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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문화평의회와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생명수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the bearer of the water of life)
기구 문화평의회 발표시기 2003-08-13 전자북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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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문화평의회와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생명수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the bearer of the water of life


‘뉴에이지’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

 


[차 례]


들어가는 말

1. 어떠한 종류의 성찰인가?
 1.1. 왜 지금인가?
 1.2. 커뮤니케이션
 1.3. 문화적 배경
 1.4. 뉴에이지와 가톨릭 신앙
 1.5. 긍정적인 도전

2. 뉴에이지 영성: 개관
 2.1. 뉴에이지는 무엇이 새로운가?
 2.2. 뉴에이지는 무엇을 준다고 주장하는가?
   2.2.1. 매혹: 천사가 있다
   2.2.2. 조화와 이해: 좋은 파장
   2.2.3. 건강: 활기찬 삶
   2.2.4. 전체성: 신비한 미지 여행(A Magical Mystery Tour)
 2.3. 뉴에이지 사고의 근본 원칙
   2.3.1. 위기의 시대에 대한 전 세계적 대응
   2.3.2. 뉴에이지 사고의 본질적 모체
   2.3.3. 뉴에이지의 중심 주제
   2.3.4. 뉴에이지는 무엇에 대하여 말하는가?
     2.3.4.1. 인간인가?
     2.3.4.2. 하느님인가?
     2.3.4.3. 세상인가?   
 2.4. “역사보다는 신화의 주인공들”인가? : 뉴에이지와 문화
 2.5. 뉴에이지가 급속히 성장하여 효과적으로 전파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3. 뉴에이지와 그리스도교 영성
 3.1. 영성으로서 뉴에이지
 3.2. 영적 자아 도취?
 3.3. 우주의 그리스도
 3.4.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와 뉴에이지 신비주의
 3.5. ‘내면의 하느님’과 ‘신화’(神化: theosis)

4. 대조되는 뉴에이지와 그리스도교 신앙

5. 생명수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6. 유의 사항
 6.1. 올바른 교육과 지도의 필요성
 6.2. 실천적인 조치들

7. 부 록
 7.1. 뉴에이지 사상에 대한 몇 가지 간략한 설명
 7.2. 간추린 용어 해설
 7.3. 뉴에이지 운동의 중요한 장소들

8. 자료들
 가톨릭 교회 교도권 문서들
 그리스도교 연구 논문들

9. 참고 문헌 총목록
 9.1. 일부 뉴에이지 서적들
 9.2. 역사적, 설명적, 분석적 작품들

 


들어가는 말


이 논문은 현대 문화의 여러 측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복잡한 ‘뉴에이지’ 현상과 관련된 것이다.

이 논문은 ‘임시 보고서’로서, 교황청 문화평의회와 종교간대화평의회(이 두 부서는 이 논문의 주요 작성자이다.), 인류복음화성과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등 교황청 여러 부서의 임원들로 구성된 ‘신흥 종교 운동 연구 분과’의 공동 성찰의 결과물이다.

이 성찰 자료는 우선적으로 사목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뉴에이지 운동과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할 수 있도록 돕고자 펴낸 것이다. 이 논문은 독자들에게 뉴에이지 신앙이 현대인의 정신적 갈증을 어떤 식으로 다루고 있는지 생각해 보도록 권유한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뉴에이지 신앙에 이끌리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들 공동체 안에 인간의 영적 차원과 그것을 삶 전체에 통합하는 문제의 중요성, 삶의 의미에 대한 추구, 인간과 나머지 피조물의 관계, 개인적 사회적 변화에 대한 열망, 합리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인 인간관의 거부 등과 같은, 실제로 가톨릭의 총체적 주제들에 속하는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문서는 뉴에이지를 문화적 경향으로 인식하고 이해할 필요성과, 가톨릭 신자들이 뉴에이지의 주제들을 올바로 평가하려면 참된 가톨릭 교리와 영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첫 두 장은 복합적인 문화적 경향으로서 뉴에이지를 소개하면서, 이러한 배경에서 나오는 사고의 기본 토대를 분석한다. 제3장부터는 뉴에이지를 그리스도교 메시지와 비교하여 연구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지표를 제시하고, 아울러 몇 가지 사목적 제안도 하였다.

뉴에이지를 더욱 깊이 있게 살펴보고자 하는 이들은 부록 이후의 부분에서 유용한 참고 자료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이 실제로 다양한 문화적 배경에 맞추어 연구를 더욱 진척시켜 나갈 수 있는 자극제가 되기를 바란다. 이 논문의 또 다른 목적은 더욱 충만한 삶을 위한 확실한 준거를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식별력을 주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무언가를 추구하는 많은 현대인들에게서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갈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미국 주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목자들은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만 주실 수 있는 참된 ‘생명의 물’을(요한 4,7-13 참조) 갈망하는 인간의 마음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여 왔는지 솔직하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교황 성하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복음 메시지의 영원한 새로움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복음 메시지의 능력”(「사도좌 관보」[Acta Apostolicae Sedis] 86[1994], 330)에 의존하고자 한다.

 

1. 어떠한 종류의 성찰인가?


아래의 성찰들이 교회 안에서 모든 차원에 걸쳐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을 가르치는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지침이 되기를 바란다. 이 문서는 뉴에이지를 비롯하여, 행복과 의미와 구원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추구를 나타내는 다른 여러 현대적 징조들이 제기하는 많은 문제들에 완전한 답을 주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뉴에이지를 이해하고, 뉴에이지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 참된 대화를 나누도록 권고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이 문서는 사목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뉴에이지 정신을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뉴에이지 정신이 가톨릭 신앙과 어떠한 점에서 대치되는지를 밝혀 주며, 그리스도교 신앙에 반대하여 뉴에이지 사상가들이 지지하는 태도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으로 요구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신앙에 굳건히 의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굳건한 토대 위에서만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 사도의 첫째 편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권고에 전적으로 부응하는 삶을 이룰 수 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러러 모시고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답변을 할 때에는 부드러운 태도로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사십시오”(1베드 3,15 이하).

1.1. 왜 지금인가?

제삼천년기의 시작은 그리스도 탄생 이천 년이 되는 시점일 뿐만 아니라 점성가들에게는 물고기자리 시대 ─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 ─ 가 끝나 가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 성찰 자료는 뉴에이지에 관한 것이며, ‘뉴에이지’라는 명칭은 점성술에서 말하는 곧 다가올 물병자리 시대에서 유래한 것이다. 뉴에이지는 역사에서 이 시점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하여 현대 문화(특히 서구 문화)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여러 가지 설명 가운데 하나이며, 그 가운데 그리스도교 메시지에 부합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뉴에이지 사상과 뉴에이지 운동을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전체적으로 평가하기에 적절한 때일 듯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특히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에서 확실성과 불확실성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맞는 말이다.1)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며, 정치 제도는 세상을 개선할 수 없고, 정통 의학(대증 요법)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치유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한때는 사회의 중심 요소였던 것들이 이제는 믿을 수 없거나 진정한 권위가 부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사람들이 내면으로, 곧 자기 자신에게로 눈을 돌려 의미와 힘을 얻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장 깊은 요구에 응답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대안적인 제도를 추구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등장한 대안 공동체들의 비체계적이고 혼란한 생활은 결국 규율과 체계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러한 규율과 체계는 오늘날 널리 퍼진 ‘신비’ 운동의 핵심 요소들이다. 뉴에이지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것은 대개 그것이 제시하는 많은 것들이 기성 제도가 흔히 채워 주지 못하는 갈증들을 채워 주기 때문이다.

뉴에이지의 많은 부분이 현대 문화에 대한 반작용이지만, 여러 면에서 바로 그 문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단순히 외부의 권위나 전통과 같은 외적인 부담에 짓눌리지 않는 현대의 서구인을 형성하였다. 사람들은 제도에 ‘소속될’ 필요성을 점점 덜 느끼게 되었으며(그러나 외로움은 현대 생활의 매우 심각한 재앙이다), ‘공식적’ 판단을 자신의 판단보다 우위에 두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인간 숭배로, 종교는 자아의 신성함을 찬양하는 데 필요한 근거를 마련하는 식으로 내면화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뉴에이지는 기업 문화와 ‘번영의 복음’(prosperity Gospel: 이에 관해서는 2장과 4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소비 문화가 신봉하는 가치들을 많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 문화의 영향은 그리스도교와 뉴에이지의 장점이라고 생각되는 것만을 가려내 이 둘을 혼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데서 분명히 알 수 있다.2)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교 내부의 이탈은 일방적인 자아 지향을 받아들임으로써 전통적인 유신론의 범위를 넘어섰으며, 이는 그러한 접근의 혼합을 부추길 것이라는 사실이다. 일부 뉴에이지 관행에서는 하느님께서 개인의 발전을 촉진하는 존재로 격하되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뉴에이지는 자유, 진정성, 자기 의존과 같은 것들을 신성하게 여기는 현대 문화의 가치들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뉴에이지는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뉴에이지는 “극장에 가는 것 이상의 신앙이나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3)고 하면서도, 사람들의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의문점이 있다. 뉴에이지의 환경에서 영성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답은 그리스도교 전통과 뉴에이지라 불릴 수 있는 많은 것들 사이의 차이를 어느 정도 밝혀 줄 열쇠가 된다. 뉴에이지의 일부 경향들은 자연의 힘을 이용하고, 개인의 운명을 알기 위하여 다른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며, 사람들이 정확한 주파수에 따라 그들 자신과 주변 환경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도록 도우려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은 전적으로 숙명론적이다. 반면 그리스도교는 외부와 초월적인 것을 보게 하며, 사랑의 대화를 실천하도록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게 한다.4)

1.2. 커뮤니케이션

지난 몇 년간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혁명은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연출하였다. 뉴에이지가 나이와 배경에 상관없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까지도 이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쉽고 빠르게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넷은, 이를 정보 획득에 알맞은 매우 매력적인 도구로 보는 젊은이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종교의 여러 측면에 대하여 잘못된 정보를 전해 주는 불안한 도구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교’ 또는 ‘가톨릭’이라고 이름 붙인 모든 것이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반영한다고 믿을 수 없으며, 또한 진지한 것에서 터무니없는 것에 이르기까지 뉴에이지 관련 사이트들이 놀랄 만큼 늘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와 뉴에이지의 차이점에 관하여 신뢰할 만한 정보를 필요로 하며 또 그러한 정보에 대한 권리가 있다.

1.3. 문화적 배경

많은 뉴에이지 전통을 살펴보면, 사실 뉴에이지에는 새로운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뉴에이지라는 이름은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 시기에 장미 십자회와 프리메이슨단을 통하여 유포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나타내는 실재는 서양의 밀교가 현대적으로 변형된 것이다. 서양 밀교의 기원은 그리스도교 초기에 성장하고 유럽의 종교 개혁 시대에 힘을 얻었던 영지주의 단체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양 밀교는 과학적 세계관과 나란히 성장하였으며, 18-19세기를 거치면서 이론적인 정당성을 획득하였다. 서양 밀교는 인격적 하느님을 점차 거부하고, 전통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로 나타나곤 하던 다른 존재들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이러한 존재들을 점차 독창적으로 변화시키거나 다른 성격들을 추가하였다. 현대 서구 문화에서 뉴에이지 사상에 강력하게 힘을 실어 준 경향은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일반적인 수용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자연의 숨겨진 영적인 힘이나 세력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오늘날 뉴에이지 이론으로 인정받는 것의 뼈대가 되어 왔다. 기본적으로, 뉴에이지는 그 바탕이 되는 세계관이 이미 널리 받아들여져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수용 층을 갖게 되었다. 상대주의의 성장과 보급, 또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감과 무관심이 토대를 잘 닦아 놓았던 것이다. 또한 뉴에이지를 포스트 모더니즘 현상으로 볼 수 있는지,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지에 관하여 활발히 논쟁해 왔다. 뉴에이지 사상과 관행의 존재와 열기는 초월성과 종교적 의미에 대한 인간 정신의 억제할 수 없는 갈망을 입증한다. 이는 비단 현대의 문화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대의 그리스도교 세계나 이교 세계에서도 이미 명백히 드러난 것이다.

1.4. 뉴에이지와 가톨릭 신앙

뉴에이지의 종교성이 어느 면에서는 인간 본성의 진정한 정신적 갈망에 부응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뉴에이지의 그러한 시도는 그리스도교 계시에 어긋난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특히 서구 문화에서는 ‘기존과 다르게’ (alternative)영성에 접근하는 방식이 강한 매력을 얻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심리적으로 개인을 긍정하는 새로운 형태들이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심지어는 피정의 집이나, 신학교, 수도자 양성 기관에서도 성행하고 있다. 또한 옛날의 지혜나 예식에 대한 향수나 호기심이 증가한 것도 밀교와 영지주의가 대중적으로 놀라운 성장을 이룬 한 원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확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켈트’ 영성5)이라고 알려진 것이나 고대인들의 종교에 특히 이끌리고 있다. 고대 종교나 동양 종교의 영성에 관한 책이나 강좌들이 성행하고 있으며, 그러한 것들은 흔히 상업적 목적으로 ‘뉴에이지’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들과 맺는 관계가 언제나 분명한 것은 아니다. 사실, 그러한 관계들은 흔히 부정되고 있다.

뉴에이지 사상과 관행은 그리스도교적으로 식별해 볼 때 2-3세기의 영지주의처럼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해 온 사상들을 요약해 놓은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이른바 뉴에이지를 가장하여 고대 영지주의 사상으로 회귀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우리는 이것으로 종교의 쇄신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단순히 영지주의를 실천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러한 정신 자세는 하느님을 깊이 알고자 한다는 미명 아래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그 말씀을 순전히 인간의 말로 바꾸는 결과를 가져온다. 영지주의는 결코 그리스도교의 영역을 완전히 포기한 적이 없다. 오히려 영지주의는 언제나 그리스도교와 나란히 존재해 왔으며, 때로는 철학적 운동의 형태를 띠기도 하지만, 흔히는 분명히 종교나 유사 종교의 특징을 띠며, 이러한 특징은 명시적이진 않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분명히 상충되는 것이다.”6) 그 한 예로 애니어그램을 들 수 있다. 9가지 유형의 성격 분석 도구인 에니어그램을 영적 성장의 한 도구로써 사용하게 되면 교리와 그리스도교 신앙 생활에 혼란을 가져온다.

1.5. 긍정적인 도전

뉴에이지 종교성의 매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일부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심오한 영성을 불어넣어 주지 못한다고 잘못 생각하여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뉴에이지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며 ‘넥스트’ 에이지(next age)를 이야기하기도 한다.7) 그런 사람들은 1990년대 초에 미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위기를 언급하면서, 특히 영어권 밖에서 나중에 그러한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서구의 수많은 도시들에 있는 서점과 라디오 방송국들, 무수한 자기 수양 단체들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적어도 당분간은 뉴에이지가 현대 문화의 한 현상으로 매우 활기차게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뉴에이지의 성공은 교회로서는 도전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더 이상 그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없거나 한 번도 준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흔히 뉴에이지를 추구하게 되는 것은 순수한 갈망 때문이다. 곧 그들은 더욱 깊은 영성,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무엇, 그리고 혼란스럽고 흔히는 소외가 늘어나는 세상을 의미 있게 하는 길을 갈망하는 것이다. “일상 생활과 철학, 심지어는 의학과 정신 의학에까지 침투한 물질주의, 종교적 초자연적인 경험을 고려하기를 거부하는 환원주의, 이기주의를 조장하고 다른 사람들과 미래와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무절제한 개인주의적 산업 문화”8)에 대한 뉴에이지의 비판은 긍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뉴에이지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뉴에이지가 삶의 물음들에 대한 대안적 해답으로 제시하는 것들 안에서 찾아야 한다. 교회가 사람들의 갈망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비난받지 않으려면, 교회의 구성원들이 해야 할 두 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원리들에 더욱 굳건히 뿌리박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만족을 얻지 못할 때 그들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는 그들 마음속의 소리 없는 외침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 그분을 따를 준비를 하라는 부름도 있다. 그리스도만이 행복과 하느님께 관한 진리, 그분의 사랑에 응답할 준비가 된 모든 사람을 위한 충만한 삶에 이르는 참된 길이시기 때문이다.

 

2. 뉴에이지 영성: 개관


그리스도인들은 서구의 여러 사회와 또 점차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뉴에이지라고 알려진 현상의 다양한 측면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매혹적이면서도 복잡하며 알 수 없고 때로는 혼란스럽기도 한 것에 어떻게 하면 가장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을지 알고 싶어한다. 이 성찰 자료는 그리스도인들이
─ 발전하고 있는 뉴에이지 전통의 요소들을 밝히고,
─ 그러한 요소들이 그리스도교 계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것이다.

이 성찰 자료는 현재의 도전에 대한 사목적 대응일 뿐이며, 뉴에이지 현상을 속속들이 열거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면 양이 방대해질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보는 다른 곳에서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뉴에이지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희화화하지 않으려면 뉴에이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뉴에이지 운동과 관련된 것은 전부 좋다거나 전부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으며, 이는 사실도 아니다. 그러나 뉴에이지 종교성의 기본적인 시각을 놓고 볼 때, 전체적으로 그것이 그리스도교 교리나 영성과 조화를 이루기는 어렵다.

뉴에이지는 일반적으로 ‘신흥 종교 운동’이라는 말로 이해되는 의미의 운동은 아니며, 일반적인 의미의 ‘사교’(cult)나 ‘종파’(sect)라는 말로 규정할 수도 없다. 뉴에이지는 음악, 영화, 학회, 회의, 피정, 치료 요법, 기타 많은 활동이나 행사와 같은 다양한 현상으로 문화 전반에 퍼져 있기 때문에, 일부 종교나 유사 종교 단체들이 의식적으로 뉴에이지 요소들을 통합시킨다고 하더라도 뉴에이지는 훨씬 더 광범하고 비형식적이며, 또 뉴에이지가 다양한 종파나 유사 종파들의 사상적 원천이 되어 왔다는 주장도 있다.9) 뉴에이지는 하나의 통일된 운동이라기보다는, 세계적으로 생각하지만 지역적으로 행동하며 접근하는 신봉자들의 느슨한 조직망이다. 이 조직망을 이루는 사람들은 반드시 서로 잘 아는 것은 아니며, 안다고 해도 만나는 일은 드물다. ‘운동’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생길 수 있는 혼란을 막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뉴에이지를 ‘영역’(milieu)10) 또는 ‘청중 숭배’(audience cult)11)라고 하기도 한다. 동시에 “뉴에이지는 매우 일관성 있는 사조(思潮)”12)로서 현대 문화에 대한 고의적인 도전이라는 지적도 있어 왔다. 뉴에이지는 여러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한 제설 혼합주의적 구조로서, 사람들이 아주 다른 각도에서 다양하게 참여하여 관심을 나누고 관계를 맺도록 해 준다. 어떤 면에서 뉴에이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여러 경향이나 관행, 태도는 사실 주류 문화에 대한 광범위하고 두드러진 반작용의 일부이므로, ‘운동’이라는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민권 운동이나 평화 운동과 같은 다른 광범위한 사회 운동에 적용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운동이라는 말은 뉴에이지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한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뉴에이지도 운동의 주요 목적들과 관련된 복잡한 부류의 사람들을 포함하지만, 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나 특정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흔히 뉴에이지가 사람들의 종교적 의문이나 요구에 응답하고, 삶의 영적 차원을 발견하거나 재발견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뉴에이지 종교’라는 표현은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뉴에이지 종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삶에서 의미와 분별력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의 참된 성격을 의문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뉴에이지 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 스스로도 ‘종교’와 ‘영성’을 신중하게 구분한다는 사실을 존중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직화된 종교는 그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그러한 종교를 거부하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다른 곳에서 ‘영성’을 찾아 왔다. 나아가 뉴에이지의 핵심에는 특정 종교들의 시대는 끝났다는 확신이 깔려 있다. 따라서 뉴에이지를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뉴에이지가 스스로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에도 어긋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뉴에이지를 점점 더 많은 호소력을 얻고 있는 더욱 넓은 맥락의 밀교적 종교성 안에 두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13)

이 문서에 잠재된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 경험을 근본적으로 한층 풍부하게 해 주는 것을 이해하고 평가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이 문서는, 이성적 논의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에서 탈피하는 것을 본질로 삼는 하나의 문화 운동을 결코 공정하게 평가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뉴에이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권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독자들에게 매우 다른 관점에서 동일한 세계에 접근하는 사람들과 비판적 대화를 나누도록 요청한다.

제삼천년기의 교회의 사목적 성공은 많은 부분 복음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사람을 준비시키는 일에 달려 있다. 앞으로 나올 내용은 뉴에이지라는 매우 복잡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현상을 다루는 많은 사람들이 호소하는 어려움들에 대한 응답이다. 그것은 뉴에이지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뉴에이지가 어떠한 문제들에 대하여 해답과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고 주장하는지 알아보려는 시도이다. 뉴에이지의 전반적 현상을 조사하거나 특정한 면들을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는 몇몇 뛰어난 책이나 자료들이 있으며, 그 일부는 부록에 참고 문헌으로 실려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언제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필요한 식별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서의 목적은 가톨릭 신자들이 뉴에이지 사상의 이면에 깔려 있는 근본 원리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찾도록 도와서, 그들이 접하는 뉴에이지 요소들을 그리스도교적 시각에서 평가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뉴에이지라는 용어를 싫어하며, 일부는 ‘대안 영성’이라는 말이 더욱 정확하고 포괄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이 문서에서 언급하는 여러 현상은 어떤 특별한 명칭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독자들은 흔히 뉴에이지라고 알려진 일반적인 문화 운동과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일련의 현상들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 뉴에이지는 무엇이 새로운가?

많은 사람들에게 뉴에이지라는 용어는 분명히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가리킨다. 점성가들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지배해 온 물고기자리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물고기자리 시대는 제삼천년기 초에 물병자리라는 새로운 시대로 대체될 것이다.14) 물병자리 시대는 대개 신지학, 심령술, 인지학, 그리고 그러한 것들의 밀교적 전신의 영향 때문에 뉴에이지 운동에서 크게 위세를 떨친다. 임박한 세상의 변화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러한 변화에 대한 바람을 표현하고 있다. 그 변화는 이 세상 자체의 변화라기보다는 우리 문화의 변화, 우리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의 변화이다. 이는 특히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서 명백히 엿볼 수 있다. 이것은 매력적인 접근 방식이다. 왜냐면 일부 뉴에이지 표현에서는,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영적 자각을 가져오는 일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표현들에서는 자연 주기의 불가피한 진행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모든 경우에 물병자리 시대는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전망이다. 그러나 뉴에이지는 물고기자리 시대에서 물병자리 시대로 넘어가는 변화와 명백한 관련이 없는 여러 사상들까지도 통합하는 광범위한 전통이다. 온건하지만 아주 일반화된 미래의 전망들이 있는데, 곧 미래에는 세계적인 영성이 개별 종교들과 나란한 위치에 존재할 것이며, 지역적인 정치 제도를 보완하는 그와 비슷한 세계적인 정치 제도와 더불어 더욱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범세계적 경제 기구가 존재할 것이고, 커뮤니케이션과 교육이 더욱 강조될 것이며, 전문 의학과 자가 치료를 결합한 혼합적 방식의 건강 접근법이 등장하고, 자신을 더욱 양성적(兩性的)으로 이해하게 되며, 과학과 신비주의와 기술과 생태학을 통합한 방식들이 생겨날 것이다. 이 또한 인류와 지구가 온전하고 건강하게 생존하기를 바라는 깊은 갈망의 증거이다. 뉴에이지로 흘러 들어온 전통 가운데는, 고대 이집트의 비술(occult) 관습, 히브리 신비 철학(Cabbalism),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지주의, 수피교, 드루이드교 지식, 켈트족의 그리스도교, 중세의 연금술, 르네상스의 헤르메티시즘(hermeticism), 선종(禪宗), 요가 등이 있다.15) 여기에 뉴에이지의 ‘새로움’이 있다. 뉴에이지는 ‘밀교적 요소와 세속적 요소들이 혼합된 것’이다.16) 이는 개인과 사회와 세계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시간이 무르익었다는 널리 알려진 인식과 맞닿아 있다. 변화에 대한 요구는 다양하게 표현된다.

─ 뉴턴의 기계론적 물리학에서 양자 물리학으로,
─ 현대의 이성 숭배에서 감정과 정서와 경험의 존중으로(흔히 표현하듯이 ‘좌뇌’의 이성적 사고에서 ‘우뇌’의 직관적 사고로 전환),
─ 개인적 사회적으로 남성다움과 가부장제의 우세에서 여성다움에 대한 찬양으로.

이러한 배경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된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변화가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게 여기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를 대한 바람의 기저를 이루는, 현대성에 대한 거부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동양 종교들과 또 현대의 심리학, 철학, 과학, 그리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발전한 대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교들(pagan religions)이 현대에 부활한 것”17)으로 묘사할 수 있다. 뉴에이지는 다름 아닌 문화 혁명의 징표이자 서구 문화의 지배적인 사상과 가치들에 대한 복잡한 반작용의 증거이지만, 뉴에이지의 이상주의적 비판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비판하는 문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미국의 과학사가인 토마스 쿤이 써서 널리 알려졌다. 그는 패러다임을 “어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신념이나 가치, 기술 등의 총체”18)라고 보았다.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갈 때에는 점진적이고 발전적인 변화보다는 대대적인 관점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의 혁명으로서, 쿤은 경쟁적 패러다임들은 양립하거나 공존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종교와 영성의 영역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은 단순히 전통적인 믿음을 언급하는 새로운 방식이라는 생각은 요점을 놓치는 것이다. 실제로는 세계관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고 있으며, 이는 이전 전망의 내용뿐만 아니라 기본 해석까지도 문제 삼고 있다. 아마도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예는, 뉴에이지와 그리스도교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의미를 완전히 다시 고쳐 쓰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두 전망을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19)

과학과 기술은 분명히 그것들이 한때 약속하는 듯했던 것들을 모두 전해 주지 못하였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의미와 해방을 찾아 영적인 영역으로 돌아섰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뉴에이지는 서구 사회의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삶의 경험보다 좀 더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려는 데에서 비롯하였다. 초기의 뉴에이지 주창자들은 멀리까지 내다보며 추구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므로, 뉴에이지는 매우 절충적인 접근법이 되었다. 뉴에이지는 ‘종교로의 회귀’를 나타내는 표징 가운데 하나일 수는 있지만, 정통 그리스도교 교리나 신조로 회귀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서구 문화를 관통한 이 ‘운동’의 최초의 상징은 1969년 뉴욕주에서 열린 유명한 우드스톡 축제와, 상징적인 노래 ‘물병자리’(Aquarius)20)를 통하여 뉴에이지의 주된 주제들을 소개한 뮤지컬 ‘헤어’(Hair)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단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그 전체적 규모는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더욱 분명해졌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이상주의는 아직도 일부 지역에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 관련자들의 대부분은 더 이상 젊은층들이 아니다. 좌익 정치 이념과의 관계는 시들해졌으며, 환각제 사용은 결코 예전만큼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후 많은 일들이 일어나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혁명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대항 문화에만 국한되었던 ‘영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경향들이 이제 주류 문화의 한 부분이 되었고, 의학, 과학, 예술, 종교와 같은 삶의 다양한 측면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서구 문화에서는 이제 정치와 환경에 대한 인식이 더욱 보편화되었고, 이 모든 문화적 변화가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일부 사람들은 뉴에이지 ‘운동’이야말로 ‘훨씬 더 나은 삶의 방식’21)으로 여겨지는 것을 향한 커다란 변화라고 주장한다.

2.2. 뉴에이지는 무엇을 준다고 주장하는가?

2.2.1. 매혹: 천사가 있다

뉴에이지 ‘영성’의 가장 공통된 요소 가운데 하나는 특이한 현시, 특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이끌리는 것이다. ‘영매’라고 인정된 사람들은, 뉴에이지에서 ‘채널링’이라고 알려진 현상이 일어나면 무아지경에서 다른 존재가 자신을 대신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동안 영매는 자신의 육체와 기능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 이러한 일들을 목격한 일부 사람들은 현시가 사실은 영적인 것이지만, 대부분 늘 사랑과 빛의 언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에게서 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아마 이러한 현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영성이라기보다는 현대적 형태의 심령술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영계(靈界)에서 오는 다른 친구들과 상담자들은 천사들이다(이들은 오늘날 번창하는 도서와 회화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뉴에이지에서 천사를 언급하는 사람들은 이를 비체계적인 방식으로 언급한다. 사실, 이 영역에서 특이한 것들에 대해서는 때때로 너무 정확하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주의 모든 옥타브(octave)에는 여러 차원의 안내자와 존재, 에너지, 실체들이 있으며 …… 그들은 모두 당신이 끌어당기거나 거부하는 행위에 따라 골라지고 선택되고자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22) 사람들은 흔히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삶과 직업을 더 잘 이끌어 가는 데 필요한 긴장 완화에 도움을 얻고자 이러한 영적 존재들을 흔히 ‘비종교적인’ 목적으로 불러낸다. 특정인을 통하여 알려 주는 영들과 결합하는 것은 스스로를 ‘신비주의자’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또 다른 뉴에이지 체험이다. 어떤 자연의 영들은 자연계와 ‘내면’에 존재하는 강력한 힘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면, 의식(儀式)이나 약물, 그 밖의 변화된 의식 상태에 도달하는 방법들을 이용하여 다가갈 수 있는 것들이다. 적어도 이론적으로, 뉴에이지는 흔히 개인의 내적 경험보다 더 높은 영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2.2.2. 조화와 이해: 좋은 파장

핀드혼 공동체와 풍수23)와 같은 다양한 현상들은 자연이나 우주와 이루는 조화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다양한 방법들이다. 뉴에이지에는 선과 악의 구별이 없다. 인간의 행위는 지혜의 열매이거나 무지의 소치이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도 비난할 수 없으며, 누구도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 악의 존재를 믿는 것은 단지 부정성(否定性)과 두려움만 낳을 뿐이다. 부정성에 대한 해답은 사랑이다. 그러나 이것은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 자세와 관련된 것이다. 사랑은 에너지이고 고주파의 파장이며 행복과 건강의 비결이고, 성공이란 존재의 거대한 사슬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 파장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이다. 뉴에이지 스승들과 치료법들은, 사람들이 삶의 음조를 조절하고 서로 간에 그리고 주변의 모든 것과 이론적 배경은 달라도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우주의 모든 요소들 사이에 조화를 찾는 열쇠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24)

2.2.3. 건강: 활기찬 삶

오늘날 일반 의학(대증요법)은 특별한 증상만을 따로 떼어 치료하는 데에 국한되는 경향이 있으며, 개인의 건강을 더 넓은 시각으로 보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불만이 많이 생긴다. 대안 치료는 인간을 전체적으로 보며 치료보다는 치유에 초점을 맞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대중적 인기를 얻어 왔다. 전인적 건강(holistic health)이란, 알려진 대로, 정신이 육체의 치유에서 맡고 있는 중요한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의 영적 측면과 육체적 측면의 관계는 면역 체계나 인도 차크라의 체계 안에 있다고 한다. 뉴에이지의 관점에서, 질병과 고통은 자연을 거스르는 활동에서 비롯한다.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 훨씬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으며, 물질적 번영도 누릴 수 있다. 일부 뉴에이지 치유자들은 실제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우리의 인간 잠재력을 발전시키면 우리 내면의 신성은 물론 소외되거나 억압되어 왔던 우리 자신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변화된 의식 상태’(Altered States of Consciousness)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러한 의식 상태는 약이나 다양한 정신 확장 기법을 통하여, 특히 ‘자아 초월 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을 배경으로 유발된다. 무당은 흔히, 영(靈)들과 신들의 초개인적 영역과 인간 세계를 중개할 능력을 가진, 변화된 의식 상태의 전문가로 간주된다.

전인적 건강을 증진하는 매우 다양한 방법들이 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종교적이거나 밀교적인 고대의 문화 전통들에서 비롯되었고, 다른 것들은 1960-1970년대에 에살렌에서 발전한 심리학 이론들과 관련되어 있다. 뉴에이지와 관련된 광고는 침술, 생체 자기 제어(biofeedback), 척추 지압 요법, 운동 요법, 동종 요법, 홍채 진단법, 마사지와 다양한 종류의 ‘신체 요법’(예를 들면, 오르고노미, 펠덴크라이스, 반사 요법, 롤프식 마사지, 극 마사지, 기 치료 등), 명상과 심상(心像), 영양 요법, 심령 요법, 다양한 종류의 한약학, 크리스탈 치료, 금속 치료, 음악 치료, 색채 치료, 환생 요법, 그리고 12단계 프로그램과 자조 집단(self-help groups) 등 광범한 범주를 갖고 있다.25) 치유의 근원은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가 우리 내부의 에너지나 우주의 에너지와 접촉할 때 그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건강에 생명의 연장이 포함되는 경우에, 뉴에이지는 동양의 신조를 서구어로 제시한다. 본래, 환생은 진아(atman) 또는 인격의 신성한 핵심(후에 영혼[jiva]의 개념이 되었다.) ─ 지난 생애의 행위와 관련된 업(karma)의 법칙에 따라 고통의 수레바퀴(윤회, samsara) 속에서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옮겨 다닌다. ─ 에 바탕을 둔, 힌두교의 윤회 사상의 일부이다. 희망은 더 나은 상태로 태어날 수 있거나, 궁극적으로는 다시 태어나야 할 필요성에서 벗어나는 데에 있다. 대부분의 불교 전통과 다른 점은 몸에서 몸으로 이동하는 것이 영혼이 아니라 의식의 연속이라는 점이다. 현재의 삶은 신들까지도 포함하는 아마도 끝이 없을 영원한 우주의 진행 과정 속에 놓여 있다. 서구에서는 레싱(Lessing) 이후, 환생은 배움과 개인의 점진적인 성취 과정이라는 식으로 훨씬 더 낙관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심령술, 신지학, 인지학과 뉴에이지는 모두 환생을 우주의 진화에 참여하는 것으로 본다. 종말론에 대한 이러한 탈그리스도교적(post-Christian) 접근은 신정론(神正論)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답을 주고 지옥의 개념을 없앤다고 한다. 영혼이 몸에서 분리될 때 인간은 그때까지의 자신의 온 생애를 돌아볼 수 있으며, 영혼이 새로운 몸에 결합될 때 다가올 생애의 단계를 미리 본다. 사람들은 꿈과 명상 기법을 통하여 전생을 엿볼 수 있다.26)

2.2.4. 전체성: 신비한 미지 여행(A Magical Mystery Tour)

뉴에이지 운동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전체성’의 추구이다. 뉴에이지는 모든 형태의 ‘이원론’을 극복하라고 촉구한다. 그러한 분리는 깨달음이 부족했던 과거의 불건전한 산물이기 때문이다. 뉴에이지 옹호자들이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리 가운데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실제적 차이,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의 실제적 구분이 있으며, 이는 모두 이원론의 형태인 것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이원론의 경향은 흔히 궁극적으로 서구 문명의 유다 - 그리스도교 뿌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추정되지만, 오히려 영지주의 특히 마니교와 관련짓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과학 혁명과 현대의 합리주의 정신이 특히 비난받는 것은, 유기적인 전체를, 최소 성분으로 축소하여그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 메커니즘으로 다루는 분할 경향 때문이며, 또한 정신을 물질로 환원하여 영혼을 포함한 영적인 실재가 단지 본질적으로는 물질적인 과정의 우연한 ‘부수 현상’이 되도록 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이 모든 영역에서, 뉴에이지의 대안은 ‘전체적’(holistic)이라 불린다. 전인적 건강에 대한 관심에서 통합적 의식에 대한 추구에 이르기까지, 또한 생태학적 인식에서 글로벌 ‘네크워크’의 개념에 이르기까지, 전체론이 뉴에이지 운동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2.3. 뉴에이지 사고의 근본 원칙

2.3.1. 위기의 시대에 대한 전 세계적 대응

“그리스도교 전통과, 과학의 무한한 발전에 대한 세속적인 믿음은 모두 중대한 단절을 겪어야 했으며, 그것은 1968년경의 학생 혁명에서 처음 드러났다.”27) 이전 세대의 지혜는 갑자기 의미와 존중을 잃어버렸으며 과학의 전능함도 사라져, 교회는 이제 “젊은 세대에게 신앙을 전달하는 일에서 중대한 단절을 겪게 되었다.”28) 사람들의 의식과 사회적 결속을 떠받쳐 주던 이전의 기둥들에 대한 전반적인 믿음의 상실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가 대신해 왔다고 믿었던 우주의 종교성 그리고 예식과 신앙의 예기치 않은 회귀가 일어났다. 그러나 오랜 기간 잠복해 있던 이러한 밀교적 흐름은 결코 실질적으로 사라지지 못했다. 신지학 운동을 통하여 19세기 후반에 자리잡게 된 동양 종교에 대한 관심과 유행은 서양의 배경에서는 새로운 것이었으며, 이는 “모든 기성 종교 전통과 더불어 나타난 세계적 영성에 대한 인식의 증대를 반영한다.”29)

일자와 다자의 영원한 철학적 문제는 부적절한 분리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차이와 구분까지도 극복하려는 충동에서 오는 현대적이고 동시대적인 형태를 띠며, 그것이 가장 흔하게 표현되는 것은 전체론으로서, 전체론은 뉴에이지의 본질적 요소이자 20세기 후반의 사반 세기 동안 시대의 주요 징표들 가운데 하나였다. 기계론적 관념의 특징인 구획 분리를 극복하려는 노력에 엄청난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거의 초월적인 권위를 지니는 글로벌 네트워크에 복종할 의무감이 생겨났다. 그 가장 명백한 결과는 의식의 변화 과정과 생태학의 발전이다.30) 의식 변화의 목표인 새로운 전망을 세우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으며, 이를 시행하는 문제에서도 낡은 사상 ─ 현상 유지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 의 저항에 부딪혔다. 성공적이었던 것은, 생태학을 자연이 주는 매혹의 한 형태로 일반화한 점, 그리고 녹색 정치(Green politics)의 특징인 선교사와도 같은 열정으로, 대지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를 재신성화한 점이다. 지구의 관리자는 인류 전체이며, 책임 있는 관리에 필요한 조화와 이해는 세계 윤리의 틀 안에서 점점 더 세계 정부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온 피조물을 자신의 신성(神聖)으로 채우는 어머니 대지의 온기는 유다 - 그리스도교의 초월적인 성부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거리를 이어 주며, 그러한 초월적 존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전망을 없애 준다.

‘하느님과’ 우리 자신을 비롯한 다른 영적 존재들을 포함하고 있는 그러한 닫힌 우주에 대한 시각에서 우리는 범신론이 암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모든 뉴에이지 사상과 관행에 스며들어 있는 근본 핵심이며, 이러한 면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미 뉴에이지 영성의 이런 저런 측면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피조물이며 영원히 피조물로 존속하므로 인간의 자아가 결코 신적 자아로 흡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31) 믿는다.

2.3.2. 뉴에이지 사고의 본질적 모체

뉴에이지 사고의 본질적 모체는 18, 19세기에 유럽 지성계에서 상당히 널리 받아들여진 밀교적 신지학적 전통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특히 프리메이슨 운동, 심령술, 은비학(隱庇學, 오컬티즘), 신지학에서 두드러지며, 이러한 것들은 일종의 밀교 문화를 공유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가시적 우주와 비가시적 우주가 소우주와 대우주, 금속과 행성, 행성과 인체의 여러 부분, 가시적 우주와 비가시적 실재 영역 사이의 일련의 교감과 상사(想似)와 영향으로 연결되어 있다. 자연은 호감과 반감이 상호 작용하는 생명체로서, 인간이 지배하고자 하는 빛과 불가사의한 불로 생명을 얻는다. 인간은 그들의 상상력(영혼이나 정신 기관)을 통하거나 중개자(천사, 혼령, 악령)나 의례를 이용하여 상부 세계나 하부 세계와 접촉할 수 있다.

인간은 영적인 변화의 여정을 통하여 우주와 신, 자아의 신비에 들어설 수 있다. 최종 목표는 가장 높은 형태의 지식이자 구원과 동등한 말인 영지(靈知)로서, 이는 철학(영원한 철학[philosophia perennis]이라고 부적절하게 불리는 것)과 종교(원시 신학), 모든 사람이 다가갈 수 있는 모든 ‘밀교’ 전통의 열쇠인 비밀(밀교) 교의에서 오래 되고 가장 뛰어난 전통을 추구한다. 밀교의 가르침은 단계적인 입교 과정을 통하여 스승에게서 제자에게 전수된다.

일부에서는 19세기 밀교를 완전히 세속화된 것으로 본다. 연금술, 마술, 점성술, 그리고 전통적인 밀교의 여러 요소들은 인과 법칙, 진화론, 심리학에 대한 추구와 종교 연구를 포함하여 현대 문화의 여러 측면들에 철저히 통합되어 왔다. 이는 1875년 뉴욕에서 헨리 올코트와 함께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를 세운 러시아인 영매 헬레나 블라바츠키의 사상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학회는 발전하는 심령술의 형태 안에 동양과 서양의 전통 요소들을 융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 학회는 세 가지 주요 목적을 가졌다.

1. 인종, 신조, 계급, 피부색의 구분 없이 인류의 보편적 형제애의 핵심을 형성한다.
2. 비교 종교학, 철학, 과학 연구를 장려한다.
3. 아직 밝혀지지 않은 자연의 법칙들과 인간의 (숨겨진) 잠재력을 연구한다.

“이러한 목적의 의미는 분명하여야 한다. 첫 번째 목적은 심령술사들과 신지주의자들이 인식하는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불합리한 편협성’과 ‘종파주의’를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신지주의자들에게 ‘과학’은 비학(occult sciences)을 그리고 철학은 은비론 철학(occulta philosophia)을 의미하는지, 자연의 법칙들이 은비론이나 심령 작용의 속성을 지녔는지, 비교 종교학이 궁극적으로 신비주의적(헤르메티시즘의) 영원 철학(philosophia perennis)을 본뜬 ‘원시 전통’의 베일을 벗겨낼 수 있을지는 목적 자체로는 즉각 명백히 알 수 없다.”32)

블라바츠키 부인의 저서들에서 두드러진 요소 가운데 하나는 여성 해방으로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남성’ 신에 대한 공격을 내포하고 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힌두교의 모신(母神)과 여성적인 미덕의 실천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하였다. 이는 여성 운동의 선구자인 애니 비산트의 지도 아래 계속되었다. 위카(Wicca)와 ‘여성의 영성’은 ‘가부장적인’ 그리스도교에 대항하여 오늘도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마릴린 퍼거슨은 「물병자리의 음모」(The Aquarian Conspi-racy)에서, 의식의 확장과 자아 초월 경험에 바탕을 둔 변화의 시각의 기초를 닦은 물병자리 시대의 선구자들에 관하여 한 장을 할애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와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칼 구스타프 융도 들어 있다. 제임스는 종교를 교의가 아닌 경험으로 정의하였으며, 인간이 자신의 정신 자세를 바꾸면 자기 운명의 설계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융은 의식의 초월적 성격을 강조하고 집단 무의식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집단 무의식은 서로 다른 세대와 문화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일종의 상징과 기억의 저장소이다. 보터 하네그라프에 따르면, 이 두 사람 모두 뉴에이지 사상과 관행의 중요한 요소가 된 ‘심리학의 신성화’에 이바지하였다. 사실, 융은 “밀교를 심리학적으로 고찰하였을 뿐 아니라 심리학을 밀교 이론의 내용으로 채움으로써 심리학을 신성화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의미하고, 자신의 영혼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신성을 의미하게 하는 이론 체계가 나왔다. 영혼이 ‘정신’이고 하느님도 ‘정신’이라면, 하나를 말하는 것은 곧 다른 하나를 말하는 것과 같다.”33) 그리스도교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하였다.”는 비난에 대하여 융은, “심리학은 현대의 신화이며 현대 신화의 관점에서만 우리는 신앙을 이해할 수 있다.”34)고 대답하였다. 융의 심리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여러 측면, 특히 악의 실재에 맞설 필요성에 관하여 (빛을) 밝힌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의 종교적 신념은 그의 삶의 단계마다 너무 달라서 하느님의 이미지에 혼란이 생긴다. 그의 사상의 중심 요소는 태양 숭배로서, 거기에서 하느님은 인간 안에 있는 생명 에너지(리비도)이다.35) 융 자신도 말하였듯이, “이 비교는 말장난에 불과하다.”36) 사실 융은 ‘내면의 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그가 모든 인간 안에 존재한다고 믿은 본질적인 신성이다. 내부 세계로 이르는 길은 무의식을 통한다. 외부 세계에 내부 세계가 상응하는 것은 집단 무의식 안에서이다.

심리학과 영성을 서로 바꾸려는 경향은 1960년대 말 캘리포니아의 에살렌 연구소가 발전시킨 인간 잠재력 운동에 깊이 새겨져 있다. 동양 종교와 융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자아 초월 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은 과학과 신비주의가 만나는 관상의 여정을 제시한다. 영체성(靈體性)에 대한 강조, 의식 확장 방법의 추구, 집단 무의식의 신화에 대한 관심은 모두 인간 ‘내부의 신’에 대한 추구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려면, 자신의 깊은 곳에 있는 신이 되기 위하여 자아(ego)를 초월하여야 한다. 이는 명상이나 초심리학적 체험, 환각제 사용 등과 같은 적절한 치료법을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신 그리고 우주와 융합하는 ‘절정의 경험’, ‘신비적’ 경험에 이르는 방법들이다.

물병자리의 상징은 점성술의 신화에서 빌려온 것이지만, 나중에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의미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핀드혼에 있는 가든 공동체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빅수르의 에살렌에 있는 인간 잠재력 개발 센터는 뉴에이지 최초의 파워 하우스(power-house)였으며, 어느 면에서는 지금도 그러하다. 뉴에이지가 꾸준히 성장하는 것은 닥쳐올 생태 위기에 대한 전 세계적인 인식과 의식의 증대 때문이다.

2.3.3. 뉴에이지의 중심 주제

뉴에이지는 정확히 말하여 종교는 아니지만, 이른바 ‘신성한’ 것에 관심을 둔다. 뉴에이지의 본질은 다양한 활동과 생각, 그리고 뉴에이지라는 말에 나름의 타당성을 부여하는 사람들의 느슨한 결합이다. 따라서 주류 종교의 교리와 같은 것에 비교될 수 있는 표현은 전혀 없다. 이러한 점과 아울러 뉴에이지 안에 엄청난 다양성이 존재함에도,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 우주를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본다.
─ 우주는 신의 영혼이나 정신과 동일시되기도 하는 에너지로 생명을 얻는다.
─ 다양한 영적 존재들에 대한 명상을 매우 신뢰한다.
─ 인간은 비가시적인 상위 영역으로 상승할 수 있으며, 사후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
─ 모든 종교와 문화보다 앞서며 우위에 있는 ‘영원한 지식’이 있다고 믿는다.
─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은 스승을 따른다.
 
2.3.4. 뉴에이지는 무엇에 대하여 말하는가?

2.3.4.1. 인간인가?

뉴에이지는 매우 다양한 기법과 치료법을 통하여 인간이 완성될 수 있다는 근본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하느님의 은총과 협력하여야 한다는 그리스도교의 관점과 반대된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참된 인성의 충만한 발현을 막아 왔다는 니체의 사상과 전반적으로 일치한다. 여기서 완성이란 우리 자신이 만들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성취하는 가치 체계에 따라 자기 완성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자신이 자신을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람들이 그들의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했을 때 현재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 사이에는 인간과 유인원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

지식을 추구하는 밀교(esotericism)와는 달리 마술(magic) 또는 은비술(occultism)을 구분하는 것이 좋겠다. 후자는 힘을 얻는 수단이다. 일부 집단은 밀교적이면서 은비술적이다. 은비술의 중심에는 신이 되고자 하는 꿈에 바탕을 둔 힘에 대한 욕구가 있다.

정신 확장 기법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신적 능력을 드러내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힘을 이용하여 깨달음의 시대를 향한 길을 준비한다. 이러한 인간 찬양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올바른 관계를 뒤집는데, 그 가장 극단적인 형태 가운데 하나가 악마 숭배이다. 악마는 인습과 관례에 대한 반항의 상징, 흔히 공격적이고 이기적이며 폭력적인 형태를 띠는 상징이 된다. 몇몇 복음주의 집단은 젊은이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일부 다양한 록 음악에 악마의 상징이 들어 있다고 주장하며 우려를 표시해 왔다. 이는 신약에서 볼 수 있는 평화와 조화의 메시지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것이다. 이는 흔히 초월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인간을 찬양할 때 오는 결과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이 젊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것은 아니다. 밀교 문화의 기본 주제는 정치, 교육, 입법 분야에도 존재한다.37) 특히 생태학의 경우가 그러하다. 생태학은 생명 중심성을 깊이 강조함으로써, 다른 자연 형태보다 질적으로 우수하다고 여겨지는 인간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는 성서의 인간학적 시각을 부정한다. 이러한 식으로 인간을 과소평가함에도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 입법과 교육에서 매우 두드러진다.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려는 인간의 소망을 표현하는 듯한 유전자 조작 실험과 인구 조절 정책의 바탕에 깔린 사상적 이론에서도 이러한 동일한 밀교 문화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유전자 암호를 해독하고, 성(性)의 자연 법칙을 바꾸며, 죽음의 한계에 도전함으로써 이를 이루려고 한다.

뉴에이지에 대한 고전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 바에 따르면, 고대 영지주의를 상기시키는 의미에서 인간은 신의 흔적을 지니고 태어나며, 그럼으로써 전체와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서로 다른 수준의 의식으로 이러한 우주의 신성에 참여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거룩하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공동 창조자이며, 우리 자신의 실재를 창조한다. 많은 뉴에이지 작가들은 모든 개개인을 우주의 창조적 근원으로 여기는 시각을 바탕으로, 우리 삶의 환경을 (심지어 우리의 질병과 건강까지도) 선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확히 어디에서 우주와 일치하는지 완전하게 이해하려면 여행을 하여야 한다. 심리 요법은 그러한 여정이며, 구원은 우주적 의식을 인식하는 것에서 온다. 죄는 없다. 오로지 불완전한 지식만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의 정체성은 우주적 존재 안에서, 그리고 연속적인 육화 과정 안에서 희석된다. 인간은 별들에게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지만, (적절한 기법을 통하여) 자신과 우주의 신적인 에너지 사이의 더 큰 조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자기 안에 존재하는 신성에 열려 있을 수 있다. 외부에서 직접 인간에게 오는 계시나 구원은 필요 없으며, 최종적인 깨달음에 이르는 심리적 육체적 기법을 숙달함으로써 자신 안에 감추어진 구원(자기 구원)을 경험하기만 하면 된다.

자기 구원에 이르는 몇 가지 준비 단계(명상, 신체 조화, 자기 치유 에너지 발산)가 있다. 이러한 단계는 사람들이 자신을 더 잘 통제하고 개인의 자아를 ‘우주적 의식’으로 ‘변환’하는 데에 더욱 정신을 집중하도록 돕는 깨달음과 완성, 영화(靈化) 과정의 출발점이다. 인간의 운명은 영혼이 여러 다른 몸을 거치며 계속하여 환생하는 과정이다. 이는 징벌인 정화의 의미에서 윤회의 수레바퀴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잠재력을 완전히 개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단계적 상승 과정으로 이해된다.

심리학은 ‘신비주의적인’ 체험인 정신의 확장을 설명하는 데에 쓰인다. 요가, 선, 초월 명상법, 탄트라 수행 등은 자기 실현이나 깨달음을 체험하게 한다. 절정의 경험들(탄생 재체험, 죽음의 문턱까지 여행하기, 생체 자기 제어[biofeedback], 춤, 나아가 약물 등 변화된 의식 상태를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은 일치와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고 여긴다. 하나의 정신만이 존재하므로, 어떤 사람들은 상위 존재들로 통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단일한 우주적 존재의 각 부분은 다른 모든 부분과 관계를 맺는다. 뉴에이지의 고전적 접근법은 자아 초월 심리학으로서, 그 주요 개념은 우주적 정신, 상위 자아, 집단 무의식과 개인 무의식, 개별 자아이다. 상위 자아는 우리의 실질적인 정체성으로서, 신적 정신인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 주는 다리이다. 영성 계발은 주체와 객체, 삶과 죽음, 영혼과 육체, 자아와 자아의 단편적 측면 등 모든 형태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상위 자아와 만나는 것이다. 우리의 제한된 인격은 실제 자아가 창조한 그림자나 꿈과 같다. 상위 자아는 전생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

2.3.4.2. 하느님인가?

뉴에이지는 유다 -그리스도교의 왜곡된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여기는 동양 종교나 그리스도교 이전 종교를 두드러지게 선호한다. 따라서 고대의 농경 의식과 다산 숭배를 높게 평가한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가부장적 개념과 연결될 수 있는 이미지의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대안으로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제시된다. 하느님을 언급하지만, 그것은 인격적 하느님이 아니다. 뉴에이지가 말하는 하느님은 인격적이지도 초월적이지도 않다. 또한 우주의 창조주도 보호자도 아니며, 세상에 내재하며 ‘우주의 일치’를 이루는 ‘비인격적 에너지’이다. ‘모든 것은 하나이다.’ 이러한 일치는 일원론적이고 범신론적이며,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만유내재신론(萬有內在神論)적이다. 하느님은 ‘생명의 원리’이며 ‘세상의 정신 또는 영혼’이고, 세상에 존재하는 의식의 총체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현존은 실재의 영적 측면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므로 모든 정신은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이다.

‘신적인 에너지’는 인간이 이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때 흔히 ‘그리스도의 에너지’로 묘사된다. 뉴에이지에서도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나자렛의 예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신성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리하여 자신을 ‘보편적 스승’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의식 상태에 이른 사람에게 적용되는 명칭이다. 나자렛 예수는 그 그리스도(the Christ)가 아니며, 부처나 다른 사람들처럼 단지 그러한 ‘그리스도적’ 성격이 드러나는 여러 역사적 인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역사적 실현은 모든 인간이 천상의 신적인 존재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인간을 이러한 실현으로 이끈다.

인간이 이러한 ‘우주의 신적인 에너지’를 ‘감지하는’ 가장 내적이고 개인적인(‘정신적인’) 차원을 ‘성령’이라고도 한다.

2.3.4.3. 세상인가?

고전 물리학의 기계론적인 틀에서 벗어나, 물체를 분자가 아닌 파장이나 에너지로 보는 개념에 바탕을 둔 현대 원자 물리학과 아원자(亞原子) 물리학의 ‘전체론적’ 틀로 옮겨간 것은 뉴에이지 사상에 매우 중요하다. 우주는 단일한 전체 또는 관계망인 에너지의 바다이다. 단일한 유기체인 우주를 살아 있게 하는 에너지는 ‘정신’이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는 타자성(他者性)이 없다. 세상 자체는 신성하며 불활성 물질에서 ‘상위의 완전한 의식’으로 이르는 진화의 과정을 겪는다. 세상은 창조된 것이 아니며 영원하고 자급자족한다. 세상의 미래는 필연적으로 긍정적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신성한 일치에 이르게 하는 내적인 역동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느님과 세상, 영혼과 육체, 지성과 감성, 하늘과 땅은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의 파장이다.
가이아 가설에 대한 제임스 러브록의 책은 “고래에서 바이러스, 오크 나무에서 조류(藻類)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지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도록 지구의 대기를 조절할 수 있는, 또 지구의 구성 요소들이 지닌 것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과 힘을 지닌 하나의 살아 있는 단일체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38)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가이아 가설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기묘한(낯선) 결합”이며 “이 모든 것은 마치 뉴에이지가 사람들을 단편적인 정치의 영역 밖으로 끌어내 세계 정신이라는 거대한 가마솥으로 서둘러 몰아넣듯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두뇌부는 통치 기구, 다시 말하여 세계 정부를 필요로 한다. “현대의 문제를 다루고자 뉴에이지는 플라톤의 「국가론」(Republic)에 나오는 것과 같은 식의, 비밀 단체들이 운영하는 정신적 귀족 정치를 꿈꾼다.”39) 이는 다소 과장된 말일 수 있으나, 영지주의적 엘리트 주의와 세계 통치가 국제 정치의 여러 문제에서 일치한다는 증거들이 상당히 있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사실 모든 부분은 그 자체가 전체의 한 단면이다. 전체는 모든 것 안에 있으며 모든 것은 전체 안에 있다. “존재의 거대한 사슬” 안에 모든 존재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 다른 정도로 진화하며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 모든 인간은 삼라만상의 한 모습인 홀로그램이며, 그 안에서 모든 것은 각자의 주파수로 진동한다. 모든 인간은 지구의 중추 신경계의 뉴런(신경 단위)이며, 모든 개별 존재는 상호 보완의 관계에 있다. 사실, 모든 피조물 안에는 내적 보완성 또는 양성구유(兩性具有)가 존재한다.40)

뉴에이지의 저술과 사상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현대 과학이 개척해 놓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전체와 체계, 자극과 변화를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주었다. 우리는 추세를 파악하고, 더욱 전도 유망한 다른 패러다임의 초기 징조들을 인식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대안적인 시나리오들을 만든다. 우리는 낡은 체계의 실패를 확인하고는 모든 분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틀을 요구한다.”41) ‘패러다임의 전환’은 급격한 관점의 변화일 뿐이며, 그 이상은 아니다. 문제는, 사고와 실질적인 변화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또 내적 변화가 외부 세계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이론이 “모든 인류는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낯선 사상이나 문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혁명은 내부에서 시작된다는 것과 자신이 깨달은 바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주적인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전쟁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42)라는 식의 주장을 담고 있을 때에는, 어떤 부정적인 판단을 내릴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과학적일 수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상상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일이 일어날 수도 없다고 결론짓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그러한 논리는 지식과 의식에 지나친 힘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실제로 영지주의적이다. 이는 과학적 발견과 창조적 발전에 대한 의식 개발이라는 근본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직 마음속에만 있는 것을 외부 현실에 투영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2.4. “역사보다는 신화의 주인공들”43)인가?: 뉴에이지와 문화

“기본적으로, 뉴에이지의 매력은 자아와 자신의 가치, 자신의 능력과 문제에 대하여 문화적으로 불러일으켜진 관심과 관련이 있다. 교계적 구조를 가진 전통적인 종교성은 공동체에 적합한 반면, 전통에서 탈피한 영성은 개인에게 적합하다. 뉴에이지는 존재해야 할 것과 되어야 할 것을 찬미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자아에 ‘관한’ 것이고, 또한 대부분의 주류 문화와 달리 인습적인 삶의 형태에서 발생하는 정체성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자아를 ‘위한’ 것이다.”44)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인 형태의 사회나 교회 조직의 전통을 거부하는 것은 현대의 자아 개념의 영향을 뚜렷이 받은 대안적인 형태의 사회를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뉴에이지 저술들은 개인은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지만,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일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여겨진다. 사회 변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는 개인의 모범이다. 이러한 개인의 모범을 세계적으로 인식하게 되면 집단 정신이 꾸준히 변화할 것이고 그러한 변화는 우리 시대의 주요한 업적이 될 것이다. 이는 분명히 전체론적 패러다임의 일부이며, 일자와 다자라는 고전적인 철학 문제를 재언급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융이 상응 이론을 옹호하고 인과성을 거부한 것과 관련이 있다. 개인은 지구의 홀로그램의 단편적인 모습이다. 인간은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세계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변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정치 문제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든다. 이것이 과연 새로운 지구 질서에 대한 민주적 참여라는 말에 들어맞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교묘하게 권리를 빼앗겨 조종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인가? 현재와 같이 지구의 문제들(생태 문제들, 자원 고갈, 인구 과잉, 북반구와 남반구의 경제적 격차, 막대한 핵 비축과 정치 불안)에 몰두하는 것은 다른 실질적인 정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가 불가능하게 하는가?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된다.”라는 오랜 격언은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 건전한 균형을 잡아 준다. 일부 뉴에이지 비평가들은 정치에 대한 표면적 무관심 뒤에 숨어 있는 음흉한 권위주의를 간파한다. 데이비드 슈팽글러는 뉴에이지의 위험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완성해 가기보다는 다가올 뉴에이지를 기다린다는 명목으로 은근히 무력함과 무책임함에 굴복하는 것”45)이라고 지적한다.

뉴에이지의 태도에서 정적주의(quietism)가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뉴에이지 운동에 대한 주요 비판 가운데 하나는, 개인적인 자기 완성 추구가 실제로 건전한 종교 문화의 가능성에 역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세 가지 점을 명백히 하여야 한다.

─ 뉴에이지가 자연과 영적 실재를 통합한다고 주장하는 세계관을 통하여 우주의 완성된 그림을 제시할 만큼 지적 설득력을 보여 주는지는 의문이다. 서양에서는 우주를 일신교, 초월성, 타자성(他者性), 분리성에 바탕을 둔 분열된 우주로 본다. 현실과 이상,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 유한함과 무한함, 인간과 신,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과거와 현재 등의 모든 구분에는 근본적인 이원론이 있다. 이러한 모든 분리는 헤겔의 ‘불행한 의식’을 연상시키며, 비극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뉴에이지가 제시하는 해답은 융합을 통한 일치이다. 뉴에이지는 영혼과 육체, 여성과 남성, 정신과 물질, 인간과 신, 지구와 우주, 초월적인 것과 내재적인 것, 종교와 과학, 종교 간의 차이, 음과 양을 조화시킨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더 이상 타자성은 없으며, 자아 초월은 인간의 관점에 맡겨져 있다. 뉴에이지 세상에는 문제될 만한 것이 없다. 더 이상 성취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일자와 다자의 형이상학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으며, 불일치와 분열의 결과를 매우 유감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어쩌면 질문조차 던지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다만 사물들이 다른 관점에서 어떻게 비쳐질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다.

─ 뉴에이지는 동양의 종교 관습을 조금씩 받아들여 서구인들에게 맞게 재해석한다. 죄와 구원이라는 말을 거부하고, 이를 중독과 회복이라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말로 대체한다. 유럽 밖의 영향에 대한 언급은 때때로 서구 문화를 ‘거짓으로 동양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그것은 참된 대화라고 하기 어렵다. 그리스 - 로마와 유다 -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달가워하지 않는 환경에서는 동양의 영향이 서구 문화의 대안으로 이용된다. 전통적인 과학과 의학은 전체적인 접근법보다 못한 것으로 여겨지며, 정치와 종교의 가부장적인 특별한 구조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것이 물병자리 시대의 도래에 걸림돌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들이 대안으로서 뉴에이지를 선택한다는 것은 분명히 그들을 형성시켜 준 전통과 완전히 단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숙하고 자유로운 태도인가?

─ 참된 종교 전통은 지혜, 평정, 연민에 이른다는 최종 목적을 가지고 규율을 장려한다. 뉴에이지는 통합적인 종교 문화에 대한 열망, 정치인들이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것보다 더 포괄적이고 진보한 것을 바라는 사회의 뿌리 깊은 간절한 열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자아 확장에 근거한 시각이 개인이나 사회에 유익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뉴에이지 수련 과정(‘에어하드 세미나 트레이닝’[EST]이라고 알려진 것 등)은 대항 문화 가치들을 성공에 대한 주류 사회의 욕구와, 또 내적 만족을 외적 성공과 결합시킨다. 핀드혼의 ‘비지니스 정신’ 수련은 생산성을 증가시키면서 노동의 경험을 변화시킨다. 일부 뉴에이지 신봉자들은 더욱 참되고 자발적이 되려고 할 뿐만 아니라, (주술 등을 통하여) 더욱 성공하려고 애쓴다. “기업가 정신을 가진 사업가들에게 더욱 호소력을 가지는 것은 뉴에이지 수련이 더욱 인본주의적인 개념을 사업계에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배움터’인 직장, ‘노동의 활성화’, ‘노동의 인간화’, ‘관리자 역할 수행’, ‘사람 우선’ 또는 ‘잠재력 발산’ 등과 관련되어 있다. 뉴에이지 강사들이 제시하는 이러한 개념들은, 더욱 (비종교적인) 인본주의적 훈련을 이미 받은 적이 있고 상업적 생산성뿐만 아니라 동시에 개인의 성장과 행복과 열정을 추구하는 사업가들에게 호소력이 클 것이다.”46) 이처럼, 이러한 수련을 받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지혜와 평정을 추구하는 것은 명백하지만, 그들이 참여하는 활동들이 공동선에 얼마나 이바지할지는 의문이다. 동기의 문제와는 별도로, 이러한 모든 현상은 그 결과로 판단되어야 하며, 그러한 현상들이 자아를 증진하고, 고래나 나무 또는 같은 의견의 사람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포함한 모든 창조물과 관련하여 자아나 연대를 증진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제도나 많은 사람의 옹호를 받는 모든 자기 본위의 철학이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유해한 결과는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규정한 대로 “인류의 식탁에서 식사할 사람들의 수를 줄이려는 전략”47)이다. 이는 철학이나 이론의 영향을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다.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창조주와 다른 모든 피조물에 대한 개방성과, 사랑에 굳게 뿌리박은 존중에 따라 인간의 노력을 평가하려고 노력한다.

2.5. 뉴에이지가 급속히 성장하여
효과적으로 전파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혹과 비판을 받긴 하지만, 뉴에이지는 거칠고 무정한 세상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러한 세상에 온기를 전해 주려는 노력이다. 뉴에이지는 현대적인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주로 감정과 본능과 정서의 차원에서 작용한다. 경제 불안과 정치 불안, 기후 변화에서 오는 종말론적 미래에 대한 우려는 사람들이 우주와 대안적이고 확고히 낙관적인 관계를 추구하도록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완전성과 행복에 대한 추구는 주로 명백히 정신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뉴에이지가 거의 전 세계적으로 다양성을 찬미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시대에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서구 문화는 개인이나 소수 집단의 특징을 마지못해 수용하거나 참아 준다는 의미의 관용을 넘어서 정상적인 것에 대한 존중을 의식적으로 손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정상적인 것은 반드시 절대 규범과 연관된 윤리적 개념으로 제시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 믿음이나 규범을 단순히 다른 사람의 관점이나 신념을 용인하지 못하는 것쯤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다양함은 용인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확실히 좋은 것이라는 대안적 생활 방식과 이론이 실제로 펼쳐져 왔다.48)

사람들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차원에서 뉴에이지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어떤 집단이나 운동에 ‘소속’되는 일은 없고, 뉴에이지의 기본 원리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나 자각도 별로 없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그 배경을 깊이 알지 못한 채 특별한 치료법이나 관행에 매료되거나, ‘뉴에이지’라는 이름이 붙은 제품을 가끔 구매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아로마테라피를 받는 사람들이나 ‘뉴에이지’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대개 그러한 것들이 자신의 건강이나 행복에 미치는 효과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 주제에 깊이 들어가서 그것의 이론적 (또는 ‘신비적’)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는 오락과 여가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회의 소비 형태에 딱 들어맞는다. ‘운동’이 시장 원리에 훌륭히 적용되었으며, 뉴에이지가 이렇게 만연하게 된 데에는 그러한 매력적인 경제 조건이 일조를 하였다. 뉴에이지는, 적어도 일부 문화에서는, 시장 원리를 종교 현상에 적용시켜 만든 제품의 상표를 가리키는 말로 여겨졌다.49) 사람들이 인식하는 정신적 요구에서 이익을 얻는 길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현대 경제학의 여러 다른 요소와 마찬가지로, 뉴에이지는 대중 매체에서 정보를 얻고 지지를 받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세계적 공동체가 대중 매체를 통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대중 문학과 대중 홍보 매체가 ‘신봉자’들과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공통 개념들을 거의 모든 지역에 급속하게 전파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느슨한 형태의 ‘공동체’이므로, 그러한 급속한 개념의 전파가 우연히 일어난 것인지 계획된 것인지 증명할 길이 없다. 인터넷이 만들어 낸 사이버 공동체처럼, 사람들의 관계가 매우 비인간적일 수도 있고 매우 한정된 의미에서 상호적일 수도 있는 영역이다.

뉴에이지는 그것이 의미하는 불일치와 부조화와는 상관없이, 흔히 임의로 선택되고 결합되는 매우 느슨한 일련의 믿음이나 치료법, 관행으로 상당한 대중성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우뇌’의 직관적 사고에 의식적으로 바탕을 둔 세계관과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 뉴에이지 사상의 근본적 특성을 깨닫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뉴에이지에서 제시하는 것은 흔히 어느 종교에 속한 것이기보다는 단순히 ‘영적인’ 것으로 설명되지만, 여러 ‘소비자’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특정한 동양 종교들에 훨씬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는 물론 사람들이 선택하는 이른바 ‘기도’ 모임에서는 중요한 점이지만, 직원들에게 직장 생활의 한 부분으로서 의식 확장 기법을 채택하고 명상을 실천하도록 요구하는 회사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경영의 실질적인 문제가 되기도 한다.50)

뉴에이지를 하나의 사상으로 중점적으로 장려하는 것에 관하여 간단히 언급할 가치는 있지만, 이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일부 집단은 음모성 비난으로 뉴에이지에 반대해 왔지만, 주로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영향력으로 결정되는 자연스러운 문화적 변화의 흐름을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일반적인 응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뉴에이지가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수많은 단체들과 목적을 공유한다는 것, 곧 인류를 통합할 수 있는 보편 종교를 만들기 위하여 특정 종교들을 대신하거나 초월하려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세계 윤리, 곧 현대의 문화, 경제, 정치의 세계성을 반영할 윤리적 틀을 만들려는 여러 기구의 일치된 노력도 이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나아가서, 생태 문제의 정치화도 가이아 가설이나 어머니 지구를 경배하는 문제와 전반적으로 명백히 관련되어 있다.

 

3. 뉴에이지와 그리스도교 영성


3.1. 영성으로서 뉴에이지

뉴에이지는 이를 하나의 ‘새로운 영성’으로 장려하는 사람들이 흔히 일컫는 말이다. 고대 종교나 문화에서 수많은 개념을 차용해 온 것에 ‘새로운’(new)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진정 새로운 것은, 뉴에이지가 서구 문화와 그것의 유다 -그리스도교적 뿌리에 대한 대안을 의식적으로 추구하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의 ‘영성’은, 모든 인간이 느끼는 불완전성과 한계 의식을 치유해 주는 내적 경험, 곧 실재하는 모든 것과 조화와 일치를 이루는 내적 경험을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모든 생명의 핵인 우주의 신성한 힘이나 에너지와 심오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를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완성을 향한 길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리하여 자신의 개인 생활과 자신이 세상과 맺는 관계를 구분하고, 우주의 생성 과정 안에서, 또 끊임없이 진화하는 세상의 신기원(New Genesis)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역동적 에너지로 싹트는 우주에 대한 의식에 바탕을 둔 우주적 신비주의가51) 생겨난다. 따라서 우주의 에너지, 파장, 빛, 신, 사랑, 심지어 최고 자아 등 이 모든 것은 하나이며 동일한 실재, 곧 모든 존재 안에 현존하는 최초의 근원을 가리킨다.

이러한 영성은 두 가지 뚜렷한 요소인 형이상학적 요소와 심리학적 요소로 구성된다. 형이상학적 구성 요소는 뉴에이지의 밀교적이고 신지학적인 근원에서 비롯하며, 근본적으로는 새로운 형태의 영지주의이다. 신성에 대한 접근은 “표면적인 것 이면의 실재적인 것, 시간 너머의 기원, 덧없는 것 너머의 초월적인 것, 사라질 전통 이면의 근원적인 전통, 자아 이면의 타자(他者), 육화된 개인 너머의 우주적 신성”에 대한 개인적인 추구를 통하여 숨겨진 신비를 이해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진다. 밀교적 영성은 “개별적인 존재들 너머로 신을 탐구하는 것으로서, 잃어버린 일치에 대한 일종의 향수이다.”52)

“여기서 우리는 밀교 영성의 영지주의적 모형(母型)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물병자리 사람들이 종교의 초월적 일치를 추구할 때 명백해진다. 그들은 역사적인 종교들에서 밀교의 핵심만 뽑아내려고 하며, 자신들이 그 수호자라고 자처한다. 어떤 식으로든 그들은 역사를 부정하며, 시간이나 어떤 제도 안에 영성이 뿌리내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나자렛의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며, 우주적 보편적 그리스도의 수많은 역사적 발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53)

이러한 영성의 심리학적 구성 요소는 밀교 문화와 심리학의 만남에서 비롯된다(앞의 2.3.2 참조). 따라서 뉴에이지는 종교적 경험과 비슷하게, 개인이 심리적 영성적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 위기나 오랜 영적 구도 끝에 깊은 신비 체험을 통하여 이러한 변화를 겪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명상이나 일종의 치료법, 또는 의식 상태를 변화시키고 실재의 일치에 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체험에서 이러한 변화를 겪는다.54)

3.2. 영적 자아 도취?

몇몇 저자들은 뉴에이지 영성을 일종의 영적 자아 도취 또는 거짓 신비주의로 본다. 뉴에이지의 대표 주자인 데이비드 슈팽글러도 이러한 비판을 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는 자신의 후기 저서에서, 밀교적 측면이 더욱 두드러진 이러한 뉴에이지 사조와 거리를 두었다.

그의 저술에 따르면, 더욱 대중적인 형태의 뉴에이지에서 “개인과 집단은 흔히 은비론적이거나 천년 왕국설 형태로 스스로 모험이나 권력의 환상에 빠져 산다. …… 이러한 차원의 주요 특징은 자아 실현을 위한 내밀한 세계에 집착하고 그 결과 (언제나 명백하지는 않지만) 세상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뉴에이지는 낯설고 이색적인 존재들, 지도자, 열렬한 신봉자, 외계인들로 채워졌다. 뉴에이지는 심령술과 은비론적 신비, 음모와 비밀스런 가르침을 위한 자리이다.”55)

데이비드 슈팽글러는 한 후기 저서에서 뉴에이지의 부정적인 요소들 곧 뉴에이지의 ‘어두운 그림자’라고 여긴 것들을 열거하였다. “미래의 이름을 걸고 과거에서 멀어지는 것, 새로움 자체를 위하여 새로움에 집착하는 것, ……, 전체성과 친교라는 명목 아래 식별력과 통찰력 부족, 따라서 한계의 역할에 대한 이해나 존중 결여, 심령 현상과 지혜, 채널링과 영성, 뉴에이지 관점과 궁극적 진리 사이의 혼동”56)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슈팽글러는 결국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인 자아 도취는 소수의 뉴에이지 신봉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뉴에이지가 변화의 이미지로서, 거룩한 것의 구체화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을 ‘매우 진지한 진리 추구자’로 만드는 운동으로서 기능하며, 삶과 내적 성장에 관심을 갖게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 예수회 수사로서 뉴에이지 환경에서 여러 해를 보낸 데이비드 툴란은 뉴에이지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여러 제품과 치료법의 상업적 측면을 밝히고 있다. 그는 뉴에이지 신봉자들은 내면 생활을 발견하였고 세상에 책임을 진다는 전망에 이끌리지만 개인주의의 경향과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에 쉽게 넘어간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뉴에이지 영성은 그리스도교적이라고 할 수 없으며, 자기 부정을 수반하지 않으므로 불교적이지도 않다. 신비로운 결합에 대한 꿈은 실제로는 단지 가상의 결합에 그치며, 결국 사람들을 더욱 외롭고 허전하게 만든다.

3.3. 우주의 그리스도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영지주의적 종교에 맞서야 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종교들을 무시하지 않고 도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우주의 신들에 사용되던 용어들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다. 그 가장 분명한 예는 바오로 성인이 골로사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그리스도께 대한 유명한 찬미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과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골로 1,15-20).

이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가올 새로운 우주 시대가 없었다. 그들이 이러한 찬미가로 찬양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만물의 성취였다. “참으로 시간은 하느님께서 강생 안에서 인류의 역사 속으로 내려오셨다는 바로 그 사실로써 충만에 이르렀다. 영원이 시간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이보다 더 위대한 ‘성취’가 또 있겠는가?”57) 우주의 힘과 어떤 불확실한 운명에 대한 영지주의적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인격적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없애 버린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우주적 그리스도는 그 몸인 교회의 여러 지체들 안에 활발하게 현존하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비인격적인 우주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인격적인 하느님의 사랑의 보호에 의존한다. 그들은 우주의 생명 중심주의는 (교회 안에서) 일련의 사회적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순환하는 우주의 사건들에 갇혀 있지 않고, 역사적 예수님, 특히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신약성서에서, 뉴에이지의 사상에 암시되어 있는 것과는 다른 하느님에 대한 교리를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적 개념의 하느님은 삼위일체의 생명의 친교를 창조된 인간과 나누시려는 바람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삼위의 하느님이시다. 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참된 영성이란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으시는 것이다.

뉴에이지 세계에서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우주적 그리스도관이 통용되어 왔다. “우주적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 안에 결합되는 (그러나 그 인물에만 국한되지는 않는) 신적 모형이다. 이러한 신적 모형의 결합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세우셨다(요한 1,14 참조). 우주적 그리스도는 경쟁, 승자와 패자, 이원론, 인간 중심주의로 가득 찬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구속성과 염세성, 그리고 약동하는 우주를 신비와 신비주의를 상실한 기계로 봄으로써 오는 지루함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우주적 그리스도는 지역적이고 역사적이며, 실제로 인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우주적 그리스도는 옆집에 살고 있을 수도 있고, 가장 깊고 가장 참된 자아 안에 있을 수도 있다.”58) 이러한 말은 뉴에이지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그 경향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으며, 두 가지 그리스도관이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준다. 뉴에이지에서 우주의 그리스도는 여러 사람과 장소, 시간 안에 반복될 수 있는 하나의 모형으로서, 거기에는 엄청난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다. 우주의 그리스도는 궁극적으로는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모형이 아니라 하느님의 위격으로서 그분의 인간적 신적 모습은 모든 사람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신비를 역사 안에서 드러낸다(요한 3,16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생명을 우리와 나누시므로 우리 안에 사신다. 그러나 그것은 강요된 것도, 저절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은 그분의 생명을 나누어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살도록 초대받았다.

3.4.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와 뉴에이지 신비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성 생활은 하느님과 맺는 관계로서, 그 관계는 그분의 은총으로 점차 더욱 깊어지게 되며, 그 과정에서 우리의 동료 인간들과 또 우주와 맺는 관계에도 빛을 비추어 준다. 뉴에이지에서 영성이라는 말은 전체와 결합된 일치감으로 충만한 의식 상태를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사랑이 충만한 초월적인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함으로써 생기는 경험, 곧 우주와 하나 된 기분 좋은 느낌, 커다란 존재의 바다 속에 잠기는 느낌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59)

모든 차원에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와 뉴에이지 신비주의를 비교할 때 이러한 근본적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뉴에이지의 정화 방식은 불안이나 소외에 대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는 전체 안에 흡수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변화하기 위해서 인간은 깨달음의 경험으로 이끄는 기법들을 사용하여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의식을 변화시켜 실재의 가장 심오한 본질로 이해되는 신성과 접촉하도록 해 준다.

신을 위격으로 보지 않는 이러한 내재론적 종교 체계가 제시하는 기법과 방법들은 ‘아래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방법들은 인간의 마음이나 영혼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도록 하지만,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신성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계획이다. 이것은 흔히 ‘내면의 신’에 대한 해방의 깨달음으로 이해되는 것을 향한 의식 차원의 ‘상승’이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기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 혜택은 영적 ‘특권층’에게만 제한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는 하느님께서 당신 창조물에게, 특히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약하고 가진 것 없는 지극히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내려오신 것이다. 배워 두면 유익한 영적 도구들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회피하시거나 무시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방법은 엄격한 의미에서 기교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다. 기교로서 기도 방법은 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일지 모른다. 순수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기술과 전혀 무관하다. 그것은 언제나 하느님의 선물이며 또한 그 선물로부터 도움을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부당한 자임을 깨닫는다.”60)

그리스도인에게 회개는 성자를 통하여 성령의 힘에 순응함으로써 성부께 되돌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 ─ 이는 언제나 또한 모든 면에서 거저 주어지는 은총이다. ─ 가 발전하면 할수록, 하느님을 신뢰하며 의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마음가짐을 방해하는 죄와 영적인 근시안, 그리고 자기 심취에서 벗어나 회개할 필요성이 더욱 강해진다.

모든 명상 기법에는 억측과 자만심이 제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자기 응시, 평상심, 자기 비움의 실천이 아니라 사랑의 대화로서, “회개의 자세 곧 ‘자기’에게서 벗어나서 끊임없이 하느님 ‘당신’께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61)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에 더욱더 완전히 순종하도록 이끌어 주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 형제자매들과 깊고 참된 연대를 이루게 된다.62)

3.5. ‘내면의 하느님’과 ‘신화’(神化: theosis)

뉴에이지와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많은 뉴에이지 문학은 ‘외부에는’ 실질적으로 나머지 실재와 구분되는 신적 존재가 없다는 확신에 차 있다. 융 이후 ‘내면의 신’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기류가 있어 왔다. 뉴에이지는 우리의 문제는 우리 자신의 신성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의 감추어진 잠재력을 발산할 수 있게 하는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고 지도를 받아서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뉴에이지의 근본 사상은 우리 깊숙한 곳에 ‘신’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이며, 우리는 거짓됨의 껍데기를 벗겨 버림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무한한 힘을 발견한다.63) 이러한 잠재력을 인식하면 할수록 이 잠재력을 더욱 많이 실현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뉴에이지는 신화(神化), 곧 신이 되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신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고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신에 대한 이해를 내면화하여야 하는 시대, 곧 외부의 전능한 신에서 모든 존재의 핵심에 있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힘인 신, 곧 영(靈)인 신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시대”64)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이레네오 성인은 「이단 반론」(Adversus Haereses) 제5권의 서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분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시려고 당신의 초월적인 사랑을 통하여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신화(神化), 곧 그리스도교에서 의미하는 신성화는 우리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작용하는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의 불완전함과 죄를 반드시 인식하여야 하며, 결코 자아를 드높여서는 안 된다. 나아가 신성화는 일치를 이루면서도 서로 구분되는 완벽한 상태인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 준다. 그것은 융합이라기보다는 상승 작용이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생명을 주는 인격적 만남의 결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은 의식의 영역에 국한된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단순히 새로운 차원의 인식도 아니다. 그것은 교회의 성사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영혼과 몸이 변화되는 것이다.

 

4. 대조되는 뉴에이지와 그리스도교 신앙


뉴에이지 종교성의 개별 요소들을 ─ 비록 그것들이 순수해 보일지라도 ─ 뉴에이지 운동의 전반적 사조에 깔려 있는 구조와 떼어 놓기는 어렵다. 이 운동의 영지주의적 특성 때문에 그것을 전체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으로 볼 때, 뉴에이지 종교성의 어떤 요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그 나머지는 거부해야 할 것으로 분리할 수는 없다. 뉴에이지 운동은 자연과 이루는 교감, 보편적 선에 대한 우주적 지식을 중요시하며,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계시된 내용들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것을 긍정하거나 무해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종교적 상대주의의 특성을 보이는 문화 환경에서 뉴에이지 종교성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같은 차원에 두려는 시도에 대하여 경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시도는 신앙과 믿음의 차이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신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더욱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이와 관련하여,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거나 꾸며낸 이야기나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이 더러 있으니 그런 일을 못하게 하시오. 그런 것들은 쓸데없는 논쟁이나 일으킬 뿐이고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해 주시는 하느님의 계획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1디모 1,3-4)라고 한 바오로 성인의 권고를 기억하는 것이 좋다. 일부 뉴에이지 관행들은 제품을 더 많이 팔려는 마케팅 전략으로 부적절하게 뉴에이지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제로는 뉴에이지의 세계관과 관련이 없다. 이것은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충실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뉴에이지 운동에 속하는 요소들을 정확하게 가려낼 필요가 있다.
다음 질문들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뉴에이지의 사상과 관행의 핵심 요소들을 평가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될 것이다. ‘뉴에이지’는 신과 인간과 세계에 관한 개념들, 그리스도인들이 종교 문제를 두고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 명상 단체를 위한 홍보물, 각종 치료법들, 종교에 관한 명시적 선언 등과 관계가 있다. 명시적으로 ‘뉴에이지’라는 이름을 달지 않은 개념이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아래의 질문들 가운데 일부는 그(것)들이 전반적인 뉴에이지 영역과 암암리에 또는 무의식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더 깊이 밝힐 것이다.

신은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인가? 우리가 사용하여야 할 그 무엇인가? 아니면 이용하여야 할 어떤 힘인가?

신에 대한 뉴에이지의 개념은 다소 모호한 반면, 그리스도교의 개념은 매우 명확하다. 뉴에이지의 신은 비인격적인 에너지, 또는 우주의 어떤 특별한 확장 또는 구성 요소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은 세상의 생명력 또는 정신이다. 신성은 “가장 낮게는 광물계의 수정에서부터 우리가 아무것도 언급할 수 없는 은하계의 신에 이르기까지” 등급에 따라 모든 존재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위대한 의식이다.”65) ‘고전’에 속하는 일부 뉴에이지 저술들은 인간이 자신을 신으로 생각할 수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특성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신은 더 이상 세상 너머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찾아야 한다.66) 또한 ‘신’이 내 밖에 있는 어떤 존재라 하더라도 조종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을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모든 인간 생명의 원천이라고 보는 그리스도교의 관점과 매우 다르다. 하느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인격적이신 성부, 성자, 성령이시며, 창조물인 인간과 당신 생명의 친교를 나누시고자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신’(1디모 6,16)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자유로운 인간들을 당신의 외아들 안에서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당신의 신적 생명을 인간들에게 주시고자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써, 인간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서서 당신께 응답하고, 당신을 깨닫고, 사랑할 수 있게 하신다.”67) 하느님께서는 우주의 ‘정신’이나 ‘기본 에너지’로 이해되는 생명 원리와 같은 분이 아니시며, 세상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사랑이시고, 만물 안에 창조적으로 존재하시며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한 분이신가, 아니면 수많은 그리스도가 있는가?

뉴에이지 문학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흔히 수많은 현자나 전수자, 또는 화신(化身) 가운데 한 명으로 제시되는 반면,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다음은 뉴에이지 접근법의 몇몇 공통점이다.

─ 인격적이고 개별적인 역사상의 예수는 영원하고 비인격적이며 보편적인 그리스도와 구별된다.
─ 예수님을 유일한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는다.
─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고통받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배제하고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부인하거나 재해석한다.
─ 외경들(예를 들면 신영지주의 복음들)을 성서 정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예수님 생애의 여러 측면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참된 출처로 간주한다. 예수님에 관한 다른 계시들, 곧 실체적 존재나 안내령(案內靈), 승천한 스승들을 통해서나, 심지어는 아카샤 연대기(Akasha Chronicles)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예수님에 관한 다른 계시들이 뉴에이지 그리스도론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 성서 본문에 일종의 밀교적 해석을 적용하여, 그리스도교의 밀교적 정수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그리스도교의 형식적 종교성을 정화한다.68)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이 말하는 나자렛 예수님이시고, 성모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고, 참 인간이시고 참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진리의 완전한 계시이시고,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그분은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69)

인간: 하나의 보편적 존재가 있는가, 아니면 여러 명의 개인이 있는가?

“뉴에이지 기법의 목적은 마치 실험 재료라도 되는 듯 신비 상태를 마음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재생, 생체 자기 제어, 감각 분리, 홀로트로픽 호흡, 최면, 만트라, 단식, 수면 축출 요법, 초월 명상 등은 신비 상태를 조절하고 그러한 상태를 지속적으로 체험하려는 시도들이다.”70) 이러한 관행들은 모두 심리적으로 취약한 (또 상처받기 쉬운) 상태를 만들어 낸다. 수행의 목적이 우리 자신을 재창조하는 것이라면, ‘내’가 누구인가 하는 실질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 안의 신’, 그리고 전 우주와 이루는 전체적인 결합은 이러한 질문을 강조한다. 고립된 각각의 인격은 뉴에이지(특히 자아 초월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병적이다. 그러나 “정말 위험한 것은 전체적인 패러다임이다. 뉴에이지는 전체주의적 일치를 바탕으로 한 사상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71) 좀 더 온건하게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볼’ 때, 또 우리의 선택과 반응이 우리의 가장 깊은 요구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때, 우리의 행동과 감정 표현이 우리의 인격 전반을 드러낼 때, 우리는 진정 참될 수 있다.”72) 인간 잠재력 운동은 인간이 신이라는, 또는 인간은 자신 안에 신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예이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에서 접근한다.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으며(창세 1,27 참조), 하느님께서는 시편 저자가 깊이 감동할 만큼(시편 8장 참조) 인간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신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전히 밝혀지는 신비이며(사목 헌장 22항 참조), 사실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진정 인간이 된다.73) 이것은 많은 뉴에이지 저자들과 실천가들이 그리스도교의 탓으로 돌리며 거부하는 왜곡된 인간 중심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가, 아니면 구원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인가?

문제는 우리가 무엇 또는 누구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지 깨닫는 것이다. 흔히 뉴에이지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동으로 우리를 구원하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받는가? 핵심 단어는 자기 완성과 자기 실현, 자기 구원이다. 뉴에이지는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에 관한 이해에서 펠라기우스 주의를 따른다.74)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은 어떠한 기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고, 하느님과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데에 달려 있다. 인간 조건은 원죄와 개인이 지은 죄에 영향을 받으므로 하느님의 행위로만 바로잡을 수 있다. 죄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만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키실 수 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인간은 하느님이시며 인간으로서 구원의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되었다.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은 자기 체험이나, 명상이나 직관을 통한 몰아(沒我)가 아니라, 오히려 죄의 용서, 자신 안의 깊은 양면성에서 벗어나는 것, 사랑의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의 은혜로써 본성을 다스리는 것이다. 구원의 길은 단순히 자신이 유도한 의식의 변화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죄와 그 영향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 사회에 내재한 죄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움직여 어려운 이웃과 사랑의 연대를 이루어 나가도록 한다.

우리는 진리를 만들어 내는가, 아니면 진리를 받아들이는가?

뉴에이지의 진리는 좋은 파장, 우주적 교감, 조화와 황홀경, 일반적으로는 즐거운 경험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행복의 요인에 따라 자기 자신의 진리를 발견하는 문제이다. 종교와 윤리적 문제에 대한 평가는 분명히 개인의 느낌이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으로 제시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치들, 다시 말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객관적 실재를 이루는 일련의 객관적인 요건들을 온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기도와 명상: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께 말하는 것인가?

심리학과 영성을 혼동하는 경향 때문에 현재 쓰이는 많은 명상 기법들이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한 기법들은 흔히 마음을 더욱 즐겁게 하거나 몸을 편안한 상태로 이끌기는 하지만, 기도를 위한 훌륭한 준비일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그 경험은 참으로 강렬하지만, 이러한 상태에 머무는 것은 혼자 있을 때만 가능하지 아직 다른 사람 앞에서는 불가능하다. 침묵에 도달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말없이 관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공허함을 가져다줄 뿐이다. 또한 자신의 영혼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위한 기법들은 궁극적으로 신성에 다다를 수 있는, 나아가서는 신이 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호소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찾고 계신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면 그러한 방법들은 그리스도교의 기도가 될 수 없다. 이러한 경험이 우주의 에너지와 맺는 관계라고 생각할 때에도, “하느님의 역할이 우리의 모든 요구를 채워 주는 것이라고 보는, 하느님과 갖는 그러한 손쉬운 ‘관계’는 뉴에이지의 핵심에 놓여 있는 이기심을 보여 준다.”75)

뉴에이지 관행들은 일반적으로 우주 에너지와 갖는 결합이나 자기 성찰의 문제라는 면에서 진정한 기도는 아니다. 자기 성찰인 동시에 본질적으로는 하느님과의 만남인 그리스도교 기도의 두 가지 지향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단순한 인간적 노력과는 거리가 먼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본질적으로 “‘자아’에게서 벗어나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회개의 태도를 뜻하는”76) 대화이다. “그리스도인은 혼자일 때와 은밀하게 기도할 때에도 그 자신이 항상 그리스도와 성령과 모든 성인과 일치하여 교회의 선익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한다.”77)

우리는 죄를 부정하려는 유혹을 받는가, 아니면 죄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뉴에이지에는 진정한 죄의 개념이 없으며 불완전한 지식의 개념만이 있다. 필요한 것은 특정한 심리적- 육체적 기술을 통하여 이를 수 있는 깨달음이다. 뉴에이지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믿어야 할 것, 하여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하여 듣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실재를 탐구하는 수천 가지의 방법이 있다. 자신의 지성과 직관이 이끄는 곳으로 가라. 자신을 믿어라.”78) 하는 말을 들을 것이다. 신의 위치에 있던 권위가 자기 내면으로 옮겨 간 것이다. 뉴에이지 사상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개인의 잘못이나 죄가 아니라 전체 우주에서 분리되는 것이다. 그 대책은 전 존재 안으로 더욱더 깊이 몰입하는 것이다. 일부 뉴에이지 저술과 관행에서는, 한 번의 생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거듭되는 환생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는 “죄의 실재, 특히 원죄의 실재는 오로지 하느님 계시의 빛으로 밝혀진다. 하느님께 대한 계시가 없다면 우리는 죄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으며, 단지 죄를 성장의 결함, 심리적 나약함, 어떤 잘못, 또는 부적합한 사회 구조에서 나오는 필연적 결과 등으로 설명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앎으로써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들이 그분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주신 자유를 오용하는 것이 죄임을 이해하게 된다.”79) “죄란 이성과 진리와 올바른 양심을 거스르는 잘못이다. 죄는 어떤 것에 대한 비뚤어진 애착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다. 죄는 인간의 본성에 상처를 입히고 인간의 연대성을 해친다. …… 80) 죄는 하느님께 대한 모욕이다. …… 죄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슬러 맞서며, 우리 마음을 하느님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다. …… 그러므로 죄는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81)

고통과 죽음을 거부하라고 하는가, 아니면 받아들이라고 하는가?

일부 뉴에이지 저자들은 고통을 자업자득, 악업, 또는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결과로 본다. 어떤 이들은 성공과 부를 얻는 방법들에 몰두한다(예를 들면, 디팍 초프라, 호세 실바 등). 뉴에이지에서 환생은 흔히 영적 성장의 필수 요소로서,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어 우리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 점진적인 영적 진화의 한 단계로 이해된다. 현생에서 다른 이들의 죽음을 체험하는 것은 유익한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우주적 일치와 환생은 둘 다, 인간은 특별한 존재로서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주어지는 단 한 번의 삶을 산다는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상충한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책임과 자유를 동시에 위태롭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속 사업이 고통을 통하여 성취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 고통 자체가 구속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으시면서 ‘죄의 악 일체를’ 스스로 짊어지셨다. 이 악의 경험이 비할 데 없을 만큼의 그리스도의 고통을 결정지었으며, 그리스도의 이 고통이 구속의 대가가 되었다. …… 구속자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고통을 받으셨다. 인간 누구나 구속 사업에서 자기 자신의 몫을 가지고 있다. 또한 각자가 모두 구속 사업이 성취되게 한 그 고통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모든 인간 고통마저 구속되게 한 그 고통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고통을 통하여 구속 사업을 완수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인간 고통을 구속의 차원에까지 들어 높이셨다. 이리하여 인간 각자는 자기 자신의 고통을 겪으면서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82)

사회 참여는 회피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적극 추구해야 하는 것인가?

뉴에이지에는 뻔뻔스럽게 자신을 드높이는 경향이 많이 있지만, 이 운동의 몇몇 지도자들은, 소수의 이기적이고 무분별하며 자기 도취적인 사람들을 보고서 전체 운동을 판단하거나 일부 기괴한 행위들 때문에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며 그 때문에 뉴에이지의 참된 영적 추구와 영성이 가려진다고 주장한다.83) 그리스도교는 개인을 우주적 자아에 결합시키는 것, 곧 우주적 조화 안에서 차이나 대립을 없애거나 상대화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참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어떤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선물에 다른 사람이 ‘긍정’이나 ‘부정’의 답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하면서 일치를 추구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합일을 친교로, 일치를 공동체로 이해한다.

우리의 미래는 별 안에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미래 건설을 돕고 있는가?

다가오는 새 시대(뉴에이지)에는 자연의 우주 법칙을 완전히 통제하는 완벽한 양성(兩性) 존재들이 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각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사라지고 범세계적 종교와 새로운 세계 질서에 자리를 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깨어 있으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마지막 날을 준비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새 시대(뉴에이지)는 2천 년 전, 다름 아닌 ‘나자렛 예수’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분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그분의 성령은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사회와 역사, 민족과 문화와 종교” 안에 현존하며 활동하신다. 사실, “성자께서 아낌없이 베풀어 주신 성부의 영은 모든 이에게 생기를 주시는 분이시다.”84)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

다른 한편, 뉴에이지와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많은 뉴에이지 관행들이 교리적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러한 관행들이, 사고에 영향을 미치고 현실에 대한 매우 특정한 가치관을 주입시킬 수 있는 성향을 전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분명히 뉴에이지는 그 나름의 환경을 만들고 있으며, 해롭지 않은 것과 정말 문제 삼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뉴에이지 세계에 퍼져 있는 그리스도 교리는 헬레나 블라바츠키의 신지학 가르침,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 그리고 앨리스 베일리의 ‘비밀 학교’(Arcane School)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현대의 뉴에이지 추종자들은 그들의 사상을 장려할 뿐만 아니라, 뉴에이저들(New Agers)과 함께 전혀 새로운 현실 이해, 곧 일부 관찰자들이 ‘뉴에이지 진리’85)라고 일컫는 교리를 발전시키려고 한다.

 

5. 생명수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유일한 토대는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께서는 모든 그리스도교 활동과 모든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중심에 계신다. 따라서 교회는 끊임없이 자신의 주인을 만나러 되돌아간다. 복음서는 베들레헴의 목자들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에 이르기까지, 성전에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던 학자들에서부터 침통한 심정으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과 만나는 여러 일화들을 들려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일화는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시는 요한 복음 4장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진리에 대한 투신의 패러다임”86)이라고 묘사되기까지 했다. 우리에게 생명수를 주는 이방인을 만나는 경험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를 통하여 걸어갈 수 있고, 또 걸어가야 할 길을 알려 주는 열쇠가 된다.

요한 복음의 이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요소 가운데 하나는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의’ 물, ‘살아 있는’ 물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다(11절). 그렇지만 그 여자는 그분이 이방인이라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의 메시지에 끌렸으며, 그 때문에 귀를 기울인다. 그 여자는 처음에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남편이 없다는 말은 숨김없는 말이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17-18절]). 놀라며, 그분의 말씀에 마음을 연다. “과연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19절). 하느님 공경에 대한 대화가 시작된다.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유다인에게서 오기 때문이다”(22절).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메시아이신 당신에 관하여 하실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신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또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와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으로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에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신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돌아가” 그분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알렸다”(28절). 이방인과 만남이 그 여자에게 미친 놀라운 영향 때문에 궁금해진 동네 사람들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 모여들었다”(30절). 그들은 곧 그분의 참된 본질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당신의 말만 듣고 믿었지만 이제는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42절). 그들은 그분에 관한 말씀을 듣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며, 그분 신원의 보편적 의미를 이해하기에 이른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의 정신과 마음과 그 이상의 것이 이끌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이 이야기가 우물가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하는 물”(14절)을 주신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친절하게 대하신 것은 효과적인 사목의 모범이며, 다른 사람들이 힘든 자기 인식 과정에서 어려움 없이 진실해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그분께서 자기의 지난 일을 다 알아맞히셨다”[39절]). 이러한 접근법은, 물을 지닌 이(물병자리)에게 이끌릴 수 있었음에도, 여전히 참으로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의 목마름을 달래 줄 뿐 아니라 영혼 깊숙이 숨겨진 ‘생명수’까지 주시는 예수님께 귀 기울이도록 초대받아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진실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속임수나 자기 기만의 문제는 있을 수 없다. 또한 훌륭한 교육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인내심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갑자기 전혀 새로운 의미의 자유, 특히 과거의 실패와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자유의 힘을 얻는다. 또한 “우물가의 그 여인처럼 자기를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도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그 진리를 알려는 열망으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87)

직접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깊이 영향을 받은 사람이 생명수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라는 초대를 한다면 더 큰 무게를 지니게 될 것이다. 단순히 그분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아니라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라는 것”(42절)을 확신하는 사람이 하는 초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방식과 정도에 따라 반응하고, 하느님께서 그 나머지 일을 하시도록 하는 문제이다.

 

6. 유의 사항


6.1. 올바른 교육과 지도의 필요성

그리스도인가 물병자리인가? 뉴에이지는 그것이 현실에 대한 대안적인 가치관이든 자신의 현재 상황을 개선시키는 대안적 방법(마술)이든, 언제나 ‘대안’과 관련되어 있다.88) 대안은 사람들에게 두 가지 가능성이 아니라 다른 것에 우선하는 한 가지를 선택할 가능성만을 제시한다.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뉴에이지는 유다 -그리스도교 유산에 대한 대안이다. 그들은 물병자리 시대를 물고기자리의 그리스도교 시대를 훌륭하게 대신할 시대라고 본다. 뉴에이지 사상가들은 이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들 가운데는 이러한 변화를 필연적인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러한 변화를 앞당기는 데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스도와 물병자리를 동시에 믿는 것이 가능한지 의심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양자 택일’의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루가 16,13).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결과가 지닌 중요성을 인식하려면 동방 박사들과 헤로데 왕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된다. 뉴에이지를 살찌워 온 많은 운동들은 명백히 반그리스도교적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러한 운동들의 태도는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무력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운동들은 모든 종교의 관점에 열려 있다고 말하지만, 전통 그리스도교를 진정 받아들일 수 있는 대안으로 여기지 않는다. 실제로, “참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자리가 없으며”, 때때로 반그리스도교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주장들마저도 있다는 것이 자명해지고 있다.89) 이러한 반대는 처음에는 뉴에이지에 대한 피상적인 집착을 뛰어넘는 한정된 집단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었지만, 최근에는 특히 복잡다단한 서구 사회에 놀랍도록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 모든 차원의 ‘대안’ 문화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융합인가 혼합인가? 뉴에이지 전통은 창조주와 피조물, 인간과 자연, 종교와 심리학, 주관적 실재와 객관적 실재의 실질적인 차이를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이상적인 취지는 어디까지나 이러한 구분을 극복하겠다는 것이지만, 뉴에이지 이론에서 그것은 서구 문화에서 일반적으로 명백히 구분되어 왔던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융합하는 문제이다. 어쩌면 융합(fusion)이라는 말을 혼합(confusion)이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뉴에이지가 혼합 위에서 성장한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단어 놀음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신앙을 정당화하고, 하느님과 세계와 인간을 이해할 때 이성의 역할을 언제나 높이 평가해 왔다.90) 뉴에이지는 많은 사람들이 차갑고 계산적이며 비인간적인 이성을 거부하는 분위기를 간파해 왔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능력이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음을 상기시키는 긍정적인 통찰이지만, 온전히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능력인 이성을 배제하는 행위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이성은 보편성을 지닌다는 이점이 있다. 신비스럽고 매혹적인 성격의 비밀스럽거나 영지주의적인 ‘신비주의’ 종교와는 달리, 이성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개념적인 혼란이나 비밀스러움을 조장하는 것들은 모두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실재의 궁극적인 본질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며, 이전 시대에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들에 대한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의혹에 상응하여, 흔히 비합리적인 것에서 위안을 구하게 한다. 신앙과 이성의 건전한 협력이 인간 생활을 얼마나 증진시키고 또 피조물에 대한 존중을 얼마나 장려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 과제이다.

자기 현실의 창조. 자기 현실의 창조자는 자기 자신이라는 뉴에이지의 보편적인 확신은 매력적이긴 하지만 착각이다. 이러한 확신은, 인간은 외부 세계에서 무한한 차원의 내부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융의 이론으로 구체화된다. 무한한 내부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자기 세계를 창조하거나 파괴하는 아브락사스이다. 이 무한한 내부 세계에서 빛나는 별은 인간의 목표인 하느님이다. 자기 실재의 창조자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임으로써 오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고통과 죽음의 문제이다. 중증 장애인이나 불치병자들은 자기 불행의 원인이 자기 자신이라거나, 그들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무기력하게 삶에 접근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을 때 속는 기분이 들거나 모멸감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결코 순전히 학문적인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직면하는 골치 아픈 실존적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사목적 접근 방식과 깊이 관련된다. 우리가 지닌 한계는 어쩔 수 없는 삶의 현실이며, 피조물의 몫이다. 죽음과 사별은 도전이자 기회이다. 서구식으로 재해석된 윤회의 개념에서 위안을 얻으려는 유혹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영생에 대한 염원을 나타내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상기하고자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마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어느 정도 진실한가? 우리 자신도 어떤 의미에서는 신(神)이라는 뉴에이지 사상은 이 점에서 상당한 논란 거리이다. 물론 모든 문제는 현실에 대한 각자의 정의에 달려 있다. 가톨릭 교육과 양성, 설교 등 모든 차원에서 인식론과 심리학에 건전하게 접근하도록 적절하게 장려해야 한다. 초월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말할 수 있는 방법에 지속적인 관심을 쏟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뉴에이지 사상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초월이, 닫힌 세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자기 초월이라는 것이다.

사목적 자원. 제8장에는 뉴에이지 사상에 대한 평가가 실려 있는 가톨릭 교회의 주요 문서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들어가는 말에 인용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연설이다. 교황께서는 이러한 문화적 동향에는 “삶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 환경에 대한 새로운 관심, 차갑고 이성적인 신앙을 극복하려는 열망”과 같은 몇 가지 긍정적인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신다. 그러나 교황께서는 또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과 맞지 않는 모호한 요소들에 주의하도록 요청하신다. 곧 이러한 동향들은 “계시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으며”, “모호한 세계관에 맞도록 종교의 교리를 상대화하는 경향이 있고”, “흔히 하느님께 대한 범신론적인 개념을 제시하며”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하느님께 져야 할 개인적인 책임을 우주에 대한 의무감으로 대체함으로써 참된 죄의 개념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필요성을 전도시킨다.”91)

6.2. 실천적인 조치들

먼저, 광범위한 뉴에이지 영역에서는 그 누구도 또 그 무엇도 이 운동의 이론들과 하나의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또한 분류 자체도 흔히 잘못 적용되거나, 다른 식으로 분류되어야 할 현상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뉴에이지라는 말이 사람이나 관행을 사악하게 여기는 데에 잘못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운동과 연계된 현상들이, 그리스도교의 신관과 인간관, 세계관을 막연하게나마 반영하는지 아니면 그것들과 모순되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뉴에이지라는 말을 단순히 사용하는 것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개인이나 집단, 습관이나 상품이 그리스도교의 중심 교리와 갖는 관계이다.

● 가톨릭 교회는 더욱 잘 활용할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인 자체 조직(network)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수많은 사목 센터, 문화 센터, 영성 센터 등이다. 이러한 조직들을 최대한 잘 활용하여 토론이나 연구 장소를 제공하는 등 다양하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뉴에이지의 종교성과 관련한 혼합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안타깝지만, 가톨릭 영성 센터들이 교회 안에 뉴에이지를 전파하는 데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 반드시 이러한 일들을 시정함으로써 혼동이나 오류가 유포되는 것을 막아야 할 뿐 아니라, 가톨릭 영성 센터들이 효율적으로 참된 그리스도교 영성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특히 가톨릭 문화 센터들은 교육 기관일 뿐 아니라 진실한 대화의 장소이기도 하다.92) 몇몇 뛰어난 전문 기관들은 이러한 모든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기관들은 그것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지역과 아낌없이 공유하여야 할 소중한 자원이다.

● 상당수의 뉴에이지 단체들은 자신들의 철학과 활동을 다른 이들에게 설명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용한다. 이러한 단체들과 만날 때는 신중하여야 하며, 가톨릭 신앙과 영성을 설명할 수 있는 동시에 뉴에이지 사상과 활동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을 언제나 그 자리에 참석시켜야 한다. 뉴에이지에 대한 안내와 정보를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나 단체, 기관들의 자격을 조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편견 없는 조사로 시작한 것이 나중에 ‘대안 종교’를 적극 장려하거나 옹호하는 것으로 변질되는 경우도 있다. 일부 국제기관들은 ‘종교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장려하고 미심쩍은 몇몇 단체들에게 종교적 지위를 부여하자고 주장하는 운동을 적극 펼치고 있다. 이는 한계성을 지닌 특정 종교들이 보편성을 지닌 새로운 종교나 영성에 자리를 양보하는 시대로 옮아 가고 있다는 뉴에이지의 관점과 일치한다. 하지만, 참된 대화는 언제나 처음부터 다양성을 존중할 것이며, 모든 종교 전통을 하나로 혼합함으로써 차별성을 흐리게 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 일부 지역의 뉴에이지 단체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기도 모임’이라고 지칭한다. 그러한 모임에 초대받는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교 영성의 표지를 찾아야 하며, 입문 예식 같은 것은 없는지 유의하여야 한다. 그러한 단체들은 신학이나 영성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유혹하여 그들을 차츰 그릇된 예배 형태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기도 모임’의 의도를 올바로 판단하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 드리는 ─ 기도의 참된 대상과 내용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은 알아보기 쉬울 것이다.93) 많은 사람이 동양의 지혜에서 ‘빌려 오는 것’은 해가 되지 않는다고 믿지만, 초월 명상법의 경우, 비록 그 지도자들이 그것이 종교적으로 중립적이라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다른 종교(이 경우에는 힌두교)에 몰두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주의시켜야 한다. 명상법을 배우는 것에는 문제가 없지만, 수행의 대상이나 내용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해 주신 하느님과 관련이 있는지, 어떤 다른 계시와 관련이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숨겨진 내면의 자아와 관련이 있는지를 명백히 나타낸다.

● 하느님의 피조물인 지구에 대한 보호를 장려하는 그리스도인 단체들도 마땅히 인정해 주어야 한다. 피조물 존중의 문제는 가톨릭 학교들에서 창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이다. 환경 운동의 더욱 근본적인 요소들이 제기하는 많은 것들이 가톨릭 신앙과 일치하기가 어렵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환경 보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하여 시의 적절하게 새로운 관심을 나타내는 표시이자 피조물을 관리할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나타내는 당연한 표시일 수 있지만, ‘전면적인 생태 보호 운동’은 흔히 범신론적이고 때로는 영지주의적인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94)

● 제삼천년기의 시작은 복음화를 위한 진정한 ‘시간’(karios)이다.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은 이미 그리스도교의 시간과 구원 역사의 개념에 대한 신뢰성 있는 지식에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열려 있다. 다른 접근법들에 결여되어 있는 것들을 강조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신앙의 원천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올바로 확실하게 소개하는 일이다. 우리는 신뢰로써 우리에게 맡겨진 것들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선물들을 사장시키는 지배 문화의 압력에 저항하여야 한다(마태 25,24-30 참조).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도구의 하나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이다. 또한 현재와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도 성덕의 길을 열어 주는 막대한 유산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풍부한 상징성과 예술적 미적 음악적 전통들을 모르거나 잊고 있는 곳에서는 그리스도인들 스스로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거나 더욱 깊이 인식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다. 뉴에이지에 이끌리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 간의 대화는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와 상징어의 매력을 고려한다면 더욱 성공적인 것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면, 성서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바로 우리의 일상 생활이 성화되는 시간인 기도와 성사를 통하여 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그리스도교 메시지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 아마도 가장 간단하고 가장 확실하며 가장 시급하고 또 가장 효과적일 수 있는 방안은 그리스도교의 풍부한 영성 유산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큰 수도회들은 명상과 영성의 확고한 전통을 지니고 있으므로, 진정한 영적 추구자들을 위하여 수도회를 개방하는 기간이나 시기에 그들에게 그러한 전통을 이용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이미 실천되고 있지만, 더욱더 요구되는 일이다. 영적 추구자들에게, 이미 입증된 참된 기도 방법이나 경험을 알려 주어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과 그리스도교 전통의 풍요로움을 드러낼 수 있는 대화를 시작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뉴에이지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뉴에이지 운동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은 생생하고 효과적인 이미지로, 전통 종교를 대성당에, 또 뉴에이지를 세계 박람회에 비교한 적이 있다. 뉴에이지 운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성당의 메시지를 오늘날의 세계적 규모의 박람회에 전달하도록 초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이미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긍정적인 도전이다. 대성당의 메시지를 박람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시간은 언제든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사람들과, 충족감을 주는 영적 음식을 찾는 사람들, 생명수를 찾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져다주라는 초대를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사실 기다려서도 안 된다. 제시된 이미지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말씀과 성사로 자양분을 얻는 대성당에서 나와, 모든 일상 생활에 복음을 전달해 주어야 한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교황 성하께서는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에서, 오늘날 세속에서 발견되는 영성에 대한 깊은 관심과 다른 종교들이 이러한 영적 요구에 호소력 있게 대답하는 방식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촉구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시자이시며 세상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은총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가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 보여 줄 의무가 있습니다”(33항). 세계 종교의 박람회장을 둘러보는 사람들은 교회 구성원들의 증언과 그들의 믿음, 침착성, 인내, 쾌활함, 그리고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매력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진실한 기도로 자양분을 얻는 신앙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7. 부 록


7.1. 뉴에이지 사상에 대한 몇 가지 간략한 설명

“뉴에이지에 대한 설명”(formulation of New Age), 윌리암 브룸, 1992년: Heelas, 225면 이하에서 인용.

● 모든 생명 ─ 모든 존재 ─ 은 불가지존재(不可知存在)인 성령의 발현이며, 여러 문화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진 최고 의식의 발현이다.
● 모든 존재의 원동력과 목적은 사랑, 지혜, 빛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다.
● 모든 종교는 이러한 동일한 내적 실재의 표현이다.
● 모든 생명은, 인간의 오감이나 과학적 도구로 파악해 볼 때, 보이지 않는 내적 실재를 감싸고 있는 외적인 가리개일 따름이다.
●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중의 피조물이다. 곧 1) 덧없는 외적 인간, 2) 다차원적인 내적 존재(영혼 또는 그보다 더 높은자아).
● 외적 인간은 유한하며, 사랑을 지향한다.
● 내적 존재의 육화 목적은 외적 인간의 감정적 반응이 사랑의 공명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 육화된 모든 영혼은 자유로이 자신의 영적 진로를 선택한다.
● 우리의 영적 스승은 육화의 필요성에서 해방된 영혼을 가진 이들이며, 무한한 사랑과 지혜, 빛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이 위대한 존재들 가운데는 세계 종교에 영향을 준 잘 알려진 이들도 있고, 보이지 않게 활동하는 알려지지 않은 이들도 있다.
● 모든 생명은 형태와 지위는 다르지만 에너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우리의 행동과 감정, 생각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과 이들 에너지와 협력하여 우리의 실재를 만든다.
● 비록 우리가 우주적 사랑의 동력으로 유지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과 우리의 환경, 모든 생명에 공동 책임이 있다.
● 이 기간 동안, 지구와 인류의 진화로 우리는 개인과 집단 의식 속에 근본적인 정신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뉴에이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의식은, 일부 사람들이 우주적 사랑의 에너지라고 부르는 것이 점차 육화에 성공한 결과이다. 이 새로운 의식은 신성성(神聖性)과 특히 모든 존재의 상호 연관성을 본능적으로 이해할 때 나타난다.
● 이 새로운 의식과, 모든 생명의 역동적 상호 의존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현재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지구 문화의 발전 과정에 있음을 의미한다.
 
제레미 타처의 “보완 설명(complementary formulation)”: Heelas, 226면.

1. 인간을 포함한 세계는 더 높고 더 포괄적인 신성(神性)의 표현이다.
2. 모든 인간 안에는 더 높고 더 포괄적인 신성의 발현인 더 높은 신적 자아가 숨어 있다.
3. 이 더 높은 신성을 일깨워 개인의 일상 생활의 중심이 되게 할 수 있다.
4. 이러한 자각은 모든 개별 생명체의 존재 이유이다.

뉴에이지 시각의 기본 특징에 관한 데이비드 슈팽글러의 말이 Actualite des religions, 8항, 1999.9., 43면에 인용되어 있다. 곧,

● 전체론적이다(하나의 단일한 실재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전 세계에 퍼지게 한다).
● 생태학적이다(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우리의 어머니이다.우리는 각자 지구 중심 신경계의 단위 세포이다).
● 양성성을 띤다(무지개와 음양[陰陽]은 모두 뉴에이지의 상징이며, 특히 남성과 여성처럼 반대되는 것을 상호 보완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 신비적이다(모든 것, 가장 평범한 것들 속에서 신성을 발견한다).
● 지구적이다(인간은 자기 문화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차원으로 열려 있으며, 사랑과 자비, 평화를 증진하고, 나아가 세계 정부를 설립할 수 있다).
 
7.2. 간추린 용어 해설

물병자리 시대: 약 2146년의 기간에 해당하는 이루어진 각각의 점성술 시대는 12궁 가운데 하나를 따서 지은 이름들이다. 그러나 ‘위대한 시절’은 거슬러 가므로, 현재의 물고기자리 시대는 끝나 가고 있고, 물병자리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각 시대는 고유한 우주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물고기자리의 에너지는 그 시대를 전쟁과 갈등의 시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물병자리 시대는 조화와 정의, 평화, 일치 등의 시대가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뉴에이지는 역사적 필연성을 받아들인다. 어떤 사람들은 양자리 시대는 유다교 시대였고, 물고기자리 시대는 그리스도교 시대, 물병자리 시대는 보편 종교 시대라고 단정한다.

양성구유(兩性具有): 이것은 육체적으로 양성을 동시에 지닌 자웅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곧 아니무스(여성의 억제된 남성적 특성)와 아니마(남성의 억압된 여성적 특성)가 내적으로 균형 있는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뉴에이지에서, 양성구유란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의 특성인 이러한 이중적 존재 양식과 실존 양식을 새롭게 인식하는 데서 오는 상태이다. 양성구유가 확대될수록 인간 관계의 변화에 더욱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인지학: 본래는 1902년에서 1913년까지 신지학회 독일 지부의 지부장을 역임한 후 신지학회를 떠난 크로트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년)가 주창한 신지학 학설이다. 인지학은 영적이고 신적인 영역에서 사람들에게 ‘객관적인 지식’을 가르쳐 주고자 한 난해한 학설이다. 슈타이너는 인지학이 우주와 인류의 진화 원리를 탐구하는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믿었다. 모든 육체적 존재는 그에 상응하는 정신적 존재가 있으며, 지상 생명체는 별의 에너지와 영적 존재의 영향을 받는다. 아카샤 연대기(Akasha Chronicle)는 초보자들이 구해 볼 수 있는 ‘우주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95)

채널링: 더 높은 단계에 사는 흔히 육체에서 떨어져 나간 다른 존재들의 말을 전해 주는 통로라고 주장한다. 영매는 승천한 스승, 천사, 귀신, 집단적 존재들, 자연 정령, 더 높은 자아 등과 같은 다양한 존재들과 연결해 준다.

그리스도: 뉴에이지에서,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은 하나의 사상이나 에너지 또는 집합적 영기(靈氣)의 육화에 지나지 않는다. 앨리스 배일리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 새로운 육화가 이루어지도록 모든 신자가 영기를 힘껏 모아야 할 위대한 기도의 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대다수 사람들에게 예수는 부처나 모세, 무함마드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그리스도가 깊이 스며들어 있는 영적 스승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의 그리스도는 또한 각 존재와 존재 전체의 바탕인 그리스도의 에너지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지니도록 요구받는 이러한 그리스도적 특성을 점차 깨닫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뉴에이지 용어에서 그리스도는 가장 높은 자아 완성 상태를 나타낸다.96)

수정(Crystal): 수정은 특정한 주파수에서 진동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수정은 자아 변화에 유용하다. 수정은 여러 가지 치료와 명상, 심상, ‘영적 여행’(astral travel)에 사용되거나 행운의 부적으로도 사용된다. 수정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아름다울 뿐 내적인 힘은 없다.

심층 심리학: 프로이드의 제자이기도 했던 칼 구스타프 융이 세운 심리학이다. 융은 인간이 온전하고 건강하기 위해서는 종교와 영적인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사용한 방법에서 중요한 요소는 꿈의 해석과 원형의 분석이었다. 원형은 인간이 물려받은 정신 구조의 형태들이다. 원형은 꿈과 환상, 신화, 동화 등에 되풀이되는 주제나 이미지로 나타난다.

애니어그램: (그리스어로 9를 뜻하는 ennea와 표지를 뜻하는 gramma가 합성된 단어이다.) 이 말은 원주에 삼각형과 육각형으로 연결된 9개의 점을 가진 원으로 이루어진 도표를 가리킨다. 애니어그램은 본래 점을 치는 데에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성격을 9가지 표준 유형으로 분류하는 상징 체계로 알려져 있다. 애니어그램은 헬렌 팔머의 책 「애니어그램」(The Eneagram)이 출판된 뒤에 유행하였지만,97) 그녀는 러시아의 밀교 사상가이자 의사인 G.I. 구르디예프와 칠레의 심리학자인 클라우디오 나란조, 아리카의 설립자인 작가 오스카 이차조 등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인정하였다. 애니어그램의 기원은 신비에 싸여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수피교도의 신비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밀교: (그리스어로 안에 있는 것을 뜻하는 esoteros에서 나온 말.) 이것은 일반적으로 입교한 집단에게만 전수되는 고대의 신비한 지식 체계를 일컫는다. 이들 단체는 자신들을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진리의 수호자라고 생각한다. 입교 과정은 사람들을 실재에 대한 단순히 외적이고 피상적인 지식에서 내적인 진리로 인도함으로써, 그들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의 의식을 일깨운다. 사람들은 이러한 ‘내적 여정’을 시작함으로써 자신들 안에서 ‘신의 불꽃’을 발견하도록 초대받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구원은 자아 발견과 일치한다.

진화: 뉴에이지에서 진화는 더 나은 생명체로 발전하는 살아 있는 존재들과 관련된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육체의 원형이 정신의 영역에 투영됨으로써 인간의 내재적인 힘은 인간을 더 나은 영적 생명체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인간은 이 힘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다는 말이 있지만, 인간의 선행이나 악행은 그러한 과정을 가속화하거나 지체시킬 수 있다. 인간을 포함하여 피조물 전체가 피할 수 없이 신성과 융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회는 명백히 탄생 이전에 시작되어 죽음 이후에도 계속된다고 말하는 점진적인 정신적 진화의 관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98)

의식의 확대: 우주를 하나의 연속적인 존재의 고리로 본다면, 무기물, 식물, 동물, 인간, 우주, 신적 존재 등 모든 차원의 존재가 상호 의존적이다. 인간은 의식의 일반 한계를 뛰어넘어 자기 의식을 확대함으로써 모든 실재에 대한 이러한 전체적인 시각 안에서 자기 자리를 인식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뉴에이지는 사람들이 더 높은 차원에서 실재를 파악하도록 돕는 지극히 다양한 기법과, 인식 과정에 있는 주체들 간의 또 주체와 객체 간의 분리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며, 일반적인 하위 의식이 실재를 분리하거나 구별하여 파악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통합하기에 이른다.

풍수: 흙 점의 한 형태로, 이 경우에는 땅이나 대기의 기운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건물이나 기타 장소에 숨어 있는 양기와 음기를 가려내는 중국의 한 주술법이다. “인간의 몸이나 우주와 같이 대지는 들어오고 나가는 힘이 교차하는 장소이다. 이 힘이 적절히 균형을 이룰 때 건강과 생명의 원천이 된다.”99)

그노시스(Gnosis, 靈知):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노시스(靈知)는 지적인 것이 아니라 계시적이거나 신비적인 하나의 지식 형태이며, 인간을 신적 신비에 결합해 줄 수 있는 계시되어야 할 사고이다. 그리스도교 초 세기에, 교회 교부들은 영지주의가 신앙과 일치하지 않았기에 그것을 반대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대부분의 뉴에이지 사고에 영지주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고 보며, 뉴에이지와 관련이 있는 일부 작가들은 초기 영지주의를 표방한다. 그러나 뉴에이지가 일원론과 나아가 범신론, 만유내재신론 등을 더욱 강조하게 되자, 어떤 사람들은 뉴에이지의 영지(靈知)와 고대의 영지주의를 구분하고자 신영지주의(neo-gnosticism)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위대한 흰 형제: 블라바츠키 부인은 위대한 흰 형제를 이루는 고귀한 존재들인 마하트마 곧 스승들과 접촉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녀는 그들이 인류의 진화를 주도하며 신지학회의 활동을 이끈다고 보았다.

헤르메티시즘(Hermeticism, 비법 전수주의): 이것은 Corpus Hermeticum이라는 책의 기록들과 신비주의자인 헤르메스 트리메지스토스의 것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문서들과 관련된 철학적 종교적 행위와 이론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 알려졌을 때는 이것이 그리스도교 이전의 교리를 나타내는 사상이라고 여겼지만, 나중의 연구 결과로는 그리스도교 제1세기에 생겨난 것으로 드러났다.100) 알렉산드리아의 헤르메티시즘은 현대 밀교의 중요한 원천이며, 이 두 가지는 공통점이 많다. 곧 절충주의, 존재론적인 이원론에 대한 거부, 우주의 긍정적이고 상징적인 특징에 대한 주장, 타락한 인류가 나중에 본래의 지위를 되찾는다는 사상 등이 그것이다. 헤르메티시즘 사상은 모든 종교 전통에 공통된 것으로 잘못 여겨진 고대 근본주의 전통인 이른바 영원한 철학(philosophia perennis)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였다. 르네상스 헤르메티시즘에서 고도의 의식적인 주술 형태가 발전하였다.

전체론(Holism): 이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핵심 개념으로, 현대인의 전체적인 세계관을 통합하는 이론적인 틀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학문과 일상 생활에서 증대되고 있는 분열의 경험과는 대조적으로, ‘전체성’이 방법론적 존재론적 개념의 핵심으로 제시된다. 인간은 단일 유기체의 일부로서, 또 조화로운 역동적 관계 조직의 일부로서 우주 안에 있다. 데카르트와 뉴턴이 대표적인 입장인 것으로 비난받고 있는, 주체와 객체의 고전적인 구분에 대해서 과학과 종교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여러 과학자들은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과 세계의 전체 조직(생태계, 가족)의 일부이며, 이러한 준(準) 초월적 권위의 모든 요소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인간이 자연 안에서, 또 신적이기도 한 우주 안에서 자기 자리를 이해할 때, ‘전체성’과 ‘신성함’이 하나이며 동일한 것임을 또한 이해하게 된다. 전체론의 개념에 대한 가장 분명한 표현은 ‘가이아(대지의 여신)’ 설에 있다.101)

인간 잠재력 운동: 이 운동은 (1960년대 캘리포니아의 에살렌에서) 처음 시작된 이래, 자아 실현으로써 인간의 타고난 창조력을 발휘하도록 촉진하는 단체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개인을 변화시키는 다양한 기법들은, 지극히 경제적인 이유로 점점 더 많은 기업에서 경영 교육 프로그램에 사용되고 있다. 개인의 한계를 초월하는 기술, 내적인 영성 자각 운동, 구조 발전과 구조 변화 등이 모두 비종교적인 것으로 제시되고 있으나, 실제로 회사원들은 개인의 자유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상황에서 이질적인 ‘영성’을 따르도록 강요받을 수 있다. 동방의 영성과 정신 치료법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성이 있지만, 융의 심리학과 인간 잠재력 운동은 샤머니즘과, 드루이드교나 마술 숭배와 같은 ‘개조된’ 형태의 이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인격적 성숙’은 뉴에이지 운동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구원’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뉴에이지 운동은 인간적 고통과 나약함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의 인간적 잠재력을 개발함으로써, 우리 안의 신성과 더욱 가까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102)

입교: 종교 민족학에서 입교는 개인이 혼자든 집단의 일원으로든 특별한 예식을 거쳐, 신앙 공동체나 비밀 결사(예를 들어 프리메이슨단), 신비 집단(마술, 밀교 또는 비술, 영지주의, 신지학 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인식이나 경험의 여정이다.

카르마(업[業]): (행위, 행동을 뜻하는 산스크리트 어원 Kri에서 나온 말이다.) 힌두교와 자이나교, 불교의 핵심 개념이지만, 저마다 의미는 조금씩 다르다. 고대의 베다 시대에 카르마는 예식 행위, 특히 희생 제사를 지칭하였다. 이를 통하여 사람은 내세의 행복과 복을 보장받았다. 자이나교와 불교가 등장하자(기원전 6세기경), 카르마는 그러한 구원의 의미를 잃었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은 아트만, 곧 자아를 아는 것이었다. 윤회(samsara)의 교리에서, 카르마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힌두교) 또는 환생(불교)의 끝없는 고리로 생각되었다.103) 뉴에이지의 맥락에서, ‘카르마의 법칙’은 흔히 우주 진화와 동일어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카르마는 더 이상 죄악이나 고통 ─ ‘우주 놀이’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 환상 ─ 과는 관계가 없지만, 서로 연관된 채 실질적인 조화를 꾀하는 우주의 큰 흐름에 속하는 보편적인 인과 법칙이다.104)

일원론: 각 존재 사이의 차이는 착각일 뿐이라는 형이상학적 믿음이다. 오직 하나의 우주적 존재가 있을 뿐이고, 모든 사물과 사람은 거기에 귀속된다. 뉴에이지 일원론은, 실재는 근본적으로 영적이라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판 범신론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때로는 명시적으로 물질주의, 특히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한다). 모든 이원론을 없애겠다는 일원론의 주장은 초월적인 신에 대한 자리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결국 모든 것이 신이 된다. 그리스도교에서 볼 때 일원론의 또 다른 문제는 악의 기원에 관한 문제가 제기될 때이다. 융은 악을 전통적인 일신교에서는 선(善) 그 자체인 신(神)의 ‘어두운 면’이라고 보았다.

신비주의: 뉴에이지 신비주의는 ‘완전한 타자’인 신과 친교하려 하기보다는 자기 안으로 파고든다. 그것은 우주와 융합하는 것이며, 합치된 전체 안에서 개인은 궁극적으로 소멸한다. 자아의 경험은 신성의 경험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개인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참된 지혜와 창조력, 힘을 발견하다.

네오 페이거니즘(Neopaganism): 뉴에이지와 나란히 가면서 흔히는 뉴에이지와 상호 영향을 미치는 사조를 말하는데, 흔히 네오 페이건들은 그렇게 불리는 것을 거부한다. 전통 종교들, 특히 서방의 유다 -그리스도교 전통을 거부하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대의 토착 종교나 전통 종교, 이교를 다시 찾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것은 무엇이든 국가나 민족의 정신에 더욱 참된 것으로, 흔히 모권적이고 주술적이거나 샤머니즘적인 자연의 힘과 교류하는 때묻지 않은 자연 종교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인류가 농사와 관련된 축제의 자연 주기나 생명에 대한 보편적인 긍정으로 되돌아간다면 더욱 건강해질 것이라고들 한다. 일부 ‘네오 페이건’ 종교들은 최근에 부활한 것으로, 본래의 형태와 참된 관계가 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으며, 특히 그 종교들이 생태학이나 여성 해방, 또는 일부의 경우에 극단적인 순수 신화와 같은 현대의 이데올로기 요소들에 좌우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105)

뉴에이지 음악: 뉴에이지 음악은 급부상하고 있는 산업이다. 관련 음악은 대부분 자기 자신이나 세계와 일치를 이루는 수단으로 제시되며, 그 가운데 일부는 ‘켈트’나 드루이드교 음악이다. 일부 뉴에이지 음악 작곡가들은 자신들의 음악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아마도, 선율 외에도 기본 악절이 명상적이고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경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뉴에이지 현상의 많은 요소들처럼, 일부 음악은 사람들을 더욱더 뉴에이지 운동에 몰입하게 하는 데에 목적을 두지만, 대부분은 단순히 상업적이거나 예술적이다.

신사상(新思想): 미국에서 발견되는 19세기 종교 운동으로, 그 기원은 통속화된 형태의 이상주의였다. 신사상에서는 신을 완전한 선(善)으로, 악은 환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근본적인 실재는 마음이다. 사람의 인생에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므로, 누구나 자신이 놓인 상황의 모든 측면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오컬티즘(Occultism: 은비학, 은비론): 숨겨진 지식과 또 정신과 자연의 감추어진 힘은, 한편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주술과 연금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교의 신비주의에서 비롯된 이른바 은밀한 ‘영원한 철학’에 관한 믿음과 관습의 바탕이며, 관련 지식과 기술을 수호하는 집단과 단체에 입문한 사람들에게는 은비학의 암호로 주어진 채 감추어져 있다. 19세기에 심령술과 신지학회는 여러 가지 새로운 형태의 은비학을 도입하였는데, 이것들이 뉴에이지의 다양한 조류에 영향을 미쳤다.

범신론: (그리스어로 모든 것을 뜻하는 pan과 신을 뜻하는 theos가 합쳐진 말이다.) 모든 것이 신이라는 믿음이며, 때로는 모든 것이 신 안에 있고 신이 모든 것 안에 있다는 믿음이다(만유내재신론). 우주의 모든 요소는 신성하며, 신성은 또한 모든 것 안에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에는 신을 전통적인 일신교에서처럼 독특한 존재로 볼 여지가 없다.

초심리학: 초감각적인 인식, 정신 감응, 염동 작용, 심령 치료, 영매나 채널링을 통한 영혼들과 대화하는 현상들을 다룬다. 과학자들의 맹렬한 비판이 있지만, 초심리학은 갈수록 힘을 얻고 있으며, 뉴에이지의 일부 영역에서 인기 있는 관점과 잘 맞아떨어진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놀라운 정신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러한 능력은 흔히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세계 의식: 이 세계관은 1980년대에 발전되어 국가나 종족, 기존의 다른 사회 단체들보다는 인류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하였다. 이것은 20세기 초에 세계 정부를 추진하였던 운동들을 계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류의 일치에 대한 의식은 ‘가이아(대지의 여신)’ 가설과 조화를 이룬다.

긍정적인 사고: 사람들이 그들의 정신 자세를 바꾸어 긍정적이고 건설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육체적 실재나 외부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다. 때때로 이것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무의식적으로 지녀 온 신념을 의식적으로 깨닫게 되는 문제이다.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건강과 온전함, 나아가 성공과 영원한 생명까지도 약속 받는다.

리버싱(Rebirthing: 다시 태어나기): 1970년대 초에 레오나르도 오르는 리버싱을 자기 의식 안에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현재 문제들의 근원이 되는 영역들을 확인하고 분리시킬 수 있게 하는 과정이라고 묘사하였다.

환생: 뉴에이지 운동에서 환생은 신성을 지향하며 나아가는 진화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인도의 종교나 거기에서 파생된 종교와는 반대로, 뉴에이지는 환생을 개인의 영혼이 좀 더 완전한 상태로 진보하는 것으로 본다. 환생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비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우주의 에너지 곧 ‘그리스도의’ 에너지에 동참하는 사람의 에너지의 불꽃, 곧 의식인 것이다. 죽음은 영혼이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옮겨 가는 것일 뿐이다.

장미 십자회(Rosicrucians): 이것은 연금술, 점성술, 신지학, 성서에 대한 카발라적(kabbala: 유다교의 밀교) 해석과 관련된 서양의 은비학(오컬티즘) 단체이다. 장미 십자회는 20세기 점성술의 부활에 한몫을 하였고, 고대 신비주의 장미 십자회(AMORC)는 건강, 부, 행복과 같은 정신적 표상을 실현하는 가상의 능력에 성공을 결부시켰다.

샤머니즘: 영매의 역할을 하는 샤만의 신들림 의식(굿)을 통하여(영에 힘입어) 정령이나 죽은 사람의 혼과 통교하는 것에 관련된 행위와 믿음이다. 이것은 자연의 힘을 빌려 치유하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뉴에이지 집단에서 인기를 끌어 왔다. 땅이나 자연과 밀접한 토착 종교들에 대한 낭만적인 이미지도 있다.

심령술(Spiritualism): 19세기의 심령론은, 죽은 이들의 혼령과 계속 접촉하려 하다가 뉴에이지로 흘러 들어온 조류 가운데 하나로 생각된다. 이것은 스웨덴보그와 메스머의 사상을 배경으로 발전하였으며, 일종의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 블라바츠키 부인은 영매였으므로 심령술은 신지학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단 심령술은 최근에 죽은 사람들보다는 아주 먼 과거의 존재들과 접촉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알란 카르덱은 아프리카계 브라질 종교들에 심령술을 전파하는 데에 영향력을 미쳤다. 일본의 일부 신흥 종교 운동에도 심령술적인 요소들이 발견된다.

신지학(Theosophy): 본래 일종의 신비주의를 가리키던 고대어이다. 신지학은 그리스 영지주의자들과 신플라톤주의자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쿠사의 니콜라스, 제이콥 보엠과 관련이 있어 왔다. 1985년에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 외 몇몇이 신지학회를 창시하면서 신지학은 새로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신지학의 신비주의는 일원론적 경향이 있으며, 우주의 영적 요소들과 물질적 요소들의 본질적인 일치를 강조한다. 신지학은 또한 물질과 영이 상호 작용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의 정신과 신의 정신이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숨겨진 힘을 찾는다. 여기에 신지학이 제시하는 신비적 구원이나 가르침이 있다.

초월주의: 이것은 19세기 뉴잉글랜드의 작가들과 사상가들의 운동으로서, 그들은 피조물의 본질적인 일치와 인간의 본성적 선함, 가장 심오한 진리의 계시를 추구하는 데에서 논리와 경험보다는 통찰력의 우월성 등에 대한 이상주의적인 일단의 신앙을 공유하였다. 중심 인물은 랠프 왈도 에머슨으로서, 그는 정통 그리스도교를 떠나 유니테리언파를 거쳐, 힌두교의 개념들을 개인주의나 개인의 책임, 성공의 필요성과 같은 대중적인 미국적 개념들과 통합한 새로운 자연 신비주의로 넘어갔다.

위카(마술 숭배): 본래는 마녀를 가리키는 옛 영어 단어였는데, 마술 의식의 일부 요소들을 네오 페이건(neo-pagan)이 부활시킨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마술 숭배는 1939년 영국에서 제랄드 가드너가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일부 학술서를 바탕으로 삼았는데, 그것들에 따르면 중세 유럽의 마술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한 고대 자연 종교였다. ‘프리메이슨단’이라고도 불린 이 위카는(마술 숭배) 1960년대에 미국에서 급속하게 발전하였으며, 이 시기에 ‘여성들의 영성’과 만났다.

7.3. 뉴에이지 운동의 중요한 장소들

에살렌 공동체: 마이클 머피와 리처드 프라이스가 1962년에 캘리포니아주 빅서에 설립한 공동체이다. 나체주의, 환상, ‘부드러운 치료’(bland medicines) 등을 이용하여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에살렌 공동체는 인간 잠재력 운동의 가장 중요한 센터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교육과 정치, 경제계에 통합 의학 사상을 전파하였다. 이것은 비교 종교, 신화학, 신비주의, 명상, 심리 치료, 의식 확장 등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핀드혼 공동체와 더불어 에살렌 공동체는 물병자리 시대 의식이 성장하는 핵심 장소로 여겨진다. 에살렌 소비에트 아메리카 연구소는 건강 증진 계획에서 소련의 관리들과 협력하였다.

핀드혼 공동체: 피터와 에일린 캐디 부부가 시작한 이 생태 농장 공동체는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막대한 농작물을 키워 냈다. 1965년에 스코틀랜드에 핀드혼 공동체가 설립된 것은 ‘뉴에이지’라는 이름표를 단 운동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사실 핀드혼 공동체는 ‘변화라는 뉴에이지의 중심 이상을 구현하는 것으로 보였다.’ 보편 의식의 추구,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목적, 변화된 세계에 대한 미래상, 채널링 의식 행위 등 뉴에이지 운동의 특징이 된 이 모든 것은 핀드혼 공동체의 창립 당시부터 나타났다. 이 공동체의 성공은 런던의 대안(Alternatives) 공동체, 캘리포니아 빅서의 에살렌 공동체, 뉴욕의 오픈 센터와 오메가 연구소 등과 같은 다른 단체에 영감을 주고 동시에 표본이 되었다.106)

몬테 베리타 공동체: 스위스의 아스코나 근방에 설립되었으며 이상향을 꿈꾸는 공동체이다. 19세기 말 이래 이 공동체는 유럽과 미국의 정치학, 심리학, 예술, 생태학 분야의 대항 문화주의자들의 집회장이 되었다. 1933년부터 해마다 이 공동체에서 에라노스 회의가 열려, 뉴에이지 운동의 일부 저명한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이 공동체의 연감은 통합된 세계 종교를 만들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107) 여러 해에 걸쳐 몬테 베리타 공동체에 모였던 사람들의 명단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8. 자료들


가톨릭 교회 교도권 문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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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참고 문헌 총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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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rles Taylor, Sources of the Self. The Making of the Modern Identity, 케임브리지,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년.

─ Charles Taylor, The Ethics of Authenticity, 런던, Harvard University Press, 1991년.

─ Ed릒io Valle s.v.d., “Psicologia e energias da mente: teorias alternativas”: A Igreja Cat쉕ica diante do pluralismo religioso do Brasil (III), Estudos da CNBB 71항, 상파울루, paulus, 1994년.

─ 문화와 개발에 관한 세계 위원회(World Commission on Culture and Development), Our Creative Diversity. Report of the World Commission on Culture and Development, 파리, UNESCO, 1995년.

─ M. York, “The New Age Movement in Great Britain”: Syzygy. Journal of Alternative Religion and Culture, 1:2-3 (1992), Stanford CA.

 


<원문 Jesus Christ, The Bearer of the Water of Life: A Christian reflection on the ‘New Age’: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 33/34(1806), 영어판, 2003년 8월 13일자, 부록판>

 

1. Paul Heelas, The New Age Movement. The Celebration of the Self and the Sacralization of Modernity, 옥스퍼드, Blackwell, 1996년, 137면 참조.
2. Paul Heelas, The New Age Movement. The Celebration of the Self and the Sacralization of Modernity, 164면 이하 참조.
3. Paul Heelas, 같은 곳, 173면 이하 참조.
4.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Dominum et vivificantem), 1986.5.18., 53항 참조.
5. Gilbert Markus o.p., “Celtic Schmeltic”, (1): Spirituality, 제4권, 1998년 11-12월, 21호, 379-383면과 (2): Spirituality, 제5권, 1999년 1-2월, 22호, 57-61면 참조.
6. 요한 바오로 2세,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Crossing the Threshold of Hope), Knopf, 1994년, 90.
7. 특히 Massimo Introvigne, New Age & Next Age, Casale Monferrato, Piemme, 2000년.
8. M. Introvigne, New Age & Next Age, Casale Monferrato, Piemme, 2000년, 267면.
09. Michel Lacroix, L’Ideologia della New Age, 밀라노, Il Saggiatore, 1998년, 86면 참조. ‘종파’라는 말은 여기서 경멸의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 현상을 가리킨다.
10. Wouter J. Hanegraaff, New Age Religion and Western Culture. Esotericism in the Mirror of Secular Thought, 라이덴-뉴욕-쾰른, Brill, 1996년, 377면과 다른 곳 참조.
11. Rodney Stark and William Sims Bainbridge, The Future of Religion. Secularisation, Revival and Cult Formation, 버클리,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5년 참조.
12. M. Lacroix, L’Ideologia della New Age, 8면 참조.
13. Faszination Esoterik 이라는 제목이 붙은 스위스의 ‘Theologie fur Laien’ 과정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Kursmappe 1 - New Age und Esoterik’의 슬라이드와 함께 텍스트 9면 참조.
14. 이 용어는 1900년 초기에 미국 남부의 Ancient Accepted Scottish Masonic Rite가 펴내던 잡지 The New Age Magazine이라는 제목에서 이미 사용되었다. M. York, “The New Age Movement in Great Britain”: Syzygy. Journal of Alternative Religion and Culture, 1:2-3(1992), Stanford CA, 156면 6항 참조. 뉴에이지로 전환되는 정확한 시기와 특성은 여러 저자들이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어서, 1967년에서 2376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간들이 추정된다.
15. 1977년 후반, 마릴린 퍼거슨은 “물병자리의 음모자들”이라고 지칭한 “사회 변화에 참여하고 있는” 210명에게 설문지를 보냈다. 다음 내용이 흥미롭다. “응답자들에게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든 저술을 통해서든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의 이름을 대도록 했을 때, 가장 많은 응답이 나온 이름은 피에르 테이야르 드 샤르댕, C.G. 융, 아브라함 매슬로우, 칼 로저스, 알도스 헉슬리, 로베르토 아사지올리, J. 크리쉬나무르티 등이다. 자주 거명된 다른 이들로는 폴 틸리히, 헤르만 헤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마르틴 부버, 루스 베네딕트, 마가레트 메드, 그레고리 베이트슨, 타르탕 툴쿠, 알란 왓츠, 수리 아우로빈도, 스와미 무크타난다, D.T. 스즈키, 토마스 머튼, 윌리스 허먼, 케네스 볼딩, 엘리제 볼딩, 에리히 프롬, 마샬 맥루한, 벅민스터 풀러, 프레데릭 스피겔버그, 알프레드 코집스키, 하인츠 폰 포에르스터, 존 릴리, 베르너 에어하드, 오스카 이차조,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 조셉 칠턴 피어스, 칼 프리브램, 가드너 머피,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이 있었다.”: The Aquarian Conspiracy. Personal and Social Transformation in Our Time, 로스엔젤레스, Tarcher, 1980년, 50면과(note 1) 434면.
16. W.J. Hanegraaff, New Age Religion and Western Culture. Esotericism in the Mirror of Secular Thought, 520면 참조.
17. 아일랜드 신학 위원회, A New Age of the Spirit? A Catholic Response to the New Age Phenomenon, 더블린, 1994년, 제3장.
18.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시카고,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년, 175면 참조.
19. Alessandro Olivieri Pennesi, Il Cristo del New Age. Indagine critica, 바티칸 시,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9년, 여러 곳, 특히 11-34면 참조. 아래 4부도 참조.
20. 북미와 서유럽의 모든 세대의 마음에 빠른 속도로 각인된 이 노래의 가사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달이 일곱 번째 집에 머물고 목성과 화성이 나란히 올 때, 평화가 행성들을 이끌고 사랑이 별들을 이끌게 될 것이니, 물병자리 시대의 새벽이 밝아오네. …… 조화와 이해, 공감과 신뢰가 넘쳐 나는 시대. 더 이상 거짓도 조롱도 없어라. 행복한 삶, 환상적인 꿈, 신비롭고 투명한 계시, 마음의 참된 해방만 있을 뿐. 물병자리의 시대에는 …….”
21. P. Heelas, The New Age Movement. The Celebration of the Self and the Sacralization of Modernity, 1면 이하. 1978년 8월 버클리 그리스도인 연맹(Berkeley Christian Coalition)의 기관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십 년 전만 해도 마약에 취한 히피족들의 펑키 영성과 서구의 요가 수행자들의 신비주의가 대항 문화를 이루었다. 오늘날 이 둘은 우리 문화 정서의 주류 속으로 흡수되었다. 심리학과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과학, 의료직, 예술이 모두 그 둘의 기본 전제가 근본적으로 재구성되는 데에 관련되어 있다”(마릴린 퍼거슨, The Aquarian Conspiracy, 370면 이하에 인용).
22. Chris Griscom, Ecstasy is a New Frequency: Teachings of the Light Institute, 뉴욕, Simon & Schuster, 1987년, 82면.
23. 7.2. 뉴에이지 용어 해설 참조.
24. W.J. Hanegraaff, New Age Religion and Western Culture. Esotericism in the Mirror of Secular Thought, 15장(“The Mirror of Secular Thought”) 참조. 상응 체계는 분명히 전통적인 밀교에서 물려받은 것이지만, 스웨덴보그를 (의식적이든 아니든) 따르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전통적 밀교 교리에서는 모든 자연 요소가 그 자체의 신적 생명을 가지고 있는 반면, 스웨덴보그에게 자연은 살아 있는 영적 세계의 죽은 반영일 뿐이다. 이러한 사상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환멸적인 세계관과 그 세계를 ‘다시 매혹적이게 하려는’ 다양한 시도의 핵심에 있다. 블라바츠키는 상응을 거부하였으며, 융은 상응에 관한 밀교적인 세계관을 위하여 인과성을 지나치게 상대화하였다.
25. W.J. Hanegraaff, New Age Religion and Western Culture. Esotericism in the Mirror of Secular Thought, 54-55면.
26. Reinhard Hummel, “Reinkarnation”: Hans Gasper, Joachim Muller, Friederike Valentin (eds.), Lexikon der Sekten, Sondergruppen und Weltanschauungen. Fakten, Hintergrunde, Kl땢ungen, 프라이부르크-바젤-빈, Herder, 2000년, 886-893면.
27. Michael Fuss, “New Age and Europe - A Challenge for Theology”: Mission Studies, 제8-2권, 16, 1991년, 192면.
28. 위와 같음.
29. Michael Fuss, “New Age and Europe - A Challenge for Theology”: Mission Studies, 제8-2권, 16, 1991년, 193면.
30. 같은 곳, 199면.
31. 교황청 신앙교리성, 그리스도교 명상의 일부 측면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 「그리스도교 명상」(Orationis Formas), 1989.10.15., 14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19항;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 1998.9.14., 22항 참조.
32. W.J. Hanegraaff, New Age Religion and Western Culture. Esotericism in the Mirror of Secular Thought, 448면 이하. 목적은 최종판(1896년)에서 인용되었다. 이전 판들은 “편협한 신앙”의 불합리성과 비종파적 교육을 장려할 시급성을 강조하였다. Hanegraaff는 뉴에이지 종교가 ‘은비론적인 형이상학적’ 전통에 뿌리를 두었다는 J. Gordon Melton의 설명을 인용한다(같은 곳, 455면).
33. W.J. Hanegraaff, New Age Religion and Western Culture. Esotericism in the Mirror of Secular Thought, 513면.
34. Thomas M. King s.j., “Jung and Catholic Spirituality”: America, 1999년 4월 3일자, 14면. 저자는 뉴에이지 신봉자들은 “역경(易經)과 점성술과 선(禪)에 관한 부분을 인용하는 반면, 가톨릭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신비학, 전례, 화해의 성사의 심리적 가치를 다루는 부분을 인용한다.”(12면)고 지적한다. 그는 또한 명백히 융의 심리학의 영향을 받고 그 가르침에 따르는 가톨릭 인물들과 기관들도 열거한다.
35. W.J. Hanegraaff, New Age Religion and Western Culture. Esotericism in the Mirror of Secular Thought, 501면 이하 참조.
36. C.G.Jung, Wandlungen und Symbole der Libido: W.J. Hanegraaff, New Age Religion and Western Culture. Esotericism in the Mirror of Secular Thought, 503면에서 인용.
37. 이에 관하여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의 서문이 있는 Michel Schooyans, L’Évangile face au des ordre mondial, 파리, Fayard, 1997년 참조.
38. 마라나타 공동체의 The True and the False New Age. Introductory Ecumenical Notes, 맨체스터, Maranatha, 1993년, 8.10에 인용. 원본은 페이지 번호가 매겨져 있지 않다.
39. Michel Lacroix, L’Ideologia della New Age, 밀라노, il Saggiatore, 1998년, 84면 이하.
40. Actualite des religions에서 데이비드 슈팽글러의 사상에 관한 부분 8항, 1999년 9월, 43면 참조.
41. M.Ferguson, The Aquarian Conspiracy, 407면.
42. 같은 곳, 411면.
43. “미국인이 된다는 것은 …… 운명을 물려받는다기보다는 운명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우리는 언제나 역사보다는 신화 속에 살아 왔다”(Leslie Fiedler: M.Ferguson, The Aquarian Conspiracy, 142면 인용).
44. P. Heelas, The New Age Movement. The Celebration of the Self and the Sacralization of Modernity, 173면 이하 참조.
45. D.Spangler, The New Age, Issaquah, Mornington Press, 1988년, 14면.
46. P. Heelas, The New Age Movement. The Celebration of the Self and the Sacralization of Modernity, 168면.
47. Michel Schooyans, L’긵angile face au desordre mondial 참조. 이 인용은 이탈리아판 Il nuovo disordine mondiale, 상 파울루, Cinisello Balsamo, 2000년, 6면에서 인용되었다.
48. Our Creative Diversity. Report of the World Commission on Culture and Development, 파리, 유네스코, 1995년 참조. 다양성을 기념하고 증진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49. Christoph Bochinger, “New Age” und moderne Religion: Religionswissenschaftliche Untersuchungen, 카이저, Gutersolh, 1994년, 특히 3장 참조.
50. 기도라고는 할 수 없는 방법들의 단점들은 아래의 ‘3.4.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와 뉴에이지 신비주의’에서 다루고 있다.
51. Carlo Maccari, “La ‘mistica cosmica’del New Age”: Religioni e Sette nel Mondo, 1996/2 참조.
52. Jean Vernette, “L’avventura spirituale dei figli dell’Acquario”: Religioni e Sette nel Mondo, 1996/2, 42면 이하.
53. 위와 같음.
54. J. Gordon Melton, New Age Encyclopedia, 디트로이트, Gale Research, 1990년, 13-14면 참조.
55. D. Spangler, The Rebirth of the Sacred, 런던, Gateway Books, 1984년, 78면 이하.
56. D. Spangler, The New Age, 13면 이하.
57.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Terito Millennio Adveniente), 1994.11.10., 9항.
58. Matthew Fox, The Coming of the Cosmic Christ. The Healing of Mother Earth and the Birth of a Global Renaissance, 샌프란시스코, Harper & Row, 1988년, 135면.
59.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문서, Frente a una Era. Desafío a la pastoral en el horizonte de la Nueva Evangelización, 1993년, 참조.
60. 교황청 신앙교리성, 「그리스도교 명상」, 23항.
61. 교황청 신앙교리성, 「그리스도교 명상」, 3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묵상과 관상 기도에 관한 부분, 2705-2719항을 보라.
62. 같은 곳, 13항 참조.
63. Brendan Pelphrey, “I said, You are Gods, Orthodox Christian Theosis and Deification in the New Religious Movements”: Spirituality East and West, Easter 2000(13) 참조.
64. Adrian Smith, God and the Aquarian Age. The new era of the Kingdom, McCrimmons, Great Wakering, 1990년, 49면.
65. Benjamin Creme, The Reappearance of Christ and the Masters of Wisdom, 런던, Tara Press, 1979년., 116면 참조.
66. Jean Vernette, Le New Age, 파리, P.U.F., 1992(Collection Encyclopedique Que sais-je?), 14면 참조.
67. 「가톨릭 교회 교리서」, 52항.
68. Alessandro Olivieri Pennesi, Il Cristo del New Age. Indagine Critica, 바티칸 시티,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9, 특히 13-34면 참조. 공통점들에 관한 목록은 33면에 있다.
69. 니케아 - 콘스탄티노 폴리스 신경
70. Michel Lacroix, L’Ideologia della New Age, 밀라노 Il Saggiatore, 1988년, 74면.
71. Michel Lacroix, L’Ideologia della New Age. 68면.
72. Edwin Schur, The Awareness Trap. Self-Absorption instead of Social Change, 뉴욕, McGraw Hill, 1977년, 68면.
73. 「가톨릭 교회 교리서」, 355-387항 참조.
74. Paul Heelas, The New Age Movement. The Celebration of the Self and the Sacralization of Modernity, 옥스퍼드, Blackwell, 1996년, 161면 참조.
75. 아일랜드 신학위원회, A Catholic Response to the New Age Phenomenon, 1994년, 제3장.
76. 교황청 신앙교리성, 「그리스도교 명상」, 3항.
77. 교황청 신앙교리성, 「그리스도교 명상」, 7항.
78. Willian Bloom, The New Age. An Anthology of Essential Writings, 런던, Rider, 1991년, 16면.
79. 「가톨릭 교회 교리서」, 387항.
80. 「가톨릭 교회 교리서」, 1849항.
81. 같은 곳, 1850항.
82.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 1984.2.11., 19항.
83. David Spangler, The New Age, 28면.
84.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 1990.12.7., 6.28항과 교황청 신앙교리성,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 12항, 2000.8.6. 참조.
85. R. Rhodes, The Counterfeit Christ of the New Age Movement, 그랜드 래피즈, Baker, 1990년, 129면.
86. Helen Bergin, “Living One’s Truth”: The Furrow, 2000.1., 12면.
87. Helen Bergin, “Living One’s Truth”: The Furrow, 2000.1., 15면.
88. P. Heelas, The New Age Movement. The Celebration of the Self and the Sacralization of Modernity, 138면 참조.
89. Elliot Miller, A Crash Course in the New Age, Eastbourne, Monarch, 1989년, 12면. 맹렬한 반 그리스도교적 입장의 영성에 관한 문헌은 R. Laurence Moore, “Spiritualism”: Edwin S. Gaustad(ed.), The Rise of Adventism: Religion and Society in Mid-Nineteenth-Century America, 뉴욕, 1974년, 79-103면과 R. Laurence Moore, In Search of White Crows: Spiritualism, Parapsychology, and American Culture, 뉴욕, Oxford University Press, 1977년 참조.
90. 「신앙과 이성」, 36-48면 참조.
91. 요한 바오로 2세, 미국의 아이오와, 캔자스, 미주리, 네브라스카 주교들의 ‘사도좌 정기 방문’ 때 한 연설, 1993.5.28. 참조.
92.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아프리카 교회」(Ecclesia in Africa), 1995,9.14., 103항 참조. 교황청 문화평의회는 전 세계에 걸쳐 있는 이들 센터들의 명단을 실은 Catholic Cultural Centres(제3판, 바티칸, 2001.)라는 책자를 펴냈다. 
93. 교황청 신앙교리성, 「그리스도교 명상」과 앞의 3부 참조.
94. 이 분야는, 정보 결여로 이들 교육 책임자들이 복음 메시지에 적대적인 단체들에게 잘못 이용될 수 있는 분야이다. 특히 호기심 많은 청소년들을 주된 목표로 삼아 사상을 전파하는 학교들의 경우에 그러하다. the caveat: Massimo Introvigne, New Age & Next Age, Casale Monferrato, Peimme, 2000년, 277면 이하 참조. 
95. J. Badewien, Antroposofia: H. Waldenfels(ed.), Nuovo Dizionario delle Religioni, Cinisello Balsamo, San Paolo, 1993년, 41면 참조.
96. Raúl Berzosa Martinez, Nueva Era y Cristianismo, 마드리드, BAC, 1996년, 214면 참조.
97. Helen Palmer, The Enneagram, 뉴욕, Harper-Row, 1989년.
98.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문서, Frente a una Era. Desafío a la pastoral en el horizonte de la Nueva Evangelización, 1993년 참조.
99. J. Gernet, in J.-P. Vernant et al., Divination et Rationalite 파리, Seuil, 1974년, 55면.
100. Susan Greenwood, “Gender and Power in Magical Practices”: Steven Sutcliffe and Marion Bowman(eds.), Beyond New Age. Exploring Alternative Spirituality, 에든버러,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0년, 139면 참조.
101. M. Fuss, “New Age and Europe - A Challenge for Theology”: Mission Studies, 제8-2권, 16, 1991년, 198-199면 참조.
102. 인간 잠재력 운동의 간단하지만 분명한 방법을 알아보려면, Elizabeth Puttick, Perspnal Development: the Spiritualisation and Secularisation of the Human Potential Movement를 보라: Steven Sutcliffe와 Marion Bowman, Beyond New Age. Exploring Alterantive Spirituality, 에든버러,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0년, 201-219면.
103. C. Maccari, La ‘New Age’ di fronte alla fede cristiana, Leumann-Torino, LDC, 1994년, 168면 참조.
104. W.J. Hanegraaff, New Age Religion and Western Culture. Esotericism in the Mirror of Secular Thought, 283-290면.
105. 이 마지막의 미묘한 문제에 대해서는 Eckhard Turk의 글 Neonazismus를 보라: Hans Gasper, Joachim Muller, Friederike Valentin(편), Lexikon der Sekten, Sondergruppen und Weltanschauungen. Faketen, Hintergründe, Kärungen, 프라이부르크 - 바젤 - 빈, Herder, 2000년, 726면.
106. John Saliba, Christian Responses to the New Age Movement. A Critical Assessment, 런던, Geoffrey Chapman, 1999년, 1면 참조.
107. M. Fuss, “New Age and Europe - A Challenge for Theology”: Mission Studies, 제8-2권, 16, 1991년, 195-196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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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황청 문헌   「가톨릭 학교의 문화 간 대화 교육: 사랑의 문명을 위한 조화로운 삶」   2013-10-28  
3   교황청 문헌   2006년 정기 총회 최종 문서 「아름다움의 길, 복음화와 대화를 위한 탁월한 길」   2006-03  
2   교황청 문헌   [교황청 문화평의회와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생명수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the bearer of the water of life)   2003-08-13  
1   교황청 문헌   뉴에이지 관련 국제 자문 회의 종합_[뉴에이지에 관한 사목적 성찰]   2004-06-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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