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일만 명으로 상징되는 이 땅의 순교자들, 특히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는 순례지

- 무명 순교자 현양탑 -
인천교구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에 위치한 '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 위쪽 동산에는 한국 천주교회 박해의 역사에서 하느님 신앙을 증언하며 숨져간 이 땅의 수많은 순교 선조들, 특히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신앙 선조들을 현양하기 위해 조성된 '일만위 순교자 현양 동산'이 있다.
또한 이곳에는 103위 성인 가운데 한 분이신 남종삼 요한 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기념관을 비롯하여, 전국의 유명 성지의 상징물들이 있는 '순교자의 길', '순교자 현양당', '무명 순교자상', '십자가의 길', '일만위 순교자 현양탑' '묵주 연못' 등이 조성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마련된 순교자 현양 동산은, 순교 선조들의 삶을 묵상하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신앙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이끌어 주는 순례길이 될 것이다.
일만위 순교자 현양 동산 순례길


- 주님 위로의 동산 -

- 한국의 성지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순교자의 길 -

- 남종삼 요한 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기념관 -
성 남종삼 요한(1817-1866)
충청도 충주(忠州)에서 태어나 남상교(南尙敎)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남종삼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淸白吏)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3품 승지(承旨)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은 홍봉주 토마스, 김면호 토마스, 이유일 안토니오 등과 논의하여 영불(英佛)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베르뇌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베르뇌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그사이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대박해가 일어나고 말았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남종삼은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李先伊)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청에서 6차의 국문(鞠問)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 토마스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 무명 순교자상 -

- 일만위 성모당 -

- 무명 순교자 현양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