 신앙 행위를 하도록 권유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24. 사실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는 교회가 오늘날 처해 있는 전례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현재 상황

25. 교회는 자신에 대하여 성찰하여 그 고유의 놀라운 활력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구원의 메시지와 형제애를 세상에 전달하려면, 자신을 더 완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처럼, 교회는 교회 안에 머무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기를 빕니다.”13)
 
변화하는 세상에 깊이 뿌리내리기
 
26.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교회는 세상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그 구성원도 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인간 문화의 풍요로움을 이끌어 냅니다. 교회는 세상의 흥망성쇠와 함께하고 세상의 번영을 촉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 세계가 변화와 격변의 소용돌이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 외적 생활 양식과 사고방식에 깊은 영향을 주는 발전 과정에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 사회생활에서 이루어진 큰 진보와 현대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여러 철학적 정치적 사조는 인간의 견해와 영적 문화적 추구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 위험과 그 치유책
 
교회 자체가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흔들리고 있습니다. 교회에 아무리 깊이 헌신하는 사람들이라도 세상의 기류에 깊은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혼돈과 방황과 불안에 빠질 위험이 있고, 이러한 사태는 교회의 뿌리 자체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터무니없는 시각을 갖도록 합니다. 그들은 교회가 그 고유의 역할을 포기하고 완전히 새롭고 전례 없는 실존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더니즘을 하나의 실례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모더니즘은 참된 종교적 표현과는 전혀 거리가 먼, 갖가지 새로운 변장을 하고 여전히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하나의 오류이며, 분명 그리스도 교회의 참다운 가르침과 규율을 더럽히려는 세속적 철학과 세속적 경향의 시도입니다.

많은 지역에 널리 퍼진 이 모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효과적인 치유책이 필요합니다. 저는 교회의 성숙된 자각에서 그러한 치유책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경과 사도전승으로 기록되고 보전되었으며 성령의 감도와 인도 아래 교회 전통으로 해석되고 설명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마음속에 품고 계신 생각을 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움을 간청하고 그분께 기꺼이 순종할 때, 그분께서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14)
 
27. 우리가 교회 자체 안에서 볼 수 있는 오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나 하느님의 계시와 그리스도께서 주신 교회의 가르치는 권한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이러한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현대의 정신 왜곡
 
28. 그러나 이미 잘 알려진 진리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필요성은 인간의 정신 세계를 더 깊이 탐구하기를 좋아하는 우리 현대인들의 기질과 심성에 매우 잘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양심에 비추어 진리를 확실히 이해할 때에 정신적 안정을 얻습니다. 이러한 탐구 방식에 심각한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명한 철학자들이 인간의 지능 활동을 연구하여 왔고 이를 최고의 가장 완전한 기능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인간의 지적 활동이 현실의 척도이며 원천이라고 주장하기까지 되었고, 결국 추상적이고 빈약하며 부조리하고 완전히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 정신의 심오한 각성 상태에 있는 진리를 통찰하는 정신 훈련이 그 자체로 뛰어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는 오늘날 현대 문화의 최고의 표현으로 간주됩니다. 또한 이러한 정신 수양이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게 해 주는 정신의 성향과 신중하게 조화를 이룬다면, 의식적 지식의 탐구는 당연히 인간 자신, 곧 인간으로서 자신이 지닌 존엄과 지적인 힘과 실천 능력을 더 잘 알게 해 줄 것입니다.
 
자기 성찰
 
29. 또한 최근 수년간 교회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더 깊이 연구해 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뛰어난 신학자들이 이 일에 탁월한 공헌을 하여 왔습니다. 또한 위대한 석학들과 지식인들, 최고의 신학교들, 사목이나 선교 단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 분야에서 성공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왔고, 무엇보다도 교황들이 발표한 기억에 남을 만한 교리 선언들도 있습니다.
 
30. 19세기와 20세기에 교회에 관하여 다루고 교회가 발표한 수많은 신학 문헌은 여기에서 간추려 소개하기에도 너무 많습니다. 교계와 사도좌에서 이 기념비적이고 중요한 주제인 교회에 관하여 발표한 모든 문서도 여기에서 개괄하기에는 너무 깁니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그리스도 교회에서 수많은 구성원들이 갈라져 나간 16세기의 대위기로 말미암은 피해를 회복하고자 힘쓴 이후 뛰어난 신학자들이 교회에 관한 주제를 열성적으로 연구해 왔습니다.
 
두 차례의 바티칸 공의회
 
그리하여 많은 진전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는 교회와 관련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명백한 것은, 교회에 관한 교리는 사목자들과 교사들뿐만 아니라 신자들과 실상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발판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관한 교리를 다시 다루고 정의하는 임무를 맡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지속이며 완성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이 주제에 관하여 여기에서 더 이상 장황한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는 교리 교육과 영성 생활을 위한 주제로 오늘날 교회 안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레오 13세와 비오 12세 교황의 교회에 관한 가르침
 
그러나 특별히 언급할 만한 두 개의 문서가 있습니다. 1896년에 발표된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Satis Cognitum15)과 1943년에 발표된 비오 12세 교황의 회칙 「신비체」16)입니다. 이 문서들은 지금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 곧 하느님께서 세우시고 그리스도께서 세상 안에서 당신의 구원 활동을 계속하고 계시는 교회에 관한 풍부하고 분명한 가르침을 줍니다. 이 두 교황 문서는 이미 교회 신학에 대한 매우 권위 있는 저서이자 우리 모두와 관계되는 하느님의 자비 활동에 대한 풍요로운 영적 묵상 자료가 되어 왔습니다. 그 가운데 비오 12세 교황의 회칙 「신비체」의 서두에 나오는 말씀을 간단히 인용하여 보고자 합니다. 제 선임 교황의 다음과 같은 훌륭한 말씀을 묵상하여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관한 교리는 본래 구세주께서 직접 계시하신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놀라운 광채를 지니고 있어서, 우리가 그토록 존엄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이루는 가장 내밀한 일치라는 형언할 수 없는 은혜를 드러내고, 거룩한 성령께서 이끄시는 모든 이가 이를 묵상하게 하고, 이들의 마음을 비춥니다. 이는 지체들이 건전한 행동을 하여 서로 더욱 굳게 결합하게 하는 강한 자극제입니다.”17)
 
31. 저는 이 말씀을 이 회칙에서 되풀이하여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시의적절하고 절실하며 우리 시대 교회의 요구에 들어맞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신비체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때 우리는 그것의 신학적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고 영적인 힘의 원천을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인류에게 봉사하는 우리의 사명을 더 잘 완수할 수 있게 됩니다. 교회에 관한 광범한 문서들에 비추어 볼 때, 또 이 주제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목을 끄는 으뜸 주제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와 관련한 어떠한 어려움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학자들의 기여
 
여기에서 저는, 교도권에 모범적으로 순종하며 신학 연구와 해설에서 탁월한 활동을 함으로써 특히 최근 수년간 이 주제에 관하여 전문적이고 유익한 공헌을 하여 온 뛰어난 학자들에게 특별한 찬사를 보내고자 합니다. 그들은 신학교에서뿐만 아니라 학자들이나 지식인들과 나누는 토론이나 그리스도교 진리를 수호하는 대중적인 글, 신자들의 영성 지도, 갈라진 형제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하여 이러한 활동을 수행하여 왔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교회에 관한 교리의 다양한 설명 가운데 상당수가 매우 뛰어나고 지극히 유용한 것들입니다.
 
32. 저는 공의회의 위대한 활동이 계속 성령의 도우심과 빛을 받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또한 성령의 감도를 따르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과 역사의 흐름을 따라 그 가르침이 합법적이고 필연적으로 발전하여 온 과정을 더욱 깊고 온전하게 연구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을 통하여, 또한 하느님의 진리가 무익한 논쟁과 소모적인 경쟁으로 분열을 조장하는 원인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일치와 이해와 조화를 가져오는 논의가 되게 하려는 진지한 결심을 통하여 공의회가 성공적인 결실을 맺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공의회가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하느님 교회에는 기쁨이 되며, 세상에는 교훈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갈 길

33. 이 회칙에서 저는 제가 주재하는 공의회에서 현재 검토하고 있는 교회에 관한 교리 문제에 대하여 제 개인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삼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중요하고 권위 있는 회의에 연구와 논의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고자 합니다. 하느님 교회의 수장으로서 교사이며 목자로서의 제 사도 직무가 요구할 때,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것입니다. 저의 가장 큰 바람은 제가 공의회 교부들의 판단에 완전히 일치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34. 그러나 저는 이 기회를 빌려, 공의회 자체의 결실이자 앞서 말씀드렸듯이 더욱 충만하고 더욱 확고한 교회의 자기 인식 노력에서 오는 결과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말씀드리지 않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제가 이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된 때부터 제 사도 직무의 목표로 삼은 것입니다. 이는 말하자면 제 교황직의 청사진으로서, 저는 이를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께 지극히 간단하지만 성심성의껏 설명함으로써 그분들의 조언과 지원과 협력을 얻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마음을 열 때 저는 여러분을 통하여 하느님 교회의 모든 자녀에게 말을 건네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가장 간절한 희망은 그리스도의 양 떼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도 저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신비체의 재발견
 
35. 저는 교회가 심오한 자기 인식에서 얻게 될 첫 결실은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생생한 일치의 끈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것이지만 지극히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이에 대한 어떠한 이해나 묵상이나 설교도 충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신앙 유산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이 진리에 대하여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여러분은 이미 이 교리를 잘 알고 있으므로, 저는 여기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언제나 이 교리에 최대한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이 교리를 여러분의 영성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설교할 때 지도 원리로 간주하기를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제 선임자이신 비오 12세 교황께서 회칙 「신비체」에서 하신 다음의 말씀을 숙고해 보십시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바로 그리스도를 보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사시고 교회를 통하여 가르치시며 다스리시고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여러 구성원들을 통하여 여러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18)
 
우리가 이 놀라운 신앙의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성경 말씀과 교부들, 교회 학자들과 성인들의 말씀을 되새겨 보는 일은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은 포도나무시고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19) 우리 앞에는 끊임없이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20)라고 일깨워 주는 바오로 사도의 풍요로운 가르침이 있지 않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머리이신 그리스도 덕분에 …… 온몸이 자라나고”21)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22)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교회 학자들 가운데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다음과 같은 글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된 것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드립시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 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 …… 그러므로 머리와 지체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함입니다. 머리와 지체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합니다.”23)
 
성숙한 신앙이 열쇠
 
36.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것은 신비, 교회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온 마음을 기울이면 분명히 우리는 더 많은 영적 유익을 얻게 될 것이고, 오늘날의 교회는 그러한 영적 유익이 가장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현존, 그분의 삶 자체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그리고 신비체 전체 안에서 그 힘과 효력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살아 있고 생명을 주는 신앙의 실천을 통하여, 앞서 이미 인용한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24)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교회의 신비에 대한 인식, 곧 우리의 삶 안에서 실천되는 성숙한 신앙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우리에게 교회 감각, 곧 교회에 대한 인식을 가져다줍니다. 이는 참그리스도인이라면 깊이 젖어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말씀의 학교에서 자라나고, 성사들의 은총으로 길러지며, 보호자이신 성령의 천상 감도를 받으며, 복음의 덕을 실천하도록 교육받고, 교회 문화와 공동체 생활에서 영향을 받습니다. 또한 그는 하느님 백성에게 부여된 임금의 사제단`25)의 품위에 동참하는 커다란 기쁨을 누립니다.
 
교계는 도구
 
37. 교회의 신비는 사변 신학의 영역에 국한된 진리가 아닙니다. 이 신비는 신자들이 비록 이를 분명히 이해하기 전이라도 직관적 경험으로 알 수 있도록 실천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인 생활 방식으로 입문하게 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고26) 그들을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며 그들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교회 교계 직무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신자들은 자신들이 한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교계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 신비체에 진리와 은총의 놀라운 선물을 전달해 주시고자 만드신 일종의 도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을 순례하는 신비체에 외적이고 가시적인 구조를 부여하시고, 숭고한 일치를 이루어 주시며, 여러 임무를 수행할 능력과 다양하면서도 조화로운 형태와 영적 아름다움을 주시고자 이 신비체를 이용하십니다.

어떠한 표상도 이 실재적이고 숭고한 신비의 적절한 개념을 전달하기엔 역부족이지만, 바오로 사도가 사용한 신비체에 관한 표상을 언급하였으니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표상, 곧 당신 자신이 계획하시고 지으신 건물의 표상도 언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원래 힘없고 약한 사람 위에 이 건물을 세우셨지만, 그를 견고한 반석이 되게 하여 주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없으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일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27)

38. 교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우리 마음속에 일깨우고 훌륭하고 사목적인 교육 방법으로 이를 신자들 안에 북돋울 수 있을 때에만, 오늘날 교회론을 배우는 학생들이 겪는 여러 가지 명백한 어려움들이 사실상 극복될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어려움들이란 어떻게 교회가 가시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이고, 자유로우면서도 규율에 매여 있으며, 특성상 공동체적이라고 하지만 거룩하고 위계적인 기초 위에 조직되고 있고, 이미 거룩하지만 아직 성화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관상적이면서 동시에 활동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는 우리가 실제로 교회 생활을 함으로써 명확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가르침을 가장 잘 설명해 주고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드높은 영성 수양
 
교회의 이러한 인식을 통하여 얻게 될 더 큰 이익은 바로 최고의 영성입니다. 이 영성은 성경뿐만 아니라 거룩한 교부들과 교회 학자들의 저술을 읽음으로써 길러집니다. 또한 교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길러 줄 수 있는 모든 것, 곧 체계적인 교리 교육, 말과 표징과 열렬한 기도와 천상 진리에 대한 묵상으로 탁월하게 영성을 가르쳐 주는 거룩한 전례에 대한 능동적인 참여, 그리고 관상 기도에 정진하려는 확고한 노력 등을 통해서도 이 최고의 영성을 기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완덕을 닦는 수양은 오늘날에도 교회의 영적 힘이 솟아나는 가장 풍부한 원천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령의 빛을 받는 수단으로서, 교회에 매우 특별한 것입니다. 또한 교회가 자신의 종교 활동과 사회 활동을 필연적이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교회가 세속의 어려움 가운데 가장 확실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어막이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쇄신시켜 나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까닭입니다.
 
세례의 의미
 
39. 세례 받은 이들과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합체된 이들은 세례에 가장 큰 중요성을 부여하여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더 높은 신분으로 들어 올려지고 초자연적 생명으로 새로 태어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행복과 그리스도의 형제자매가 되는 특별한 영예, 자기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축복과 은총과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그들은 새로운 삶으로 부름 받았으나 원죄의 비참한 상태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인간성을 조금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지닌 인간성은 이제 가장 아름다운 완덕의 꽃을 피워 가장 소중하고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거룩한 세례를 받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어떤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세례 받은 사람의 존재 자체를 뒤흔들어 놓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는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세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곧, 생명을 주는 하느님 진리의 빛이 자신의 영혼을 밝히고, 자신에게 하늘이 열리며, 빛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행복의 샘이신 하느님을 뵈러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그 빛을 우리의 덧없는 삶에 비추어 주는 ‘조명’으로 세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40. 이러한 성찰 덕분에 우리 자신과 우리 직무에 영향을 주는 실질적인 결단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미 교회 안의 모든 곳에서 이러한 결단들이 이행되고 있고 신중하고 열렬한 신앙의 열정으로 촉진되고 있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저는 이러한 결단을 승인하고 상찬하며 추인하고 축복합니다.


II. 쇄 신

41. 저의 간절한 바람은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뜻하신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곧 하나이고 거룩한 교회,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고 합당한 자격을 부여하신 완덕을 추구하는 데에 온전히 헌신하는 교회 말입니다. 지상의 나그네인 교회는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뜻대로 완덕의 이상을 드러내고자 실제로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살아 있는 교회가 부딪쳐야 하는 가장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실제로 얼마나 힘 있고 효과적인지를 보여 주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행동으로 이끌고, 엄중한 비판을 받아들이게 하며, 그 목적에 늘 부합하게 합니다. 이는 교회 안에 기도와 성찰, 참회와 희망, 노고와 확신, 모험과 성취의 정신을 낳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의 본질 자체와 인간 삶에서 진리가 차지하는 특별한 중요성에서 생겨난 문제입니다. 교회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탁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본질은 무엇인지, 인간 본래의 완전한 상태와 원죄로 말미암은 비참한 결과는 어떠한지, 선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의 역량은 어느 정도인지, 선을 바라고 성취하는 데에 어떠한 도움이 필요한지, 이 현재 삶의 중요성과 목적은 무엇인지, 인간이 추구하거나 이미 소유하고 있는 선은 무엇인지, 완덕과 성덕에 이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지, 최고의 완덕과 완전함에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길을 배우려는 끊임없는 강한 바람을 가지고 교회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저의 간절한 바람은 교회에서 수 세기 동안 계속되어 온 그리스도인 완덕에 관한 모든 소중한 논의들이 다시 한 번 그에 합당한 중요성을 얻어, 새로운 영성 규칙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새로운 힘을 얻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성덕을 따르고자 노력하도록 고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과 모범, 그분의 인도와 도움 덕분에 우리는 이 성덕에 대하여 알고 이를 바라며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성 방식은 교회의 관습과 전통으로 확인되고 교회 지체들의 일치된 행동으로 확립되었으며, 성인들의 탁월한 삶으로 구현되었습니다.
 
세상의 성화를 위하여
 
42. 교회가 몸담고 있는 외적 조건 자체가 종교적 도덕적 완덕을 향한 이러한 노력을 더욱 촉진합니다. 교회가 주변 세상의 변화에 무관심하거나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외적 조건은 교회의 활동 과정에 온갖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 또 이를 조정하고 제약합니다. 아시다시피, 교회는 세상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살며, 따라서 그 지체들은 세상의 영향을 받고 세상에 이끌립니다. 그들은 세상의 문화에 젖어 있고 세상의 법에 매여 있으며 세상의 풍습을 따릅니다. 세상과 이루는 이 긴밀한 접촉은 계속해서 교회에 문제를 야기하고 있고, 오늘날 이 문제들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장려하고 보존하는 그리스도인 삶은 기만이나 타락, 자유에 대한 억압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원천을 거부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오류나 악에 오염되지 않도록 주의하듯이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도 경계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현세의 환경이 요구하거나 또는 거의 강요한다고 할 수 있는 사상이나 삶의 형태에 적응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물론 그러한 사상이나 삶의 형태가 교회의 종교적 도덕적 가르침의 기본 원칙들과 양립할 수 있는 경우라면, 이러한 형태들에 접근하여 그것들을 바로잡고 품위 있게 만들고 장려하고 거룩하게 하고자 노력하여야 합니다. 이는 교회에게 지속적인 자기 성찰과 외적 행동에 대한 재평가의 과정을 요구합니다. 실제로 이는 현시대가 교회에 진지하게 꾸준히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의회의 도움
 
43. 여기에서 이번 공의회가 매우 시의적절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공의회의 주된 목표는 교회 법전을 개정하고 그리스도교 생활의 실천을 더 용이하게 하려는 사목적 특징을 지닙니다. 그리스도교 생활이 언제나 그 거룩한 본질에 충실할수록 그 실천은 그만큼 더 수월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의회는 대부분의 교령들의 발표를 앞둔 지금도 매우 성공적입니다. 공의회는 목자들뿐만 아니라 신자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교 생활의 초자연적 특성을 온전히 보전하고 증진하려는 열망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는 그들의 일상 행위에서 이러한 참된 특성을 분명히 드러내야 할 양심상의 의무가 있음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공의회는, 게으른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고 착한 사람은 더 착한 사람이 되도록 격려하며, 더 착한 사람은 관대한 정신을 지니게 하고, 관대한 사람은 성화를 이루도록 장려합니다. 또한, 공의회는 성덕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밝히고, 창의력이 넘치는 사랑을 일깨우며 그리스도인의 영웅적 삶과 덕행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불러일으킵니다.
 
44. 공의회는 당연히 어떤 개정 사안들을 교회의 법과 규율에 반영시켜야 할지를 결정할 것입니다. 공의회 후속 위원회나 특히 이미 설치되어 있는 교회법 개정 위원회는 공의회의 권고 사항들을 구체적인 용어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 교회의 모습을 정화하고 젊게 하고자 어떠한 결정들이 필요한지 본인에게 제시하는 일은 여러분의 의무일 것입니다. 저 또한 있는 힘을 다해 이 개혁을 지원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다시 한 번 명백히 밝히는 바입니다.
 
과거에도 흔히 개혁에 대한 결의가 공의회 개최와 이어져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렇게 합시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회에 어느 특정 이단을 없애거나 공적 무질서를 바로잡으려는 목적에서가 아닙니다. 다행히 이러한 무질서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하나의 가시적인 사회인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새로운 영적 열정을 불어넣고, 그 많은 지체들이 저지르는 잘못에서 이 신비체를 정화하여 신비체가 새로운 힘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필요한 개혁의 종류

45.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러한 결과를 얻고자, 저는 여러분 앞에 그러한 개혁들에 도움이 되는 생각들을 제시하고, 여러분에게 어떠한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 그러한 개혁을 고무하는 데에 필요한 용기를 주며, 더 효과적인 개혁 실행을 위한 일반 원리들을 개략적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교회의 본질과 무관한 개혁
 
46. 먼저 개혁 활동에 지침이 될 몇 가지 규칙들을 제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이는 교회의 본질이나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구조를 개혁하고자 하는 문제는 결코 아닙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개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완전한 잘못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하고 사랑받는 교회에 불신의 오명을 남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교회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축복의 하나로 간주하여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정신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28) 증언해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살아 있는 참지체이고 그분 복음의 진정한 상속자이며 사도들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그토록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교만도 오만도 완고함도 어리석음도 아니라 바로 확고한 믿음, 기쁜 확신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특징인 진리와 성덕의 위대한 유산을 소유하고 본래 사도전승의 살아 있는 유산을 흠 없이 보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이유입니다.29) 또한 이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교회 앞에서 더 큰 책임을 지고 있다고 느끼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토록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느님께 책임이 있고, 바오로 사도가 일컬은 대로 우리가 “맡은 것”30), 이 보화를 지키고자 하는 바람과 결심과 더불어 이와 같은 확신을 교회 안에 북돋워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갈라진 형제들과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함께 하느님의 은총을 나눌 책임이 있습니다.
 
축소가 아닌 복원
 
47.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개혁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의 관심은 무언가를 바꾸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새겨 주신 독특한 모습들을 더욱 확고히 지키려는 데에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교회가 교회 본연의 모습에 부합하는 그 완덕과 아름다움의 이상, 그 본연의 타고난 모습에서 현재의 교회 구조를 갖추기까지 교회가 이루어 온 필연적이고도 통상적이고 합당한 성숙 속에서 한결같이 추구하여 온 그 이상을 복원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교회 초기의 작은 모습이 참되고 정당하며 유일한 형태인 양 여기면서 오늘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워진 넓고 웅장하며 장엄한 성전이 되어 버린 교회가 그 최소 규모로 축소되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교회 일부 지체들의 특별한 영적 선물(은사)을 생각하며 교회 구조 전체를 쇄신하려는 바람을 품어서도 안 됩니다. 어떤 이들은 진정한 교회 쇄신이란 흔히 자신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일부 열성적인 사람들의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쇄신에 대한 그들의 그릇되고 허황된 꿈은 교회 본연의 모습 자체를 쉽게 훼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역사를 이해하고 하느님의 뜻을 겸손한 마음으로 찾으려 노력하면서 교회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나약함으로 교회의 찬란한 모습과 교회의 거룩한 활동이 빛을 잃을 때에도 교회를 이끄시고 도우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찬란함과 거룩함을 발견하고 촉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가야 할 과잉 적응
 
48. 우리 스스로 이러한 확신을 더 굳게 가짐으로써 개혁에 대한 열망에서 생겨날 수 있는 또 다른 위험도 피하여야 합니다. 개혁에 대한 열망은 우리의 거룩한 의무를 깨달아 심적 압박을 받는 우리 목자들뿐만 아니라 교회 개혁이란 주로 교회의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을 세속화된 현대 사회의 관습과 추세에 적응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신자들의 마음속에 또 다른 위험을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속적 삶은 실제로 매우 강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삶을 따르는 일이 불가피하고 실제로 매우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깊은 신앙도 없고 교회법에 충실하지도 않은 이들은 세속적인 삶의 기준이 그리스도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선의 유일한 삶의 기준이라는 가정 아래서 자신을 이러한 세속적 삶의 기준에 맞출 때가 무르익었다고 쉽사리 생각합니다.
 
적응에 대한 이러한 갈망은 철학 영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고가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오로지 진리만을 갈구하며 검증된 스승이 아니면 어떠한 권위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영역에서 이러한 경향이 특별히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또한 도덕적으로 올곧은 것과 올바른 삶의 행위를 정의하기가 날로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고 있는 윤리 영역에서도 그러한 갈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릇된 철학들
 
49.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개념을 훼손하고자 하는 자연주의 이론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상대주의 역시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동등한 가치로 다루려고 하면서, 그리스도교 원리의 절대성을 공격합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교 생활에서 노력이 요구되거나 불편을 일으키게 하는 모든 것을 없애려는 경향이 늘어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그리스도교의 수덕 실천과 하느님의 것들에 대한 관상을 헛되고 무익한 것으로 보고 거부합니다.
 
사실, 때때로 언제든 세속 사회로 들어가 세상 사람들 특히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람이 되려는 사도적 열망과 결의에 차서, 일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 원리들을 접어 두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결심에 힘과 의미를 부여해 주는 그리스도인다운 품위를 포기해 버리기까지 합니다. 일부 젊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대중과 개별 집단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장한 노력으로 그들과 구별되기보다는 그들과 똑같이 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이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이러한 쓸데없는 모방으로 그들 노력의 참다운 가치와 효과가 상실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 있어야 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중요한 말씀은 오늘날 실천으로 옮기기는 힘들지만 그만큼 특히 중요합니다. 늘 살아 계시어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시는31)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당신 아버지께 드리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기도 안에 우리 현대인도 포함시켜 주신다면 좋을 것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32)
 
지도 원리의 쇄신
 
50. 이 권고의 목적은, 과거에 교회가 채택한 방식들을 엄격히 고수한다거나 일반적으로 현대의 특성에 부합한다고 생각되는 실천 수단들을 거부하는 데에 완덕이 있다는 생각을 지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수단들을 시험하여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요한 23세 교황께서 사용하셨고 제 교황직의 목표이자 목적을 표현하는 말로 채택한 ‘쇄신 또는 현대화’(aggiornamento)라는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말을 공의회의 지도 원리로 승인하고 확인할 뿐만 아니라, 온 교회가 이 말에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이 말이 교회에 자극을 주어 교회가 자신의 활력과 역량을 더욱 키워 자신을 알고 시대의 징표를 주의 깊게 살피며 언제 어디서나 젊은 열정을 가지고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할”33)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뜻에 대한 순명
 
51. 우리의 공동 권고와 이익을 위하여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교회는 그 외적 법률을 바꾸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순명을 따르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취지에서 스스로 만든 법률을 지킬 때 자신의 젊은 활력을 되찾을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쇄신, 그리스 말로 메타노이아(회심), 완덕 수행의 비결이 있습니다.
 
적지 않은, 어쩌면 더 많이 요구되는

자신의 의무를 더 깊이 인식하고 또 이를 완수할 만큼 더욱 성숙하고 실천적인 지혜를 가진 현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신뢰함으로써 교회가 자신의 법률이나 계명을 더 쉽게 지킬 수 있게 되더라도, 법 자체의 본질적 구속력은 보존됩니다. 교회가 신중한 법 제정을 통하여 제시하고 설명하는 그리스도인 생활 방식은 적지 않은 성실성과 인내와 자기희생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 구세주께서 권유하신 “좁은 문”34)을 택하게 합니다. 이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는 전에 못지않은 필요하고 힘든 즉각적인 복종을 요구하지만, 자연적인 동기보다 초자연적인 동기로 고무되기에 더욱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세상의 정신에 동화되고, 그리스도교의 수덕 규칙을 거부하며, 현대의 도덕적 해이에 무관심하고, 현명하고 적법한 장상들의 권위에서 벗어나며, 현대 사상의 모순된 형태에 무관심한 이러한 경향들은 교회에 활력을 주고 성령께서 주시는 힘과 권능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를 강건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교회에 깨어 있는 형제애의 정신을 불어넣지도 않고, 교회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지도 않습니다. 교회에 축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들은 오로지, 하느님 은총에 따라 살아가려는 결심,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한 자세, 거룩한 교계의 서열 사이에 그리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들 사이에 이루는 일치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는 우유부단하거나 비겁하지 않고 충성스럽고 강합니다.

52. 오늘날 바람직한 그리스도인 삶의 방식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는데도 설명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이를 길게 설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 주교님들께서는 우리 시대의 도덕적 요구에 대하여 잘 알고 계시고,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품위 있고 깨끗하며 진실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우리 시대의 도덕적 위험과 악습을 공개적으로라도 고발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경에 나온 다음과 같은 장엄한 권고를 기억합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35)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영감을 얻어 깨어 있고 근면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공의회는 우리에게 새롭고 유익한 지침을 줄 것이고, 우리는 지금이라도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복음의 두 가지 기본 계명

53. 그런데 제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두 가지 특별한 요소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제가 보기에는 가장 중요한 요구와 의무와 연관되는 것들이고, 교회 생활 쇄신에 대한 전반적인 방침을 성찰해 볼 거리를 줍니다.

청빈의 정신
 
54. 첫 번째는 청빈의 정신, 아니 그보다는 이 정신을 지키려는 열정입니다. 이번 회칙에서 저는 이 정신에 대하여 분명히 언급하였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 안에서 이 계명이 지니는 탁월함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이를 수 있도록 예정해 주신 하느님 계획의 기본 요소이지만, 부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현대의 경향으로 매우 큰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청빈 정신에 대한 열정은,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많은 잘못과 오류를 깨닫고 현재 우리 생활 방식의 바탕이 되어야 하는 원칙을 배우며 그리스도교를 가장 잘 선포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새로운 규범에 복종하고자
 
제가 여기에서 청빈의 정신에 대하여 말씀드리는 이유는 우리 모두 이를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주제에 관한 특별한 교회법 규정을 발표할 생각입니다.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 여러분의 동의와 조언과 실례로 도움을 주기를 청합니다. 교회 안에 성령의 활동과 영감을 권위 있게 해석하는 일은 여러분의 임무이기에, 저는 여러분이 사목자와 신자들에게 청빈의 정신이 그들의 모든 말과 행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쳐야 하는지 분명히 밝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가 권고하였듯이,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36) 저는 여러분께서 우리가 다 함께 어떤 규정과 결정들을 교회의 의무로 만들어야 할지 제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믿을 수 없는 인간적인 수단들보다는 하느님의 도움과 영적 가치를 더욱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사람들과 우리에게 영적 자산이 경제적 자산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그러한 지침들이 필요합니다. 경제적 자산의 소유와 사용은 우리 사도직 사명의 이행과 이익에 맞춰지고 그것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경제적 현실과 갈등 없는 관계
 
55. 청빈의 정신은 그리스도 복음의 특징입니다. 청빈의 필요성과 탁월성에 대하여 지나가듯 언급하였다고 하여, 저는 청빈에 대한 열정이 중요한 경제 법칙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적절하게 적용하는 데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청빈의 정신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엄청나게 발전한 주제입니다. 청빈에 대한 열정은 문명의 발전, 특히 그것의 인간적 사회적 측면의 발전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복음적 청빈에 대한 열정으로 내적인 자유를 얻게 됨으로써 사실상 경제 문제의 인간적 측면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그러한 측면들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필요하다면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삶에 대하여 침착하고 흔히는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즉시 기꺼이 가난한 이들을 도우러 올 수 있으며, 부가 사람들 사이에 갈등과 이기주의, 교만의 원천이 되기보다는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하여 정당하고 공평하게 사용되고 더 큰 안목을 가지고 분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사실 영적이고 영원한 자산보다는 못하지만 현세 생활에서 꼭 필요한 이러한 외적 자산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복음을 따르는 사람은 신중한 결정을 내릴 수 있고, 이 분야에서 참되고 인간적인 기여를 합니다. 우리는 학문과 기술, 그리고 특히 인간의 노동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학문과 기술과 노동으로 생산된 빵은 식탁에 놓이는 것이든 제대에 놓이는 것이든 거룩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인 사회 교리이고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는 건전한 교리입니다. 저는 기꺼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제 자신의 권위로 이 교리를 확인하는 바입니다.
 
으뜸인 사랑
 
56.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다른 요소는 분명 여러분이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인 사랑을 기르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사랑은 신구약에서 계시된 대로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계획의 핵심이며 정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영성 생활을 실천하는 목표가 사랑이라고 한다면 틀린 말입니까? 사랑을 더 완전하고 더 기쁘게 실천하는 것이 모든 신학 연구와 그리스도인 신심 실천의 목표라고 말하면 사실이 아닙니까? 이 두 물음은 제게 교회가 그 상속자이고 수호자이며 주인이고 관리자인 성경과 성사의 보화에 대하여 묵상해 보게 합니다.
 
제 선임 교황들과 우리 시대의 천상과 지상의 성인들, 그리고 신자들의 신심과 완전히 일치되어, 저는 사랑이, 오늘날 이론으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생활의 실천에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들 가운데서 정당하고 가장 으뜸인 자리를 차지하여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당신 사랑을 우리에게 풍부히 내려 주시는 하느님께 우리가 드리는 사랑뿐만 아니라 우리가 형제인 온 인류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야 하는 사랑도 그러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로잡습니다. 사랑이 이루지 못하거나 새롭게 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37) 우리 가운데 이를 깨닫지 못하는 이가 있겠습니까? 이를 깨달았으면, 지금이 바로 사랑을 실천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지극히 사랑하는 교사인 마리아
 
57. 여기에서 제시하는 그리스도인의 고결하지만 겸허한 완덕의 이상은 동정녀들 가운데서 가장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를 떠올리게 합니다. 마리아께서는 이 완덕의 이상을 당신 자신의 인격으로 가장 완전하고 훌륭하게 드러내신 분이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지상에서 이 이상적인 완덕에 가장 완전히 일치한 삶을 사셨고, 지금은 하늘 나라에서 그 영광과 복을 누리고 계십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한 신심이 번성하고 있고, 저도 이 기회를 빌려 그리스도인 완덕의 모범이시며 참된 덕의 거울이시고 우리 인류의 자랑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그리스도의 거룩한 동정 성모 마리아께 대한 공경을 표현하게 되어 기쁩니다.
 
저는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한 신심을 복음적 삶을 실천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깁니다. 저는 거룩한 장소를 순례하며 참된 그리스도교의 교훈을 성모님에게서 배우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께 본래의 흠 없고 아름다운 육신을 주시는 특권을 받으셨으니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고 자애로우시며 겸손하시고 티 없으신 분이십니다.
 
친애하는 형제 주교님들, 교회 생활의 영적 도덕적 쇄신을 논의하고 있는 지금도 저는 성모님께 간절한 눈길을 돌립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는 지극히 사랑하는 교사이시기 때문입니다. 
 

III. 대 화

58. 대화라는 이 세 번째 제목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은 가톨릭 교회가 현대 세계에 대하여 지녀야 하는 정신적 자세입니다. 교회의 끊임없는 자아의식 증대와 그리스도의 이상에 부합하려는 치열한 노력은 교회를 둘러싼 세상, 교회가 영향을 주려고 하는 세상과 매우 다르게 행동하고 사고하도록 만들 수 있음을 생각할 때, 교회는 과연 오늘날 인간 사회와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대화의 동기
 
59. 복음은 교회와 세상의 차이에 대하여,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여야 할 필요에 대하여 분명하게 일러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상이란 신앙의 빛과 은총의 선물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 순진하고 낙관적인 생각에서 자신들의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충만하고 지속적으로 넉넉한 번영을 누리는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삶에 대하여 지극히 염세주의적인 사고 속으로 도피하여 인간의 사악함과 나약함, 도덕적 결함은 피할 수도 치유할 수도 없는 것이며 어쩌면 개인의 자유와 진실성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바람직한 것일 수조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리하고 때로는 모질도록 진실하게 그 점을 고발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나약함을 이해하고 치유하기도 합니다. 복음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하고 자족하며, 마음껏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환상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성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빛이고 새로움이며, 힘이고 구원이며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새롭고 다른 차원의 삶이 생겨나게 하며, 그 경이로움은 신약 성경 곳곳에 선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바오로 성인은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38)
 
60. 그리스도인의 삶과 세속의 삶이 다른 것은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의화되었다는 우리의 의식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특히 세례로 파스카 신비에 참여할 때 의화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성인이 말한 것처럼, 세례는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39)
 
61. 그러므로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이 특별하고 놀라운 삶에 대하여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의 존엄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주변 어디에나 존재하는 저주받을 인간의 비참을 피할 수 있으며, 인간적 영광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62. 이방인들의 사도는 당시의 그리스도인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불신자들과는 상종하지 마십시오. 의로움과 불법이 어떻게 짝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빛이 어떻게 어둠과 사귈 수 있겠습니까? …… 신자와 불신자가 어떻게 한몫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40)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교육자들과 스승들은 젊은 신자들에게 그들의 특권적 위치와, 세상이 사는 방식대로가 아닌,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의무에 대하여 상기시켜 줄 책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위하여 바치신 기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41) 교회는 예수님의 이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삼고 있습니다.
 
무관심이 아닌 관심과 사랑으로
 
63. 우리가 세상과 구별된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세상에 무관심하다거나 세상을 두려워한다거나 세상을 경멸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교회가 자신을 인류와 구별하는 것은 인류에 대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더 가까이 가려는 것입니다. 질병의 위험을 깨달은 의사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질병에서 보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고자 노력합니다. 교회도 같은 일을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교회만이 독점적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보지 않습니다. 또한 교회가 엄청난 특권을 누리면서도 그 특권을 나누어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교회는 자신의 구원에서, 가까이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 줄 이유를 찾습니다. 교회는 스스로의 노력을 통하여 구원의 축복을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용어 설명
 
64. 앞서 말하였듯이, 교회가 하느님께서 교회에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면 많은 힘을 얻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 받은 사명과 널리 전파되어야 할 메시지를 명확히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화 의무, 모든 민족을 가르쳐야 할 우리의 사명, 모든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힘써야 할 우리의 사도적 노력이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단지 신앙에 충실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교 전통을 통하여 물려받은 진리와 보화와 은총을 보존하고 보호하여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듯이, “그대가 맡은 것을 잘 지키십시오.”42) 그러나 신앙의 보존이나 보호도 교회가 받은 은사들과 관련된 교회의 의무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의 본질 자체가 요구하는 것은, 그 은사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명령,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43)라고 하신 말씀에서 명확히 드러나 있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회피할 수 없는 사명이란 뜻을 내포합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충동은 그 사랑을 외부로 나누어 줌으로써 표현되고자 합니다. 저는 이러한 내적인 사랑의 충동에 ‘대화’라는 말을 적용하고자 합니다.
 
65. 교회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대화를 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해 줄 말과 전해 줄 메시지가 있으며, 세상과 나누어야 할 대화가 있습니다.
 
66. 저는 교회 생활의 이 특별하고 중요한 측면을 숙고하고 연구하는 것이 공의회의 목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공의회의 공을 가로챌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공의회의 교부들은 이 문제들을 자유롭게 또 상세하게 논의하여야 합니다.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 저의 유일한 관심은 세 번째 회기가 시작되기 전에 주교님들께서 몇 가지 사항들을 고려해 보시도록 제안함으로써 교회가 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하여, 그리고 어떠한 방법을 추구하여야 할지 또 어떠한 목표에 도달하여야 할지 우리 모두 더욱 명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선임 교황들
 
67. 사실, 저는 저의 사도 직무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화라고 확신하기에 제게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지난 세기의 저의 선임자들에게서 저는 사목의 방향과 방식을 물려받았습니다. 저의 첫 번째 스승은 위대하시고 현명하신 레오 13세 교황이십니다. 레오 13세 교황께서는 복음서의 신중한 율법 학자처럼,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44) 집주인을 닮으셨습니다. 사도좌의 교도권에서 비롯되는 막강한 위엄으로 그분은 현대의 문제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데에 전력하셨습니다. 저의 또 다른 스승들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분의 뒤를 가까이 따랐던 그분의 후계자들입니다.
 
68. 저의 선임 교황들, 특히 비오 11세와 비오 12세 교황께서 제게 물려주신 풍부한 교리적 유산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비오 11세와 12세 교황께서는 이를테면 교과서적 언어가 아니라 현대인이 말하는 일반어를 사용하여 하느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 사이의 간격을 메우고자 노력하셨습니다. 그분들의 이러한 사도적 노력이 대화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저의 바로 앞 선임자이신 요한 23세 교황께서는 현대인이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최대한의 범위 안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전해 주는 스승으로서 확신을 가지고 노력하셨습니다. 사목의 방향을 전해 받은 것은 다름 아닌 공의회가 아닙니까? 공의회는 현대의 사조에, 현대 세계의 정신적 혼란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의 언어, 문화, 풍습, 감성에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불어넣으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바꾸고자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세상에 다가가 말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조건입니다.
 
69. 저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저에게 주목하도록 하는 것이 그리 내키지는 않지만 저는 주교단과 그리스도인 백성에게 끈기 있게 이러한 노력을 해 나가려는 저의 결심을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저의 나약한 힘으로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또 하느님께서 제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의 한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제게 운명 지워 주신 대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 다가가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저는 존경과 인내와 사랑으로, 또 세상을 알고자 하는 노력과 하느님께서 제게 맡겨 주신 진리의 은사와 은총을 세상에 전해 주고자 하는 노력으로 세상에 다가갈 것입니다. 저는 세상이 하느님의 구원에 동참하도록, 저의 이 간절한 희망에 동참하도록 만들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저는 제 마음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다음 말씀을 겸손하게 그러나 확고하게 저의 말씀으로 삼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45)

구원의 대화

70. 그러므로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 이 대화의 숭고한 기원은 바로 여기에, 곧 하느님의 뜻에 있습니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입니다. 종교는 기도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기도는 대화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초자연적인 관계인 계시도 마찬가지로 대화로 볼 수 있습니다. 강생을 통하여, 그리고 복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담의 비참한 타락 이후 단절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 아버지의 거룩한 대화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복원되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구원 역사 전체가 하나의 파란만장한 대화입니다. 이 대화는 하느님께서 먼저 멋지게 시작하셨으며,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과 대화를 이어 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와 인간의 ‘대화’46)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자신과 하느님 생명의 신비, 본질은 하나이면서 세 위격을 지니신 하느님 자신의 신비에 대하여 알려 주십니다. 그와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순수하고 꾸밈없는 사랑으로 인식하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높임과 섬김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으뜸가는 계명은 사랑입니다. 어린아이와 신비주의자는 모두 이 무한하고 신뢰할 수 있는 대화에 참여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신비주의자는 바로 그러한 대화에서 자신의 영적인 힘을 가장 많이 발견합니다.
 
새로운 대화에 빛을

71.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과 시작하고 맺으신 이러한 관계, 이러한 대화는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매우 실제적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인류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강화해 나가야 할지를 이해하려면 이러한 관계와 대화를 면밀히 숙고하여야 합니다.
 
시작은 우리가 먼저
 
72.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대화를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47)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요구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인류와 대화를 요구하여야 합니다.
 
그 동기는 사랑이어야
 
73. 구원의 대화는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48) 그러므로 이러한 대화를 시작하려는 우리의 동기는 다름 아닌 열렬하고 진실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편협하거나 자기중심적이지도, 강압적이지도 않은

74. 구원의 대화는 함께 대화를 시작한 사람들의 공로에 좌우되는 것도, 그 결과에 좌우되는 것도 아닙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49) 그러므로 우리는 대화에 제한을 두어서도, 대화에서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려 해서도 안 됩니다.

75. 그 누구에게도 구원의 대화를 받아들이도록 물리적 압력을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대화는 압력과는 거리가 먼, 사랑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대화는 그 대상자들에게 중대한 의무를 부여하였지만50) 대화에 응하느냐 대화를 거부하느냐는 그들의 자유에 맡겨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청중의 성향과 의사에 따라 기적51)의 횟수와 그 기적이 보여 주는 힘을 달리하셨습니다.52) 그리하여 청중들이 자신들이 받은 계시를 인정하는 것은 자유에 맡기시되, 인정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포하여야 할 진리가 확실한 것이며 구원은 필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외적인 억압을 행사하려는 생각을 조금도 품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우리는 합법적인 수단, 곧 인간적인 호의, 내적인 확신, 평범한 대화를 이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개개인의 개인적 권리와 시민권을 존중하면서 구원의 선물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편적이고
 
76. 구원의 대화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차별 없이 모든 이에게 적용됩니다.53) 따라서 우리의 대화도 되도록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대화는, 그것을 완전히 거부하거나 기꺼이 받아들이는 시늉만 하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끈기 있는 대화

77. 구원의 대화는 보통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단계적으로 발전해 나가야 온전히 성공할 수 있습니다.54) 우리의 대화도 인간과 역사의 발전이 더디다는 것을 인지하고, 하느님께서 대화의 열매를 맺어 주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오늘 이룩할 수 있는 것을 내일까지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적절한 때를 갈망하여야 하고,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합니다.55) 오늘 그리고 날마다 우리의 대화를 새로 시작하여야 하며, 대화의 상대보다 우리가 먼저 대화를 시작하여야 합니다.

하나의 방법으로서의 대화

78. 교회와 세상의 관계는 분명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세속 사회와 따로 떨어지기를 바란다는 구실로 그러한 관계를 최소화하고 이를 정당화하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속 사회에 만연한 죄악들을 파헤치고, 공공연하게 비난하며, 그 죄악들에 대항하는 운동을 벌이는 것에 만족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가 세속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그 사회를 신권에 종속시키려고 세속 사회에 다가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최선의 가능한 접근법

그러나 저는 교회가 세상과 맺으려는 관계는 대화의 본질에 더욱 맞는 것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이론상으로 다른 방법들이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의미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대화가 아닙니다. 대화는 그 대상자들의 지적 능력에 맞추어져야 하며, 상황을 고려하여야 합니다. 어린이들과 나누는 대화는 어른들과 나누는 대화와 같지 않으며, 그리스도인들과 나누는 대화는 비신자들과 나누는 대화와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오늘날 성(聖)과 속(俗)의 관계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요구하는 것이며, 현대 사회의 모습을 바꾸는 역동적 활력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다원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며, 현재에 이른 인간의 성숙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종교인이든 아니든 인간은 세속 교육을 통하여 품위 있게 생각하고 말하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79. 더욱이 이러한 대화를 한다는 사실 자체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존중, 이해와 친절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대화를 하는 사람은 편협과 편견, 악의적이고 무차별적인 증오, 빈말과 허풍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존중하고자 하므로 대화 상대를 참신앙으로 귀의시키는 것이 우리 대화의 직접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화 상대가 이상과 신념을 더욱 충만히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노력합니다.
 
80. 그러므로 우리의 대화는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진전시키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은 사도적 사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 자신의 구원은 다른 사람들의 구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마음가짐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메시지를 모든 사람에게 전해 주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합니다.

대화의 고유한 특성

81. 그러므로 대화는 사도직의 승인된 방법이며, 영성적 만남의 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대화는 다음 특성들을 지녀야 합니다.

1) 무엇보다 명확성입니다. 대화에 요구되는 것은 말의 내용이 명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화를 사상 주입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화는 인간이 지닌 최고의 영적 정신적 능력을 발휘하고 발전시키도록 해 줍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대화를 인간의 활동과 문화를 가장 잘 드러내 보여 주는 것 가운데 하나로 분류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러한 첫 번째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우리 모두 사도직의 열의를 느끼며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이해하기 쉬운 말인지,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인지, 현대어인지 검토하여야 합니다.
 
2) 우리의 대화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배우도록 명하신 온유함을 지녀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 나에게 배워라.”56) 우리의 대화가 오만함을 띠거나 적나라한 말들을 사용하거나 공격적인 신랄함을 보인다면 대화의 품위가 실추될 것입니다. 대화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그 대화가 진리를 선언하고, 사랑의 선물을 다른 사람과 나누며, 그 자체가 미덕의 본보기이고, 독단적인 언어를 피하며,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대화는 평화적이며,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반대에 부딪힐 때 인내하며 관용을 지향합니다.

3) 신뢰도 필요합니다. 자기가 하는 말이 지니는 힘에 대한 신뢰뿐만 아니라 대화에 대한 쌍방의 자발적 의지에 대한 신뢰 역시 필요합니다. 따라서 대화는 쌍방의 친교와 우정을 증진시킵니다. 대화는 서로가 선에 충실하도록 해 주고, 그럼으로써 모든 이기주의를 배제하도록 해 줍니다.

4) 마지막으로 가르치는 사람의 지혜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의 심리적 도덕적 상황들을 매우 신중하게 고려합니다.57) 그 대상이 어린이거나, 그의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의심이 많거나, 적대적일 경우 특히 그러합니다.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듣는 사람의 감성을 헤아리려고 노력합니다. 이성이 요구하면, 그는 듣는 사람의 감성과 이해 수준에 맞추어 대화 방식을 달리합니다.
 
82. 이러한 신중함을 가지고 대화를 할 때 진리는 애덕과, 지성은 사랑과 결합됩니다.

더욱 폭넓은 설명을 통해 깊어지는 이해
 
83.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신앙의 빛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이며, 그러한 길들이 모두 같은 목적을 향하도록 할 수 있음이 대화 안에서 명백해지기 때문입니다. 길이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그 길들은 흔히 서로를 보완하여 줄 수 있습니다. 그 길들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보도록 우리를 고무하고, 우리가 연구하는 주제를 더 깊이 파고들어 우리의 생각을 전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을 찾아보도록 격려합니다. 그러한 생각은 천천히 이루어지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서 진리의 요소들을 발견하게 해 줄 것이며, 우리의 가르침을 매우 온당하게 표현하고 싶어 하도록 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교리를 설명할 때 다른 사람들이 기꺼이 거기에 반응을 보이고 점차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믿음이 자리 잡을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명해지고, 가르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대화의 방법들

84. 이제 구원의 대화가 어떠한 형태를 띠어야 할지, 어떠한 방식으로 그것을 제시할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85. 구원의 대화는 여러 형태를 띱니다. 필요할 경우, 그것은 현재의 경험에 입각하여 적절한 수단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편견의 방해를 받지 않으며, 의미의 상실로 더 이상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표현 방식들을 고수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문제들

86.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합니다. 곧 교회가 특정한 시대와 환경, 교육적 사회적 조건의 인간 생활에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87. 교회는 자신이 사명을 수행하여야 하는 역사적 지역적 상황에 어느 정도 순응하여야 하겠습니까? 교회가 자신의 교의와 도덕 원칙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는 상대주의의 위험에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모범을 따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58) 되어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 구원을 가져다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전제 조건들

세상은 외부로부터 구원될 수 없으므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전해 줄 사람들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모든 특권 의식을 버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서 인간적이고 훌륭한 보통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말을 듣게 하고 이해하게 하려면,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말하기 전에 사람들이 하는 말뿐만 아니라 특히 그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말들에 귀를 기울이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되도록 그들과 일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사람들의 목자요 아버지이며 스승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들의 형제로서 행동하여야 합니다. 대화는 우정으로 발전하고, 특히 섬김으로 발전하여 나갑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하며,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에 따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59)

위험들

88. 그러나 위험은 남아 있습니다. 사실 사도직을 수행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시련을 겪습니다. 형제로서 함께 모이려는 바람이 진실을 희석하거나 감소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대화가 우리 신앙에 대한 충실성을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도직이 이론과 실천에서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원칙들과 애매하게 타협하여서도 안 됩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이루고 의견 차를 줄이려는 무모한 바람(평화주의와 혼합주의)은 결국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하느님 말씀의 권위와 진의를 믿지 않는 회의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능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충실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철저하게 살아가는 사람인 유능한 사도만이 주변 세상의 잘못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공의회의 방향

89. 저는 공의회가 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활동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게 될 때, 우리가 동시대인들과 적절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데 필요한 교리적 실천적 규범들을 제시해 줄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또 교회의 실질적인 사도적 사명과 그 사명이 수행되는 다변적인 상황들에 관한 문제에서 교회의 최고 권위가 모든 경우에 현명하고 효율적이며 분명한 목적과 원칙과 방법들을 정해 주어 활발하고 효과적인 대화가 보장되고 지속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라 믿습니다.

첫째가는 사도직인 선포

90.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제쳐 두고, 저는 특히 현대의 가톨릭 사도직에서, 그리고 현재 저의 관심사인 대화와 관련하여 선포가 지니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른 어떤 형태의 커뮤니케이션도 선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과 같은 현대의 기술이 제공하는 대단히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들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상, 사도직과 거룩한 선포는 어느 정도 동의어입니다. 선포는 첫째가는 사도직입니다.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 우리의 직무는 그 무엇보다도 말씀의 직무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이를 상기함으로써 우리의 사목 활동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알맹이 없는 수사학적 궤변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참된 방법을 다시 연구하여야 합니다.

91. 우리는 단순성, 명확성, 효율성, 그리고 권위를 지향하는 원칙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위대하고 신비로운 도구인 하느님 말씀을 사용할 때 우리 본래의 어리석음을 극복하고, 언어 사용에 능숙하여 현대 세계와 여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에게 견줄 만한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움직이는 이러한 중요한 은사를60)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하여, 우리가 참되고 효율적으로 신앙을 선포하는 데에 알맞은 도구가 될 수 있도록,61) 또 우리의 메시지가 땅 끝까지 가닿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62)

공의회의 전례 헌장이 말씀의 직무에 관하여 규정한 모든 것을 현명하고 열성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 백성과 또 가능하다면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주는 가르침이 훌륭하게 표현되고 신중하게 숙고되며 열정적으로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며, 참된 덕행의 증거로 뒷받침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르침은 발전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르침이 확고한 신앙을 전해 주고,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삶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이루어지도록 하며, 하느님의 빛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대화하는 교회

92. 마지막으로 저는 우리가 대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점에서도, 곧 밝혀지게 될 공의회의 결정들을 앞설 의도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메시지
 
93. 오늘날의 교회가 새롭게 열의를 다져 시작하여야 하는 대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교회 안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선의의 모든 사람과도 기꺼이 대화를 하여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94. 교회는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품에서 그 누구도 배제하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스스로 교회의 적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적이 없습니다. 교회의 보편성은 근거 없는 허풍이 아닙니다. 교회가 인간들 사이에 사랑과 일치, 평화를 촉진할 사명을 거저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인정하여야 할 어려움들
 
95. 교회는 그러한 사명이 지닌 엄청난 어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와 나머지 인류 사이의 수적인 불균형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한계와 결점, 그리고 교회 구성원들의 약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교회의 사도적 열정에 달려 있는 것도, 현세의 적절한 조건들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만이 세상에서 구원의 순서와 시기를 결정하십니다.
 
그러나 교회는 자신이 씨앗이라는 것을, 다시 말해 세상의 누룩이며 소금이고 빛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현대의 새롭고 놀라운 모든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만, 변화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확신을 가지고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찾고 필요로 하는 것을 여기 내가 가지고 있소.”
 
교회가 지상(地上) 행복을 약속하여 주지는 않지만, 지상 행복에 도달하는 최고의 수단으로 빛과 은총을 제공하여 줍니다. 교회는 인간들에게 초자연적인 미래 생명에 대하여 가르치며, 더 나아가 진리, 정의, 자유, 진보, 화합, 문명, 평화에 대하여 말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것들의 가치를 잘 알고 있으며, 그것들을 그리스도의 계시에 비추어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소년 소녀, 젊은 남녀, 과학자와 학자, 사회 모든 계층의 남녀 노동자, 전문가와 정치인, 그러나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불행한 사람들, 병자와 임종자, 한마디로 모든 사람에게 들려줄 메시지가 있습니다.
 
동심원의 관점에서
 
96. 여러분은 제가 이러한 주장을 하면서 저의 직무에 대한 지나친 열정에 사로잡혀 가톨릭 교회가 세상에서 지니는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구체적인 상황을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으며, 그 상황을 하느님께서 안배해 주신 대로 우리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동심원들로 묘사하면서 개괄적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원: 인류
 
97. 이 원들 가운데 첫 번째 원은 엄청나게 큽니다. 그 둘레는 우리의 시야를 넘어 머나먼 지평선에까지 펼쳐져 있습니다. 그 원은 인류 전체, 곧 세계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세상 사이에 놓인 거리를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우리는 온 인류와 자연을 공유하고, 삶을 공유하며, 그것이 주는 선물과 문제점들도 모두 공유합니다. 우리는 이 첫 번째 보편 사회에서 우리의 역할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 사회가 근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의 줄기찬 요구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새롭고 또 흔히는 숭고하게 드러나는 그 사회의 특징들에 박수를 보낼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회에 제시해야 할 지극히 중요한 도덕적 가치들이 있습니다. 그 가치들은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치들을 인간 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습니다. 인간이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곳이면 어디든 우리는 그 가치들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국가 협의체들이 모여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확립하는 곳이면 어디든 우리는 그 가운데 낄 수 있다면 영광일 것입니다. 인간 안에 ‘본성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영혼’이 있다면, 우리는 그 영혼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그 영혼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98. 이 모든 것을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상기시키면서 우리는 어떠한 사욕이나 현세적 정치적 동기도 품지 않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지상에서 인간 삶에 유익한 것을 받아들여 초자연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교회는 문화와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문화를 발전시킵니다.
 
무신론이라는 악의 증대
 
99.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종교가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이 거대한 원 안에 너무도 많습니다. 또한 여러 형태의 무신론 가운데 하나를 주장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공공연히 자랑하면서, 자신들은 삶과 세상에 대한 낡고 그릇된 개념들에서 인류를 해방시키고 과학적이고 진보적인 시각을 심어 주고 있다는 어리석고 섬뜩한 신념으로 교육과 정치에서 무신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100. 이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입니다. 저는 무신론의 기본 주장이 완전히 그릇된 것이며 사고의 근본 원칙들과도 화합할 수 없다고 굳게 확신합니다. 무신론의 주장들은 인간이 세상의 합리적 질서를 받아들이는 참되고 실질적인 토대를 무너뜨리며,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는 무익한 교조주의를 인간 생활에 도입하여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삶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원칙들에 토대를 둔 그 어떠한 사회 제도도 결국엔 완전한 파멸에 이르고 맙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은 해방을 가져다주는 힘이 아니라 재앙을 가져다주는 세력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빛을 꺼 버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증대하는 이 악의 세력에 온 힘을 다하여 대항하여야 할 것입니다. 진리 수호에 대한 크나큰 열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충실하게 선포하여야 할 우리의 사회적 의무, 그리고 인간의 선이 우리의 지속적 관심이 되게 하는 꺼지지 않는 불타는 사랑에서 나오는 힘으로 그 악에 대항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현대인이 가톨릭 신앙이 제시하는 종교적 이상을 깨달아 인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오히려 인간 정신을 자연적, 초자연적 완성에 이르게 해 줄 문화를 추구하는 일에 이끌릴 것이라는 굳센 희망을 갖고 무신론에 저항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간이 평화롭고 영예롭게 현세의 재화를 얻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영원한 보화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공산주의의 억압
 
101. 바로 이러한 이유들에서 저는, 저의 선임자들이 그러하셨듯이, 그리고 종교의 탁월성과 중요성을 굳게 믿는 모든 사람이 그러하여야 하듯, 하느님을 부정하고 교회를 억압하는 이념들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이념들은 흔히 경제 사회 정치 제도들과 동일시됩니다. 무신론적 공산주의는 이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이념들을 단죄하는 것이 지나친 것일까요? 드러내 놓고 우리를 혐오하는 것은 오히려 그러한 무신론적 공산주의 이념들이며 정치가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조주의적 이유로 우리에게 폭력적인 억압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들에 항거하는 우리의 목소리는 재판관의 선고가 아니라 희생자의 항변입니다.
 
102. 이러한 상황에서, 비록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제도와 체제를 신봉하는 사람들과 단절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진 않다 하더라도, 대화를 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진 않지만 매우 어렵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토론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도덕 질서의 장애 때문에 어려움이 엄청나게 커집니다. 사고와 행동의 자유가 많이 없고, 논쟁에서 단어를 고의로 잘못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단어들은 객관적 진리를 탐구하고 공식화하는 데에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주관적인 방편으로 이용될 뿐입니다.
 
103. 따라서 교회는 대화 대신에 예를 들면 침묵을 선택합니다. 교회가 들려주는 유일한 목소리는 고통의 목소리입니다. 고통을 통하여 교회는 억압받고 타락한 사회, 통치자들에게 모든 정신적 권리를 빼앗긴 사회의 대변자가 됩니다. 우리가 먼저 대화를 시작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63)가 될 따름입니다. 교회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증언은 침묵과 고통, 인내와 불굴의 사랑에 대한 증언이며, 그것은 죽음조차도 침묵시킬 수 없는 목소리입니다.
 
이해와 응답과 개선을 위한 노력
 
104. 저는 종교와 또 그 종교가 선포하고 소중히 여기는 인간적 영성적 가치들을 확고하고 분명하게 수호하지만, 사목적 관심에서 현대의 무신론자들의 정신적 혼란과 그들이 하느님을 부정하는 이유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자면 그들의 생각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분명히 많이 있으며 복잡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유들에 대하여 신중한 결론을 내려야 하며, 효과적으로 답을 주어야 합니다. 그 이유들은 때때로 종교적 진리를 더욱 깊고 순수하게 제시하도록 요구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또한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언어와 예배 형태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개선하여야 합니다. 그것들을 정화하고 그것들이 상징하는 거룩한 실재가 더욱 적합하게 표현되도록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열정과 이상에 불타 힘들지만 흔히는 고귀한 명분에 봉사하고 정의와 진보를 꿈꾸며 신적 질서를 제외하고는 궁극적 완성이라 여기는 사회 질서를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을 봅니다. 사회 질서는 그들에게 절대적인 것이며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는 그 무엇도 그들의 마음에서 모든 것 가운데 으뜸이자 궁극 목적인 하느님에 대한 갈망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들에게 이 모든 것은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고 인간 본성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것을 끈기 있고 슬기롭게 보여 주는 것이 저의 가르치는 직무의 과제입니다.
 
또한 우리는 인간의 논리로 우주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흔히 순진할 정도로 이 일에 열정적입니다. 최고의 철학 학파에서 가르치는 법칙들과 논리적으로 매우 유사한 법칙들을 따른다는 점에서 그러한 탐구는 전혀 비난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탐구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무신론을 옹호하는 반박할 수 없는 논거를 마련하여 주기보다는 오히려 그 본질상 결국에는 지고하신 신의 존재를 형이상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도록 그들을 이끌어 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정치적인 무신론 과학자는 이 불가피한 추론 과정에서 고의로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춤으로써 우주를 이해하게 해 주는 최고의 빛을 가려 버립니다. 그가 마침내 우주의 객관적 실재를 깨닫도록 도와주어 하느님의 현존과 마주하게 하고 눈물로 겸손하게 치유의 기도를 드리도록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는 아무도 없습니까?
 
대화의 가능성
 
그들은 때로는 현대 사회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치는 무관심과 자기중심주의를 견디지 못하는 참으로 넓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류의 형제애, 상호 도움, 인간적 연민과 같은 복음서에 나오는 감정과 표현들을 자주 사용합니다. 언젠가는 그들을 이러한 그리스도교 도덕 가치들의 원천으로 되돌아오게 할 수는 없겠습니까?
 
105. 저는 선임자이신 요한 23세 교황께서 회칙 「지상의 평화」에서 하신 말씀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요한 23세 교황께서는, 어떤 특정 철학의 공식이 일단 세워지고 체계화되고 나면 바뀌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철학이 주창한 실천 강령은 점진적으로 재조정될 수 있으며 사실상 커다란 변화를 겪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셨습니다.64) 그러므로 저는 이 사람들과 교회 사이의 대화가 언젠가는 가능하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그 대화는 우리의 정당한 불평과 거부를 표현하는 데에 그칠 따름인 현재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 운동
 
106. 현대 세계의 이러한 문제를 뒤로 남겨 두기 전에, 제가 품고 있는 희망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온갖 다변적인 상황에서도 대화를 계속하고 발전시켜 나가려는 저의 의지가 사람들 사이에 평화 운동을 도와줄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대화가 신중하고 진실하게 인간관계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길을 가르쳐 주고, 모든 사람에게 초자연적 가치들의 중요성을 되새겨 주는 문제와 관련하여 경험과 지혜를 모아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심 없고 객관적이며 진실한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유롭고 고귀한 평화를 위한 환경이 됩니다. 대화는 온갖 허식과 경쟁, 속임수, 배신을 적극 배제하며, 침략 전쟁과 제국주의와 지배를 범죄이자 재앙으로 규정합니다. 대화는 모든 차원에서 사람들을 결집시키게 될 것입니다. 국가 수반들과 국가 조직 그리고 국가의 토대가 되는 사회와 가정과 개인을 결집시킵니다. 대화는 모든 제도와 모든 사람에게 평화에 대한 이해와 사랑, 평화를 보존할 의무를 심어 주고자 노력합니다.
 
두 번째 원: 한 분이신 하느님을 경배하는 사람들
 
107.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를 에워싼 또 다른 원을 봅니다. 이것 역시 넓고 방대하지만 우리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 원에는 먼저 우리도 경배하는 한 분이신 최고의 신을 경배하는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먼저 유다인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구약의 종교를 간직하고 있으며, 사실 우리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어서 다른 일신교, 특히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하느님 경배에서 참되고 좋은 모든 것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위대한 종교들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다양한 종교들과 의견을 같이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이 종교들을 모두 대등한 관계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또는 이들 종교의 신봉자들이 하느님께서 어떤 식으로 이해받고 사랑받고 섬김 받으시길 원하시는지 당신 스스로 명확하고 확실하게 계시해 주셨는지를 탐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 그 종교들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무비판적인 태도를 지녀서도 안 됩니다. 사실 우리는 숨김 없는 마음으로 그리스도교가 하나이며 유일하고 참된 종교라는 확신과, 하느님을 찾고 경배하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교를 그렇게 인정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공공연하게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 영역의 공동 이상들
 
108. 그러나 우리는 여러 비그리스도 종교들의 영성적 도덕적 가치들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 종교들과 함께 종교의 자유, 인류의 형제애, 교육, 문화, 사회 복지, 민생 치안의 영역에서 공동의 이상들을 증진하고 수호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훌륭한 이상들에서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러한 이상들은 비그리스도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사이며, 대화를 제안할 경우가 생길 때 우리는 그러한 기회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제안은 참된 상호 존중 안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세 번째 원: 그리스도인들
 
109. 이제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 원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역에서 이른바 교회 일치 대화가 이미 진행되고 있고, 커다란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들도 있습니다. 이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에 대하여 할 말이 많지만,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을 여기서 끝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몇 가지 아주 분명한 점들만 지나가면서 언급하겠습니다.
 
정당한 바람을 들어줄 준비가 된
 
저는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보다 우리가 함께 공동으로 가진 것을 강조하는 원칙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이는 우리의 대화를 위한 유익하고 효과적인 토대가 되며, 우리는 의지를 가지고 대화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전통, 영성, 교회법, 예배에 관한 여러 차이들과 관련하여, 갈라진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정당한 바람을 우리가 어떻게 들어줄 수 있을 것인지 검토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신앙과 사랑의 완벽한 일치 안에서 그들을 끌어안는 것이 저의 가장 큰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신앙의 보전과 사랑의 의무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할 권한이 없음을 강조하여야 하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일부 사람들에게서 의혹과 반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가 자진하여 그리스도 백성의 일치를 회복하려는 발걸음을 내디딘 지금, 교회는 최대한의 신중함과 사려심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의 자기 변론, 곧 갈라진 형제들을 멀리하는 결과를 낳고 있는 주장들은, 지난 과거의 성과에 기대어 자기 권한을 확대하려는 정신에서 나오는 것도, 또한 어떤 불건전한 신학적 고찰에서 나오는 것도 아닌 그리스도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주장해 나갈 것입니다. 교회의 주장들이 올바로 이해될 때 그 주장들은 모든 사람의 선익을 위한 것으로 또 공동의 일치, 자유, 충만한 그리스도교 생활을 위한 것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기도와 참회를 통하여 오랜 열망인 화해를 준비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장애물로 보이는 교황권
 
110. 이러한 화해를 촉구하는 저를 많은 갈라진 형제들은 화해의 장애물로 여긴다는 사실이 제게는 몹시 슬픈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부여하시고 그분의 후계자인 제가 물려받은 영예로운 수위권과 재치권이 장애물로 보이는 듯합니다.
 
일치의 원칙
 
로마 교황의 수위권이 폐지되면 갈라진 교회들과 가톨릭 교회 사이의 일치가 더욱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갈라진 우리 형제들에게 이러한 견해가 근거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요청합니다. 교황이 없다면 가톨릭 교회는 더 이상 가톨릭이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베드로의 실질적이고 권위 있는 최고의 사목직이 없다면 그리스도 교회의 일치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참된 일치 대신에 다른 일치의 원칙을 찾는 것은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이 올바로 지적하였듯이, “교회에는 사제만큼이나 많은 이교가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65)
 
으뜸인 섬김과 사랑
 
저는 거룩한 교회를 이끄는 주된 원칙은 영적 자만에서 오는 우월감과 인류를 지배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섬김과 도움, 사랑을 으뜸으로 삼는 것임을 덧붙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은 괜한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111. 이것이 바로 우리의 대화 방침입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과 대화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진지한 기도와 깊은 신뢰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사랑의 대화를 나눕니다.
 
미래를 약속하는 재회
 
112.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 이처럼 다양하고 방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동심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 열기를 주목하는 것은 제게는 기쁨이자 희망입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인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장차 일치를 이루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징조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령께서 교회 일치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시기를 간청하며, 제가 예루살렘에서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를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과 기쁨을 다시 한 번 떠올립니다. 그것은 사랑이 넘치고 제게 새로운 희망이 불타오르게 한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고 계신 갈라진 교회의 대표들을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그분들께 일치 문제와 관련되거나 연관된 모든 영성 운동에 제가 열렬하고 지대한 관심이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드립니다. 일치와 관련된 그러한 영성 운동들은 신심이 뛰어난 개인과 단체, 공동체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원의와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바라신 일치는 우리의 진실하고 우정 어린 대화를 통하여 증진될 것임을 확신하며, 이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인사드립니다.
 
마지막 원: 가톨릭 신자들
 
113. 마지막으로 저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인 하느님 집의 자녀들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로마 교회는 그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입니다. 저는 우리 자녀들과 나누는 대화가 신앙과 사랑, 성덕으로 충만하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모릅니다. 대화가 빈번하고 친밀하게 이루어지며, 진리 전체와 모든 덕,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상속자가 되게 해 주는 모든 영적 가치에 열려 있고 거기에 응답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대화가 진실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참된 성덕에 대한 갈망을 불어넣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대화가 현대 세계의 다양한 시각들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 대화가 가톨릭 신자들을 고결하고 현명하며 자유롭고 공정하고 강한 사람들이 되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순명의 실천
 
114. 그러나 교회의 본질적 관계가 사랑에 토대를 둔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대화 형태가 되어야 한다는 이러한 바람이 곧 순명의 미덕을 더 이상 실천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명령할 권리와 순명할 의무는 정당하게 구성된 모든 사회 안에 존재하여야 하며, 특히 거룩한 교계 위에 조직된 교회 안에 반드시 존재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권위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그분 말씀에 권위를 가지는 유기체이고, 그분의 목자로서의 크나큰 사랑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그러므로 순명은 신앙을 그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순명은 복음적 겸손을 배움으로써 실천됩니다. 순명은 교회의 공동생활을 지배하는 요소인 지혜, 일치, 이상, 사랑과 관계가 있습니다. 교회는 명령하는 사람과 순명하는 사람에게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던”66) 그리스도를 닮았음을 치하합니다.

115. 더 나아가, 그러한 권위의 행사는 이러한 대화에서 순명의 실천이 됩니다. 곧 진리와 사랑에 대한 봉사 직무를 순명의 정신으로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순명이란 제게는 교회법의 규정들을 준수하고 합법적인 교회 장상들의 통치를 존중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자유롭고 사랑스러운 자녀들에게서만 기대되는, 기꺼이 자발적으로 하는 준수와 존중입니다.
 
반대로 독립심, 혹독한 비판 정신, 반항심, 오만함은 교회 안에 친교와 화합, 평화의 정신을 길러 주고 보존해 주는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대화의 질을 완전히 떨어뜨리고, 대화를 논쟁, 불화, 분쟁이라는 유감스러운 사태로 변질시킵니다. 이는 결코 드물지 않은 일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를 경고한 바 있습니다. “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67)
 
순조로운 출발 - 가야 할 머나먼 길
 
116. 그러므로 저는 오랫동안 교회의 관심을 끌어온 이 대화가 새로운 영감, 새로운 주제, 새로운 대화 상대를 얻음으로써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더욱 거룩해지고 더 큰 생명력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교회가 수호하고 섬기는 진리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지지합니다. 저는 전례와 선포가 내면생활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라고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이와 함께 저는 학교와 언론, 사회 사도직, 선교, 자선 사업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공의회가 분명히 우리의 논제로 내어놓을 것들입니다. 저는 합법적인 권위를 가지고 활기와 활력을 주는 교회의 대화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축복하고 격려합니다. 특히 우리 사제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가톨릭 운동 단체들과 그 외의 사도직 단체들과 사도직 활동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싸우는 사랑하는 평신도들을 생각합니다.
 
117. 저는 교회 안팎에서 이러한 대화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기쁨과 큰 위안을 얻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에 넘칩니다. 그러나 문제를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오늘날 시작되고 있는 이 일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한정된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지상 순례의 법칙입니다.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 그것은 우리 직무의 공통 조건이며, 오늘날 모든 것이 우리에게 더욱 신속하고 헌신적으로 우리 직무를 쇄신하고 책임을 다하도록 촉구합니다.
 
118. 주교님들께 이러한 것들을 말씀드리면서, 저는 주교님들의 협력을 기대할 뿐만 아니라 저 자신도 주교님들께 협력할 수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이방인들의 사도의 이름으로, 또 이방인들의 사도의 정신으로 베드로 좌에 오른 지 1년밖에 안 되었지만 저는 이러한 목적과 활동의 일치를 요청하며, 저 또한 이를 약속합니다.
 
119. 그러므로 저는 그리스도 안에 기원을 둔 우리의 일치된 마음을 크게 기뻐하며 저의 이 첫 번째 회칙을 마칩니다. 여러분의 아버지이자 형제로서 저는 여러분에게 영원하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도로서 축복을 드리며, 나아가 온 교회와 온 인류에게도 기꺼이 축복을 드리는 바입니다.
 


로마 성 베드로 좌에서

교황 재위 제2년
1964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교황 바오로 6세
 
<원문 Encyclical of Pope Paul VI on the Church, Ecclesiam Suam, 1964.8.6.>
 

1. 요한 7,16.
2. 에페 3,9-10 참조.
3. 사도 20,28 참조.
4. 에페 5,27 참조.
5. 히브 1,1.
6. 마태 26,41 참조.
7. 루카 17,21 참조.
8. 마태 26,75; 루카 24,8; 요한 14,26; 16,4 참조.
9. 필리 1,9.
10. 요한 9,38.
11. 요한 11,27.
12. 마태 16,16.
13. 에페 3,17.
14. 요한 14,26.
15. 레오 13세, 회칙 Satis Cognitum, 『교황 레오 13세의 문헌』(Acta Leonis XIII), 16(1896), 157-208.
16. 비오 12세, 회칙 「신비체」(Mystici Corporis), 『사도좌 관보』(Acta Apostolicae Sedis: AAS) 35(1943), 193-248.
17. 「신비체」, AAS 35(1943), 193.
18. 「신비체」, AAS 35(1943), 238.
19. 요한 15,1 이하 참조.
20. 갈라 3,28.
21. 에페 4,15-16.
22. 콜로 3,11.
23. 성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In Evangelium Ioannis Tractatus), `21,8, 『라틴 교부 총서』(Patrologia Latina), 35,1568.
24. 에페 3,17.
25. 1베드 2,9 참조.
26. 갈라 4,19; 1코린 4,15 참조.
27. 마태 16,18.
28. 로마 8,16.
29. 에페 5,20 참조.
30. 1티모 6,20.
31. 히브 7,25 참조.
32. 요한 17,15.
33. 1테살 5,21 참조.
34. 마태 7,13.
35. 묵시 2,2.
36. 필리 2,5.
37. 1코린 13,7.
38. 로마 12,2.
39. 로마 6,3-4.
40. 2코린 6,14-15.
41. 요한 17,15-16.
42. 1티모 6,20.
43. 마태 28,19.
44. 마태 13,52.
45. 요한 3,17.
46. 바룩 3,38 참조.
47. 1요한 4,10 참조.
48. 요한 3,16.
49. 루카 5,31.
50. 마태 11,21 참조.
51. 마태 12,38 이하 참조.
52. 마태 13,13 이하 참조.
53. 콜로 3,11 참조.
54. 마태 13,31 참조.
55. 에페 5,16 참조.
56. 마태 11,29.
57. 마태 7,6 참조.
58. 1코린 9,22.
59. 요한 13,14-17 참조.
60. 예레 1,6 참조.
61. 로마 10,17 참조
62. 시편 19(18),5; 로마 10,18 참조.
63. 마르 1,3.
64. 요한 23세,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AAS 55(1963), 300 참조.
65. 성 예로니모, 「루치페르파 논박」(Dialogus contra Luciferianos), 9항, PL 23,173 참조.
66. 필리 2,8.
67. 1코린 1,10.
 

번호 | 문서명 | 교황 | 발표시기 | 전자북
7   주님의 교회 (Ecclesiam Suam)   바오로6세   1964-08-06  
6   Ad futuram rei memoriam   바오로6세   1964-05-19  
5   In fructibus multis   바오로6세   1964-04-02  
4   Studia latinitatis   바오로6세   1964-02-22  
3   Sacram Liturgiam   바오로6세   1964-01-25  
2   Pastorale munus   바오로6세   1963-11-30  
1   Summi Dei Verbum   바오로6세   1963-11-04  
   1 2 3 4 5 6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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