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진영과 진주 옥
복자 구한선 타대오, 정찬문 안토니오, 윤봉문 요셉의 순교지

옛 진주목 지도에서 진영과 진주목 관아 위치(* 이미지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진주목 관아와 진주 진영
조선 시대 초기 낙동강을 기준으로 경상도를 동서로 군사 구역을 나누어 경상우도의 병무를 관할을 '경상우병영'이 맡도록 했는데, 초기에 창원의 합포(지금의 마산)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진주성이 '경상우병영'의 근거지가 되었다. 경상우병영이 진주성으로 이전하자 무관인 경상우병마절도사가 진주 목사(고을 원님)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그러다 글을 숭상하는 유교와 양반의 고장을 칼을 찬 무관이 다스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1635년(인조 13년) 목사를 따로 파견하여 경상우병영과 진주목의 업무를 분리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진주 목사와 진주 진영은 진주성 밖에 자리하고 있었다. 진영장은 경상우병영에 속한 무관직으로 조선 후기에는 소속 고을의 토포 활동을 관할하였다. 이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도 체포되면 진주목 관아와 진영으로 끌려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진주 진영터(진주시 촉석로 178) (*이미지 출처: 진주문화사랑모임 홈페이지)
진주 옥의 순교 복자들
순교 복자 가운데 구한선 타대오(1844-1866)는 진주 옥에 갇혀서도 진주 관장 부인에게 주요 교리를 설명하기도 하였으며, 심한 매질을 당한 뒤 석방되어 집으로 온 지 7일만에 후유증으로 순교하였다. 정찬문 안토니오(1822-1867)는 진주 진영과 관아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고 무수히 매를 맞고 진영 안이나 옥에서 순교하였다. 윤봉문 요셉(1852-1888)은 거제에서 체포되어 통영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진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진주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진주까지 끌려오는 동안 그의 발뒤꿈치는 칡넝쿨로 꿰어져 살이 뭉개지는 고통을 겪었으나, 오히려 윤 요셉은 큰소리 십계명을 외우며 신앙을 증언하였다.

진주 옥 터임을 알 수 있는 진주 중앙 시장 안 우물 자리
진주 옥 터
진주 옥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중앙 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에도 옥은 남아 있었다고 전하는데, 우물 인근에 있었다고 한다. 이 우물 동쪽에 자리한 옥사는 현재 진주중앙시장과 옥봉동성당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66년 2월 진주공설시장이 대화재로 전소되어 새로 지으면서, 이곳을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위험하다는 이유로 우물 뚜껑을 콘크리트로 덮었다고 한다. 현재 어렴풋이 남은 콘크리트 자국으로 이곳이 진주 옥 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