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성지

전주옥 순교지

 

 

전주옥 순교지

 

 

복자 유중철 요한, 유문석 요한, 이경언 바오로,

이봉금 아타스타시아와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심조이 바르바라 순교지

 

 

전주 옥

전주 옥은 한국 천주교회 박해 기간 동안 전라도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신앙을 고백하였고, 굶주림과 형벌로 인한 고통으로 옥에서 숨져갔으며, 이곳에서 끌어내어져 처형장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 신앙의 증거지이다.

 

전주부 1872년 지도에서 향옥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자료 출처: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전주 옥에서 순교한 순교 복자들 

124위 순교 복자 가운데 이곳에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아들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이 교수형으로 순교하였고,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로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한밤중에 옥졸들에 의해 교수형을 당한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순교자가 있다.  또한 이순이 루갈다의 동생인 이경언 바오로와 이봉금의 어머니인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홍낙민 루카의 손자 며느리인 심조이 바르바라는 굶주림과 모진 형벌로 인한 고통으로 병들어 옥사하였다.

 

 

유중철 요한복자 유중철 요한

유중철 요한(1779-1801)

일찍 천주교 신앙을 받아 들여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이 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집안에서 맏아들 유중철 요한은 자연스럽게 깊은 신앙심을 쌓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6세가 되던 1795년에 주문모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첫영성체를 하면서 동정생활에 대한 결심을 신부님과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두 해가 지나 한양에 살던 이순이 루갈다 또한 같은 갈망을 지니고 있던 터라 둘은 부모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렇게 동정 부부가 탄생하였다. 유중철은 1801년 신유박해로 전주 옥에 갇혀 있던 8개월 동안  한여음 더위 때조차 단 한 차례도 의복을 갈아입을 수 없었고, 이 기간 내내 목에 칼이 체워져 있었으며, 그 목의 칼은 죽을 때에 비로소 그에게서 제거되었다. 그의 시신을 거두었을 때, 사람들는 그의 의복 안에서 이순이 루갈다에게 보내는 짧은 서신을 발견하였다.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우리 다시 만납시다."

 

 

유문석 요한

복자 유문석 요한

 유문석 요한(1784-1801)

1801년 초남이에서 부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고, 이어 형 유중철 요한과 친척들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을 때, 17세의 어린 유문석 요한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다. 그는 여름 내내 전주 옥을 오가며 형 유중철 요한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9월 중순 무렵 모친 신희를 비롯한 남은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가  그해 11월 14일 형과 함께 옥에서 끌려나와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경언 바오로

복자 이경언 바오로

이경언 바오로(1792-1827)

이경언 바오로는 1792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로 외조부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교회 설립에 기여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누이였다. 1802년 한양에서 순교한 이경도 가롤로는 그의 형이고,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는 그의 누나이다. 이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비록 몸은 허약하였지만 성격은 유순하면서도 강인하였고, 정신적으로도 훌륭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난 뒤, 이 바오로는 자신이 나누어준 서적과 상본 때문에 전주 관아에 고발되었다. 이내 전주에서는 그를 체포하려고 한양으로 포졸들을 파견하였다. 얼마 안 되어 체포된 그는 우선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신앙을 고백한 다음, 조정의 명령에 따라 전주로 이송되었고,  여러 차례의 혹독한 형벌 때문에 약해지려는 마음을 끊임없이 채찍질해 가면서 순교를 위해 노력하였다.  모진 형벌 속에서 고문의 상처가 깊어지면서 그는 1827년 6월 27일 전주 옥에서 옥사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복자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김조이 아나스타시아(1789-1839)

김조이 아나스타시아는 충청도 덕산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 이성삼 바오로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본디 김 아나스타시아는  원만한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는 이러한 성격으로 더욱더 모든 이에게 사랑받았다. 또 그녀의 가정은 모두가 열심한 신자로 성가정의 본보기가 되었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에, 김 아나스타시아 부부는 다행히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딸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를 낳았다. 그녀의 가정에 다시 박해의 위협이 닥쳐온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였다.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김 아나스타시아의 남편은 집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밀고된 상황이었으므로 피신을 하기는 해야만 하였다. 이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딸을 데리고 전라도 광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같이 있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김 아나스타시아는 곤장을 맞고 판결이 내려올 때까지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의 상처로 옥사하였다. 이때가 1839년 10월경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였다.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복자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이봉금 아나스타시아(1827?-1839)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어머니 김조이 아나스타시아와 함께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으로 피신해 갔다가 그곳에서 포졸들에게 압송되었다. 옥중에서 어머니가 형벌로 인하여 순교하는 장면을 목격하였고, 포졸과 옥리들의 회유 속에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다졌다. 관장은 형리들을 시켜 한밤중에 옥에서 교수하라고 명하였다. 아직 그녀의 나이는 12세를 넘지 못하였다.

 

 

심조이 바르바라

복자 심조이 바르바라

심조이 바르바라(1813-1839)

심조이 바르바라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20세 무렵에 홍봉주 토마스와 혼인하였다. 1801년의 순교자 홍낙민 루카는 그녀의 시조부였으며, 그녀와 같이 체포되어 순교한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그의 시아버지였다. 남편 홍 토마스도 1866년에 순교하였다. 심조이 아나스타시아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중요한 교리 외에는 배울 수가 없었지만 신앙심은 매우 깊었고, 열심히 애덕을 실천하였다.

19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시아버지 홍재영 프로타시오가  유배생활을 하던 광주에서 시아버지와 그곳으로 피신해온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로 끌려갔다. 전주 영장 앞에 끌려간 그녀는 80명의 포졸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위협적인 고함소리, 거친 명령 등을 함에도 평온함을 잃지 않았다. 쇠사슬을 채우고 큰칼을 씌워졌다. 연일 몽둥이질 등 형벌로 살점이 찢어져 있었고 모욕과 빈정거림의 대상이 되었지만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했다. 그녀는 감옥에서 형벌로 인한 고통에 이질까지 걸려 1839년 11월 11일 옥사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 26세였다. 그녀의 어린 아들 홍 베드로는 감옥 안에서 병들어 있었는데 심 바르바라가 숨을 거둔 지 몇 시간 뒤 숨을 거두었다.