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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태 (Rerum Novarum)
교황 레오13세 발표시기 1891-05-15 전자북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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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노동에 관하여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

RERUM NOVARUM

1891. 5. 15.

LEONIS XIII
SUMMI PONTIFICIS
LITTERAE ENCYCLICAE
RERUM NOVARUM
AD PATRIARCHAS, PRIMATES, ARCHIEPISCOPOS ET EPISCOPOS
UNIVERSOS CATHOLICI ORBIS GRATIAM ET COMMUNIONEM
CUM APOSTOLICA SEDE HABENTES
DE CONDITIONE OPIFICUM

노동자들의 상황에 관하여
사도좌와 더불어 평화와 일치를 누리는
존경하는 형제들인
총주교, 수석주교, 대주교, 주교들에게 보내는
교황 레오 13세 성하의
회칙




[차 례]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
갈등의 원인들
사회주의자들의 해결책
사유 재산
재화의 공동 사용과 사적 소유
실정법과 신법에 의해 인정되는 사유 재산
가정과 국가
빈곤에 대한 공산주의 원리
교회와 사회 문제
투쟁 없이도 계층들간의 화목은 가능하다
노동자와 고용주의 의무들
재화의 소유와 사용
노동의 존엄성
자연의 재화 및 은총의 보화의 공동 소유
교회의 모범과 교도권
교회가 실천하는 애덕의 활동
국가의 협력
국가 번영의 기원
국민들을 위한 국가의 통치
국가의 의무와 개입의 한계
국가는 사유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
국가는 노동 파업을 예방해야 한다
국가는 영적 보화들을 보호해야 한다
노동자 및 부녀자와 연소자의 노동에 대한 보호
노동자의 적정 임금
계층들간의 화해의 방편인 절약
노동 조합의 역할
사적 단체와 국가
가톨릭의 노동 단체
노동 조합의 규율과 목적
가톨릭 노동자들의 단합
결정적 해결책:애덕




존경하는 형제들에게 인사와 더불어 사도적 축복을 보낸다.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

1.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의 열망이 한번 불타올라, 오랫동안 여러 나라들을 동요시켜 왔으며, 그러한 열망으로 인해 언제부터인가 변혁의 추구가 정치의 영역에서 경제 관련 분야로 옮겨가게 되었다.
실제로 새로운 산업의 성장과 새로운 기술의 발전, 변화된 노사 관계, 극소수의 막대한 부요와 대다수의 빈곤, 노동자들의 자기 신뢰 증가와 상호 결속의 필요성, 그 밖에 윤리의 타락이 투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같은 사태는 사람들의 마음을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들 정도로 극히 심각하여 각계 각층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 문제 해결에 고심하게 하고 있다. 학자들은 연구하고 현인들은 숙의하고 대중들은 모임을 개최하고 입법자들은 협의하고 통치자들은 심의한다. 이 문제보다도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치명적인 오류를 반박해야 하는 순간이 닥칠 때마다 본인이 교회의 선익과 공공선을 수호하기 위하여 ‘공권력’, ‘인간의 자유’, ‘그리스도교 정신에 따른 국가 조직’ 등에 관한 회칙들을 반포하였던 전례에 따라, 또한 똑같은 동기로 인하여, 이제 본인은 노동자 문제에 개입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본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미 수차례 이 문제를 다루었지만 본인의 사도적 직무에 대한 자각으로 말미암아 정의와 평등의 기준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원칙들을 부각시키려는 목적으로 다시금 이 문제를 광범위하게 취급하고자 한다. 이 문제의 해결은 어렵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상대적인 권리와 상호 의무를 명확하게 규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교활하고 선동적인 사람들이 이 같은 허점을 이용하여 그릇된 판단을 유도하고 민중을 혼란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위험한 일이다.

갈등의 원인들

어떻든 근로자들 대부분이 부당하게도 비참한 처지에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들을 도와주는 적절한 해결 방안이 시급히 강구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며 또한 모든 사람이 이를 인정하고 있다. 지난 세기에 숙련공들의 오랜 협동 조합(길드)이 무너져버린 채 그러한 역할을 맡을 다른 보호 조직이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또 그와 동시에 제도와 법률들이 그리스도교 정신을 온전히 망각하기 시작하여 노동자들은 점차 고립 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인정머리 없는 고용주들의 무절제한 경쟁의 탐욕에 무참히 희생되어 왔다. 교회가 수차례 엄중히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고리 대금업은 여전히 성행하고 파렴치한 모리배들로 말미암아 또 다른 형태로 그러한 불의가 자행되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생산과 상업이 소수에 의해 독점 장악되어 극소수의 탐욕스런 부자들이 가난하고도 무수한 노동자 대중들에게 노예의 처지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멍에를 뒤집어씌우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해결책

2. 이러한 악의 치유를 위하여, 사회주의자들은 부자들에 대한 가난한 이들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면서 사유 재산을 없애야 하며 그 대신 모든 이를 위한 공동 재산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유 재산을 공유화하고 또 모든 재화를 국민에게 공평하게 분배할 때에 사회악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러나 투쟁을 종식시킬 수 없는 그들의 이론은 노동자 계급에 손해를 입히며, 그 밖에도 정당한 소유주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국가의 임무를 변질시키며, 사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기 때문에 부당하다.

사유 재산

3. 사실 노동의 목적, 즉 노동자가 자각하고 있는 노동의 근본 동기는 사유 재산이며, 또한 그가 고용되어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자기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동기가 자기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획득하기 위한 것임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노동자는 노동의 대가로서 임금을 요구할 뿐 아니라, 자기의 합당한 임금을 원하는 대로 활용할 수 있는 진정하고도 완전한 권리도 요구한다. 그러므로 만일 노동자가 자기 임금을 절약하여 저축하고 또한 그 임금을 증식시키기 위하여 토지 매입에 그것을 투자하였다면, 이 토지는 결국 다른 형태로 변형된 똑같은 임금이며 또 결과적으로 그 자신의 재산인 것이다. 그것은 다른 형태의 임금에 지나지 않는다. 동산이든 부동산이든 재산이 그런 식으로 형성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모든 사유 재산을 공유화한다면, 그들은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투자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자기의 자산을 유용하게 활용하고 자기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권리와 희망을 빼앗아버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게 된다.

4. 더 나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한 해결책이 명백하게 정의에 어긋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유 재산권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이기 때문이다.
사유 재산권은 인간과 짐승을 구분짓는 인간의 기본권이다. 짐승에게는 자기를 통제하는 능력이 없다. 짐승은 두 가지 본능, 즉 개체 보존의 본능과 종족 보존의 본능에 의해 지배당하고 규제받는데 그 본능들은 짐승이 민첩한 행동을 하게 하고 그 힘을 발휘하게 해주는 반면에 짐승의 모든 움직임을 결정하고 제한한다. 이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는 짐승이 자기 주변에서 발견하게 되는 제한된 수단들을 이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짐승은 감각과 특수한 감수성에 의해서만 움직이므로 자기 주변의 테두리를 벗어나 멀리 내다보지 못한다.
인간의 본능은 짐승의 본능과 전혀 다르다. 인간도 다른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감각 기능을 갖추고 있지만 물질 세계의 재화들을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감각 능력을 충만히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적 본성이 아무리 영향력을 미칠지라도 인간의 본성을 제한하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의 본성보다 훨씬 열등하며 또 이 본성에 봉사하고 따르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출중한 특권, 즉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고 짐승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존재가 되게 해주는 구성 요소는 지성 또는 이성이다. 그리고 인간이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은 다른 모든 짐승들처럼 이 땅의 재화들을 단순히 이용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최대한으로 활용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곧 안정된 재산의 소유권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사용됨으로써 소모되는 일시적 사물들뿐 아니라 사용되더라도 소모되지 않는 항구한 사물들까지 소유하는 권리인 것이다.

재화의 공동 사용과 사적 소유

5.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본성을 더욱 깊이 통찰해 보면 한층 더 명백해진다.
인간은 하느님의 영원 불변한 법과 보편적 섭리 안에서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까지도 내다보는 폭넓은 인식 능력과 자유 덕분에 자신을 스스로 보살필 줄 안다. 따라서 인간은 일시적 순간뿐 아니라 장래를 위해서도 자기의 삶을 꾸려나가기에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방편들을 선택해야 한다. 이는 땅에서 생산되는 결실들을 향유하는 권리 이외에도 땅 자체를 소유할 권리를 인간이 가지고 있으며, 또 인간은 땅의 풍요로운 생산물들에 힘입어 미래에 대비한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인간의 욕구는 한번 충족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즉, 오늘 충족된 욕구가 내일 다시 꿈틀거린다. 그러므로 자연은 인간이 자기의 끝없는 욕구를 적절히 충족시켜 줄 재화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그 권한을 인간에게 부여하였음이 분명하다. 풍성한 결실로써 인간에게 갖가지 재화들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토지뿐이다.

6. 국가의 보살핌에 무턱대고 의존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국가보다 먼저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볼 권리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온 인류로 하여금 땅을 지배하고 활용하게 하셨다는 사실은 사유 재산의 소유와 상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공동으로 소유해야 한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한 특정인에게 어느 한 부분의 땅도 독점 분배되지 않고 개인의 노력과 각 민족들의 제도에 따라 사적 소유의 규정이 허용되야 한다는 뜻으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땅을 선사하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토지가 비록 각 개인 소유로 분배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여전히 모든 이들에게 공동 이익과 편의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왜냐하면 땅으로부터 양식을 구하지 않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재화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노동으로써 생계를 꾸려나간다. 진정 생계 유지를 위한 보편적 방편이 노동인데, 그것은 자기의 토지를 직접 경작하는 형태의 노동일 수도 있고 또는 노동이나 기술을 제공하여 그 대가로 땅의 여러 가지 소출 대신에 임금을 받게 되는 형태의 노동일 수도 있다.

7. 사유 재산권이 자연법에 온전히 부합된다는 것을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실제로 인간이 토지를 경작하고 열성껏 관리할 때에 한하여 토지는 생계 유지와 인간 생명의 성숙에 필요한 것을 인간에게 제공한다. 인간은 자연의 결실들을 획득하는 과정 중에 육체적으로 수고하고 정신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로써 그는 자연의 일부를 자신 안에 간직하여 자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자연 안에 자기 인격의 흔적을 낙인처럼 남겨두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인하여 인간은 당연히 토지를 자기 소유로 삼으며 그 토지를 존중해야 하는 권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정법과 신법에 의해 인정되는 사유 재산

8. 이처럼 명백한 근거에 비추어볼 때, 어처구니없는 이상론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의 주장 안에 모순점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들은 땅의 활용과 땅의 여러 가지 생산물들은 인간에게 허용하지만 인간이 경작한 토지나 새로 개간한 농토에 대한 소유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소유권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인간에게서 자기 수고의 결실을 교묘하게 빼앗아가게 된다는 것을 그들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다. 토지는 경작인의 노동과 기술에 의하여 변화된다. 즉 황폐한 땅, 불모지가 비옥한 농토로 된다. 이와 같이 토지를 개량하는 노동은 그 토지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을 정도로 인격의 자국을 남겨둔다. 그렇다면 그 토지를 경작하지 아니한 다른 사람이 그 결실을 가로채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이겠는가? 결과가 반드시 원인에 뒤따르는 것처럼 노동의 결실도 당연히 수고한 당사자에게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인류가 소수의 다른 의견들을 세밀히 고찰하지 않더라도 자연법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자연법에서 재화 분배의 기본 원리를 확인하고, 또 사유 재산이 인간의 본성 및 평화로운 사회 생활에 지극히 부합된다는 것을 깨닫고 전 세기에 걸쳐 실천해 오면서 사유 재산의 소유와 그 권리를 공공연하게 인정해 온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리고 자연법 안에 그 고유한 권위와 효력의 바탕을 두고 있는 정당한 실정법들은 그러한 권리를 승인하고 공권력으로 보호해 준다. 신법 또한 다른 사람의 재물에 대한 탐욕까지도 엄금하면서 사유 재산권을 인정한다. “너희는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못한다. 이웃의 집이나 밭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1)

가정과 국가

9. 우리가 개인의 사유 재산권을 가정 생활과 관련하여 고찰해본다면 그 권리의 의미는 더욱 명백해진다.
자기의 고유한 생활 상태를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다. 인간은 자기 처지에서 독신 생활의 복음적 권고를 따를 수도 있고 혼인의 계약에 매여살 수도 있다. 결혼 생활의 권리는 자연적이고 기본적이기에 실정법이 그것을 폐지할 수도 없고,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라”2)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제정된 혼인의 목적을 제한할 수도 없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가정은 가족 사회로서 작은 사회이기는 하지만 다른 모든 사회에 우선하는 진정한 사회이고 국가와는 독립된 권한과 의무를 지닌 사회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사유 재산권에 관하여 우리가 이미 말한 사실은 가정의 우두머리인 가장에게 해당된다. 더욱이 가정 생활에 있어서 그의 인격이 미치는 영향력이 광범위하고 포괄적일수록 그가 향유하는 사유 재산권은 더욱더 강한 힘을 지닌다. 가장은 침해될 수 없는 자연법으로 말미암아, 자녀들을 부양할 책임을 맡고, 그로 하여금 자녀들 안에서 자신의 모상과 인격의 연장과 계승을 인식하게 해주는 자연의 충동 때문에 그는 자녀들이 고된 삶의 여정 중에서 그들의 욕구를 정당하게 충족시킬 수 있도록 당연히 그들을 보살펴주기 마련이다. 자녀 부양의 책임 완수는 가장이 후에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상속시켜 주게 되는 풍성한 재화를 획득함으로써 가능하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진정한 사회인 가정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권한인 부권에 의하여 다스려진다. 따라서 가정은 자기 목적의 제한된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를 지탱하고 자기의 정당한 독립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방편들을 선택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 국가와 대등한 권리를 가진다. 왜냐하면 가족 사회는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국가에 선행할 뿐 아니라 국가보다 더 중요한 사회이므로 이에 마땅한 권리와 의무를 지녀야 한다. 만일 인간이나 가정이 국가에 예속되어 국가로부터 도움은커녕 손해를 보거나, 보호받기는커녕 자기의 고유한 권리들을 침해당한다면 그러한 국가는 바람직하기보다는 오히려 배척되어야 할 것이다.

10. 그러므로 국가가 가정의 신성한 영역을 침범하기를 바라는 것은 위험 천만한 큰 잘못이다.
만일 어떤 가정이 불행하게도 극심한 곤경에 처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그 곤궁에서 헤어날 수 없다면 그러한 상황에 공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분명히 타당한 일이다. 가정은 국가를 형성하는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가정의 가족들간에 심각한 마찰이 생겨 큰 혼란이 야기될 경우에 국가가 개입하여 각 가족에게 각자의 몫을 되찾아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조정 역할은 시민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공명 정대한 정의의 원칙에 따라 그 권리들을 확인하고 보호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의 개입은 이 선에서 끝나야지 그 이상의 개입은 안된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자연이 용납하지 않는다. 가장의 권한은 인간 생명의 근원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국가가 그것을 철폐할 수도 그 역할을 대신 담당할 수도 없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분신이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인격의 연장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자녀는 그들 자신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그들이 태어난 가정을 통하여 국가의 한 구성원이 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즉, “자녀들은 당연히 아버지의 분신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성을 사용할 수 있기 전에는 부모의 보호를 받는 것이다.”3)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부모의 보살핌을 국가의 배려로 대치시킴으로써 자연의 정의를 거스르며 가족들간의 유대를 파괴한다.

* 소제목은 이탈리아어 번역문을 따랐고, 항 번호는 라틴어 원문(Libreria Editrice Vaticana, 1971)의 단락에 따라 매겼다.

1. 신명 5,21.
2. 창세 1,28.
3.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II-II, q.10, a.12.


빈곤에 대한 공산주의 원리

11. 또한 국가의 개입은 정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혼란과 무질서 속에 빠뜨려 증오와 견디기 어려운 참혹 상태를 초래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상호간의 원한, 비방, 불목의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고 개인의 재능과 근면을 고취시키는 자극이 전혀 없어져 재화의 원천이 근원적으로 고갈되어 버리고 그토록 염원해 온 평등의 꿈은 결국 굶주림과 헐벗음이 널리 만연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에 근거하여 볼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사회주의자들이 주창하는 재산의 공유화는 정작 혜택을 받아야 할 노동자 당사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므로 배격되어야 한다. 재산의 공유화는 각 개인의 타고난 권리들을 침해하고 국가의 기능들을 변질시키며 만인의 평화를 교란시킨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추진하려면 확고 부동한 기본 원칙으로 사유 재산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명명백백하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본인은 참다운 해결책을 어디서 찾아낼 수 있는지를 밝히려 한다.

교회와 사회 문제

12. 본인은 분명히 본인에게 속한 권한으로 확신을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신앙과 교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결코 그 진정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권한에 속한 방편들을 관장하며 종교를 보살피는 일이 본인의 주된 임무이므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같이 보일 것이다.
분명코, 이토록 어려운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활동과 노력을 요청한다. 즉, 국가의 통치자들, 고용주들과 부유한 자들, 그리고 이 문제에 직접 연루되어 있는 노동 계층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교회의 협조가 없다면 그 모든 노력은 분명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사실상 교회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갈등을 해소시키는 데에 적절한 가르침을 복음으로부터 얻어낸다. 교회는 자신의 가르침으로써 인간 정신을 계몽하고 각 개인의 생활과 습관들을 교화시키는 데에 노력을 쏟는다. 수많은 유익한 제도들을 활용하고 모든 사회 계층의 여론과 역량들을 수렴하여 노동자들의 상태를 개선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모색하는 데에 기여하기를 교회는 바란다. 또한 교회는 이러한 목적의 성취를 위하여 적절하고도 합당한 범위 내에서 국가의 권위와 법률의 개입에 의지하여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투쟁 없이도 계층들간의 화목은 가능하다

13. 무엇보다도 먼저 확립되어야 할 주요 원칙은 인간의 고유한 조건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조건에 비추어볼 때에 세상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제거하기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이지만, 사물의 본성을 거스르는 온갖 시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가장 뛰어난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즉,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재능, 성실, 건강, 체력을 지니지는 않는다. 이같이 불가피한 차이로부터 당연히 사회적 조건들의 차별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차이는 오히려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모두 이득이 되는데, 사회 생활이 다양한 소질들과 서로 다른 직분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직분들을 수행하도록 움직이게 해주는 기본 충동이 곧 각 처지의 불평등인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 노동에 대해서만 생각해 본다면, 원죄 이전과 똑같은 ‘무죄’ 상태에 인간이 처하여 있다 해서 그가 전혀 일하지 않는 게으른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상태에서는 마음의 휴식을 위하여 인간이 기쁨으로 노동하였지만 범죄한 이후로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마땅히 힘겹고 지겨운 처지에서 노동을 해야만 하였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4)
이와 같이 고통도 이 땅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견디어내기가 어렵고 가혹한 것은 인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죽을 때까지 인간을 따라다니는 죄악의 탐탁치 아니한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숙명이다. 또 인간이 아무리 애쓰고 발버둥치더라도 진정 이 세상의 고통을 없앨 수 있는 방법과 기술은 결코 없다. 이 땅에서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가련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죄벌과 고통이 없는 삶과 완전한 평화와 기쁨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기만하는 것이며 현 상태보다도 더 심한 고통에의 길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가장 적절한 태도는 인간의 모든 사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고 동시에 우리가 말한 대로 악에 대한 해결책을 다른 곳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문제 중에서 가장 잘못된 견해는 한 사회 계층이 다른 계층과 본성상 적대 관계에 있으므로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은 성격상 상호간에 끝없이 투쟁하기 마련이라고 내세우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성과 참된 진리에 완전히 상반된다. 인체에는 다양한 지체들이 서로 일치하며 좌우 대칭이라 불리는 균형 잡힌 조직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본래 국가도 부유한 자들의 계층과 가난한 자들의 계층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또 그 결과 균형을 유지하기를 요구한다. 두 계층은 각기 다른 계층을 절대 필요로 하는데, 자본은 노동 없이 있을 수 없고 노동은 자본 없이 있을 수 없다. 화합이 만사를 아름답고도 질서 정연하게 만드는 반면에 끝없는 반목은 혼란과 잔혹만을 조장할 뿐이다. 그리스도교는 분쟁을 종식시키고 나아가 분쟁의 뿌리 자체를 근절시키는 놀라운 힘을 풍성히 지니고 있다.
교회가 해석하고 수호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에게 정의가 당당히 요구하는 의무들에서 출발하여 그들에게 그들 상호간의 의무들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서로 화해시키고 일치시키는 강한 힘을 지닌다.

노동자와 고용주의 의무들

정의의 원리에 따르면 근로자와 노동자의 의무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자유와 평등에 따라 체결된 업무를 온전하고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하고, 사용자의 재산을 침해하거나 그의 인격을 손상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경우에라도 폭력의 사용을 삼가야 하고 자신을 수호하려는 노력을 폭동으로 변질시켜서는 안된다. 또한 허황된 것들을 약속하면서 교활하게 선동하는 자들과 야합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결과는 무익한 후회와 만사를 끝장내는 파멸일 뿐이다.
자본가와 고용주가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은 고용인들을 노예처럼 취급하지 말아야 하고 그들이 혹시라도 그리스도교인이 됨으로써 더욱 품위를 지니게 되는 인격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 이성과 신앙에 비추어볼 때 노동은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수고로써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품위를 드높여준다. 참으로 부당한 일은 인간을 마치 이윤 추구를 위한 물건처럼 마구 다루는 것이고 오직 노동 기술이나 노동력으로써만 인간을 평가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종교 생활 및 영혼의 선익과 관련된 의무를 준수하도록 고용주들은 배려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종교적 의무들을 수행하는 데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와 편의를 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것, 타락의 온갖 유혹과 저속한 행위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는 것, 가정에 대한 책임감과 절약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해주는 것, 연령과 성별에 적합치 않는 힘겨운 노동을 강요하지 않는 것은 고용주들의 당연한 의무들이다. 그들의 의무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각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하여 정의에 따라 임금을 결정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가들과 고용주들이 대체로 명심해야 할 원칙은 자신의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곤궁한 자들과 불쌍한 자들을 억압하고 이웃의 비참을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신법과 실정법이 모두 금한다는 사실이다. 정당한 임금을 착취하는 것은 하느님께 복수를 호소하리만치 중대한 과오이다. “잘 들으시오. 당신들은 당신들의 밭에서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고 가로챘습니다. 그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또 추수한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의 귀에 들렸습니다.”5) 마지막으로 부유한 자들은 폭력으로나 속임수로나 고리 대금업의 방법으로든 노동자의 보잘것없는 소득에 손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의무는 노동자가 자신을 보호하기에는 미약하고 능력이 부족하며 또한 그의 밑천이 빈약하기 때문에 더욱 각별히 준수되어야 한다.

15. 이러한 의무들이 잘 지켜진다면 비참한 상태가 충분히 완화되고 분쟁의 여러 원인들이 제거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는 교회는 더욱 높은 목적을 지향한다. 즉, 두 사회 계층을 가능한 한 가깝게 접근시키고 친구 사이가 되도록 노력한다.
인간의 마음이 또 다른 삶, 곧 영원한 삶을 향해 있지 않으면 현세의 사물들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한다. 영원한 삶이 없다면 도덕적 선에 대한 참다운 개념은 반드시 없어지고 말 것이며 나아가 온 창조계가 설명할 길 없는 수수께끼가 될 것이다. 장차 실현될 세상의 삶이 인간의 참 삶이라는 것은 자연 자체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리이고 그리스도교의 교리인데, 이 가르침을 근본 바탕으로 하여 종교의 모든 진리가 구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지상적이고 일시적인 재화들이 아니라 천상적이고 영원한 보화들을 향유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땅은 고향으로서가 아니라 유배의 장소로서 하느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재산 및 다른 지상적 보화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든 적게 소유하고 있든 그것은 영원한 행복에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그 재화들을 선용하거나 악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구속 행위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현세의 삶 안에 얽혀 있는 여러 가지 번민과 고통들을 없애신 것이 아니라 덕을 쌓는 자극제 및 공로를 쌓는 기회로 그것들을 변화시키셨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들 중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발자취를 따르지 않는다면 하늘 나라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가 끝까지 참고 견디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6) 예수께서는 번민과 고통들을 스스로 기꺼이 떠맡으심으로써 놀랍게도 고통과 수고의 짐을 가볍게 하셨고 또한 모범으로써뿐 아니라 당신의 은총 또는 영원한 보상에 대한 희망으로써도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더욱 쉽게 이겨낼 수 있게 해주셨다.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7)

16. 그러므로 부유한 이들은 경고를 받는다. 재화는 부자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못하며 그것들은 장차 올 행복을 위해서 유익하기보다는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8) 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당히 엄중한 경고9)를 상기하고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재화의 사용에 대하여 심판관이신 하느님께 가장 엄격한 셈을 바쳐야 한다.

재화의 소유와 사용

재화의 사용에 대하여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원칙은 역시 철학에 의하여 제시되었지만 교회에 의하여 완전하게 보충되어 정립된 가르침이다. 교회는 순수 사변에 만족하지 않고 실천의 영역에로 나아가 삶을 교화시키려고 애쓴다. 그러한 가르침의 바탕은 재산의 부당한 소유와 정당한 사용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사유 재산권은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이며, 또한 이 권리의 행사는 특별히 사회 생활에 있어서 합법적일 뿐 아니라 절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인간의 생활에 정당하고, 나아가 필수적이다.”10) 재화의 사용이 어떠해야 하느냐고 질문을 받는다면, 교회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인간은 물질적 재화를 자신의 것으로뿐 아니라, 공동의 것으로 가져야 한다. 이에 대해 사도께서도 말씀하신다. 이 세상의 부자들은 자기의 소유를 기꺼이 나누어주어야 한다.”11) 물론 아무도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에게 꼭 필요한 것까지 남들에게 베풀어야 할 의무를 진 사람은 없다. 더욱이 자기 신분에 알맞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까지 내놓아야 할 의무는 없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의 처지보다 못하게 살아야 할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12) 그러나 자기 생활에 필수적인 것과 신분에 필요한 것 이외의 나머지를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마땅한 의무이다.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13) 극도로 궁핍한 경우를 제외하고 이러한 의무들은 분명히 정의에 입각한 의무가 아니고 그리스도교 애덕의 의무이므로 법률로 그 실천을 강요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인간의 법과 판단에 그리스도의 법과 판단이 선행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너그러이 베풀어주는 덕행에 관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말씀하시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14)고 가르치시고 또 궁핍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나 거절한 것은 곧 당신 자신에게 선행을 행한 것이나 거절한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15)
결론적으로 외적이고 물질적인 재화이든 정신적인 재능이든 하느님께로부터 풍성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기의 인격 완성에 그것을 활용하는 동시에 하느님 섭리의 봉사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활용하도록 그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 재능을 숨기지 말아야 하고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은 자선을 베푸는 데에 너무 인색하지 말아야 하고 기술을 가진 사람은 이웃 사람의 편의와 이익을 위하여 그것을 나누어야 한다.”16)

노동의 존엄성

17. 교회는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처지와 가난이 하느님 앞에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모범을 보이시어 이 진리를 확인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부요하셨지만 가난하게 되셨고”17)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느님 자신이시지만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정받기를 원하셨다. 더욱이 그분은 노동하심으로써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시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가 아닌가?”18) 이러한 모범을 친히 보여주신 하느님을 생각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진실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진정한 존엄성과 고귀함은 전적으로 도덕 곧 덕행으로 응답하는 태도에 있다. 덕은 높은 신분의 사람이건 낮은 신분의 사람이건, 부유한 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쌓을 수 있는 공동 유산이다.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간에 영원한 행복의 보상은 오로지 덕을 쌓는 행업에만 베풀어진다. 더욱이 하느님께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쏟으시는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하시기 때문이다.19) 그분은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모든 사람을 인자로이 부르시어 당신께로부터 위안을 받게 하신다.20) 무력하고 박해받는 사람들을 넘치는 사랑으로 감싸주신다. 이러한 진리들은 부유한 자들의 오만한 태도를 낮추고 불쌍한 자들의 굴욕적 자세를 치유해 주는 놀라운 효력을 지닌다. 또한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 모두에게 절제와 관용의 정신을 고취시키는 힘을 지닌다. 이러한 진리에 힘입어 교만이 빚어낸 간격이 좁혀지고 두 계층이 서로 화해함으로써 우정 어린 화합에 일치하게 되는 일이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것이다.

자연의 재화 및 은총의 보화의 공동 소유

18. 그러나 두 계층이 복음의 법에 순종한다면 단순한 우정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형제적 사랑의 결속을 염원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사람이 만인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났으며 궁극 목적이신 하느님께로 향해 나아가고 있고 하느님 홀로 사람들과 천사들을 완전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았고 그들 서로만이 아니라 “많은 형제들 중의 맏아들”이신 주 그리스도와 결합되도록 하느님의 자녀의 품위에 부르심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자연의 재화와 은총의 보화가 인류의 공동 유산이고 자신의 결함이 없다면 천상의 보화들을 상속받는 데에 제외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느끼게 될 것이다.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21)

19. 바로 이것이 복음 안에 내포되어 있는 이상적인 권리와 이상적인 의무이다. 복음이 세상 안에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면 온갖 분쟁이 종식되고 평화가 회복되지 않겠는가?

교회의 모범과 교도권

20. 교회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어머니다운 태도로 그 자신이 몸소 그것을 실천한다. 교회는 자기 교리가 내포하고 있는 구원의 생명수가 주교들과 사제들을 통하여 넘쳐 흘러서 온 땅을 적시도록 배려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고취시켜 주려고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인간의 마음과 의지를 순화시켜 준다. 그리고 실제로 모든 선익을 가져다 주는 가장 중대한 이 역할은 오로지 교회만이 참으로 효과 있게 수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 목적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을 감화시키기 위하여 이용하는 방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고, 따라서 그 자체 안에 신적인 효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방편들만이 사람들의 깊숙한 마음속과 양심에까지 가닿아,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의무감을 갖고 행동하게 해주고, 여러 가지 욕망과 격정들을 잘 다스리게 해주며, 고귀하고 드높은 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해주고 덕을 쌓는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장애들을 대범하게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사실을 확인하려면 역사적인 사례들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들과 사항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업적으로 말미암아 인간 사회가 변화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인류의 발전이었으며 나아가 도덕적인 죽음으로부터 도덕적 삶에로의 소생이었고 일찍이 전혀 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더 나은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더없이 완벽한 발전이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변화의 근원이고 완성이시므로, 그 모든 변화가 그분에게서 연유되었으며 그분과 결부되어 있음을 우리는 명심하고 있다. 세상이 복음의 빛을 통하여 말씀의 강생과 인간 구원의 위대한 신비를 깨달았을 때에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인간 사회 안에 파고들었으며, 세상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계명과 법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일 세상의 죄악을 척결하는 해결책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교적 생활과 그리스도교적 제도로 되돌아가는 길밖에는 없을 것이다. 몰락하여 가는 사회를 일으켜 세우려면 그 사회가 존재하기 시작할 때에 부여받은 근본 원리들에로 그 사회를 다시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 중요한 원칙이다. 모든 사회 단체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고 거기에 도달하여야 한다. 사회 단체의 모든 움직임과 활동을 유발시키는 원리는 그 단체를 발생시킨 똑같은 원리이기 때문이다.

21. 따라서 교회의 모든 배려가 지상의 현세적 삶에 속하는 것을 무시하면서까지 오로지 영혼의 구원에만 전적으로 쏠려 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특히 노동자들이 그들의 가련한 처지에서 헤어나고 그 상태가 호전되기를 바라며 또 그렇게 배려하고 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을 덕행으로 인도하고 교화시킴으로써 그 일을 추진한다. 그리스도교의 관습들이 그러한 역할을 계속 수행해 나갈 때에 그 자체로서도 현세 삶의 번영에 기여한다. 왜냐하면 그 관습들은 온갖 선의 근원이며 원천이신 하느님의 축복을 얻어 누릴 수 있으며, 모든 것이 풍족한 상황에서도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재난, 즉 재산에 대한 탐욕과 쾌락에 대한 탐닉을 규제하기 때문이다.22) 그 관습들은 검소한 생활에 만족하면서 재산의 부족을 절약으로 보충하며, 적은 재화들은 물론 큰 재화들을 낭비하고 심지어 엄청난 유산까지 탕진하게 만드는 악행들을 멀리하라고 가르친다.

4. 창세 3,17.
5. 야고 5,4.
6. 2디모 2,12.
7. 2고린 4,17.
8. 마태 19,23-24 참조.
9. 루가 6,24-25 참조.
10.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II-II, q.66, a.2.
11. 「신학대전」, II-II, q.65, a.2.
12. [신학대전」, II-II, q.32, a.6.
13. 루가 11,41.
14. 사도 20,35.
15. 마태 25,40.
16. 성 대 그레고리오, Evang. Hom. 10, 7항.
17. 2고린 8,9.
18. 마르 6,3.
19. 마태 5,3:“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참조.
20. 마태 11,28:“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편히 쉬게 하리라” 참조.
21. 로마 8,17.
22. 1디모 6,10:“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참조.


교회가 실천하는 애덕의 활동

교회가 하는 일은 그 밖에도 또 있다. 교회는 빈곤의 구제에 효력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진 수많은 단체들을 설립하고 또 운영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교회는 자기를 반대하는 적들로부터도 찬사와 경탄을 자아낼 정도로 훌륭하게 이 자선 사업을 추진해 왔다.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안에는 형제적 사랑의 열정이 뜨겁게 달아올라 부유한 이들이 다른 형제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너무나 자주 자기 재산을 희사하였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23) 사도들은 매일의 자선 행위를 부제들에게 맡겼는데 부제직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제정된 직분이었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모든 교회를 돌보는 일에 여념이 없었는 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모은 희사금을 가난한 신자들에게 직접 전해주기 위하여 고달픈 여행을 감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신자들이 집회 때마다 자발적으로 모은 헌금들을 ‘신심의 보증금’이라 불렀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차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죽었을 때 장례를 치러주고 남녀 구별 없이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들과 늙은 사람들과 파산당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에 사용되었기”24)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점차로 교회의 세습 재산이 형성되었는데 교회는 그것을 항상 종교적인 배려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공유 재산으로 활용하였다.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참신하고도 결정적인 구제 활동 덕분에 구걸하는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사실상 교회는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 모두의 공동 어머니로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영웅적인 자선 행위를 독려하고 실천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여러 수도 단체와 다른 자선 단체들을 탄생시켰는데, 이 단체들은 도움과 위안을 받지 못하는 온갖 종류의 비참한 처지를 그냥 방치해 두지 않았다. 이교도들이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미 그렇게 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훌륭한 자선 활동에 대해서조차 비난을 퍼붓는다. 그들은 이 자선 활동을 법률적 성격의 원조 사업으로 대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재간이 있고 성실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선익을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선 활동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자선 활동은 교회의 도덕적 힘에서 나온 것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으로부터 생겨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를 등지고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협력

22. 물론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려면 인간적 방편들도 활용하여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 문제에 관심을 쏟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또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본받아 협력해야 한다. 좋은 결과는 그것을 전적으로 좌우하는 모든 원인들이 조화 속에서 함께 작용하여 이루어지는 결실이라는 평범한 원칙을 명심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의 협력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국가란 어떤 특정한 나라들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구성되어 있고 또 기능을 다하는 그런 국가가 아니라 가톨릭 교리 내용과 완전히 부합되고 올바른 이성의 원칙들 위에 근거를 둔 참된 의미의 국가이다. 본인 자신이 ‘그리스도교 정신에 따른 국가 조직’에 관한 회칙에서도 이러한 국가관을 제시하였다.

국가 번영의 기원

따라서 국가의 통치자들은 우선 모든 법과 정치 제도들을 총괄적으로 또 균형 있게 운용하여 사회의 번영과 개인의 복리가 자연스럽게 증진되도록 국가를 다스리고 운영해야 한다. 이러한 일은 현명한 정치가의 직분이고 통치자의 본분이다. 그런데 국가의 번영은 특히 도덕적인 사회 관습, 건전한 가정 생활, 열심한 종교 생활 및 정의의 실천, 조세 공과금의 적절한 부과와 균등한 배분, 상공업 및 농업의 발전 그리고 이와 유사한 다른 정책들, 즉 더 훌륭히 촉진될수록 더욱더 백성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여러 요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오로지 이런 제도들을 통해서만 국가는 다른 사회 계층들과 노동자 계층의 복지를 상당히 촉진시킬 수 있으며 또한 부당한 간섭의 의혹을 받지 않고서 자기의 충만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공동선을 보살펴주는 것이 국가의 본분이고 권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의 이러한 총괄적인 배려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전체 이익이 크면 클수록 노동자들의 복리 증진을 추구하기 위한 다른 방법들을 강구하려는 필요성은 줄어들 것이다.

24. 우리 문제의 핵심에 더 가까이 가려면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 또 있다. 즉, 국가는 더 낮은 계층과 높은 계층의 사람들을 조화 속에서 똑같이 포용하는 단일체라는 점이다. 노동자들도 부자들에 못지 않게 타고난 권리를 가진 시민들이고 참되고 살아 있는 국가 구성원들이며 또 그 결과 두말할 나위 없이 절대 다수인 노동자 계층의 가정들을 통하여 국가가 한 생명체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계층의 시민들을 소홀히 하면서 어느 한 계층의 시민들을 보살피는 것은 불합리하며 노동자들의 복지를 마땅히 배려해 주는 것이 국가의 진정한 의무이다. 이 본분을 다하지 않을 때 각 사람에게 각자의 몫이 되돌아가게 해주는 정의는 손상된다. 이 점에 대해서 성 토마스 데 아퀴노가 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부분과 전체가 어떤 식으로든 한 단일체를 이루기 때문에 전체에 속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부분에 속해 있다.”25) 그러므로 공동선을 위해 애쓰는 통치자들이 수행해야 할 많은 중대한 의무들 가운데 으뜸가는 임무는 ‘분배 정의’를 엄격하고도 공정하게 준수함으로써 모든 계층의 시민들을 공평하게 보살펴주는 일이다.

25. 모든 시민이 예외 없이, 나중에 각 개인들의 이익으로 환원되는 공동 복지에 각자가 협력한다 할지라도 공동 협력은 모든 부면에 있어서 일률적으로 똑같을 수는 없다. 국가의 통치 방식이 아무리 변할지라도 국민 각자의 처지는 항상 서로 다르며 불평등할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과 차이가 없는 인간 사회는 존재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사람들, 판결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평화시에 치안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전쟁 중에 나라를 방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여러 직분들이 공동선을 실현하는 더욱 용이하고 효과적인 방편들이기 때문에, 국가의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 근로자들도 똑같은 방식이나 업무로써 공동선에 협조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그들의 업무 수행으로써 공동선의 실현에 큰 일익을 담당한다. 물론 사회 복지의 궁극 목적이 국민 각자의 손색 없는 안녕이기 때문에 사회 복지는 반드시 덕을 바탕으로 하여 실현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물질적 재화의 사용이 덕을 실천하는 데에 필수적이기”26) 때문에 질서 정연한 모든 사회는 그런 재화들을 풍부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물질적 재화들을 생산하는 데에는 논밭에서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노동과 기술이 필수적이고 효과적이다. 이 점에 있어서 노동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므로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해서만 국가의 부가 생산된다는 것이 아주 확실하다. 그러므로 정부는 노동자 자신이 생산해 내는 국가의 재산에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참여할 수 있도록 노동자에게 적극 배려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게 되고 또 더욱 편리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노동자의 처지를 호전시킬 수 있는 모든 방도가 최대한 강구되어야 하며 또 이러한 배려가 분명히 어느 한 사람에게도 손해를 끼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혜택을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의 그토록 중요한 이득을 산출해 내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의 해결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국민들을 위한 국가의 통치

26. 이미 말한 대로 국가가 개인이나 가정을 장악하는 것은 부당하다. 개인이나 가정이 공동선과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국가는 마땅히 개인이나 가정이 가능한 한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또한 국가의 통치자들은 사회 전체와 그 부분들을 보호해야 한다.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 최고 통치권자에게 맡겨진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에 공공의 안녕은 최고의 법으로 보장받을 뿐 아니라 정부의 유일하고 근본적인 존재 이유이다. 정부의 설립 목적이 통치자 개인의 이득이 아니라 국민들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임을 철학과 복음이 한결같이 가르치고 있는 만큼, 통치자는 사회의 구성원들도 마땅히 보호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정치 권력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또한 하느님의 주권에 참여하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본받아 행사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자부적 배려로써 온 우주뿐 아니라 각개 피조물까지도 보살피시고 다스리신다. 따라서 사회 전체나 일부 구성원들이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하고 손해를 입게 되는 상황에서 그 침해를 회복하거나 미연에 방지할 만한 별다른 방도가 없을 때에 국가가 개입할 필요가 있다.

국가의 의무와 개입의 한계

개인의 복지도 사회의 안녕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공공 질서와 평온이 유지되어야 하고, 가정 생활이 하느님의 법과 자연의 원리들에 따라 영위되어야 하고 종교가 존중되어야 하며 사회의 미풍 양속과 개인의 건전한 생활이 확산되어야 하고 정의가 침해당하지 말아야 하고 사회의 한 계층이 다른 계층들을 억압하지 말아야 하고 국가의 이익을 신장시키고 국가를 수호할 능력을 갖춘 건전하고 강한 시민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만일 노동자들의 폭동이나 파업으로 말미암아 사회 질서가 극도로 교란된다면, 가난한 노동자들의 가정이 뿌리째 흔들린다면, 노동자가 종교 생활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와 기회를 갖지 못하여 그 생활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한다면, 성문란 및 악으로 유인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하여 공장 내의 건전한 풍속이 문란해진다면, 기업주들이 강요하는 부당한 부담 때문에 노동자들이 억압당하거나 인간의 존엄성에 상반되는 계약 조건에 희생된다면, 성별과 연령에 맞지 않는 과도한 작업량과 작업 환경으로 인하여 노동자들의 건강이 위협받는다면, 이런 경우에 법이 힘과 권위로써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법의 개입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는데 국가의 개입이 필요한 경우에 적용되는 똑같은 한계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악이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다른 방도가 없을 때에 한하여 법이 개입해야 한다.

27. 권리를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그 권리를 마땅히 보호받아야 하며 공권력은 권리의 침해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그 침해에 대해 처벌함으로써 각 사람에게 그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개인의 권리를 옹호함에 있어서, 국가는 특별히 약자들과 빈자들을 보살펴야 한다. 부유한 이들은 자기 방어 능력이 있으므로, 공적인 보호를 받을 필요가 덜하다. 이와는 반대로 빈곤한 대중은 든든한 재산이 없으므로, 국가의 재산에 크게 의존한다. 따라서 임금 노동자들이 빈곤한 대중에 속하기 때문에, 국가는 이들을 특별한 배려와 관심을 가지고 돌봐야 한다.

국가는 사유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

28. 아주 중요한 몇 가지 개별 원칙들이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국가의 통치자들이 법을 훌륭히 집행함으로써 사유 재산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탐욕의 열기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오르고 있는 오늘날에 특히 국민 모두가 각자의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의 처지를 향상시키는 것은 정의가 허용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을 빼앗거나 평등을 빌미로 하여 다른 사람의 재산을 침해하는 것은 정의와 공동선이 결코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히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다른 사람의 인격을 손상하지 않고 정직하게 자기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하겠지만, 그릇된 주장에 물들고 위태로운 변화에 광분하여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소란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여 폭동을 선동하려는 자들도 적지 않다. 따라서 국가의 공권력은 이에 즉각 개입하여 선동자들을 규제하고 나서 선동의 위험으로부터 선의의 노동자들을, 약탈의 위험으로부터 양심적인 기업주들을 보호해야 한다.

국가는 노동 파업을 예방해야 한다

29.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는 동기는 대개의 경우 작업 시간이 너무 길며 고되고 또 임금이 적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자주 발생하는 이런 심각한 불상사를 국가가 미리 방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파업은 고용주들과 노동자 자신들뿐 아니라 상업과 공공 이익에도 손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또한 일반적 파업에 뒤따라오는 폭력과 소요 사태들이 가끔 사회의 평화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에 가장 큰 도움이 되고 효과적인 해결책은 적절한 법이 노사간의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들을 제때에 제거함으로써 악을 예방하고 또 노사 분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국가는 영적 보화들을 보호해야 한다

30. 그와 동시에 국가는 노동자가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 가운데 으뜸가는 것이 영적 보화이다. 현세의 삶이 아무리 좋고 바람직할지라도, 그 자체는 창조 목적이 될 수 없고 진리에 대한 완전한 인식에 이르고 또 선을 실천함으로써 영적 생명을 완성시키기 위한 방편이며 길일 뿐이다. 인간의 영혼은 그 자체 안에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이 영혼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지배하고 또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온 땅과 온 바다를 이용할 수 있는 주권을 누린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27) 이 점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다. 즉,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주인과 하인, 우두머리와 그 수하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같은 주님께서 만민의 주님이 되시기”28) 때문이다. 하느님 자신이 대단한 존경심으로 다루는 인간 존엄성을 어느 누구도 부당하게 침해할 수 없으며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완성에로 나아가는 길을 걷지 못하게 방해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인간은 자기의 자유 선택권을 단념하여 영혼의 예속 상태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방치되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께 대해 엄격히 수행해야 할 절대적 의무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의무로부터 주일과 축일에 일하지 말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생긴다. 이 휴식은 오랜 시간 무료하게 지내는 상태로 이해해서도 안되고,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흔히 바라듯이, 범죄의 동기와 낭비의 기회가 되는 전적인 태만으로 생각해서도 결코 안된다. 그것은 종교에 의해 거룩하여진 휴식, 곧 안식이다. 종교와 결부된 휴식은 인간을 노동과 일상 생활의 업무로부터 해방시켜 천상 보화에 유념하게 하고 하느님께 마땅한 예배를 드리도록 해준다. 이것이 바로 휴식의 근본 동기이고 안식의 목적이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성서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29)고 인간에게 말씀하시면서 안식을 율법으로 제정해 주셨고 또한 몸소 안식을 준수하심으로써 직접 가르치셨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에 창조 사업을 마치시고 안식을 취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엿새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30)


23. 사도 4,34.
24. 테르툴리아누스, Apologia II,39.
25. 「신학대전」, II-II, q. 61, a.1 ad 2.
26. 성 토마스 데 아퀴노, De Regimine Principum, I, c.15.
27. 창세 1,28.
28. 로마 10,12.
29. 출애 20,8.
30. 창세 2,2.



노동자 및 부녀자와 연소자의 노동에 대한 보호

31. 외형적이고 육체적 안녕을 보호하는 문제에 관하여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이득을 목적으로 사람들을 마치 물건 취급하듯 무차별 혹사시키는 악덕 기업주들의 인권 유린으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일이다. 과중한 노동으로 정신이 무디어지고 육신이 핍진해지도록 노동을 요구한다는 것은 정의도 인간성도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활동에도 한계가 있다. 인간의 활동은 훈련과 실행을 통하여 촉진될 수 있으나, 이는 적절한 시기에 활동을 중지하고 휴식을 취할 때에 한해서 그러하다. 따라서 체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 시간이 길어져서는 안된다. 휴식 시간은 노동의 질, 작업 시간과 작업 장소의 환경, 노동자들의 체질 자체와 건강 상태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예컨대, 채석 작업이나 철, 구리 따위의 지하 자원의 발굴 작업은 건강을 해치는 힘든 노동이므로 작업 시간이 단축되어야 한다. 역시 계절에 따라서도 작업량과 시간이 정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계절에는 쉽게 견딜 만한 노동이 다른 계절에는 참으로 견디기 어렵고 너무 고된 작업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결국 신체 건장한 성인 남자에게나 적합한 노동을 부녀자나 연소자에게 강요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연소자들이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충분한 힘을 기르기까지는 공장에서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사춘기에 발산하는 힘은 한창 자라나는 풀과 같아서 조속히 발육시켜 버리면 그 힘이 빨리 소모되며 나아가 연소자에 대한 교육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직종의 노동은 원래 가사를 돌보는 데에 적합한 부녀자들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다. 여자들은 온유한 성품의 여성다움으로써 정절을 훌륭히 지키며 자녀들을 교육하고 가정의 안녕을 유지하는 데에 타고난 자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규범은 꼭 지켜져야 할 일반 원칙이다. 즉, 노동자에게 필요한 휴식은 노동으로 소모된 체력에 비례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노동으로 소모된 체력은 휴식으로써 회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용주들과 노동자들이 서로 맺은 모든 협약에는 노동자들에게 정신과 육신의 휴식을 보장하는, 명시적 또는 묵시적 조건이 있어야 한다. 이것과 달리 합의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게 대해 지고 있는 의무들을 저버리도록 유도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든 절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적정 임금

32. 이제 우리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를 다루게 되는데, 그것은 상반되는 양 극단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하여 올바로 이해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흔히 말하기를 임금은 고용주와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고용주는 합의된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할 바를 다하고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고용주가 합의한 임금 전부를 지불하지 않거나 노동자가 계약한 작업을 완수하지 않을 경우에만 불의가 저질러지며 또한 고용주와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만 국가의 개입이 정당할 뿐이고 그 밖의 다른 경우에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리 전개는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에게 쉽게 납득되지도 않고 모든 사람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측면에서 사태를 관찰할 줄 모르고 또 결정적인 몇 가지 고려해야만 할 사항을 빠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한다는 것은 생활의 다양한 요구, 특히 생계 유지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31) 그러므로 인간의 노동은 인간이 날 때부터 타고난 두 가지 특성을 지니는데, 인격적인 특성과 필연적인 특성이 바로 그것이다. 인격적인 특성이라는 이유는 활동의 힘이 인격 안에 천부적으로 내포되어 있으며 그 힘을 발휘하고 활용하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연적인 특성이라 함은 노동의 결과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수적이며 또 생명 보존이 자연에 의하여 부여된 불가피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격적인 특성에 비추어서만 고찰해 본다면 노동자가 정당한 수준에 못미치는 임금으로 계약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노동을 원하는 만큼 제공할 수 있으므로, 그가 원해서 적은 임금에 만족할 수도 있고 실제로 그것마저 포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격적인 특성과 함께 필연적인 특성도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현실에 비추어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이 두 가지 특성은 논리상으로 구별되지만 실제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실 생명의 보존은 의무이고 이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죄악이므로 아무도 그 의무를 저버릴 수 없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생계 유지를 위한 것을 취득할 권리가 나오며, 가난한 이는 노동으로 취득한 임금을 통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와 고용주가 양자 합의로 계약을 체결하고 임금을 분명하게 결정하더라도, 쌍방간의 자유 의사를 우선하고 능가하는 기본적인 정의가 항상 반영되어야 한다. 임금은 노동자가 검소한 생활, 말하자면 최소한의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미흡해서는 안된다. 만일 노동자가 궁핍 때문에 강요되거나 더 큰 악이 두려워서 더욱 힘든 조건들을 받아들인다면, 또 원하지도 않는데 고용주와 기업주가 부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것은 폭력을 당하는 것이며, 이에 정의가 항의하는 것이다.
그 밖에도 이와 유사한 다른 문제들이 있다. 작업 시간 및 노동자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작업 환경에 대한 세심한 배려는 국가가 부당하게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환경, 시기, 장소에 따라 사정이 너무나 달라지는 문제이므로 이에 대한 결정은 앞으로 우리가 다룰 당사자들의 협동 단체에 맡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또는 국가의 보호나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만 국가의 개입을 요청하면서 정의에 따라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다른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계층들간의 화해의 방편인 절약

33. 노동자의 임금이 그 자신과 가족의 생계 유지 및 안락한 생활에 충분할 경우에 그가 현명하다면 쉽게 절약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또 그리하여 본성 자체의 충동에 따라 지출을 줄이고 임금의 일부를 남겨 어느 정도의 재산을 장만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미 지적한 대로, 침해될 수 없는 사유 재산권은 노동자 문제의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해결에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법은 이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하며 재산을 소유한 국민의 수효가 가능한 한 늘어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몇 가지 큰 혜택이 뒤따를 것이다. 우선 국가의 재화가 더욱 공평하게 분배될 것이다. 혁명은 사회를 두 계층으로 분리하였으며 큰 차이로 벌어지는, 두 계급으로의 분열을 만들어놓았다. 한 계층은 굉장히 부유하여 막강한 세력을 지닌다. 온갖 종류의 생산과 교역 체계를 장악함으로써 부의 모든 원천을 독점하고 국가의 운영에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다른 계층은 가련하고 힘없는 수많은 대중이다. 이들은 생활고에 쪼들려 마음이 조급하고 항상 소요에 쉽사리 휩쓸린다. 그러나 만일 이들이 안정된 재산을 획득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근면해진다면 두 계층은 서로간에 점차 가까워져서 결국에는 극도의 가난과 극도의 부유 사이의 거대한 장벽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
두번째 혜택은 땅에서 훨씬 많은 소득이 산출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토지에서 일하고 있다는 보람을 느낀다면 더욱 기꺼이 또 열심히 수고한다. 더욱이 토지가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양식뿐 아니라 안락한 생활을 마련해 준다는 기대감 때문에 자기가 손수 경작하는 토지에 대해 더 큰 애정을 가지게 된다. 농토에 대한 이 같은 마음가짐이 땅의 소출과 국가의 재산을 증식시키는 데에 얼마나 많이 기여하는지는 쉽게 이해된다. 그 결과 고향에 대한 애향심이라는 세번째 혜택이 생긴다. 왜냐하면 고국이 대체로 편안한 생활을 마련해 준다면 자기 고국을 등지고 외국으로 떠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유 재산이 각종 세금의 과도한 부과에 의하여 고갈되지 아니할 경우에만 그러한 혜택들이 생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유 재산권은 인간의 법이 아니라 자연법에서 나온 것이므로 국가는 그것을 폐지할 수 없으며, 다만 재산의 사용을 규제하고 또 공동선과 융화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을 뿐이다. 국가가 각종 세금의 명목으로 각 사람들에게서 그가 바쳐야 할 것 이상으로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고 비인간적인 처사이다.

노동 조합의 역할

34. 결국 고용주와 노동자 당사자가 가난한 이들을 적절히 도와주고 두 계층을 서로 접근시킬 수 있는 단체들을 통하여 노동자 문제의 해결에 상당히 공헌할 수 있다. 그런 단체들로서 상부 상조의 사회 단체, 노동자와 과부와 고아들이 갑작스런 불상사를 당하거나 고질병을 앓거나 그 밖의 사고를 겪게 될 때에 그들을 보살펴주는 사설 단체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 으뜸가는 단체가 노동 조합이며 이 협동 단체는 다른 모든 단체가 지니는 기능을 거의 다 간직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이 협동체로부터 여러 가지 현저한 혜택을 누렸다. 그 단체는 숙련공들에게 큰 이득을 주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기념비적 업적들이 증언하고 있듯이, 기술 자체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데 문화가 발전하고 새로운 생활 풍습이 형성되어 일상 생활의 요구가 늘어남에 따라 이러한 단체는 오늘날의 실정에 맞게 적응되어야 한다. 이 같은 조직체가 노동자들만으로 구성되거나 또는 고용주와 노동자가 함께 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며, 그 숫자가 증가되고 그 기능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가 이 협동 단체에 대하여 이미 수차례 언급하였지만, 여기서는 노동 조합의 필요성과 긴급성을 다시 한번 설명하고 그 결성 시기, 합법성, 조직 방법, 활동 계획 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사적 단체와 국가

35.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뼈저린 체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활동을 다른 사람의 활동과 연합시키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성서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혼자서 애를 쓰는 것보다 둘이서 함께하는 것이 낫다. 그들의 수고가 좋은 보상을 받겠기 때문이다. 넘어지면 일으켜줄 사람이 있어 좋다. 외톨이는 넘어져도 일으켜줄 사람이 없어 보기에도 딱하다.”32) 또한 “의좋은 형제는 요새와 같다.”33) 이 자연적 성향으로 인하여 인간은 큰 사회 단체인 국가 및 다른 개별 단체들을 형성하게 된다. 이 개별 단체는 분명히 작고 불완전하지만 참다운 사회 단체이다. 이 개별 단체들과 국가 사이에는 각기 그 직접적인 목적이 서로 다르므로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국가의 목적은 보편적이며 공동선에 관심을 두는 것으로서 모든 국민 각자가 적절한 비례에 따라 그 공동선에 대한 권리를 누린다. 이 때문에 국가는 ‘공적 사회’라 불린다. 공적 사회로 말미암아,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한 국가를 세우기 위하여 서로 친교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34) 반면에 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형성되는 다른 사회 단체들은 그 구성원들만의 사사로운 이익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사적 단체라 불린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말을 빌리자면, “사적 사회는 둘이나 셋이 공동 교역의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는 것처럼 사사로운 목적을 추진하기 위하여 결성되는 것이다.”35) 그런데 이 사적 사회 단체들이 국가 안에서 형성되고 또 많은 부분으로서 존재할지라도, 일반적으로 또 단적으로 말해서 국가가 그 결성을 금지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회 단체에 가입하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는 자연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없애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국가가 시민들의 단체 결성을 금지한다면, 이는 명백히 국가의 존재 자체에 모순을 초래한다. 다른 사회 단체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유래도 바로 사회성이라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 사회 단체가 정의의 공정성과 국가의 안전에 명백히 상반되는 목적을 획책하려 할 때에 국가가 그 결성을 금지함으로써 또는 이미 형성되었다면 그 단체를 해체시킴으로써 반대하는 것은 합법적이다. 그러나 국민의 이 자연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또 죄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그 점에 있어서 최대한의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법은 올바른 이성에 부합될 때에만, 또한 따라서 하느님의 영원한 법에 일치될 때에 한해서 구속력을 지니기 때문이다.36)

36. 이제 교회의 권위와 신도들의 신심이 탄생시킨 수많은 형태의 수도회, 협동 단체 및 그 밖의 다른 사회 단체들을 살펴보려 한다. 지금까지 이러한 단체들이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혜택을 주었는지는 역사가 증거한다. 이 단체들을 오로지 이성에 비추어서만 고찰해 보더라도 그것들이 정당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타고난 권리로 말미암아 분명히 합법적인 단체이다. 더욱이 이 단체들은 종교와 결부된 것이므로 오직 교회의 권위에 예속되어 있다. 따라서 국가는 이 단체들에 대하여 어떠한 권한도 행사할 수 없으며 관할권을 주장할 수 없고, 그 대신에 그것들을 존중하고 보존해야 하며 또 필요하다면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실은 그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여러 곳에서 수많은 방식으로 국가가 그 단체들을 장악하고 실정법에 예속시키며 법인체로서의 권리를 박탈하고 사유 재산을 강탈함으로써 그 단체들의 권리를 침해해 왔다. 그 단체들의 사유 재산에 대한 권리는 교회 및 그 단체의 각 구성원들, 그리고 그 단체가 일정한 목적에 따라 모은 재산을 나누어주려고 작정한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당하고 악독한 강탈 행위를 통탄해 마지않는다. 더군다나 결사의 권리에 대한 요구가 드높아져 가고 있는 이때에 평화를 유지하며 많은 이득을 주는 가톨릭 단체들의 결성이 금지당하고 또 종교와 국가에 해를 끼치려고 공공연하게 획책하는 사람들에게 결사의 권리가 널리 주어지고 있는 현사태를 볼 때에 더욱 통탄스럽다.

가톨릭의 노동 단체

37. 확실히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여러 사회 협동 단체들, 특히 노동자들의 단체가 늘어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단체들 가운데 많은 단체의 기원, 목적, 진로 방향에 관하여 논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정보에 의해 확인된 공통 견해에 따르면, 이 단체들 중 상당수가 그리스도교 정신과 공익에 위배되는 조직으로서, 배후의 우두머리들에 의하여 은밀히 조정되고 있다. 이 막후 인물들은 산업을 독점함으로써 자기 단체에 가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협하여 거절하면 큰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고 협박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그리스도인 노동자는 두 갈래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 생활을 위태롭게 하는 사회 조직에 가담하든가 아니면 자신들의 힘을 규합하고 자기들의 고유한 단체를 결성하여 불의와 견딜 수 없는 탄압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의 가장 고귀한 선을 위기에 빠뜨리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찌 후자의 길을 택하는 데에 주저하겠는가?

38.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최고의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시대의 요구를 통찰하여 노동자들의 처지를 적절하게 향상시키는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의 원인을 면밀히 파악하여 노동자 자신은 물론, 그 가족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며 형평의 원칙에 따라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의 상호 관계를 원만히 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그들은 이 두 계층이 서로 지키고 수행해야 할 근본적으로 중요한 의무들과 복음적 계명들을 생생하게 인식시켜 준다. 복음의 계명들은 인간의 마음이 온갖 종류의 탈선에 빠져들지 않게 해줌으로써 절제를 몸에 배이게 해주며, 국가 내에서 상당한 다양성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 간에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해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여러 모임들이 열리는데, 토론 중에 현명한 인사들이 의견을 교환하고 힘을 합쳐서 더 나은 해결 방안에 뜻을 모은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들이 각기 알맞은 노동 조합에 가입하도록 노력하고 조언과 수단들을 제공하여 그들을 도와주며, 그들이 공정하고 유익한 일거리를 확보하도록 배려한다. 이에 주교들은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주고 그들을 보호하며, 많은 수도 사제들과 교구 사제들은 주교의 지도하에 노동 조합원들의 영신적 선익을 열성껏 보살펴주고 있다. 끝으로 부유한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는 노동자들과 함께 거의 공동 보조를 취하면서 조합을 결성하고 널리 보급시키는 일에 자기 재산을 아끼지 않고 투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으로써 당장의 어려움을 해결하게 할 뿐 아니라 또한 장래의 영예로운 퇴직과 평온한 노후를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토록 다양하고 자발적인 성실한 활동이 공동선에 미치는 혜택들은 너무 잘 알려져 있으므로 이에 대해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본인은 다만 그러한 활동들이 앞으로도 더욱더 활발해지기를 염원할 뿐이다. 그러한 단체들이 갈수록 언제나 번창하고 또 현명하게 운영되기를 희망한다. 국가는 시민들의 합법적인 단체들을 보호해야 하지 그 조직과 규율에 깊숙이 간여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생명력의 움직임은 그 내재적 원리에서부터 저절로 나오며 외부로부터의 거친 간섭은 그 생명력을 말살하기 때문이다.

노동 조합의 규율과 목적

39. 어느 단체가 일관된 목적을 향하여 원활한 활동을 펴나가려면 훌륭한 조직과 현명한 규율이 절대 필요하다. 만일 시민들이 실제로 누려왔던 것처럼 한 사회 단체에 가입하는 자유로운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자기 목적에 더욱 부합된다고 판단하는 방향에서 조합을 선택하는 권리를 똑같이 누려야 한다. 조직과 규율이 각기 세세한 부문에 있어서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가 여기서 분명하고 구체적인 규범들을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각 국민의 성격, 노동자들의 경험과 재능과 생산 능력, 상공업의 발전 그리고 나아가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할 제반 환경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규범으로 설정될 수 있는 근본 원칙이 있다.
노동 조합은 조합원 각자가 가능한 한 최상의 신체적 경제적 도덕적 조건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의 달성에 더욱 적합하고 용이한 방편들을 마련할 수 있도록 조직되고 운영되어야 한다.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관심이 그 주요 목적이 되어야 하며 또 사회 단체의 모든 규율이 그 목적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 아니하면 이러한 조합들이 다른 성격의 단체로 변질되어 버리고, 종교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엉뚱한 단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더군다나 노동자가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 주는 단체에 가입할지라도 그의 영혼이 영적 양식을 구하지 못해 파멸의 위험을 겪게 된다면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37)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바로 이 점이 그리스도인과 이교인을 구분짓는 특징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38) 그러므로 이 단체들이 먼저 하느님을 찾게 해야 하고, 조합원 각자가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의무들을 깨닫도록 그들을 위한 종교 교육에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 각기 조합원이 믿어야 할 바, 바라야 할 바 그리고 자기 구원을 위하여 행해야 할 바를 잘 인식하게 해주어야 하며 널리 유포되어 있는 오류들과 타락의 유혹에 물들지 않도록 용의 주도한 방비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노동자가 하느님을 흠숭하고 열심한 신앙 생활을 영위하도록 해주고, 특히 주일과 축일의 의무들을 잘 지키려는 투철한 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모든 이들의 공동 어머니인 교회를 존중하고 사랑하기를 배워야 하고, 교회의 계명들을 준수하며, 죄의 사함과 거룩한 생활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몸소 제정하신 성사들을 자주 받도록 해주어야 한다.

40. 사회 단체의 규약들이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그 구성원들의 평안하고 풍요로운 삶과 경제적 안녕을 위하여 그들 상호간의 결속을 다지는 길이 열리게 된다. 공동 이익에 적합한 방식으로 업무들이 분담되고 다양성이 일치를 깨뜨리지 않도록 업무 분담이 조화 속에서 이루어진다. 구성원들 중 어느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도록 업무들을 분담하고 그 책임 한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각 사회 단체의 공동 재산은 구성원 각자가 필요에 따라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또 고용주의 권리 및 의무가 노동자의 권리 및 의무와 융화될 수 있도록 온전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만일 고용주와 노동자 중 어느 한편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되면, 규약의 구속력 때문에 쌍방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정직하고 유능한 인물들을 쌍방의 조직 안에서 각각 선출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톨릭 노동자들의 단합

또 배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노동자들에게 일자리가 부족해서는 안되며 각기 노동자가 어려움을 겪을 때, 즉 갑작스럽고 돌발적인 산업 위기가 발생하였을 때뿐 아니라 병고나 노령이나 그 밖의 불상사가 일어났을 경우에도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기금이 조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규약들이 자발적으로 준수된다면 가난한 사람들의 물질적 복지와 안녕이 충분히 보장될 수 있으며 또한 가톨릭 협동 단체들이 국가 자체의 융성한 발전에 적지 아니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우리가 가까운 과거로부터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결코 경솔한 짓이 아니다. 실제로 인류의 모든 세대가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역사의 사건들은 서로간에 닮은 점이 많다. 왜냐하면 그 사건들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규제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섭리는 인류를 창조할 때 미리 정해놓은 목적을 향하여 인류의 모든 사건이 진행되어 가도록 인도한다.
교회의 초창기에 희사나 노동에 힘입어 삶을 꾸려나간 그리스도인들은 세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고 무력하였지만 부유한 자들의 동정과 권력 있는 자들의 보호를 받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들은 활동적이고 근면하고 평화를 애호하며 정의를 모범적으로 실천하였고 특히 애덕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았다. 그토록 놀라운 생활과 관습 앞에서 온갖 편견이 사라졌고 악담하는 자들의 험담이 잠잠해졌으며 뿌리깊은 미신의 거짓이 그리스도교의 진리 앞에 굴복당하고 말았다.
오늘날 노동자 문제는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어 있는데 그에 대한 해결책이 좋든 나쁘든 그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그리스도교 노동자들이 단체를 결성하여 연합한다면 그 문제를 훌륭하게 해결할 수 있고 또 현명한 지도를 받는다면 그들 자신과 노동자 단체를 위하여 그들의 선조들이 걸어갔던 똑같은 길을 따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인간의 편견과 노여움이 거셀지라도 사악한 마음으로 정의감이 상실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자비심을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노동자들이 근면하고 절도 있으며 이익보다는 정직을 더 중요시하고 다른 모든 것보다 의무감을 앞세우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될 때에 더욱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또 다른 혜택이 초래될 것이다. 즉, 믿음이 부족하거나 믿음의 생활을 영위하지 않는 노동자들에게 회개의 마음과 희망의 열정을 쉽게 불러일으킬 것이다. 노동자들은 너무 자주 거짓 희망, 허황된 기만에 속아왔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탐욕스런 고용주들로부터 비인간적 대우를 받아왔고 노동으로써 생산해 내는 것 이상의 평가를 거의 받지 못하였음을 자각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노동자 단체 안에 애덕과 형제적 사랑 대신에, 거만하고 불신에 찬 가난과 함께 수반되는 뿌리깊은 불화가 지배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노동자들 가운데에는, 영육의 비참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참혹한 노예 상태의 멍에를 벗어버리기를 절실히 원하지만 인간 관계나 빈곤에 대한 공포 때문에 감히 실행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자가 얼마나 많겠는가. 만일 망설이는 그들을 가톨릭 단체가 도와 자기의 품안에 따뜻이 맞아들이고 또 그리하여 각성한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원조를 베푼다면 노동자 문제의 해결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정적 해결책:애덕

41.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본인은 이토록 어려운 문제를 누가 또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여야 하는지를 제시하였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역할을 즉각 수행하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미 심각한 상태의 악이 지연으로 인해 치유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일을 미루다 보면 그토록 심각한 악을 퇴치하는 일이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국가의 통치자들은 훌륭한 법과 현명한 제도로써 전력을 기울여야 하고, 자본주들과 고용주들은 항상 자기의 의무들을 명심해야 하고, 이 문제에 직접 관련되어 있는 노동자들은 정의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처음부터 줄곧 역설해 왔듯이 참되고 근본적인 치유책은 오로지 종교로부터 나올 수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그리스도교 생활을 다시금 영위해야 한다. 그 생활을 영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뛰어나고 효과적인 방안일지라도 소기의 목적을 결코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를 두고 말하자면, 교회는 모든 시대에 모든 방법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 교회의 활동은 자유로울수록 더욱더 큰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들의 안녕을 돌보는 직책을 맡은 모든 사람이 이 점을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성직자들은 문제 해결에 온 힘과 온 열성을 다 쏟아야 한다.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은 권위와 모범으로써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성심 성의껏 꾸준히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각자 최선을 다하여 공동선의 증진에 이바지하고 특히 자기의 안녕을 보살피기 위하여 전심 전력을 다해야 하며 또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 모든 덕의 근원이고 절정인 애덕의 열정을 불러일으켜 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두가 염원하는 안녕은 근본적으로 사랑이 널리 확산되어 생겨난 결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본인이 말하는 사랑은 그 자체 안에 복음 전체를 요약하며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항상 자신을 희생시킬 만반의 태세를 갖춘 그리스도교 사랑, 곧 애덕이다. 애덕은 그야말로 세속의 교만과 이기심을 해소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약이다. 애덕의 신적 요소들에 대하여 성 바오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39)

42.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본인은 여러분 각자와 여러분의 사제들과 신자들 모두에게 주님께 대한 크나큰 애정과 더불어 하느님 은총과 본인의 호의의 표시인 사도적 축복을 보낸다.


로마 성 베드로좌에서,
교황 재위 제14년,
1891년 5월 15일
교황 레오 13세



31. 창세 3,19.
32. 전도 4,9-12.
33. 잠언 18,19.
34. Contra impugnantes Dei cultum et religionem, cap.II.
35. 상동.
36.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I-II, q.13, a.3.
37. 마태 16,26.
38. 마태 6,32-33.
39. 1고린 13,4-7.

번호 | 문서명 | 교황 | 발표시기 | 전자북
478   진리의 광채 <개정판> (Veritatis Splendor)   요한바오로2세   1993-08-06  
477   Inde a Pontificatus   요한바오로2세   1993-03-25  
476   1993년 제27차 홍보 주일 담화   요한바오로2세   1993-01-24  
475   Europae orientalis 동유럽   요한바오로2세   1993-01-15  
474   1993년 제26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요한바오로2세   1992-12-08  
473   1993년 제1차 세계 병자의 날 담화   요한바오로2세   1992-10-21  
472   Fidei depositum 신앙의 유산     1992-10-11  
471   1993년 제30차 성소 주일 담화   요한바오로2세   1992-09-08  
470   현대의 사제 양성 (Pastores dabo vobis)   요한바오로2세   1992-03-25  
469   Apostolic Letter for the organization of the ecclesiastical jurisdictions in Poland   요한바오로2세   1992-03-25  
468   1992년 제26차 홍보 주일 담화   요한바오로2세   1992-01-24  
467   1992년 제25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요한바오로2세   1991-12-08  
466   1992년 제29차 성소 주일 담화   요한바오로2세   1991-11-01  
465   백주년 (Centesimus annus)   요한바오로2세   1991-05-01  
464   1991년 제25차 홍보 주일 담화   요한바오로2세   1991-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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