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관아와 옥터
순교 복자 오반지 바오로와 김원중 스테파노, 송 베네딕토 가족의 신앙 증거지

진천 관아(특히 동헌과 형청)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진천현 옛지도(1872년) 일부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진천 관아와 진천 옥터 자리*
1872년에 제작된 '진천현' 지도를 보면 순교 복자 김원중 스테파노가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던 진천 관아 동헌과 '형청(刑廳)'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1894년 기록(동학농민군이 진천 관아터를 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했다는 기록)과 진천자치신문 기사(2020년 8월 21일자)에 따르면 진천 관아 자리는 지금의 삼수초등학교 자리(*현 진천읍사무소는 진천 관아 '객사' 자리)로 추정된다. 이 기사는 현재의 삼수초등학교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진천 관아 건물 20여 채가 자리해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1907년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10일자 기사를 언급하며 1907년 12월 진천에서 의병과 일본군의 교전으로 진천 관아가 대부분(객사 등 일부 건물 제외) 소실되었다고 전한다. 이후 진천 군청(1895년 진천현에서 진천군으로 바뀜)은 객사(현 진천읍사무소 자리)를 군청사로 사용하다가 1932년 객사를 철거하고 군청사를 신축하였다. 참고로, 진천군 읍내리(邑內里)에 위치한 '과터' 마을은 읍사무소에서 서북쪽으로 100m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관아터', '관터'('관터'에서 'ㄴ'이 탈락하여 '과터'가 됨), 곧 관아가 있던 자리에 생긴 마을로, 그 이름에서 관아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진천 관아의 형청과 형옥과 관련하여, 진천 관아의 부속 건물인 '형청'은 진천현의 형벌과 치안 업무를 맡은 형리들이 근무하던 관사로 1872년 진천현 지도를 통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형옥의 규모는 1899년 작성된『진천군읍지』의 「공서(公署)」편에 "刑獄八間" 곧 8칸으로 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개 옥이 형청 안이나 관아의 '우백호'(右白虎, 주산을 등지고 앞을 향해 바라볼 때 오른쪽 산줄기) 방향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고, 1872년 진천현 지도에서 옥이 따로 표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형청 안에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또한 현재 진천군 읍내리 3구에는 '옥당 거리'로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 자리에 형청과 형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현재 옥당 거리 바로 옆에는 진천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2006년 당시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을 위한 진천 관아와 옥터 현장조사 때 방문한 진천읍사무소는 진천 관아 동헌이 아닌 '객사' 자리였고, 2006년 당시 옥터 자리로 확인했던 진천경찰서는 2022년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

진천 관아(동헌) 자리임을 보여주는 진천 삼수초등학교 느티나무(수령 300년)

진천 관아 옥터에 자리한 옥당 거리

복자 김원중 스테파노(?-1866)
김원중 스테파노는 진천 발래기 출신이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천 관아에서 그가 천주교인임을 알고 있었기에 배교의 증거로 천주교 서적을 관아에 바치라고 했으나 김 스테파노는 이를 거부하였다. 1866년 11월 10일 그는 진천 관아로 자진하여 끌려가 신문을 받고 옥에 갇혔다. 그는 진천 관아 옥에서 신성순 회장를 비롯한 발래기교우 3명 함께 25일 동안 갇혀 있다가 12월 6일 충청 감영이 있는 공주로 이송되었다. 공주로 압송되기 전에 김 스테파노는 아우와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어 순교 원의를 밝히며 죽은 뒤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김원중 스테파노와 교우 3명은 공주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증언하고 1866년 12월 16일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복자 오반지 바오로(1813-1866)
진천의 반지에 살던 오반지 바오로는 방탕하게 살다가 마흔이 훨씬 지나서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면서 지난날의 탕자의 모습을 버리고 완전 새 사람이 되었다. 오반지 바오로는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진천 지장골로 이주하였고, 그리스도교적 가난을 몸소 실천하며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주변 사람들에게 회자될 정도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가 천주교인이라는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었기에 청주 병영에서 포졸들이 지장골로 찾아와 그를 체포하였고, 먼저 진천 옥에 투옥되었다가 1866년 3월 13일 청주로 이송되었다. 청주 병영에서 오 바오로는 모진 형벌과 문초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고, 1866년 3월 27일 군중이 보는 가운데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복자 송 베네딕토 가족
송 베네딕토(1798-1867)는 청주 서촌 양반 출신으로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자식들과 함께 신앙을 실천하였다. 송 베네딕토는 가족들과 좀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진천 배티 교우촌으로 이주하였는데,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1867년 배티 교우촌에도 서울의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송 베네딕토를 비롯하여 그의 가족들, 곧 그의 아들 송 베드로(1821-1867)와 송 베드로의 딸, 송 베드로의 며느리 이 안나(1841-1867), 그리고 이 안나의 아이 5명이 진천 관아로 끌려갔고, 이어 죽산 관아로 끌려간 다음 서울로 이송되었다. 송 베네딕토와 5명의 가족은 서울에서도 굳게 신앙을 증언하고 순교하였다. 순교 당시 송 베네딕토의 나이는 69세, 송 베드로는 46세, 이 안나는 26세였다.

진천 성당(*사진 출처: 청주교구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