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성지

문경 진안리 성지

문경 진안리 성지

길 위의 사제, 최양업 신부의 마지막 발자취가 서린 곳

(구전에 따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선종지) 

                   진안리 성지(*사진 출처: 문경 천주교 성지 카페) 

 

 

문경새재 길 

충북과 경계를 이루는 영남의 관문으로 일명 "새재"라고 하는 조령(鳥嶺)은 옛날 영남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이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이다.  조선시대 숙종 34년(1708년)에 영남의 현관인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하였다. 

 

제3관문 조령관(鳥嶺關)

문경새재 조령관 (*사진 출처: 문경시 홈페이지)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마지막 발자취를 따라서

문경새재 길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도 이 길을 통하여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사목 활동을 하였고, 교우들도 박해를 피하기 위한 피난길로 이용했다. 1861년 6월 최양업 신부는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마치고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활동 결과를 보고하고자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과로와 장티푸스로 쓰러져 최양업 신부의 발걸음은 문경읍에서 영원히 멈추었다(<최 바시리오 이력서>(1939년)와 <최 신부 이력서>(1945년) 등의 기록에 따르면 "문경읍내의 이씨 교우가 운영하던 약국"으로 묘사되어 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달려온 간 사람은 배론 신학교 교장이던 푸르티에 신부였다. 푸르티에 신부는 그의 편지에서 최양업 신부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은 "나의 산(배론)에서 약 17리외(170리) 떨어진 한 교우 집"이라 표현하였다. 한편, 최양업 신부가 자신과 가장 절친한 "단짝"이라 소개했던 페롱 신부는 최 신부의 선종지가 "(배론) 신학교에서 대략 12리외(120리) 떨어진 작은 교우촌"이라고 표현하였다. 최양업 신부 후손들의 구전과 여러 사료를 근거로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를 문경(당시 문경읍) 또는 진천의 교우촌으로 보고 있다.

*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링크) 

 

* 푸르티에 신부가 친구 아브리알 신부에게 보낸 1861년 11월 2일 편지:

"매우 안타깝게도 티푸스가 우리 본방인 사제 토마스를 우리에게서 앗아갔다네. 그는 매우 위중한 상태로 한 교우집에 간신히 도착했는데, 이 교우집은 내가 있는 산에서 17리외*(17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네.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갔고 그가 숨을 거두기 8-9시간 전에 도착했다네. 그는 매우 평화로이 눈을 감았지. 지금 나는 그의 장례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네. 그의 장례는 며칠 뒤 내가 있는 산의 언덕에서 치러질 것이네. 주교님이 직접 주례하는 장엄 미사로 거행될 예정이고, 동료 신부 두 사람도 올 것이다." 

* 프랑스의 옛날 거리 단위 1리외(lieue)는 약 10리(4km)이다. 17리외는 약 170리 (70km)이다.

 

* 페롱 신부가 파리 본부의 장상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61년 7월 26일 편지(8월 9일 추신 포함) :

"올해는 몹시 애통해 하며 편지를 드립니다. 우리는 우리 선교사들 중에서 제일 귀중한, 또 신부님께서도 당연하게 매우 사랑하신 착한 토마스 신부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신부는 공소 순방을 마치고 (베르뇌) 주교님한테로 가는 길이었는데, 도중에 티푸스에 걸려 며칠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매우 다행하게도 그는 신학교에서 약 12리외(120리) 떨어진 한 작은 교우촌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푸르티에 신부는 통지는 받고 그에게 마지막 사죄경을 염해 주고 종부성사를 주기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의식을 거의 완전히 잃었기 때문에 고해성사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주 성모님에 대한 깊은 신심을 드러낼 만큼 아직 의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숨을 거둘 때까지 예수 마리아를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조선 교회 전체의 초상입니다. 또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었는데 우리는 종교 자유가 선포될 때까지는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남쪽의 오지에서 방문하던 지역들은 지금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

- 추신: 8월 9일,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가 막 저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신부의 병에 관해 자세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토마스 신부가 쓰러진 것은 다름 아닌 과로 때문이랍니다. 실제로 지난 해의 소요(경신박해)는 그의 성사 집전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는 낮에는 80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하였으며, 밤에는 고해를 들어야 하고 또 날이 새기 전에 다시 떠나야 하였으므로 그가 한 달 동안에 취할 수 있었던 휴식은 나흘 밤을 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

 

 

               

진안리 성지(*사진 출처: 문경 천주교 성지 카페) 

진안리 성지

진안리 성지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선종한 곳으로 문경시 문경읍에서 문경 관문 방향으로 1㎞ 정도 가면 닿을 수 있다.
조령, 이화령, 하늘재 등은 옛날부터 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이름난 통로로서 숱한 전설과 애환이 서려 있다.
특히 일명 ‘새재’라고 하는 조령은 옛날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이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였다. 그러므로 조선 숙종 34년(1708년)에 영남의 현관인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하였다. 제1관문인 주흘관, 제2관문인 조곡관, 제3관문인 조령관이 서 있는데 각각 약 3㎞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이 지방이 충북과 경계를 이루는 영남의 관문이기에 과거는 물론, 최양업 신부와 칼레 강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을 통해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선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특히 관문과 이화령 고개 갈림길에 위치한 진안리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 보고차 서울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곳이다. 

[*진안리 성지 소개글 출처: 안동교구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