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경상 감영과 옥터
이윤일 요한 성인과 순교 복자 19위, 하느님의 종 3위 등
경상 지역 순교자들의 신앙 증거지와 순교지
- 대구 경상 감영 선화당 -
경상 감영
경상도 지역 천주교 신자들은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병인박해(1866-1868년) 기간 '사학 죄인'으로 몰려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옥사하거나 형장에서 목숨을 바쳤다. 당시 각 고을에서 체포된 이들은 관할 지방 관아에서 심문과 처분을 받았는데, 이 때 끝까지 배교를 거부한 신자들은 중죄인으로 분류되어 경상 감영이 있는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최종 판결을 받고 형 집행이 내려질 때까지 경상 감영 옥에서 혹독한 옥고를 치러야 했다. 순교자들은 옥 안에서도 변함없이 신앙을 실천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하게 담대하게 신앙을 증언하며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
경상 감영 옥 터 (대구시 중구 서성로 16길 77 서문로 교회와 대안성당 일대)

대안 성당에 있는 경상 감영 감옥과 순교자 안내문
“이 옥을 복락소(福樂所)로 생각하시오. 밖에 있는 가족들 때문에 분심을 갖지 말고 내 뒤를 따르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오.” - 복자 박경화 바오로 -
1815년 을해박해와 경상 지역 순교자들
1815년(순조 15)에 일어난 을해박해는 경상도 북부(청송, 진보, 영양 등)와 강원도 남부(원주, 울진 등) 산골에 교우촌을 이루고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던 천주교인들을 대상으로 지방 관리 등이 주도한 박해다. 특히 1814년 대기근이 들면서 일부 포졸들과 외교인들은 교우촌 신자들의 재산과 곡식을 빼앗으려는 사욕과 배교자의 밀고가 을해박해를 촉발시켰다. 또한 체포와 박해는 수개월의 비교적 단기간에 끝이 났으나, 경상 감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처형 결정을 받기까지 1년 6개월여의 긴 시간이 걸리면서 옥사한 교우들이 많았다. 경상 감영으로 이송된 33명의 교우 가운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교우들은 20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7명은 옥사하고 7명은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았다(*관련 기사 링크).
복자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왼쪽), 서석봉 안드레아, 구성열 바르바라, 최봉한 프란치스코(오른쪽)
청송 노래산 교우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교우들로, 복자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1765-1815), 서석봉 안드레아(?-1816)와 구성열 바르바라(1776?-1816) 부부, 이들의 사위 최봉한 프란치스코(1785-1815), 고성대 베드로(?-1816)와 고성운 요셉(?-1816) 형제, 그리고 하느님의 종 안치룡(1766?-1816?)은 1815년 2월 22일 경(주님부활대축일)에 체포되어 경주 관아에서 먼저 문초와 형벌을 받고,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같은 청송 지역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김화춘 야고보(?-1816)도 1815년 을해박해 당시 청송 일대를 수색하던 경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고, 고성대와 고성운 형제, 서석봉과 구성열 부부 등과 함께 경주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경상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고성대 베드로(왼쪽), 고성운 요셉(가운데), 김화춘 야고보(오른쪽)

복자 김시우 알렉시오(왼쪽) 이시임 안나와 아기(오른쪽)
진보 머루산 교우촌(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에서 함께 신앙 생활을 했던 교우들로, 복자 김시우 알렉시오(1783-1816), 이시임 안나(1782-1816), 하느님의 종 김흥금과 김장복 부자는 1815년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안동 관아로 압송되어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고, 다시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경상 감영에서도 또다시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 했다.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혹독한 형벌을 받던 중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감영의 문을 막 나서다가 안동에서 이송되어 온 김종한 안드레아을 만났고 그의 권면에 힘입어 다시 감영 안으로 들어가 배교를 철회하였다. 그녀는 혹독한 매질을 당하고 옥으로 끌려가 들어가자마자 숨을 거두었으니, 이때가 1815년 음력 4월 또는 5월로, 그녀의 나이 50세 가량이었다.
경상 감영에서 계속된 형벌과 굶주림 속에서 최봉한 프란치스코는 1815년 음력 5월경에, 서석봉 안드레아와 김시우 알렉시오, 김흥금 김장복 부자는 1816년 12월 9일 이전에, 그리고 안치룡은 1815년 12월 26일 이후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고성대 베드로와 고성운 요셉 형제, 구성열 바르바라, 김화춘 야고보(이상 청송 지역), 이시임 안나(진보 머루산), 그리고 경상도 영양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붙잡힌 김희성 프란치스코(1765-1816)와 김종한 안드레아(?-1816) 등 7명 교우 모두 옥 안에서 참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한 마음으로 낮에는 짚신을 삼아 일용할 양식을 구했고, 밤이면 불 하나를 밝혀 소리 높여 함께 기도문을 암송하여 옥졸들과 비신자 수인들도 깊은 감화를 받았다. 7명 모두 1816년 12월 19일 경상 감영의 사형장(아미산 관덕당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김광옥 안드레아의 아들로, 부친이 순교한 뒤 경상도 영양 곧은장에서 들어가 가족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 1815년 3월 붙잡혔다. 김종한 안드레아는 순교 복자 김진후 비오의 아들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이다. 이 두 분 모두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 관아로 끌려가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고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어 같은날 순교한 것이다. (* 관덕정순교기념관 자료실 '박해' 설명글 링크 )
복자 김종한 안드레아(왼쪽)와 김희성 프란치스코(오른쪽)
1827년 정해박해 순교 복자들
1827년 정해박해 때에도 경상도 상주, 안동, 봉화 등지에서 교우 31명이 체포되었고, 혹독한 형벌의 고통 속에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6명의 교우는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 가운데 박경화 바오로, 김세박 암브로시오, 안군심 리카르도는 옥중에서 순교하였고, 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이재형 안드레아는 기해박해 때인 1839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복자 박경화 바오로(왼쪽), 김세박 암브로시오(가운데), 안군심 리카르도(오른쪽)
박경화 바오로(1757-1827)는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1839년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는 그의 아들이다. 그해 4월 그믐 그는 주님승천대축일을 교우들과 함께 지내다 체포되어 상주 관아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70세의 고령임에도 여러 차례의 혹독한 형벌을 받고 1827년 11월 15일(음력 9월 27일) 옥중에서 순교하다.
김세박 암브로시오(1761-1828)의 관명은 '언우'로, 하느님의 종 김범우 토마스와 한 집안 출신이다.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김세박 암브로시오는 포졸들의 수색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직접 안동 관아를 찾아가 자신이 천주교인임을 밝혔고, 한달 뒤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경상 감영 옥에서 그는 이재행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등을 만나 서로 권면하며 순교의 원의를 함께 다졌다. 오랜 옥살이와 모진 형별, 스스로 지킨 철저한 단식재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그는 1828년 12월 3일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67세였다.
안군심 리카르도(1774-1835)는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언젠가는 자신도 체포되리라 생각하고 얼마간 은신해 지내며 순교할 준비를 하였다.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상주 관장 앞에서 신앙을 증거했고, 다시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혹독한 형벌의 고문 속에서 의연하게 신앙을 지켰고, 사형 선고를 받고 8년의 옥고를 치른 뒤 결국 1835년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61세였다.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세 분의 안드레아 복자
복자 이재행 안드레아(왼쪽), 박사의 안드레아(가운데), 김사건 안드레아(오른쪽)
이재행 안드레아(1776-1839)는 정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경상도 순흥 곰직이(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 살고 있었다. 그의 집에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안동 관아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동료들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조정의 판결(윤허)이 내려오지 않아 무려 12년 동안 옥살이의 고통을 겪었다. 그러다 1839년 기해박해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비로소 사형 집행이 결정되자 매우 기뻐하였다고 한다. 1839년 5월 26일 동료들과 함께 관덕당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63세였다. 그와 동료들이 순교하자 포졸들이 나서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 주었다.
박사의 안드레아(1792-1839)는 1827년 정해박해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가 그의 부친이다. 정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부친과 함께 상주 멍에목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해 주님승천대축일에 부친과 멍에목 교우들과 함께 축일을 기념하던 중 상주 포졸들에게 붙잡혀 먼저 상주 관아로 끌려갔다. 부친과 마찬가지로 용감하고 인내로이 신앙을 증건하고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노령의 부친과 함께 모진 형벌과 옥고를 치르면서 극진히 부친을 보살폈고, 형벌의 상처와 노령으로 인해 부친 박경화 바오로는 1827년 11월(음력 9월) 먼저 순교하였다. 박사의 안드레아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조정의 판결이 내려오지 않아 무려 13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 1839년 기해박해의 여파로 다시 신문을 받고 마침내 사형 집행을 받았다. 이재행 안드레아를 비롯한 동료들과 함께 1839년 5월 26일 관덕당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김사건 안드레아(1794-1839)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 1815년 을해박해 때 21세였던 그는 부친과 함께 붙잡혔으나 마음이 악해져 풀려나온 뒤, 줄곧 순교의 기회를 놓친 당시의 일을 두고 후회하였고, 부친이 유배를 떠나고 큰아버지 김강이 시몬이 순교한 뒤 경상도로 이주하여 순교의 때를 기다리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상주 관아에서 혹독한 형벌 속에서 굳건히 신앙을 증거하고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대구 옥에서 무려 13년의 옥고를 치르 뒤 1839년 기해박해의 여파로 다시 신문을 받고 마침내 사형 집행을 받았다. 위의 두 안드레아를 비롯한 동료들과 함께 1839년 5월 26일 관덕당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병인박해 순교 성인과 복자

성 이윤일 요한(1815-1867)은 경상도 문경 여우목(호황리) 교우촌 회장으로 신자들을 보살피고 이웃에게 신앙을 전하며 여우목을 큰 교우촌으로 성장시켰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로 그해 11월 18일 문경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문경 관아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고 상주로 이송되었고, 상주에서 석달 동안 매달 한 차례 마찬가지로 형벌을 받은 뒤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경상 감영에 온지 사흘째 되는 날인 1867년 1월 21일 관덕당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52세였다.

신석복 마르코(1828-1866)는 경상도 밀양 명례 출신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창원 마포로 장사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고 밀양 관아로 끌려가 무수한 형벌을 받았다. 이어 다시 경상 감영이 있는 대구로 이송되던 길에 신석복 마르코의 형제들이 포졸들에게 돈을 주어 풀려나려고 하였으나, 신 마르코는 그렇지 못하도록 당부했고, 이 때문에 대구로 끌려가는 동안 포졸들로부터 갖은 능욕을 겪어야 했다. 대구에 도착한 뒤 여려 차례 극심한 형벌의 고통을 받고 1866년 3월 31일(또는 3월 18일) 관덕당 형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박대식 빅토리노(1812-1868)는 경상도 김해 사람으로, 1868년 박해 때 대구와 김해 포졸들이 함께 그의 집에 들이닥쳐 그의 조카로 예비신자였던 박수연와 함께 박 빅토리노를 김해 관아로 끌고갔다. 김해 관아에서 의연하게 신앙을 증거했고 사흘 뒤 경상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모진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조카와 동료 2명과 함께 1868년 10월 12일 관덕당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참수형을 받은 뒤 순교자들의 머리는 지역 주민들에게 경각심을 준다는 명목으로 높이 매달도록 했다(군문효수). 이후 그의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안장하였다.
* 관련 성지: 관덕정순교기념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